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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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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시대
Viking Age
파일:Viking Map.png
파일:Dragon_boat_Vikings.jpg
바이킹들의 팽창 권역과 일반적인 바이킹의 이미지인 롱쉽(랑스킵)
793년 ~ 1066년
위치 스칸디나비아 반도, 브리튼 제도, 유럽 해안 일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동유럽, 러시아
정치 체제 부족 체제
수장 야를[1]
언어 고대 노르드어
문자 룬 문자
종교 고대 노르드 신화, 가톨릭(10세기 이후)
주요 사건 793년 린디스판 수도원 습격[2]
795년 아일랜드 수도원 약탈
808년 카롤루스 대제 데인 전쟁(~811년)
839년 스코틀랜드 포트리우 공략
849년 군도 왕국 건국
851년 애설울프의 아클레아 전투 승리
853년 올라프의 더블린 왕국 건국
860년 해스테인의 이탈리아 북부 루나 약탈
862년 류리크의 노브고로드 공국 건국
864년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죽음
865년 이교도 대군세의 잉글랜드 침공
871년 애설레드 1세의 애쉬다운 전투 승리
874년 아이슬란드 정착
875년 할프단 라그나르손의 요르비크 왕국 건국
878년 알프레드 대왕의 에딩턴 전투 승리
882년 올레그 키예프 루스 건국
884년 림버트의 노르디티 전투 승리
885년 외드 파리 공성전 승리(~886년)
911년 흐롤프( 롤로)의 루앙 백국[3] 건국
954년 요르비크 왕국 최종 멸망[4]
966년 리스본 공격
985년 그린란드 정착
988년 바실리오스 2세 바랑인 친위대 창설
1000년 빈란드 발견
1014년 브리안 보루마의 클론타프 전투 승리
1028년 크누트 대왕 북해 제국 확립
1030년 올라프 2세의 스티클스타드 전투 패배
1042년 북해 제국 붕괴
1066년 하랄 3세 하르드라다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패배
1079년 구드뢰드 크로반의 군도 왕국 정복[5]
1164년 군도 왕국의 남북 분열
1171년 더블린 왕국의 최종 멸망
1266년 노르웨이의 군도 지배권 포기. 군도 왕국의 멸망
종결 이후 중세
언어별 명칭
게르만조어 *Wīkingaz[6]
고대 노르드어 Víkingr[7]
덴마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8]
Viking
아이슬란드어
페로어
Víkingur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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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영어 Wīċing
핀란드어 Viikinki
라트비아어 Vikings
리투아니아어 Vikingai
에스토니아어 Viiking
독일어 Wikinger
라틴어 Viccingi
루마니아어 Vicingi
그리스어 Βίκινγκ
스페인어 Vikingo
네덜란드어 Vikingen
이탈리아어
시칠리아어
리구리아어
Vichinghi
러시아어
불가리아어
Викинги
우크라이나어 Вікінги
아랍어 فايكنج
일본어 バイキング, ヴァイキング
중국어 維京人(번체), 维京人(간체) }}}

1. 개요2. 어원3. 역사
3.1. 선사시대3.2. 청동기와 철기의 유입3.3. 바이킹 시대의 개막
3.3.1. 바이킹들의 등장 원인
3.4. 바이킹의 대침공
3.4.1. 브리튼 제도
3.4.1.1. 잉글랜드3.4.1.2. 스코틀랜드3.4.1.3. 아일랜드
3.4.2. 프랑크 왕국3.4.3. 남유럽3.4.4. 중동부 유럽3.4.5.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3.4.6. 북아메리카
3.5. 바이킹들의 쇠퇴3.6. 재평가
4. 정치5. 사회
5.1. 여성의 지위
6. 종교7. 문자8. 군사9. 바이킹식 장례10. 건축
10.1. 룬스톤
11. 복식12. 문학13. 스포츠14. 오락거리15. 식생활16. 무역17. 바이킹 함선
17.1. 랑스킵
17.1.1. 건조하는 방법17.1.2. 항해 방법
18. 유명한 바이킹들
18.1. 바이킹 혈통의 유명인
19. 바이킹에 속한 민족20. 기타21. 매체
21.1. 미디어의 바이킹들, 혹은 모티브로 한 것들
2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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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킹은 8세기 ~ 11세기 배를 타고 무역이나 약탈로 살아가던 북게르만계 노르드인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유틀란드 반도에 한정되어 살고 있었던 노르드인들은 8세기 말부터 바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발트해 북해는 물론이고 지중해 흑해 심지어 카스피해[9] 등 바닷가라면 유럽 어디든지 배를 타고 나아갔으며, 브리튼 제도,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등 지중해권과 유럽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전성기 시절에는 잉글랜드 7왕국들을 죄다 멸망시킬 뻔 했으며, 서프랑크 왕국의 수도 파리를 함락하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바이킹을 신의 진노라고 불렀으며 자연재해와 동일한 취급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바이킹들도 시대가 변화하면서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유럽 각국에서 더이상 치고 빠지는 전술이 통하지 않을 만큼 해안 방비가 강화되었고, 말을 타는 기사들의 등장으로 보병 위주의 바이킹들의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노르망디 공국처럼 아예 현지에 정착해 완벽히 동화되어버린 바이킹들이 되려 제 땅을 지키기 위해 다른 바이킹들을 쫒아내게 되면서 바이킹들은 더욱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

결정적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기독교화와 중앙집권화가 치명타를 입혔다. 같은 그리스도교도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걸 금지한 교리 때문에 바이킹들이 가장 큰 이익을 봤던 노예무역이 더이상 불가능해졌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 내에도 왕국들이 세워지면서 자국민들이 함부로 타국을 약탈함을 엄격히 금지시킨 것이다.[10] 결국 1066년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노르웨이계 바이킹 군대가 패배하면서 바이킹들은 더이상 타국을 침략할 여력을 잃어버렸고, 학계에선 이를 '바이킹 시대'의 종말로 본다.

야만스러운 해적으로서 바이킹의 인상이 깊게 남아서 '거대한 도끼[11]를 들고 뿔투구를 쓴 잔인하고 마초적인 바바리안'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탁월한 항해사이자 탐험가, 상인이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편견과 달리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다. 자유민들은 매년 의회(alþingi, 알팅기)를 소집하여 법을 제정하거나 분쟁을 해결했다. 이러한 의회 문화는 영국에도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아이슬란드의 의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이기도 하다.[12]

그들의 항해술이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는 물론이고 캐나다 동부와 뉴펀들랜드까지 진출하여 빈란드라 이름붙이고 식민지인 란세오메도스(L'Anse aux Meadows)를 건설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500년 일찍 북아메리카에 발을 딛은 업적이었다. 물론 원주민들과의 마찰과[13] 기후의 변화로 결국 그린란드로 돌아가야 했으나 그 모험성과 발견은 분명 무시 못할 성취였다.[14] 바이킹들은 북아메리카 외에도 키예프, 콘스탄티노폴리스, 심지어 저멀리 바그다드까지 가서 교역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동유럽과 러시아로 진출했다. 이때 바이킹 류리크와 그 후계자들은 현대 러시아의 기원이 되는 루스 카간국을 세우기도 했다. 어찌보면 러시아의 기원에 바이킹이 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의외로 현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민족이기도 하다. 북유럽 신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집트 신화와 함께 세계 3대 신화로 꼽히고 북유럽 신화를 기반으로 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 니벨룽의 반지>는 그 비극성과 장엄함으로 전세계에 영감을 뿌렸다. 조금 더 현대로 오면 《 반지의 제왕》의 작가 J. R. R. 톨킨은 북유럽 신화에서 상당 요소를 차용했고, 판타지물에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오크, 드워프, 엘프도 모두 북유럽에서 기원했다. 《 마블 코믹스》의 작가 스탠 리 토르라는, 대중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히어로를 만들어냈으며 바이킹들은 게임, 미디어, 영화 등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이 덕분에 북유럽과 바이킹들의 문화적 영향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2.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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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하르당에르피오르(Hardangerfjord)
'viking'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들이 존재한다. 한 가설은 라틴어 마을을 의미하는 'vicus'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다른 가설은 개울, 입구, 작은 만(灣)을 의미하는 단어 'vik'에서 왔다는 가설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신빙성은 떨어진다.

노르웨이의 지명 'vikin'에서 따왔을 거라는 말도 있다. vikin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해서 'viking'이라고 불렀다는 설인데, 이미 vikin 지방의 사람들은 vikverir라고 따로 부르기에 별다른 설득력은 없다.

21세기 들어서 가장 주목받는 이론은 고대 노르드어 vika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이 어근은 원래 '교대로 노를 젓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어근 weik나 wik에서 유래했다. 게르만조어 wikan이 '물러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바이킹들은 장거리 항해를 하면서 어마어마하게 노를 저으며 다녔고, 절대 다수는 근력이 더 강한 남자였다. 선원들은 2교대로 돌아가면서 노를 저었는데, 젓던 사람이 휴식을 취하던 사람에게 노를 넘겨줄 때 옆으로 피해서 거리를 두고 돌아나갔다. 이 과정에서 'vika'라는 어근이 사용되었고, 이게 확장되면서 'viking'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는 학설이다. 이 이론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이킹'이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해적이나 약탈자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스칸디나비아 선원들을 모두 일컫는 용어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바이킹이라는 단어가 잔인한 전사들을 일컫는 대명사가 된 것은 후대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져서 그렇다.

이후 중근세 시절까지만 해도 '바이킹'이라고 하면 야만적이고 피에 미친 악귀들을 묘사하는 부정적인 단어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낭만주의와 영웅주의가 득세하던 18세기, 바이킹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재인식되기 시작하면서 바이킹의 이미지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바이킹에게 '고귀한 야만인' 혹은 '용맹한 전사'의 이미지를 부여했고 점차 현대적인 바이킹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졌다.[15] 그 덕분에 '바이킹 건축', '바이킹 예술', '바이킹 문화', '바이킹 시대'처럼 바이킹이 붙은 단어들이 우후죽순 만들어지기도 했다.

3. 역사

파일:I46_XT2_TKLS5423-IridientEdit-2_Ersfjordbotn-Kvaløya-Troms.png
오로라가 빛나는 노르웨이의 에르스피오르(Ersfjord)

3.1. 선사시대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워낙에 위도가 높고 추운 지방이라 사실상 북극이나 다를 바가 없어 인류의 활동은 오랫동안 중부 유럽의 사냥꾼들이 간간이 사냥오는 수준에 그쳤다. 영구적인 부락민들이 스칸디나비아에 완전히 정착한 때는 기원전 1만 2천 년 무렵이었고, 그마저도 빙하기가 기원전 1만 1700년쯤에 간신히 끝날 만큼 추운 날씨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농경 부족이 아니라 수렵채집 부족이었다.

그러나 빙하기가 확실히 물러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얼음벌판이 광대한 초원으로 변함에 따라 풀을 먹는 순록이 유입되었고, 자작나무와 일부 마가목만 있었던 동토에서 서서히 타이가 숲들이 자라나면서 기원전 1만 1400년 무렵 스칸디나비아 구석기 문화의 시작인 브롬 문화권이 생겨났다. 다만 스칸디나비아 일대의 기후가 아직 인류가 견딜 수 있는 한계선에 가까웠기 때문에 기후가 조금만 오락가락해도 수많은 문화권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기원전 1만 500년쯤에 기후 재냉각이 일어나면서 전통적인 순록 유목에 의존하는 아렌스부르크 문화권이 일어났다. 약 천 년 후에 잠시 온난한 기후가 나타나자 아렌스부르크 문화는 스칸디나비아 북부까지 뻗어나갔다. 다만 기원전 9천 년부터는 다시 아한대 기후가 몰아닥치며 인류의 정착이 약간 늦춰졌다고 한다.

약 2천 년에 걸친 아한대 기후가 끝나고 기원전 7천 년 무렵에는 대서양 기후로 바뀌면서 훨씬 온난해졌다. 덴마크와 스웨덴 남부의 마글레모제 문화, 노르웨이와 스웨덴 서부 해안가의 포스나-헨스바카 문화 같은 중석기 시대 문화들이 번성했다. 아직도 겨울은 너무 매서웠기 때문에 겨울에는 덴마크 등 남부로 이동했다가 여름이 되면 그때서야 다시 위로 북상하는 철새 느낌의 이동 생활을 했다. 기원전 6천 년쯤에는 훨씬 기후가 따뜻하고 습해지며 바다표범, 순록, 무어, 사슴 등을 사냥해 먹고 살 수 있었고, 사람들은 광활한 활엽수림에서 채집을 하기도 했다.

사람이 살만한 땅이 되자 콩게모세 문화권이 등장했다. 주로 순록이나 사슴, 유럽들소 같은 거대 동물들을 사냥하며 먹고 살았고 얕은 바다에서 낚시를 하기도 했다. 콩게모세 문화권의 일부는 포스나-헨스바카 문화권과 합쳐지면서 리훌트 문화권을 형성하기도 했다. 기원전 6천 년대 말 경에는 해수면 상승과 기후 온난화의 영향으로 콩게모세 문화권이 에르테볼레 문화권으로 대체되었다. 에르테볼레 문화권은 남쪽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고, 농경을 처음으로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신석기 문화권의 시대를 알렸다. 기원전 4천년쯤 들어서는 스칸디나비아에서도 신석기 시대가 개막하면서, 푼넬비커 문화[16]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3.2. 청동기와 철기의 유입

기원전 4천 년에는 중부 유럽의 깔때기-항아리 문화권이 스칸디나비아로 유입되면서 에르테볼레 문화 및 푼넬비커 문화와 합쳐졌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중부 유럽의 농경 문화를 배워와 농사를 지었다. 점차 조그마한 마을과 촌락들이 세워지면서 전형적인 신석기 시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후 기원전 2천 년 경에는 마침내 청동기가 스칸디나비아로 전래되었다. 북유럽인들은 호박 같은 보석들을 팔아서 미케네 문명, 중부 유럽 등지에서 청동기를 사왔다. 다만 자체적으로 청동기를 제조하는 기술은 무려 200년이 지난 기원전 1750년이 되어서야 겨우 배워왔다고 한다. 이 시기를 북유럽 청동기 시대라고 부르며 게르만족의 기원으로 본다.[17]

1500년 동안 지속된 북유럽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500년 말에 종결되었다. 모종의 이유로 북유럽과 지중해 문명권 간의 교역 네트워크가 끊어졌고, 이 때문에 청동기가 더 이상 유입되지 않았다. 금속에 환장하던 북유럽인들에게 청동기를 더 이상 들여올 수 없음은 치명적인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자구책을 찾아내야만 했는데, 이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었다. 철은 스칸디나비아에 풍부하게 널려 있었다. 풍부한 자원에 중부 유럽의 켈트족에게 전수받은 철기 제조법이 합쳐지면서 북유럽 철기 시대가 개막했다. 다만 이 시기의 스칸디나비아는 아직 로마 제국을 포함한 지중해권과는 단절되어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와 로마 제국 둘 다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문화적으로도 별 접점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파일:Germanic_tribes_(750BC-1AD).png
파일:Genseric_sacking_rome_456.jpg
게르만족의 남하[18] 로마를 약탈하는 게르만족
철기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서서히 남하했다. 기원전 750년 이전까지만 해도 덴마크 스웨덴 일대에 머물렀다면 기원전 500년에는 독일 북부로, 기원전 250년에는 독일 중부와 네덜란드까지, 기원전 1년에는 로마 제국 국경 바로 위까지 접근했다. 그리스와 로마 같은 지중해권 문명들은 이들을 ' 게르만족'이라고 불렀고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싸움에 능했다고 기록에 남겼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로마 제국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1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게르만인들이 마침내 로마 제국 국경 바로 북쪽까지 남하했기에 그때서야 교류가 시작된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게르만인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지만[19] 스칸디나비아와 게르만족들은 선진적인 로마의 문물들을 대거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문화가 크게 뒤바뀌었다. 동전, 그릇, 청동상, 유리컵, 에나멜 버클, 무기 등 로마의 발달된 문화가 북유럽으로 쏟아져들어왔던 것이다. 이 시기를 로마 철기 시대라고 따로 부르며 북유럽이 처음으로 로마-지중해 문명권과 접촉한 시대로 본다.

초기에는 로마 제국과 교역하면서 근근히 물건들을 수입해오는 정도에 그쳤지만, 5세기에 들어 로마 제국이 본격적으로 쇠퇴하면서 북유럽인들이 로마 제국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수많은 게르만계 친척들이 제국을 침략해 막대한 금과 은을 약탈해오는 것을 보고 혹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친척들을 따라 점차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북부 국경을 넘나들며 엄청난 부를 뜯어왔고, 결과적으로 상당량의 금이 북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이렇게 게르만인들이 로마 제국을 마음껏 약탈하던 시대를 게르만 철기 시대라고 부른다. 게르만 철기 시대는 800년대까지 약 400년 동안 이어졌다. 게르만 철기 시대 이후 서부 및 중부 유럽에서는 게르만계 왕국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게르만의 고향 스칸디나비아에 남아 있었던 북게르만족들은 본격적인 바이킹 시대를 열어젖혔다.

3.3. 바이킹 시대의 개막

3.3.1. 바이킹들의 등장 원인

스칸디나비아인들이 8세기부터 '바이킹'이라는 형태로 유럽 곳곳에서 약탈을 시작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통설은 인구와 경제, 이념과 정치 모두가 합쳐졌다고 본다.

첫 번째는 인구 문제였다. 8세기 이후, 유럽은 점진적인 농업 기술의 발달과 함께 Medieval Warm Period라고 불리는 따뜻한 기후에 힘입어 인구가 급증했다. 이는 북유럽도 예외는 아니어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인구는 유례없이 크게 늘어났지만, 한정된 자원을 넘어서까지 계속 늘어나는 인구를 제어할 수는 없었기에 농업만으로는 불어난 인구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점까지 도달했다.[20]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식량 공급원을 찾고자 하는 이들과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 조직적으로 전 유럽을 약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제 문제였다. 이슬람 세계와 유럽 세계의 동반 성장 덕분에 유럽은 갈수록 부유해졌고, 자연스레 무역량도 늘어났다. 무역로는 점차 북쪽으로 확장되었으며 8세기 경에는 심지어 브리튼 제도도 무시못할 수준의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북쪽에 자리해 아직 그만큼의 부를 획득하지 못했던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입장에서 서유럽의 재화는 그럴듯한 먹잇감이었고, 결국 이들의 부를 강제로 빼앗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바이킹들은 잉글랜드와 서유럽 해안가에서 해적질을 벌이며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저멀리 동유럽과 중동까지 가서 해적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 번째가 바로 정치 문제였다. 특히 잉글랜드는 아직까지도 중앙집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체계적인 방비체계가 없는 상황이었다. 돈은 그득그득 쌓아놨는데 정작 그걸 지킬 만한 무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바이킹들이 이를 가만 놔둘 리 없었고, 브리튼섬은 바이킹들의 최우선 공격 목표가 되었다. 반대로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본토에서는 점차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 왕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왕들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토착 유력자들을 억압했고, 정치싸움에서 밀려난 지방 유력자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 브리튼 제도나 서유럽을 약탈하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다. 당연히 바이킹 시대 이전에도 발트 해 유역에 해적은 존재했지만 바이킹만큼 대대적인 규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8세기에 들어 갑자기 바이킹들이 증가한 원인은 기술적인 진전의 이유도 있었다. 더 거대한 돛의 도입, 태킹, 24시간 항해와 같은 더 발달된 항해술이 도입되었고, 배도 이전보다 훨씬 정교해졌다.

이념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바로 그리스도교 전파였다. 카롤루스 대제의 주도로 그리스도교가 점차 스칸디나비아 일대에 전파되면서 기존의 노르드 신앙을 믿던 사람들과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 때문에 스칸디나비아 일대에 혼란이 발생했고, 제대로 통제가 되지 못하면서 바이킹이 날뛰었다는 설명이다.[21]

3.4. 바이킹의 대침공

3.4.1. 브리튼 제도

3.4.1.1.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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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793년, 올해 노섬브리아의 땅에 끔찍한 경고가 날아들었고, 사람들을 가장 비참하고 두렵게 했다. 이것은 공기를 꿰찢고 돌진하는 거대한 빛이요, 회오리바람, 궁창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불의 용이었다. 이 엄청난 징표 후에 기근이 뒤따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 1월 6일 전 이방인들의 가혹한 침입이 성스러운 섬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를 강간과 학살로 덮쳤다...


- 《앵글로색슨 연대기》
브리튼 섬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가까웠고, 아직 중앙집권화가 덜 이루어진 상태였기에 바이킹들이 노리는 제1순위 먹잇감이었다. 이때문에 바이킹 시대를 알리는 첫 번째 사건 역시 브리튼 섬에서 발생했는데, 바로 린디스판 수도원 약탈이었다. 793년 6월 8일 바이킹들은 함선 3척을 이끌고 노섬브리아 왕국의 린디스판 수도원을 침략했다. 아무 방비가 갖추어지지 않았던 수도원은 무력하게 약탈당했고, 바이킹들은 수도사들을 싸그리 죽여버리거나 바다에 던져 익사시킨 다음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 참혹한 사건 이후 바이킹들은 본격적으로 브리튼 제도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린디스판 수도원은 이후에도 약 80여 년 동안이나 약탈에 시달리다가 버티지 못하고 875년에 도망치듯이 린디스판에서 빠져나왔다.

이후 바이킹들은 끊임없이 브리튼 섬을 공략하면서 당시 브리튼 섬의 지배자였던 앵글로색슨인들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공격은 865년 동앵글리아에 상륙한 덴마크 바이킹(데인)들의 공격이었다. 당시 바이킹들은 851년 웨식스의 군주였던 애설울프와 싸운 아클레아 전투에서 패퇴당한 뒤 약 14년 동안 소강 상태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설적인 바이킹이었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노섬브리아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면서 이에 격분한 그의 아들들이 대규모로 브리튼 섬을 침공했던 것이다. 라그나르의 아들 '이바르 라그나르손'[22] 할프단 라그나르손이 이 바이킹들을 이끌었으며 브리튼인들은 이들을 이교도 대군세라고 불렀다. 이전의 바이킹들이 그냥 약탈만 하고 바로 떠난 것과는 달리 이들은 아예 노섬브리아 내륙까지 깊숙이 밀고들어와 노섬브리아의 수도였던 요크를 점령하고 아예 눌러앉아버렸다.

바이킹들의 대침공에 브리튼 토착 앵글로색슨계 왕국이었던 동앵글리아, 웨식스, 노섬브리아, 머시아 등은 바이킹들을 쫒아내기 위해 총력을 다했지만 별 효력은 없었다. 노섬브리아는 바이킹의 괴뢰국이 되어버렸고, 머시아는 수도인 노팅엄을 빼앗기자 간신히 배상금을 내고 되돌려받는 굴욕을 당했다. 동앵글리아 왕국 역시 바이킹과 체결했던 평화조약을 깨고 바이킹들을 급습하려고 했지만 되려 역기습을 당하여 아예 왕국이 멸망해버렸다.[23] 바이킹들이 승승장구하자 그들을 막을 만한 세력은 웨식스 왕국 밖에 없었는데, 웨식스 왕국은 다른 왕국들과는 다르게 기반이 탄탄했던 덕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웨식스의 애설레드 1세 871년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지원군이었던 여름의 대군세를 격파했고, 애설레드 1세가 승하하자 그 유명한 앨프레드 대왕이 즉위하면서 대바이킹 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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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 대군세의 진격 경로 에딩턴 전투의 상상화 앨프레드 대왕
애설레드 1세가 '여름의 대군세'를 격파했다고는 해도 바이킹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바이킹들은 878년 치픈햄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기던 앨프레드 대왕을 습격했고 웨식스 왕국마저 멸망 직전의 위기로 몰고 갔다. 당시 바이킹 군대를 이끌던 구트룸은 웨식스 왕국의 왕위요구자들을 꼬드겨 서로를 분열시켜뒀고, 이 덕분에 손쉽게 웨식스 왕국의 대부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구트룸은 이를 기반으로 웨식스 왕국의 괴뢰국화를 시도했지만, 수년간 전쟁을 치르며 웨식스인들은 바이킹을 원수로 여겼기 때문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웨식스를 점령한 바이킹들은 고립되었고, 간신히 도망쳤던 앨프레드 대왕은 군대를 규합해 반격에 나섰다. 결국 두 세력은 에딩턴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는데, 이 전투에서 앨프레드 대왕이 대승을 거두면서 웨식스에서 바이킹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이미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 머시아 등지는 여전히 바이킹 통치하에 있었는데, 886년에 체결된 평화조약으로 바이킹들의 영유권이 인정되면서 완전한 바이킹들의 땅이 되었다. 이렇게 브리튼 섬에 자리잡은 바이킹들의 세력을 데인로라고 부른다.[24]

앨프레드 대왕과 바이킹 사이의 평화조약으로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지만 서로 간에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다만 바이킹들의 데인로는 갈갈이 분열되어 있었던 반면, 웨식스 왕국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서 점차 웨식스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892년에는 또 다른 바이킹 세력들이 이끌고 온 함대 250여 척이, 나중에 또 80여 척이 추가로 도착하여 웨식스에 쳐들어왔다. 그러나 앨프레드 대왕의 격렬한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쫒겨나 기존 바이킹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동앵글리아, 노섬브리아,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일대로 후퇴했다. 앨프레드 대왕은 바이킹들을 극도로 싫어했고 이같은 기조는 대 에드워드 시대까지 이어졌다. 924년 대 에드워드가 승하하자 애설스탠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는데, 애설스탠은 바이킹의 마지막 본거지였던 요크를 탈환하면서[25] 바이킹 개척지들을 죄다 뿌리 뽑은 뒤, 앵글로색슨 전체를 아우르는 첫 임금으로 즉위했다. 그래서 이때부터를 웨식스 왕국이 아니라 잉글랜드 왕국으로 본다.

