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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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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국
Рѹ́сьскаѧ землѧ | Rusĭskaję zeml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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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1054년 야로슬라프 1세 사망 직후의 최대 강역
882년 ~ 1240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루스 카간국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수즈달
하자르 카간국 갈리치아-볼히니아
<colbgcolor=#005bbb> 위치 동유럽
수도 벨리키 노브고로드 크예브
정치체제 군주제[1]
국가원수 벨리키 크냐즈(키예프 대공)
주요 대공 올레그(882~912)
스뱌토슬라프 1세(945~972)
블라디미르 1세 '벨리키'(980~1015)
야로슬라프 1세(1019~1054)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1112~1125)
므스티슬라프 1세 '벨리키'(1125~1132)
언어 고대 동슬라브어, 교회 슬라브어,
고대 노르드어(초기 한정)
민족 루스인( 동슬라브인), 노르드인,
발트인, 발트핀인, 볼가핀인 등
종교 북유럽 신화, 슬라브 종교 정교회[2]
인구 540만 명 (1000년)
통화 그리브나[러], 흐리우나[우], 그리우나[벨]
현재 국가
[[러시아|]][[틀:국기|]][[틀:국기|]]

[[우크라이나|]][[틀:국기|]][[틀:국기|]]

[[벨라루스|]][[틀:국기|]][[틀:국기|]]
언어별 명칭
고대 동슬라브어 Рѹ́сьскаѧ землѧ[6] / Рѹ́сь
(Rusĭskaję zemlę / Rusĭ)
러시아어 Ки́евская Русь
우크라이나어 Київська Русь
벨라루스어 Кіеўская Русь
그리스어 Κράτος των Ρως
영어 Kievan Rus'
한국어 키예프 루시
1. 개요2. 민족 구성3. 역사
3.1. 형성3.2. 초기3.3. 중기3.4. 전성기3.5. 쇠퇴 및 멸망
4. 역대 대공5. 문화6. 경제7. 창작물

[clearfix]

1. 개요

중세 동유럽에 존재했던 나라로, 동시대 유럽에서는 가장 영토가 넓었던 나라였기도 하다. 옛 루스(Древняя Русь)라고 불리기도 한다. 좀 더 마이너한 용어로 동시대의 카롤루스 제국과 대비하여 류리코비치 제국(Имерия Рюриковичей)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7]

쉽게 혼동되는 부분이지만 '키예프 루스(Киевская русь)'와 그 키예프 루스의 일부인 '키예프 크냐지국(Киевское княжество)'[8]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니 주의할 것. 이러한 용어적 혼동은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도 있는데, 이 용어가 제정 시대에 만들어져서 초창기에 보편적인 정의 없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對동로마 무역이 쇠퇴하면서 수도 격인 키예프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 체르니고프, 폴로츠크, 랴잔 등이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13세기 중엽 몽골 제국이 침공함으로써 최종적으로 키예프 루스 체제가 붕괴되자 동슬라브족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3개국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루스의 북부에서 몽골의 간접 지배를 받은 지역으로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자립해 강대국으로 성장했고, 벨라루스는 몽골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배를 받은 지역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다가 벨라루스보다 좀 더 늦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세력권 안에 들었다.

러시아 벨라루스 측에서는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뒤로는 키예프 루스의 정통성이 독립을 지키고 이후 힘을 길러 루스 영역의 최강국이 되는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반면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몽골 침공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남서부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으로 키예프 루스의 직계가 이어진다고 보았다. 역사가 토마셰프스키는 이 갈리치아-볼히니아를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했다.[9]

2. 민족 구성

노르드인들이 발트해를 건너 지금의 벨리키 노브고로드 일대에서 류리크 왕조를 개창한 뒤, 남하해서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정복한 후 제2대 대공 노브고로드의 올레그 때 중심지를 이곳으로 옮겼다.

