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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아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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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344><colcolor=#fff> 사보이아 가문
Casa Savoia
파일:사보이아 왕조 문장.svg
건립일 1003년
모토 F.E.R.T.[1]
창립자 움베르토 1세
現 수장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나라 사보이아 백국
사보이아 공국
사르데냐 왕국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어 Casa Savoia
피에몬테어 Ca ëd Savòja
프랑코프로방스어 Mêson de Savouè
프랑스어 Maison de Savoie

1. 개요2. 역사
2.1. 가문의 탄생과 초창기2.2. 수난사(16~17세기)2.3. 사르데냐 왕국의 수립(1720)과 안정화(18~19세기 중반)2.4. 이탈리아 통일(1861~1871)과 불안정한 치세(1878 ~ 1922)2.5. 무솔리니 집권기(1922 ~ 1943)2.6. 왕정 폐지(1946)와 추방(1946~2002)2.7. 귀국 이후 현황(2002~현재)
3. 역대 군주 및 가문 수장4. 분가
4.1. 사보이아-제노바 공작가4.2. 빌라프란카-수이손스 백작가 #4.3. 사보이아-아오스타 공작가
5. 기타
5.1. 수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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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사보이아 가문 문장.svg 파일:사보이아 왕조 문장.svg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장.svg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장(1929-1944).svg
사보이아 가문 소형 문장 사보이아 가문 대형 문장 이탈리아 왕국 대형 문장 무솔리니의 파시즘 집권기 문장
Casa Savoia

중세 프랑스 이탈리아의 유력 가문으로, 사보이아 백국/ 사보이아 공국/ 사르데냐 왕국의 통치 가문이자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창립한 왕조로 유명하다. 가문의 이름은 프랑스 사부아에서 유래하였다. 이웃나라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처럼 혈통이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행운이 있었으며, 그 덕에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하였다.

3년 동안 스페인 왕국의 왕가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데오 1세 항목 참조. 가문의 발상지를 결국 이웃나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스위스에게 가문의 첫 근거지를 빼앗긴 합스부르크 가문과 비슷한 점이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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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2.1. 가문의 탄생과 초창기

독일 마그데부르크 출신[3]이라는 것 외에는 초창기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사보이아 가문은 오늘날 프랑스의 사부아와 이탈리아의 발레다오스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으며, 1032년 움베르토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로부터 사보이아 백작으로 서임되면서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움베르토 1세의 막내 아들 오도네 토리노(Torino)의 상속녀 수사의 아델라이데(Adelaide di Susa)와 결혼하여 토리노와 수사 계곡 일대를 상속받았고 사보이아 백국은 프랑스 남동부와 이탈리아 반도 북서부 일대에 걸친 독립 군주국이 되었다.

아메데오 2세는 여동생 베르타와 결혼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도운 대가로 뷔제(Bugey)를 얻었고, 결혼을 통해 제네바를 얻어 스위스 서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후대에 대 백작(il Conte Grande)으로 알려진 아메데오 5세는 1295년 샹베리(Chambéry)를 사보이아 백국의 수도로 삼고 살리카법을 도입하였으며, 숙부 필리포 1세가 후견을 맡았던 바제(Bâgé)의 상속녀 시빌(Sibylle de Baugé)과의 결혼을 통해 바제와 브레스(Bress) 지역을 획득하였다. 1388년 아메데오 7세 니차(Nizza)를 획득하여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출구를 확보하였고, 1416년에는 아메데오 8세 독일왕 지기스문트로부터 공작으로 서임되면서 사보이아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이 시기에는 민족주의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보이아 가문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서 애매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2.2. 수난사(16~17세기)

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스위스의 경계에 위치한 입지를 살려 사보이아 공국은 여러 세력들을 중재하며 실리를 추구하려 했지만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 최단 경로에 위치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더군다나 아메데오 8세의 아들 루도비코 사후 즉위한 맏아들 아메데오 9세는 종교에 헌신한 나머지 정치적으로는 무능하여 부인 프랑스의 욜랑드(Yolande de France)로 인해 프랑스의 간섭을 불러일으켰고, 아메데오 9세의 뒤를 이은 필리베르토 1세, 카를로 1세,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가 모두 어린 나이에 죽으면서 정치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결국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의 종조부이자 아메데오 9세의 동생 필리포 2세가 사보이아 공작으로 즉위하였으나 그는 전임자의 가장 가까운 혈연이었을 뿐, 법적 계승자는 아니어서 사보이아 공국의 통치권을 두고 여러 세력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16세기에도 계승 정통성 문제로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1536년, 밀라노 공국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하여 사보이아 공국을 밀라노 침공의 교두보로 삼으려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4]의 침략을 받았다. 당시 공작이었던 카를로 2세는 영토 대부분을 잃은채 베르첼리(Vercelli)에서 사망하였고,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에서 파견된 행정관들의 간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카를로 2세의 유일한 자식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프랑스에게 점령당한 사보이아 공국을 되찾기 위해 이모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5]와 사촌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 휘하에서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복무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직접 스페인군을 이끌고 승리하였고 1559년 체결된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사보이아 공국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공국을 되찾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공국의 언어를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대체하였고[6],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노출된 샹베리에서 알프스산맥 뒤편에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한 토리노 천도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애매한 정체성을 가졌던 사보이아 공국을 확실한 이탈리아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발돋움시켰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후계자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살루초(Saluzzo)를 병합하여 피에몬테 지역 대부분을 사보이아 공국의 영토로 편입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프랑스의 동의를 얻기 위해 1601년 리옹 조약으로 브레스, 뷔제, 젝스 지역[7]을 양도하였다. 이후 프랑스 부르봉 왕조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살아남았지만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와 결혼한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딸 크리스틴 마리가 남편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와 맏아들 프란체스코 자친토가 연달아 사망하면서 어린 둘째 아들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의 섭정을 맡게 되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의 동생이었던 마우리치오와 톰마소 프란체스코[8]가 크리스틴 마리 공비 때문에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하여 1638년 피에몬테 내전을 일으키며 내부적으로 분란에 휩싸였다.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까지 개입한 이 내전은 1642년에야 종결되었다.