애설스탠이 승하하자 그의 뒤를 이어 에드워드 1세 이드리드가 연달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노섬브리아는 939년 애설스탠이 승하하자마자 바이킹계 아일랜드 왕국의 침공으로 바로 바이킹의 치하로 돌아가버렸고, 이러한 바이킹들의 통치는 94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944년에 다시 웨식스의 왕이 탈환했으나 노섬브리아는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를 왕으로 삼아 독립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후 에이리크 1세는 요크에서의 영향력을 잃었고, 다시 또다른 바이킹 세력인 더블린 왕국에 합병되었다. 하지만 노심브리아는 952년에 에이리크 1세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954년 이드리드가 에이리크 1세를 완전히 끝장내는 데 성공했고, 이로써 잉글랜드 최후의 바이킹 왕이 사라짐과 동시에 노섬브리아가 7왕국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잉글랜드 왕국에 복속되었다.

노섬브리아가 복속된 이후, 잉글랜드 왕국은 평화왕 에드거 1세를 거치면서 훨씬 안정화되었다. 하지만 순교왕 에드워드 애설레드 2세를 거치면서 잉글랜드 왕권이 다시 흔들리자 바이킹들은 잉글랜드에 눈독을 들였다. 980년에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재침공했고 이들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던 잉글랜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막대한 배상금을 퍼주어야만 했다. 당연히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결국 1002년 애설레드 2세가 잉글랜드 내부의 바이킹들에 대한 대학살을 벌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잉글랜드가 덴마크인들을 학살하자 격노한 스벤 트베스케그 왕이 잉글랜드로 쳐들어와 햄프샤이어 등 수많은 도시들을 불질러버렸다. 이후로도 잉글랜드의 굴욕은 계속되어 토르켈이 1009년에 연달아 잉글랜드를 공격했다. 1013년에 되돌아온 스벤 트베스케그는 아예 애설레드 2세를 쫒아내버리고 자신의 영토로 삼아버렸다. 스벤이 승하하자 그의 아들이 잉글랜드와 덴마크를 물려받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크누트 대왕이었다.[26] 이때의 잉글랜드와 덴마크 왕국을 북해 제국이라고 부르는데, 안타깝게도 크누트 대왕이 40세의 나이에 요절하면서 오래가진 못했고, 그의 아들이었던 하레크누드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그 역시 즉위한지 2년만인 1042년에 승하했다. 이후 덴마크의 왕위는 망누스 1세[27]에게, 잉글랜드의 왕위는 참회왕 에드워드에게 넘어가면서 바이킹의 잉글랜드 통치는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후 1066년에 노르웨이의 왕이었던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해럴드 2세의 동생인 토스티그의 사주를 받아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재진입을 시도했지만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해럴드 2세에게 패배해 전사하면서 무산되었고, 이 시도가 바이킹의 마지막 잉글랜드 진출 시도가 되었다.
3.4.1.2.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못지않게 바이킹들의 영향력이 컸던 곳이 있었으니 바로 브리튼 섬 북부 스코틀랜드 지방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달리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서 당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어려움이 좀 많은데, 가장 큰 이유는 스코틀랜드 지방의 수도원들을 바이킹들이 싸그리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아이오나 수도원은 849년 바이킹의 침략을 피해 철거되었고, 글을 읽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적 자원인 수도사들이 사라지자 역사를 기록할 사람들조차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바이킹들이 스코틀랜드에 끼친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선 대부분 노르웨이나 덴마크, 잉글랜드쪽의 사료에 의존해야만 하는 실정이다.

스코틀랜드인들 중에서도 게일인 픽트인들은 이미 바이킹 시대가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스칸디나비아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에서와는 달리 스코틀랜드는 개발도가 떨어졌고, 약탈할 것도 별로 없어서 침략 빈도도 적었다. 그렇다고 아예 침공을 안 하지는 않았다. 839년 대규모 노르웨이 함대가 테이강과 언강으로 들어와 픽트 왕국의 수도인 포트리우를 공략했고, 870년에는 클라이드 만의 요새를 공격해 막대한 물자를 탈취해갔다.

참고로 바이킹은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상당히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데, 일단 스코틀랜드의 핵심인 스코틀랜드 저지대가 원래는 노섬브리아 왕국의 영토로, 즉 앵글로색슨족의 땅이었다. 그러나 바이킹이 노섬브리아를 멸망시켜버리고, 앵글로색슨족을 학살하면서 이 영토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이는 훗날 스코틀랜드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바이킹들은 무려 300년 동안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는데, 원주민인 픽트인이나 게일인, 앵글로색슨인 등이 바이킹을 막기 위해 하나로 뭉치도록 만드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결국 덕분에 스코틀랜드 최초의 제대로 된 왕국인 알바 왕국이 등장했고, 알바 왕국은 훗날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바이킹 시대는 약 100년 후에 종결되었지만 바이킹과 스칸디나비아의 영향력은 바이킹 시대가 끝나고도 400년 후인 13세기, 최후의 스코틀랜드 바이킹 국가인 군도 왕국[28]이 스코틀랜드에 복속될 때까지 스코틀랜드에 남아 있었다.
3.4.1.3.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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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들이 세운 1000년경의 더블린 모습
795년 경에 소규모의 바이킹 무리들이 처음으로 아일랜드 해안가를 따라 수도원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굳이 수도원들을 약탈했던 이유는 그 주변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 바로 수도원이었기 때문이다. 821년에는 호우스를 약탈하고, 수많은 여자들을 포로로 잡아 끌고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840년부터는 아예 요새화된 숙영지를 지어놓고 그곳을 본거지로 삼아 아일랜드 내에서 더욱 체계적인 약탈 행위를 했다. 이때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더블린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지만 바이킹이 모두 불태웠으며, 교역의 번영지로 떠오름은 바이킹이 이곳을 본거지로 삼은 이후부터였다.

아예 터를 잡은 바이킹들은 거대한 함대를 조직하고 대규모로 약탈을 저질렀다. 바이킹들은 내륙으로 쳐들어가 더 거대한 수도원을 공격하거나 고대 아일랜드 왕들의 능을 도굴했다. 853년에는 바이킹 올라프가 더블린의 초대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수십여 년 동안 바이킹들은 아일랜드 원주민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는데,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더 이상 바이킹들이 일방적인 약탈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잡아 아일랜드 토착세력들과 끊임없이 합종과 연횡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바이킹이 항상 승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866년에 아일랜드 북부에 있는 모든 바이킹 정착지들이 불태워지고 약탈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902년에는 최대의 중심지였던 더블린에서 강제로 쫒겨났다.

하지만 아일랜드 바이킹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았다. 이바르 가문이 이끄는 바이킹 함대가 914년 아일랜드로 돌아와 8년 동안 전쟁을 벌였고, 결국 더블린을 회복했다. 바이킹들은 파괴만 했었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도시들을 건설했는데 워터포드, 웩스포드, 코크, 리머릭 등이 이 때 건설되었다. 더블린은 아일랜드 최초의 대도시로 부상했고 서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노예 항구라는 웃지 못할 타이틀을 짊어지기도 했다.

바이킹들은 날이 갈수록 아일랜드의 토착 게일인들과 동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노르드-게일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더블린의 바이킹 왕들은 문화를 진흥한다는 명목으로 아일랜드 최초의 조폐국을 설립했고, 심지어 가톨릭교회를 후원해주기까지 했다. 현대 바이킹들에 대한 인식이 그냥 쳐죽이는 야만인인 것에 비하면 놀라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게일인 출신인 미데 왕국의 '말 세크날 막 돔날' 왕이 더블린을 정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게일인 출신의 브라이언 보루가 아일랜드 전역을 정복하고 아일랜드의 '하이 킹'으로 올라서면서 바이킹의 세력은 더욱 쇠약해졌다.[29] 물론 정복당한 바이킹들은 게일인들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진압당했고, 1014년 이후로는 제대로 된 반란조차 일으키지 못하는 약소세력으로 전락했다. 이후 바이킹들은 자연스럽게 아일랜드 문화권에 흡수되면서 사라졌다.

3.4.2. 프랑크 왕국

잉글랜드가 바이킹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뻔했다면 프랑크 왕국 및 분열 이후 독일이 되는 동프랑크 왕국, 프랑스가 되는 서프랑크 왕국도 마찬가지로 바이킹의 침략은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바이킹들은 잉글랜드보다도 더 부유한 프랑스 지방을 허구헌날 약탈하러 쳐들어왔는데, 지명인 ' 노르망디'가 애초에 북쪽 사람들을 의미하는 '노르만'에서 유래한 단어일 정도였다. 바이킹들은 790년에서 800년 사이에 처음으로 프랑스 약탈을 시작했으며 주 약탈지는 프랑스 서부와 북부 해안가였다. 바이킹들이 주로 겨울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조용히 보냈기 때문에 약탈은 여름에 이루어졌다.

일부 바이킹들은 아예 노르망디 해안가에 숙영지를 짓고 알박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로마 제국 시절부터 행정력이 체계적으로 짜여 있었던 프랑스 지방은 잉글랜드나 아일랜드만큼 점령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바이킹들은 프랑크 왕국의 막대한 부를 놓칠 수 없었고, 결국 남부 가스코뉴 지방에 첫 번째 정착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바이킹들은 주로 부유하지만 방어력은 거의 없는 수도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는데, 루앙과 쥬미에쥬 지방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845년에는 센 강을 타고 올라가 파리를 공격할 정도였다. 당시 프랑크의 국왕 대머리왕 샤를 2세는 은화 7천 파운드를 지불하고서야 바이킹의 파리 포위를 풀 수 있었는데 이 일로 샤를 2세의 권위는 치명타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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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5년 바이킹들의 파리 공성전[30]
바이킹들의 파리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856년에 바이킹들은 또다시 센 강을 거슬러올라가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모든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약탈했지만 샤를 2세는 역시나 제대로 된 방책을 내놓지 못했다. 샤를 2세의 무능에 치를 떨던 파리 시민들이 대신 독일인 루트비히 2세에게 자신들을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했을 정도였다. 샤를 2세는 센 강 주변에 요새와 다리들을 설치해서 바이킹들의 전함을 막으려고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후 루이 2세, 루이 3세, 샤를로망 2세가 연달아 왕위에 올랐고 이들 모두 바이킹들을 퇴치하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소년왕이자 어린 나이에 바이킹들을 물리쳤던 루이 3세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은 더욱 안타까운 부분이다.[31]

바이킹들의 공세는 886년에 일어난 파리 공성전에서 정점을 찍었다. 885년 11월 바이킹들은 수백여 척의 함선과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파리에 도착해 조공을 요구했고, 당시 파리를 수비하던 외드 백작은 이를 거절했다. 외드 백작은 불과 병사 수백여 명을 이끌고 수만 명에 달하는 바이킹들을 상대로 분전했고, 결국 바이킹들은 파리 성벽을 넘을 수 없었다. 886년 10월에 카를 3세가 파리를 돕겠답시고 지원병을 이끌고 도착했는데 바이킹들을 쫒아내기는커녕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부르고뉴 지방을 처벌하기 위해 바이킹들을 일부러 그쪽으로 몰아넣으면서 엄청나게 욕을 들어먹었다. 결국 이 일로 프랑스에서 카롤링거 왕조는 상당히 신망을 잃었으며, 끝까지 파리를 수호한 외드가 새 서프랑크 국왕으로 즉위하여 카페 왕조의 선조가 되었다.

외드는 파리를 지켜낸 공로로 왕에 즉위했지만[32] 카롤링거 왕조의 정통성이 워낙 압도적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자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카롤링거 가문의 샤를 3세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911년 노르웨이계 바이킹인 흐롤프[33]가 샤르트르를 습격했는데, 당시 권신이었던 외드의 동생 로베르에게 대패했다. 한편 대바이킹 전쟁의 영웅이었던 로베르와 권력 투쟁을 벌이던 단순왕 샤를 3세는 흐롤프를 회유하기로 마음먹었다. 샤를 3세는 바이킹이 주춤한 틈을 타 흐롤프에게 루앙과 노르망디 북부를 봉토로 주고 루앙 백작위를 제안했다. 흐롤프는 이에 동의했고, 루앙 백작위를 받는 대신 세례를 받은 후 다른 바이킹들의 침략으로부터 서프랑크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 911년 7월) 이후 흐롤프, 즉 롤로는 루앙 백작으로 분봉받아 바이킹들의 침략을 잘 막아냈고, 훗날 루앙 백작에서 승격된 노르망디 공작들은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대귀족으로 성장했다.[34]

812년부터 바이킹이 프리지아 지방도 공격하기 시작하자, 826년 루도비쿠스 1세는 바이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덴마크 왕에게 프리지아 지방의 일부를 떼주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프리지아 지방의 방어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834년부터 바이킹의 리더인 도레슈타트의 로리크와 덴마크 왕의 조카였던 해럴드가 프리지아 지방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841년 루도비쿠스 1세의 붕어 이후 즉위한 로타르 1세는 프리지아 지방을 노리는 자신의 형제들과 바이킹의 침공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앞서 말했던 바이킹들의 수장인 해럴드와 로리크에게 영지를 일부 지급했으나 이 지역에 대한 바이킹의 침공이 매우 잦아들고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형제들간의 영토 분쟁도 안정화되자 로타르 1세는 이들을 토사구팽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846년, 이들은 반역죄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옥에 갇혔다. 이후 해럴드는 옥사했고, 로리크는 동프랑크 왕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850년 도레스타트와 위트레흐트 등 프리지아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결국 로타르 1세는 로리크를 이 지역의 지배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867년에 일어난 봉기로 로리크는 쫓겨났고, 결국 프랑크 왕국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873년에 해럴드의 아들이었던 루돌프가 아버지가 옥사하기 전에 다스리던 영역을 수복하기 위해 침공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전사했다. 884년 가을 덴마크계 바이킹들의 병력이 독일 북해 해안에서 벌어진 노르디티 전투에서 함부르크의 대주교 림버트가 이끄는 프리슬란트인 군대에게 패배했는데 이 노르디티에서의 패전 이후, 바이킹들의 프리지아 침략은 확 줄어들었고, 882년 로타링기아를 약탈하다가 카를 3세에 의해 프리지아 공작이 되었던 바이킹 수장 고드프리드[35]역시 노르디티 전투 때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다가, 889년에 암살당하면서 프리지아 지역의 바이킹 지배도 끝을 맺었다.

3.4.3. 남유럽

바이킹들은 장거리 항해도 즐겨했다. 보통 바이킹이 얼음이 가득하고 추운 바다에서만 활동했다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 포르투갈 지방은 물론 심지어 지중해 안까지 들어와서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860년에는 비요른과 해스테인이 이끄는 바이킹 함대가 이탈리아 북부의 항구도시인 루나를 쳐들어와 약탈한 다음, 60마일 떨어진 토스카나 지방으로 이동해 피사를 약탈했다. 심지어는 아르노 강을 타고 그대로 따라 올라가 피렌체 인근도 약탈했다. 바이킹들이 가장 즐겨 털었던 지방은 토스카나와 이탈리아 서부 해안가, 그리고 시칠리아 섬과 북아프리카 지방이었다. 특히 이탈리아가 몇백여 년 동안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덕에 워낙 많은 부가 쌓여있어서 바이킹들이 군침을 흘리던 먹이였다고 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바이킹은 상대적으로 늦게, 9세기 초중반부터 활동했다. 기록들이 워낙 중구난방이라 확실하지는 않으나 확실한건 당시 바이킹들이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를 습격한 뒤 리스본 세비야를 약탈했다는 것이다. 이베리아인들조차도 바이킹의 침략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다만 바이킹들은 갈리시아 왕국과 후우마이야 왕조가 워낙 방비를 잘 갖춘 덕에 큰 성과는 내지 못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859년에는 3년에 걸친 대규모 원정을 실시했지만 실패했고 966년에 함대 28척이 리스본을 공격했으나 역시 격퇴당했다. 바이킹들의 공격 자체는 11세기까지 쭉 이어졌지만 어디까지나 무역선 습격이나 소규모 기습에 그쳤고,[36] 잉글랜드나 프랑스처럼 나라의 존망이 걸린 싸움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또한 노르망디 출신 모험자들 시칠리아 토후국이 지배하던 시칠리아 섬과 동로마 제국이 통치하던 칼라브리아[37] 등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여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시칠리아 섬은 동로마 제국 시칠리아 토후국이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는데, 이때 동로마 제국은 노르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싸우도록 했다. 그러나 시칠리아 섬의 비옥함을 두 눈으로 확인한 노르만인들이 스스로 시칠리아 섬을 집어삼킬 야심을 품었던 것이다. 결국 시칠리아 왕국을 세운 노르만계 오트빌 가문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서방 교회에 간섭하던 동방 교회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력을 종식시켰다.[38] 중세 내내 노르만인 기사들은 동지중해의 십자군 전쟁이나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레콩키스타, 그리고 그 외의 각종 전쟁에서 뛰어난 용병으로 활약했다.

3.4.4. 중동부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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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에 발을 내딛는 류리크 바이킹들에게 점령당한 키이우
스칸디나비아 바이킹들은 9~10세기 경에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동쪽이나 남쪽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을 따로 바랑인이라고 불렀으며, 대부분은 스웨덴 출신이었다. 주로 무역이나 용병업 등에 종사하면서 부를 쌓았는데 심지어 흑해를 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나 페르시아(이란), 아랍과도 교역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은 다시 서유럽과의 거래에 활용되었다.[39] 바랑인들은 현지인과 결합하여 루스의 정체성을 형성했고, 이들은 튀르크계 국가인 하자르 칸국을 격파한 후 북유럽과 흑해 그리고 중동을 잇는 광활한 무역로를 장악했다. 특히 전설적인 바이킹 지도자였던 류리크는 기존의 슬라브족들을 통합하고, 862년 노브고로드 지역에서 루스 카간국을 수립했는데, 그의 후손들인 류리코비치 가문이 통치한 역사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의 기원이 되었다.

882년 류리크의 후계자였던 올레그는 아시아계 유목민들로부터 키이우를 정복하고, 루스 카간국을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비록 이후 슬라브족에 동화되기는 했지만, 일단 우크라이나 역사의 기원으로 평가되는 키예프 공국을 류리크의 후손들이 세웠다. 훗날 몽골 제국에게 키이우가 갈려나간 뒤 러시아의 중심지로 대두한 모스크바 공국 역시 류리크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였다. 분할 상속 전통 탓에 영토가 쪼개져서 군소 국가군이 난립하기는 했지만, 류리크의 후손들이 통치한 영지를 합치면 대충 유럽 러시아 중심부 + 벨라루스 + 우크라이나가 나온다. 어떻게 보면 바이킹이 러시아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셈이다. 다만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에 바이킹들의 문화가 상당히 남아 있었던 것과는 대조되게 러시아에서는 11세기 무렵에 바랑인 지배계급이 역으로 슬라브화되었다.

또한 류리크 가문 자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이킹이라는 정체성은 잃어버렸지만 1598년 뇌제 이반 4세의 삽질로 단절되기까지 700년 동안 러시아를 지배했다. 류리크 왕조가 단절된 이후 러시아가 혼란 시대로 빠져든 원인 자체가 '류리크 가문의 직계가 아닌 이상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어서'였다. 혼란시대를 거쳐 탄생한 독일계 로마노프 왕조 역시 류리크 가문과 혼인했음을 근거로 차르위를 요구했을 정도로 바이킹 왕조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이 스스로 부르는 명칭이 'Pyccкий' 즉 루스인이다. 한편 이들 본토 스웨덴 출신의 바랑인은 9~10세기에 동로마 제국군에서 바랑인 친위대로 복무했다. 반란과 배신이 판을 치던 난세에 용병으로서는 보기 드문 충성심, 그리고 바랑인 특유의 무자비함과 용맹성을 발휘하면서 동로마 제국 최정예 근위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3.4.5.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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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의 바이킹 식민지 재현 가옥 바다코끼리를 사냥하는 바이킹들
바이킹들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라는 2개의 거대한 섬을 발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페로 제도의 첫 번째 정착민의 일원이자 바이킹이었던 나도드(Naddodd)가 노르웨이에서 페로 제도로 항해하던 중 길을 잃고 우연히 한 거대한 섬의 동부 해안가로 표류했다. 아이슬란드라고 불리게 될 섬이 처음으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한 스웨덴 선원이 아이슬란드 해안으로 표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아이슬란드를 찾아간 사람은 '흐라프나플로키 빌게르다르손'이었다. 그가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는 이미 추운 겨울이었고, 거대한 피요르드 사이에서 떠다니는 유빙을 보고 현재의 이름인 아이슬란드를 붙였다.

아이슬란드에는 870년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했다. 심지어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의 이름도 남아있는데, 잉골프 아르나르손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 족장으로 아내인 할베이그 프로데스다테르와 함께 아이슬란드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설화에 따르면 잉골프는 아이슬란드가 가까워지자 배 밖으로 나무기둥 2개를 던지고는, 그 기둥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정착하겠노라 맹세했다. 그는 나무기둥이 닿은 곳에 닻을 내렸고, 땅에서 증기가 솟아오르는 따뜻한 곳에 집을 지었는데 이곳이 바로 레이캬비크다.

한편 아이슬란드보다도 한참 멀고, 북쪽에 떨어진 그린란드는 한참 후에야 발견되었다. 985년 전설적인 탐험가였던 에이리크 힌 라우디가 3년 전 살인 혐의로 본국에서 쫒겨난 이후 바다를 이곳저곳 떠돌다가 그린란드를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한다. 그린란드를 발견한 에이리크는 986년의 탐험에서 14척의 배들을 가지고 귀환했다. 에이리크는 이때 그린란드에서 그나마 살만한 남서부 해안가를 식민화했다. 그러나 그린란드가 하도 북쪽에 있어서 짧은 여름에만 겨우 호밀과 보리를 재배할 수 있었고, 양과 소 정도를 키우며 근근히 연명하는 정도였다. 그린란드의 특산품은 바다코끼리 상아였으며, 현지에서 생산할 수 없었던 철 및 생필품들과 거래해서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린란드는 1261년 노르웨이 국왕의 속령이 되었다. 하지만 무려 3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인구는 크게 증가하지 못해서 그 넓은 땅에 고작 5천 명도 안 되는 인구만이 살았다. 그린란드는 크게 동부 식민지와 서부 식민지로 나뉘어졌는데, 이 식민지 커뮤니티는 종교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농장 약 250여 곳, 성당 14곳, 대성당 한 곳이 있었다. 그린란드의 가톨릭 교구는 노르웨이의 니다로스 대교구 관할이었고, 주교도 있었지만 절대다수의 주교들은 그 먼 그린란드로 떠나기 싫어해서 대부분 니다로스에 머물렀다. 그러나 1300년대에 소빙하기가 몰아닥치고, 이누이트의 공격을 받자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으며 그린란드 식민지는 점차 쇠퇴했다. 1450년까지는 아예 노르웨이 본국과 연락이 끊길 지경이었고, 그린란드는 아예 스칸디나비아 전설에나 등장하는 신비의 섬 수준으로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힐 뻔한 적도 있었다.

3.4.6. 북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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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들의 아메리카 탐험 경로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란세오메도스' 유적 북아메리카를 발견한 레이프 에이릭손

아메리카 대륙의 이른바 '발견'이라고 하면 흔히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92년 산타마리아 호의 아메리카 상륙을 떠올리지만[40] 사실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은 유라시아의 인물은 바이킹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41] 986년 뱌르니 헤룔프손이라는 아이슬란드인 탐험가가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본토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콜럼버스보다 무려 600년도 일찍 아메리카에 첫 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뱌르니 헤룔프손은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로 향하던 중 실수로 표류해 북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아이슬란드 출신 탐험가였던 레이프 에이릭손이 북미 대륙에 연달아 상륙하며 배를 건조하기에 적합한 품질 좋은 나무들을 여럿 베어갔다. 이 덕분에 그린란드 바이킹들의 활동범위는 그린란드를 넘어 캐나다 최북단 섬까지 확장되었고, 심지어 이누이트들과 물건을 교역하기까지 했다. 특히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는 짧게나마 최초의 바이킹 식민지가 건설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콜럼버스와 비교하면 500년 가까이 이른 시점이었다. 이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교역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무력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더 잦았다. 원주민들은 끊임없이 바이킹들을 괴롭혔고, 도저히 살 땅이 아니라고 판단한 바이킹은 어쩔수 없이 그린란드로 철수해야만 했다.

