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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0 21:44:04

해럴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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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웨식스 왕조 제10대 국왕
해럴드 2세
Harold 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rold2.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해럴드 2세
(Harold II)
출생 1022년
잉글랜드 왕국 웨식스
사망 1066년 10월 14일 (향년 44세)
잉글랜드 왕국 서섹스 센락 언덕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왕
1066년 1월 5일 ~ 1066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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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해럴드 고드윈슨
(Harold Godwinson)
아버지 고드윈 백작
어머니 귀타 토르켈스도티르
대관식 1066년 1월 6일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왕위에 오르다3. 최후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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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영어: Harold Gōdwines sunu
영어: Harold Godwinson
라틴어: Haroldus II

해럴드 2세(Harold II), 즉 해럴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은 잉글랜드 왕국 앵글로색슨계 웨식스 왕조의 마지막 왕[1]이었다. 마지막 왕일 뿐 아니라, 엄청 짧은 기간 동안 다스렸던 왕이다. 재임 기간이 불과 9개월..

그는 매우 잘 나가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웨식스 백작 고드윈(Godwin, Earl of Wessex)이었고[2], 어머니는 크누트 대왕의 여동생인 귀타(Gytha Thorkelsdóttir)였다. 해럴드 2세의 아버지인 고드윈은 본래 앵글로색슨족 자유민 전사 집안 출신의 해적이었으나, 덴마크의 크누트 대왕이 영국을 정복할 때 크누트에게 합류하여 공을 세웠고, 그 덕에 웨식스 백작이 된 이후에도 크누트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엄청난 권세를 누렸다. 1035년 크누트 대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해럴드 1세가 불안하게 뒤를 잇자, 노르망디 공국에서 망명하고 있던 옛 앵글로색슨계 왕국의 앨프레드 왕자가 왕위를 되찾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고드윈은 앨프레드 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안심시킨 뒤에 기습하여 두 눈과 사지를 베어내고 해럴드 1세에게 넘겨버렸다.

하지만 해럴드 1세와 뒤이은 하레크누드 왕도 곧 죽고 덴마크의 영국 통치가 끝나면서, 결국 앵글로색슨계 귀족들의 청원에 힘입어 1042년에 앨프레드 왕자의 동생인 참회왕 에드워드가 노르망디에서 넘어와 영국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도 고드윈 백작의 힘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에, 에드워드 왕은 자신의 형을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고드윈 백작을 어떻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에드워드 왕이 8년차에 잠깐 반격에 성공했을 시절의 1년간을 제외하고는, 고드윈 백작의 세력이 에드워드 왕의 치세에서 점점 더 커져서, 후술한 것처럼 앵글로색슨 영국의 대부분을 자신의 가문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헤럴드 2세는 이런 고드윈 백작의 둘째 아들로 태어 났는데, 사이코패스로 보이는 첫째 형이 수녀원장을 납치 강간하는 대형 사고를 치고 죽은 뒤에 고드윈 백작의 후계자가 되었다. 헤럴드 2세에게는 남동생인 토스티그 고드윈슨을 비롯하여 많은 형제·자매가 있었고, 그중 여동생인 이디스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왕비가 되었다. 즉, 그는 당시 왕과 처남 매부지간이었다. 다만 에드워드 왕은 고드윈 백작에 의해 강요되다시피해서 결혼한 이디스 왕비를 경원시했다. 여동생이 왕비가 되었을 때, 헤럴드 2세는 만 23세의 나이에 동앵글리아 백작이 되었다. 아버지 고드윈의 사후인 1053년에는 웨식스의 백작을 물려받아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었으며, 1058년에는 히어포드의 백작에도 올라 잉글랜드에 영향력을 미치는 노르만족 세력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권력가의 철없는 후계자가 아니라 웨일스와의 전쟁에서도 탁월한 전과를 올린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잘 나가는 젊은 세력가였다. 그는 여전히 왕의 명령에 따라 각종 국가 대사를 치루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차츰 에드워드 왕보다도 더 높은 권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애서 좀 문제가 있었으니…

동생 토스티그는 노섬브리아의 백작이었는데, 성격이 난폭한 그는 통치에 애를 먹고 있었고, 그나마도 1063년에 들어서는 크누트식 관습법을 마음대로 바꾸고, 영지를 비웠을 때 주변 국가들에게 빈집털이를 당하기까지 하면서, 인기가 아주 폭락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웨일스 전쟁에서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마저 올려 버리게 된다. 가뜩이나 불만이었던 민심은 드디어 폭발했다. 1065년, 빡친 요크셔의 데인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점령하고 토스티그의 관리와 친위병들을 죽여버렸다. 그런데 토스티그로서는 기가 막히게도, 형인 해럴드는 고드윈 가문을 적대하는 다른 가문들을 달래기 위해 동생을 버리고 이들 노섬브리아의 반란군과 평화 협정을 맺어버렸다! 게다가 해럴드는 결국 토스티그를 쫓아내고, 머시아 백작 에드윈(Edwin)의 동생 모르카(Morcar)를 대신 임명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해럴드가 에드워드 왕의 후계자가 되는 데는 큰 보탬이 되었으나, 덕분에 고드윈 집안은 콩가루가 되었다.[3] 더 중요한 것은, 동생 토스티그가 이 사건으로 인해 형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훗날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2. 왕위에 오르다