2.3. 사르데냐 왕국의 수립(1720)과 안정화(18~19세기 중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창기에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부인인 오를레앙의 안 마리(Anne-Marie d'Orléans)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조카였던지라 프랑스 편을 들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의 명장이자 같은 가문 출신의 사부아 공자 외젠[9]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참전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편을 들었다. 토리노 공방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북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일소시키는데 성공했고 전쟁을 끝낸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시칠리아 왕국을 양도받아 시칠리아 국왕을 칭하였다. 하지만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가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상실한 이탈리아 반도의 스페인 영토 탈환과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외치며 시칠리아를 침공해 점령하자 사국 동맹 전쟁이 일어났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시칠리아를 탈환했는데 이 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사르데냐의 국왕이었던 카를 6세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바꾸자고 제안하였고[10], 그 제안을 받아들여 사르데냐를 얻어 1720년 국호를 사르데냐 왕국(Regno di Sardegna)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사보이아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라인강 상류 관구(Oberrheinischer Reichskreis)와 명목상의 부르군트 왕국의 일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밖에 위치한 프로이센 공국을 획득해 프로이센 왕국으로 개칭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비슷하게 사르데냐 왕국을 칭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는 사보이아 공국 시절부터 내려온 생존 전략을 활용하여 프랑스-스페인의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야금야금 영토를 확장해나갔고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사르데냐 왕국을 스페인 부르봉 왕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를 3등분하는 주요 세력으로까지 성장시켰다.[11] 하지만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프랑스 혁명 정신으로 뭉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를 막아내지 못해 니차와 사보이아를 빼앗겼고,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가 1798년 피에몬테까지 상실하면서 사르데냐의 칼리아리 몽진하여 피난생활을 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의 양위로 즉위한 동생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1814년 제1차 파리 조약으로 니차, 사보이아, 피에몬테를 모두 되찾으면서 토리노로 돌아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Regno di Sardegna-Piemonte)으로 국호를 개칭하였고 이듬해 빈 회의에서 옛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인 리구리아 지역까지 획득하였다. 1831년에 카를로 펠리체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12] 사보이아 본가의 대가 끊기고, 카를로 펠리체와 13촌 관계였던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의 카를로 알베르토가 새 국왕이 되었다.

2.4. 이탈리아 통일(1861~1871)과 불안정한 치세(1878 ~ 1922)

19세기 유럽을 휩쓸은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빈 체제가 붕괴되고 이탈리아도 민족주의의 물결에 휩쓸리자 사보이아 왕가는 이탈리아 북부 대부분을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섰다. 그러나 국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채 패배하여 카를로 알베르토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퇴위하여 망명하였고 후계자였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즉위하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민족주의를 무기로 삼았던 자유주의 세력을 억누르고 친정 체제를 공고히 하는 한편 카보우르를 중용하여 리소르지멘토를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도움을 받았고 1860년 토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토스카나 대공국,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교황령 움브리아 마르케가 속한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Province Unite del Centro Italia)를 병합하는 대신 대대로 세습해온 가문의 고향 사보이아와 프랑스에 인접한 항구도시 니차를 프랑스 제2제국에 넘겨주었다. 1861년 3월 17일에 토리노에서 소집된 이탈리아 왕국의 첫 의회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이탈리아 국왕'(Re d'Italia)의 칭호를 수여하였고 정식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출범을 선언하였으나, 교황령이 잔존한 로마와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는 베네치아가 남아있어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베네치아는 1866년 발발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 편에 합세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매입 후 주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합병하였고, 로마와 라치오 지방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프랑스군이 로마를 빠져나간 틈을 타 1870년 9월 20일 로마에 입성하여 교황령을 폐지하고 로마를 수도로 선포하면서 최종적으로 병합시켰다.

사보이아 백작가에서 시작한 사보이아 가문은 시대가 흐르면서 사보이아 공가·시칠리아 왕가·사르데냐 왕가·이탈리아 왕가가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통일 후유증으로 인한 이탈리아 내부의 불안한 정국을 해소하고 다른 서구 열강처럼 식민지 확장을 위하여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아도와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 메넬리크 2세에게 대패하면서 좌절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서의 패전으로 오히려 사회불안이 가속화되었고 심지어 움베르토 1세 몬차에서 암살당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독일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양 진영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연합국 측에 힘을 실어주는 태도를 취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면서 이탈리아인이 다수 거주하던 트렌티노알토아디제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이스트라 반도, 차라를 획득하였으나 얻은 영토와 배상금은 그리 크지 않았다.

2.5. 무솔리니 집권기(1922 ~ 194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시즘을 등에 업고 집권한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의 우군이 되어주었다.

1935년에 일어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에티오피아를 강점하면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 황제를 겸임했다. 그러나 국제연맹을 포함하여 미국· 멕시코· 소련· 일본 등 국제사회 다수가 승인하지 않아 널리 인정받지는 못했고, 영국· 프랑스가 1938년에 에티오피아 강점을 승인[13]하면서 열강으로부터 널리 인정받는 기미가 보이는 듯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940년 6월 두 나라는 에티오피아 강점 승인을 취소했다. 1941년 1월부터 영국군 주도 연합군의 동아프리카 작전이 진행되어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상실[14]하면서 제위는 속 빈 강정이 되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계속 황제를 자칭했고 이는 이탈리아가 무조건 항복한 2달 뒤인 1943년 11월까지 계속됐다. 종전 후 1947년 평화협정에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과 황제 겸임은 그 합법성이 부정됐으며, 이탈리아 신정부는 에티오피아 강점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추가로 에티오피아 정부에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무솔리니보다는 더 관망하는 입장이었지만, 1940년 6월에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급속도로 밀어붙이자 이탈리아의 대(對) 프랑스 선전포고를 승인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의 프랑스 침공에는 이견을 보였지만,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은 물론이고 제2차 세계 대전 직전(1939년) 알바니아 병합과 전쟁 초반에 일어난 그리스 침공에는 이견 없이 동조·승인했다.

