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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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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태평양청어
太平洋靑魚 | Herring
학명 Clupea pallasii
Valenciennes in Cuvier and Valenciennes, 1847
분류
<colbgcolor=#fc6> 동물계 Animalia
척삭동물문 Chordata
조기어강 Actinopterygii
청어목 Clupeiformes
청어과 Clupeidae
청어속 Clupea
태평양청어 C. pallasii
멸종위기등급
파일:IUCN_DD.png
자원보호
금지체장 20cm
한국어 청어(靑魚), 비웃
영어 herring, shad[1]
중국어 鯡魚/鲱鱼 (fēiyú)
일본어 ニシン(니싱)
스페인어 arenque

1. 개요2. 생태3. 다른 한국어 명칭4. 청어와 인간
4.1. 수산업
4.1.1. 한국4.1.2. 일본
4.2. 관련 민요와 풍속4.3. 음식
5. 여담

[clearfix]

1. 개요

청어목 청어과 청어속의 바닷물고기. 동아시아에서 소비되는 청어는 이 태평양청어로 서구권에서 소비되는 청어는 대서양청어라는 다른 종이다.

2. 생태

성체는 길이가 20~38 cm, 외견이 정어리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지만, 몸 측면에 방사형 융기선이 없고, 꼬리에 정어리 특유의 비늘이 없으며, 옆구리에 검은 점이 없는 점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몸빛깔은 담흑색에 푸른색을 띠지만 배 쪽은 은백색이다. 대표적인 한해성 어류로, 3월 하순부터 수온이 4~5°C 가까이 올라가면 성숙한 성어는 깊은 바다에서 연안의 해조류가 무성하고 암초가 있는 얕은 연안이나 내만으로 떼를 지어 몰려오고, 그곳에서 12월부터 이듬해 4월 사이에 산란한다. 성숙하는 데는 4년 정도 걸리고 수명은 20년 정도이다. 먹이는 플랑크톤성 갑각류이다.

무리지어 생활하고 개체 수가 매우 많기 때문에 생태적으로는 상위 포식자들의 먹이로서 매우 중요한 종이다.

3. 다른 한국어 명칭


출처

4. 청어와 인간

서양에 대해서는 대서양청어 문서로.

4.1. 수산업

물 반 청어 반이다 싶은 어마어마한 개체 수 때문에 근대 이전까지 바다를 끼고 있는 곳에서는 중요한 먹거리였다. 한국의 과메기[2]와 청어알젓, 일본의 미카키니싱 등은 태평양청어를 이용한 대표적인 보존 식품이다.

일단 어업을 하면 엄청나게 잡혀서 예전부터 청어잡이를 할 때는 낚시보다는 그물을 사용했다. 워낙 대량으로 어획되는 탓에 기존의 시장 규모에서는 단시간에 소비가 불가능해서 냉동 유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3년 12월 기준 남해안에서 잡힌 청어(산란기라 곤이 이리가 있는)의 경매가는 20 kg 한 상자에 9천 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물론 소매가는 이보다 비싸지만 그래도 타 물고기보다 싸긴 하다. 참고로 고등어는 1 Kg당 1만 원가량이다. 청어는 꽤 저렴한 생선이라 주로 양식장 물고기들의 사료로 이용된다.

4.1.1. 한국

청어는 정월에 입포(入浦)하여 해안을 따라 회유하면서 산란하는데 무수한 청어가 떼를 지어 군래하면 바다를 뒤덮는다.
- 정약전, 《 자산어보》 中

동아시아에서 청어 어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한국으로, 고려 시대부터 그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청어 어획량이 급증한 것은 조선 시대, 그 중에서도 근세이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며 각 지역의 인구가 폭증하고 성리학 질서가 향촌 사회에 깊게 뿌리내림에 따라 수산물의 소비량 역시 덩달아 증가했다. 값싼 수산물을 통해 단백질을 보충하는 인구의 비율이 늘어나고, 제사 문화가 확산되며 제삿상에 필수적인 수산물을 구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이는 다시 전국을 잇는 상인 집단의 성장을 가속화했다. 전국의 수산물이 잡히는 대로 가공되어 수로를 통해 곳곳의 시장에 유통되었다. 심지어는 얼음을 채워 넣은 냉장선이 개발되어 생물을 유통하기도 했다. 가령 서울의 경우 경강상인들이 주도하여 각지의 수산물을 사들였고, 이를 다시 한양의 외어물전과 내어물전에 내다 팔았다.

