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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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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실제 사례
3.1. 한국사3.2. 중국사3.3. 기타 지역
4. 매체에서5. 유사 개념6. 여담

1. 개요

순장()은 장례 방식 중의 하나로, 죽은 지도자가 사후에도 그 지위를 누리며 살기를 기원하며 다른 존재를[1] 같이 묻는 장례를 말한다.

2. 역사

순장은 전세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그중에서도 고대 동아시아권에서 많이 자행되었다. 방식은 주로 2가지로, 일단은 생매장이 있고 아니면 같이 묻을 존재를 먼저 살해한 다음 시신을 묻는 방식이 있었다. 이는 순장된 시체의 깨진 두개골 등 여러 상처를 통해 알 수 있다.

동아시아의 내세관이 짙게 드러난 장례방식으로, 사후에도 삶이 이어진다고 믿은 권력자에게 예속된 하민들이 함께 부장되는 경우가 제일 흔했다. 허나 무덤의 주인공이 왕 등 높은 사람이면 신하나 가족 등 생전의 지도자에게 호감을 샀던 지체 높은 남녀들도 순장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드물지만 좋은 군주가 죽었을 때 그 슬픔을 못이겨 자원해서 순장되는 경우도 있었다.[2] 고구려 동천왕이 대표적인 사례로, 죽은 뒤 중천왕이 그의 유언에 따라 순장을 금했으나 정작 장례일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이 일단 기록상으론 매우 많았다고 한다. 허나 '살인 순장'이 많은 여러 순장 케이스를 볼 때 이런 '자사 순장'은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점차 복잡한 사회가 되자, 권력 다툼에서 정적들을 합법적이면서 효율적으로 숙청하는 용도로도 자주 쓰였다. 주로 권력자가 죽기 전 마음에 안 들었던 부하를 하나 이상 지목하며 "내가 죽을 때 저 충성스런 부하 녀석도 같이 좀 묻어주면 좋겠구나!"라거나, 파벌 싸움에서 이긴 쪽이 진 쪽에게 "저승의 고인께서 자네들의 도움을 꼭 필요로 하시지 않겠나, 안 그런가?"라는 식으로 행해졌다.

물론 결초보은의 경우처럼 유언에 의해 순장을 안 하는 경우도 있지만, 죽은 자는 결정권이 없기에 순장 여부는 영향력 있는 후계자들의 의사가 반영되기가 쉬웠다. 결초보은 일화도 최종적으로 그걸 결정한 건 세상을 떠난 이의 아들로, 그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서모를 순장하지 않고 친정으로 돌려보내 개가시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까대는 등 가혹한 풍습이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재산상 손실도 늘어나자, 나중에는 사람 대신 용(俑)이라는 인형을 묻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이 용(俑)이 스케일이 큰 것이 병마용. 물론 규모가 줄었을 뿐 살인 순장 자체는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진다. 그러다 인형을 묻는 풍습도 시대가 흘러 유교가 동아시아 문화권 주류가 되면서 사라졌는데, 유학의 시조이자 당대의 생명경시 풍조를 전방위적으로 비판했던 공자가 순장 풍습을 극히 혐오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순장은 물론 사실상 인간이 인간을 산채로 묻는 행위를 흉내내기 위해 만든 용 또한 몹시 싫어해서 "이걸 만든 자는 후손이 끊어질 것"이라 발언하기까지 했을 정도. 거기에 더해 생명 존중과 자비를 내세운 불교가 전래된 것도 순장 악습 폐지에 도움이 되었다. 물론 후술하듯 그럼에도 몇몇 지역에서 꽤 장기간 순장은 부활과 금지를 반복하였다.

3. 실제 사례

청동기 시대부터 세계 각지에 이런 사례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철기 시대 부여,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특히 많이 행해졌다.

3.1. 한국사

한국사에도 순장 풍습이 있었다. 시기로는 삼국시대인 500년대 고대국가 시절까지로, 반대로 말하면 고대왕국 시기를 벗어난 시점에서 한반도에선 순장 풍습이 없어졌으며, 부장품조차도 줄여나가 동아시아 문화권에선 불행 중 다행으로 순장 악습을 빨리 끝낸 축에 속한다.