전황이 악화되어 연합군이 본토를 위협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버리고 항복했지만 이탈리아 항복 협상 중에도 연합국 측에 왕실의 유지, 리비아 등 아프리카 식민지 유지, 유고슬라비아에서 병합한 영토 유지, 이탈리아가 아닌 발칸반도를 통한 연합군의 진격을 항복 조건으로 요구했다. 이미 때늦은 요구였고 왕실의 유지 이외의 요구조건은 연합국 측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항복 협상이 한 달이 넘게 지속되면서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체하고 북부를 점령할 독일군 병력이 이탈리아로 진입할 수 있었다.[15] 그는 이탈리아 정부의 무조건 항복 뒤에도 얼마 동안 의회가 합법적으로 내게 부여한 칭호라는 이유로 에티오피아 황제위와 알바니아 왕위 포기를 거부하는 등 무가치한 고집을 부렸다.[16]

2.6. 왕정 폐지(1946)와 추방(1946~2002)

무솔리니 정권 대부분의 기간 동안 파시즘에 협조했으며 물질적 안락을 누리며 생활한 사보이아 왕가 전체에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공화정 전환 여론이 크게 대두되었다. 이탈리아 사회당, 이탈리아 공산당 좌익 공화파 세력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통일 당시부터 존재했던 공화정 수립 여론이 다시 크게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움베르토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하여 이집트로 망명[17]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왕정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1946년 치러진 왕정과 공화정 중 선택 여부를 묻는 개헌 국민투표에서 46:54로 패하여 왕정이 폐지되었다. 이로서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되었고, 움베르토 2세와 그의 남자 직계후손들은 2002년까지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왕실에서는 개헌 국민투표를 결과가 조작된 부정 선거였다고 주장하지만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정치권과 내각은 왕실 측의 이의 제기를 무시했고, 이탈리아 대법원도 왕실 측의 이의 제기를 기각했다.

왕정 폐지 당시 왕정 지지 성향이 강한 남부 나폴리 등에서는 공화국을 부정하고 왕정 신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일부 과격 왕당파는 무력으로 공화국을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움베르토 2세는 국가 분열과 내전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18] 게다가 이탈리아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연합국 측은 왕정 폐지로 충돌이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왕정 지지자도 대부분 내전을 불사할 정도로 왕정 유지에 사활적이지 않았다. 결국 움베르토 2세 등 사보이아 가문은 대거 망명을 떠났다.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 제2공화국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카네이션 혁명 후 다시 스위스 제네바로 떠넜고, 1983년 망명지에서 사망했다.

신생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는 파시즘과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모든 사보이아 가문 남자 구성원의 이탈리아 입국을 금지하는 조항을 공화국 신헌법에 넣었다. 굳이 남성 구성원의 입국만 금지하는 이유는 이탈리아는 살리카법이라 남계로만 왕위 계승을 하기 때문이다.[19] 이 금지 조항은 2002년 11월에야 의회 표결을 통해 폐지되었고, 그 대신 사보이아 가문의 수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위 요구를 포기했다.

2.7. 귀국 이후 현황(2002~현재)

2002년 11월에 의회 표결로 입국 금지가 해제된 후 사보이아 가문 구성원 대부분은 이탈리아로 귀국하여 이탈리아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20] 현 수장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그 외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2008년 1월에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하지만 사보이아 가문이 이탈리아 귀국을 허락받는 등 현 이탈리아 정부와 정치적으로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보이아 가문에 대한 이탈리아 내 여론은 대체로 매우 부정적이다. 심하면 왜 귀국을 받아줬냐며 2002년 당시 귀국을 허용한 이탈리아 정부를 비난하는 의견도 있는가 하면 가문의 문장조차 혐오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21] 정확히 말하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그 손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에 대한 평가인데 이는 사보이아 가문의 대(對) 파시즘 협력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그들이 보여준 무사안일· 무능함에 기인한다. 게다가 그 손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비행(非行), 망언, 극우 성향 등도 여론의 비호감 원인 중 하나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41살이던 1978년 자가용 요트에서 고무보트가 없어지자 화풀이로 옆 보트에서 잠자고 있던 19살의 독일인 청년 디르크 하머[22]를 총으로 살해했는데도 고작 6개월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23] 물론 디르크 하머의 어머니와 누나 비르기트가 소송을 제기하여 엄청난 돈을 보상해야 했다. 게다가, 2006년에서야 당시 항구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영상을 구해서 사람죽이고 좋아라 웃는 비토리오의 낯짝이 공개되어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도 완전히 사이코패스라고 다시 비난이 터졌다. 이럼에도, 이걸 보도한 신문과 유족을 고소했다가 패소당했고 비토리오를 비난하는 책자를 낸 모델 겸 언론인인 베아트리체 보로메오[24]도 고소했으나 역시 패소했다. 2015년에 보로메오는 SNS에서 "저 막되먹은 사보이아 쓰레기들이 패소하여 우울해하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다."고 디스했을 정도다. 비토리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약 흡입과 스페인에서 열린 펠리페 6세(당시에는 아스투리아스 공)의 결혼식에서 아메데오 아오스타 공작 폭행 등의 비행과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망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노인이 된 후에도 2006년 마피아 관련 인신매매 주모자 혐의로 긴급체포를 당했다. 또한 "무솔리니 정권의 무엇이 문제였냐?"면서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을 두둔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해 정치적으로도 빈축을 샀다.[25] 정작 그 파시즘 정권 때문에 왕조가 무너졌고 심지어 안되겠다 싶던 왕실에서 무솔리니를 토사구팽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의 아들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또한 한때 마약중독자였으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논란이 될 수도 있는 정치성 발언[26]을 해 물의를 빚었다. 게다가, 이 사람도 사람을 쏴죽인 자기 아버지를 옹호하여 디르크 하머의 누나 비르기트에게 대놓고 무솔리니처럼 총살당해야 했다는 분노어린 비난을 들었다. 위에 서술한 아버지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까지 덩달아 비난한 언론인 베아트리체 보로메오와 에마누엘레는 SNS에서 한참동안 서로 분노어린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에 비하면 큰 논란거리가 되는 인물은 아니며, 이탈리아에서는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기도 했고 이탈리아 요리를 세계에 홍보할 목적으로 미국에서 이탈리아 요리 푸드코트 사업을 벌이는 등 외국에서의 평판은 좋은 편이다.

2007년에 에마누엘레 부자는 이탈리아 정부에 자기 조상들의 재산을 반환하라면서 2억 6,000만 유로[27]를 보상하라는 발언을 하며 이탈리아 여론의 분노를 샀다. 더군다나 귀국을 허용받기 위해 몰수된 왕실 재산을 포기하겠다는 언급을 이미 한 바가 있었기에 더더욱 분노를 살 만했다. 물론 이탈리아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이에 대해서 당시 이탈리아 여론이 얼마나 사보이아 가문 사람들을 혐오했는지 당시 이탈리아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피노 스고비오는 "이탈리아에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사보이아 가문 족속들"이라고 비난했고, 당시 총리실 관계자 또한 "(사보이아 가문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취한 행동을 근거로 그들에게 피해배상을 요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경고성 발언을 했다.

