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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01:04:23

로버트 스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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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colcolor=#fff> 로버트 스콧
Robert Scott
파일:Scott_of_the_Antarctic_(bw)_(cropped).jpg
본명 로버트 팰컨 스콧
Robert Falcon Scott
출생 1868년 6월 6일
잉글랜드 데번 주 플리머스
사망 1912년 3월 29일 (향년 43세)
남극 로스 빙붕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군인, 탐험가
계급 해군 항해 대령
복무 1881년 ~ 1912년
수상 로열 빅토리아 훈장 (1904)
RGS (1904)
베가 메달 (1905)
컬럼 메달 (1906)
배우자 캐슬린 브루스 (1908년 결혼)
자녀 피터 스콧 경 (1909~1989)

1. 개요2. 남극 탐험
2.1. 죽음의 길2.2. 사망2.3. 스콧은 왜 실패했는가
3. 그 후의 이야기4. 미디어5. 기타6. 관련 링크

[clearfix]

1. 개요

영국 해군 장교이자 남극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의 남극점 정복 경쟁으로 유명하다. 최종 계급은 항해 병과 대령.

1904년에 로열 빅토리아 훈장 3등급을 수훈했다.

2. 남극 탐험

제국주의 시대의 유럽 각국은 항로개척, 극지방 정복에 나라의 자존심을 걸고 경쟁을 펼쳤다. 1900년,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가 남극 탐험대를 보낸다는 소문을 들은 영국 왕실은 이전부터 남극 정복을 꿈꾸던 70대 나이의 왕립지리학회 회장 클레멘츠 마컴 경을 후원하기로 했다.

마컴 경은 탐험대장을 맡을 해군 장교를 물색하는데 당시 독일과 전쟁이 곧 일어날 거라는 풍문에 장교들은 남극 탐험에 무관심했다. 31세의 해군 대위였던 스콧은 전부터 알고 있던 마컴 경을 직접 만나 자신이 탐험대장을 맡겠다고 자원했고 1900년 6월 30일, 스콧은 공식적으로 남극 탐험대 대장으로 임명되고 중령으로 승진했다.

1901∼1904년 남극 탐험을 지휘해 남한 도달기록인 남위 82도 17분을 기록했다. 스콧은 당시의 이야기를 《디스커버리 호의 여행(The Voyage of the Discovery)》이라는 책으로 써서 영국인들을 흥분시켰다. 이 탐험에는 어니스트 섀클턴도 동행했는데, 섀클턴은 스콧이 책에서 자신이나 다른 동료의 행동을 지나치게 별 볼 일 없이 기록했다고 하여 스콧과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이 나빠졌다. 그런데 실제 스콧의 인성이나 행태들을 보면 섀클턴의 평가는 꽤 들어맞았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섀클턴이 1908년 12월에 남극점 100마일 전방까지 갔다가 상황이 악화되어 퇴각하고 돌아와 유명해지자[1], 스콧은 섀클턴이 다음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했기에 섀클턴보다 먼저 성공하려고 남극점 도달을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스콧은 섀클턴이 아니라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1910년 제2차 남극탐험에 나서 1912년 1월 18일 남극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스콧 일행이 남극점에서 본 것은 약 한 달 전( 1911년 12월 14일) 한발 앞서 남극점에 도달한 로알 아문센이 남긴 빈 천막과 노르웨이 국기, 그리고 천막 안에 있던 몇몇 물품과 메모지였다. 메모지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스콧 대령님께.

당신이 우리 다음으로 이 지역에 도착한 첫 번째 사람이 될 것 같으므로 이 편지를 호콘 7세께 발송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텐트 속에 남아 있는 물건들 중에서 쓸모 있는 것이 있으면 부담 가지지 말고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무사히 귀환하시기를 빌며.

로알 아문센.

아문센이 이 편지를 쓴 이유는 나쁜 의도가 아니라 만에 하나 자신이 귀로에서 쓰러져 죽을 경우에 대비한 것이지만, 스콧 탐험대에게는 속을 벅벅 긁는 비수 같은 글이었다. 스콧 탐험대의 반응은 "우리가 집배원이냐"였다고 한다.

어쨌든 약간의 어떤 물품이라도 필요한 극지 탐험에서 경쟁자에게 이런 배려를 하고 탐험 전에도 요긴한 충고를 해준 아문센에 대해 스콧과 그 탐험대의 태도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스콧이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아문센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적어도 비참한 최후는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존심 때문에, 장갑을 잃어버린 바워스 해병 소위가 장갑 하나를 챙긴 것 말고는 아문센이 남긴 물자에 손도 대지 않았다.

