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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필리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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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오를레앙 왕조 초대 국왕
루이필리프 1세
Louis-Philippe I
파일:1841_portrait_painting_of_Louis_Philippe_I_(King_of_the_French)_by_Winterhalter.jpg
출생 1773년 10월 6일
프랑스 왕국 파리 팔레 루아얄
사망 1850년 8월 26일 (향년 76세)
영국 잉글랜드 서리 클레어몬트
재위기간 프랑스인의 왕
1830년 8월 9일 ~ 1848년 2월 24일
서명
파일:루이필리프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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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오를레앙 가문
이름 루이필리프 도를레앙
(Louis-Philippe d'Orléans)[1]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
어머니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형제자매 앙투안 필리프, 프랑수아, 아델라이드, 루이 샤를
배우자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1809년 결혼)
자녀 페르디낭 필리프, 루이즈, 마리, 루이, 클레망틴, 프랑수아, 샤를, 앙리, 앙투안 }}}}}}}}}
파일:Louis_Philippe_I.jpg
존영

1. 개요2. 집안 배경3. 생애
3.1. 어린 시절3.2. 혁명 시대3.3. 망명 시대3.4. 귀국3.5. 즉위: 시민왕 혹은 폭동왕3.6. 치세3.7. 퇴위
4. 평가
4.1. 치세에 대한 평가4.2. 인간적인 면모
5. 기타6. 가족 관계
6.1. 조상6.2. 아내 마리아 아말리아6.3. 자녀6.4. 사후 계보 및 후손들
7.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마지막 .[2] 프랑스 부르봉-오를레앙 왕조[3]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이며,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의 아들이다. 루이 13세의 6대손으로 루이 13세의 차남이자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5대손이다.[4]

또한 부모 양쪽으로도 루이 14세의 자손이기도 하는데 그의 어머니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는 루이 14세와 정부 몽테스팡 후작부인 사이의 사생아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의 손녀이고, 그의 고조할머니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 역시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 부인 사이의 사생아였기 때문이다.[5]

오를레앙 가문은 부르봉 왕조의 방계 가문 중 최선임 가문으로서 부르봉 직계 후손이 끊긴 후에는 프랑스 왕위에 오를 1순위[6]의 현 부르봉 왕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다. 게다가 재산 또한 아버지 루이 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는 프랑스 왕국의 5% 영지를 가진 막대한 영주였으며 어머니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는 자식 없이 요절한 오빠 랑발 공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7]을 대신해 툴루즈 백작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이어받은 상속녀였다.

2. 집안 배경

가족관계 이름 생몰년 재위기간 비고
열조부 루이 13세 1601년 ~ 1643년 1610년 ~ 1643년(프랑스 국왕) 프랑스 국왕
현조부 필리프 1세 1640년 ~ 1701년 1661년 ~ 1701년(오를레앙 공작)
고조부 필리프 2세 1674년 ~ 1723년 1701년 ~ 1723년(오를레앙 공작) 6촌[8] 손자뻘 루이 15세 섭정
증조부 루이 1703년 ~ 1752년 1723년 ~ 1752년(오를레앙 공작)
조부 루이 필리프 1세 1725년 ~ 1785년 1752년 ~ 1785년(오를레앙 공작)
아버지 루이필리프 2세 1747년 ~ 1793년 1785년 ~ 1793년 프랑스 혁명 주동자 중 하나
단두대에서 처형됨

3. 생애

3.1. 어린 시절

1773년에 출생하였다. 태어나면서 발루아의 공작(duc de Valois) 작위를 받았고, 이어 샤르트르의 공작(duc de Chartres) 작위를 받았다.

3.2. 혁명 시대

아버지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를 따라 그 아들인 루이 역시 프랑스 혁명에서 혁명파로 가담했다.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가 스스로 귀족임을 부정하고 '평등한 자(에갈리테)'[9]를 자칭하자, 아들인 루이 필리프 역시 '평등한 자의 아들(Égalité fils 에갈리테 피스)'이라 불리게 된다.

혁명 프랑스 공화국에서 사령관으로서 프랑스군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1790년에는 자코뱅 당에 들어가기도 했다.

3.3. 망명 시대

1793년, 쿠데타 음모를 꾸미던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가 처형당하자 스위스로 망명한다. 이후 지리학, 수학, 현대 문학 교사를 하면서 박봉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1795년에는 독일 함부르크, 1795년에서 1796년에는 북유럽, 1797년에서 1799년 동안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망명했다. 1801년에서 1807년까지는 영국 런던 교외에서 살았다.