때마침 소빙기의 영향으로 냉수괴가 황해까지 확장하자 한류성 어종이었던 청어 또한 서식지를 넓혀 중국 연안까지 진출했다. 당시 조선에서 청어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가장 인기 있는 등푸른 생선이 된다. 수많은 등푸른 생선을 제치고 청어(靑魚)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바로 그 증거. 즉 옛 조선인들에게 등푸른 생선의 표준은 어디까지나 청어였던 것이다.

당시 청어는 전국의 바다 연안 전역에서 매우 많이 잡혀[3] 비유어(肥儒魚: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4]로 불릴 정도로 값싸고 친숙하며 맛있는 생선이었다. 이때는 시기별로 각 지역에서 청어를 잡아 올릴 수 있었으며, 지금은 상상도 못하지만 황해도 해주산 청어도 한때 이름을 날렸다. 해당 지역은 현재는 오히려 난류성 어종인 조기 어장으로 변했다.

특히 당시 소빙기의 영향으로 기근이 자주 발생할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었는데, 오히려 청어는 어획량이 폭증하면서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고, 배고픈 일반 민중의 배를 채워준 고마운 식품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조선에서도 청어를 보존하기 위해서 다양한 가공 방법들을 개발했다. 대부분은 타국의 청어 가공품과 아주 비슷했다. 대표적인 것은 관목이라 불린 과메기로, 바닷바람에 청어를 말린 것이다. 현재는 꽁치로 만들지만 원조는 청어였다. 한편, 부엌 굴뚝에 걸어 훈연한 훈제 청어(연관목)도 있었다.

예로부터 청어죽은 보신재로 산후나 병후의 회복기에 좋은 식품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값도 싼 생선이라 어떤 선비는 "1냥에 청어 3뭇밖에 안 되는데 너무 비싸진 거 아니냐?"라고 하기도 했다. 참고로 1뭇은 10마리.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는 한술 더 떠서 "청어는 옛날에는 극히 흔하였는데 고려말에는 감산되어 쌀 한 되에 청어 40마리밖에 주지 않았다." 하고 한탄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은 병사들을 동원해 청어잡이로 수십만 마리를 잡아 군사와 피난민들의 식량으로 썼다고 한다. 한산도 둔전을 일구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곡식만 가지고는 그 많은 입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5] 잡은 청어들은 주로 그냥 먹기보다는 말려서 과메기로 먹었다. 청어는 내장에 지방이 많고 살이 쉽게 물러서 금방 상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말린 청어를 농민들과 물물교환하여 군량미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순신 본인도 구운 청어를 즐겨 먹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생선이라서 조선 수군의 체력과 사기유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여담이지만, 청어와 함께 조선수군에 기여한 또 다른 수산물은 미역.

조선에서도 청어의 포획과 소비, 가공업은 국제적이었던 유럽에 맞먹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팔도 곳곳에서 활황이었다. 소빙기와 기근, 그리고 인구 증가와 화폐경제의 발전에 맞물려 삼면의 바다에서 대량으로 잡히기 시작한 청어는 조선 후기 어업과 유통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조정의 수입 중에서도 청어 수산업에서 걷은 세금이 어느 정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지역에서는 주로 어살을 설치해 잡았고, # 많은 지역에서는 세망과 정치망[6] 등을 이용했다. 이 중 경상 북부 지역에서 쓰였던 세망은 청어망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청어 어업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한편 다산 정약용은 포항 유배 도중에 청어 어업에 적합한 그물을 만드는 법을 해당 지역의 어부들에게 알려 줌으로써 청어 어획량 증가에 기여했다. 원래 포항 어부들은 칡넝쿨로 만든 조악한 그물을[7] 사용했기에 청어를 많이 잡아도 그물이 터지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정약용은 명주나 면사로 그물을 짜는 방법과 그렇게 만든 그물을 소나무 껍질을 달인 물에 담가 강도를 강화시키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를 갈물 들인다고 하며, 이 방식으로 강화된 그물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8] 정약용의 그물은 일제강점기에도 절찬리에 쓰이다가 나일론 그물이 등장하는 1950년대에야 사라졌다. #