1066년 1월 5일, 당시 왕이었던 에드워드가 자식없이 사망했다. 왕의 오른팔이자 처남이었던 해럴드는 잽싸게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4] 명목은 에드워드 왕이 자신에게 왕위를 넘겼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왕은 죽기 전에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잠깐 동안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앞으로는 해럴드의 보호를 받을 것을 지시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긴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왕위를 해럴드에게 넘긴다는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여간 자문협의회[5]는 에드워드의 남성 친척을 하나 찾아서 모셔오는 대신에 해럴드를 왕으로 뽑았고, 왕이 죽은 다음 날 해럴드는 잉글랜드 왕 중 최초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가지며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해럴드 2세를 보며 바다 건너에서 깊은 빡침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으니.... 참회왕 에드워드의 사촌인 노르망디 공국 공작 윌리엄 1세였다. 죽은 에드워드 왕보다 20살 연하인 윌리엄은 에드워드가 노르망디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시절에 분명히 안면이 있었을 것이다. 윌리엄의 아버지인 로베르 1세가 일찍 죽은터라, 윌리엄은 에드워드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기 위해서 떠날 때 고작 13살에 불과했지만 이미 노르망디의 공작이었다. 그리고 에드워드가 잉글랜드의 왕이 된 이후에 자신의 후계자로 윌리엄을 지목한다는 언질을 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윌리엄 측의 주장일 뿐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여간 자기에게 넘어올 줄 알았던 왕위를 뺏긴 것도 억울한데, 그것을 차지한 것이 하필 우연찮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버렸던 해럴드였다. 에드워드 왕이 죽기 2년 전인 1064년, 해럴드는 모종의 이유로 프랑스 연안을 항해하던 중에 퐁티외라는 영지의 근해에서 배가 난파된 적이 있었다. 이때 해럴드가 항해에 나선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에드워드 왕의 건강이 좋지 않던 시절에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대영주가 왕국을 떠난 데에는 아마도 그만큼 중요한 외교적 이유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난파된 해럴드는 해안에 상륙하자마자 윌리엄 1세 휘하의 지역 영주에게 포로로 잡혔는데,[6] 이 소식을 들은 윌리엄은 그를 풀어주었고, 심지어 해럴드를 자신의 군사 원정에 동행시키기도 했다. 윌리엄은 해럴드의 활약을 칭찬하며 선물도 하사하고 봉신으로 삼아 기사 작위까지 내렸다. 해럴드가 나중에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위를 요구할 때 도와주겠다며 충성을 맹세했다는 기록도 전해지는데,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하여간 이때 해럴드가 반강제로 윌리엄의 부하가 된 것은 확실하다. 아마도 윌리엄은 자신이 노리고 있던 잉글랜드의 왕위의 잠재적 경쟁자인 해럴드를 이 기회에 주종의 맹세를 이용해 경쟁에서 제외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yeux_Tapestry_scene23_Harold_sacramentum_fecit_Willelmo_duci.jpg
윌리엄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해럴드를 묘사한 인증샷바이외 태피스트리. 오른쪽의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해럴드.[7]

그런 해럴드가 낼름 자신이 노리던 잉글랜드 왕위를 꿰찬 것이다. 윌리엄은 군사를 모집하고 함선을 건조하며 잉글랜드 침공 준비를 했다. 처음에 윌리엄의 기사들은 복무해야할 날짜를 이미 채웠기에 이제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 관리를 해야 한다며 원정에 비협조적이었지만, 윌리엄이 정치력을 발휘하여 교황 알렉산데르 2세로부터 잉글랜드를 정벌하라는 윤허를 받아내자, 노르망디의 기사들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의 기사들까지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해럴드 2세는 윌리엄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친위대 3천명과 함께 경험많은 자유민 전사를 주축으로 하는 군대를 소집하여 영국 남부 해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해럴드의 고드윈 가문은 영국의 대부분을 영지로 가지고 있었고 전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최대 3만명의 정예병을 소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바람이 계속 북풍이어서 윌리엄은 원정을 떠나지 못하고 프랑스 해안에 묶여 있어야 했고, 해럴드는 윌리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소집된 군대의 복무 기간인 40일이 지나자 어쩔 수 없이 소집병을 해산해야만 했다.