망명 시대의 루이 필리프는 부르봉 왕조의 친척들에게 노골적으로 외면받으며 왕따를 당했다.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가 프랑스 왕위와 권력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하며 루이 16세 일가를 위협했고 자신도 이를 말리긴 커녕 동조한데다, 심지어 아버지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의 처형을 찬성하고[10]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가 똑같이 처형당하기까지 했으니 다른 부르봉 왕가 친척들로부터 배척당한 건 당연했다. 지금도 부르봉 가문에서는 오를레앙 가문을 종가[11]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망명 생활 중 나폴리의 공주 마리아 아말리아[12]와 만나 흔치않은 연애결혼을 했는데, 문제는 아말리아의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13]와 가장 사이가 좋은 언니였다는 점이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자 당시 유럽의 외교 언어였던 프랑스어를 평생 쓰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를 증오했는데, 아끼던 여동생의 처형에 일조한 원수의 아들[14]이 자신의 딸과 결혼하는 걸 당연히 싫어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루이 필리프가 마리아 카롤리나를 직접 설득해서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는데, 이를 보면 인품 하나는 확실히 대단했던 모양이다.

3.4. 귀국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퇴위하고 나서야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르봉 왕조의 왕정 복고로 프랑스 혁명으로 재산을 잃은 귀족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이 만들어졌다. 루이필리프는 이 법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다. 대대로 물려받아 오던 오를레앙 공작(duc d'Orléans)의 작위와 아버지의 저택이던 팔레 루아얄을 비롯한 많은 재산을 되찾았다.

죽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를 후원하고 혁명 이전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려는 복고주의에 반대하였다. 대귀족임에도 겸손하고 평범하게 행동했으며, 자신의 자녀들 역시 일반 고등학교에 보냈다. 이러한 처신 덕분에 루이 18세 샤를 10세 치하 동안 루이 필리프의 인기는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3.5. 즉위: 시민왕 혹은 폭동왕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이 발발하여 복고 왕정은 무너져 내렸다. 샤를 10세는 퇴위하는 한편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프랑스 하원은 샤를 10세의 퇴위만 받아들이고 대신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선포하여 7월 왕정이 수립된다.

이때 이전부터 쓰던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roi de France et de Navarre/king of France and Navarre)'이 아닌 '프랑스인의 왕(roi des Français/king of the French)'이라는 칭호를 쓰게 된다. 프랑스의 왕은 왕권이 신에게서 부여받아 왕국 자체가 국왕의 소유라는 뜻이 있으나, 프랑스인의 왕은 왕권은 인민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뜻이 내재되어 있다.[15]

의회로부터 왕위를 받은 루이 필리프는 스스로 시민들에게 옹립되었다 하여 '시민왕(le roi-citoyen)'을 자처했으며 이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했으나, 그의 즉위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각국의 군주들은 '폭동왕'(...)이라고 불렀다.

즉위 이듬해인 1831년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그를 지지한 자유파들이 282석을 얻으며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 그는 원내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한 운동당[16]의 당수 카지메르 페리에를 총리로 임명한다.

당시 아내를 포함한 대부분의 가족(사실상 전 유럽의 왕실)들은 그의 즉위를 반대했다고 하는데, 아내 마리 아멜리는 이를 ' 재앙(catastrophe)'으로 묘사했으며 전 유럽이 남편을 찬탈자라고 부를 것이고 그의 재위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18년이나 집권했으니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었지만, 루이 필리프도 결국엔 퇴위하였으니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예측이 반은 맞게 된 셈이다. 집권기간도 전부 순탄치만은 않아서 이 과정에서 있었던 1832년 6월 봉기 레 미제라블의 배경으로 쓰이기도 한다.

1844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초청을 받아서 영국을 정식 방문하였다. 이는 백년전쟁 이후 400여년 만에 프랑스의 군주가 영국을 방문한 사례이다.

3.6. 치세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진행하였다. 1830년에 알제리에 출병하여 알제리를 병합하고 식민지로 삼았으며 1831년 프랑스 육군에 5개 대대 규모의 프랑스 외인부대를 만들게 된다.

멕시코에 압력을 걸고, 아편전쟁으로 굴복당한 청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인도네시아에도 포함외교를 걸었다. 또한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를 점령했다.

그리고 조선에도 간섭하려 한 적이 있다. 1846년과 1847년( 헌종 13년)에 걸쳐서 루이필리프는 장바티스트 세실 제독을 시켜 프랑스 해군을 보내 기해박해에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사제 3명[17]을 죽인 일을 항의하고 조선을 개항하려 했었다. 이는 불과 십수 년 후에 일본에서 벌어진 쿠로후네 사건과 매우 흡사했다. 그런데 되레 프랑스 해군 함정들이 죄다 암초에 좌초, 수백의 승조원들은 충청도에 고립된 채 떨고 있다가 상하이에서 빌린 배를 타고 돌아갔다.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제 내각책임제를 도입했으며, 귀족의 세습 제도를 폐지하는 정책을 취했다. 루이 필리프는 망명 생활 도중 영국의 정치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1840년엔 세인트 헬레나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무덤을 지금의 앵발리드로 이전케 하였다.(Retour des cendres) 자신이 이전 부르봉 왕들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일종의 정치적 이벤트라 평가되고 있다. 이 대형 이벤트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몇 년을 다룬 영-프 합작영화 <Monsieur N>(2003)에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심 나폴레옹을 불편히 여기고 이장을 주저했던 왕정은 나폴레옹의 관과 이를 보기 원하는 민중을 기피했다. (영화 <Monsieur N>과 달리) 실제 관은 커다란 장의 마차 가운데에 숨겼고, 파리를 제외한 도시는 모두 피했으며, 앵발리드의 예식에는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제한했다. 그나마도 왕정 쪽 정치인들은 굉장히 산만하고 무성의한 분위기였다고.