하지만 한국 근해의 청어들도 어획량 변화가 걷잡을 수 없이 큰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이후 청어의 이동이 시작되면서 청어 산업은 쇠퇴하고 만다. 소빙기가 끝나면서 우선 중국 연안의 청어들이 사라졌고, 한반도 서해안의 청어는 19세기부터 서서히 개체수가 감소하다 자취를 감췄다.[9] 19세기 말에 들어서는 청어 서식지가 아예 인구 희박 지역인데다 높은 산맥으로 타 지역과 고립되어 있는 동해안으로 국한되었다. 이 덕에 인구 밀집 지역인 서부 지역과 생산지가 괴리되면서 생산량도 덩달아 급감했고, 자연스럽게 청어 어업도 다른 어종에 밀려 사양세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고 고도로 발전했던 어업은 난류성 어종이라 서해안에서 원래 많이 잡히고 소비되는 조기, 그리고 삼면에서 잘 잡히는 고등어 어업이었다.[10] 한류성 어종인 명태 대구(어류), 청어는 교통 및 냉장 기술이 발전한 근대에 들어서야 소비량이 다시 폭증한다.

이 때문에 조선 청어 어장은 19세기부터 국제적인 각축장이 되기도 했다. 18 ~ 19세기경 중국 연안까지 잠시 확장했던 청어 집단이 다시 조선 서해안 연안으로 돌아가자, 이를 쫓아 청나라 어선들이 조선 연안까지 와서 조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황당선이라고 불렸던 선단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중국 어선의 불법 어로 행위 중 가장 이른 것이다. 특히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시점이 가장 악명높았다. 당시 조선 조정과 청나라 조정 간의 외교 문제로까지 번졌을 정도였다.

19세기부터는 일본의 청어 어업이 개항 및 산업화와 맞물려 더더욱 활황을 띰에 따라 일본 선단이 조선 어장에 침투했다. 당대 일본은 서구 국가들에 비누 및 각종 기계유의 원료인 청어 어유를 수출하였는데, 홋카이도까지 병합해서 그 근해 어군을 싹 잡아들인 결과 청어 개체수가 격감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 어선단은 점차 일본 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어업권을 야금야금 갉아먹었고, 경술국치 이후 조선이 식민지가 되자 거리낌 없이 조선 동해안의 풍부한 청어 어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편 서식지가 축소되었음에도, 19세기 말까지는 어획량이 엄청나 부산항에 배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청어가 몰려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60년대부터 차차 줄어들어 7~80년대에는 1/100수준이 되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원래 제철이어야 하는 연초 때의 어획량이 아예 0이었다는 기록도 있었으나, 90년대들어 차차 늘고 있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수십 년간 청어가 거의 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산어보에도 이런 청어의 주기적인 이동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55년 주기로 서해에서 청어가 잡히다가 동해에서 잡히다가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에서 청어가 씨가 마르면서 청어로 만드는 과메기는 거의 사라지고 꽁치 과메기밖에 남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청어 회유로가 40년이 지날 때마다 바뀐다는 설이 있으므로, 다시 연근해가 청어 떼로 넘칠 날이 올 것이라 예상했는데[11] 실제로 2010년대 이후로 국내에서 청어 어획량이 다시 늘어나고 청어 풍년인 해도 점점 늘어나는 중. 당연히 청어 과메기도 부활했다.[12] 대한민국에서 잡히는 청어는 주로 양식장의 사료로 이용된다. 청어를 직접 식용으로 판매하기보다 청어로 넙치 같은 양식어종을 길러서 판매하기가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수온이 바뀌면서 과거 씨가 말랐었던 것과 달리 청어가 많이 잡히기도 한다. 실제로 가자미를 잡으려고 출항했는데 목표로 노렸던 가자미는 안나오고 엉뚱하게도 청어를 잡히기도 했다. #[13]

2020년대 초 시점에서 한국의 청어 어업은 전 세계 생산량의 약 4.3%를 차지하여, 아시아에서는 독보적 1위이자 세계 5위이다.

주요 가공품은 다음과 같다.

* 과메기
청어를 막대기에 꿰어 겨울 바닷바람에 말린 건어물. 눈을 꿰었다 해서 관목(貫目)이라고도 한다. 이 한자어가 과메기라는 말의 원조인지, 아니면 단순히 과메기란 단어를 한자로 음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공식적으로는 관목의 방언이 과메기라는 것이다. 현대 들어 청어의 개체수 감소로 인해 대체재인 꽁치로 주로 만들었지만, 청어 어획량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원조 청어 과메기도 다시 늘어나고 있다. 내장을 제거하지 않은 채 말린 것은 요새는 통과메기라고 부르는데 이쪽이 사실 원조다. 현재 유통되는 과메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내장을 제거하고 반으로 가른 편과메기는 사실 1990년대 대량공급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신식 기법이다. 실학자 서유구의 저서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는 청어를 통째로 말리고, 일본에서는 반 갈라 말린다고 씌어 있다.