자세히 따져보면, 일단 고조선의 경우 의외라면 의외로 기록도 없고 관련 유적도 없다. 강상 유적이 고조선의 유적이며 순장묘라는 주장이 발굴 초기에 제시된 바 있었으나, 1980년대에 이미 반박을 받고 재반론이 나오지 않은 상태. 애초에 강상 유적 자체도 순장묘로 보긴 어려운 부분이 있고, 고조선과 관련성이 높다고 학계에서 주로 보는 유적은 이쪽보단 십이대영자 유적이다.

한국사에서 순장 풍습이 활발했던 나라는 부여, 가야, 신라였던 것으로 보이는데[3], 오죽하면 이들이 같은 문화권하에 묶여 있었던 것 아니냐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을 정도다.
특히 한국사에서 순장을 가장 활발히 했던 나라가 대가야였다. 옆 동네 신라 금관가야, 아라가야도 순장을 하긴 했지만 많아야 1~5명 같이 묻는 정도였는데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대형 고분마다 순장덧널이 수십 개씩 있어서 한국사에서도 독보적으로 순장을 많이 했던 것이 밝혀졌다.[4] 총 22명 18기의 유골이 출토된 44호분과 4명의 유골이 발견된 45호분이 유명하다. 순장곽의 숫자와 크기로 볼 때 44호분은 약 36명, 45호분은 약 12명 정도가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도굴꾼 때문에 사라진 순장곽도 추가로 있을 수 있으므로 순장자가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연령대는 성인부터 10세 이하 여아까지 다양하며 칼이나 둔기에 의한 사망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런 대가야의 대량 순장 풍습 덕분에 현대까지 가야는 도굴당하지 않고 잘 보존된 고분이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시신과 같이 묻었던 부장품을 노리는 도굴꾼들은 과거 왕이나 고위 귀족이었을 무덤 주인공의 덧널을 가장 먼저 노린다. 그리고 유물의 급이 좀 떨어지는 주변 순장 무덤은 건드리지 않은(혹은 발견 못 한) 경우가 많다. 현대에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대가야 쪽 유물은 순장덧널에서 나온 유물이 많다. 순장이 잔인한 풍습이긴 하지만 가야를 연구하는 데에는 도움을 크게 주고 있는 셈이다.

대가야 외에 김해 금관국의 왕릉급 고분군인 대성동 고분군의 경우 왕급 무덤은 시기에 따라 순장자가 1~5인, 최전성기인 5세기 초가 되면 왕급이 아닌 중형 무덤에도 2명의 순장자가 묻힌다. 다만 대가야와 다르게 원칙이 있었는지, 전성기에도 순장자가 6명을 넘기지 않는다. 함안 아라가야는 가야 다른 지역과 다르게 순장곽을 따로 만들지 않고 큰 석실 하나만 만든 뒤 무덤 주인의 발치에 2~6명을 순장하는 식이었다. 그 외에도 고고학 조사 결과 경주 황남동 98호 남분, 영덕 괴시리 고분, 의성 대리 고분,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11호분과 22호분 등 신라권과 가야권 여러 지역에서 금관가야와 비슷한 방식인 주부곽 소규모 순장이 확인됐다. 그러나 무덤 주인공과 완전히 독립된 순장곽이 여러 개인 다곽 순장묘는 다른 가야에선 없고 오직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만 나온다. 주부곽+순장곽으로 된 중간 형태도 고령 지산동 일부[5]와 고령 근처 지방인 합천 옥전 고분군, 함양 백천리 고분군 정도 범위에서만 조사되는데 전부 대가야의 영향권이다.

고구려는 실제 발굴조사로 순장의 흔적이 나온 적은 없었다. 다만 삼국사기 동천왕 22년(248)조에는 왕이 붕어하자 가까운 신하들이 스스로 순사하려고 하여, 사왕( 중천왕)이 이는 예가 아니라 하면서 금하게 했으나, 정작 장례일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가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경우에서처럼 사망한 사람을 따라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다 버려 순장되는 '자사순장'의 풍습은 부여에서 보이는 '살인순장'과 비교되는 또 다른 형태의 순장 풍습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때도 중천왕이 금지했음에도 자살한 사람들이 많았단 것에서 알 수 있듯 제도라고 보긴 어려운 부분이 있다.