이에 반해 민중은 프랑스 제국 근위대 생존자들이 옛 군복을 입고 황제를 맞았고 구경꾼도 40만이나 밀집하였다. 그들은 제1제정에 대한 향수를 자극받았으며, '순교자 황제'에게 무례한 왕정에 분노했다. 왕실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꾸민 이벤트는 역으로 왕정과 민중의 단절만 드러냈다. 이는 왕정의 권위를 상처 입히고 나폴레옹 신화를 강화한다.

3.7. 퇴위

1848년, 공화파들의 2월 혁명으로 프랑스 제2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퇴위하였다.[18] 그 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가 1852년 친위 쿠데타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되면서 프랑스 제2제국이 성립되고,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 왕국의 마지막 이 되었다(마지막 군주이자 황제는 나폴레옹 3세).

영국으로 망명하여 클레어몬트에서 지내다가 1850년 8월 26일 사망하였다. 사후 영국 에이브리지에 묻혔다가 1876년 프랑스로 이장되어 오를레앙 가문 구성원들이 전통적으로 안장되어온 드뢰 왕실 묘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자손인 파리 백작 장 도를레앙(Jean d'Orléans)이 현재 부르봉-오를레앙 왕가의 수장으로 정통 후계자로서 장 4세를 칭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왕정복고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물론 프랑스 어디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는 왕정복고를 실질적으로 주장하진 않고 있다.

4. 평가

비만과 여러 성인병에 시달리고 리더십의 부족으로 비판받았던 루이 18세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극단적인 왕정주의적(Ultraroyaliste) 포지션을 고수했던 전대 왕 샤를 10세에 비하면, 제법 정세도 읽을 줄 알고 인간적인 매력도 있었던 왕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다루기 어렵다는 프랑스 국민들을 데리고 난세에 18년이라는 독보적으로 긴 기간 동안 군림했으니, 군주로서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7월 혁명 이후, 공화주의라는 엄연한 대안이 있는 상황에서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추대한 것은 그가 제법 대중적 인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4.1. 치세에 대한 평가

오를레앙 가문의 ' 입헌군주제'와 ' 자유주의'에 대한 호감은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부터 있었던 것이라 전해진다.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자신이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자유주의에 호감을 느낀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얼마나 그 후손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루이필리프의 아버지 대에 이르기까지 오를레앙 공작가는 앙시앵 레짐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대귀족이면서도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기묘한 전략을 유지했다. 아무튼 정통 부르봉 왕가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는 전략적인 입장도 있었던 듯.

조상의 생각처럼 앙시앵 레짐 문제와 프랑스 혁명의 혼란기에 대한 루이 필리프의 대안은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프랑스에 이식하자는 것이었다. 이 '오를레앙 공에 의한 입헌군주정'은 프랑스 혁명의 혼란기 시기 하나의 대안으로서 언제나 존재했다.

특히 복고 왕정 시대부터 오를레앙 가문 지지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자유주의자였다. 사실 부르봉 복고 왕정의 첫 국왕인 루이 18세의 경우 입헌파를 밀어주고 왕당파를 내각에서 배제하는 등 꽤 중도적인 면모를 보였으나,[19] 다음 왕인 샤를 10세는 구체제에 가까운 면모를 보였기에 여러모로 자유주의와 맞지 않았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에게 보나파르트주의는 "민주주의를 내거는 권위주의"에 지나지 않다고 여겨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20] 그러므로 오를레앙주의자들의 생각은 오를레앙 공이 이상적인 정부를 만들어, 질서를 지키는 한편 관용으로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주는 중도적인 대안이었다.

오를레앙주의자들은 입헌군주제를 선호하였으나 그 반면에 전면적인 민주주의의 도입은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는 골수 왕당파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부르봉 왕조에 대한 지지는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정부는 민주주의를 내걸면서도 왕당파의 폭발을 막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억제하는 모순을 지속적으로 안고 있었다. 또한 소위 '프랑스의 영광'을 건설한 나폴레옹 신화에 기초한 나폴레옹 지지자, 보나파르트주의 역시 폭발력을 가지고 있어 정부의 골치를 키웠다. 실제로 후일 보나파르트주의를 내세운 나폴레옹 1세의 조카 나폴레옹 3세는 70%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21]