이 나라를 세운 민족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노르드인들이라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똑같이 바이킹 계열 집단이 정복하여 지배층이 된 노르망디 공국,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 잉글랜드가 그 이전까지 국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국가' 수준으로 발전했는지는 몰라도 노르드인의 도래 이전에 토착민 세력이 존재했으며 북쪽의 바이킹들, 남쪽의 유목민들과 맞써 싸우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동슬라브 계통 국가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는 자신들의 시조가 되는 국가를 노르드인들이 세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부정하고 #, 동슬라브인들이 건국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 각 국가의 위키백과에서는 키예프 루스의 노르드인 도래설을 인정하는 서술을 써놓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 3국에서, 키예프 루스가 노르드인이 세운 국가라는 설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은 듯하다.[10]

그러나 반노르드 이론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반노르드 이론'이란 명확하게 정립된 특정 이론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있었던 노르드주의에 대한 반론이나 대안설 등을 총칭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11] 물론 이중에서는 역사왜곡이나 프로파간다성 주장도 있지만, 대부분은 키예프 루스가 건국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르드인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지적하거나, 슬라브인•핀인•발트인•튀르크인[12] 등 다른 민족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노르드 이론이 '민족주의적' 시각이고 반노르드 이론이 여기에 반대하는 형국이다. 오히려 노르드설이 16~18세기 스웨덴의 최전성기 시절 동유럽에서 스웨덴의 팽창주의를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로 쓰였다.

다만 원래 ' 루스'라는 단어 자체가 노르드인을 의미하는 만큼 노르드인이 그중 상대적으로 가장 지분이 크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13] 초기 러시아 연대기나 기록들은 루스인을 정복자-지배자, 슬라브인[14]을 피정복자-피지배자로 구분하며 '루스인의 땅'은 단지 이 노르드인들이 점유하고 있는 땅으로 국한한다. 마찬가지로 전근대에서 전사회적인 민족주의나 민족의식이 있었을 리 만무하고 노르드인의 도래 이전에 (혈통적으로) 순수한 슬라브인인 존재했다기보단 발트인, 핀인, 슬라브인, 튀르크인들이 같이 살면서 서로 연합하기도 하고 분열하기도 하면서 섞이다가 최종적으로 노르드인에 의해 군사적으로 통합되고 훗날 기독교 공인으로 인해 문화적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잡다한 민족들이 '동슬라브인', '루스인'이라는 동일한 의식을 가지게 된 것에 가깝다.

비록 각국 정부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는 민족주의적 사관에 의해 왜곡되고 있지만 그 해당 국가 역사학계 내에서도 주류라고 보긴 힘들고 신성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류리코비치 제국 또한 (동슬라브인이라는 대범주로도 묶기 힘든) 다민족적 국가 혹은 엘리트층을 제외하면 하나의 단일의 민족집단을 형성하지 못했다고 보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3. 역사


3.1. 형성


중세 초기,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인하여 유럽의 동쪽 대부분은 슬라브인이 다수인 지역이 되었다. 그중 중앙유럽에 자리잡은 서슬라브인과 발칸 반도에 자리잡은 남슬라브인과 달리 동유럽에 자리잡은 동슬라브인은 기독교 문명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러 부족들로 나눠져 있었다. 그중 키예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일대는 튀르크계 하자르 칸국의 영향권에 있었고, 노브고로드를 포함한 러시아 북서부는 슬라브족이 우랄계 민족이나 발트계 민족과 함께 살던 지역이었다.

그러던 중 8세기 중반부터 바이킹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9세기에 이르러 류리크가 이끄는 바랴그인(바랑인) 바이킹 세력이 855년에 라도가 호수에 정착했고, 862년에는 일멘 호수에 도달해 노브고로드를 건설했다. 그리고 류리크 사후 세력을 이어받은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남하해 키예프를 점령하고는 수도로 삼은 것이 키예프 루스의 시작이었다.