백제도 고구려와 비슷하게 딱히 순장 풍습의 흔적이 보이진 않는다.

신라도 초기에는 순장을 했지만 6세기 초인 지증왕 3년(502)부터 공식적으로 이 제도를 금지한다. 이전 신라에서는 마립간이 사망하면 살아있는 남녀 각각 5명씩을 묻었다고 한다. 실제 신라왕릉을 보면 하대로 내려올수록 금관과 같은 화려한 위세품을 넣는 게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고인을 화장한 뼛가루를 담은 그릇과 작은 토우 정도만 무덤에 넣게 된다.

이후 순장을 마지막 시기까지 유지하던 가야가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의 정복(562)으로 멸망하면서 한국사에서 순장 제도는 영구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예를 들어 고령군의 지산동 고분군에는 대가야가 멸망하고 신라의 지방이 된 뒤의 무덤도 조사됐는데, 지금의 대가야박물관 부지에서 신라식 묘제인 횡구식 석실, 횡혈식 석실분이 34기가 조사됐는데 순장 흔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한 신라 법률이 구 가야 영토에서도 적용돼 순장이 한 번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2. 중국사

중국도 오랫동안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당장 상나라 시절의 순장은 유명하다.

그러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때부터 용(俑)이라는 제례용 인형으로 순장 피해자를 줄이려는 노력을 시도했는데[6], 반인륜적인 풍습이란 비판에 더해 인구도 적던 시대라 한두 명도 아닌 수백 명씩 묻어대면 당연히 묻는 사람의 손실도 클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춘추시대 사람인 공자는 이 인형인 용마저도 "이걸 발명한 사람은 대가 끊어지리라!"라고 비판을 넘어 저주를 퍼부었다. 당대에도 확실히 순장이 정신 나간 짓이라는 인식은 있었는지, 공자를 시작으로 지식인들이 전방위적으로 까대자 후대로 갈수록 금기시된다.

허나 춘추시대엔 여전히 남아있어 진목공의 경우 무려 177명을 순장으로 살해했다. 엄식, 중항, 겸호(셋 다 명신 자거씨의 아들이다) 등 유능한 신하들까지 대거 순장당해 이후 진나라 국력이 크게 쇠락할 정도. 자폭 그래서 진목공을 비판하는 의견이 많지만, 소동파 등 일각에서는 그 어질다고 소문났던 진목공이 순장을 그렇게 많이 했겠냐며, 진목공 본인의 뜻이 아니라 사후 진나라 풍습에 따른 것뿐이거나 신하들의 자발성이[7] 있었을 거라는 식으로 진목공을 옹호하기도 했다.

사자성어인 결초보은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신 위주(魏犨)[8]에게 총애하는 첩이 있었는데, 위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아들 위과(魏顆)에게 자기가 죽으면 첩을 재가(재혼)시키라고 했다. 그런데 병세가 더 위독해져 정신이 많이 흐려지자 말을 바꾸어 첩을 순장시키라고 한 뒤 죽고 만다.

이에 위과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맑은 정신으로 한 말씀이 진심일 거라 생각해서 서모를 재가시켜 주었다. 이후 위과는 진(秦)나라와의 전쟁에 나갔다 두회라는 맹장을 만나 본인과 군대가 위험에 처했다. 그때 갑자기 두회가 탄 말이 넘어졌고, 위과는 이때를 노려 두회를 사로잡은 후 처단해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날 밤 위과가 꿈을 꾸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자기는 그가 순장하지 않고 재가를 보낸 서모의 아버지로, 풀을 묶어서 두회의 말을 쓰러뜨림으로써 딸을 살려준 보은을 했다고 하였다고 했다.

전국시대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는지, 전국 7웅을 통일한 진시황의 장례식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스케일의 순장이 이뤄졌다. 진시황의 후궁들과 호해의 형제 자매들, 진시황릉을 축조한 장인 노예들까지 도굴 우려로 대거 순장 당했다고 알려져있다. 이는 주술적인 의미도 없는건 아니겠지만, 2대 황제가 된 호해가 잠재적으로 정적이 될 수 있는 형제들을 죽여 황권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작 4년도 못가 나라가 망한게 함정이지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은 진시황릉 병마용처럼 인형 용이 일반화되어 그나마 순장 피해자들이 이전보단 줄었다는 것이다.