결론적으로 오를레앙주의자들은 이 때문에 입헌군주제를 선호하는 중산층에 해당하는 '법정 인구(pays legal)' 25만명(실제 유권자는 17만명 정도)을 유권자로 하여 의회를 구성하고 국정에 적용했다. 이들은 중산층의 대표자인 의회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 입헌군주제를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인구에서 빠진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은 정부가 특권 계급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옛날의 왕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오를레앙주의자들과 루이 필리프의 정치는 프랑스 혁명기의 여러 이념들 가운데서 나름대로 ' 중도주의'의 위치에 있었다. 부르봉 왕조의 복고주의보다는 한 발자국 나간 것은 분명하지만,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왕이기는 했지만, 루이 필리프는 부르봉 왕조 골수 왕당파에게는 찬탈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아 인정을 받지 못했고 외국의 왕족과 귀족들에게도 그와 비슷하게 보여져 '폭동왕'이라고 폄하당했다. 특히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일한 후손으로 프랑스의 최고 적통이었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루이 필리프를 매우 증오해서 망명 시절에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게다가 입헌왕정을 지지한 중도적 자유주의자가 아닌, 완전한 공화정을 추구하는 진성 공화파, 프랑스 제1제국을 지지한 보나파르트파는 각기 자기네 꿍꿍이대로 왕정을 뒤엎을 음모를 꾸몄다.

4.2. 인간적인 면모

치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는 별도로, 루이필리프 본인은 선량하고 너그러운 문자 그대로의 신사였다고 한다. 루이필리프의 선량함에 대한 일화.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정치가인 빅토르 위고도 루이필리프를 높게 평가했으며 위고는 1848년 혁명 당시에도 루이필리프의 손자를 옹립할 것을 주장했다.사실 '왕으로 모시자'고 지지할 정도의 파벌이 있을 정도이니 그 나름대로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은 당연하긴 하다.

요약하면 노회하고 철두철미한 군주보단 인간성 좋은 군주이고 입헌 군주제의 군주로선 아주 적합한 인물이라고 볼수 있다.

그의 두상이 서양배와 닮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의 문장도 배라고 조롱했지만 루이필리프는 대범하게 웃어넘겼다고 한다. 얼마나 대범한지 서양배 머리의 왕을 그린 만평이 나돌아도 멀쩡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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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만평. 배머리로 데포르메되는 과정이 적나라하다.

심지어 궁궐 벽에 를 그리면서 왕을 조롱하는 부랑아들을 보고도 대노하긴 커녕 아이들과 같이 배를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금화까지 쥐어주면서 "이 금화에도 배가 새겨져 있다"고 농담까지 해주었다.[22] 당장 동양 왕실에서 군주의 이름을 피휘 할 정도로 군주에 대한 모욕은 반역죄라고 할말 없읕 정도로 대역죄였는데 아이들 장난이라고 너그럽게 봐주고 같이 놀이에 참여하는 걸 봐도 보통 인품이 아닌 걸 알 수 있다.

그의 대인배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또다른 일화로 왕을 몰아내려던 1832년 6월 봉기가 처참하게 실패한 이후에 파리의 경찰청장 앙리 지스케는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으러 온 반역자들을 내놓지 않으면 재미없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는데, 루이 필리프는 "살려고 의사들을 찾아간 환자들을 의사 손으로 단두대에 보내는 그따위 비인도적인 처사가 어디 있느냐"며 반역자들을 보호해 주었다.

1835년, 코르시카 출신의 주세페 마리오 피에스키(Giuseppe Marco Fieschi)[23]라는 인물이 탕플 대로(Boulevard du Temple)에 파리 근위대 사열식에 참석한 루이 필리프 및 정부 각료들을 향해 총을 발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24][25] 이 사건으로 루이필리프 본인은 부상을 입었으며,[26] 그의 말 및 에두아르 모르티에 원수 등 총 17명의 고관이 살해당하고 22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27]

피에스키는 나폴레옹 시대 병사로 복무하였으며, 전역 이후 생활고로 각종 절도 행각을 버리다 10년을 복역한 이력이 있었다. 허나 석방 후에도 계속되는 감시와 생활고에 분노하여 이런 사건을 벌이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히 피에스키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루이필리프는 피에스키의 사정을 듣고 몹시 가슴 아파하며 "나 하나만 다쳤다면 사면을 해줬을 텐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또한 가족 부분에 있어서도 부르봉 왕조의 국왕들(루이 16세 제외)과는 다르게 사생활이 깨끗했고 자식들에게도 다정했던 아버지이기도 했다. 애인이나 총희를 둔 바도 없으며, 항상 자신의 아내인 마리아 아말리아와 지냈다. 심지어는 이를 자랑하기 위해 부르주아들을 초대해 자신의 침실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5. 기타

파일:루이 필리프 왕의 사진.jpg
1842년 6~7월에 촬영된 루이 필리프의 사진

의외의 면에서 주목할만한 기록이 있는데,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진 자료를 남긴 국가원수다.[28] 참고자료 또한 이후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 3세를 제외하면 역대 프랑스의 국왕 중 유일하게 사진을 찍은 국왕이다.