포항 수협의 설명에 따르면 전통적으로는 부엌의 살창에 통째로 걸어 겨울 바람에 말리는 냉훈법으로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부엌에서 나오는 연기가 자연적으로 청어를 훈연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별도로 연기 연(煙) 자를 앞에 붙여 연관목(烟貫目)이라고도 불렀다. 연관목은 현재는 거의 완전히 사라져서 기록에서나 볼 수 있다. 본래 과메기는 동해안 전역에서 소비하는 보존식품이었지만 포항시 영일만의 청어로 만든 과메기가 특히 유명하다.

4.1.2. 일본

일본의 청어 어업은 동북아 3국 중 가장 늦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 시기인 17세기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전국적 유통망을 갖춘 산업으로 성장했다.

당시 일본의 농업 생산량과 상품 작물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비료 제작 산업이 활황을 띄었다. 원래는 정어리를 가열하고 압착해 어유를 추출한 뒤 남은 깻묵으로 비료를 만들었는데, 때마침 정어리가 사라지고 소빙기의 영향으로 청어가 급증하면서 일본 북부 해안으로 넘어오자 원료가 정어리에서 청어로 변화했던 것이다. 에도 시대 어부들은 청어를 쫓아 북상하면서 마침내 당시는 아이누의 영역이던 홋카이도까지 도달했는데 이는 일본의 홋카이도 식민지화의 첫 단계였다.

홋카이도 남부에 위치한 마츠마에 번에서는 청어와 연어를 찾아 가신들에게 특혜를 주어 홋카이도 해안 곳곳을 개척하도록 했다. 이때 일본인들이 임노동자로 아이누 부족들을 헐값에 동원하며 아이누의 생활 양식을 파괴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반란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반란은 막부의 지원을 받은 마츠마에 측의 승리로 끝났고, 진압당한 아이누들은 저항의 동력을 잃고 일본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부 일본인들은 청어를 찾아 사할린까지 올라가다가 남하하던 러시아 제국과 만나기도 했다. 이는 양국의 최초 조우였다.

어쨌든 청어잡이 시즌이 되면 각지의 어부들이 마츠마에로 올라와 청어 저택이라 불리는 집단 숙소에서 묵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청어 떼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리는 즉시 배를 타고 나가 그물을 던져 포획했다.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주로 정치망을 썼다. 이렇게 잡힌 청어들은 인근의 집산지에서 크기별로 분류되어 가공된 후, 운송업자들의 전국적인 유통망을 거쳐 일본 각지에 납품되었다. 주로 기타마에부네라고 불리는, 동해 항로를 통해 오사카 홋카이도를 잇던 운송업자 조합이 청어를 운반했다.[14][15] 이들은 세토내해를 따라 조슈 번[16]의 시모노세키로 간 후 다시 쓰시마 난류를 타고 서일본 연안을 따라 홋카이도로 올라갔다가, 일을 마치고는 같은 길을 따라 오사카로 돌아왔다. 훨씬 짧은 동일본 항로를 이용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태평양 연안이 항해하기에 위험했기 때문이었다.[17] 물론 세토내해와 호쿠리쿠의 중간 기착지들에서 물건을 거래하고, 청어 염장에 필요한 소금을 구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 덕에 청어가 긴키 지역의 명물이 될 수 있었다. #