레이프 에이릭손은 그린란드로 가는 길에 북미로 표류했고, 야생 포도, 야생 밀, 단풍나무를 발견했다. 에이릭손은 새롭게 발견한 신품종들을 배로 실은 다음 다시 동쪽으로 향해 중간에서 난파자들을 구하고 그린란드에 도착했다. 당대에 난파하면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사람들은 표류에서 살아남은 레이프 에이릭손을 '행운아'라고 불렀다. 다른 판본도 있는데 레이프 에이릭손이 앞서 북미 대륙을 발견한 뱌르니 헤룔프손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생겨 북미를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는 포도와 덩굴이 널려있는 비옥한 땅을 발견했고, 작은 정착지를 건설했다. 에이릭손은 그곳에서 온화한 기후와 넘쳐나는 연어들을 발견하고 겨울을 보냈으며, 겨울이 지나가자 마찬가지로 그린란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 판본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레이프 에이릭손이 현대의 캐나다 북부지방을 탐험하고 그린란드로 돌아왔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42]

그린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새롭게 발견한 땅을 빈란드라고 불렀다.[43] 빈란드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이킹들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화 시도가 죄다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캐나다 본토뿐만 아니라 스발바르 제도 아조레스 제도와 같이 북아메리카 대륙 최북단의 섬들도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이킹들은 스발바르를 '차가운 해안'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곳도 얼음만 꽁꽁 어는 땅이라 바이킹들은 별 경제성을 찾지 못했고 결국 바이킹들은 500년 일찍 신대륙을 발견할 기회를 놓쳐버리고야 말았다.

북아메리카를 탐험한 바이킹이라고 하면 레이프 에이릭손만 유명하지만 사실 그 외에도 토르발드, 토르핀 칼세프니 등 꽤 많은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토르발드는 원주민들을 잘못 건드렸다가 되려 반격을 당해서 화살을 맞아 사망했다. '용감한 칼세프니'라는 별명이 있었던 토르핀 칼세프니는 가축과 160여 명의 남녀를 실은 배 3척을 거느리고 북미로 향했다. 북미에 정착한 칼세프니는 상대적으로 원주민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는데, 우유와 붉은 천을 물물교환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좋은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칼세프니 소유의 황소가 갑자기 흥분해 날뛰면서 원주민들을 놀라게 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원주민들이 돌을 쏘아대면서 바이킹들을 쫒아낸 것이다. 수적 열세였던 바이킹들은 원주민들에 밀려 쫒겨났다.[44]

북아메리카의 가장 대표적인 바이킹 유적은 란세오메도스(L'Anse aux Meadows)이다. 약 990년 경에 지어진 바이킹 식민지 마을 유적으로, 1960년에 발견되어 바이킹들이 북아메리카에 왔었다는 전설을 실제로 드러나게 만든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마을에서 발견된 목재들을 탄소연대로 추정해본 결과 평균적으로 목재들은 1014년에 베어졌고, 대략 인구 30~16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 척박한 그린란드 식민지의 10%도 안되는 인구로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굉장히 규모가 작았음을 의미한다. 건물들은 대략 8개가 발견되었는데 개중에는 대장간, 거주 가옥, 배 수리용 건물, 목공 작업장들도 있었다. 또한 석유 램프, 숫돌, 청동 핀, 뼈로 만든 뜨개질 바늘, 물레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이중에서 물레가 발견되었음이 중요하다. 즉 여자들도 이곳에 머물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란세오메도스가 단순한 전사들의 초소가 아니라 정식 정착지였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바이킹들이 그린란드를 떠난 이유를 찾기 위해 고고학자들이 바이킹의 식단을 분석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그린란드의 바이킹 유적에서 발견된 유골의 치아 동위원소를 분석했으며, 분석 결과 그린란드에 도착한 초기, 바이킹 식단에서 해산물의 비중은 20% 정도였다. 그런데 바이킹이 그린란드를 떠나는 14~15세기 유골에서는 식단에서 해산물의 비중이 80%까지 올라갔다. 그린란드에 정착해 농사와 목축을 했을 텐데도 곡식과 고기의 비중이 줄어든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결과를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바이킹이 농사를 짓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

3.5. 바이킹들의 쇠퇴

이렇게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전 유럽을 휩쓸던 바이킹이었으나 이들 역시 10세기 경에 정점을 찍더니 이후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0세기 말부터 조금씩 약탈 빈도가 줄어들었으며, 11세기 중후반부에는 거의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바이킹이 쇠락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아래와 같은 이유들로 요약이 가능하다.
  1. 군사·방어 체계 정비
  2. 경제적 효용 감소
  3. 스칸디나비아의 중앙집권화와 지방통제력 강화
  4. 그리스도교의 스칸디나비아 확산
  5. 기온 하강과 유빙의 증가, 항해 환경의 악화

이러한 바이킹의 공격은 당시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바이킹의 공격으로 서유럽의 많은 도시와 마을, 수도원 등이 파괴되고 약탈되었고, 인명과 경제적 면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당대의 서유럽 군주나 영주의 당면과제는 신민을 이들의 침략에서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그 성과에 따라 권력이 왔다 갔다 했기에 머리를 싸매면서 바이킹을 막을 다양한 대책을 강구했다.

가장 먼저 이루어졌으며 큰 영향을 준 대응책은 축성이었다. 많은 주거지들이 스스로 성벽을 두르거나 피난용 요새를 마련하였고, 군주들이 이를 적극 조성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웨섹스 왕국에서는 알프레드 대왕이 곳곳에 요새화한 거주지인 (burh)를 지어서 방어거점으로 삼았고, 유럽 대륙에서도 여러 도시와 수도원들이 요새화되었다. 하천 어귀에는 침략자들이 배를 타고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고자 성을 쌓거나 다리를 놓아 물리적으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기도 하였다.

서유럽 영주들의 대비책들 중에는 당연히 해안방어체계 정비가 있었다. 곳곳에 바이킹들의 기습을 막을 초소와 기지들이 세워졌고, 특히 분열되어 있었던 유럽의 왕국들은 중앙집권까지는 아니어도 군주와 유력 영역제후들을 중심으로 통합되었고, 하나 둘씩 안정을 찾으면서 방어체계도 굳건해졌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잉글랜드 왕국이었다. 과거까지만 해도 7왕국으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기에 급급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왕국이 되어 더는 바이킹들이 건드려서 크게 득볼 것이 없었다. 바이킹들은 더 이상 기습의 이점을 노릴 수가 없었는데, 치고 빠지는 싸움방식을 좋아하던 바이킹들에게 치명적인 문제였다.[45]

동원체계와 군제에서도 혁신이 이루어졌다. 잉글랜드에서는 알프레드 대왕 치세부터 "fyrd"라고 불리는 징집부대를 반기 단위로 순환근무시키면서 언제든 투입 가능하게 하였고, 유럽 대륙에서는 중무장을 한 중세 유럽 기사들이 등장하여 해안가에 상륙하는 해적만 보면 말을 타고 몰려들었다. 기존의 치고 빠지는 소규모 보병 방진은 아무 쓸모가 없어졌고, 바이킹들이 상륙해봤자 기사들 아래에 짓밟히기만 했고 약탈도 점점 시원찮아졌다. 그 결과 일부 바이킹들은 약탈자 노릇이나 하기보다는 아예 현지에 정착해 본인들 스스로 봉건기사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현지 사회에 녹아든 바이킹들은 이제 자기 신민과 재산을 지키고자 스칸디나비아 본토에서 온 침략자와 싸웠다. 이렇게 동화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노르망디 공국이었다. 노르망디 공국의 지배층이었던 노르만인들은 바이킹 출신이었지만 결국에는 프랑스에 동화되어 누구보다 바이킹들을 막아내는 데 열정적인 정착민들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약탈형 바이킹들은 동화된 바이킹이든 토착 봉건기사들이든 현지 방어군에 가로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넘어야 할 산이 늘어나자 바이킹들로서는 원정과 약탈의 수지타산이 맞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만만한 마을들을 털어서 보화를 실어오고 노예도 수급했는데, 오히려 죽거나 헛고생만 하다가 돌아오게 된 까닭이다. 농노제 정착 역시 바이킹들에게 치명타였다. 중세 초까지만 하여도 그리스도교권 유럽에서도 노예제가 아직 남아있었으므로[46] 바이킹들도 점령지의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가서 노예로 팔아넘기는 노예무역에 끼어들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는 하였는데, 노예제가 완전히 사장되면서 더는 노예들을 사줄 고객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노예제가 비효율적인 제도여서 고대부터도 이미 자유민 농민들과 상호보완적으로 운용되었는데, 고대 말부터 이어진 혼란 속에서 자영농들조차 알아서 신종하고 투탁해오는 마당에 굳이 비싼 돈을 내고서 말도 안 듣는 새 노예들을 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47]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중앙집권화였다. 사실 스칸디나비아 바이킹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을 통제할 중앙권력의 부재 탓이 컸다. 마치 일본의 전국시대 때 중앙정부의 약화 때문에 왜구들이 발호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1000년 경부터는 점차 스웨덴 왕국, 덴마크 왕국, 노르웨이 왕국 등 왕국들이 발전하고 힘을 갖추면서 바이킹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바이킹들은 과거처럼 날뛸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일대가 안정을 찾으면서 바이킹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이러한 중앙화와 발을 맞추어 그리스도교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역으로 전파되었는데,[48] 같은 그리스도교도들을 노예로 부림을 금지한 교리 때문에 노예무역을 하는 것조차 꺼리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가장 막대한 이익을 내던 노예무역이 점점 사라지니 바이킹들이 약탈할 이유도 사라졌다.[49]

그 외에 환경 악화도 문제였다. 특히 11세기에 정점을 찍었던 온난한 기후가 다시 악화되어 점차 소빙기 기후로 변해갔다. 원래 바이킹들의 약탈 자체가 넘쳐나는 인력이 원정을 갔다 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제는 본토 상황이 나쁘니 불가능해진 것이다. 바이킹의 주 근거지는 유빙 탓에 항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침략이라기보다는 이주에 가까웠던 그린란드 같은 경우에도 이러한 이유로 더이상 푸르를 수 없었다. 결국 그린란드의 바이킹 정착지들은 15세기 이후엔 완전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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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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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바이킹 시대' 자체는 1066년 노르웨이 왕 하랄 3세 하르드라다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패배해 잉글랜드 침략에 실패함으로써 끝이 났다고 본다. 잉글랜드의 참회왕 에드워드가 명확한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승하하자 왕위계승다툼이 일어났다. 이 경쟁에서 밀려난 노섬브리아 백작 토스티그가 앙심을 품고 노르웨이의 하랄 3세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하랄 3세는 무려 선단 300여 척과 병사 9천 명을 모아 잉글랜드로 쳐들어갔고,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잉글랜드 국왕 해럴드 2세와 격돌했다. 이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노르웨이계 바이킹 군대가 괴멸하면서 바이킹들은 더이상 외세를 침공할 여력을 잃어버렸고, 이를 274년에 걸친 바이킹 시대의 종결로 친다.

가장 일반적인 종결 기준은 위의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지만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다. 노르웨이의 경우 1030년에 벌어진 스티클스타드 전투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기독교도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는데, 이때 이후의 노르웨이인들은 더이상 '바이킹'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스웨덴 995년부터 1020년까지 재위한 올로프 솃코눙 왕이 세례성사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바이킹 전통을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후까지 바이킹 신앙을 유지하던 아이슬란드마저 그리스도교로 돌아섰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가 그리스도교화되면서 바이킹은 저 시골 벽지로 들어가지 않는 한 더이상 찾아 보기 어려울 지경이 되어 버렸다.

아일랜드의 경우, 바이킹들의 도시였던 더블린 1171년에 함락되었고, 스코틀랜드는 바이킹 전통을 간직한 최후의 노르웨이 왕이었던 호콘 4세 1263년에 오크니 제도, 헤브리디스 제도의 패권을 두고 스코틀랜드와 벌인 일전에서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그때까지도 끈질기게 버티던 헤브리디스 제도 맨 섬의 바이킹 왕국이 북유럽과의 연계가 완전히 끊기면서 1266년 끝내 스코틀랜드에 복종, 흡수됨으로서 마지막 바이킹 왕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스코틀랜드 곳곳에 남아 있었던 소규모 바이킹계 세력들은 꼼꼼하게 살해당하거나 동화되었고, 15세기에 이르면 스코틀랜드 내에서 바이킹 세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또한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1469년까지도 노르웨이 국왕 소유의 섬들이었는데, 그래서 바이킹 시대가 넓은 의미에서 15세기에 종결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소수 있긴 하다.

3.6. 재평가

북유럽 신화를 다룬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지금이야 바이킹들이 '고귀한 야만족', 혹은 '진취적인 해양민족'이라는 이미지를 달고 있지만 고대 및 중세인들에게 바이킹은 그냥 피에 미친 이교도 야만인 그 자체였다. 유럽인들이 어찌나 바이킹들에게 시달렸는지 그들을 신의 진노라고 불렀으며, 자연재해와 비슷하게 취급했을 정도였다. 유럽을 습격한 이민족들은 그리스도교도거나, 혹은 관용성이 있던 이슬람교도들이었기 때문에 교회나 수도원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바이킹들은 그런 거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이런 곳들을 보물이 있다며 습격했기 때문에 더욱 더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바이킹들이 중세 유럽인들에게 남긴 상처가 워낙 깊었기에 바이킹들은 유럽에서 1천 년 동안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추어졌다.

이렇게 워낙 이미지가 나빴기 때문에 한동안 유럽 역사에서 바이킹의 후손을 자처하는 민족도 없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남은 후예들은 기독교화된 이후 악명 높았던 과거를 "이교도 시절에 한 일"로 거의 흑역사 취급했다. 잉글랜드(데인로, 채널 제도), 아일랜드, 프랑스( 노르망디), 러시아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현지 주민과 동화되어 본토 시절의 언어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도 잃어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그 후손들은 자신들이 바이킹의 후예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의 역사와 생활사를 문자화하여 남긴 것은 거의 없어 구두로만 전승되었고, 그들에 대한 기록은 침략당한 쪽의 문자로 기록되어 전해지다보니 악명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저작권'을 주장할 만한 원주인들이 사라진 덕에 마음놓고 재평가를 할 수도 있었다. 바이킹 못지 않게 악명이 높았던 몽골 제국 역시도 한때는 유라시아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결국은 현 몽골 지역 외에서는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반복되었다.

바이킹이 현대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17~18세기에 들어 낭만주의영웅주의가 널리 퍼지게 되면서 영국을 중심으로 바이킹들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던 것이다. 노르드어로 쓰인 고대 텍스트들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바이킹들을 칭송하는 시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대중들이 '바이킹'이라는 단어를 흔히 쓰게 된 것은 19세기 초 시인 에릭 구스타프 가이저가 쓴 시 <바이킹>이 크게 히트를 치면서부터였는데, 가이저가 바이킹을 무슨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묘사하면서 바이킹들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영국인들이 북유럽에 품었던 환상적인 인식이 합쳐지면서 바이킹은 점차 영웅시되었다.

바이킹들의 영웅화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빅토리아 시대에 그 정점을 찍었다. 스칸디나비아 3국, 독일, 영국 등지에서 범스칸디나비아주의가 생겨나면서 그 일환으로 바이킹들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다. 특히 바이킹의 고향이었던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북유럽 통일 운동의 대두와 함께 전근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이전 자신들의 조상이었던 바이킹을 개종하기 이전의 야만적인 문명에서, 북해와 발트해 그리고 지중해와 흑해를 모조리 재패한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독일은 서유럽의 주류문화였던 로마-프랑스 문화에 대비되는 게르만 문화의 본류로서 바이킹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바이킹과 비슷한 해양제국을 건설했기에 이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50]

20세기 초에도 만연했던 게르만 우월주의 인종주의는 바이킹들의 신격화에 더욱 불을 붙였다. 게르만 우월주의자들은 게르만족을 '북유럽의 신비스러운 안개에서 걸어나온 선택받은 인종'이라고 미화했는데, 이들의 입장에서 영웅적이고 용맹한 바이킹만큼 입맛에 딱 맞았던 것도 없었던 덕분이었다. 북유럽 신화를 다룬 바그너의 오페라가 대히트를 치면서 바이킹들의 이미지는 180도 달라졌다. 특히 나치 독일에서는 게르만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이킹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용맹한 전사들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다.[51] 노르웨이에서는 자원병 모집 포스터에 바이킹과 무장친위대를 나란히 놓은 이미지를 쓸 정도였다. # 나치는 이들 북유럽 출신 자원병들을 중심으로 무장친위대 제5기갑사단을 편성했는데, 이들의 별칭이 다름아닌 바이킹의 독일어 표현인 '비킹'(Wiking)이었다. 현대의 바이킹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나치 독일의 공로도 있었던 것이다. 나치 독일 자체는 1945년에 패망해 사라졌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바이킹의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한때 피에 미친 악랄한 이교도로 불리던 바이킹은 고귀하고 영웅적인 전사들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그 덕에 바이킹들은 현대까지도 토르(마블 코믹스), 드라마 < 바이킹스>, 게임인 <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 등 다양한 미디어물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로 꾸준하게 등장하는 중이다.[52]

4. 정치

바이킹들은 중앙집권적인 왕국이나 국가를 따로 세우고 살지 못했다. 대부분은 부족이나 마을 단위로 살았고 족장에 해당하는 야를(Jarl)이 부족을 이끌었다. 왕권신수설도 없고, 지배자의 권위도 훨씬 약한 씨족 사회였던지라 제아무리 위대한 부족장이라도 더 강력한 경쟁자에게 패배하면 바로 자리를 빼앗겼다. 내부의 세력 다툼이 엄청나게 흔했기에 족장직이 갈아치워짐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권력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바이킹 족장들은 할 수만 있다면 보통 아들, 그중에서도 장자에게 족장직을 물려줬다. 형제가 공동 족장을 맡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자는 족장이 될 수 없었다.[53]

바이킹들이 무식한 전사들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이들도 의회 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선진적이었다. 바이킹들의 의회는 (Thing)이라고 부르는데 스웨덴어로는 하라드, 덴마크어로는 헤레드라고 부른다. 자유민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일종의 집회에 더 가까웠는데 일정 나이에 다다른 자유민이라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여자들 역시 자유민이라면 참여할 수가 있었는데, 특히 아이슬란드 그린란드처럼 먹고 살기 어려운 곳에서 이런 특징이 두드러졌다. 참고로 현대 아이슬란드에서는 알씽(althing)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세계 최초의 의회로 본다.

이런 의회 제도가 있었던 것은 스칸디나비아의 문화적 영향이 컸다.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씨족의 구성원이 남에게 상처를 입고 돌아온다면 씨족 전체가 그 가해자를 적으로 돌리고 싸워대는 복수의 전통이 있었다. 이 때문에 바이킹들은 사소한 다툼만 있어도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싸워댄다면 도저히 부족이 존속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말로 해결할 수 있도록 완화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싱'은 단순히 다툼을 중재할 뿐만 아니라 종교집회, 결혼동맹, 세력과시, 유산상속, 보증 등 다양한 목적으로 열렸다. 이런 점이 오히려 민주주의적이고, 평화로운 문제 해결방법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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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들의 의회인 '씽'의 상상화 씽이 열리는 장면을 재현한 모형
씽이 열리는 곳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많은 인원들을 수용할만큼 거대한 건물이 없었던 탓에 야트막한 언덕이나 인공둔덕 위에서 씽을 열곤 했다. 특히 조상이나 친척들을 묻어놓은 곳에서 씽을 여는 경우가 가장 흔했다. 유력 가문이나 족장들은 자기 가문의 룬 문자가 새겨진 거석들을 언덕 위에 세워놓고 그곳을 회의장으로 삼아 세력을 과시했다. 사람들이 오기 편해야 했기 때문에 무역로에 가까운 곳이나 맑은 물과 가까운 곳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하위 '씽' 위에는 더 상위의 씽들이 있었고, 최고 꼭대기에는 지역의 부족장이나 유력자들만 모여서 개최하는 '씽'이 따로 있었다.

씽은 주기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족장이나 부족장을 선출하고 판사(lawman)들에게 판결을 받았다. 당시 판사들은 나이가 많고 현명하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뽑았으며 이들은 구전되어 내려오는 규칙들을 줄줄 암송했다고 한다.[54]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벌금형을 받거나 '무법자'로 낙인찍혔다. 무법자라고 낙인 찍한 사람들은 바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바이킹 사회에서 쫒겨났다. 그 누구의 음식도, 지원도, 호의도 감히 바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아서 아무나 이 사람을 죽여도 괜찮았다. 그래서 무법자형을 받은 바이킹들은 죽기 살기로 외국으로 도망쳐 살 길을 도모해야만 했다.[55]

씽은 입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가졌지만 형을 집행할 권리는 없었다. 부상당한 당사자의 가족이 형을 집행했고, 형집행이 끝나면 상인들이 몰려와 축제를 벌였다. 자기들끼리 에일 벌꿀술을 마시며 결혼 주선, 동맹 결성, 정보교환 등을 벌였던 것이다. 이렇게 활발하게 운영되던 씽은 점차 스칸디나비아가 중앙집권화되면서 축소되기 시작했다. 왕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지방 자치를 하는 씽이 아니꼬웠고, 씽을 국왕 산하의 기구로 편입시켰다. 씽은 독자적인 기구라기보다는, 국왕이 내려보낸 신하들과 지방의 유력자들이 서로 견제하고 의견을 나누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왕권이 더 강해진 중세 이후부터는 씽이 의회의 기능을 완전히 잃고 지방법원의 형태로 변했다.

5.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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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사회의 계급 피라미드
바이킹 사회는 크게 세 계급으로 나뉘어졌는데, 엘리트 계급인 야를(Jarl),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유민인 카를(Karl), 사회 밑바닥인 스렐(Thrail)로 분류할 수 있었다.[56] 자유민들은 무기를 휴대할 권리가 있었고 의회인 '씽'에서 발언권도 있었으며 투표권도 있었다. 자유민 대다수는 농부였고 자영농도 소작농도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57] 우리가 흔히 '바이킹'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전사들은 다 자유민 계급이었다. 이 전사들은 대부분 재산이 없는 무일푼에 미혼인데다가 대체적으로 어렸다. 전사들이 이렇게 어렸던 이유는 바이킹들의 상속관습 때문이었다. 바이킹 상속체계에서 아들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것을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재산을 많이 물려받지 못한 나이가 어린 아들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바다 밖으로 나가 약탈을 저질렀던 것이다.

야를들은 여러 전사들을 거느리는 거물들로 보통 족장이나 지방 유력자가 여기 해당되었다.[58] 이들은 수많은 전사들, 말, 노예들을 거느렸으며 거대한 영지를 경영하며 롱하우스에서 살았다. 주요 소일거리는 행정, 정치, 사냥이었고 허드렛일은 아래의 자유민과 노예들이 해줬다. 종종 해외원정이 있을 때 함대를 이끄는 것 역시 이 야를들이었다. 카를(자유민)과 스렐(노예) 등 대부분의 바이킹들은 농업에 종사했다. 바이킹은 기본적으로 농민 공동체였으며, 약탈만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불가능했다. 바이킹 사회에서 밖으로 나가 약탈에만 종사하는 인원의 비율은 생각만큼 높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돈이 없는 어린 전사들이 젊은 혈기에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경우가 더 흔했다. 바이킹들은 대부분 대가족 형태로 살았는데, 여자는 농장에서 일하며 집안일을 했고, 남자들은 배를 타고 밖으로 나가 약탈을 해오거나 씽에서 가족들을 대표했다.

바이킹 자유민들인 카를의 경우, 야를을 제외하면 자기들끼리는 대체적으로 평등했지만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하던 스렐( 노예)들은 바이킹 사회 내부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주로 바이킹들이 약탈지에서 납치해온 사람들이거나 노예 가문에서 태어나 날때부터 노예인 부류로 나뉘어졌다.[59] 이 노예를 스렐(Thrail)이라고 불렀다. 바이킹들이 하도 약탈을 많이 저질렀던 탓에 한 가구마다 노예가 최소 1~2명은 있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많은 집은 노예 30명을 데리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노예들의 생활조건은 주인의 취향, 그리고 경제 여건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었다.

노예는 어딜 가나 천시받는 비참한 존재였지만[60] 의외로 계급 유동성은 상당했다. 주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해방될 수 있었고, 심지어 돈을 모아 자신의 자유를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예들이 해방되었다고 태생부터 자유롭게 태어난 자유민인 '카를'(karl)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는 없었다. 해방노예들은 노예와 자유인 사이의 계급인 레이싱기(leysingi)가 되었는데, 여전히 주인에게 충성을 바쳐야 했고, 의회에서도 자신의 의견이 아닌 주인의 뜻에 찬성해야만 했다.[61] 해방노예들이 주인 가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기 위해선 최소 2세대가 지나야 했다. 해방노예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주인이 해방노예의 재산을 환수해갔다.