가족을 순장하는 전통은 삼국시대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때 위왕 조조 무덤으로 '추정되었던' 무덤에서 20대와 40대로 추정되는 여자가 순장된 유골이 발견되었다. # 참고로 한국의 삼국지덕후들은 이 무덤이 조조의 무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긴 하다. 그 외 정사 오서에서는 진무 합비 공방전에서 전사하자 손권이 진무의 애첩을 강제로 자결시켜서 순장 조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에서도 산음공주의 장례에 그녀의 남총 30명이 순장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허나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쓸데없는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고, 순장이라면 학을 떼는 유교도 다시 정비되어 가면서 6세기 수나라 때에 와서는 순장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한반도에서 순장이 없어진 시기와 대략 비슷하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북방 정복 왕조들이 들어서면서 중국은 한동안 없어졌던 순장 문화가 부활한다. 거란족 여진족을 비롯한 정복 왕조의 주류 민족들은 순장 문화를 유지하고 있어서 중국 대륙에서 다시 순장이 벌어진 것.

일례로 요태조 야율아보기가 붕어하고 제위를 승계한 아들 요태종이 어려 선황의 아내 겸 금상의 모후로서 수렴청정한 술율평은 그 과정에서 수렴에 반대하던 신하들을 싸그리 순장시켜 버렸다. 한참 순장이 진행되던 중 조사온이라는 신하가 "그럼 부인인 당신은 왜 순장되지 않느냐"라고 반발하자 자신은 어린 아들이 있으니 대신 을 잘라 넣겠다며 자기 팔을 하나 잘라서 같이 묻었다. 조사온은 놀랍게도 살아남았고 939년 사망했다. 이걸 보면 당시 순장이란 풍습이 악습임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하던 실권자조차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인 유학자, 관료들의 강력한 비판이 지속되면서 , 양대 정복 왕조의 순장 문화는 점차 사라졌다가, 원나라 때에 다시 순장이 부활끝이 없다, 한인 왕조인 에까지 영향을 끼쳐 명대까지도 순장 문화가 살아남아 황제가 붕어하면 후궁이나 궁녀들을 순장했다. 명나라에서는 홍무제가 후궁과 궁녀를 순장시킨 이래 영락제는 물론이거니와 '인선의 치'라 일컬어진 명군 홍희제 선덕제 시절에도 숫자만 적을 뿐 순장 제도를 유지했다.[9]

당시 명을 상국으로 받들던 조선의 유학자들조차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순장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반도에선 이미 천여 년 전에 금지된 악습을 정작 유교 본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이 아직도 운용하고 있었으니.. 오랑캐가 한족도 오염시켰다. 일례로 세종 때 대신 허조 영락제 사후의 순장 소식을 듣고, 공자가 말했던 '용(俑) 처음 만든 놈은 자손이 끊기리라!'라는 구절을 언급한다. 맹자가 공자의 발언을 인용하며 주장했던 것을 다시 인용한 것. 원문은 맹자 양혜왕 장구 상(梁惠王 章句 上) 4편.
"허수아비라도 순장하면 후손이 끊어진다는 건 어린애도 아는데 중국의 풍습이라고 해도 본받을 게 못 됩니다."
(세종실록 1425년 10월 9일 기사).
라는 촌평을 남기며 허조는 순장을 비판했다.[10] 이러한 말이 씨가 됐는지 물론 영락제가 순장을 해서 일어난 일은 아니나 명나라 황실 직계는 훗날 청나라의 중원 입관 후에 일어난 명나라 주씨 학살로 단절되었으며[11], 후술할 내용처럼 마찬가지로 초기에 순장을 했던 청나라의 경우 비록 명나라 황실 직계만큼 비참한 황실 직계 단절이 일어난 건 아니지만 동치제가 자녀 없이 요절하면서 마찬가지로 황실 직계가 단절되었고 그 뒤를 이은 방계 출신 황제인 광서제 선통제도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결과적으로 청나라 황실의 계보도 정통성 측면에서는 사실상 단절된 셈이 되었다.