사보이아 가문 사람들에 대한 이탈리아인의 혐오가 어느 정도냐면 가문에 대한 혐오가 다소 누그러졌다는 2020년대에도 이탈리아에서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손녀 비토리아 디 사보이아(Vittoria di Savoia)[28]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이탈리아 왕위 요구를 주장하지도 않았는데도 그저 사보이아 가문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SNS에서 심한 악플 테러를 받고 있다.

2022년에 가보를 돌려받으려는 소송을 냈다.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결정적 실책과 후손들의 망언으로 인해 현재 사보이아 가문은 이탈리아 내에서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혐오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그나마 유일하게 옹호해주는 극우 파시스트 세력 내에서도 사보이아 가문에 대한 입장은 차이가 있어서 극우 세력 상당수는 왕정 시절이 아닌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시절을 자신들의 이상으로 삼고 있기에 극우 파시스트 세력의 일부에게만 지지를 받고 있다. 왕실의 보신이 주된 이유이긴 했지만 왕실에서 전쟁 말기에 무솔리니와 국가 파시스트당을 통수쳤기 때문이다. 그런 이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들이라도 지지층을 넓히고 싶어서인지 "무솔리니 정권이 무엇이 문제였나?"며 무솔리니를 옹호하기 급급했던 손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덤.

결국 사보이아 가문은 이탈리아에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고 입헌군주제로의 복고도 가능성이 거의 없다.[29] 앞선 얘기들을 종합하면 이탈리아 국민들이 사보이아 가문을 싫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베니토 무솔리니를 등용하여 이탈리아 왕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휘말리게 한 책임.
  2. 그런 왕실은 전황이 불리해지니까 무솔리니를 잘라 꼬리자르기를 하고[30] 사후 수습도 제대로 안 한 채로 국민들을 버리고 자신들만 잽싸게 남쪽으로 도주.
  3. 겨우 50년만에 용서하고, 이탈리아 귀국을 허락해줬더니, 돌아온 것은 가문의 수장들이 2대에 걸쳐 저지른 실책과 망언.
  4. 그럼에도 정신 못 차리고 재산 내놓으라는 등의 행패.

3. 역대 군주 및 가문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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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수장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972년생)는 딸 둘만 두고 있어서, 움베르토 1세 이후 계속 외아들로만 대가 이어진 상황으로[32], 남계가 절손되고 그 이후의 수장은 먼 친척이자 철천지 원수인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에게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2020년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가문의 계승법을 바꾼다고 선언하면서 본인과 본인 아들의 사후 가문의 수장 계승권을 친척인 아오스타 가문이 아닌 손녀 비토리아에게 주었다.[33] 당연히 아오스타 가문 등에서는 반발하고 있다. 2010년 아레초 법원에서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편을 들어주어 아오스타 가문이 5만 유로를 배상하고 사보이아 가문의 명칭도 사용할 수 없다고 판결을 내렸으나, 2018년 선고된 항소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힌 상황이다.

4. 분가

분가 사람들은 전쟁 참여 정도에 따라 국외추방과 잔존으로 나뉘었다.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과 사보이아-제노바 가문 직계들은 역시 1946년 움베르토 2세의 퇴위와 함께 국외추방을 당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했다. 나치 독일의 괴뢰국이었던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군주 토미슬라브 2세이기도 했던 4대 아오스타 공작 아이모네는 추방당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홀로 지내다가 1948년에 사망했고, 부인 이리니와 외아들 아이모네는 스위스에서 지내다가 귀국했다.[34] 사보이아-제노바 가문은 3대 공작 페르디난도는 움베르토 2세와 함께 포르투갈로 망명했다가 귀국하여 리구리아주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으며[35], 2대 공작의 3남[36]은 원체 조용한 삶을 살아 추방당하지 않고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다. 4, 5대 공작 역시 추방당했기 때문에 타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보이아-아오스타 공작가의 수장 아메데오(1943 ~ 2021)는 1983년 망명중이던 움베르토 2세가 스위스에서 죽자 움베르토 2세의 외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1937년생)를 제치고 왕위 계승권을 다시 제기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를 제치고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움베르토 2세의 허락 없이 수상 스키선수인 스위스인 평민 마리나 도리아(1935년생)와 결혼해서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상실했다는 이유에서였다.[37] 참고로 나폴리 공(전 왕세자)은 위 문단들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논란이 꽤 많지만 5대 아오스타 공은 1번 이혼한 경력이 있고 사생아[38]가 1명 있는 문제 외에는 나폴리 공에 비해 훨씬 정상적인 행보를 보였고, 9살 때 추방당해서 50여년 뒤에나 돌아온 나폴리 공과 다르게 5살 이후로 계속 이탈리아 본토에서 거주했으며 해군 장교로 군복무까지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왕당파들 중에는 아오스타 공을 지지하는 세력이 상당수였으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로는 아오스타 공 지지파 세력도 약해진 상황이다.[39]

4.1. 사보이아-제노바 공작가

카를로 알베르토의 차남이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동생 페르디난도(1822 ~ 1855) 왕자를 시조로 하여 5대 165년(1831~1996) 동안 지속되었다. 사실 댓수만 5대지 조부-아들-손자들로만 3세대까지만 물려받았을 뿐인데, 3세대 손자들이 후사는 없지만 워낙 장수해서 1996년까지 버텼다. 가문의 수장이 될 수 있는 남계가 끊긴 것이지, 여계는 여전히 건재하다. 마지막 수장 에우제니오의 외동딸은 현재 살아있으며 4명의 자녀를 낳았다. 또한 제노바 공작가에서 움베르토 1세의 왕비를 배출하였으므로, 사보이아 본가 쪽 후손들은 모두 제노바 공작가의 여계후손이다.[42] 그 외에는 2대 공작 톰마소의 두 딸(마리아 보나, 마리아 아델라이데)의 후손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4.2. 빌라프란카-수이손스 백작가 #

카를로 알베르토의 증조부인 루이지 비토리오의 3남 에우제니오를 시조로 하여 1778년에 창설.