6. 가족 관계

6.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루이필리프 1세
(Roi Louis-Philippe Ier)
<colbgcolor=#fff3e4,#331c00>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
(Louis-Philippe d’Orléans, duc d'Orléans)
<colbgcolor=#ffffe4,#323300>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1세
(Louis-Philippe d’Orléans, duc d'Orléans)
오를레앙 공작 루이[29]
(Louis d’Orléans, duc d'Orléans)
바덴바덴의 아우구스테
(Auguste von Baden-Baden)
루이즈 앙리에트 드 부르봉
(Louise-Henriette de Bourbon-Conti)
콩티 공 루이 아르망 2세
(Louis-Armand, Prince de Conti)
루이즈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30]
(Louise Élisabeth de Bourbon)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Louise-Marie-Adélaïde de Bourbon)
팡티에브르 공작 루이 장 마리 드 부르봉
(Louis-Jean-Marie de Bourbon, duc de Penthièvre)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31]
(Louis-Alexandre de Bourbon, comte de Toulouse)
마리 빅투아르 드 노아유
(Marie-Victoire de Noailles)
마리아 테레사 펠리치타 데스테
(Maria Teresa Felicitas d'Este)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3세 데스테
(Francesco III d'Este, duca di Modena e Reggio)
샤를로트 아글레 도를레앙
(Charlotte-Aglaé d'Orléans)

6.2. 아내 마리아 아말리아

아내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아내 마리아 아말리아 양시칠리아 국왕 페르디난도 1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의 5녀다. 루이 필리프와는 시칠리아에서 망명 중일 때 만나 사랑에 빠져 3년 뒤 결혼하였다. 당대의 왕족들 중 흔치 않은 연애결혼이었다. 바로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의 딸로 때문에 카롤리나는 처음엔 딸과 루이 필리프의 결혼을 매우 싫어했지만 결국 허락했다.

남편이 왕위에 오르는 걸 반대하여 "모두가 우리를 찬탈자로 부를 것이고 왕좌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결국 사실이 되었다. 프랑스의 왕비가 된 후에도 훗날의 트러블을 피하기 위해 정계와 얽히기를 꺼렸다. 개인적으로는 온화하고 관대한 성격으로 화려했던 베르사유와 달리 시민 계급처럼 가정적이고 검소한 궁정을 꾸렸다. 이렇듯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생활 덕에 루이 필리프와 가족들은 퇴위 후에도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평온한 말년을 누릴 수 있었다.

6.3. 자녀

마리아 아말리아와의 사이에서 6남 4녀를 낳았으며 가문의 후계자는 장손 필리프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필리프
(Ferdinand-Philippe, Duc d'Orléans)
1810년 9월 3일 1842년 7월 13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헬레네 여공작[32]
슬하 2남[33]
1녀 벨기에의 왕비 루이즈
(Louise, reine des Belges)
1812년 4월 3일 1850년 10월 11일 레오폴드 1세
슬하 3남 1녀[34]
2녀 뷔르템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작 부인 마리
(Marie, Herzogin Alexander von Württemberg)
1813년 4월 12일 1839년 1월 6일 뷔르템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작[35]
슬하 1남[36]
2남 느무르 공작 루이
(Louis, duc de Nemours)
1814년 10월 25일 1896년 6월 26일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빅토리아 공녀[37]
슬하 2남 2녀[38]
3녀 프랑수아즈 공주
(Françoise d'Orléans)
1816년 3월 26일 1818년 5월 20일
4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아우구스트 공자비 클레멘티네
(Clémentine, Prinzessin August von Saxe-Coburg und Gotha)
1817년 3월 6일 1907년 2월 16일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아우구스트 공자[39]
슬하 3남 2녀[40]
3남 주앵빌 공 프랑수아[41]
(François, prince de Joinville)
1818년 8월 14일 1900년 6월 16일 브라질의 프란치스카[42]
슬하 1남 2녀[43]
4남 팡티에브르 공작 샤를[44]
(Charles, duc de Penthièvre)
1820년 1월 1일 1828년 7월 25일
5남 오말 공작 앙리[45]
(Henri, duc d'Aumale)
1822년 1월 16일 1897년 5월 7일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46][47]
슬하 7남 1녀[48]
6남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49]
(Antoine, duc de Montpensier)
1824년 7월 31일 1890년 2월 4일 스페인의 루이사 페르난다
슬하 4남 5녀[50][51]

6.4. 사후 계보 및 후손들

가문 수장이 아니었던 인물은 괄호로 표기.
왕세자였던 장남 페르디낭 필리프는 루이 필리프보다 먼저 사망하여 장손인 필리프가 계승하였고, 이후 한 차례 남계 직계가 끊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 오를레앙 가문의 계보는 루이필리프의 차손인 샤르트르 공작 로베르의 자손으로 이어지고 있다. 왕가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유럽 여러 왕가와 통혼하였기 때문에 후손 자체는 상당히 번성한 편이다. 현존하는 유럽 왕실 중 스페인 왕가, 벨기에 왕가, 룩셈부르크 대공가가 모두 루이필리프의 후손들이다.[62]

다른 남계후손으로는 차남 루이 왕자의 자손이 현재 브라질 제국 구황가의 종가인 오를레앙-브라간사 가문으로 이어지고 있으며[63] 6남 앙투안 왕자의 남계후손인 오를레앙-갈리아 가문 역시 현존한다. 3남 프랑수아 왕자의 가계는 외아들이 독신이었기에 적손으로는 여계로만 이어지고 있으며,[64] 요절한 3녀를 제외한 딸들의 후손은 모두 현존한다.