파일:attachment/e0006522_4ebc9a3925771.jpg
도달 뒤에 찍은 사진. 얼굴들을 봐도 울적함이 드러난다.

2.1. 죽음의 길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겠다는 꿈이 좌절된 이후, 지칠 대로 지친 영국 탐험대는 철수를 시작했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말도, 개도 ,스노모빌도 없이 사람의 힘으로 썰매를 끌고 강행군을 했기 때문이다.

운도 따르지 않았는데, 출발 전에 참고한 남극의 기온변화표는 현대 기준으로도 매우 정확한 물건이고 그에 따르면 스콧과 그의 탐험대에는 사람이 버티기 힘든 추위가 오기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이상 기온 탓에 갑자기 빨리 찾아온 추위로 영하 40도를 연속해서 견뎌내야 했다.

2월 17일, 크레바스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뇌진탕과 폐렴 합병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해군 중사(First Class Petty Officer) 에드거 에번스(Edgar Evans /1876~1912)[2]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파일:external/www.inniskillingsmuseum.com/Oates-in-Uniform.jpg

두 번째 희생자는 오츠였다. 보어 전쟁 때 입은 총상이 동상으로 도져 발이 썩어들어가서 오래 걷지 못하게 되자, 스콧에게 자신을 놔두고 가라고 애원했지만, 스콧은 그럴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오츠는 3월 16일 발의 고통을 참으며 신발을 신고 스스로 눈보라가 불어대는 천막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국내에도 번역된 스콧의 일기인 남극일기에 나온다.
오츠: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Oates: I am just going outside and may be some time.
스콧: 우리는 가엾은 오츠가 우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죽음을 향해 걷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그것이 용감한 자의, 영국 신사의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 스콧의 일기에서
결국 오츠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고,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3월 17일은 오츠의 32번째 생일이었다. 오츠가 쓰던 침낭은 구조를 위해 파견된 후발대에 의해 회수되었고, 케임브리지의 스콧 극지 연구협회에 전시되어 있다.

스콧 일행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오츠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이 '나를 놔두고 가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힘을 내 귀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계속 몰아치는 눈보라가 기다리고 있었고, 9일 동안이나 계속된 이 눈보라는 스콧 일행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등유도 바닥나 뼈까지 얼어붙을 듯한 지독한 추위 속에 식료품이라고는 홍차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진정제 30알과 모르핀 주사액 등의 의약품과 탐험 일지, 광물 샘플들 뿐이었다. 물을 끓일 수 없었으니 홍차는 그냥 이파리째로 먹어야 했고, 진정제와 모르핀은 자살을 원한다면 바로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 기독교 사회에서 자살은 금기시되는 행동이었기에 하지 않고, 끝까지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실제 죽음의 원인도 전원 동사, 즉 얼어죽은 것이다. 사실상 자살에 가깝게 죽은 사람은 오츠뿐인데 자살이라기보다는 동료들을 위한 희생이었고 후일 찢어진 침낭이 발견된 것으로 봐서는 당연스럽게도 살려고 몸부림친 것이 확인된다.

일기를 보면 스콧이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탐험 일지 마지막 페이지에 먼저 세상을 떠난 오츠 대위와 에번스 중사, 그리고 자신과 함께 마지막으로 남아 있다가 생을 마감한 헨리 바워스(Henry R. Bowers 1883~1912) 해병 소위 민간인 탐험가 에드워드 윌슨(Edward A. Wilson 1872~1912)의 아내와 식구들에게 사죄하는 글까지 써두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식구, 그리고 지인들에게 글을 쓴 스콧은 글 말미에 '침낭에 누운 채로 잠자듯이 영원히 눈을 감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저 홀로 남아있는 게 괴롭습니다...'라고 적어두고 있다.

