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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8년 10월 6일 | ||
덴마크 코펜하겐 | |||
사망 | 1863년 11월 15일 (향년 55세) | ||
독일 연방 홀슈타인 공국 글뤽스부르크 | |||
재위기간 | 덴마크 국왕[1] | ||
1848년 1월 20일 ~ 1863년 11월 15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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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0013><colcolor=#fff> 가문 | 올덴부르크 가문 | |
이름 |
프레데리크 칼 크리스티안 (Frederik Carl Christ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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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크리스티안 8세 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샤를로테 프레데리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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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덴마크의 빌헬미네 마리 공주 (1828년 결혼 / 1837년 이혼)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롤리네 마리 공녀 (1841년 결혼 / 1846년 이혼) | |||
루이제 라스무센 (1850년 결혼) | |||
종교 | 루터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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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olkets kærlighed, min styrke
국민의 사랑은 나의 힘
즉위 당시 모토
국민의 사랑은 나의 힘
즉위 당시 모토
올덴부르크 왕조 본가의 마지막 수장이자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국왕. 크리스티안 8세의 외아들이다.
2. 생애
부왕 크리스티안 8세에 의해 즉위 이전 2번 결혼했는데, 자식 없이 모두 이혼했다.[2] 거기다가 유약했기 때문에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프레데리크 7세의 후계자로 육촌 동생인 크리스티안 9세를 들이기로 했다. 3번째로 평민 여성과 결혼하긴 했으나 역시 자식이 없었다.그의 사망으로 올덴부르크 왕조 본가는 완전히 단절된다.
3. 재위기간 행적
프레데릭은 즉위 이후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고, 이는 크리스티안 9세에 의해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그의 사망 이후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들의 상속에 관한 문제로 외교적 위기와 전쟁이 발발한다. 자세한 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문서 참고.
4. 여담
- 술을 즐기는 괴팍한 성격이었고 덴마크 이곳저곳을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 세계적인 동화 작가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그의 치세 때의 사람인데, 당시 유력 정치인이었던 요나스 콜린을 통해 어린 나이에 생활고로 인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안데르센에게 학비를 지원해주기도 하고[3], 나중에는 노년의 그에게 명예 군사 고문관 직위를 하사하고 어전에서 그의 작품을 낭독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왕으로서의 프레데리크 7세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안데르센 개인에게는 그야말로 인생을 바꿔준 사람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