바이킹들이 잡아오는 노예들은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애초에 바이킹들이 스칸디나비아에서 벗어나 약탈을 시작한 이유에는 성비 불균형 문제도 있었는데, 일부다처제를 선택한 스칸디나비아에서 권력자가 여자들을 죄다 독차지하자 번식의 기회를 놓친 남자들이 바다로 나갔던 것이다. 남성 전사들은 당연히 약탈지의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만 납치해서 데리고 왔다. 그렇게 노예로 잡혀온 여자들은 강간에 수시로 노출되었고, 주인이 음주가무와 군사훈련을 하는 동안 고된 가정일에 종사했다. 다만 운이 좋다면 주인의 아내가 되어 신분이 상승할 수도 있었다. 노르드 문화에서는 행복한 가정생활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정실부인만 된다면야 여자들의 생활은 상당히 나아졌다.

5.1. 여성의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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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마을 재현도 포로들을 납치하는 바이킹 바이킹 가옥의 내부 재현도
마초적인 이미지와 달리 여성 인권 또한 강한 축에 속했다. 일부 여성들은 방패 처녀[62]라고 불리며 남성과 동등하게 전투를 수행했고, 그중에는 고위직 군사지도자도 있었다고 한다.[63] # 실제로도 무장들과 방패들, 군마 두 필과 함께 매장된 고위직 바이킹 방패 처녀 한 명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했다. 기사 링크 해당 무덤 관련 네셔널 지오그래픽 영상 이 무덤 이외에도 군마 한필과 매장된 다른 방패 처녀의 무덤 노르웨이에서 발견된 바 있고 잉글랜드의 바이킹 전사자 매장지의 유골들 중 20%를 차지하는 여성들의 유골이 전사로써 몸을 여러해에 걸쳐 혹사시키고 싸우다 죽은 전사자들이라는 것 또한 분석으로 드러난 바 있다. 군사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바이킹 여성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다만 이혼을 하려면 결혼 당시에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지참금을 다시 돌려줘야 했다. 바이킹 여성들이 이처럼 권리가 강했던 까닭은, 남성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여 집을 비우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 기간 동안 아내가 집을 관리하고 재산과 농토를 지키는 등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64]

결혼한 여성은 후스프레야(húsfreyja)라고 불렸으며 육아, 가정일, 농장일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여자는 20살이 되면 법적 성년이 되었고 스스로 거주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 다만 결혼에 대한 권리는 없어서 제 아버지가 짝지어주는 남자와 결혼해야만 했다. 신랑은 신부 가족에게 지참금인 'mundr'를 지불했다. 여성은 의외로 이혼이나 재혼을 할 수도 있었는데, 남자들이 밖에 나갔다가 죽는 일이 하도 많아서 그랬다.

결혼하지 않고 남자와 함께 사는 문화도 있었는데 이런 여자들은 따로 프릴라(friðla)라고 불렸다. 보통 프릴라를 둘 정도의 사람이라면 상당히 부유하고 강한 유력자였다. 프릴라도 남자의 총애를 받는다는 조건하에 좋은 대우를 받긴 했지만 역시나 본처에 비하면 그 지위가 약했다. 첩의 자식, 즉 서자는 의외로 별 차별이 없었는데 혼외자식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 다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가 있었고,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을 자격도 있었다. 물론 본처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이 조금 더 우위를 점했던 것은 사실이다.

남편이 죽으면 과부들은 그 재산을 모두 물려받았다. 특히 남편 가문이 어느 정도 재력과 권세가 있는 가문이고, 그 가문에 적법한 남자 후계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아예 그 과부가 그 가문의 수장이 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런 여자들을 따로 바우그리기르(Baugrygr)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재혼할 때까지 쭉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재혼하면 과부가 가지고 있었던 권한은 모두 재혼한 남편에게로 넘어갔다. 여자들은 여사제(gydja)나 예언자(sejdkvinna)가 될 수도 있었고 시인, 룬어 해석자, 상인,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방패 처녀'의 이야기가 진실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거리가 있지만 일부 여자들은 병사로 활동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유입 이후 여성의 권리는 서서히 악화되더니 13세기 후반부터는 여타 기독교 문화권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65]

6.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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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이후로는 바이킹들 중에서도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대거 나타나긴 했지만[66], 대부분은 여전히 북유럽 신화를 믿었다. 청동기까지는 그 원형격인 원시 인도유럽 신화[67]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앙을 믿었다. 그러다가 점차 신화 체계가 정립되고 나서[68] 바이킹의 전성기가 도래한 8~9세기에 북유럽 신화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때의 융성함으로 인해 게르만 문화권에서 각 요일을 뜻하는 단어에도 북유럽 신화의 흔적이 남았을 정도였다.[69]

7.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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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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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병사의 모습 상륙하는 바이킹 전사들
바이킹은 명예롭게 싸우다 죽으면 죽은 뒤에 오딘의 궁전인 발할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믿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바이킹 남자들은 보통 하나 이상의 무기는 반드시 가지고 있었다. 모든 노르웨이 자유인들은 무기를 하나씩 지녀야만 했고, 오딘이 바이킹에게 내렸다는 조언집인 《하바말》[70]에도 항시 무기를 챙기고 다니라고 쓰였을 정도였다. 부유한 사람이라면 헬멧[71] 사슬 갑옷, 방패을 전부 지녔다. 즉 우리가 아는 '투구, 갑옷, 도끼들을 풀로 갖춘 바이킹'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그보다 못한 복장이었다.[72]

바이킹은 자신이 사용하는 무장은 직접 구비해야 했고 빈•부에 따라서 무장이 달랐다. 부유한 경우는 찰갑이나 사슬 갑옷을 착용했고, 대부분은 천 갑옷을 입고 싸웠으며, 방패은 필수 무장이었고, 은 부유한 경우 부무장으로 착용했다고 한다. 도끼와 단검은 도구로서 소지했다고 한다.[73]

그리고 양날도끼와도 연관이 많다고 여겨지지만, 바이킹들은 던지기 좋은 가벼운 손도끼나 자루가 긴 외날 도끼인 데인 액스를 좋아했고, 양날도끼는 제의 의식에나 사용했다는 것이 당대의 성상화나 조각품들에서 드러나고 있다.
Forgotten Weapons의 바이킹 도끼 리뷰 영상
바이킹 전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무기는 도끼였다. 검은 만드는데도 비쌌고, 여유가 있는 남자 전사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고급 무기였다. 심지어 여자들도 도끼를 많이 써서 여자들은 무덤에 도끼와 함께 묻혔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양날도끼를 사용했다는 편견은 사실이 아니며, 실제 바이킹들은 데인 액스라는 외날 도끼를 썼다. 양날도끼를 쓰고 다녔다면 철을 낭비하는 팔자 좋은 놈이거나 과시용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바이킹 유물 중에는 정교하게 잘 제련된 검이 많이 출토되고 부무장으로 단검이나 검을 소지한 전사들도 많았다. 그러나 검은 만들기 어렵고 비싸다 보니 어디까지나 부무장 또는 의장용 성격이 강했고, 실제로 전쟁터에서 애용된 무기는 둥근 방패이었다. 창의 길이는 보통 2~3m 가량이었으며, 들고 찌르는 것 외에 투창용으로도 많이 쓰였다.

단검도 즐겨썼다. 바이킹은 두 종류의 단검을 썼는데 하나는 'knífr'라고 하는 다소 평범하게 생긴 외날 칼이었다. 바이킹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무기로, 심지어 노예들조차 휴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였다. 사람을 죽인다는 목적보다는 야채나 나무를 깎는데 썼고, 조금 더 큰 사이즈는 사냥할 때 썼다. 무기용으로 쓰는 칼에는 일부러 날에 무늬를 새겨넣었다. 손잡이는 원통형이었고 칼등은 직선, 칼날은 약간 휘어진 곡선이었다.

또 다른 단검 종류는 ' 색스'였다. 브로큰백 스타일식의 단검이었는데 knífr보다는 더 무거웠고, 마체테처럼 사용했다. 부유한 사람일수록 더 크고 무거운 색스를 사용했다. 만들기도 편하고 무거워서 타격력도 좋아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다고. 외날검인데 칼날이 워낙 무거워서 양손으로 잡고 휘두르기까지 했다. 이 색스는 유럽 곳곳으로 이주한 게르만 부족들이 많이 썼는데 심지어 색슨족의 '색슨'이 이 색스에서 유래했다. 이주가 끝나면서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포함한 유럽 대륙에서는 점차 인기가 떨어져서 사라졌지만, 바이킹이 정착한 브리튼 제도의 지방에서는 약간 남아있었다.

방패는 가장 일반적인 방어 수단으로, 유물에 따라 다양한 나무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가장 선호된 것은 라임나무, 그 다음이 비교적 더 무겁지만 단단한 참나무, 그리고 물푸레나무 소나무등을 이용해서 만들기도 했다. 링크 이외에도 가문비나무, 전나무등 사용할 수 있으면 다양한 나무들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가죽을 붙여 덧대거나, 테두리에 철을 박아 공격용으로도 쓸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대부분의 방패는 원형이었고 지름이 45~120cm 사이를 왔다갔다했지만 보통 75~90cm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바이킹식 선박의 측면 난간에는 방패를 걸어둘 수 있는 구멍이 있었다. 여기에 방패를 걸어둔 바이킹 롱쉽은 마치 바이킹을 상징하는 클리셰나 다름없는데, 단순히 장식용이 아니라 파도나 바람에서 바이킹 승무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줬다. 매체에서는 라운드 실드들이 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동로마 제국에서 유입된 카이트 실드도 썼는데 동로마에서 서유럽으로 유입된 카이트 실드가 다시 서유럽에서 바이킹들에게 유입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방패와 창 등을 주로 썼던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바이킹들의 전투는 방진을 이룬 보병 육박전이 많았다. 배를 많이 이용하는 생활상 말을 타는 문화나 기병은 꽤 나중에서야 등장했고, 말을 이용할 때도 초창기에는 물건을 나르거나 이동을 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기병을 활용한 전투 자체도 드물었다.[74]

탁 트인 개활지에서의 야전이나 해전에서는 활도 많이 이용했지만 보통 활을 쓰는 것보다 냉병기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을 더 명예롭게 여겼다. 고고학적으로는 도끼 유물이 많이 발굴되고, 당시에 바이킹을 그린 벽화나 회화에서 도끼를 든 전사의 모습을 많이 살펴볼 수 있다.

활과 화살은 장거리에서 적을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무기였다. 바이킹들이 쓰는 활은 주목이나 느릅나무처럼 상대적으로 유연한 나무를 잘라 만들었고 당기는데 대략 400N의 힘이 필요했다. 400N이 40kg짜리 물체를 들때 필요한 힘임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힘을 써야 활을 당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힘을 주고 쭉 당겨 쏘면 유효사거리가 최소 200m에 달했다. 활이 강할수록 사거리도 길어져서 그보다 더 멀리 나갈 수도 있었다. 현대처럼 시위를 입꼬리나 턱 아래가 아니라 가슴 쪽으로 당겨서 쐈다. 화살촉은 철로 만들었고, 가끔씩 나무나 뼈, 뿔을 잘라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독수리 깃털을 붙여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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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버서커 바이킹 전사들의 모습 바이킹 전사의 무기
바이킹 전사들 중에는 반쯤 정신착란 상태에서 싸우는 버서커의 어원이 되는 베르세르크 등이 있어서 맹활약하기도 했다. 게임위른에서도 등장하는 버서커, 즉 광전사의 원조가 바이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버서커들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입에 거품을 물고 동물처럼 울부짖으면서 싸웠다. 전설에 따르면 이 상태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불과 고통을 느끼지 못했고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했다. 눈으로 노려보기만 해도 적들이 두려움에 떨었으며 주문을 외워 적들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 수 있었다고. 물론 전투가 끝나면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바이킹들은 이들이 이나 거대한 늑대로 변신할 수 있고, 인간보다는 트롤에 가까운 무서운 존재라고 여겼다. 어찌나 버서커들이 광포한 존재들이었는지 타오르는 숯불을 통째로 삼키기도 했으며,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 전사 여섯 명을 한 번에 작살냈다는 카더라도 있다. 스칸디나비아 왕들은 버서커들을 휘하의 친위대로 고용하기도 했다. 버서커가 죽으면 곰가죽 위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알려졌지만, 베르세르크 문서에 들어가면 알 수 있듯이 반쯤 맞는 말로 곰가죽을 걸치거나 스칸디나비아의 권력자들이 친위대로 고용하긴 했지만, 고문헌을 연구하면서 베르세르크들이 트랜스 상태로 싸웠던 광전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복부에 자상을 입었을 경우 양파와 향신료를 섞은 수프를 먹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배에 양파 냄새가 나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서 장에 구멍이 났는지 여부를 확인했다고 전해진다. 배에서 양파 냄새가 나면 복부 장기에 치명타를 입었다고 확인은 할 수 있었으나,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간주했다.

스캴드메르(skjaldmær), 혹은 방패처녀라고 불리는 여전사들도 존재했다. 원래 학계는 바이킹 전사들이 100% 남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무기가 함께 매장된 여자의 무덤이 발견되고, 971년 불가리아에서 바이킹 여전사들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증거로 여전사들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물론 남자들에 비하면 전사 내 비율은 압도적으로 작았다고.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여전사 발키리 역시 이 스칼드메르의 존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가설이 있을 정도이다.

유명한 용병대로 욤스비킹이 있었다. 10세기 ~ 11세기 동안 활동한 바이킹 출신 용병대로 돈만 주면 기독교도 영주 심지어는 이슬람 교도들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북유럽 신앙을 그대로 유지했던 덕분에 바이킹 버전 성전기사단이라고 불린다. 이후 스칸디나비아가 덴마크를 시작으로 기독교화되면서 소멸되었으나, 그 타고난 기세 덕분에 위명은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바이킹들의 키는 컸지만 덩치는 의외로 크지 않았으며 유골 조사 결과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73cm, 성인 여성의 평균 신장은 158cm 전후로 추정되며 기초대사량이 높아 마른 근육 체형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작물에서 나오는 근육돼지 급의 바이킹들은 타 민족에 의해 만들어진 스테레오타입이다. 하지만 평균 신장이 170cm 정도였어도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웬만한 유럽인들에게는 거인처럼 보였고[75] 바이킹들은 동시대인들을 체격에서 압도했다.

8.1. 갑주

현대 매체에선 야성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가이사타이[76]처럼 비키니 아머 수준의 장구류를 입고 나오지만, 당대의 바이킹들은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꽁꽁 싸매고 싸웠던 걸로 유명했다.

일단 대부분의 가난한 하위 전사들이 갑옷을 입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도 매체에서처럼 벗고 싸웠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하위 전사들은 가장 두꺼운 평상복 위에 모피나 망토를 둘러매서, 일종의 천 갑옷으로 만들어 입은 채로 전장에 나갔다.

좀 여유가 있는 이들은 후손인 노르만 기사처럼 체인메일(사슬갑옷)을 자주 입었다. 다만 자주 입은 것과는 별개로 영 선호되는 장구류는 아니었다. 일단 사슬갑옷은 철고리 수천 개를 만들고 휘어서 연결하는 대단히 번거로운 작업으로 만들어지는데, 분업화가 덜 된 바이킹 사회에선 입는 전사 본인이 직접 수선해야 했으니 대다수 전사들이 싫어했다. 그래도 사슬갑옷 특유의 유연한 움직임은 해상 전투가 잦았던 바이킹 전사들에게 고평가를 받았다. 특히 바랑기안 가드[77]들이 사슬갑옷을 애용했는데, 이들은 원시적인 하네스[78]를 위에 걸쳐서 사슬 갑옷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도 했다.

가장 대접 받았던 갑옷은 라멜라 아머(찰갑)이었다. 주로 고위층들이 입고 다녔는데, 금속제가 대부분이었고 드물게[79] 가죽제(피갑)도 있었다고 한다. 바이킹의 가죽제 찰갑은 특유의 야만적인 분위기 때문에 매체에서 자주 등장하는 편.

이 밖에도 상술한 베르세르크 전사들처럼 짐승의 모피를 뒤집어 쓰고 싸우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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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를 쓴 바이킹 전사
덧붙여서 멋드러진 수염과 장발을 자랑하기 위해 투구를 쓰지 않았다는 낭설이 퍼져있는데, 바이킹들은 투구를 반드시 쓰고 다녔다. 바이킹들은 두 개 이상의 둥근 판을 리벳으로 조여 만든 슈팡겐 헬름을 썼으며[80], 여기에 특유의 T자형 코가리개를 달아 사용했다. 이 T자형 코가리개의 크기를 키우거나[81], 사슬을 달아서 면갑 효과를 기대하기도 했다.

의외로 상징으로 알려진 뿔투구를 절대 쓰지 않았다. 바이킹의 뿔투구는 바이킹을 악마와 동일시한 유럽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을, 리하르트 바그너를 비롯한 근대 창작자들이 차용하면서 기원했다. 실용적인 장구류를 선호했던 바이킹들은 전투에 도움이 안 되는 뿔 장식을 쳐다 보지도 않았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바이킹들을 몰락시킨 동시대 그리스도교 기사들이 뿔투구를 쓰고 싸웠다. 뿔투구와 별개로 날개 장식을 달았던 투구는 실제로 있었으나, 신라 금관처럼 부유한 이의 매장품이나 중요 행사 용도로만 썼다고 한다. #

8.2. 바이킹 소드

Man at Arms에서 제작한 울프베르트의 재현품.

전투종족이었던 바이킹은 도끼를 비롯한 여러 무기를 사용했지만, 그중에서도 'Ulfberht'라는 바이킹 소드가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울프베르트 혹은 볼프베르히트로 불리며, 서기 800년 ~ 1000년경에 현대의 고 탄소강에 필적하는, 탄소 함유량이 높으면서 철의 순도도 높은, 당시로서는 오버테크놀러지인 무기이기 때문이다. Ulfberht에 사용된 것과 같은 순도 높은 철을 얻으려면 노에서 1700도 이상으로 철을 가열하여 불순물을 없애야 하는데, 유럽에서는 산업혁명 시기인 1700년대 중반 이후에나 이러한 철이 등장했다. 바이킹은 800년~1000년경에 이러한 강철을 사용하여 칼을 만든 것이다.

날의 가운데가 파인 특유의 디자인은 이전보다 철을 덜 쓰고도 검을 만들 수 있어 더 가볍다.

바이킹이 활동하던 당시 유럽에서는 품질 좋은 철괴를 구할 수 없었다. 무기를 만들 정도로 대량으로 사용했다면 어딘가에는 분명 이를 제련한 흔적이나 유적이 있어야 하는데 유럽 어디에서도 일절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에 사용된 품질 좋은 광석들은 동쪽의 볼가 강 교역로를 타고 이란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Ulfberht 는 칼날에 VLFBERHT 라고 각인되어 있는데, +VLFBERHT+ 와 +VLFBERH+T 로 2가지 각인이 출토된다고 한다. +VLFBERH+T 가 탄소 함량이 높은 철로 만들어진 것으로 진품이고 나머지는 복제품으로 본다다.

이러한 재질과 더불어, 칼을 제련할 때 연철과 강철을 꼬아 접어 두드리는, 페턴웰디드 접쇠 기법을 쓰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주조한 경우 검신에 물결 무늬가 드러나고 각 철강의 장단점들이 서로 보완되어 강도가 월등한 물건이 나온다.[82]

유튜브에서 "Secrets of the Viking Sword" 라고 검색하면 Ulfberht 검에 대해 자세하게 다룬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다.

9. 바이킹식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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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식 장례에 대한 오해. 실제로 이런 장례방법은 없었다
'바이킹'이라고 하면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들 중 하나이다. 특히 한국 내에서는 영화 < 토르: 다크 월드>에서 등장하는 프리가의 장례식으로 잘 알려졌다.

흔히 바이킹식 장례라고 하면 배에 시신을 실어 바다로 띄워보낸 다음, 육지에서 불화살을 쏘아 배를 불태운다는 것이 상식처럼 알려져 있다. 그렇게 배를 불태워서 시신을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힌다는 방법이다. 듣기만 하면 굉장히 극적이고 인상적인 장례법이지만, 실망스럽게도 이런 장례방법은 할리우드 영상물들이나 서양의 미디어 믹스에서 드라마틱하게 각색을 가한 것이다. 실제 바이킹들은 시신을 불태워 수장시키는 방식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

바이킹들이 시신을 화장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생각처럼 배에 눕혀 바다에 띄우지 않고, 그냥 땅 위에 장작더미를 높게 쌓고 거기에 시신과 부장품을 넣고 불을 질렀다. 바닷물을 시신에게 약간 묻히는 경우는 있어도 물 위에 띄우는 일은 아예 없었다. 이후 연기기둥이 크면 클수록 망자가 빠르게 천상의 사후세계로 끌어올려질 수 있다고 믿어서 최대한 연기가 하늘 위로 높이 올라가게 불을 질렀다고 한다. 모든 것이 탈 때까지 태우다보면 뼛조각과 금속류 정도만 남았는데 이걸 바다에 던지거나 땅 위의 무덤에 묻었다. 이렇게 하면 망자가 함께 불태운 부장품들과 함께 발할라로 향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할리우드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배에 시신을 넣고 장례를 치르는 경우도 있긴 했다. 가장 높은 명예를 가진 전사나 부족장들에게만 치러지던 장례방법이었는데 이는 배가 아무에게나 줄 만큼 값싼 물건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었다. 보통 고위층들이 이런 방법으로 묻혔기 때문에 소나 말의 유골처럼 훨씬 화려하고 많은 부장품들이 함께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83] 여행용 배나 전투용 전함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행사용 또는 장례용 목적으로 제작된 배를 주로 썼다. 장례용 배는 만들 때부터 아예 좌석을 만들지 않았으며 일상생활에 쓰는 선박들보다 훨씬 화려한 모습으로 건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배로 무덤을 만들어놓아도 무조건 불태우지는 않았고 그냥 묻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바이킹식 장례에 대하여 가장 자세하게 묘사한 기록은 10세기 경 아바스 왕조 출신의 아랍인 탐험가였던 '아흐마드 이븐 파들란'이 작성한 기록이다. 당시 그는 칼리파 알 무크타디르가 볼가 불가르족에 파견한 사신단의 일원이었다. 여정 도중 일행은 볼가 강 일대에 정착한 러시아 바이킹들의 정착지를 지나쳤다. 이곳에서 그는 한 바이킹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파들란의 기록에 따르면, 바이킹들은 부유한 사람이 죽으면 그 재산의 3분의 1은 가족에게, 3분의 1은 장례식의 수의를 짤 비용으로, 나머지 3분의 1은 장례식 때 마실 독한 증류주를 만들 값으로 나눠진다고 한다. 죽은 고인은 일단 과일 및 술 등과 함께 임시 무덤 속에 안치되어 사람들이 그의 수의를 짤 때까지 약 10일간 보관되었다. 그 10일 동안 고인의 가족들은 주인과 함께 순장당할 노예들을 선발했는데,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노예들만을 뽑았다. 보통 소녀 노예들이 자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가족이 노예에게 순장 여부를 물어보면 노예는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주인과 함께 순장당할 여자 노예가 뽑히면 즉시 다른 소녀 두 명에게 보호 겸 감시를 받았다. 이 소녀들은 여자 노예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동행하여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감시였지만 나름 극진하게 대우해서 심지어 여자 노예의 발을 씻겨주기까지 했다. 여자 노예는 독한 증류주를 종일 마셔대며 모든 고통을 잊어버렸다. 순장 예정자 노예는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맛보았는데, 여자 노예는 마을의 모든 집을 돌아다니면서 주인의 지인들 전부와 성관계를 맺었다.[84] 노예는 할 수 있는 모든 장식을 다 꾸민 채로 좋은 드레스를 입고, 열흘 동안 쾌락에 탐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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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바이킹식 화장 실제 매장에 사용된 오세베르그 호[85]
그렇게 여자 노예가 한창 쾌락을 즐기고 있을 무렵, 사람들은 주인의 배를 제방 위로 끌어올린 뒤 그 위에 대형 천막을 짓고 색색가지 천을 덮었다. 그 곁에 긴 의자를 놓고 역시 금실을 섞어 만든 매트리스를 깔아놓았다고 한다. 이후 임시 무덤에서 주인의 시신을 수습해[86] 배 위의 텐트로 옮겨 금실과 고급 옷감으로 만든 수의와 모자를 입혔다. 시신 곁에는 향기나는 약초와 증류주, 빵, 고기, 양파 등을 벌려놓았다. 다음으로는 고인이 기르던 개를 데려와 죽인 다음 배를 갈라 펼치고, 말 두 필을 끌고와 땀이 날 때까지 달리게 한 다음 역시 조각을 내어 죽이고 배 안에 던져넣었다.

정오에 남자들은 미리 만들어 놓은 문틀처럼 생긴 곳으로 여자 노예를 끌고 갔다. 여자 노예가 남자들이 내민 손 위에 발을 올려놓으면 남자들은 노예를 문 틀 위로 높이 들어 올렸고, 총 세 번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여자 노예는 남자들이 들어올릴 때마다 첫 번째는
"보라,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뵙노라."
라고 말했고, 두 번째는
"나는 모든 죽은 조상들이 앉아있는 것을 보았노라."
라고 말했으며, 세 번째는
"나는 주인님이 천국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노라. 천국은 아름답고 푸르구나. 주인과 함께 시중 드는 하인이 있구나. 주인님이 나를 부른다. 어서 나를 주인님께 데려가다오."
라고 말했다. 이 단계를 마친 남자들은 여자 노예에게 암탉을 건네주었고, 여자 노예는 암탉의 머리를 잘라 멀리 던진 다음 그 몸뚱이는 배 안으로 던져넣었다.