이후 1834년에 3대 백작 에우제니오 에마누엘레가 카를로 알베르토가 갖고 있던 카리냐노 공작위를 하사받았으나 1863년에 귀천상혼을 하였고 그 뒤 1888년에 움베르토 1세가 해당 결혼을 승인하면서[43] 빌라프란카-수이손스[44] 백작위를 하사하여 에우제니오 에마누엘레의 아들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부터는 빌라프란카-수이손스 백작위를 쓰게 되었으며 이후 3대째 지속되고 있다.

4.3. 사보이아-아오스타 공작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메데오 왕자를 시조로 하여 1845년 창설. 6대째 지속되고 있다.[45]
사보이아 가문의 종가와 사보이아-아오스타 공작가 간의 관계는 사보이아 가문의 계승 논쟁 때문에 매우 좋지 않았다. 2004년 당시 스페인의 왕세자였던 펠리페 6세와 왕세자비였던 레티시아 왕비의 결혼식에 참석한 두 분가의 수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아메데오는 서로 주먹다짐을 벌였을 정도.[52] 다만 서로 물리적 충돌까지 빚었던 두 사람이 모두 죽고 자녀들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아이모네가 수장이 된 이후 서로 얼굴 붉히려 하지는 않고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다.

이제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칭호일 뿐인데도 양측이 이렇게나 가문의 수장 자리에 집착하는 이유는 왕실의 후손으로서 1032년 사보이아 백국 시절부터 1946년 이탈리아 왕정 폐지 이전까지 천 년 가까이 쌓아놓았던 어마어마한 재산은 물론이고 지난 수백여년 간 왕실 명의로 수집한 예술품과 소유했던 궁전, 가문의 구성원들이 안치된 수도원이나 성당 같은 문화재들의 관광 수익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53]

5. 기타

사보이아 가문의 일원들은 대체로 프랑스 사부아에 있는 오트콩브 대수도원(Abbaye Royale d'Hautecombe)에 매장되었다가 사르데냐 왕국 선포 이후에는 수페르가 성당[54]에 안장되었다. 다만 오트콩브 수도원은 공작 필리포 2세 이후로는 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펠리체와 이탈리아의 마지막 국왕 움베르토 2세만 안장되었으며, 수페르가 성당이 세워지기 전에는 토리노 대성당(Duomo di Torino)[55], 베르첼리 대성당(Duomo di Vercelli), 비코포르테 성소(Santuario di Vicoforte) 등으로 분산되어 안치되었다.

사보이아 가문이 사용했던 궁전들은 현재 '사보이아 궁중저택(Residenze della Casa Reale di Savoia)'[56]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토리노에 위치한 주요 궁전은 정궁이었던 토리노 왕궁(Palazzo Reale), 고고학 박물관으로 쓰이는 마다마 궁전(Palazzo Madama), 리소르지멘토 박물관으로 쓰이는 카리냐노 궁전(Palazzo Carignano), 토리노 공과 대학교(Politecnico di Torino)[57] 건물로 쓰이는 발렌티노 성(Castello del Valentino), 공작부인 및 왕비들이 주로 사용했으며 현재는 일부만 공개중인 빌라 델라 레지나(Villa della Regina) 등이 있다. 피에몬테 지역으로 넓히면 토리노 근교에 있는 스투피니지 사냥궁전(Palazzina di Stupinigi), 몬칼리에리 성(Castello di Moncalieri), 유벤투스 알리안츠 스타디움 근처에 있는 베나리아 궁전(Reggia di Venaria Reale), 토리노에서 좀 더 나가야 볼 수 있는 라코니지 왕궁(Castello Reale di Racconigi) 등이 있다. 임시 천도때 사용했던 칼리아리 궁전(Palazzo Regio)[58] 역시 대중에게 개방하고 있으며, 토리노 천도 이전 사용했던 샹베리 성(Château des Ducs de Savoie)은 현재 프랑스 사부아 데파르트망 의회로 사용하고 있어 가이드투어 한정으로 일부만 개방한다.

이 가문을 상징하는 색은 블루 사보이아(Blu Savoia)로 알려진 파란색이다. 헥스 코드#4B61D1. 1366년 6월 20일,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가 교황 우르바노 5세의 위임을 받아 외가쪽 친척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황제 요안니스 5세를 돕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조직하여 17척의 배에 2,000여 명의 병사를 태우고 갈 때 베네치아 기함에 가문의 문장인 붉은 십자가 깃발과 그 옆에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푸른 깃발을 걸었다는 기록에서 유래한다. 다만 푸른 깃발의 사용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1589년으로 알려졌다. 블루 사보이아는 이후 사르데냐 왕국, 더 나아가 이탈리아 왕국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고 현재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상의 색[59] ITA 항공 항공기 도색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이탈리아의 국가(國歌)인 마멜리 찬가 이전에 사용된 왕의 행진곡(Marcia Reale d'Ordinanza)은 사보이아 가문을 찬양하는 노래였다.

1938년 마리조제 왕세자비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를 접견했을 때, 성 비오 신부는 곧 있을 끔찍한 전쟁과 왕정의 소멸을 예언했다. 그것이 현실이 되고 난 이후에도 왕세자비는 성 비오 신부와 편지 교류를 계속하였는데, 성 비오 신부는 "미래에 이탈리아 군주제는 귀환할 것이지만, 직계는 나무 위의 마른 잎사귀처럼 바짝 말라버릴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

5.1. 수모

통일 이전부터 프랑스한테 두들겨 맞아 16세기 이탈리아 전쟁,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본토 대부분이 점령당하는 수모를 당했는데 통일 이후에도 이러한 수모는 달라지지 않았다. 통일 이후의 이탈리아 왕국은 빈부격차가 너무 심해서 내부에서 혼란이 많았고, 내부 잠재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해 유럽의 열강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즉, 물리적인 통일만 해 놓고 국민통합은 왕정 폐지 때까지도 실패한 것이며 이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부실한 전력과 국력으로 인해 별다른 활약을 못 보였고 그 덕에 이익도 많이 보지도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추축국이 되었으나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으로 유명하듯 이탈리아군은 한심한 행보를 보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독일, 일본과 함께 패전국 신세가 되었으며,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되면서 사보이아 가문은 최소 56년 가량이나 이탈리아에 입국조차 하지 못했다.