하여튼 명사에는 껄끄러운 역사인 관계로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영락제 당시의 순장 기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순장된 30명의 후궁, 비빈 중 두 명이 한씨, 강씨로 불린 조선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강혜장숙여비 한씨는 계보상으로는 성종의 어머니가 되는 인수대비 한씨의 고모가 되는 인물로 훗날 여동생까지 공녀로 보낸 것으로 유명한 한확의 누나였다. 기록을 근거로 했을 때, 명나라 순장은 생매장은 아니고, 먼저 목을 매달아 죽인 다음 같이 묻어주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황제가 죽은 뒤 당시 자금성 전각에서는 궁녀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이들은 한날 한시 같은 장소에서 목이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명나라 시절 정통제가 금지시킨 이후 중원에서 다시 한번 사라졌던 순장 제도는 이후 순장 문화를 유지하던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또다시 초창기 부활한다. 네버엔딩스토리 건국 군주인 천명제 누르하치의 사후 그의 대복진이던 오랍나랍 아파해( 효열무황후)와 첩 덕인제가 순장된 것. 천명제의 뒤를 이은 숭덕제가 자신의 최대 정적들이었던 이복동생 아제격, 도르곤, 다탁 삼형제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생모인 계모 대복진을 순장 제도를 명분으로 이용해 제거했다고 볼 수 있다. 헌데 정작 망자인 천명제는 아내를 순장하라는 유언을 남긴 적이 없으니 효열무황후 입장에선 피눈물 나긴 했을듯. 이후 3대 황제인 순치제 때도 순치제의 후궁이자 동악비의 사촌동생인 정비 동고씨가 순장된다.

청에서 순장이 금지된건 4대 황제인 강희제 시절이었다. 순장을 금지한 강희제는 청나라에서 두 번째로 장수한 황제이자 중국사 최장 재위기록을 세운 황제[12]였기 때문에, 당시의 혼인 연령을 고려하면 거의 3~4세대에 해당하는 62년 동안 금지령이 이어졌고 강희제 사후엔 새삼 다시 시작하기도 애매해졌는지 순장 풍습이 다시 성행하는 일은 없어졌다.

이와 별개로, 대만 동녕 왕국에서는 2대 국왕인 정경(鄭經)의 장남이었던 정극장이 이복동생인 정극상(鄭克塽)의 장인 풍석범(馮錫範)을 위시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고, 그의 아내였던 진(陳) 부인이 임신한 상태로 순장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는 풍석범의 계략이었는데, 진 부인이 정극장의 조력자로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진영화(陳永華)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해당 사건을 끝으로 중화권에서 순장 풍습은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3. 기타 지역

수메르인들의 도시였던 우르의 왕릉에서 남성 6구, 여성 68구에 달하는 순장자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자세로 깔끔하게 배열되어 묻혔고 사치품과 보석과 같은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었다. 무기와 휘장이 같이 묻힌 남자는 군인, 여자는 하인 신분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 자발적으로 독약을 먹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둔기로 살해되어 묻혔다는 설이 유력하다. 링크.

고대 이집트의 경우도 제1왕조 3대 왕인 제르(Djer)의 무덤에서 587구, 4대 왕인 제트(Djet)의 무덤에서 236구, 5대 왕인 (Den)의 무덤에서 230구에 달하는 순장자가 발견되는 등 순장 풍습이 남아있었으나, 마지막 왕인 카아 때는 26구로 서서히 줄어들더니 제2왕조 1대 왕 헤텝세켐위부터 ' 샤브티'라는 나무, 혹은 도자기 인형들로 교체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즉 꽤나 초기에 순장 풍습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매체(특히 서양)에서는 이집트인들이 순장을 행한 것으로 나오는 예가 많다. 당연히 인종차별이다.