2.2. 사망

파일:image-1-for-captain-scott-gallery-695556396.jpg
마지막 일기의 일부분
3월 29일 남긴 마지막 일기는 다음과 같다.[3]
Thursday, March 29. Since the 21st we have had a continuous gale from W.S.W. and S.W. We had fuel to make two cups of tea apiece and bare food for two days on the 20th. Every day we have been ready to start for our depot 11 miles away, but outside the door of the tent it remains a scene of whirling drift. I do not think we can hope for any better things now. We shall stick it out to the end, but we are getting weaker, of course, and the end cannot be far. It seems a pity but I do not think I can write more. R. Scott.
"3월 29일 목요일. 21일 이후로 남서남과 남서 방면에서 계속해서 강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20일에 우리에게는 두 잔의 차를 끓일 연료와 이틀 분량의 날것의 식량뿐이었다. 11마일 떨어진 우리 창고로 가려고 매일 준비했었지만 텐트 밖은 몰아치는 눈보라뿐이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긍정적인 상황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끝까지 버티겠지만 우리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끝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슬프지만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 로버트 스콧"
이 문장을 끝으로 스콧의 탐험 일지는 끊겼다. 세 명 모두 동사한 것이다. 그리고 약 8개월 남짓 뒤, 스콧 탐험대를 구조하기 위해 파견된 후발대가 스콧과 바워스 소위, 윌슨 세 사람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 후발대에는 지원대로 탐험 초기에 참가했다가 스콧의 지시에 따라 도중에 기지로 복귀한 7명[4]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앱슬리 체리개러드(Apsley Cherry-Garrard/1886~1959)의 회고록에서 세 사람의 주검을 발견했을 당시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912년 11월 12일 정오쯤, 우리는 마침내 그들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혹독한 눈보라가 모든 걸 덮어서 거대한 눈구덩이로만 보였기에,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곳은 윈튼 캠프로부터 12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눈을 헤치고 보니 천막이 보였다. 천막 위에는 약 2~3피트는 됨직한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천막이 무너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그걸 보고 난 짐작했다. '이들은 죽었구나'. 천막 입구 바깥에는 두 쌍의 스키 스틱이 눈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천막 안을 열어봤다. 안에는 바워스 소위와 윌슨이 침낭 속에 누워 있었고, 스콧은 등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름을 불러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셋 다 눈을 감고 잠을 자는 듯이 편안해 보였다. 윌슨과 바워스 소위는 기도하듯이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있었고, 스콧은 평생의 친구이던 윌슨에게 왼손을 내민 채로 굳어 있었다. 스콧의 곁에는 작은 가방이 있었는데 안에는 탐험 기록이 꼼꼼하게 적혀있는 세 권의 공책이 들어 있었다. 바워스 소위의 기후 관련 기록은 3월 13일까지 적혀 있었다.(중략)
해군 군의관 에드워드 앳킨슨(Edward L. Atkinson/1881~1929)이 고린도전서에 나온 장례식 구절을 손수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있던 자리에 그들을 묻었다.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장례식을 끝내고 보니 어느새 자정이 되었다.

파일:attachment/e0006522_4eb76e1b26aa0.jpg

그렇게 마지막 남은 세 사람도 남극에 묻혔다. 극지방의 추위 속에 장기간 방치된 시체는 100~200㎏이 넘는 무게가 나가서 시체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도 무리이기 때문이다.

파일:attachment/e0006522_4ebc9a3974d22.jpg

그리고 그들의 유품은 영국 탐험대의 전초 기지였던 윈튼 캠프(사진)로 옮겨졌고, 이 오두막은 탐험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스콧 탐험대 기념관'이 되어 있다.

스콧 탐험대는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저장고에서 17.7㎞ 떨어져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서쪽으로 불과 800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제대로 방향을 잡아 800m만 더 갔으면, 조금이나마 식량과 연료를 얻어서 생환했을지도 모른다. 전초 기지인 윈튼 캠프까지는 19.3㎞만 가면 되는 위치였으니. 물론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 겨우 800m가 그들에겐 800km처럼 느껴졌을 테지만 이걸 알았더라면 희망으로 힘을 냈을 테니 후세에 안타까움을 준다. 문제는 저장고를 찾지 못한 것도 스콧이 자초한 일이었다는 것. 아문센은 제아무리 어떤 눈보라가 와도 눈이 쌓여도 생필품 저장고를 찾을 수 있도록 큰 깃발을 높이 세우고 할 수 있는 일을 다했고, 개썰매를 운용했으므로 개들이 냄새를 맡고 저장고가 있는 정확한 지점으로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스콧은 그런 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죽음은 자업자득이 되고 말았다. 결과론적이지만, 트뤼그베 그란(Tryggve Gran,1888~1980)이라는 노르웨이 출신 파일럿을 초대하여 스키를 배운 스콧이지만 정작 일행들은 스키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데다 탐험 여정에도 그란을 빼놓고 갔다가 전원이 다 사망했다. 바로 이 그란이 스콧 구조대 가이드를 맡아 공교롭게도 얼어 죽은 스콧 일행 시신도 먼저 찾아냈다. 그란은 스키를 잘 타고 추운 지역에 살면서 추위에 대응도 잘했기에 같이 갔더라면 최소한 목숨이라도 구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인데 그런 그를 놔두고 간 건 같은 노르웨이인이라고 아문센을 도와 자신들을 방해할 거라고 여긴 스콧이 자업자득으로 최후를 맞이한 셈이다.