여자 노예는 이후 남자들에게 들어올려져 주인의 시신이 안치된 배로 향했다. 배에 도착하면 여자 노예는 차고 있었던 발목걸이 두 개를 풀어 '죽음의 천사'라고 불리는 노파에게[87], 반지 두 개를 빼내 자신을 시중들었던 두 소녀에게 건넸다. 그후 여자 노예는 극도로 도수가 높은 독주를 마시고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로 주인의 시신이 있는 배 갑판 위의 텐트로 끌려들어갔다.[88] 남자 6명이 텐트 안으로 들어가 또 차례로 난교를 벌였으며, 여자 노예를 주인 옆에 눕힌 다음 2명은 소녀의 다리를, 2명은 소녀의 발을 잡았다. 그러면 '죽음의 천사'라고 불리는 노파가 다시 들어와 여자 노예의 목에 밧줄을 감은 다음, 날 넓은 단검을 여자 노예의 갈비뼈 사이에 빠르게 찔렀다가 빼냈다. 밧줄을 잡고 있는 나머지 두 남자는 여자 노예가 죽을 때까지 밧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여자 노예가 완전히 죽으면 시신을 주인 곁에 곱게 눕히고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빠져나갔다. 그후 죽은 남자의 친척 2명이 배에 불을 붙였는데, 머리를 돌려 배를 보지 않은채 걸어왔다고 한다. 그들은 완전히 벌거벗고 있었는데 한 손에는 횃불을, 나머지 한 손은 엉덩이를 가린 채로 걸어갔다. 그들이 배와 그 아래에 쌓인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배와 천막, 남자와 여자의 시신이 모두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불꽃은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1시간도 되지 않아 모든 것이 재와 숯으로 변해 있었고, 그들은 배를 태운 장소에 기념물을 만들었다. 모든 장례절차가 끝나자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떠났다.[89] 이것이 바로 이븐 파들란이 기록한 바이킹식 장례법이었다.

이븐 파들란이 본 장례식은 가장 부유한 사람의 장례식이었고, 대부분의 바이킹들은 저것보다 소박한 장례식을 치렀다. 다만 여자와 남자 모두 부장품과 함께 묻혔으며, 함께 묻히는 부장품을 가진채 사후로 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걸 싸가지고 가려 했다. 대장장이들은 생전에 썼던 망치나 모루와 함께 묻혔고, 여자들은 보석류와 뜨개질거리를 갖고 묻혔다. 시체에게 극진하게 대우를 해야 집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부장품이 있어야 사후세계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것도 자유민 정도나 되어야 부장품이라도 가지고 갈 수 있었지, 노예들은 그냥 땅에 대충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던져서 묻어버렸다.

바이킹들의 장례식은 지역의 관습[90]이나 망자의 신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단순히 간단한 부장품과 함께 매장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만일 죽은 사람이 부유하고 지체높은 사람이었다면 특별히 배와 함께 장례식을 치러주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덴마크 바이킹인 데인족은 그들의 시조인 쉴드 섀핑(Scyld Scefing)의 경우처럼 망자의 시신을 보물과 함께 배에 실어서 바다로 떠내려 보냈는데, 이 광경은 서사시 《 베오울프》에 잘 묘사되어 있다.[91] 또한 이 시대에는 노인들이 자연사하기 전에 절벽에서 떨어져 목숨을 끊는 일종의 자진 고려장 비슷한 Ättestupa라는 악습도 있었으나 이후 사라졌다.[92]

10.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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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복원된 롱하우스[93]
미디어의 영향으로 바이킹들의 건축물들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바이킹들이 살았던 실제 건물들은 헛간이나 오두막 또는 롱하우스 정도에 불과했다. 애초에 바이킹의 본거지였던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워낙 척박하다보니 인류의 정착도 늦었고, 건축술 역시 동시대 유럽에 비하여 낙후되었던 탓이 컸다. 거의 대부분이 목조건물이었고 석조건물은 정말 흔치 않았다. 건물의 규모 역시 동시대 지중해권 국가들에 비하면 상당히 좁은 편이었다.

바이킹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바로 롱하우스이다. 기울어진 벽 위에 마치 배를 뒤집어놓은 듯한 삼각지붕이 길게 올라탄 형태인데 크기는 보통 5~7m, 길이는 15~75m 정도로 소유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크기가 달라졌다. 크기는 달랐어도 기본적인 설계 형태와 구성은 동일했다. 롱하우스가 작으면 내부에 공간구분이 없이 그냥 뻥 뚫린 형태였으나, 커다랗다면 지붕 하중을 받치기 위해 나무 기둥을 2열로 세웠다. 지붕은 초가, 목재, 심지어 잔디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고 벽 역시 널빤지를 잇거나 흙, 잔디로 쌓아서 지었다. 특히 아이슬란드 그린란드처럼 목재가 희박한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잔디와 흙으로 벽을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부에 세운 2열 기둥들은 롱하우스의 공간을 셋으로 분리했다. 기둥들 사이의 중간 공간은 마치 복도처럼 기능했고, 기둥들 사이에 벽을 쳐서 방을 나누기도 했다. 요리와 난방을 위한 모닥불은 이 중간 복도에 피우는게 보통이었는데 집마다 달라서 방마다 화덕을 설치해놓은 곳도 많았다. 불을 피우고 나온 잿가루는 습기와 냄새를 잡기 위해 흙과 섞어 바닥에 뿌렸다.

롱하우스의 벽을 따라서 벤치들을 배치해서 침대나 앉을 수 있는 소파 역할을 했다. 벤치 아래에는 물건을 보관하거나 쓸데없는 잡동사니들을 넣어놨다. 특히 롱하우스 내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창문과 굴뚝이 없어 어둡고 연기가 자욱하다는 것이었다. 추운 스칸디나비아 기후 특성상 차가운 외풍이 들어올까 봐 창문을 크게 낼 수 없었고, 당연히 햇빛이 들어오지 못해 롱하우스는 하루 종일 어둡고 우중충했다. 지붕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굴뚝도 마찬가지라 집 안에는 연기가 자욱한 경우가 많았다. 롱하우스 설계를 교묘하게 조정해서 연기가 지붕 틈 사이로 빠져나가게 만들었지만 충분히 환기시키기에는 무리였다.

지금이야 북유럽이 이케아 가구로 유명하지만, 당시 바이킹들의 롱하우스에는 가구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바이킹들은 고작해봐야 자물쇠 달린 상자와 보관함 정도가 전부였고 여기에 옷이나 가재도구 같이 몇 안 되는 도구들을 보관했다. 식사용 테이블이 따로 있어서 서까래에 보관하다가 식사 때만 내려서 썼다. 우리가 아는 침대가 있기는 했지만 웬만큼 부유한 바이킹이 아니면 거의 볼 일이 없어서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벤치에 퍼질러져서 자거나 아예 땅바닥에서 잤다. 침구는 대부분이 양가죽이었고, 부자들은 닭털이나 오리 깃털로 만든 베개를 쓰기도 했다. 매우 부유한 가정은 해외에서 사온 실크 침구류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정말 최고위층이 아니면 꿈도 꾸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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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하우스 내부 모습 노르웨이 구드방겐의 바이킹 마을 바이킹 롱하우스 단면도
롱하우스에 창문이 거의 없어서 롱하우스 내부는 껌껌한 분위기였으나 일부 바이킹들은 창 2개를 교묘하게 뚫어서 채광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아니면 창문을 만들고 거기에 동물 가죽으로 두꺼운 커튼을 만들어서 낮 동안에만 말아올리는 방법도 있었다. 그래도 밤에는 빛을 제공받기 어려웠기에 대부분 바이킹들은 롱하우스 내부에 대구 간유나 바다표범, 고래기름 등을 태워 환하게 불을 밝혔다. 양초가 있긴 있었지만 굳이 비싼 양초를 쓰기보다는 심지를 꼬아서 기름에 적신 뒤 불을 밝히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롱하우스 내부에는 심지어 축사도 함께 있었다. 축사를 따로 짓기에는 자원이 부족했고 가축들을 밖에 풀어놓기에는 얼어죽을 것이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물론 축사는 롱하우스에서도 가장 구석지고 생활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동물들의 소음과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대가족들로 버글거리며 비좁은 롱하우스에 동물들까지 같이 살았으니 롱하우스 내부는 어둡고 냄새나고 더러웠으며 시끄러웠다. 모두가 함께 일하고 먹고 잤기 때문에 사생활을 챙김은 롱하우스 내부에서 터무니없는 사치였다. 여자들의 베틀, 대장장이의 모루, 장인의 작업대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작업실 역시 모두 이 롱하우스 하나에 다 있어서 롱하우스는 바이킹 삶의 터전 자체나 다름없었다.

아이슬란드는 특히 잔디를 이용한 집으로 유명했다. 의외로 바이킹이 아이슬란드에 도착했을 당시 아이슬란드의 30%가 자작나무 숲으로 뒤덮였기에 목재를 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이킹들에게는 자작나무로 집을 세우기보다 잔디로 집을 짓는 쪽이 훨씬 편했다. 잔디 자체의 단열성이 무시 못할 만큼 우수했을뿐더러 자작나무 집보다 훨씬 짓기 쉬웠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바이킹들은 평평한 돌로 깔은 기초를 만든 다음, 잔디의 하중을 지탱할 나무 프레임을 짜고 그 프레임 위에 잔디가 덮인 흙블록을 쌓았다. 집 외부로 드러난 유일한 목재는 입구와 문짝밖에 없었다. 심지어 지붕도 잔디로 덮어서 화재가 잘 안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부 홀은 목재로 지어서 종종 화재가 일어나곤 했다고 한다.

바이킹들이 롱하우스만 짓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Ritual House'라고 해서 교회 성당 비슷한 건물들도 있었다. 이 건물들은 롱하우스보다는 훨씬 외양이 화려했고 특히 내부에 장식이 풍부했다. 다만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현대 북유럽의 '통널 교회'와는 확연히 다른 건축물이다. 통널 교회는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고 난 이후에야 만들어진 건축형식이다. 물론 바이킹들의 건축에서 영향을 받긴 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노르드 신화를 믿는 바이킹들은 통널 교회 같은 건물들을 짓지 못했다. 바이킹들의 종교시설은 통널 교회보다 훨씬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이었다.

10.1. 룬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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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룬스톤들
룬스톤은 룬 문자가 새겨진 암석들을 통칭하는 단어로, 롱하우스와 함께 바이킹의 상징들 중 하나인 건축물이다. 영토 표시, 망자의 위업을 기리기,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는 등의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4세기부터 12세기까지 무려 약 800년에 걸쳐 지속된 오랜 문화기도 하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룬스톤들은 바이킹 시대 후반인 950년~11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절대다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개중에서도 스웨덴에 집중되어 있지만 잉글랜드나 아일랜드 같은 바이킹들이 정복했던 영토들에도 일부 있긴하다.[94]

룬 문자가 새겨진 돌을 무덤 옆에 세우는 풍습은 4세기 경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후 꾸준히 명맥을 이어 내려오다가, 960년 덴마크의 왕 하랄 1세 블로탄이 세례를 받고 새로운 신앙과 질서의 도래를 기념하기 위해 룬스톤들을 곳곳에 건설하도록 명령한 것을 계기로 크게 발전했다. 하랄 1세가 세운 룬스톤들은 3면으로 깎은 뒤 한 면에는 기존대로 룬 문자와 동물들을 새겼고 다른 한 면에는 예수의 모습을 새겼다. 족장들이 하랄 1세를 따라하면서 룬스톤은 스칸디나비아 전체로 퍼져나갔고,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한 세대만에 유행이 끝나 사라졌지만 스웨덴 중부 쇠데르만란드와 우플란드 일대에서는 무려 12세기까지 계속됐다.

스칸디나비아에는 현재 룬 문자 비문 6천여 기가 남았는데 개중 약 3천 기가 룬스톤이다. 덴마크에는 룬스톤이 250기, 노르웨이에는 50기가 있고 아이슬란드에는 하나도 없다. 스웨덴에 룬스톤 대부분이 몰려서 대략 1700~2500기가 있다. 스웨덴 내에서도 우플란드가 룬스톤 1196기로 가장 많은 지역이고, 2위가 391기인 쇠데르만란드다. 스칸디나비아 외의 지방에서는 그나마 맨섬이 30개의 룬스톤이 있으며 그 외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페로 제도 등지에서도 가끔씩 발견된다. 동유럽에는 거의 룬스톤이 없다시피한 수준인데, 이는 쓸 만한 돌도 없었을 뿐더러 특히 동유럽인들이 이교의 잔재라고 생각한 룬스톤을 모조리 부수거나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룬스톤은 처음에는 묘비로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건립 목적도 기념비나 경계석 등으로 다양하게 바뀌어 집회장소, 도로, 교량, 여울 등지에 세워졌다. 그러나 룬스톤이 처음 세워진 자리에 그대로 보존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교도의 것이라 하여 훼손되는 경우도 많았고, 성당이나 성, 건물을 지을 때 자재로 떼어가곤 했기에 룬스톤이 뜬금없이 교회 벽재나 바닥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고. 현재 남아있는 룬스톤들 중 40%만이 원래 세워진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나머지는 죄다 다른 건물에 석재로 쓰이거나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 색도 남아있지 않지만 예전에는 룬스톤의 글귀들이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95] 고대 시집 '하바말(Hávamál)'을 보면 오딘이 '나도 룬을 쓰고 색칠한다'라고 말했으며 '룬을 쓰다'를 의미하는 고대 노르드어 fá는 본디 '그리다'를 뜻하는 'faihian'에서 유래한 단어다. 바이킹 화가들은 붉은 황토, 붉은 납, 그을음, 탄산칼슘, 기타 광물을 섞고 기름과 물을 첨가해 붉은색의 물감을 만들었다. 유럽에서 흰색 납, 공작석, 푸른 청동 따위를 수입하기도 했다고. 여러 가지 색이 사용되었지만 지배적인 색깔은 흰색과 붉은색이었다. 여러 사가들을 보면 예언자가 나무 뿌리에 룬을 새기고 자신의 피로 색칠해 괴물을 죽였다거나, 술잔에 룬을 새긴 다음 피를 칠해 술에 독이 들어있는지 아닌지 확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마 붉은 빛이 를 연상시키기에 바이킹들이 더 선호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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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한 룬스톤[96] 시구르드 룬스톤 오딘 룬스톤
스티그르는 그의 아들 에이빈드르를 기리며 이 돌을 세운다. 그는 에이비슬과 함께 동쪽에 떨어졌다. 비킹그르와 그리믈프르가 칠하다.

- 칼베스텐 룬스톤
그리고 단과 후스카를과 스베인이 그들의 아버지의 아버지인 울프리크르를 위해 비석을 세우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2번 공물[97]을 받았다. 신과 신의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그 아들의 영혼을 도우시기를.

- 링스버그 룬스톤 U 241
룬스톤의 94%가 남성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대부분이 고향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것들이며, 바다 밖으로 항해하러 나간 이야기를 담은 룬스톤은 전체의 10%에 불과하다. 이 것도 바다 밖으로 원정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추억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들이 절대다수지, 원정에서 살아돌아온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룬스톤에는 사망자의 이름, 사회적 지위, 사망 장소, 기도문 따위를 주로 새겼다. 가장 많이 언급된 바이킹들의 사망 장소는 동로마 제국으로, 바이킹들은 동로마에서 죽으면 보통 '그리스에서 죽었다'라고 새겼다.

룬스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용을 죽이는 시구르드 북유럽 신화의 최고 인기신 토르였다. 시구르드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룬스톤은 람순드 비석으로, 레긴이 주조한 칼을 용의 몸에 찔러넣는 시구르드를 묘사했다. 용의 몸에는 룬 문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 가장 왼쪽에는 목이 잘린 채 자신의 대장장이 도구들과 널부러져 있는 레긴이 있으며, 그 옆에는 용의 심장을 굽다가 엄지 손가락이 데인 시구르드의 모습, 우연히 엄지를 입에 대었더니 새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시구르드의 모습이 그려졌다. 시구르드의 말 그라니도 옆에 있는 나무에 묶인 모습이다.

북유럽 신화도 대중적인 주제였다. 토르 미드가르드에서 뱀 요르문간드를 낚는 거대한 모험이 인기있었는데, 낚싯줄에 걸린 요르문간드가 하도 요동치자 화난 토르가 발에 힘을 주었는데, 하도 힘이 강해서 타있는 배의 갑판을 뚫고 바다 바닥에 발을 박았다는 언급을 충실히 그려놨다. 신들의 황혼 라그나로크도 묘사했다. 펜리르 오딘의 발을 물고 있는 모습을 그린 레드버그 비석이 대표적. 발드르의 장례선 흐링호르니가 움직이지 않자 이를 띄우도록 불려온 여자 거인 히로킨을 묘사한 것 등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그렇다고 모든 룬스톤이 북유럽 신화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의외로 현존하는 룬스톤의 50%는 그리스도교와 관련이 있다. 십자가나 그리스도교의 기도문을 새긴 룬스톤들이 많기 때문. 특히 룬스톤이 가장 많이 분포한 우플란드에서는 룬스톤 중 무려 70%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을 새겼다. 룬 문자로 라틴어 기도문의 발음을 음역해 새긴 경우도 있었다.

11.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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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복식 바이킹 고위층들의 푸른색 복식 바이킹 복식 재현 모습[98]
바이킹은 귀족 계급인 '야를', 자유민인 '카를', 노예인 '스렐', 이렇게 3개의 계급으로 나뉘었는데, 계급에 따라서 옷차림이 달라졌기에 외모만 봐도 어떤 계급에 속해있는지 분간이 가능했다. 가장 높은 야를에 속하는 남성과 여성들은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실크로 지은 값비싼 옷, 브로치, 벨트 버클, 목걸이 및 팔찌 같은 것들을 착용해 부를 과시했다. 반지는 거의 착용하지 않았고 귀걸이 역시 슬라브족의 특성이라고 여겨서 웬만하면 거의 안했으며 심지어 문신 또한 저 멀리 스키타이 튀르크 같은 변방의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겨 거의 하지 않았다. 야를보다 낮은 자유민 카를들은 야를보다 훨씬 소박하게 입고 다녔다. 웬만하면 다 비슷하게 튜닉과 바지, 거기에 망토를 걸쳐서 다녔다고 한다. 가장 비참한 노예 계급이었던 스렐들은 주인의 입맛에 따라 입는 옷이 달라졌다. 부유한 주인의 노예들은 웬만한 자유민들보다도 잘 차려 입고 다닐 수도 있었으나, 대부분 노예들은 딱 얼어죽지 않을 정도인 거적떼기를 걸쳤다.

바이킹 남성의 일반적인 복장은 튜닉 바지, 그리고 망토였다. 바이킹이라고 해서 맨날 갑옷에 투구를 쓰고 다녔던 것은 아니었다. 튜닉에는 단추가 없었으며[99]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팔 셔츠와 비슷하게 생겼었다. 어깨 너머로는 망토를 비스듬하게 걸쳐서 브로치로 고정했다. 망토를 두르는 팔은 칼이나 도끼를 휘두르는 팔이었는데, 이로써 그 남자가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바이킹식 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찬바람이 바지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무릎 아래에서 한 차례 묶었다고 한다. 발목이나 정강이 부분에는 따로 천을 둘러서 보온용으로 했고, 가죽으로 만든 기다란 부츠나 신발을 신어 눈 속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모든 곳이 다 그렇듯이 바이킹들 중에서도 상류층들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옷을 입었다.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재료는 해외에서 수입해오는 실크였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만들 수 없었고 100% 동로마 제국 산이었기 때문에 매우 값이 비쌌으며, 심지어 막노동을 많이 해야 하는 일반인들이 입기에는 내구도가 지나치게 약하고 잘 해졌기 때문에 실크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곧 상류층의 상징이었다. 특히 붉은색과 밝은 푸른색이 귀족들의 색깔이었다. 부유한 사람들의 옷에는 금실과 은실로 수를 놓았고, 모피로 안감을 대서 따뜻하게 만들었다.

바이킹들의 옷은 다양한 색깔이었는데, 염색을 하기 위해 일부러 식물이나 동물에서 추출한 재료를 끓여서 염색약을 만들기도 했다. 대부분은 노란색이나 빨간색, 보라색 및 푸른색이었다. 이 중에서 푸른색과 보라색은 지배자의 색깔이라 웬만한 권력자가 아니면 입기 힘들었다. 그래서 유적에서 발견되는 당시 옷들을 보면 푸른색 옷은 오직 부유한 바이킹들의 무덤에서 밖에 안나온다. 푸른색 염료는 식물 덩어리를 짓이겨 끓여 만들거나 외국에서 수입한 인디고로 만들었다.

바이킹 시대 직물 재료의 40%는 아마였고, 나머지가 가죽, 실크 따위였다. 그러나 아마의 효율은 썩 좋지 않았는데 튜닉 1벌을 짜기 위해서 아마 20kg이 필요했고 아마를 심고 키우고 옷 한 벌을 만들 때까지 무려 400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아무데서나 키울 수도 없어서 덴마크의 남부 일대에서만 재배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 북부나 스웨덴 북부 등지에서는 아마를 키우기 힘들어 동물 가죽을 벗겨입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정 안되면 덴마크나 중유럽에서 아마 옷감을 사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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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헤어스타일 바이킹의 영향을 받은 중세 기사의 머리
대부분 바이킹 남자들은 덥수룩한 장발과 수염을 기른 인식과 다르게 현대의 남성들처럼 머리를 짧게 깎았으며 수염을 면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이킹 남성들은 옆, 뒷머리를 민 언더컷이나 투블럭 형태 헤어스타일을 즐겨했으며 소년의 경우 일자 앞머리 형태의 칼단발 머리를 자주 했다. 수염 또한 면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턱수염을 면도하고 나머지는 카이저 수염이나 투스브러쉬 형태 콧수염으로 가꾸었다. 외모가 현대 북유럽인들과 별 차이가 없었는데 대부분은 금발이거나 적발이었다. 특히 스웨덴 동부는 금발이 많았고, 스칸디나비아 서부는 대부분이 붉은 머리였다. 여자는 남자와 달리 머리를 길게 길렀는데, 소녀는 느슨하게 풀어헤치거나 땋은 머리를 했고, 기혼 여성은 롤빵 머리를 하고 다녔다.

왠지 지저분했을 것 같다는 편견과는 달리, 세계적으로도 위생을 무척 중시하는 문화였다. 바이킹들의 거주지가 있었던 곳에서는 귀이개, 족집게, 면도칼이 잇따라 출토되고, 심지어는 원시적인비누도 사용했다고 한다.[100] 바이킹들의 노략질에 시달렸던 잉글랜드 측의 기록에도 바이킹들은 '굉장히 깨끗하게 정리정돈을 하며 산다.'고 적혀 있다. 또한 오늘날의 사우나처럼 온천의 증기로 목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101]
노르드인들은 매일 머리를 빗고, 매주 토요일에 목욕하며, 정기적으로 옷을 갈아입는 습관 덕분에 ( 앵글로색슨) 기혼 여성의 미덕을 떨어뜨릴 수 있었고 심지어 귀족의 딸들을 유혹하여 정부로 삼았다.
- 윌링포드의 존, 13세기 잉글랜드 수도사

다만 아랍인인 파들란의 기록에서 매우 부정적이게 묘사하는데, 식사 후 손을 닦지도 않고 대소변을 가려보지도 않으며 야생 당나귀 같다고 묘사하고 주인이 세수를 하면 그 물에 가래를 뱉고 그 물로 다음 사람이 이어서 세수를 한다는 점을 경멸스럽게 보았다.

12.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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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냘의 사가》 원고 삽화를 담은 바이킹들의 서적
바이킹 문학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가장 큰 이유는 라틴 알파벳이 그리스도교 전래 이후에야 들어왔기 때문에, 아직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시대에 살았던 바이킹들은 기록물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룬 문자가 존재하긴 했지만 이건 기나긴 텍스트라기보다는 짤막짤막한 문구나 뜻을 전달하는 매개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현대 학자들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외부의 그리스도교도나 무슬림들이 남겨놓은 사료들만 가지고 바이킹 문학을 연구해야 하는 판국이다. 외부인들의 자료를 기반으로 바이킹들을 연구하다보니 지나치게 바이킹들에게 부정적이거나 편향적인 관점이 보이기도 한다.

아이슬란드와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문학의 핵심은 바로 사가(Saga)였다. 사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건 《아이슬란드인의 무용담》(Íslendingasögur)으로 아이슬란드로 향하는 바이킹들의 항해, 이주하면서 겪었던 역경, 아이슬란드 전통 가문 내의 불화 등을 담은 무용담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9세기~11세기까지의 시대를 사가 시대라고 따로 구분하는데 대부분의 사가들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고대 노르드어의 방언인 고대 아이슬란드어로 쓰였고 아이슬란드 문학, 더넘어 바이킹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힐 정도이다. 당대 아이슬란드인들의 사는 모습과 전통을 그대로 표현했기에 굉장히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귀중한 작품들이기도 하다.