보면 알겠지만 루이 필리프의 부계 자손끼리 혼인한 게 많다. 현재 오를레앙 가문의 직계는 루이 필리프의 장남인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필리프의 차남인 샤르트르 공작 로베르의 가계로 이어지고 있다.

7. 대중매체에서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2] 마지막 군주는 황제인 나폴레옹 3세이다. [3] 부르봉 왕조의 방계로 루이필리프의 1대 왕조 [4] 루이 16세와 그 형제들, 에스파냐 국왕 페르난도 7세,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1세,왕비인 마리아 아말리아(프란체스코 1세의 여동생)와도 항렬이 같다. [5] 참고로 왕비 마리아 아말리아는 루이 14세의 남계 적손이다. 루이 14세의 친손자 펠리페 5세의 손자인 페르디난도 1세의 딸이기 때문. [6] 사실 족보상으로는 루이 14세 손자이자 스페인 펠리페 5세 후손들인 보르본 왕조가 가장 유력했지만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 자격을 포기했기 때문에 해당사항에 없었다. 오를레앙 가문 다음이 부르봉-콩데 가문이지만 이 가문은 나폴레옹이 이 집안의 마지막 상속자 앙기엥 공을 죽이면서 대가 끊어졌다. [7] 참고로 루이 알렉상드르의 아내인 랑발 공비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시아버지와 시누이 루이즈의 도움으로 궁궐에서 지냈고 이 인연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장이 된다. [8] 필리프 2세는 루이 13세의 손자이며, 루이 15세는 루이 13세의 현손(4대손)이기 때문이다. [9] 순수하게 평민들을 위해서인 것은 아니고,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자신이 평등주의자라는 명목으로 평민계급의 지지를 받아 프랑스 국왕이 되기 위해서였다. [10] 왕위에 눈이 멀어 친척까지 죽이려드는 이 행태에 루이 16세 부부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찔렀던 프랑스 민중조차 충격을 금치 못했고 루이 16세의 딸 마리 테레즈도 오를레앙 가문을 완전히 증오하게 되었다. [11] 샹보르 백작 앙리가 사망하면서 부르봉 직계가 단절된 이후 살리카법 원칙상으로는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 보르본 왕조)의 수장이 프랑스 왕실의 수장이 되어야 하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르면 펠리페 5세의 후손들(보르본 왕조 구성원)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으므로 오를레앙 가문이 프랑스 왕실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소위 법통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오를레앙 가문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보르본 왕조의 일원을 부르봉 왕조 및 카페 왕조 전체의 수장으로 추대했다. 이로 인해 현재는 보르본 왕조의 일원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이 루이 20세로 자칭하며, 자신이 프랑스 왕실의 수장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반대로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여담으로 루이스 알폰소는 펠리페 6세와는 육촌이며 그의 외증조부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이다. 이후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다면 스페인 작위인 제3대 프랑코 공작이 될 예정이다. [12] 카를로스 3세의 3남으로 뒷날의 양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이자, 부르봉양시칠리아 가문의 시조인 페르디난도 1세의 6녀이다. 루이 13세 기준으로 하면 루이 필리프와 12촌 간이다. [13] 독일어식으로는 마리아 안토니아. [14] 루이필리프의 아버지 평등한 필리프는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왕실 가족의 처형에 일조했다. [15] '프랑스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루이필리프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루이 16세 역시 1789년부터 퇴위하기 직전에는 '프랑스인의 왕'이 공식 칭호였다. 이후 루이 18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이라는 칭호가 부활한 것이다. 여담으로 나폴레옹 1세와 3세의 칭호는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emperor of the French)였다. [16] 자유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당으로, 오를레앙파 내 좌파에 속했다. 오를레앙파 내 우익은 다음 선거인 1834년 선거에서 승리한 저항당. [17]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18] 퇴위 직전, 프랑스의 신문왕 에밀 드 지라르댕은 루이필리프 1세에게 "장손(필리프)에게 양위하고 며느리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헬레네를 섭정으로 세우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19] 하원은 소선거구제였기에 당연히 왕당파로 도배되었으나, 상원은 왕이 임명하는 세습직임에도 불구하고 옛 귀족보다는 나폴레옹의 옛 관료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즉, 루이 18세는 의도적으로 중도를 걸었던 것이다. 