국가의 역사 뿐만 아니라 왕실 구성원을 봐도 무언가 문제가 있는데 제3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키가 153cm밖에 안되는 희대의 단신으로 주변에서 놀림을 많이 받았으며[60] 왕정 폐지 이후로도 사보이아 가문은 가문의 수장이자 외아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부자가 연달아 사고를 치는 등 안 좋은 구설수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나마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마약도 끊고 나이 든 후에는 아버지처럼 이렇다할 사고를 치지도 않았고 이탈리아에서 각종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미국에서 이탈리아 음식 푸드트럭 사업 등으로 이탈리아의 국격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평은 받는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 왕실 사람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한 것이, 제2대 국왕인 움베르토 1세와 마르게리타는 왕과 왕비로서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서로 부부금슬은 매우 나빴으며 난산으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낳았던지라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어 사이가 더 틀어졌다. 제4대 마지막 국왕인 움베르토 2세와 왕비 마리조제 역시 움베르토가 게이였기 때문에 부부관계는 처음부터 삐걱거렸고 1946년 왕정 존속 투표 당시 이 점으로 공격받아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이미지가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왕정 폐지 이후엔 서로 평생 별거하며 살면서 왕실 행사나 다른 나라 왕실 행사, 자녀들의 결혼식 때에만 한두번 정도 만나는 정도였다.[61] 마지막 왕세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어릴 적 그러한 환경에서 노출된 데다 본인 나름대로 아름다웠던 기억이었던 왕자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왕족이었다가 단숨에 망명자 신세가 되었으니 이에 대한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비뚤어져 자랐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 아들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역시 망명지에서 태어난지라 제왕학을 못 받고 자라서 그랬다고 볼 여지도 있다.

즉, 사보이아 가문의 불운은 정치적으로, 왕족 개개인들의 개인사적으로 불운을 겪어서 그렇다고 볼 여지는 있지만 상당수는 왕가 사람들 본인들이나 조상들의 자업자득으로 벌어진 것이긴 하다. 사보이아 가문은 다른 유럽 왕실과 달리 20세기까지 스파르타식 교육을 강요했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솔직하지 못하다보니 서로 의사소통이 원할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인간성이 결여된 군주들이 많았다.