《아이슬란드인의 무용담》에는 수십여 개에 달하는 사가들이 적혀 있는데 그 대표작이 바로 《 냘의 사가》이다. 《냘의 사가》는 내용이 상당히 길고 복잡하지만 짧게 요약하면 가문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어떻게 대를 이어가 피튀기는 혈투로 악화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주인공은 용감한 바이킹 귄나르와 냘이고, 아이슬란드 가문들이 결혼과 사소한 시비가 걸려서 투닥투닥 죽이면서 싸우다가 결과적으로는 화해하고 평화를 되찾는다는 나름대로의 해피엔딩 스토리이다. 눈여겨볼 만한 점은 《냘의 사가》에서 분쟁이 생기면 법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결투를 벌여서 해결하는 경우가 더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법보다 무력이 우선시되었던 당시 아이슬란드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과정 역시 조금이나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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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숭 사가》에 등장하는 시구르드 브륀힐드
《락스델라 사가》도 유명하다. 위의 《 냘의 사가》가 가문 간의 명예 싸움이었다면 《락스델라 사가》는 사랑 싸움이다. 카르탄, 폴리, 구드룬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자란 사이였지만, 점차 성숙해지면서 구드룬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하자 카르탄과 폴리 두 남자가 서로 구드룬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삼각관계 때문에 서로간의 우정이 깨져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카르탄이 잠시 아이슬란드를 떠나 있는 틈을 타 폴리는 잽싸게 구드룬과 결혼해버렸고, 다시 돌아온 카르탄은 어마어마한 배신감을 느꼈다. 분노한 카르탄이 끊임없이 폴리와 구드룬 부부를 괴롭히자 참다못한 구드룬은 그녀의 오빠들과 폴리에게 카르탄을 죽여버리라고 시켰다. 폴리는 그녀가 시키는대로 카르탄을 죽였지만 그 순간 제 잘못을 깨닫고 크게 후회한다. 아이슬란드 법정은 폴리를 국외로 추방했고, 폴리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해 바랑인 친위대로 명성을 떨친다. 구드룬은 이후 3번 더 결혼하지만 결국에는 회의를 느끼고 수녀로 출가한다는 이야기이다.[102]

아이슬란드의 무법자 그레티르의 삶을 다룬 《그레티스 사가》도 있다. 《그레티스 사가》는 총 9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부터 13장은 그레티르의 증조부가 노르웨이를 탈출해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스토리를, 14장부터 85장은 그레티르의 삶과 정죄, 죽음에 초점을 맞추며 86장부터 93장은 그레티르의 이복형 토르스테인 드로문드가 복수를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궁정으로 향하는 여정을 다룬다. 원래부터 성격이 썩 좋지 않았던 주인공 그레티르는 전설 속에 나오는 영웅이 되고 싶어했다. 그는 실수로 오두막에 불을 질러 사람들을 살해했고, 이 죗값으로 무법자로 선포되었다. 무법자로 낙인찍힌 그레티르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그레티르는 같은 무법자 사이에서도 배신당하며 쫒기다가 결국 한 섬에서 외롭게 죽는다. 그야말로 북유럽 특유의 우울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서사시들 중 하나이다.

이 외에 《 볼숭 사가》, 《 빈란드 사가》 등도 잘 알려져 있다. 북유럽 신화가 천상 세계인 아스가르드에서 벌어지는 북유럽 신들의 이야기라면, 《 볼숭 사가》는 중간계인 미드가르드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외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 반지의 제왕》, 《 니벨룽의 반지》 등 유럽 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그 유명한 드래곤 슬레이어 시구르드 발키리 브륀힐드가 바로 여기에 나오는 인물이다. 북유럽식의 잔혹하고 폭력적인 내용들이 넘쳐나고, 현대인이 보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잔인함이 뚜렷하지만 그 작품성 만큼은 상당한 수준이다. 《 빈란드 사가》는 바이킹들의 북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탐험을 담은 작품으로 문학적인 가치보다는 사료적인 가치가 훨씬 더 크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몇 백년도 전에 이미 북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바이킹의 단편문학은 사트르, 서사집은 에다, 음유시인 스칼드라고 따로 부른다. 에다는 운문인 《고(古) 에다》와 산문집인 《신(新) 에다》로 나뉜다. 그 구분을 시간별로 한 것은 아니고, 일명 《왕의 서》(Codex Regius)라는 서적이 발견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고대 가요로 지어진 걸 '《고 에다》', 기존에 알려져 있었던 걸 '《신 에다》'라고 부른다. 이 에다가 중요한 이유는 북유럽 신화의 내용 대부분이 바로 《신 에다》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신 에다》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북유럽 신화는 반쪽 짜리도 못되는 불구였을 것이다. 아이슬란드 출신의 문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스노리 스튀르들뤼손 1220년에 엮어냈고, 해당 문헌이 작성된 13세기 경에는 이미 기독교가 아이슬란드에 침투하기 시작한 시점이었기에 기독교적인 내용이 은근히 많다. 심지어 라그나로크 이후 이름을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로 강한 신 오딘을 대신해 인간들을 보살펴 줄 거라는 등 내용까지 있다.

13. 스포츠

바이킹식 스포츠는 바이킹들을 닮아 폭력적이기 짝이 없었다. 바이킹들은 언제 어디서나 몸을 단련하고 힘을 길러야했고, 그 결과 스포츠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체력단련의 일종이었다. 창과 돌 던지기, 레슬링, 주먹 싸움, 무거운 돌 들어올리기 따위가 인기였는데 그중에서도 인기있는 것은 바이킹식 레슬링이었던 '글리마'였다. 글리마는 상대의 허리를 잡고 상대를 땅에 내동댕이치는 씨름 같은 경기였다. 지금이야 안전을 위해 벨트를 허리에 찬 채로 그걸 잡으며 경기를 하지만 당시에는 그냥 상의를 탈의한채 바지를 잡고 했다. 타입은 크게 트라우저 그립 레슬링, 백홀드 레슬링, 루스 그립 레슬링 등이 있었으며 현재는 아이슬란드의 국민 스포츠이다.

산이 많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특성상 등산은 그냥 흔한 일상이었다. 바이킹 전사들은 등산을 통해서 지구력을 길렀고, 달리기를 통해서 민첩성을 길렀으며 노젓기 등을 통해 근력을 키웠다. 스노리 스튀르들뤼손이 쓴 책만 봐도 바이킹들이 다이빙이나 장거리 수영 등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런 극한의 스포츠를 하는 건 대부분 남자였고 어린아이, 특히 여자는 이런 스포츠에 참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스포츠를 잘할수록 추앙받았는데 올라프 트뤼그바손 왕은 등산과 노젓기에 탁월했고 을 던져서 저글링하는 것이 취미였다. 그밖에 스키나 아이스 스케이팅도 즐겼다.

일반적인 문화권에서 투계가 유명했다면 바이킹들은 '투마'를 즐겼다. 밖에서 잘 보이는 울타리 안에 암말을 가둬두고, 발정난 종마 2마리를 그 앞에 갖다놓은채 서로 싸우도록 시킨 것이다. 종종 이 투마는 두 종마들 중 하나가 죽는 걸로 엔딩이 났는데 워낙 종마들이 비싸고 보충하기 힘든 동물이라 아무데서나 치를 수 있는 경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투마가 치러지는 건 잔칫집이나 부잣집에서나 가능했고, 한 번 열린다치면 군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이슬란드 한정으로는 '크나틀릭(Knattleikr)'이라는 독특한 스포츠를 즐겼다. 현대의 하키와 비슷한 스포츠로 매끄러운 얼음 위에서 배트와 작고 딱딱한 공을 가지고 노는 스포츠였다. 성인과 어린 아이들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얼음 위에서 하는 미식축구 급으로, 사납고 거칠어서 부상자들이 속출하는 위험한 경기이기도 했다. 투마와 마찬가지로 한 번 열리면 사람들이 미어터졌다고 한다. 원래는 실전되었지만 현대에 들어서 북유럽 문화 애호가들이 다시 부활시켰는데, 예일 대학교, 클라크 대학교 등 대학별로 팀경기를 치른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즐긴 스포츠가 이 정도였으나 정말 고급진 취미는 바로 사냥이었다. 평민들이야 먹고 살기 위해, 밥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사냥을 했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사냥이 취미였다. 특히 북유럽 3국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어 먹을 게 많아 사냥이 필수가 아니었던 덴마크에서 사냥을 스포츠로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사슴, 산토끼, 자고새 등이 주요 사냥감이었고 여우는 모피를 얻기 위해 사냥했다. 주요 무기는 창과 활, 칼 등이었고 종종 사냥감을 쫒기 위해 사냥개를 풀어 쫓았다.

14. 오락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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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식 연회의 상상화

바이킹이라고 하루 종일 패싸움만 벌이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바이킹들도 나름대도 머리를 쓰는 게임과 오락거리들을 즐겼다. 특히 유명한 것이 스칸디나비아 최북단에 사는 사미족이 즐기던 보드게임인 타블룻이다. 고누 체스 중간의 그 어딘가에 위치한 게임으로 플레이어가 흑•백 한 진영을 가지고 격자판 위에서 게임을 펼친다. 백은 자신의 왕을 격자판 네 모서리들 중 하나로 보내면 이기고, 흑은 백이 모서리에 가기 전에 왕을 잡으면 이긴다. 게임 보드 자체는 동물 뼈, 나무, 상아 따위로 만들었다. 엄밀히 말해 사미족의 타블룻은 고대 바이킹들이 즐기던 그 보드게임과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바이킹들의 게임은 이미 오래전에 체스에 밀려 사라졌기에 현대에 들어서 사미족의 타블룻을 기반으로 바이킹식 타플 게임을 복원한 것에 더 가깝다.

바이킹의 놀이에는 흔히 생각하는 음주와 싸움, 무훈 자랑에서 사냥이나 노래, 타블룻이라는 고누 장기와 비슷한 보드게임 등이 있었다. 여러 형태로 나뉘었으며 13×13 양식의 네파타플(Hnefatafl)이 널리 알려져 있다.

바이킹식 연회는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당시 유럽 연회가 대부분 그랬듯이 음악 연주, 시 낭송, 이야기 따위가 연회의 주류였고 사람들은 맥주 벌꿀술을 마셔댔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발할라의 연회가 바로 바이킹식 연회의 이상향에 가깝다. 연회에서 음악은 의외로 천대받지 않고 오히려 존중받았는데, 음악이 단순한 잡기가 아닌 예술로 여겨졌으며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악기 하나쯤 다루는게 상식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바이킹들이 즐겨 연주하던 악기들 중에는 하프, 류트, 거문고 바이올린 따위가 있었다.

바이킹들의 잔치는 척박한 땅에 사는 바이킹들이 입에 기름칠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보통 주최자의 부에 따라 규모가 좀 달라지긴 했지만 보통 바이킹들은 잔치를 호화롭게 여는 걸 좋아했다. 큰 잔치는 12일 동안 지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12월 20일부터 31일까지 12일 동안은 연말 연회를 열었고, 춘분에 맞추어서 대지의 다산을 기원하는 축제인 '오스타라'를 열었다. 바이킹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하지 기간에는 딱히 축제를 열지 않아도 약탈해온 음식과 물건들이 많아서 축제가 열리는 빈도가 적었다. 가을이 되고 점차 바이킹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시기가 되면 그제서야 성공적인 약탈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렸다. 가을이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기에 대부분의 결혼식이나 대규모 행사는 다 가을에 열렸다.

술집에서는 서로에게 모욕을 주는 욕설 배틀[103]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현대의 랩배틀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고 한다. 아무 욕지꺼리나 하는 것이 아니라 라임과 리듬을 중요시하는 시적 표현으로 싸웠으며 상대방이 발언하면 그 말을 받아서 연관된 단어로 대처해야 하는 등 여러 규칙들이 있었다. 특히 랩배틀에서 상대를 찍어누르는 소위 ' 펀치라인'이 존재하기도 했다. 즉, 그냥 말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놀이 문화였으며 세간의 인식과 달리 몸싸움이 아닌 말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도 명예롭게 여겼다. 이 문화는 중세 영국까지 퍼졌으며, 로카센나와 같이 욕설로 겨루는 모습을 다룬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5. 식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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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식 식사
바이킹식 잔칫상을 재현한 영상

일상식으로는 화덕에 구운 플랫브레드에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식재료를 곁들여 먹었다. 농장에서 직접 기른 야채와 돼지(주로 집에서 직접 절인 베이컨)로 만든 스튜를 몇 날 며칠씩 끓여먹었으며 계절에 따라 남자들이 숲에서 잡아온 짐승의 고기나 아이들이 주워온 열매와 견과류를 같이 먹기도 했다. 코티지 치즈 또한 우유를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해안에 인접한 공동체의 경우, 여기에 대서양대구 대서양청어, 어패류 같은 해산물이 추가되었다. 음료는 맹물이나 음식에 쓰고 남은 버터밀크를 주로 마셨으며 가끔 약한 에일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과수원에서 기른 자두 따위의 과일은 (대부분의 자유민 입장에서) 나름 귀한 별식 취급이었기에 일상에 후식으로 나오는 경우보다는 축일에 꿀을 곁들인 신선한 빵과 같이 먹는 경우가 많았다.

잔칫날에는 온 가족이 롱하우스에 모였다. 먹는 음식들은 일상식에 양과 질을 늘린 형태를 띠었는데 옛 신들에게 제물로 바친 신선한 말고기를 케밥과 유사한 꼬치구이로 만들어 먹기도 했고, 기독교를 믿는 가정의 경우 전통 축일에도 어린 양고기를 먹었다. 이런 날에도 훈제나 염장 고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구운 고기 또한 생고기보다는 조금 오래 가는 만큼 여유가 되는 대로 생고기를 구워먹었다.

바이킹들은 온갖 종류의 고기들을 소비했다. 말, 소, 양은 물론이요 암탉 거위까지 해치워댔다. 심지어 잉글랜드 북부 요크의 바이킹 유적지에서는 모든 뼈들이 세로로 갈라진 채로 발견되었다. 바이킹들이 뼈 내부의 골수까지 빨아먹기 위해 일부러 뼈들을 세로로 쪼갰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머리가 부드러운 양이나 돼지는 머릿고기를 통째로 썰어 편육을 만들어 먹었고, 족발도 좋아했다. 은 고기와 계란을 얻기 위해 길렀고 검은 뇌조, 금물떼새, 야생 오리, 야생 거위 같은 야생 조류들도 사냥해 먹었다.

해안가에서 활동하던 바이킹들이라 해산물이 고기보다 더 중요하게 대접받는 곳도 있었다. 특히 한 번 먹으면 다시 보충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가축들과는 달리, 해산물은 항구가 얼지 않는 한 1년 내내 잡아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가장 선호되었던 사냥감은 고래 바다코끼리였다. 노르웨이와 북대서양 지역의 바이킹들이 주로 잡았는데 지방이 많아서 인기가 많았다. 고래와 바다코끼리는 산지가 제한되어 있어 먹을 수 있는 지역이 많지 않았지만 흔한 물개는 스칸디나비아 전역에서 잡아 먹었다. , 홍합, 새우는 바다에 나가기만 하면 널려 있어서 대량으로 먹었으며 대구 연어 같은 생선들은 훈제해서 먹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청어를 잡아서 먹기도 했다.

바이킹의 경우, 채집꾼의 이미지가 강하지는 않지만 그들 역시 과일, 채소, 견과류 따위를 채집하거나 길러서 먹었다. 사과, 자두, 체리는 바이킹들이 즐겨먹는 과일이었고 로즈힙, 라즈베리, 산딸기, 블랙베리, 엘더베리, 마가목 등에서 딴 열매는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해줬다. 헤이즐넛이나 호두 같은 견과류도 잘 챙겨먹었는데, 열매는 먹은 다음에 그 껍질로 염색도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였다.

바이킹 시대 초기에 쟁기라는 혁신적인 발명품이 도입되면서, 척박하기 짝이 없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도 좀더 효율적인 농업이 가능해졌다. 호밀, 보리, 귀리, 같은 곡물들이 재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재배한 곡물과 밀가루는 을 만들어먹거나 일부는 으로 구웠다. 노르웨이의 빵집에서 누룩의 흔적이 발견된 걸 보면 누룩도 넣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곡물로만 만든 빵들은 먹기에 너무 빡빡하고 거칠었다. 그래서 바이킹들은 말린 과일이나 꿀, 우유를 넣어 어떻게든 먹을 만한 빵을 만들어보려고 시도했지만 그런 빵은 가장 부유한 사람들만 먹을 수 있을 뿐, 대부분 사람들은 거칠고 맛이 없는 빵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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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식 호밀빵 바이킹식 벌꿀술 바이킹식의 연회상
바이킹들이 먹던 빵의 질은 썩 좋지 않았다. 요크에서 발견된 바이킹 시대의 빵은 통밀가루를 써서 만들었는데, 이 빵을 분석해보니 잡초의 씨앗이 포함되었다. 문제는 이 씨앗이 빵을 시커멓게 만드는 데다가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배탈이 난다는 것이다. 당근, 파스닙, 브라시카 등의 씨앗도 발견되었지만 이것도 영 질이 좋지 않았다. 분석해봤더니 당근은 제대로 익지도 못했고, 양배추는 쓰고 밍밍해서 제대로 먹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식재료의 질조차도 좋지 않았는데 바이킹들이 쓰던 맷돌은 현무암 재질이라 사용하면 돌가루가 같이 갈려나왔다. 이렇게 만든 음식을 먹으면 치아가 잘 상해서 나가거나 닳아버렸는데 실제 바이킹들의 유골을 확인해보면 치아가 죄다 닳아 있다.

바이킹들은 벌꿀술을 물마시듯이 마셔댔다는 편견이 있는데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벌꿀술은 아무때나 먹을만큼 흔한 음료수가 아니었다. 벌꿀술은 애초에 을 발효시켜서 만드는 음식이다. 기온이 낮은 스칸디나비아에 꽃이 많을 리가 없고, 꽃이 없으니 벌이 없으며 벌이 없으면 꿀이 없다. 바이킹들은 맥주와 벌꿀술, 심지어 와인까지 만들어 마셨지만 벌꿀술은 왕족들의 음료수라고 할만큼 귀했다. 일반적인 바이킹들이 벌꿀술을 마실 때는 특별한 행사나 잔치 때 뿐이었다.

바이킹들은 벌집을 헝겊에 넣고 쥐어짜 순수한 꿀을 짜냈다. 벌집이 워낙 귀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최대한 쥐어짠 벌집을 또 헝겊에 넣고 빗으로 꾹꾹 눌러 극한까지 짜낸 다음 물에 넣었다. 맨 처음에 짜낸 순수한 꿀은 최상급의, 즉 귀족들이 먹는 벌꿀술을 제조할 때 썼고 남은 벌집은 자유민들이 먹는 하급 벌꿀주를 제조하는 데 사용했다. 꿀과 물을 섞은 다음, 효모와 허브, 향료 등을 넣고 따뜻한 곳에 놓은 뒤 발효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적어도 하루에 3번 정도 막대기로 저어주어야 했고, 약 5일 정도가 지나면 점차 거품이 나더니 발효가 끝났다. 효모의 활동이 느린 겨울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완성된 귀중한 벌꿀술은 오크통에 넣어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마셨다.

완성된 벌꿀주는 금빛이 돌았고, 알콜 농도가 약 8~20% 정도로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증류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 발효만으로 알콜 농도가 그보다 더 높아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통째로 들어 벌컥벌컥 마시는건 더더욱 도수가 약했다. '벌꿀' 술이라고 해서 단 맛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벌꿀의 당분이 발효 도중에 죄다 분해되어버려서 의외로 단 맛은 잘 안났다. 술을 좋아하던 바이킹들은 여러 향을 첨가해서 먹기도 했는데, 라즈베리, 엘더베리, 체리, 산사 열매, 제비꽃, 심지어 민들레까지 넣었다. 종종 잎이나 히비스커스를 첨가해 먹는 사람도 많았다.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는 이 벌꿀술을 하도 좋아해서 신혼부부가 결혼하면 1개월 동안 벌꿀술을 마시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허니문의 유래일 정도이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것처럼 염소뿔이나 소뿔로 뿔잔을 만들어 벌꿀주를 마시는 건 보편적인 일이었다. 물론 나무로 깎은 잔도 있었지만 뿔잔이 그 특유의 분위기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스칸디나비아 현지의 바이킹 마을에 가면 아직까지도 뿔잔을 사용하는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다. 물론 동물권 문제 때문에 실제 동물의 뿔을 잘라 만든 뿔잔은 점차 수요가 줄어들고 있고, 플라스틱으로 느낌만 살린 뿔잔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짜 뿔잔을 쓰면 아무래도 훨씬 비위생적이기도 하고.
바이킹식 여행식을 소개한 영상

말린 청어 육포, 버터밀크로 구운 쿠키 등 이동에 유리한 보존식품 위주의 음식들을 볼 수 있다. 다만 당시의 보관 기술의 한계로 일상식 또한 보존식의 비율이 높았기에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뱃사람들이 먹던 뻑뻑한 말린 어포 수준은 아니지만 훈제나 염장 정도의 처리는 필수였고, 같은 이유로 소시지도 만들어 먹었다.

16.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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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바이킹의 무역로
바이킹들이라고 해서 약탈만 한 것이 아니라 교역도 했다. 저멀리 중국에서부터 시작한 실크 로드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지중해까지 이어졌는데, 이렇게 흘러들어온 물산들이 다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북해까지 유입되었다. 그 누구보다 배와 바다에 친숙했던 바이킹들은 이 방대한 전세계적 무역 네트워크에 끼어들어 한 몫 단단히 차릴 수 있었다.

국제 교역로에서 막대한 부를 창출할 기회를 엿본 바이킹들은 스칸디나비아 인근에 수많은 항구들을 세웠다. 수많은 바이킹 항구도시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덴마크 리베와 헤데비, 노르웨이의 카우팡에르, 스웨덴의 비르카 등이 가장 규모가 크고 교역량도 많았다. 이중에서도 덴마크의 헤데비가 규모만 보면 압도적이었는데, 스칸디나비아 일대에서도 가장 남단인 덴마크 남쪽에 있어 바다가 얼지 않았으며, 바이킹들의 남북 무역로(유럽과 스칸디나비아 사이)와 동서 무역로(발트 해와 북해 사이)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그 정점에 달했을 때 헤데비의 인구는 몇 천여 명에 달했다.[104]

그 외에도 덴마크 서부 해안가에 위치한 리베는 8세기 초 북해 무역 네트워크의 동쪽 경계에 위치한 도시였다. 한때는 수많은 물산들이 이동하는 북적북적거리는 꽤 큰 항구도시였지만 1000년 이후부터 대륙 경제가 육상 무역 위주로 전환되고, 발트해 항구 도시들의 기능이 쇠퇴하면서 리베도 쇠락했다. 스칸디나비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등 대륙에도 바이킹 항구도시들이 많아서 노브고로드, 키예프, 체르니히우, 그뇨즈도보 같은 도시들에도 바이킹 무역소들이 들어섰다. 주로 발트 해와 중앙아시아 사이의 무역상들이 여기에서 이익을 많이 봤다고 한다.

바이킹들이 무역하는 물건들은 상당수가 해외에서 약탈해온 장물들이었다. 특히 바이킹 최대의 수출품은 노예였다. 바이킹들은 유럽에서 수많은 노예들을 잡아와 '스렐'로 낙인찍고 저 멀리 이슬람 세계로 팔아 넘겼다. 바이킹들은 노예를 팔아서 물건과 교환하기도 하고 빚을 갚기도 했다. 노예들의 가격은 외모, 나이, 성별, 기술, 건강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가격들이 천차만별이었는데, 특히 젊은 백인 여성이나 미소년들은 아랍 쪽에서 인기가 많아 불티나게 팔렸다. 약탈지의 백인들만 잡아서 판 것도 아니어서, 심지어 같은 바이킹 북유럽인들도 노예로 팔아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잡아온 아랍인들을 노예로 팔기도 했다. 가끔씩 귀한 출신의 포로가 노예로 잡히는 일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일부러 살려뒀다가 몸값을 비싸게 받고 풀어주면서 짭짤한 이득을 봤다.

노예를 주로 팔았으나 주석, , 양모, , 같은 기초적인 자원들은 물론 바다코끼리 상아, 모피, 순록 녹용, 호박 같은 북유럽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산물을 팔기도 했다. 바이킹들은 이런 물건들을 팔아 외부에서 은, 비단, 향신료, 무기, 와인, 유리 제품, 고급 직물, 도자기, 귀금속 따위를 사왔다. 특히 북유럽산 모피가 그렇게 인기가 많았는데 아랍쪽으로 갈수록 인기가 폭발해서 한 번만 제대로 거래해서 대박이 나면 평생 먹고 살 만한 부를 챙길 수 있었다. 10세기 아랍 작가가 '북유럽산 검은 가죽 한 장이 무려 100디르함에 달한다'고 불평한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바이킹들은 중국과 페르시아 상인들로부터 향신료를 사들였다. 백리향, 캐러웨이, 홀스래디시, 겨자 등은 북유럽에서도 자생해서 굳이 수입할 필요가 없었으나 후추 사프란은 어쩔 수 없었다. 동로마 제국과 중국에서는 비단을 수입했는데 비단은 곧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라 인기가 많았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입해온 와인은 비싼 음료로 서민들의 맥주보다 가격이 한참 비쌌다.