12세기에 한 수도자가 작성한 《원초연대기》에 따르면 노브고로드 일대는 슬라브족, 핀족, 발트족이 서로 싸우느라 혼란스러웠다. 참다 못한 현지 부족이 류리크를 찾아가 '이 일대는 혼란스러우니 이 곳을 다스려 달라.' 하고 초청했고, 류리크가 이에 응해 바랴그인을 이끌고 이 지역을 평정했다고 한다. 류리크는 노브고로드를 건설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는 세력을 확장했다. 879년 류리크가 죽었을 때, 올레그가 아직 어린 류리크의 아들인 이고리 류리코비치를 대신해 통치했다. 882년에 올레그는 어린 이고리를 데리고 드네프르 강을 타고 남하하여 키예프로 가서 류리크의 아들인 이고리가 정당한 지배자라는 명분으로 이미 키예프를 지배하고 있었던 류리크의 옛 부하인 아스콜드와 뒤레를 죽이고, 키예프를 접수했다고 한다. 초기 키예프 루스의 인구 구성은 원주민인 슬라브 및 우랄계와 발트계, 북유럽에서 이주해 온 바이킹계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3.2. 초기


이후 올레그는 키예프 인근의 여러 동슬라브족들을 공격해 영토를 빠르게 확장했다. 키예프 루스는 910년에 카스피해를 통해 이란 북부 마잔다란 지역을 약탈하기도 했고, 흑해를 통해 동로마 제국에도 직접 원정을 가기도 했다. 올레그의 뒤를 이은 자는 제1대 대공 류리크의 아들로 알려진 이고리 류리코비치였다.[15] 941~944년에 다시 동로마 원정에 나섰으나, 945년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는 길에 키예프 공국의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감을 품은 드레블랴네족에게 살해당했다.

이고리 류리코비치의 아들 스뱌토슬라프는 너무 어렸기에 이고리의 아내 올가 대공비 섭정하였다. 이 시기 드레블랴네족에게 응징을 가하여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세례를 받아 루스 최초의 그리스도교도 군주가 되었다. 아들 스뱌토슬라프 1세는 성장한 뒤 965년부터 군사활동에 나서서 볼가 불가르를 복속시켜 볼가 강 일대의 무역로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하자르를 공격하여 수도 이틸을 함락시켰다.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슬라브 부족들은 9세기 바랑고이족들이 남하하기 이전까지 하자르 칸국에 공물을 바치던 상황이었다. 루스인이 남하하여 하자르 칸국은 점차 슬라브 부족들에게 영향력을 상실하다가, 10세기에 키예프 루스에게 침공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과거 하자르 칸국에게 공물을 바치던 슬라브 부족 상당수가 루스인들에게 투항한 것을 계기로 키예프 루스는 점차 슬라브화되었다.

이후 스뱌토슬라프는 스뱌토슬라프 전쟁을 일으켜 발칸 반도의 강국 불가리아 제1제국을 침공하여 거의 점령하는 등 그 강력한 군사력을 입증했다.[16] 하지만 결국 스뱌토슬라프는 동로마 제국도 공격하다가 요안니스 1세에게 패배하고 돌아오던 중 유목 민족인 튀르크계 페체네그인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두개골은 술잔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스뱌토슬라프의 최후는 비참했으나 패배하기 이전까지는 군사적으로 뛰어났다. 동로마 제국은 키예프 공국 병사들의 활약상을 보고는 바랑인 친위대를 창설하기도 했다.[17]

3.3. 중기


정복군주 스뱌토슬라프의 전사하자 왕위를 야로폴크 1세가 이었다. 그러나 980년에 옛 수도 노브고로드를 지배하던 블라디미르 1세가 반란을 일으켜 야로폴크 1세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블라디미르 1세는 국경지대의 발트족과 동슬라브족, 핀족 등을 정벌하여 국경을 안정시켰다. 또한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였고, 이후 국교로 인정했다. 물론 이 기독교화 과정이 평화롭게 진행되지 않았고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노르드 성향이 강한 북부지방에는 반란과 학살이 일어났다.