스키타이족의 경우에도 상당히 잔인한 방법으로 순장을 행하였다. 왕이 죽으면 귀족 청년 수십 명과 그들 숫자에 맞춰 말까지 죽였는데, 말 잔등 위에 청년의 시신을 태우고 뾰족한 나무로 꿴 다음, 왕의 시신 주위에다가 돌아가면서 배치하면서 마치 죽은 왕을 호위하는 것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바이킹의 경우 족장이 사망했을 때 노예 중에 한 명을 자원받아서 함께 장례를 치렀다. 아랍 상인 이븐 파들란이 볼가강 유역에서 만난 바이킹들의 장례를 목격한 바에 따르면 죽은 족장의 재산을 3등분하여 유족에게 남길 유산, 장례를 치를 비용, 그리고 함께 죽을 노예 호강시키는 돈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자원하는 노예는 대개 여자 노예가 되는데, 10일 동안 모든 종류의 장식품으로 머리를 꾸미고 좋은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과 함께 마시고 쾌락에 탐닉한다. 죽음의 천사라고 부르는 늙은 여인이 수의를 만들고 모든 장례 물품을 준비하면서 이 노예를 안락사시킬 사람들을 선별한다. 안락사를 시킬 때는 독한 술로 의식을 흐리게 만든 후, 한 사람은 목을 조르고, 또 한 사람은 단검으로 갈비뼈 사이의 급소를 찌른다고. 이렇게 죽은 노예는 족장의 시신이 실린 배에 함께 태워 물에 띄워 보낸 후 화장시킨다.

일본 스이닌 덴노 시절 순장을 금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전해진다. 노미노스쿠네가 대신 하니와(土輪)라는 흙인형을 묻는 방법을 제안하여 덴노로부터 포상을 받았다는 전승도 이때의 일이다. 기록대로면 순장 제도가 고대부터 금지된 것이나[13], 고고학적으로 하니와의 등장은 노미노스쿠네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라고 한다. 실제 일본서기의 고대 덴노들 연대는 나이부터가 100살을 가뿐히 넘는 등 신뢰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기록상으론 스이닌 덴노의 후대 사람인 히미코 여왕 시절에도 버젓이 대규모 순장이 이뤄졌다는 기록이 있다. 연도 자체가 엉터리거나, 부족 국가 연맹체 수준이었을 확률이 높은 시절임을 감안하면 여기도 부족마다 풍습이 달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북아메리카 미시시피 문화권에서도 순장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매체에서

EBS 어린이 드라마 점프에도 이 내용이 나왔으며, 순장 제도가 사라지게 하는 데 주인공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부여 노비가 된 주인공이 도망을 치다가 산 속에서 호랑이에게 습격을 당한 태자를 만나게 되고 그 태자를 구해준다. 그리고 태자의 여동생인 공주가 주인공에게 시비를 털다가 말에 밟혀 죽게 되자 그 공주를 따르는 대상자로 주인공을 포함해서 노비 11명이 같이 순장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그 태자가 주인공이 자신의 생명의 은인임을 기억해 냈고 자신의 아버지인 부여 왕에게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고 충성심을 얻으려면 순장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이에 왕이 따른 것이다. 그리고 태자는 흙으로 빚은 인형을 순장자들의 대용으로 썼다.[14]

KBS 사극 대왕 세종에서는 장영실의 연인이자 영락제의 후궁으로 등장하는 '한다연'이라는 인물이 영락제가 죽은 후 순장당해 목을 메는 장면이 나온다. 장영실이 다연을 구하기 위해 시체를 바꿔치기 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MBC 사극 김수로에서는 순장이 한국사에서 가장 활발했던 가야가 배경인 드라마답게 노비들이 둔기로 살해당한 뒤 주인의 묘에 순장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사료가 많지 않기에 귀족이 죽자 그를 모시던 노비들을 죽여 묻는 것으로 설정해 재현했으며, 함께 죽는 노비의 수가 많을 수록 그 귀족의 권세도 높은 것으로 설정되었다.

가야 사람인 우륵의 일대기를 다룬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에서 가실왕의 순장 장면이 나오는데, 담담한 필체로 꼼꼼히 묘사되어 있다.