발트 해 북해 연안에서 자주 발견되는 호박은 북유럽 특산품이었다. 북유럽산 호박은 이미 오래전부터 재질이 맑고 투명한 걸로 이름이 높아 '앰버 로드'라는 선사시대 무역로가 있을 수준이었다. 담비, 여우, , 수달, 비버 모피도 비싸게 팔아 이익을 챙겼고 양모도 팔았다. 심지어 새의 깃털도 판매했다. 아무래도 추운 지방이다보니 보온재가 크게 발달했는데, 노르웨이 서해안에서는 솜털 이불을 만들기도 했다. 다만 새 깃털을 얻기 위해서는 가파른 절벽을 타서 새를 잡아야했는데 엄청 위험해서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바이킹제 무기, 왁스, 상아, 소금, 대구, 숫돌, 가죽 같은 물건들도 다양하게 팔아 이문을 남겼다.

바이킹들은 이슬람권에서 주조한 은화 동전들을 사랑했다. 돈 앞에서는 이교도고 야만족이고 가릴 필요가 없었다. 고틀란드에서는 무려 8만 닢에 달하는 이슬람 디르함이 발견되었으며, 스웨덴 본토에서도 이슬람 은화가 4만 닢 이상 출토되었다. 심지어 바이킹들이 은괴를 주조하기 위해 유입된 은화를 상당수 녹여버렸으므로, 당시에는 이것보다도 은화들이 훨씬 많이 유통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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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에 노예를 판매하는 바이킹 바이킹들이 거래용으로 썼던 은제 물건들 바이킹들의 노예무역
바이킹들은 상하지 않고 영원히 보관할 수 있는 귀금속을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대부분의 경제활동은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지만 을 사용해 부를 축적하기를 더 좋아했다. 9세기까지 바이킹 경제의 기반은 바로 이슬람권에서 유입된 이었다. 그러나 바그다드 근처의 은광이 고갈되고 은의 유입이 끊기자 어쩔 수 없이 바이킹 본인들이 독일 근처 하르츠 산맥을 개척해 직접 은을 뽑아내었다. 이렇게 하르츠 산맥에서 채굴되어 주괴, 덩어리, 동전 형태로 주조한 은덩어리들은 바이킹 문화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105]

11세기 초 아이슬란드의 환율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은 8온스 = 금 1온스였고, 은 8온스는 즉 젖소 4마리를 살 수 있었으며 양 24마리를 살 수 있었다. 또한 은 8온스로는 폭 1m, 길이 72m에 달하는 직물 '와드말'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돈을 조금만 더 보태서 은 12온스를 만들면 이걸로 성인 남성 노예 1명을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은괴 형태가 아닌 은제 장신구로 가격을 지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워낙 거래에 철저해서 만약 장신구가 지불 가격보다 더 무거우면 그 가격만큼만 잘라서 가져갔다.[106] 상인들은 조그마한 개인용 저울을 휴대하며 다녔고 즉석에서 은의 순도와 가치를 계산할 수도 있었다. 큼직한 은괴를 써서 거래하는 건 대규모 거래나 고액거래 때만이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거대한 바이킹 은괴는 무려 1kg에 이른다.

덴마크 국립박물관에 의하면 당대의 바이킹들은 코미인들을 비롯한 북극 문화권의 민족들과는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시대에 따라서는 이들의 문화를 일종의 유행처럼 받아들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훗날 같은 종교관을 공유하게 될 남쪽의 서게르만계, 라틴계 기독교 국가들을 오히려 더 적대시했다는 점이 매우 얄궂다. 바이킹들은 추운 지역에서 항해하는 일도 잦았고 거기다 그런 기후에서도 갑판 생활을 지속해야 할 수도 있었으니 북극 문화권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야 할 간절한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107]

바이킹들은 해상 무역을 통해 스칸디나비아와 영국, 북해 일대에서 가장 많이 교역했지만 육로를 통할 수도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볼가 교역로'와 '바랑인-그리스 교역로'다. 볼가 교역로는 볼가 강을 통해 동유럽 러시아를 거쳐 저멀리 카스피 해 사산 왕조와 교역하는 루트였다. 체스가 페르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된 루트이기도 하다. 볼가 불가르인들과 루스인들이 바이킹과 페르시아 사이를 중개무역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고, 한때는 상당히 거대한 교역로였지만 11세기에 들어 아바스 왕조의 쇠퇴와 은 생산량 감소로 중요성이 떨어지더니 결국에는 쇠락했다.

바랑인-그리스 교역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키예프 루스, 동로마 제국을 연결하는 교역로였다. 바이킹들이 애용했던 꿀단지같은 무역로들 중 하나로 발트 해 드니프로 강을 따라 쭉 내려오다가, 키예프를 지난 뒤 흑해 서부 해안가로 붙어서 항해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직통하는 교역로였다. 바랑인 친위대로도 유명한 바랑인들이 8세기 말 즈음에 뚫었고, 10세기와 11세기에 크게 번성했다. 바이킹들은 무기, 수공예품, 목재, 모피, 꿀, 밀랍 등을 팔았고 동로마 제국은 와인, 향료, 보석, 유리, 고급 직물, 성화, 같은 고급 물건들을 팔았다. 그러나 11세기에 십자군들이 중동에 세운 십자군 국가들을 통해 유럽에서 동양으로 가는 또 다른 루트를 뚫어버렸고, 상대적으로 통행이 불편했던 바랑인-그리스 교역로는 점차 쇠퇴했다.

17. 바이킹 함선

17.1. 랑스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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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전투함 '랑스킵' 바이킹 무역선 '크노르'
바이킹의 배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탐험, 무역, 전투 등의 다목적 선박인 랑스킵(Langskip)[108]과 무역, 수송 및 대서양 항해에 특화된 크노르(Knǫrr)이다.[109] 우리가 흔히 '바이킹 배'하면 생각나는 뱀머리 장식과 거대한 돛, 방패가 옆면에 주렁주렁 달린 배는 대부분 '랑스킵'에 해당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랑스킵의 경우, 재질이 가볍고 선체가 안정적이어서 기동성이 당대의 다른 배들보다 우월했다. 흘수가 굉장히 얕아서 심지어 수심 1m의 바다에서 항해가 가능할 정도였다. 그랬기에 해안가 바로 앞까지 바이킹들을 빠르게 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상륙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으니 약탈한 뒤 빠르게 치고 빠지는 데는 아주 그만이었다. 약탈이라는게 속도가 생명이라 항속도 당시치고는 굉장히 빠른 편에 속했는데, 보통 시속 9km~19km 안쪽에 있었고 바람만 잘 불어준다면 15노트, 즉 시속 28km까지도 낼 수 있었다.

랑스킵은 앞뒤가 완벽히 대칭이었다. 그래서 굳이 뱃머리를 돌릴 필요도 없이 노젓는 방향만 바꾸면 배의 방향을 쉽게 뒤집을 수 있었다. 또한 추진력을 최대한 내기 위해서 뱃전 거의 전체에 노를 빽빽하게 깔았다. 돛대를 여러 개 설치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그럴 공간조차 없었기에 웬만한 랑스킵은 단일 돛대에 거대한 직사각형의 돛을 달았다. 이 돛은 특히 장거리 항해 도중 노젓는 사람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순풍이 불어 바람이 대신 배를 밀어줄 때는 노잡이들이 잠시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킹들의 랑스킵은 일정한 규격이 있거나 형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건조하는 지방에 따라서 돛대의 형식, 선체의 모양, 나무 재질도 죄다 달랐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정말 기본적인 틀은 존재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 틀에 기반해서 랑스킵을 대략 네 가지로 분류한다.

첫 번째는 카르베다. 카르베는 랑스킵 중에서도 가장 작은 배들인데, 10세기의 관제법에 따르면 약 13열의 노잡이용 좌석이 딸린 소형 군용 선박이라고 정의가 되어 있다.[110] 말은 랑스킵이지만 군용보다는 어업용이거나 무역선으로 더 많이 썼다. 비율도 다른 랑스킵들과 차이가 많이 나서 다른 랑스킵들은 길이 대 너비의 비율이 7:1인데 카르베만 9:2였다. 1880년대에 발굴된 9세기 경의 카르베 선박이 가장 유명한데, 길이는 약 23m에 16열의 노잡이 좌석이 있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스네크야이다. 카르베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랑스킵인데 보통 본격적인 전쟁에 투입되는 건 스네크야급 함선부터였다. 최소 20열의 노잡이용 좌석이 있었고 일반적으로 길이 17m, 너비 2.5m, 흘수가 0.5m였다. 승무원은 대략 41명으로, 노잡이 40명과 지휘관 1명으로 구성되었다. 가장 흔한 유형의 랑스킵이기도 해서, 북해 제국을 건설한 크누트 대왕은 전투 한 번 나가는데 무려 1,200여 척의 스네크야를 동원했고, 대부분의 바이킹들은 이걸 타고 약탈을 나갔다. 배치고는 굉장히 가벼운 편이라 정박지도 필요하지 않았고, 그냥 해변에 끌어 올려두면 끝이었다. 심지어 사람들이 들어서 쉽게 옮기는 것도 가능했다. 스네크야는 바이킹 시대가 종결된 이후에도 계속 쓰였고 현대에는 더 크고 무겁게 진화했다. 현대 스웨덴어로는 '스니파', 노르웨이어로는 '스네케'라고 부른다.

세 번째는 스케이드이다. 용어 자체는 칼이 들어가는 칼집을 의미한다. 30열 이상의 노잡이용 좌석을 가진 전함을 스케이드라고 보는데 보통 이쯤 되면 바이킹들 사이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거대한 배였다. 대략 70명에서 80명을 태울 수 있었는데 워낙 개수가 적어서 현대까지 발견된 것도 고작 2척밖에 없다. 하나는 1962년에, 하나는 1996년에 발견됐는데 1962년에 발견된 스케이드는 1042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참나무로 건조되었고 30열의 노잡이용 좌석이 있었다. 1996년에 다른 항구에서 또다른 스케이드가 발견됐는데, 그 길이가 무려 37m로 현존하는 최장 바이킹 함선이다. 1025년에 진수된 걸로 추정되며 바이킹 함대의 주력을 담당했던 걸로 보인다. 2012년에는 노르웨이에서 35m짜리 바이킹 스케이드를 재현해서 진수하기도 했다.

네 번째이자 가장 유명한 게 바로 드라카르이다. 뱃머리에 용이나 뱀의 머리를 달고 다니는 랑스킵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바로 이 드라카르의 모습이다. 가장 독특하게 생겼고 화려하며 크기도 압도적으로 컸는데, 좌석이 최소한 30열 이상이었고 훨씬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드라카르를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10세기 경 헤럴드 페어헤어가 소유했던 드라카르였고, 가장 유명한 드라카르는 노르웨이 국왕 올라프 1세가 건조한 거대한 드라카르였다. 999년과 1000년 사이의 겨울에 만들어졌으며 무려 방 34개가 딸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 드라카르는 단 한 척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드라카르를 그냥 스케이드와 같은 분류로 넣기도 한다. 그냥 스케이드에 뱀머리만 붙이면 드라카르가 된다는 식이다.

바이킹들의 무역선이었던 크노르는 랑스킵보다 더 폭이 넓고 깊었으며 길이는 약간 작았다. 화물 운송이 주목적이라 적재 화물량은 최대로, 승무원의 수는 랑스킵보다 적었다. 일반적인 크노르는 길이 약 16m, 폭 5m으로 1척이 약 24톤에 달하는 화물을 적재 가능했다. 주 수송품은 바다코끼리 상아, 양모, 목재, 모피, 갑옷, 노예, 밀, 꿀 및 무기 등이었다. 빈란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교역로의 장거리 루트도 항해할 수 있을만큼 선체가 안정적이었고 브리튼 제도, 유럽 대륙, 중동의 교역소까지 운행했다. 현재까지 보존된 바이킹 크노르는 단 한 척뿐으로 1962년 덴마크에서 출토되었다. 적들이 수로를 통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수로 바닥에 크노르 한 척을 가라앉혔는데 이게 현대에 발견된 것이다. 현재는 덴마크의 바이킹 선박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17.1.1. 건조하는 방법

랑스킵을 만드는 방법
바이킹들의 조선소에 정확한 도면이나 설계도가 있을 리 없었다. 바이킹들은 그냥 눈대중으로 배를 만들었다.[111] 일단 용골과 배의 기본 줄기를 만들었다. 용골은 양 옆의 용골판들을 받쳐야했기 때문에 뒤집어진 T자 모양이었고, 단일한 하나의 목재가 아니라 여러 목재들을 못으로 고정해서 묶은 것이었다.

용골과 배의 기본 뼈대를 만들었으면 선박의 측면을 널빤지로 채울 차례였다. 거의 모든 랑스킵들은 측면의 널빤지들이 약간 서로 겹쳐지도록 붙이는 '클링커' 기법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떡갈나무로 만든 널빤지의 두께는 약 2.5cm였고 각 가장자리를 따라 점점 가늘어지더니 맨 끝은 2cm 정도로 얇아졌다. 널빤지를 만들 때는 일부러 나무의 결이 표면과 수직이 되도록 잘랐는데 이렇게 자르면 최대의 강도를 얻을 수 있었고, 나무가 물 속에서 고르게 팽창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선박의 밑바닥, 즉 용골과 바로 접하는 밑창 부분은 일부러 더 단단한 목재를 써서 만들었다. 최소한 4cm 두께 널빤지를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상륙할 때에 수면 아래의 모래바닥과 바로 충돌하는 부분이기도 했으므로 비싼 금속 못을 박아서 보강했다.

배에 물이 샐 것을 대비해서 널빤지 틈에다 가죽이나 동물 털을 쑤셔넣었다. 때로는 수밀성을 더하기 위해 소나무 타르에 적신 대마를 넣기도 했다. 널빤지가 거의 직선이나 다름없는 선체 중앙에서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선미와 선수로 갈수록 점차 배가 좁아지면서 널빤지도 휘어져야했는데, 이 때문에 끝의 판자에는 상당한 비틀림과 휘어짐이 발생했다. 그래서 일부러 50% 정도 두께가 얇은 판자를 쓰거나 아예 특수처리를 한 목재를 거기다 붙였다. 선미나 선수에 쓸 목재는 일부러 건조하지 않고 겨울 늪지에 보관했는데 이러면 잘 휘어지지 않는 목재가 완성되었다. 그러면 이 목재를 가져다가 정교하게 깎아 딱 곡선 모양을 내서 붙이는 것이었다.

용골과 배 뼈대에 널빤지를 붙이다가, 일정 부분 이상 옆면이 채워지면 내부 프레임과 목재 빔을 추가했다. 내부 프레임은 일부러 가깝게 배치했는데 이는 판자가 너무 얇아서 프레임을 멀리 배치하면 압력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용골 바로 위의 바닥은 L자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외부에서 못질로 박아서 고정했으며 내부에서 밧줄로 다시 한번 묶어 고정했다. 이렇게 못을 많이 사용했으니 랑스킵 한 척에는 보통 700kg에 달하는 철못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바이킹들이 실제로 쓰던 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바이킹들을 묘사한 기록들을 보면 바이킹 랑스킵에 돛대 하나와 직사각형의 거대한 돛이 달려 있었음을 확인 가능하다. 대략 11~12m에 달하는 거대한 돛이었고, 거친 양모로 만들었다. 돛은 최대 16m 높이에 달하는 돛대에 고정되었고, 돛대는 반원형의 마스트 스텝으로 고정되었다. 마스트 스텝은 참나무로 만들었고 너비 70cm, 길이 6m 정도였다. 돛대는 그 어떤 곳보다도 부러지거나 파손되기 쉬운 곳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배 가장 아래 용골에까지 박아 넣었고 그곳도 모자라 프레임 2개로 보강했다. 하지만 이것도 충분치 않아서 '미스트 피쉬'라고 하여 갑판 바로 아래에 돛대를 받쳐주는 길이 3m 정도의 두껍고 거대한 기둥이 있었다. 돛대의 길이는 배 전체 길이의 절반 정도였고, 그래서 쓰지 않을 때는 돛대를 접어 갑판 위에 보관했다.

유명한 바이킹 배로는 노르웨이의 오세베르그에서 발견되어 잘 보존된 '오세베르그 배'가 있다. 무덤 근처에서 발견되었고, 젊은 여성과 나이 든 여성 두 명의 유골도 있었으며[112], 사치스러운 부장품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의식용으로 만든 배라는 게 정설이다. 배에 있는 장식 등은 너무나 정교하게 만든 반면 실용성은 별로인 것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한다. 항해보다는 아마 해안에서 열리는 의식에 활용된 배라고 보고 있다.

17.1.2. 항해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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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들의 방해석 나침반 해시계 유물과 복원도
노를 저어 강을 역류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현대의 고무보트처럼 전사들이 들고 이동하기도 했다. 바이킹은 유럽을 약탈할 때 수로를 많이 이용했는데, 노르드인들은 이러한 뛰어난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전술을 구사해 당시의 다른 민족[113]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크노르는 수송이 주목적이어서 랑스킵과 비교했을 때 더 짧으면서 넓고 더 깊게 지어졌다.[114] 최대 24톤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고 한다.

랑스킵의 속도에 대해 입증된 기록으로는 1893년에 바이킹 선을 재현해 대서양을 횡단한 사례가 있다.[115] 이 항해는 28일 만에 성공했는데 이는 하루에 평균 185km를 이동한 것이다. 유럽을 공격했을 때 바투와 수부타이의 몽골원정군의 하루 평균 이동속도가 하루에 25~27km였다는 것 출처[116]을 생각해 보면 경악할 만한 수준이다.[117]

바이킹들은 원시적인 아스트롤라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린란드 남부의 바이킹 농장 유적에서는 원시적인 해시계가 발견되었는데, 이걸 토대로 바이킹들이 태양을 이용해 항해 방향을 잡았을 거라 추정하는 중이다. 이 유물은 빗금이 새겨진 평평한 나무 조각인데, 직경 7cm 짜리로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작다. 위에 붙어있는 나무조각은 태양의 고도에 따라 판 위에 그림자를 비추는데 이 그림자의 위치를 보고 항해했던 것이다. 특히 이 유물을 보면 북위 61도 정도를 중점으로 기준이 맞추어져 있는데, 이 북위 61도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그린란드 섬 사이의 항해 루트 위도라는 걸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걸 사용해 항해 방향을 잡았다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1984년 실제 이 유물을 갖고 재현 실험 항해를 해봤더니 꽤나 성공적이었고, 위도 오차는 대략 ±5° 이내였다.

나침반이 없었던 시대에 일장석(Sunstone)으로 태양을 보며, 빛 방향을 따라 항해했다고 추정된다. 일장석을 수평선과 같은 눈높이에 놓고, 이 일장석이 빛을 편광시키는 모습을 보며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 일광석에 햇빛을 비추면 양전하를 띤 칼슘 이온과 음전하를 띠는 탄산 이온 때문에 이중으로 굴절되어 불투명하게 보이는데, 이 불투명도는 태양빛의 입사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투사된 두 상이 정확하게 일치하면 돌이 태양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일광석을 이용한 항해법은 돌과 햇빛을 같은 눈높이에 맞춰야하기 때문에 태양의 고도가 낮은 곳일수록 유용했는데, 태양 고도가 대체적으로 낮은 극지방에 사는 바이킹들에게 딱 좋은 방법이었다.[118] 그 외에도 까마귀를 데려왔다가 풀어주면 새가 육지를 향해 날아가는데, 이 방향을 따라 항해하는 방법도 있었다.

랑스킵은 노로 젓거나 돛의 바람에 의존하거나, 이 2개의 추진방법 밖에 없었다. 당연히 노보다 바람으로 가는 게 훨씬 빨랐고 힘도 덜들었다. 바람이 불어치면 바로 때맞춰 돛을 올려야 했기 때문에 바이킹들은 90초 이내로 돛을 펼칠 수 있었다고 한다. 노는 해안가 근처나 강에서 빠르게 속도를 내기 위해, 아니면 역풍이 불 때만 주로 사용했다. 랑스킵에는 벤치나 의자가 없었고, 노잡이들은 그냥 바닥에 나무 상자 하나 깔고 그 위에서 노를 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움직이는 랑스킵은 당대에 탁월할 정도로 좋은 성능을 자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코게가 등장한 후 점차 밀려났다. 랑스킵은 1429년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되었고, 그마저도 코게 함대에게 패배하면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 유명한 바이킹들

18.1. 바이킹 혈통의 유명인

19. 바이킹에 속한 민족

20. 기타

21. 매체

바이킹은 전후 '거대한 냉병기를 들고 웃통을 깐 야만전사' 같은 캐릭터들에 굉장히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문화적으로는 마초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혹한과 파도로 단련된 상남자라는 이미지가 만연하지만, 친근감을 주고자 할 경우 ' 술과 고기를 밝히는 동네 힘센 바보' 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만화 빈란드 사가》는 주인공 토르핀 카를세프니를 중심으로 바이킹의 브리튼 제도 침략과 생활상, 북미 대륙 개척 등을 다룬다.

영화 < 패스파인더>는 인디언 부족 사이에서 키워진 바이킹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 바이킹들은 무슨 모르도르의 오크 군단 같은 악의 야만족 무리로 나온다.

레드 제플린의 노래 < Immigrant Song>은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공을 소재로 하며 가사 중에 신의 망치, 발할라 등이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해당 곡은 2017년 북유럽 신화를 소재로 하는 MCU의 < 토르: 라그나로크>에 삽입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 노래는 바이킹 메탈의 시초라고 평가받으며, 그 이름대로 헤비메탈 장르의 노래 중에 바이킹을 소재로 한 것이 많이 있다.

캐나다 드라마 < 바이킹스>는 바이킹의 유럽 대륙 진출을 전설적인 바이킹 왕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2020년 현재 시즌 6까지 방영했다.

영국 드라마 < 라스트 킹덤>은 바이킹에게 호되게 당하는 앵글로색슨의 영웅 베번버그의 우트레드 웨식스 알프레드 대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는 바이킹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대체역사물인 《 마지막 바이킹》은 빈란드 개척을 시도하는 그린란드 바이킹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미국의 중세시대 드라마인 <미디벌 오디세이> 시리즈에서도 비중있게 등장하며, 맡은 배역을 북유럽계가 아닌 영국계나 독일계 배우가 맡은 데다가[119] 죄다 금발머리에[120] 짧은 모히칸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어느정도 고증을 잘 지켰다.[121] 작중 시즌 3에서는 건물 등을 파괴하고 약탈과 광기에 찌든 야만인으로 묘사했으나 시즌 4에서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고, 기사가 되는 등 간지 쩌는 마초캐가 되었다. 시즌 4~6에서는 이들의 후손인 노르만족도 등장한다.