이후 정교회는 현재까지 동슬라브인들의 명실상부한 전통 종교가 되었다. 키예프 상인들은 드네프르 강 흑해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 교역했으며, 볼가강의 아틸[18]과 불가르[19]를 거점으로 삼아서 이슬람의 아바스 칼리파조와 교역했다. 블라디미르 1세 사후에는 야로폴크 1세의 아들 스뱌토폴크 1세가 대공위를 계승하였다. 스뱌토폴크 1세는 정교회가 아닌 가톨릭 신자인 데다가 권력 유지를 위해 동생들을 살해한 탓에 민심을 잃었다. 이런 와중에 야로슬라프 1세가 반란을 일으켜 스뱌토폴크 1세를 죽였다.

3.4. 전성기


야로슬라프 1세가 재위하면서 영토가 확장되었고, 11세기 중반에 최전성기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야로슬라프 1세는 자신의 세 공주들을 각각 프랑스, 헝가리, 노르웨이의 왕에게 시집을 보냈고[20], 자신의 여동생들을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공작 ('부흥공') 카지미에시 1세 및 동로마 제국의 황자와 혼인을 시켰다. 그 자신도 1019년 스웨덴 임금 올로프 솃코눙의 딸 잉에예르드 올로프스도테르(Ingegerd Olofsdotter)와 결혼하는 등 적극적으로 타 유럽 국가들과의 혼인 외교정책을 펼쳐, 전쟁을 피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한편 중세 유럽의 문화적 패권국인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를 방해하는 페체네그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적극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루스카야 프라우다》라는 동슬라브 최초의 법전을 편찬하는 등 키예프 공국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며 번창하였다.

3.5. 쇠퇴 및 멸망


파일:13세기 초 루스 지도.png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키예프 루스
1169년 루스 공후들 중 가장 세력이 막강하고 야심이 큰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보골륩스키 공후의 군대가 키예프를 차지했다. 보골륩스키 자신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아들을 보내 전투를 치르게 했다. 키예프를 점령한 그의 군대는 3일 연속 도시를 약탈했다. 보골륩스키는 키예프로 옮겨와서 이곳을 수도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보골륩스키가 클라즈마 강변에 있는 자신의 수도인 블라디미르를 선호한 것은 12세기 루스 정치, 경제, 사회에 일어난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키예프와 드니프로강 중류 지역이 끊임없는 전쟁에 휘말려 있는 동안 키예프 세계의 변방에 있는 주요 공국들이 더 부유해지고 강해졌다.

현재 우크라이나 서부인 카르파티아 산맥 아래에 있는 갈리치아 공국은 동로마 제국의 후원 아래 다뉴브강을 이용해 발칸 지역과 교역을 했다. 이곳의 공후들은 공국을 번성시키는 데 드니프로 강 교역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보골륩스키는 볼가강 교역을 장악하고 있던 불가르인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북서쪽의 노브고로드 발트 지역과의 교역으로 부를 쌓았다. 드니프로강 교역로는 여전히 존재했고, 폴로베츠족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교역량은 더 증가했지만, 드니프로강 교역로는 루스에서 더 이상 유일한 교역로도 아니고 중요한 생명선도 아니었다.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세르히 플로히 저 / 허승철 역
12세기 초반부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지중해 무역로가 더 각광을 받게 되면서 흑해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무역로가 쇠퇴함에 따라 키예프 루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키예프 루스는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기에 무역 쇠퇴는 국가 경제의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더욱이 키예프 루스는 체계적인 대공위 계승 시스템이 갖춰졌다기보다는 대공위 계승자들이 각 지방 도시를 다스리며 상황에 따라 서로 내전을 벌이는, 일종의 봉건적인 상태였기에 국력을 단결시키기 어려웠다. 대크킹시대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쇠퇴기에 접어든 키예프 루스를 중흥시켰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련되지 못했다. 경쟁자들에게 쫓겨난 대공은 다시 세력을 키워 키예프 대공으로 복위하기도 했는데, 뱌체슬라프 1세 때부터 쫓겨났다가 복위함이 관례처럼 되풀이되었다. 심지어 류리크 2세는 무려 5번이나 즉위했다. 이렇게 키예프 대공 자리가 불안정해지자 키예프가 각 공국을 통제할 수 있는 힘 또한 약해졌다. 키예프 루스는 므스티슬라프 1세대에 브세볼로드 1세의 자손들을 모두 동로마 제국으로 추방했지만, 결국 그를 마지막으로 이후 여러 공국들로 분열된 채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21] 등이 강국으로 성장했다.