심지어 열받은 왕당파 쪽에서 왕은 의회 다수파에게 내각 구성을 위임해야 한다며 의회주권론을 주장하고, 이에 당황한 입헌파는 왕은 헌장에 위배되지 않는 한 마음대로 내각을 구성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20] 물론 백일천하 시기 나폴레옹의 지켜지지 않은 약속인 '자유 제정' 때문에 보나파르트주의도 어느 정도 인기는 있었다. [21] 물론 당시 듣보잡 수준이던 나폴레옹 3세가 이렇게 몰표를 받은건, 당시 부르주아 정부에 반감이 많던 노동자 세력+정부의 지지층이었으나 나폴레옹이 내세운 프랑스의 영광같은 이른바 국뽕 전략에도 환호한 시골 농민들의 지지가 합쳐져서였다. 그리고 알다시피 나폴레옹 3세는 대통령이 되어 얼마 안가 친위 쿠데타를 통해 제정을 선포한다. 프랑스의 진정한 공화국 체제는 이 나폴레옹 3세의 제정 체제가 무너진 이후 시작된다. [22] 당시 프랑스 동전엔 여느 유럽 군주국들이 그렇듯 재위 중인 군주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다. [23] 이탈리아어로 읽으면 "피에스키"가 되고, 코르시카어로 읽으면 "피에시"(/fiɛʃi/)가 된다. [24] 당시 루이필리프와 그의 아들 셋, 여러 하인들과 관료들이 참석한 사열식이 진행되고 있었고, 피에스키는 대로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일행이 탕플 대로를 지나가는 순간 피에스키는 아래를 향해 총을 발사하였다. [25] 25개의 총신을 하나로 묶어 한 번에 25발을 발사할 수 있는 상당히 독특한 총이었다. 볼리 건의 일종이긴 한데, 우리가 흔히 아는 대포 모양의 볼리 건과는 다르게 생겼다. 혹자는 이 총의 외양을 설명하면서 큰 마림바를 예로 들 정도. 영문 위키피디아에 이 총을 다룬 문서까지 있다. "지옥의 기관총"(machine infernale)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어 있으며, 현재는 프랑스의 국립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건 당시 25개의 총신 중 넷은 발사 당시 터져버렸고, 넷은 불발되었고, 하나는 장전되지 않았다고 하니 전부 제대로 발사되었다면 사건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여담으로 피에스키 또한 사건 직후 총의 반동으로 머리 등을 심하게 다쳤고, 결국 손가락 두 개를 절단해야 했다. [26] 총알이 이마를 스치는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27] 부상자 중 최소 넷은 팔다리를 절단해야 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 이 때문에 영문 위키피디아에 피에스키는 "대량살인자"(mass murderer)로 기재되어 있다. [28] 미국의 전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는 위의 사진이 찍힌지 1년 뒤인 1843년에 첫 사진을 남겼고,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 1844년에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29]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아들로 어머니 프랑수아즈 마리 드 부르봉이 루이 14세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사생아딸이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30] 어머니 루이즈 프랑수아즈가 루이 14세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사생아이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31] 루이 14세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사생아다. [32] 초대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의 손녀이자, 2대 대공 파울 프리드리히의 이복여동생이다. [33] 파리 백작 필리프, 샤르트르 공작 로베르. [34] 레오폴드 2세, 멕시코의 황후 카를로타 등. [35]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의 손자. '뷔르템베르크 공작'은 뷔르템베르크 왕국 초대 국왕인 프리드리히 1세의 직계 후손을 제외한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방계 왕족에게 주어지는 작위이다. 조지 5세의 왕비 테크의 메리의 부친인 프란츠 폰 테크는 이 인물의 5촌 조카이다. 마리의 형부인 레오폴드 1세의 조카이기도 하며(누나 안토이네테의 아들), 빅토리아 여왕의 이종사촌이자 앨버트 공의 고종사촌이다. 또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외사촌이기도 하다. [36]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필리프(1838~1917), 뷔르템베르크의 마지막 왕 빌헬름 2세의 사후 뷔르템베르크 왕가 수장 자리를 계승한 알브레히트가 이 필리프의 장남이다. 현재는 알브레히트의 현손인 빌헬름이 뷔르템베르크 가문 수장을 맡고 있다. [37] 자형 레오폴드 1세의 조카이자 초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동생 페르디난트의 장녀이다. 빅토리아 여왕 앨버트 공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38] 장남 가스통은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장녀 이자베우와 결혼하여 오를레앙-브라간사 가문을 개창했다. [39] 둘째 올케 빅토리아의 작은오빠이자 형부 레오폴드 1세의 조카이다. 