2.3. 스콧은 왜 실패했는가

당시 세계에선 당연히 세계최강 영국의 막강한 지원을 받는 스콧이 이길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정작 스콧의 탐사팀은 여러 모로 심각한 문제투성이여서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로알 아문센 vs 로버트 스콧 문서
번 문단을
전략 비교 분석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그 후의 이야기

스콧 원정대가 추위 속에서 절망과 고통으로 생을 마감할 때, 아문센 원정대는 개 몇 마리를 잡아먹어서 잃은 것을 제외하고[5] 이미 전원 아무도 다치지 않고 돌아왔기에 노르웨이에서는 당시 국왕이었던 호콘 7세(1872~1957)가 탐험 성공을 치하하여 탐험대 대장이던 아문센을 위시한 탐험대원 전원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등 나라 전체가 잔치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세계의 예상을 뒤엎은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영국을 제외한 세계 언론은 아문센의 기적 같은 대승리[6]를 축하하고 보도했다. 무엇보다 영국을 아니꼽게 보던 프랑스에서는 좋아라 하며 아문센에게 몰려와 축하해 주면서 아문센의 탐험 성과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물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당시 최강대국인 영국은 유럽에서 새로 등장한 신생 독립국[7] 노르웨이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멘붕한 나머지 아문센을 어떻게든 격하하려고 언플에 나섰다. 탐험 도중 개를 잡아 식량으로 썼다는 말을 듣고는 영국 신문들은 '개를 잡아먹는 야만인', '개, 남극점에 도달하다'라는 제목으로 비하하는 기사들을 썼다. 심지어 아문센의 탐험에 귀중한 조언과 경험을 전수해준 이누이트들을 '날고기 먹는 놈들'이라는 인종차별적이고 비하적인 명칭인 에스키모로 칭하며 도매금으로 비난하는 추태를 저질렀다. 하지만 개들을 도살했을 당시 아문센의 일기를 보면 매우 안타깝고 어쩔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남아있으며, 썰매들을 '충성스러운 동반자'로 지칭했다.

이에 아문센은 " 그렇다면 추위와 굶주림 속에 죽어가면서까지 개를 지키고 싶은가?"라며 영국 기자를 비꼬았고, 이 일갈에 영국 기자들은 제대로 반론도 못했다. 사실 아문센의 동료이자 개훈련 담당이던 할머 한센은 당연히 직업상 개를 무척 아꼈고, 소중한 개들이 식량으로 희생되는 것을 슬퍼했으나, 그렇다고 영국 기자들의 편에 서서 탐험대장이던 아문센을 비하하거나 욕하는 짓은 안했다. 오히려 개들의 숭고한 희생을 더럽혔다며 영국 기자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비록 실패자이지만 아문센과 함께 위대한 탐험가로 칭송되는 영국인 어니스트 섀클턴 또한 직접 말을 데리고 남극 탐험을 했다가 크게 데인 경험을 살려 스콧의 여정에 조랑말이 아닌 개를 추천했으며, 그 자신 또한 개를 데려가서 모두 잡아먹었고,[8][9] 결과적으로 인간 대원 전원을 무사히 살려서 함께 귀환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영국 언론은 전멸한 스콧 탐사대를 기리고 슬퍼하면서 스콧 일행을 우상화하는 감정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스콧을 자상한 인품과 강한 의지를 동시에 지닌 이상적인 인물이었다고 보도하면서 은근히 아문센이 성질 더럽네 어쩌네 하며 은근히 까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탐험 초기에 이탈한 요한센의 예를 들어 독선적인 고집불통이라고 계속 공격했다. 그러나 아문센 VS 스콧 문서를 읽었으면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아문센은 스콧의 탐험에 계속해서 충고와 도움을 주었으나 그것을 무시한 것은 스콧 본인이었으며 게다가 같은 나라의 동료인 어니스트 섀클턴에게 보인 이기적인 태도를 보면 오히려 이러한 영국 언론의 비난은 스콧 본인에게 가야 할 것이었다. 참고로 섀클턴은 아문센이 남극점 정복 계획을 감추고 북극으로 간다고 거짓말을 한 행동에 대해선 비판을 했지만, 아문센이 성공적으로 탐험을 마치고 돌아오자 언론과 달리 아문센을 비난하지 않은건 물론, 아문센을 "오늘날 가장 위대한 극지 탐험가"라고 극찬하기 까지 했다.