하자르 칸국 페체네그족을 주무르던 키예프 루스였지만, 말기에 접어들면 유목민족인 쿠만, 즉 폴로베츠족과 볼가 불가르의 침략 앞에 괴로워하였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보리스테네스 강( 드네프르강) 일대 비옥한 흑토 평야는 전성기 시절에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평야 지대 특성상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을 넘나들던 유목제국의 기습과 침략에 매우 취약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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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분열되어 있었던 루스 공국들은 1223년 몽골 제국이 숙적인 쿠만을 침공하자 쿠만보다 더 위험한 상대라 파악하고 연합군을 구성했으나 칼가강 전투에서 불세출의 명장 우량카이 수부타이에게 대패한다. 이번 침공은 본격적인 공격이 아니라 호라즘 왕조 잔당을 처리하고 지나가다가 건드려본 정도였기 때문에 몽골군은 이기고도 그냥 돌아갔지만, 시간이 흘러 1237년에 몽골 제국의 바투 칸이 본격적으로 루스를 침공한다. 바투는 랴잔, 블라디미르, 수즈달 등 동쪽의 공국들을 하나하나 박살내며 키예프로 진격했다. 당시 키예프 대공이었던 미하일 2세는 헝가리에 있었는데 그 사이 갈리치아의 다닐에게 키예프가 점령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군사 지도자 드미트로의 지휘 아래 끝까지 항전했다. 결국 치열한 공성전 끝에 성벽은 무너지고 키예프 루스는 처참하게 멸망했다(1240년).[23] 키예프 공국의 난민들은 북쪽의 척박한 삼림 지대나, 반대편인 러시아 남부의 스텝으로[24] 대거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빛나는 문화도 쇠락하고 키예프 루스의 영토 대부분이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렸다.

몽골인들은 고향과 환경이 비슷한 우크라이나 초원지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직할통치했고, 삼림지대에 있는 모스크바, 노브고로드 등 루스 북부 쪽은 지구 반대편 한반도의 고려처럼 간접통치를 시행했다. 결국 몽골의 지배는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이 조금씩 힘을 길러 몽골을 쫓아낼 때까지 계속된다. 1326년에는 루스 세계 전체의 정교회를 관할하는 키예프 부주교좌도 전쟁과 몽골의 직접지배로 쇠퇴한 우크라이나를 떠나, 힘을 기르고 있던 모스크바로 옮겨갔다. 키예프 대공 직위는 명목상으로 킵차크 카간 밑 루스 공국을 대표하는 작위가 되었지만,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키예프를 점령하자 리투아니아 대공의 칭호 중 하나가 되었다가 소멸했다.