앨버트 공의 사촌형이다. [40] 페르디난트 1세 [41] 프랑스 해군에 투신해 해군 대장까지 진급한 제독으로, 아버지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후 37년간 1886년까지 복무했다. 미합중국 해군 사관학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42]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의 4녀. [43] 그 중 장녀 프랑수아즈는 프랑수아의 맏형 페르디낭 필리프의 차남 로베르의 부인이자,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사후 오를레앙 가문 수장이 되는 기즈 공작 장의 어머니이다. [44] 부르봉 왕조의 왕위요구자 샹보르 백작 앙리의 15촌 조카이자 동갑내기다. 이쯤되면 그냥 남남이다. 참고로 모계로 보면 샤를의 어머니인 마리아 아말리아 샹보르 백작 앙리의 어머니인 마리 카롤린의 고모니 5촌간이다. [45] 콩데 공작 루이 앙리 드 부르봉(망명자 군대를 만든 루이 조제프 드 콩데의 아들)이 죽은 후 콩데가의 상속자로 지명된다. [46] 양시칠리아 왕국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손녀. [47] 여기에는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부르봉-오를레앙 왕조가 사이가 매우 안좋은 부르봉 왕조 본가의 수장인 샹보르 백작 앙리가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와 결혼하려고 했으나, 오를레앙 왕정이 혼담을 가로채 마리아 카롤리나를 오말 공작 앙리와 결혼시켰다. 그 업보인지는 몰라도 앙리와 마리아 카롤리나는 슬하에 7남 1녀를 낳았지만 전부 사산되거나 요절해서 오말 공작 앙리의 가계는 단절되었다. [48] 루이필리프의 자녀 중 가장 아들이 많았지만 전부 사산되거나 요절해서 실제 후손은 없으며, 당연히 콩데 가문도 앙리 이후로 단절된다. [49] 루이사 페르난다와 결혼하여 오를레앙-갈리에라 가문을 개창했다. [50] 루이필리프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자녀가 많으며, 장녀 마리아 이사벨은 앙투안의 맏형인 페르디낭 필리프의 장남인 파리 백작 필리프와 결혼했다. [51] 참고로 앙투안과 루이사는 모계로는 5촌(앙투안의 외조부 페르디난도 1세가 루이사의 외조부 프란체스코 1세의 아버지)이며 부계로는 둘 다 루이 13세의 7대손이라 14촌 남매 간이다. [52] 부인은 막내 숙부인 앙투안 왕자와 스페인의 루이사 페르난다의 장녀로 친사촌인 마리 이자벨이었고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다. [53] 레오폴트 2세의 7남 요제프 대공의 손녀다. [54] 부인은 둘째 숙부인 프랑수아 왕자의 장녀 프랑수아즈였다. 3남 2녀를 두었다. 장녀 마리는 크리스티안 9세의 3남 발데마르 왕자의 부인이자, 미하이 1세의 아내인 안의 외할머니이다. [55] 큰형은 요절했고, 작은형은 요절하진 않았지만 독신으로 먼저 사망하여 3남인 장이 계승하였다. [56] 파리 백작 필리프의 사위이기도 하다. 파리 백작 필리프의 3녀이자 자신의 사촌인 이자벨과 결혼했기 때문. [57] 후계자 앙리를 비롯한 1남 3녀를 두었다. 차녀 프랑수아즈는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막내아들 크리스토폴로스 왕자와 결혼했고 3녀 안은 3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와 결혼했다. [58] 이 점으로 보아 오를레앙 가문은 샹보르 백작 앙리까지는 적통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샹보르 백작 앙리 이후의 스페인계 보르본 가문은 당연히 인정하지 않지만. [59] 부인은 브라질의 이자베우 황태녀의 손녀인 이자벨로, 루이필리프의 차남 루이 왕자의 친증손녀이기도 하다. (구 포르투갈 왕가인 브라간사 왕가의 현 수장 두아르트 피우의 이모이기도 하다) 5남 6녀를 두었으며, 3녀 안은 부르봉양시칠리아 왕가 칼라브리아 계통 수장인 카를로스(현 수장 페드로의 아버지)와 결혼했고, 4녀 디안은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수장인 카를(현 수장 빌헬름의 할아버지)과 결혼했다. 5녀 클로드는 5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고모 안의 시조카이다)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고 이혼했다. [60] 2번 결혼(이혼후 재혼), 첫번째 부인은 필리프 알브레히트의 4녀인 마리 테레제(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현 수장인 빌헬름의 할아버지이자 앙리의 매제인, 카를의 누나이기도 하다)로, 루이필리프의 차녀 마리의 고손녀이다. 당초 이혼 때문에 상속권을 박탈당했으나, 이혼 7년 후인 1991년에 아버지가 복권해주어 오를레앙 가문 수장 자리를 계승할 수 있었다. 자녀는 첫 부인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다. [61] 가스통(2009~), 앙투아네트(2012~), 루이즈마르게리트(2014~), 조제프(2016~), 자생트(2018~). [62] 스페인 왕가는 루이필리프의 장손 필리프의 4녀인 루이즈의 후손이고, 벨기에 왕가와 룩셈부르크 대공가는 루이필리프의 장녀 루이즈의 후손들이다. [63] 루이 왕자의 장남 가스통 왕자가 브라질의 이자베우 황태녀와 혼인한 것을 계기로 창설된 가문이다. [64] 루이필리프의 차손 샤르트르 공작 로베르의 후손들이 프랑수아의 여계후손들이다. 따라서 오를레앙 가문의 직계도 프랑수아의 여계후손이다. [65] 그런데 도무지 왕을 변호할 거리가 많지 않아서 온갖 구라를 섞었다. 펭귄이라서 키가 작아 발 받침대로 쓰려고 빌려갔을 뿐인 두꺼운 책들을 실은 왕이 모두 읽고 있다며 구라를 쳐서 바보 멍칭이인 왕을 지성인으로 둔갑시킨다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