당시 일본의 주된 청어 가공 식품은 하술할 미가키니싱으로, 한국의 연관목, 또는 유럽의 훈제 청어와 비슷한 제품이다. 우선 청어의 내장을 제거한 뒤 바싹 훈연하여 만드는 훈제품으로, 주로 상등품이 청어가 가공되었다. 청어가 나지 않는 서일본, 그것도 내륙인 교토의 명물이라는 점에서 당대 일본의 청어 산업이 얼마나 고도로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하급품 청어는 우선 대량으로 쪄낸 후 압착하여 청어 어유를 분리한 뒤 등유로 팔고, 남은 깻묵은 상술한 대로 비료로 가공해 각지의 농장에 팔았다. 주로 세토내해 일대에 널리 퍼져 있던 목화 재배 농가에서[18] 청어깻묵을 구입하곤 했다.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편, 일본이 개항한 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기존의 어유 산업이 특히 발전하였다. 어유에 수소를 첨가해 경화유로 가공하면 윤활유 등의 각종 산업적 용도로 쓸 수 있었던데다 비누의 원료도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곧 일본 근해의 청어는 남획되었고, 식민지로 편입된 조선 동해안에도 수많은 어유 생산 공장이 들어섰다. 이때 가공된 청어와 정어리 어유는 일본 제국 해군 함대의 주요 동력원으로도 쓰였으며 한때는 일제가 바이오매스로 에너지 자급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그러나 1940년대부터 청어와 정어리가 일본 근해에서 사라지며 안그래도 중일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던 일본 제국의 연료 공급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고, 일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소나무에서 송근유를 채취하기에 이른다. 일본의 청어 어업은 1897년에 최고점을 찍곤 줄곧 감소세를 보여 1950년대부터는 거의 잡히지 않게 되었다. 쇼와 30년, 즉 1956년 봄부터 청어는 '환상의 물고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오늘날 일본의 청어 어업은 세계 10위권 밖이다. 에도 시대부터 이어진 남획과 청어 서식지 변동으로 인해 일본 근해 어군이 거의 사라졌고, 1945년에 한국이 광복을 맞으며 동해 어장 절반을 상실했다. 한편 북쪽으로는 소련이 남사할린 쿠릴 열도를 접수하곤 자국 EEZ에 대한 일본 어선의 접근을 봉쇄하는 바람에 오호츠크해 어장과의 연결도 끊어졌다.[19] 다만 청어 양식업에 있어서는 여전히 높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가즈노코라 불리는 염장청어알 요리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4.2. 관련 민요와 풍속

청청 청어 엮자,
위도 군산 청어 엮자.
한국 전라남도 서남부 도서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통 놀이인 '청어엮기놀이'는 강강술래의 일종으로, '고사리 꺾자'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원을 그리며 모여 '청어 엮자'를 자진모리중중장단으로 반복해 부르며 손을 엮은 후, '청어 풀자'라고 하며 서서히 다시 푸는 것을 반복한다. 민속학자들은 어로 작업을 무용화한, 풍어를 기원하는 생산굿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ヤーレ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にしん来たかと 鴎が騒ぐ
야렌 소란 소란 소란 소란 소란
청어가 왔는가, 갈매기가 우는구나
일본의 경우, 홋카이도의 어부들이 청어잡이 어선에서 조업 도중 잠을 쫓기 위해 부르던 민요인 ' 소란부시'가 유명하다. '소란, 소란' 하는 반복되는 후렴구가 특징이다. '요사코이소란 마츠리'라는 축제는 삿포로의 명물이다.

4.3. 음식

비늘이 얇지만 넓고 질긴 편이라 먹으면 소화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청어를 어획후 알만 빼서 버리는 지역에선 이걸 주워 먹은 바다표범들이 비늘 때문에 위장병에 걸려서 빼빼 말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도 한다. 요리를 할 경우, 얇은 비늘이라 방심하지 말고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5. 여담