4. 역대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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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독립 시기

4.2. 몽골-타타르의 멍에 시기

4.3. 리투아니아 대공국 지배 시기

5.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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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로 지은 교회 건축물들이 그 아름다움과 특유의 건축 형태로 유명했으나, 수명이 짧은 목조 건물 특성상 키예프 공국의 건축물 중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없다. 다만 역사 기록과 그림을 바탕으로 키예프 공국 시대의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들을 복원한 야외 박물관이 우크라이나 키이우 르비우 등에 있으며, 이 외에도 러시아 황금의 고리 지역에 루스의 옛 흔적이 꽤 남아 있다.
류리크 왕조의 대부분 신민들은 슬라브인들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슬라브 정체성이 키예프 지역 너머로 퍼져나간 것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 그 중에서도 정교회를 수용하고, 교회 슬라브어를 예배, 설교, 지적 대화의 언어로 삼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독교는 키예프 영역의 슬라브 지역과 비슬라브 지역 모두에서 슬라브어와 슬라브 문화라는 치장을 하고 나타났다. 루스가 점점 더 기독교화될수록 루스는 더 슬라브화되었다.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세르히 플로히 저 / 허승철 역

사가 문학이 발전했으며, 《이고르 대공의 원정기》 같은 수준 높은 고전 서사시 작품도 쓰였다. 정교회 수도자들이 집필한 《원초 연대기》는 류리크 왕조의 기원부터 1110년까지를 다루었는데, 슬라브족의 초기 역사, 분파, 습속에 관한 여러 가지 구전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1146년부터 1154년 사이에 일어난 공후 이쟈슬라프 2세의 키예프 대공위 계승 투쟁을 비롯한 이야기를 담은 《키예프 연대기》도 있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의 문학사에서는 키예프 공국 시대의 문학 작품을 동슬라브족 문학의 시초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을 정도다.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후에도 13세기 후반 갈리치아-볼히니아에서 키예프 공국 시절 연대기에 영감을 받아 《볼히니아 연대기》를 편찬하였다. 《 열왕기》와 《 이사야서》의 영향을 받은 《볼히니아 연대기》는 교회와 관련된 일보다 세속적이고 군사적인 일들에 관해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흑해 및 카스피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 동로마 문화 및 중동의 선진 문화를 적극 흡수하면서 높은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식받은 동방 정교회 이콘의 전통 또한 동슬라브족 문화를 특징 짓는 키예프 공국의 유산이다. 다만 정교회 신앙이 일반 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키예프 공국 내에서는 정교회와 다른 종교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해 줄 교육받은 성직자의 수가 부족했기도 하였고, 문화적 저항 때문에 키예프 루스 주민 대다수는 정교회 슬라브 토속 신앙을 둘 다 믿는 이중신앙을 따랐다.[32]

6. 경제

노브고로드, 스몰렌스크, 체르니고프(체르니히우), 키예프(키이우), 류베치, 프스코프, 폴로츠크, 비텝스크 같은 키예프 대공국의 주요 도시들은 대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흑해를 잇는 수상 교통로에 건설되었다. 특히 흑해와 가까운 키예프와 스칸디나비아와 가까운 노브고로드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서유럽 출신 여행자들은 키예프 루스에 많은 도시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루스를 '도시의 나라'라고 칭했다. 상인들의 권리는 '스메르드'라고 불리는 자유민 농민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했는데, 상인을 살해할 경우에는 자유민 농민을 살해한 경우의 벌금보다 2배 이상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상인들의 권리가 높았던 이유는 이들이 키예프 루스의 전사 계급이기도 했으며, 대외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었다. 키예프 루스의 상인들은 동로마 제국, 중부 유럽, 스칸디나비아, 이슬람 칼리파조와 교역했다. 동로마 제국에는 밀랍, 꿀, 아마, 가죽, 대마, 귀금속, 무기, 갑옷을 주로 수출했으며 이슬람 칼리파조에는 주로 노예와 모피를 수출했다. 오늘날 스페인의 후우마이야 왕조의 노예 대부분은 키예프 공국에서 중부 유럽의 유대인 상인들을 통해 수출된 슬라브족 노예였다.