심지어는 1920년대까지 스콧이 남극점을 정복했다고 역사왜곡을 하는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이것이 밝혀지게 된 계기로는 영국에서 공부하던 노르웨이인 학생이 이 사실을 알고 자기 아버지에게 얘기를 했는데, 하필 이 학생의 아버지는 아문센과 친구 사이였다. 그렇게 이 사실은 아문센에게까지 알려지고, 여러 국가에서 영국을 비난하게 된 이후에서야 영국은 교과서를 수정했다고 한다.

이외에 영국 정부는 계속 아문센과 스콧의 업적을 동일시하려고 온갖 로비를 벌였다. 이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어 남극점 코앞에 조성된 미국 기지가 ' 아문센-스콧 남극점 기지'로 명명되어 있는 것은 물론 남극점 위치 팻말에도 1등인 아문센과 2등인 스콧의 이름이 같이 새겨져 있다. 등산가 박영석(1963~2011)은 생전에 남극점 탐험에 나선 뒤 이 푯말을 보면서 '당시 아문센이 2등을 했다면 과연 이렇게 아문센의 이름이 같이 적혀 있었을까?' 이렇게 회고한 적도 있다.

영국의 국력이 강했고, 스콧 일행 모두가 생환하지 못했다는 동정표 및 그 와중에도 틈틈이 기후를 꼼꼼하게 기록하면서 마지막까지 광물과 온갖 자료를 소중히 간직하며 죽었다는 점으로 오로지 남극점만 가려던 아문센보다 더 성과가 많다는 점으로도 부각되었다.

그래도 굳이 스콧이 체면치레할 만한 건덕지가 있다면, 탐사 과정에서 남극 생태 광물 및 기후, 빙하 연구 등의 분야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남극에 사는 펭귄들, 그 중에서도 황제펭귄 연구는 스콧이 처음 시도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마냥 변호만 해 줄 수도 없는 게, 황제펭귄 알을 채집하겠답시고 남극의 한겨울인 6~7월에 왕복 2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가서 알을 채집해오는 무모한 일을 저질렀다.[10]

물론 펭귄 알을 채집하자는 것이 스콧의 생각은 아니었고 같이 탐험을 온 윌슨의 제안이었으나 # 대원들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딱 잘라 말하면 탐험대장이라는 중요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펭귄 연구라는 명목으로 위험천만한 행동을 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 탐험대를 이끌어야 할 책임자가 혼자 뻘짓하다 덜컥 죽어 버리면 같이 간 대원들은 뭐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실제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스콧은 탐험대를 이끄는 대장이라는 직책의 인물이었고, 탐험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업적이나 탐사가 아니라 생존과 생환이다. 아문센이 어떻게 마지막에 승리했고 지고의 탐험가로 이름이 남았는지, 섀클턴이 왜 실패했음에도 칭송받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콧의 일지가 발견된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에 불과하며, 그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얻은 부산물이 무엇이건 스콧은 결국 탐험가로서는 실패한 인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반면에 승리자인 아문센은 국가 간 힘의 논리로 인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되레 부정적인 면이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며 북극점을 먼저 정복했다고 알려졌던 로버트 피어리 이누이트들에게 저지른 잔악한 행위로 본국에서도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것과는 달리, 아문센은 승부욕이 크기는 했지만 이누이트들과 친하게 지냈던 데다가 사생활적으로도 검소했고 경쟁자였던 스콧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움베르토 노빌레와 탐험 인생 내내 사이가 안 좋았지만 노빌레를 구하고자 나섰다가 사고로 생을 마친 것을 보면 사람 됨됨이도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군자스러운 사람이었다.

사실, 스콧이 남극점 정복에 무리하게 나선 것도 한때 자신의 수하였던 어니스트 섀클턴이 비록 남극점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큰 성과를 얻고 남극 탐험을 마치자 열등감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저서에서는 섀클턴을 변변치 못한 인물로 헐뜯고 있는데, 탐험대의 리더로 놓고 본다면 섀클턴과 스콧 사이에는 넘사벽의 기량 차이가 있다. 훗날 아문센이 섀클턴을 '나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못 해냈을 것'이라며 칭찬했던 것을 비교하면 이미 기본적인 인성에서부터 스콧은 한 수 접고 들어간다.