한편 에드워드 왕의 죽음으로 인해 비게 된 잉글랜드 왕위를 탐내던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 그것은 덴마크 왕이며 노르웨이의 왕인 하랄 3세였다. 그는 과거 크누트 대왕의 가문과 자신의 가문이 잉글랜드 왕위를 두고 맺은 약조를 근거로 잉글랜드의 왕위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에드워드 왕이 죽고, 해럴드에게 버림받고 쫒겨난뒤에 형을 향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해럴드의 동생 토스티그가 와서 동맹을 제안하자, 그는 영국 원정을 결심했다. 1066년 9월 8일, 하랄 3세의 강력한 노르웨이군과 토스디크가 플랑드르 지역에서 모집한 용병대로 구성된 1만명의 침략군은 잉글랜드 동부 해안에 상륙했고, 그들은 동네지역 수비군을 무찌르며 거침없이 진격했다. 이 소식을 들은 머시아의 에드윈 백작과 노섬브리아의 모르카 백작의 군대가 맞서 싸웠으나, 9월 20일 요크 근처에서 벌어진 풀포드 전투에서 쳐발렸고, 요크는 침략군에게 항복하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로부터 5일 후, 해럴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4일만에 약 300km를 주파하는 급속 행군으로 올라와 요크를 통과하여 노르웨이군을 기습하는데 이것이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다. 이 전투에서는 해럴드 2세가 완승했고, 그 와중에 하랄 3세와 토스티그 둘 다 전사했다. 하지만 해럴드 2세의 군대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다.[8] 이 때의 엄청난 행군 속력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해럴드의 친위대는 비록 전투에서는 장갑 보병으로서 싸웠지만 이동은 말을 타고 했을 것으로 보이며, 북쪽으로 행군하며 가는 길에 신속하게 주변에서 예전에 해산했던 병사들을 소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최후의 전투

이로부터 불과 이틀 후인 9월 27일, 윌리엄은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남부에 상륙했다. 마침 해럴드가 하랄 3세와의 싸우기 위해 정예병인 후스카를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윌리엄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상륙할 수 있었고, 마음대로 분탕질을 치며 런던을 향해 진군했다. 해럴드 2세는 윌리엄과 맞서기 위해서 많은 수의 병력을 잉글랜드 북부에 남겨 놓은 채 친위대만 이끌고 또 신속 행군으로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다. 그는 이동 중에 허겁지겁 군대를 모아가며 남쪽으로의 행진을 계속했다. 윌리엄보다 빨리 런던에 도착한 그는 더 많은 병력이 합류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윌리엄의 군대를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10월 14일, 런던 동남쪽의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엄과 해럴드 2세는 잉글랜드 역사를 바꾸는 헤이스팅스 전투를 벌였다.

6시간 동안 치러진 이 전투 말미에 해럴드 2세는 전사했고, 안그래도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던 와중이라 그의 군대는 패배했다. 승리한 윌리엄은 이후 몇년간 해럴드의 잔당과 앵글로색슨 귀족들을 잔혹하게 때려잡으며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1] 즉위식을 치르지는 못했지만 왕으로 추대되었던 에드거 2세의 왕위를 인정할 경우, 마지막 왕은 아니다. [2] 백작(Earl)인데 매우 잘 나가는 가문인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Earl은 흔히 백작으로 번역되기는 하나 이 당시 잉글랜드에는 Duke, 즉 공작위가 아직 없었다.(처음으로 공작위가 생기는 것은 흑태자 에드워드 콘월 공작의 작위를 받을 때부터였다.) 즉, 백작(Earl)이 최고 귀족이었고, 따라서 웨식스 백작(Earl of Wessex)은 이 당시에는 사실상 웨식스 공작(Duke of Wessex)이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사실 영지가 "웨식스"라는 것부터 그 위상을 알 수 있는데, 웨식스는 잉글랜드 칠왕국의 일각이자 앨프레드 대왕의 주도하에 다른 왕국들을 정복한 지역이었다. [3] 다만 해럴드의 다른 동생들은 마지막까지 그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나중에 토스티그가 해럴드를 치고 백작위를 되찾기 위해 위해 외세를 끌여들였을 때도 해럴드는 토스티그의 목숨만은 살려주려고 했다. [4] 정통성으로 따지면 에드먼드 2세의 손자이자 참회왕 에드워드의 형인 망명자 에드워드의 자식이었던 에드거 에설링이 가장 앞서긴 했지만 이때 아직 10살배기 어린아이였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망명자 에드워드가 살아있었다면 이복이긴 하지만 선왕의 형이라는 강력한 명분이 있었기에 해럴드는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5] Witenagemot. [6] 당시 기준으로는 어떤 지방 영주가 지나가던 다른 나라 영주를 포로로 잡고 몸값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 행위였다. [7] 태피스트리에 적힌 글은 라틴어이다. UBI HAROLD SACRAMENTUM FECIT WILLELMO DUCI(해럴드가 윌리엄 공에게 서약한 곳). [8] 이때 300km를 4일만에 주파하는 미친 행군 속도를 선보였기에 그로 인한 피로 누적이 피해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이 누적된 피로와 전투 피해를 회복할 새도 없이 윌리엄이 밀고 들어오면서 다시 비슷한 속도로 돌아가 헤이스팅스 전투를 치러야 했으니 해럴드의 패배는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해럴드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해럴드군이 승리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 해럴드의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반증일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