키예프 공국에서는 화폐를 거의 주조하지 않았는데, 이슬람 칼리파조와 동로마 제국에서 유입된 화폐가 많았던 데다가 자체적인 농업과 공업이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11세기 이후부터는 흐리우나라는 화폐 단위가 생기는데, 이것은 400그램짜리 은괴였다. 흐리우나를 절반으로 자른 것을 루블 흐리우나 또는 줄여서 루블이라고 했다. 은괴에는 중량 표기와 함께 공작의 인장을 새겼다.

7. 창작물



[1] 여러 공국으로 분권화된 군주제 국가긴 하지만 봉건제 국가가 아니다. 보리스 그레코프, 리바코프 등의 소련 초중기 역사학자들은 키예프 루스를 봉건제 국가로 파악했으나, 1974년 이고르 프로야노프가 키예프 루스는 봉건제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건 소련 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에서의 봉건제 기준을 적용해서 그런거고 현재는 러시아 학계에서도 봉건제나 아니냐 논하는게 의미없다고 굳어지는 중이다. [2]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이 동로마 제국을 통해 받아들인 정교회를 국교로 삼고 슬라브 신들을 표현한 신상들을 모두 강에 빠뜨리는 등 철거하면서 슬라브 신화는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정교회와 전통 신앙을 동시에 믿는 이중신앙 생활을 했다. 북유럽 신화는 주로 키예프 루스 초기 귀족들이 믿었던 종교다. [러] [우] [벨] [6] 루스 공국이란 뜻이 아니라 루스인들의 땅이란 뜻이다. 당시에는 '키예프'나 '공국'이란 말은 나라 이름으로 쓰이지 않았고 역사의 여러 루스 중 키예프를 정치적 중심지로 두고 있는 루스라고 해서 후대 사람들이 구분을 위해 붙인 이름이다. 예를 들면 촉한이나 통일신라의 원래 이름은 그냥 한나라, 신라였지만 후대 사람들이 구분을 위해 따로 용어를 만들어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7] 이 경우는 카를 마르크스가 원조다. [8] 혹은 키예프 공국 [9] 키예프 루스는 여러모로 동슬라브 3개 나라의 공동 역사라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인 고유의 독립국가로서는 이 나라가 최초라는 것이다. [10] 소련 붕괴 이후에 나타난 反노르드주의는 국가마다 조금씩 다르다. 러시아는 러시아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반노르드주의를 바라봐서 일부 21세기 러시아 학교 교과서에서 반노르드적 서술이 두드러진다. 한편,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는 러시아 제국주의의 역사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진 포스트 소비에트 국가 건설이 학계와 대중문화에서 반노르디즘적 관점을 훨씬 더 많이 촉진시켰다. [11] 류리크의 노르드인들이 실제로는 슬라브인이었다는 것은 아예 슬라브 가설(Славянская гипотеза)로서 반노르드 이론에 속하는 여러 주장 중 하나이며 발트인설, 핀인설도 있다. 류리크가 어느 민족이냐는 논쟁 이외에 류리크 도래 이전에 국가가 존재했는가?, 류리크 이전에 다른 노르드인의 유입은 없었는가? (류리크 이전에 다른 노르드인의 국가 혹은 유사국가 형성은 없었는가?), 노르드인 도래 이전에 원주민들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노르드인 이외에 다른 민족들의 유입과 혼합은 없었는가?, 있었다면 이들은 키예프 루스 형성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당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여겼는가? (혹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등등 사실상 반노르드 이론이라는 하나의 이론으로 엮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노르드 이론 vs 반노르드 이론이라는 구도로 이해함 자체가 잘못이다. [12] 튀르크인의 경우는 루스 카간국, 불가르 칸국, 하자르 칸국이 존재나 더 서쪽의 불가리아, 헝가리 초기 국가 형성에서 튀르크인의 역할을 볼 수 있듯 관련 민족들 중 가장 저평가를 받은 듯하다. 