[1] 라틴어 문장의 약자(略字)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러 설이 있다. [2] 다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더 넓은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면서 촌구석의 합스부르크를 반쯤 스스로 포기했지만, 사보이아 가문은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프랑스 제2제국 울며 겨자 먹기로 내주었다는 차이점은 있다. [3] 최근에는 사보이아 가문이 정통성을 높이고자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왕조와의 혈연을 강조하기 위해 족보를 조작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유전학적 분석에 따르면 프랑스 부르고뉴 또는 프로방스 출신이라고 한다. [4]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는 필리포 2세가 첫번째 부인 부르봉의 마르그리트로부터 얻은 장녀였다. 그녀는 이복동생 카를로 2세가 즉위하면서부터 서출 오빠인 레나토와 함께 끊임없이 카를로 2세의 즉위가 부당하다며 공격했다. [5]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즈(Beatriz de Portugal)는 카를 5세의 황후인 포르투갈의 이자벨(Isabel de Portugal)의 동생이었다. [6] 더 정확히는 발레다오스타와 알프스 서쪽의 사부아에서는 프랑스어를, 알프스 동쪽의 피에몬테와 니차에서는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지정한다는 칙령이었는데 이후 사부아의 샹베리에서 피에몬테의 토리노로 천도하면서 이탈리아어가 자연스럽게 프랑스어를 누르고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7] 현재 프랑스 앵 데파르트망. [8] Tommaso Francesco di Savoia 1596~1656. 사보이아 가문의 본가의 대가 끊긴 후 뒤를 이은 사보이아-카리냐노 분가의 시조이다. [9] 외젠의 아버지인 수아송 백작 외젠 모리스의 아버지는 앞서 말한 톰마소 프란체스코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사부아 공자 외젠은 6촌 관계였다. [10]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반강제로 바꾸자고 협박한 것이다.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사르데냐를 얻었는데 나폴리 왕국에서 멀리 떨어진 사르데냐보다는 가까운 시칠리아가 통치하기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11]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대왕은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를 보고 사르데냐 왕국만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유일하게 나라다운 나라라는 평가를 남겼다.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것을 감안하면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셈이다. [12] 카를로 펠리체의 왕비인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ristina di Borbone-Napoli)가 불임이었다. [13] 그러나 이탈리아 국왕의 황제 겸임은 승인하지 않았다. [14] 사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의 대부분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완벽하지는 못해서, 1941년까지도 몇몇 지역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지지하는 저항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15] 무솔리니 축출 당시 이탈리아 군부는 아직 이탈리아 내 독일군 병력이 이탈리아군에 비해 열세인 현 시점이 연합군에 항복할 적기라는 이유로 가능한 한 빠른 항복을 권고했다. [16] 사실 연합군 입장에서는 그의 행보는 존중해줄 가치도 없었다. 그나마 리비아 식민지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얻은 것이라 어느 정도 명분이 있다 쳐도, 알바니아와 에티오피아는 무솔리니 체제 하에서 얻은 것이고, 그 무솔리니 체제 하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가 패했는데 무솔리니만 팽하고 그의 체제 하에서 얻은 것은 안 내놓겠다고 땡깡을 부리는게 곱게 보일 리가 없다. 본인 입장에서야 이거라도 건져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삽질만 한 것이 아니고 뭔가를 했던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연합군의 고려대상이 아니다. [17] 194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다. [18] 당시 남부가 전반적으로 왕정 지지 여론이 우세했다고 하지만 남부의 공화정 지지 여론이 무시해도 좋을 만한 수준으로 낮은 것은 아니었다. 왕정 지지세가 가장 강했던 나폴리조차도 공화정 득표율이 20%는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국민 대다수는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고, 파시즘을 용인했던 이탈리아 재계도 분열과 내전을 원치 않고 있었다. 만약 일부 왕당파가 실제로 국가 분열을 시도한다면 얼마나 물적 뒷받침을 받을 수 있을지 회의적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움베르토 2세는 '이탈리아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으며, 내 조상들이 이탈리아를 통일했는데 어떻게 내 손으로 다시 분열시키겠느냐.'는 말로 내전 시도를 일축하였다. 한편 북부에서는 이탈리아 왕국 이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시절부터 다스린 피에몬테나 사르데냐에서는 왕정 지지가 높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피에몬테가 절대적으로 높다기보다는 북부 중에선 그나마 높은 편이이었고 정작 토리노는 왕정을 폐지하자는 투표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19] 참고로 본가 사람들은 움베르토 1세 이후 외아들로만 대가 이어지고 있었다. [20] 여성의 경우 2002년 이전부터 이미 이탈리아 국내 거주가 가능했다. [21]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에도 이것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22] 다만 디르크 하머의 아버지인 뤼크 게르트 하머(1935~2017)는 유럽에서도 미친 사기꾼으로 악명높은 유사의학 사이비 의사였다. 한마디로 독일판 허현회인데 암을 자신만의 의료 방법으로 고칠 수 있다면서, 추종자의 어린 딸아이를 하마터면 죽일뻔했다가 1995년 구속되었다. 오스트리아 소녀인 올리비아 필하르(Olivia Pilhar)는 병원으로 옮겨져 항암치료를 받아 겨우 살아남아 지금도 살아있다. 반대로 뤼크 하머는 구속되고 부모도 징역형을 살았으며 부모는 양육권이 박탈당했다. 의사 자격도 박탈당함에도 이런 방법을 고집하여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지에 이런 엉터리 진료소를 차려 돈벌다가 싸그리 폐쇄당하고 추방당해 노르웨이에서 살다가 죽었다. 게다가 뤼크 하머는 자신의 사이비 치료방법이 게르만 민족 우월적인 방법이라며, 이걸 유대인들이 음해하고 있다면서 유대인 음모론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딸인 비르기트 하머는 아버지나, 동생을 죽인 비토리오라는 놈이나 똑같다며 절연하고 혐오했다. 비토리오나 뤼크 하머나 유대인 음모론을 주장하고 다닌 건 매한가지였고 심지어 뤼크 하머는 자기 아들을 죽인 비토리오를 이해한다는 개막장 짓이나 보였으니, 그의 아내와 딸마저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작자가 증오스러울 것이었다. [23] 디르크 하머를 직접적으로 조준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과실치사 및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과실치사 혐의는 인정되지 않고 불법 무기 소지만 유죄로 인정되어 6개월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24] 참고로 이 사람은 사보이아 가문 후손들을 상당히 혐오하긴 하지만 군주제 혐오자는 아니다. 세계 유명 왕족들과 귀족들과도 친하고 무려 세계적인 여배우이자 모나코 공비였던 그레이스 켈리의 장녀 카롤린 그리말디의 차남 피에르 카시라기(즉, 그레이스 켈리의 외손자)와 결혼했다. 사실 보로메오 본인부터가 귀족으로 역사가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보로메오 백작 가문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조차 저런 소리를 들을 정도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인성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베아트리체의 어머니 파올라 마르초토가 비르기트의 친구이기도 했다. [25] 시메온 2세는 자신이 왕국 말기에 왕세자, 국왕이던 시절에 모국 불가리아가 나치 독일군에게 부역했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불가리아는 이탈리아와 달리 사실상 나치의 강압에 의해 전쟁에 참여한 것이었음에도! [26] 증조할아버지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판테온에 묻혀야 마땅하다는 발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파시즘 집권을 방조하다 못해 협력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 보여주었던 추태를 고려한다면 빈축을 살만한 발언이었다. [27] 한국 원으로 3,240억원이 넘는다. [28] 국적과 주요 활동지는 이탈리아지만 어머니를 따라 주로 프랑스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9] 사실 군주제가 폐지된 유럽 국가 중 여론이 좋은 편인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도 각각 경제적 이유나 정치 불안 등으로 복고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프랑스와 독일, 구 오헝제국 등은 복고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거의 0%인 것과 별개로 왕가 구성원들의 인품이나 1차대전 같이 군주 한두명이 막기 힘든 불가항력적인 전쟁으로 폐지되었다는 점에서 복고까지는 지지하지 않더라도 동정여론은 제법 많은 편이다. 