거기에 스콧과 아문센이 남극점 정복을 위해 각자의 베이스 캠프와 보급기지를 만들고 준비하던 시기, 나름대로 훈훈한 분위기에서 서로 조언과 충고를 나누며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스콧이 침낭에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며 아문센은 영국 영토에 침범한 것이니 붙잡아서 귀국시킬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쳤다며 매우 아까워하기도 했다. 스콧이 베이스 캠프로 삼은 그레이트 보빙 아이스 지역은 스콧과 섀클턴이 발견한 지역이므로 영국 영토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단 그 지역은 영국령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런 저열한 수단으로 상대방을 해코지할 생각을 했다는 것부터가 신사나 페어플레이에서 한참 벗어난 발상이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더라도 스콧은 간접적으로 대원들을 전부 죽게 만들었다.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는 데 성공만 하면 '스노모빌 몇 대 좀 버렸다고' 비난을 받을 리도 없었을 텐데 비싼 장비랍시고 무시무시한 혹한 속에서 인력으로 끌고 가게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 짓을 벌였으며 이는 스콧 탐험대가 몰살당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또한 다음 전초기지까지 정말 가까운 거리에서 전원 사망했다는 건, 설령 위치를 알았어도 거기까지 갈 힘이 없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져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되기 때문이다. 사람 포유류 동물 중에서 평균 신체능력이 최하위권이다. 덩치가 큰 편에 속해서 싸움실력만 늑대급이지 힘, 민첩, 맷집 등 세부적인 것을 하나하나 따지자면 사람은 완력을 제외하고는 토끼만도 못하다.[11] 이런데도 대영제국 군인으로서 극기정신이니 뭐니 하며 말도 안되는 짓을 자행함으로써 생존에 도움 안 되는 짓만 반복했다. 어니스트 섀클턴이 남극점 정복에는 실패했을지언정 위대한 탐험가로서 괜히 존경받는 게 아니다. 적어도 섀클턴은 대원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살려서 고국에 데려왔고, 심지어 이후의 탐험에서는 밀항자까지 살려서 데려왔다.

당시 탐험가들의 도전정신과 낭만주의, 근대주의를 선호하는 당시의 시대상[12]+비극적인 최후+잘 나가던 시절의 영국이 어거지성으로 스콧을 띄워준 것 등이 합쳐져 고평가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나 낭만주의가 저물고 합리주의가 대두되면서 아문센이 지나치게 저평가되고 있다는 주장과 인식이 크게 떠올랐고, 반대로 아무리 스콧이 인정이 많았고 과학 탐사에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더라도 스콧의 무능이 대원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스콧의 탐험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 심지어 '사실 스콧은 살려면 살 수도 있었는데 남극점 최초 도달 기록을 빼앗긴 패배자로 살기보다는 순교자로 기억되기를 원해서 죄 없는 동료들까지 함께 고의로 죽게 만들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13] 오히려 남극점에 도달하지도 못했지만[14] 현명한 판단력과 강한 의지로 전원 생환에 성공한 섀클턴이 재조명되고 있다.

심지어 '스콧은 일기만 쓸데없이 잘 써서 평가가 높아졌다'는 주장까지 있다. 자신들이 겪은 고난을 구구절절하게 문학적으로 서술하며 최후까지 가는 스콧의 일지에 비해, 아문센의 남극 회고록은 애초에 탐험 과정에서 심각한 고난이나 변수를 겪지 않아서 일반인들의 관점에서는 흥밋거리[15]가 없고, 실용적인 성품이다 보니 문체도 비교적 건조한 편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나온 저술에서는 스콧의 실패를 대영제국의 몰락과 연계시킨 연구까지 나왔는데, 남극에서 망해서 저주를 받았다는 식은 아니고 스콧의 오만함과 무계획성, 그리고 소통의 부재가 이후 20세기의 영국이 벌인 여러 실책들을 연상시킨다는 내용으로 상당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론이다.

2000년대 이후에는 또다시 스콧의 탐험에 대하여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긍정적인 평가는 아니고, 오히려 과거처럼 어거지로 스콧 미화라는 이름의 재평가라는 비아냥도 있다. 사실 탐험에 대한 재평가로서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것은 이미 100년 전부터 열심히 홍보하곤 했었다.

WWF( 세계자연기금)의 창립자 중 한 명이자 자연주의 화가였던 아들 피터 스콧(1909~1989)은 아버지가 죽을 당시 3살이었는데, 어머니인 캐슬린 스콧[16]과 의붓아버지 켄넷 남작의 배려로 자연과 친숙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훗날 가족들과 함께 남극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탐험대원들과 함께 케이크와 바다표범 고기로 생애 마지막 잔치[17]를 즐겼던 윈튼 캠프(전술한 스콧 탐험대의 전초 기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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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6월 22일 미드윈터스 데이 당시 사진. (굵은 글씨가 스콧과 마지막을 한 이들이다.) 사진 속에 나온 사람들은 앉아있는 왼쪽부터 데버넘, 오츠 대위, 미어스, 바워스 소위, 체리-개러드, 라이트, 스콧 대령(가운데), 윌슨, 심슨, 넬슨, 에번스 중사, 데이, 테일러. 그 밖에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앳킨슨,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은 글렌.