튀르크인 역시 슬라브인ㆍ루스인과 마찬가지로 키예프 루스의 한 민족이었으나, 오랜 대립으로 상호구분과 적대감이 커지면서 구분되었다는 것. 현대로선 키예프 루스 형성 과정에서 하자르 칸국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는 추세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편견과는 달리 의외로 타타르의 멍에 시기가 튀르크 유목민의 직접적 영향이 가장 적었던 때였다. [13] 류리크가 노르드인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쪽도 그와 별개로 노르드인들이 이전부터 동유럽에 정착, 정복하고 있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14] 정확히 말하면 슬라브인이라는 대단위는 없었고 오늘날 슬라브계라고 규정된 크고 작은 부족들을 의미한다. [15] 류리크가 죽었을 땐 이고리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친척인 올레그가 중간에 나라를 통치했고 올레그 사후 원래 계승 구도로 돌아온 셈이었다. [16] 유목 민족이었던 폴로베츠인들의 어머니들은 그의 이름으로 겁을 주곤 했다. 나폴레옹 사례와 비슷하다. [17] 정확히는 밑에 나오는 블라디미르 1세가 형 야로폴크와의 내전에서 루스인 용병들을 고용해 써먹었다가 내전이 끝나자, 할 일이 없어지고, 유지비도 많이 들게 되었다. 그때 마침 바실리오스 2세의 지원 요청이 들어오자 얼씨구나 하고 보낸 루스인 용병 6천 명이 시초였다. 그리고 병사들의 활약도 활약이지만 이들의 충성심을 높게 평가해서 고용하였다. 실제로 바랑인 친위대는 외지인이어서 기댈 사람이라곤 오직 황제밖에 없었기에 이전의 로마 제국 근위대와 달리 황제를 갈아치우는 짓을 하지 않아서 충성심을 입증하였다. 대신 황제가 폐위되면 바로 충성의 대상을 새 황제로 바꾸었다. [18] 오늘날 아스트라한 근처 [19] 오늘날 타타르스탄 카잔 근교 [20] 옐리자베타는 노르웨이 하르드라다 왕조의 국왕인 하랄 3세 하르드라다, 아나스타시야는 헝가리 아르파드 왕조의 국왕 언드라시 1세, 안나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국왕인  앙리 1세와 결혼했다. [21] 위 지도에서 이 공국 오른쪽에 있는 키예프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남아있다. [22] 그 키예프조차도 고대 시절, 대표적인 유목민이었던 스키타이족이 정착해 살던 곳이었다. [23] 참고로 이때 대공이였던 미하일 2세의 손녀도 죽었다고 한다. [24] 훗날 카자크 중 한 일파인 '돈 카자크'의 선조들 중 하나가 됐다고 전한다. [25] 키예프 대공은 아니지만 노브고로드 대공으로서 키예프 루스의 직접적 전신을 세웠다. [26] 노브고로드의 대공은 879년부터 [27] 1068년~1069년 이자슬라프에 대한 반란으로 실각해 스뱌토슬라프 2세와 브세볼로드 1세가 대신 통치. [28] 공동통치 [29] 1203년 ~ 1205년은 로만 2세와 공동통치, 1204년 ~ 1206년은 로스티슬라프 2세와 공동통치 [30] 1240년 몽골이 침공해올 때 미하일 2세는 지원군을 요청하러 헝가리로 가 키예프를 잠시 떠나 있었다. 그때 갈리치아의 다닐에게 키예프가 점령되었고, 다닐은 자신의 보이보드(상급귀족)에게 키예프를 방어하도록 명령했으나 키예프는 몽골군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다. [31] 키예프 공성전 이후 복귀. 1243년 퇴위 이후 체르니히우로 돌아가 체르니히우를 통치했으나 상급 대공으로 임명해준 몽골 대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고 자신을 모욕하자 분노한 대칸에 의해 1246년에 처형당한다. [32] 물론 당연히 천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토속신앙은 종교가 아닌 고전 민속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