21.1. 미디어의 바이킹들, 혹은 모티브로 한 것들

볼드체는 바이킹이 주역인 작품들

2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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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노르드어로 귀족을 의미하는 단어였으며, 부족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2] 정확히는 793년 6월 8일, 바이킹이 3척의 함선을 이끌고 브리튼 섬 노섬브리아 왕국의 린디스판 수도원을 습격해 약탈한 뒤 불태웠다. 역사에 기록된 바이킹의 첫 대외 침략이었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바이킹 시대의 시작을 구분한다. [3] 노르망디 공국의 전신 [4] 이교도 대군세 이후 잉글랜드에 정착한 바이킹의 최종적 축출 [5] 아일랜드계가 지배하던 군도 왕국을 다시 바이킹의 국가로 되돌렸다 [6] 위킹가즈 [7] 위킹그르 [8]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등도 표기가 동일하다. [9] 볼가강을 타고 진출한 것이다. [10] 신생 기독교 왕국인 덴마크 왕국, 스웨덴 왕국, 노르웨이 왕국은 자연스레 기존의 유럽 그리스도교 질서에 편입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당연히 기존 유럽 세계의 강대국인 프랑스 왕국이나 잉글랜드 왕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스칸디나비아 3국에게 바이킹들을 통제하라고 매우 강력한 압박을 넣으면서 3국은 좋든 싫든 바이킹 활동을 억제시키는 도리밖에 없었다. [11] 또는 양날 도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는데, 실제로 바이킹은 양날 도끼보다는 외날 도끼를 더 많이 썼다. [12] 다만 바이킹들은 법 집행도 상당히 엄격하게 하기로 유명했고, 실제 집행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잔인한 사형법인 피의 독수리 의식도 바이킹들의 사형법이었다. [13]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들에게 우유를 선물로 받았다가 유당불내증으로 소화불량에 걸린 원주민들이 우유를 독으로 오해해 적대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설화에 불과하고 별 신빙성은 없다. 바이킹들이 원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워낙에 거리가 멀어 본토와 연계하기가 어려웠던 점이 더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14] 북아메리카에서의 정착을 단념하고 철수한 후에도 바이킹들이 캐나다를 방문한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배를 만들기에 적합한 양질의 목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자원 캐려고 신대륙으로 가는 패기 재미있게도 근대 영국이 범선을 건조할 때 주로 사용했던 목재도 노르웨이산이나 북미산 침엽수였다. [15] 참고로 바이킹(ˈvaɪ.kɪŋ)이라는 발음을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뿐이다. 프랑스,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의 여타 모든 유럽 국가에서 부르는 명칭은 비킹이다. [16] 기원전 4300년부터 기원전 2800년까지 유럽에서 일어난 독특한 농사 문화이다. 고인돌에서는 나무관을 사용한 매장을 했으며, 사람들은 그릇을 사용하여 제사를 지냈다. [17] 북유럽인들은 청동기를 매우 좋아했다. 어찌나 금속류를 좋아했던지 유럽 전체에서 손꼽힐 정도로 금속제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는 문화권이기도 하다. [18] 기원전 750년 이전의 게르만 정착지
기원전 500년까지의 게르만 정착지
기원전 250년까지의 게르만 정착지
서기 1년까지의 게르만 정착지
[19] 물론 문물이나 문화에 관심이 없었단거지, 군사적 충돌은 기원전 2세기 킴브리 전쟁 이후로 토이토부르크 전투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등등 계속 있어 왔다. [20] 또한 이 시기에 단기적인 기후 냉각 즉, 일종의 짧은 소빙기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21] 비슷하게 일본도 전국시대에 중앙의 통제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왜구들이 날뛰었다. 에도 막부시대처럼 지방 통제가 강력하게 이루어졌던 시대에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 스스로 왜구를 철저하게 단속했다. [22] '약골' 이바르라고도 부르는데, 영국과 아일랜드를 공격한 바이킹으로 유명하다. [23] 정확히 말해서 멸망한 건 아니었고, 동앵글리아를 멸망시킨 바이킹 수장 구트룸이 동앵글리아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조 교체가 일어났다. [24] 잉글랜드를 침략한 바이킹의 대부분은 '데인족'이라 불린 집단이었는데, 덴마크라는 국호가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데인인의 땅이라는 뜻. 그리고 데인로는 '데인인의 법'이라는 말이다. [25] 910년부터 918년까지는 요크를 다시 탈환해 앵글로색슨족이 통치했으나, 918년 바이킹의 공격으로 다시 빼앗겼다. [26] 크누트 대왕은 매우 관용적인 화합책을 시행했다. 이를테면 이 시기 앵글로색슨의 고유 신분을 몰아내고 중간 지배층으로 굳어진 Jarl(Iarl, Earl), 앵글로색슨의 고유 신분인 Thegn 아래의 전사 신분으로 자리잡은 huskarl이 있다. [27] 노르웨이의 국왕이었다. [28] 헤브리디스 제도에 위치했다. 사실 이들도 이 시점에는 게일인들에게 거의 동화된 상태라 실질적인 바이킹 시대는 이전에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한다. [29] 그래서 브라이언 보루를 '바이킹의 아일랜드 침공'을 종결시킨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30] 참고로 해당 사진은 바이킹스에서 보여주는 파리 시테 섬의 한 장면인데, 당시 시테 섬에는 성벽이 없었고 센 강 서안쪽 육지에도 도시가 있었다. 파리에 성벽이 생긴 건 300년쯤 후인 필리프 2세 때의 일. 파리에 옛날부터 성벽이 있었다는 것은 해당 공성전을 묘사한 19세기 삽화에도 나올 정도로 유서 깊은 고증 오류이다. [31] 루이 3세는 말을 타고 가다가 낙마해 자신의 말에게 두개골을 밟혀 죽었다. 2018년 다윈상을 수상할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32] 외드 뿐만 아니라 플란데런 백국을 비롯한, 북쪽 연안의 제후령들은 바로 이 시기 바이킹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면서 성장한 유력자들이었다. [33] 프랑스식 이름은 롤로였다. [34] 노르망디 공국은 라틴·로망스의 언어와 문화를 수용하면서 본토인 북유럽의 노르드인과는 구별되는 노르만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창출했다. 노르망디 공작가는 잉글랜드에 정복왕 윌리엄을 시조로 하는 노르만 왕조를 개창했다. [35] 이교도 대군세를 이끌던 바로 그 인물이다! [36] '소규모 기습'이라고 해서 피해가 적은 건 아니었다. 1015년에는 바이킹이 민호 강을 따라 주교좌가 있는 도시 '투이'를 공격해 약탈했고, 투이는 무려 1070년까지도 주교좌를 회복하지 못했다. [37] 대 그리스, 즉 마그나 그라이키아로 불린 지역이다. [38] 다만, 바이킹의 정착에 관하여 이탈리아 남부가 많이 언급되는데, 그들은 이미 노르망디에 정착한 지 한 세기 이상 지나서 그리스도교화 및 프랑스화가 되어 있었다. 로망스계 언어와 문화 및 정체성을 지니고, 군사문화도 바이킹 특유의 롱쉽을 타고 다니는 땡보병 군대에서 중갑기병인 기사 중심의 군대로 완벽히 변모했다. 노르만인들이 갑자기 바이킹으로 둔갑하여 국가를 세운 양, 시칠리아 왕국을 바이킹의 정착이라 부르면 전•후 결과가 뒤바뀐다. 이미 동로마 제국령이 라벤나 총독부의 성상파괴운동으로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서게르만계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짓밟은 상태라서 동로마 황제는 로마 교회에 대한 압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한 상태였다. 특히 이 사건은, 온갖 야만인들의 침공으로 서로마 제국이 증발하면서 터진 헬게이트를 로마 교회가 뼈저리는 노력으로 그들을 개종시켜 버티는 동안, 그러한 서방 교회에 대하여 보여준 동방 교회의 불성실한 태도로 쌓인 악감정을 뻥 터트리고 말았다. 그럴 것이 당장 로마조차 랑고바르드족에게 함락될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서 교회는 완전히 분열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었던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남부 영토가 제한적으로나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노르만족이 교황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고는 자기 영토 확보 겸 교황에 대한 충성 증명으로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최후 거점인 바리를 함락시키면서 동로마 세력은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39] 아랍 은화들이 노브고르드와 핀란드, 스웨덴, 유틀란트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바이킹들이 아바스 왕조에 모피와 노예, 꿀, 밀랍 등을 수출한 뒤 동방 물산을 수입하여 서유럽에 되판 돈으로 얻은 수입은 대략 1천만 닢~1억 닢으로 추산된다. [40] 사실 '발견'이라는 표현 자체는 틀린 말이다. 콜럼버스가 오기 한참 전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견했다는 표현은 유럽 중심적인 시각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41] 다만 전설이기는 하지만 바이킹보다 무려 500년이나 더 앞서서 아일랜드 수도사인 성 브렌던이 북미 대륙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링크에 건 게시물의 내용을 참조할 것. 링크 [42] 그래서 출처가 불분명한 뱌르니 헤률프손보다 레이프 에이릭손을 북아메리카에 발딛은 최초의 바이킹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대중적 인지도도 레이프 에이릭손이 압도적인 편이다. [43] 레이프 에이릭손이 이곳에서 수없이 많은 야생 베리들을 발견했고, 발효된 베리들을 술처럼 마시다가 취하여 '와인의 땅'이라는 뜻의 'Vineland'라고 이름 붙였다는 속설이 있다. [44] 레이프 에이릭손의 이복누이는 당시 임신한 상태라 퇴각하는 바이킹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누이는 자신이 칼을 들어도 니네보다는 잘 싸우겠다고 욕하며, 도망치는 바이킹 전사들에게 소리질렀다. 결국 원주민들에게 따라잡힐 위기에 처하자 누이는 땅에 쓰러져 있는 시체에게서 칼을 빼내 젖가슴을 칼로 잘라버렸다. 이를 보고 기겁한 원주민들이 잠시 추격을 멈추자 그 틈을 타 후퇴했다는 이야기다. [45] 널리 퍼진 오해가 이러한 원정의 주체가 야를이나 왕이라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들보다 더 낮은 hersir와 같은 하급 지배층들이나 평민 중 유력자들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까닭에 각 집단의 규모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46] 심지어 그리스도교인끼리도 경쟁자나 원수 등 사이가 나쁜 관계인 인물을 포로로 잡았다면, 그리고 처형하지 않기로 했다면 먼 이국에 팔아치우는 경우도 있었다. # [47] 다만 노예제도 자체는 유럽에서도 꽤나 오랫동안 존속했다. 세계 곳곳의 노예제 관련 자료들 [48] 그리스도교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리를 갖추고 관료화된 교단을 세운 까닭에 중앙집권을 시도하는 이교도 군주들이 이를 정책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49] 다만 서유럽에서 로마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던 아일랜드에서는 12세기까지도 노예제도가 존재했다. [50] 여담으로 영국 왕실도 거슬러 올라가면 바이킹과 희미하게나마 연결된다. 정복왕 윌리엄 1세는 노르만인 출신의 노르망디 공작이었고, 노르망디 공국의 시작은 바이킹 정복자 롤로였기 때문이다. [51] 특히 슈츠슈타펠 사령관이자 나치 독일 최고위급 인사였던 하인리히 힘러는 오컬트, 그중에서도 북유럽 신화에 심취했던 걸로 유명하다. [52] 다만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은 긍정적이라 평할 수 있겠으나, < 바이킹스>에서나 <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에서나 한결같이 바이킹은 야만적으로 그려진다. [53] 단 죽은 족장의 아내가 대리로 통치하는 경우는 자주 있었다. 물론 새로운 남성 족장이 선출되면 그 지위를 넘겨줘야 했지만. 이 야를에서 파생된 단어가 영국의 백작에 해당하는 단어인 Earl이다. 이 Earl 역시 남성 전용으로, 여성형으로 대비되는 명사가 없고 대륙에서 비롯된 count의 여성형 명사인 countess를 수입해서 쓰고 있다. [54] 고대 바이킹들은 성문법이 없었고, 죄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규칙들밖에 없었다. [55] 이렇게 씽에서 판결을 받는 것 말고도 홀강이라고 결투를 벌여 자기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으로 피를 흘리거나 죽는 사람이 패배하는 결투였다. [56] 이러한 세 계급의 발생은 리그스툴라라는 신화로 설명되었다. [57] 척박한 지방에서 살아서 약탈을 주된 생활사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반농 쪽에 가까웠다. 거기서 재배할 수 있는 곡식과 야채를 재배했고, 낙농업도 어느 정도는 시행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중국 북부의 흉노 등 외부 유목민족들의 생활사와 유사하다. [58] 훗날 스칸디나비아에 왕들이 등장하자 이들은 왕 아래의 귀족 체계로 편입된다. [59] 혹은 태어날 때는 자유민이었지만 파산해서 빚을 지고 노예로 들어간 사람들도 많았다. [60] 자유민이 자유민을 죽이면 무려 200실링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노예를 죽이면 살인죄가 아니라 재물손괴죄로 취급받아서 훨씬 형이 약했다. 게다가 주인이 죽으면 순장되는 경우도 많았다. [61] 로마 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로마의 해방노예들도 여전히 옛 주인한테 충성을 바치거나 협조해야 했다. 이를 어기면 옛 주인은 노예 해방을 취소하고 다시 자신의 노예로 되돌려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62] shield maiden, 노르드어로는 skjaldmær(스캴드메르) [63] 다만 미드 바이킹즈의 묘사와 같이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부대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언제까지나 다른 문화/집단과 비교해 여성 전사가 많았다는 것이지, 대한민국의 여군같이 전사 중 열에 한 명꼴로 여성이라는 게 아니다. [64] 이 점은 스파르타와도 상당한 유사하다. 군사원정을 위해 남성들이 대규모로 동원되고, 가장의 부재 중 여성이 육체노동의 상당량을 감당해야 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65] 참고로 스칸디나비아 여성들은 꽤나 오래 살았다. 기본적으로 35세는 훌쩍 넘겼다. 다만 20~35세 사이에 유난히 사망률이 갑자기 높아졌는데 이건 임신 출산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66]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 도달했던 바이킹 탐험가인 레이프 에이릭손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67] 그리스 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슬라브 신화, 베다 신화 조로아스터교의 기원이 된 신화이다. [68] 타키투스가 ' 게르마니아'에서 로마신들의 이름을 빌려서 묘사하긴했지만 게르만족이 믿는 신들로 오딘, 토르, 티르, 프레이야의 초기 형태에 가까운 신들이 등장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신화는 5세기 이후에 체계화됐으나 신들 자체는 이미 청동기 이후 어느 시점에서 그 형태를 갖췄다. [69] 일례로, 목요일을 뜻하는 영어 단어 Thursday는 직역하면 ' 토르의 날'이라는 뜻이다. 그 외에도 수요일을 뜻하는 Wednesday는 ' 오딘의 날', 금요일을 뜻하는 Friday는 ' 프레이야의 날'이라는 뜻이다. [70] 《Hávamál》. 바이킹 시대의 노르드어 시집인 《고 에다》에 수록된 시집들 중 하나로, 북유럽의 최고신 오딘이 사람들에게 내리는 현명한 조언들을 담고 있다. [71] 대중매체로 잘 알려진 뿔투구가 아닌 눈을 감싸는 모양의 벤델헬름이었다. [72] 다만, 이건 전근대시대 군인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심지어는 막강한 부와 더불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어서 군장비를 제식화하고 있었던 한국이나 중국의 왕조들도, 일개 병사들은 갑옷이나 투구 등이 제각각 다른 경우가 꽤 보였을 정도였다. [73] 위키백과 관련 항목의 요약 [74] 대표적으로 딱 두 건이 있는데, 서기 888년드 몽포콘 전투(battle of montfaucon 888 france)와 968년의 sulcoit 전투였다. [75] 당시 켈트족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3cm 전후로 추정되고, 동 시기 한국 남성의 평균 신장은 약 160cm 전후로 추정된다. [76] 켈트족의 알몸 전사들. [77] 당연히 바이킹 출신들이 대다수였던 초기 바랑기안 가드들을 가리킨다. [78] 이를 바랑기안 하네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79] 가죽이 제대로 갑옷의 성능을 발휘하기 위해선 두꺼운 가죽을 몇 겹으로 두텁게 겹쳐입어야 했는데, 당시 가죽은 그렇게 낭비할만큼 값싼 재료가 절대 아니었다. 차라리 리넨이나 대마 천을 두껍게 껴입는게 훨씬 경제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아예 입고 다니지 않았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계급 낮은 전사들이라고 해서 가죽 갑옷이라도 마음껏 입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절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80] 바이킹의 슈팡겐 헬름은 로마군 고트족의 것과 달리, 장식과 크기가 소박하고 귀 가리개가 종종 생략되는 것이 주요 특징이다. [81] 시대에 따라 조금씩 커지다가, 바이킹 시대 말기엔 아예 가면 형태에 가깝게 변한다. [82] 물론 현대에서 접쇠 방법은 미학적 장점 이외에는 현대의 초강법을 능가하는 점이 없다. [83] 2018년에 노르웨이에서 발견된 배는 천 년도 더 전에 묻혔다. 그 길이가 무려 20m나 되는 거대한 배였는데 아마 왕을 위해 만들어진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84] 남자들은 성관계를 마친 뒤 여자 노예에게 '너의 주인에게 가서 내가 그를 사랑한 마음에서 이 일을 했다고 전하라.'고 속삭였다. [85] 노르웨이의 오세부르그 농장에서 발견된, 지금까지 가장 잘 보존된 바이킹식 선박 중 하나로 꼽힌다. 여자 유골 2구가 발견되었고, 현재는 복원되어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86] 추운 기후 덕분에 악취는 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피부색만이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87] 수의를 만들고 모든 장례 절차를 진두지휘하는 사람으로, 이븐 파들란이 본 죽음의 천사는 늙었지만 억센 체구에 살이 찌고 불만에 찬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한다. [88] 죽음의 천사라는 노파가 여자 노예의 머리를 감싸고, 텐트 안에 끌여들었는데, 이때 여자 노예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주변의 남자들이 힘차게 방패를 두드려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고 한다. [89] 여담이지만 이때 조문객들 사이에서 고인이 발할라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걸 보고 왕이 내린 결론은 '싸워서 이긴 사람의 말이 맞다.' 누가 이겼는지는 써놓지 않았다. [90] 바이킹족의 근원지였던 스칸디나비아 반도 일대만 하더라도 지역간의 관습이 달랐고, 또 그린란드나 러시아 등 해외로 이주해서 사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같은 바이킹들이라도 사는 곳마다 관습이 다른 경우가 더러 있었다, [91] 다만 이 경우 역시 영화에서처럼 극적으로 불화살을 쏘아서 불태우는 일은 없었다. [92] 공포영화 < 미드소마>에서 노인들이 절벽 아래로 투신해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죽는 장면이 바로 여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참고로 여기서 투신해 머리가 깨져 죽는 할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가 바로 왕년에 북유럽 최고의 미소년으로 이름을 날렸던 비요른 안데르센이었다. [93] 노르웨이 로포텐의 옛 바이킹 집터에 복원된 롱하우스의 모습이다. 바이킹 수장 '올'의 집터였는데, 길이 83m의 거대한 선박 형태의 집을 복원해놓았다. 이곳은 실제 당시 바이킹 세계에서도 거대한 건축물들 중 하나로 손꼽혔다. 로포텐은 노르웨이의 바이킹 거주지 중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해있는데, 이곳에서 대량으로 대구가 잡혀 식량이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94] 바이킹들은 가는 곳마다 룬스톤을 남겼기 때문에 서쪽으로는 맨섬, 동쪽으로는 흑해, 북쪽으로는 옘틀란드, 남쪽으로는 슐레스비히까지 온갖 군데에 룬스톤 유적들이 남아있다. [95] 지금도 일부 룬스톤에는 색깔이 남아있다. 특히 룬스톤이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뜯어가 교회나 성당의 석재로 경우일수록 더욱 보존상태가 좋다. 비바람에 침식풍화되지 않아 색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 스웨덴 욀란드섬의 코핑 교회에 있는 룬스톤이 대표적이다. [96] 위에서 언급한 스웨덴 욀란드 섬의 코핑 교회에 있는 룬스톤이다. [97] 이를 데인겔드라고 한다. 중세 초기 바이킹의 약탈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그 공물을 마련키 위해 거두었던 세금이다. [98] 해당 변발의 남자는 젊은 전사다. 대부분의 바이킹들은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머리를 짧게하고 다녔으며 머리가 긴 남성을 게으름과 나약함의 상징으로 보았다. [99] 옷에는 단추뿐만 아니라 주머니나 끈이 달려있지 않았기에 남자들은 벨트를 매거나 허리에 끈을 따로 묶었다. 허리띠에는 칼이나 도끼를 찼고,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도 흔했다. [100] 재료는 마로니에 열매의 속살이었다. 이것을 으깬 후 물을 섞어 반죽하고, 다시 물기를 짜내서 쓰기 좋은 모양으로 빚어 햇빛에 건조시켜 만들었다고 한다. [101] 실제로 노르웨이에서는 사우나 시설을 'badstue'라는 고유어로 부른다. 이미 자기네들에게 익숙했던 관습이라고 본 것이다. [102] 마지막 장에 구드룬의 아들 볼리는 어머니가 남편들 4명 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했는지 묻는다. 구드룬은 네 남편들의 장•단점을 모두 이야기하면서 어물쩍 넘어가지만, 볼리는 그게 제 질문의 답이 아니라고 다시 따져 물었다. 그러자 구드룬은 '내가 가장 사랑한 이에게 나는 가장 최악이었지'라고 말하면서 사가의 끝을 맺는다. 이것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103] 영어로는 플라이팅(Flyting)이라고 한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Flyting 문서 참고. # <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에서도 미니게임으로 구현되었다. [104] 헤데비에 워낙 많은 부가 쌓였기에 바이킹들이 이 도시를 노리고 수많은 공격을 퍼부었다. 그래서 10세기에는 헤데비에 요새가 세워지고 벽이 둘러쳐졌다. [105] 당시에도 금•은의 순도를 판단하기 위해 팔면체나 편구체 모양의 추, 저울을 사용해 철저하게 가치를 따졌다. [106] 이를 hacksilver라고 부른다. 일부러 멀쩡한 은제 물건들을 쪼개고 잘라내서 딱 그 가격만큼 가치가 나가도록 맞추는 것이다. 바이킹들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인이나 페니키아인들도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107] 이는 먼 훗날인 20세기에 노르웨이 혈통의 탐험가인 로알 아문센이 재현하기도 했다. 아문센의 경쟁자였으며 조상이 바이킹과 서로 적대관계였던 영국인 탐험가 로버트 스콧은 아문센과 정반대인 매우 안일한 탐험으로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108] 영어롱쉽(Longship)이다. 이전에 서술되어 있었던 드라카르(Drakkars)는 랑스킵 중 하나로 대형선인 스케이드에 용 혹은 뱀의 머리 장식을 단 배를 일컫는다. [109] Knarr 또는 Knörr 라고도 함 [110] 가장 많아봤자 좌석이 16열이었고, 적은건 심지어 6열까지도 갔다. 거의 어선이나 무역선과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111] 사실 눈대중으로 무언가를 만듦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아름답다는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거대한 돔도 눈대중으로 지었다. 그래서 팔각형 모양 돔의 꼭짓점들을 모두 이으면 교차점이 하나가 아니라 삐뚤삐뚤하게 여러 개가 나온다. [112] 나이 든 여성은 높은 계급이 확실하지만 젊은 쪽이 낮은 계급인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혈육은 아니나 비슷한 음식을 먹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나이 든 여성의 하녀를 순장처럼 같이 죽인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113] 게르만 계통의 고트족, 프랑크족부터 켈트족에 이르기까지 [114] 길쭉한 랑스킵과 달리 비교적 둥글둥글하게 지어졌다는 얘기이다. [115] 다만 이런 일이 바이킹의 배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며, 1978년 7월 27일 아일랜드의 역사가 팀 세버린은 자신이 직접 고대 아일랜드의 전통 배인 코라클(나무판자에 소가죽을 덮어씌운 배)을 만들어 타고서 실제 아일랜드에서 미국까지 항해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바다의 짠 소금기가 소가죽에 닿으면 가죽이 오히려 더 딱딱해져서 물이 전혀 스며들지 않고 방수에 좋았다고 한다. 링크 [116] 동영상에 따르면 원정거리와 소요일수로 계산해보면, 바투와 수부타이가 일평균 25~27km, 몽골군 표준원정 속도가 일평균 22~25km, 홀레구가 알말릭까지 행군한 속도가 하루에 15km, 알말릭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이동한 속도가 일평균 6~9km였다고 한다. [117] 단, 수로와 육로의 차이는 감안해야 할 점이다. 기원전부터 해로에 의한 이동거리가 육로에 의한 이동거리보다 훨씬 길었다. 몽골군의 이동 속도도 전차와 항공기가 일상화된 20세기 이전의 전쟁에서는 경이적인 속도였다. [118]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 바이킹스>에선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정착한 노르만 왕조의 시조인 롤로가 일장석을 사용해 북해를 건너갔다는 설정을 한 바 있다. [119] 그래도 이 드라마는 흑인, 히스패닉계 주역이나 배우들도 많이 나오고 아시아계, 아메리카 원주민 배우도 꽤 나오는데다가 맘루크 전사를 아랍계 미국인으로 캐스팅 하는 등 배우들의 인종 구성이 다양한 편이다. [120] 바이킹을 맡았던 실제 금발 배우가 적어서 그런지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로 나온다. [121] 흔한 매체에서 나오는 바이킹을 떠올리면 긴 산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뿔투구를 쓴 야만인을 떠올리지만 여기서는 머리도 짧게 깎고 면도도 했으며, 뿔이 없는 투구를 썼다. [122] 작품의 배경인 가상의 왕국 아렌델은 19세기 노르웨이를 모티브로 했고, 작중에 등장하는 교회 등 건물의 양식이 바이킹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관식 등 제례에서 노르드어를 사용하는 등 문화적으로 바이킹 문화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123]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이치로가 어렸을 적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해적 문화를 동경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124]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바이킹임을 강조하는 대사를 수도 없이 한다. 또한 바이킹 전통 장례식(배에 시신을 안치하고 바다에 띄운 뒤 불을 붙여 화장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등 바이킹의 문화도 곳곳에서 보여 준다. 다만 실제 바이킹의 생활상을 충실히 고증했다기보단 만화적으로 과장한 부분이 많아, 버크 섬 주민들의 상당수가 거칠고 호전적이며 야성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남자 성인들은 대부분 수염이 텁수룩하고, 생활 습관이 상당히 비위생적인 등장인물도 있다. 그러나 상술했듯 바이킹들은 면도와 이발을 하고 원시적인 비누를 사용하는 등 위생에 신경을 많이 썼다. [125] 바이킹 트린다미어라는 스킨이 있으며 그의 부족도 바이킹이 모티브다. [126] 위의 로스트 바이킹의 패러디. [127] 다만 15세기 초가 배경이라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이킹들과는 성향이 많이 다르다. [128] 시즌 4에서 나오는 바이킹으로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다. [129] 붉은 머리 에리크가 모티브다. [130] "바이킨(세균) + 바이킹 + King"의 말장난. [131] 로한 기마병(로히림)은 헤이스팅스 전투의 노르만족 기병을 모티브로 했다. [132] 건물 양식이 전형적인 북유럽 양식이다. 단 너른골은 호빗 실사 영화판에서는 동유럽풍의 건물 양식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