4. 미디어

일본에서 나온 학습 애니메이션 미미의 컴퓨터 여행(ミームいろいろ夢の旅(원제목은 밈과 여러가지 꿈의 여행)/1983. 우리나라에서는 1986년에 KBS-1에서 방영했다.)에서는 아예 아문센 이야기와 함께 스콧 편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여기서도 스콧 편을 더 비중있게 만들어버린 게 문제.[18] 스콧 편에서는 주인공 일행이 탐험대에 합류해 같이 탐험하지만 중간에 빠진다. 이 행보도 어떤 면에서는 애니를 만든 제작진의 의도와는 달리 스콧의 탐험가로서 한심한 면을 부각시키는 격인데 중간에 작별했다지만 단순 여행도 아닌 남극탐험에 원래 예정에 없던 사람들을 즉흥적으로 탐험대에 합류시키면 그만큼 물품 소모가 늘어나 보급 문제에 예상보다 더 빨리 직면하기 때문이다.

1985년 영국에서 The Last Place on Earth(지구의 마지막 땅)라는 제목으로 아문센과 스콧 탐험대에 대한 드라마를 제작했고 한국에서는 MBC를 통해서 방영된 바 있다. 영국 배우 마틴 쇼가 스콧 역을 맡았고 이하 영국, 노르웨이 배우들이 대거 참가한 작품인데.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스콧 탐험대의 병크를 많이 줄이고 아문센의 철저한 계획부분을 그냥 넘어가버렸으며, 위인전 이상으로 스콧 탐험대의 비장한 최후만 리얼하게 그렸기에 이 드라마는 후세 역덕들에게서도 욕을 먹고 있다.

노빈손의 남극 어드벤처에서는 노빈손이 이 시대로 시간여행을 와서 스콧 일행과 함께 남극을 탐험하는 모습이 나온다. 대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노빈손의 시점에서 보여주며, 여기서도 스콧이 마지막으로 죽은 것으로 나온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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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답게 스콧의 이름을 딴 홍차인 캡틴 스콧 블렌드 티(Captain Scott Blend Tea)가 있다. 테스코가 매각하기 전까지 홈플러스에서 판매했다. 홈플러스 매각 이후 추가 입고 없이 70%가 넘는 할인판매를 하고 판매 종료. 더 이상 한국에서는 구할 길이 없어진 듯.

열어보면 보통 티백 이미지와는 달리 둥근 형태가 특징으로, 표지에서는 스콧이 있었던 남극처럼 어떤 극한 기후에도 잘 우러나온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엑스트라 스트롱이라는 단어답게 매우 진하고 쓰다. 거기에다 티백 당 70원 정도 하는 가성비 덕분에 보통 밀크티용으로 쓰였다. 온수가 아닌 물에서도 빨리 우러나오며 아침에 바쁠 때 브렉퍼스트 티로서도 좋다. 어쨌든 남극에서 했던 것처럼 찻잎째로 씹어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자손으로 외아들 피터 스콧이 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국 해군에 몸담아 자원예비역 장교로 중령까지 진급했고, 올림픽 요트 선수 및 자연사학자, 자연 보호론자로 활약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선박의 위장도색으로도 유명했다. 아버지보다 이름은 덜 알려져 있지만, 성과만 놓고 보면 아버지보다 낫고, 뭣보다 아버지처럼 미숙하게 탐험하다 사람 잡진 않았다.