[1] 청어 무리 [2] 본래 과메기는 청어와 꽁치 둘 다 사용하여 만드는 것이었다. 과메기 참조. [3] 기록에서 보면 청어 떼가 너무 많아 배가 나아가질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4] 청어의 순우리말인 비웃을 음차한 것(또는 비유어가 비웃이 된 것)이다. 절인 청어는 자반비웃아라 한다. [5] 또한 전쟁 중엔 에너지 소모가 많아서 동물성단백질 섭취가 필수였을 테니, 이를 그나마 구하기 쉬운 생선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순신의 인품이 훌륭함을 어느 정도나마 확인할 수가 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해산물을 포함한 지역 특산물의 경우 지방관이 중장에 뇌물로 바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이순신은 뇌물로 바치기는커녕 군사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데 썼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의 인격에 감탄하게 된다. [6] 설치식 그물. 고기떼의 예상 진행 방향에 입구를 두고 설치하여 알아서 들어가 갇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그물로 만든 어살 또는 거대한 통발이라 생각하면 된다. 형태에 따라 여러 세부 종류가 있다. [7] 갈망이라 한다. [8] 정확히 말하자면 갈물 들이기는 원래 서해안 지역에서 널리 퍼졌던 기술이다. 연평도를 비롯한 조기 어장에서 주로 사용했는데, 여기서는 참나무 해당화를 달인 물을 썼다. 나일론 그물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는 사라졌고, 대신 갈물을 끓이던 가마인 '갈가마'라는 단어만 섬 서쪽의 몇몇 숙박업소와 식당 이름에 남아있다. # 연평도의 향토 해양사 박물관인 조기역사관에서 당시의 모습을 디오라마로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 [9] 다만 서해 하층의 냉수괴에 청어 군집이 남아 있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10] 다만 한국 내 고등어의 주 생산지는 동해와 남해다. 서해로 올라오는 건 가을 한 철. [11] 맛의 달인에서는 청어- 고등어- 꽁치- 정어리 순으로 순환이 일어난다는 설을 제시했다. [12] 2000년대 초반에는 청어 씨가 말라서 청어 과메기를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허영만 작가의 만화 식객 6권에 수록된 구룡포 이야기에서 청어 과메기를 어렵게 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2010년대 중후반부터 청어 과메기가 부활했다. [13] 실제 어부가 취재진에게 청어보다 가자미가 일도 더 수월하고 돈도 더 짭짤하다고 청어가 잔뜩 잡힌 것을 아쉬워한다. [14] 이들은 청어 외에도 말린 연어, 말린 해삼, 그리고 우치우라만 일대에서 채취해 가공한 건 다시마 역시 긴키로 가져왔다. 연어는 일본 내에서 소비되었고, 건해삼과 건다시마는 더 남으로 내려가 사쓰마 번 류큐 왕국을 통해 중국에 팔렸다. 중국에서 진미로 치던 해삼과 약재로 쓰이던 다시마는 매우 쏠쏠한 이익을 남겼다. 사쓰마는 이 다시마 무역과 아마미 제도에서의 설탕 플랜테이션, 그리고 도자기 수출을 통해 근대화 자금을 모았다. [15] 반대로 기타마에부네가 오사카에서 마츠마에로 올라갈 때에는 마츠마에에서 나지 않는 각종 공산품과 쌀, 그리고 청어 가공에 필요한 소금을 싣고 올라갔다. [16] 오늘날의 야마구치현. [17] 특히 이와테현 일대의 산리쿠 해안이 그러했다. 산리쿠는 홋카이도에서 몰려오는 추운 고위도 저기압으로 인해 거칠기 짝이 없었으며 지진해일의 위협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주로 이와테에서 센다이로 이어지는 기타카미 강의 수운을 이용하고, 센다이에서부터 에도로 바닷길을 이용했다. 게다가 미개척지가 대부분이었던 산리쿠 해안 일대는 좋은 시장이 많지 않아, 상단 입장에서는 오래 전부터 개발된 서일본 항로를 항해하는 것이 안전하면서도 더 수익이 좋았다. [18] 원래 일본은 조선에서 면직물을 수입했으나, 에도 시대부터 자체적인 면직물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생사의 원료가 되는 목화와 염료로 쓰인 쪽의 재배 면적이 급격하게 늘어났으나, 이로 인해 지력 악화 문제가 대두되면서 비료 제작 산업 역시 덩달아 발전한 것. [19] 현재 일본 어선들은 한국 원양어선들이 그렇듯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받고 오호츠크에서 조업한다. 그러나 쿠릴 열도 분쟁 때문에 종종 잡음이 발생하고는 한다. [20] 머리만 남은 것에 입맛 다시는 것을 본 랍비가 머리 하나당 온전한 청어 한마리 값으로 팔았다는 내용도 있다. [21] 사실 청어의 청은 푸를 청(靑)이 맞지만, 홍어의 홍은 붉을 홍(紅)이 아니라 넓을 홍(洪)이다. [22] 일단 홍어여야 홍어의 반댓말인 청어가 될 수 있으므로 아무 우파에게나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전라도 출신 우파에게만 사용한다. [23] 위에 쓰여 있듯 청어는 바다의 밀과도 같은 존재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리고 부를 안겨준 물고기인데 진수식을 위해 바닷물을 들였더니 느닷없이 바다의 밀이 떠밀려 들어왔고 이를 활황의 징조라고 여긴 듯. 실제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어 중국으로 갈 만한 물량이 한국으로 쏠렸는데, 한국 조선업계의 큰 문제점이라면 낮디낮은 인건비로 인한 숙련공의 이탈과 신규 인력의 부재라는 것이다. [24] 바이오매스로 쓰려면 매우 많은 양이 잡혀야 타산이 맞는데, 그정도로 많진 않고 애매한 양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