독일연방공화국 건국 주역들이 상당수가 독일 제국 구 귀족 출신인데다 프랑스 오를레앙 왕가와 프랑스 공화국 정치권과의 친분은 유명하다. [30] 위에서 나왔듯 극우 파시스트조차 대다수가 등을 돌린 이유다. [31] 1439년~1449년 대립교황 펠릭스 5세 [32] 반면 경쟁자인 친척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은 시조인 스페인 국왕 아마데오 1세 때부터 공작위를 이을 장성한 아들만 셋이었고(물론 장남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869~1931)만 결혼하고 자녀를 두었고 차남, 삼남은 요절하진 않았지만 독신이라 자식 없이 사망했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도 아들만 둘을 두었고, 그 차남 아이모네(1900~1948)는 외아들을 두었지만 그 외아들 아메데오(1943~2021)는 1남 2녀를 두었고, 아메데오의 장남 아이모네(1967년생) 역시 2남 1녀를 두어서 사보이아 본가보다는 단절될 가능성이 적다. 또한 계승을 못 해서 그렇지 아메데오의 두 딸들도 각각 5명, 3명의 자녀를 두어서 본가에 비하면 제법 번성한 가문이다. [33] 물론 살리카법을 폐지한다고 해도 손녀 비토리아(2003년생)와 루이사(2006년생)가 자녀를 낳지 않고 죽는다면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에 넘어가게 된다. 불가리아 왕국 시메온 2세와 같은 움베르토 2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여계후손이 제법 있기는 하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살리카법을 폐지하면서 계승권자를 본인의 자손으로 제한한다고 밝혔기에 대가 끊기게 되면 더 윗대에서 갈라진 여계후손은 어느 쪽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계승권이 없고,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수장이 계승권을 주장할 만한 유일한 인물로 남기 때문이다. [34] 아오스타 공작 작위는 군주제가 폐지되고 명목상으로만 남은 이탈리아 국왕 자리와는 달리 1946년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공식적으로도 현재 남아 있는데, 이탈리아 공화국은 제헌 헌법을 통해 귀족 제도는 폐지했지만 1922년 로마 진군 이전에 수여된 귀족 칭호는 인정하기 때문이다. [35] 페르디난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 해군에서 맹활약했으나 전후 은퇴하여 정계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36] 아달베르토(1898 ~ 1982), 4대 공작인 형 필리베르토보다 먼저 사망해서 제노바 공작위를 세습하지 못했다. [37] 사보이아 왕가 역시 다른 대다수의 유럽 왕가처럼 군주의 승인 없이 비왕족과 결혼할 경우 자동으로 계승권이 박탈되는 형태의 귀천상혼 배제 원칙을 시행하였다. [38] 지네브라 마리아 가브리엘라. 2006년생이고 다운 증후군이 있다. [39] 6대 아오스타 공작 아이모네는 2013년부터 피렐리 타이어의 러시아 지부 부사장을 역임하고 있는데 주요 공장이 보로네시 돈바스 지역에 있어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이모네는 모스크바에서 수 년 동안 거주하면서 2018년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훈장까지 수여받은 골수 친러이다. [40] 부인은 작센 국왕 요한의 차녀 엘리자베트로 조피 대공비의 외조카(어머니 아말리가 조피 대공비의 친언니)다. 또한 프란츠 요제프 1세, 막시밀리아노 1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 요세피나, 브라질의 황후 아멜리,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오귀스트의 이종사촌이다. [41] 움베르토 1세의 왕비 마르게리타가 톰마소의 누나이다. [42] 또한 불가리아의 마지막 왕 시메온 2세의 어머니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딸이므로, 구 불가리아 왕가 후손들도 모두 제노바 공작가의 여계후손이 된다. [43] 당시 사보이아 가문은 엄격한 귀천상혼제를 적용했으나 에우제니오 에마누엘레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벌어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친정을 나갔을 때 수도 토리노를 지킨 공로가 있었고 왕실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승인을 받았다. [44] 빌라프란카는 오늘날의 프랑스 빌프랑슈쉬르메르로 1860년 토리노 조약 전까지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영토였으며 나폴레옹 3세 카보우르의 통수를 치고 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단독 강화를 맺은 그곳이다. 수이손스는 파리 근교에 있는 수아송 이탈리아어 발음으로 사보이아-카리냐노 분가가 배출한 최고의 아웃풋 사부아 공자 외젠의 부친 외젠 모리스(에우제니오 마우리치오)가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이곳을 봉토로 받았었다. [45] 중간에 3대 아메데오가 딸 둘만 있고 아들이 없어서 동생 아이모네가 4대로 이어받은 형제 간 승계가 한 번 있었다. [46] 부인은 자신의 이종사촌이자 6촌 동생인 오를레앙의 안( 페르디낭 필리프의 증손녀(차남 로베르의 손녀)다. 어머니 이자벨이 아메데오의 어머니 엘렌 도를레앙의 여동생이고, 아버지 기즈 공작 장은 엘렌의 친사촌이다) 장녀 마르게리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차남 로베르트와 결혼했다. [47] 당숙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153cm의 단신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아메데오는 198cm의 장신이었는데, 이 때문에 생전에 종종 비교가 되곤 했다. 1937년 12월 21일부터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총독으로 재임하였고,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로 진군할 당시 투항하여 케냐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병으로 사망하였다. [48] 벨기에 국왕 알베르 2세의 딸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비 아스트리드가 장남의 이름을 이 사람에게서 따와 아메데오라고 지었다. 아스트리드의 남편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로렌츠의 외조부가 바로 이 인물이기 때문이다. [49] 부인은 그리스 왕국 콘스탄티노스 1세의 차녀(다섯째) 이리니이다. [50] 2번 결혼(이혼 후 재혼). 첫번째 부인은 오를레앙 가문 출신이다.(아메데오의 큰어머니인 안의 조카이다. 또한 아메데오의 할머니 엘렌의 여동생인 이자벨의 손녀이기에 아메데오와는 6촌간이다.) [51] 부인은 그리스 왕국 미하일 왕자(콘스탄티노스 1세의 막내 남동생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외아들)의 차녀 올가. 미하일 왕자는 6대 공작 아이모네의 할머니 이리니와 사촌이고, 미하일 왕자의 외가도 오를레앙 가문이기 때문에, 부부는 덴마크-그리스 왕가, 오를레앙 가문 기준으로 친척이 된다.( 요르요스 1세 기준으로 하면 7촌, 오를레앙 가문 수장이었던 기즈 공작 장 기준으로 하면 6촌이다. 참고로 미하일 왕자의 어머니 프랑수아즈는 상기한 3대 공작 아메데오의 부인 안의 언니다.) [52] 첨언하자면 5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는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후안 카를로스 1세의 6촌 동생(후안 카를로스 1세의 외할머니 루이즈 도를레앙이 아메데오의 할머니 엘렌 도를레앙의 여동생)이자 그의 왕비 소피아의 고종사촌 동생(아메데오의 어머니 이리니가 소피아의 고모)이다. [53] 단적으로 사보이아 가문의 조상들이 안치된 프랑스 사부아 생피에르드퀴르티유의 오트콩브 수도원만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아 존재조차 모르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연간 150,000여 명이 방문했다. 오트콩브 수도원 같이 대중적이지 않은 장소만 해도 이정도인데 토리노 왕궁 같은 주요 명소들은 말할 것도 없다. [54] 수페르가의 비극의 원인이 된 그 성당이 맞다. [55] 토리노의 수의를 보관하고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56] 프랑스어 : Résidences de la famille royale de Savoie/ 영어 : Residences of the Royal House of Savoy [57] 토리노 대학교와는 다른 대학교로 1859년 설립되었다. [58]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은 아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사보이아 가문의 궁전은 토리노와 피에몬테 지역으로 한정된다. [59]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포스터를 보면 파시즘에 물든 이탈리아의 모습이 반영돼있듯 파란색의 이탈리아 국대 유니폼에 사보이아 왕조의 문장이 새겨져있다. [60] 다만 현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단신은 윗대부터 지속된 근친혼에 의한 부작용이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유전질환으로 인해 심한 통증을 앓았고 그래서 성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할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고종사촌 겸 당이모인 오스트리아의 아델하이트와 결혼했고, 아버지 움베르토 1세와 어머니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도 친사촌 관계였기 때문. 숙부인 오도네 왕자(1846 ~ 1866, 할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3남)도 근친혼에 의한 유전질환으로 인해 왜소증을 앓다 20세에 사망했다. [61] 이 시절은 1930년대, 특히 보수적인 가톨릭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였기 때문에 동성애와 인공수정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긴 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동서양 모두 전근대보다도 근대가 훨씬 보수적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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