6. 관련 링크



[1] 섀클턴이 탐험하기 전 스콧은 자신에게 맥머도 만 탐험길의 우선권이 있다며 태클을 걸었고 섀클턴 또한 수긍했지만 기상 사정으로 맥머도 만을 통해 탐험했다. 스콧은 이를 알고도 영국 왕실에서 평민에서 귀족으로 올려 줄 정도로 영웅이 된 섀클턴을 비난할 수 없었고 더욱 초조해졌다. [2] 사실 그 전에도 뇌진탕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스콧의 일기를 보면 잘 나타나 있는데 바쁘게 가는 길을 가로막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횡설수설했다. 외국에서 제작한 미니시리즈에서는 완전히 실성한 모습이 리얼하게 방영되어 충격을 준 바 있다. [3] 그 외에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작성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실패 원인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 [4] 이 중 1명이 훗날 어니스트 섀클턴과 함께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구조 요청을 하러 떠난 무모한 인물 5인 중 한 명인 톰 크린이다. [5] 사실 아문센 원정대의 원래 계획이 개를 데리고 가다가 유사시에는 먹는다였으니 개를 잃었다고 하기도 뭐하고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다고 해야 한다. 더구나 극지방의 썰매개들은 원래 본능적으로 같이 썰매 끄는 동료가 쇠약해지면 집단 공격하여 잡아먹는 습성이 있기에 오히려 극지에서의 생존방식을 잘 따른 셈이다. [6] 겉으로 보면 대영제국 VS 갓 독립한 노르웨이의 대결국면이라서 영국이 유리해 보였다. 실제로는 아문센 VS 스콧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실 스콧이 이긴다면 그게 더 이상했고 아문센이 이기는 게 당연했다. [7] 노르웨이는 1905년에 스웨덴으로부터 겨우 독립했다. 이전에는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이라 하여 스웨덴과 동군연합이었고 외교와 국방이 스웨덴에 종속되어 있었다. [8] 개뿐만이 아니라 남극에 있던 펭귄, 바다표범, 조개 등 일단 먹을 수 있는건 다 구해다가 먹었고, 심지어 개먹이였던 개 페미컨까지 먹어야 했다. 섀클던 탐험대는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식량사정이 여의치 않아 고생했다. 그러나 스콧 탐험대는 주변 자원까지 닥치는대로 활용하긴커녕 당장 탐험에 동원한 말과 개조차도 제대로 식량으로 삼는 것에 실패했다. 그래도 죽은 말 중 일부가 식량이 되었지만 스콧 탐험대의 식량난을 해결해주는 것에 도움이 크게 될 수준은 아니었다. [9] 아문센의 탐험대도 남극에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사냥을 했지만 철저히 준비된 안전한 탐험에 도리어 지루함을 느껴 심심풀이로 하기도 했으며, 이마저도 아문센이 과한 사냥은 불필요하다며 자제시켰다. 심지어 그렇게 사냥을 많이 하면서 식량을 비축했는데도 예상외로 소모가 많아서 개를 도축해 먹어야 했다. [10] 채집한 알을 스케치 후 돌려주러 갔다 사고를 당할 뻔했다는 말도 있지만, 스케치를 할 필요도 없이 이 당시 스콧 일행이 가져온 알의 표본이 지금도 남아있고(5개를 채집했지만 2개는 돌아오는 중에 깨져 3개만 남아있다고 한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몇백 킬로미터나 되는 서식지까지 돌아가서 알을 돌려주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움직이는 것 자체가 자원을 소모하는 행위인 극지방에서 그러한 행위를 할 경우 오히려 죽으려고 작정했다고 다윈상 받기 딱 좋은 짓이다. [11] 대신 인간은 동물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지구력과 도구를 쓸 수 있는 높은 지능으로 약점을 극복했다. 문제는 이들이 간 곳이 그 '도구'를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지구력 따위는 순식간에 고갈되는 남극이라는 점이었다. [12] 그래서 실용적이고 합리적으로 탐험을 계획했고 그 계획을 잘 따라 수월하게 탐험을 진행했던 아문센은 그 당시엔 저평가를 받기도 했다. 물론 탐험에 있어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계획과 실리적인 태도, 팀원들의 안위가 중시되는 현대에선 아문센이 오히려 고평가를 받고, 스콧은 똥별 취급을 받고 있다. [13] 책 '죽음에 대한 잡학사전'의 평가. [14] 정확히 말하자면 섀클턴 또한 스콧과 마찬가지로 남극점에 도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남극점을 밟으면 아무도 귀환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결국 포기하고 돌아가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후 귀환한 섀클턴이 아내에게 한 말이 "죽은 사자보다 산 당나귀가 낫다"였다. [15]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려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 되어야 하는데, 아문센이 준비를 철저히 했고 너무 탐험을 잘 해서 초반에 너무 빠른 출발이라는 실수를 한 것 정도 빼면 애초에 위기라고 할 만한 위기가 없다. 아문센은 따분한 휴식 시간 동안 사냥에 맛들린 대원들이 마구잡이로 남극의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을 엄금하였는데 1분 1초가 위험과 위기가 뒤따르는 남극탐험 도중에 따분함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얼마나 순탄한 여정을 이어나갔는지를 증명한다. [16] 1878~1947, 원래 성은 브루스, 나중에 힐턴 캔넷 남작(1879~1960)과 재혼하면서 캐슬린 캔넷이 되었다. [17] 생일잔치라고 알려졌는데 생일잔치가 아니라 남극 기지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미드윈터스 데이를 즐기는 잔치 자리이다. [18] 일본과 영국은 정치체제상 같은 군주국에 통행방식도 좌측통행으로 같고 영국을 좋아하는 경향이 강하긴 하다. 노르웨이도 왕이 있는 군주국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