주윤발이 주연으로 나온 2010년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에서도 영화 초반부 순장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나라 실세인 계씨 가문이 선조의 뜻을 받들어 아랫사람들을 순장하려고 하자 이때 한 아이가 도망쳤는데, 아이는 공자 일행과 마주치게 되고 사연을 들은 공자가 노나라 조정에서 말빨로 순장을 금지시키고 아이를 살려준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소녀의 무덤에 소년이 산 채로 순장(생매장)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소년은 무덤에서 빠져나와 도망쳐서 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결국 머리를 삽으로 얻어맞아 기절하면서 결국 산 채로 생매장당한다. 이 내용은 소설 소나기에서 소녀가 자기가 입던 옷(소년과의 추억이 담긴)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는 내용을 패러디한 것.

중국 사극에서 순장이 형벌이나 정적 제거 또는 선왕 운운하면서 협박용으로 등장한다.

Why? 정치 편에서도[15] 주인공이 홍익인간 이념을 내새워 순장을 없애려는 모습이 나온다.

미국 드라마 V에서 리디아가 외계인 특사 찰스를 질투심에 멀어 독살하려다 독살범으로 우주 순장당할 뻔하다 필립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독약을 건네준 약사가 대신 순장으로 희생당한다.

만화 불새의 3부인 야마토 편 자체가 순장을 막으려는 주인공의 비극을 담고 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에선 뮤 엘리나스의 무덤에 500명의 이교도가 함께 순장당했고 이들의 원혼은 아일렛 로델라인에 의해 성불한다.

엘더스크롤 시리즈에 등장하는 드라우그들은 드래곤 전쟁에서 패배한 세력의 인간들이 무덤의 주인과 함께 매장당한후 언데드로 되살아난 괴물들이다.

Warhammer에서 툼 킹팩션의 경우 과거 네헤카라시절 왕이 죽을때 왕을 호위하는 정예부대 툼 가드들과 개인 경호원인 툼 헤럴드가 같이 순장되며 왕의 피라미드를 만드는 네크로텍트들은 피라미드가 완공되는 즉시 순장된다. 다만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왕과 함께 묻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네헤카라 멸망이후 언데드로 부활한 뒤 인간 시절보다 더 강력한 전투능력을 가지게 되어 블랙 오크, 카오스 워리어를 상대로도 어느정도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

5. 유사 개념

6. 여담

특정 인물이 죽으면서 같이 죽는다는 개념 때문에 특정 인물의 지지층을 비하하는 의미로도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 특정 인물이 죽거나 몰락할 때 평소 그를 추종하던 자들에게 너흰 순장 안 하고 뭐 하냐는 식으로 비꼬는 것. 정치권에서도 간혹 사용하는 말인데, 특히 이런저런 권력형 스캔들이나 초대형 사고로 지지율이 폭락한 정권의 임기 말에 입각하거나 여당 총수를 맡는 경우 순장조라 칭하기도 한다.

칼덕후 커뮤니티에서는 도검 소지 허가증을 발급받은 칼들을 순장템이라 부른다. 해당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도소증이 요구되는 도검은 개인간의 거래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기 때문에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을 때까지 소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1] 사람이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사람이나 인형 외 (아마도 애완용) 동물을 묻는 케이스도 있었다. 물론 가장 악질적인 케이스는 사람을 묻는 것이긴 하다. [2] 이런 경우는 순사라고 칭하기도 한다. [3] 당시 순장 대상은 무덤 주인을 저승에서도 따를 노비같은 하층민 위주였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몇몇 묘에서는 꽤 높은 신분으로 추정되는 순장자나 순장자용 묘가 발견되기도 하기에 학계에서도 갑론을박의 대상이다. [4] 다만 한반도 북부의 무덤 양식과 남부의 무덤 양식의 차이는 꽤 크며 북부의 무덤 양식이 도굴이 쉬웠음은 고려해야 한다. 북부는 굴식 돌방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어 도굴하기 쉬운 반면, 남부는 돌무지 덧널 무덤으로 이루어져있었고 무려 지증왕대에서도 이 무덤 양식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고구려의 세력권은 특히 여러 민족들이 오가던 만주였으므로 여러 국가들의 흥망성쇠 속에서 무덤이 훼손되는 건 있을법한 일이다. 허나 도굴도 보물 위주로 하지 시신을 전부 다 가져가는 경우는 드물 뿐더러, 후기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은 만주가 아니다. [5] 32호분, 34호분. [6] 봉건제다 보니 각 나라마다 순장 풍습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좀 복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7] 실제 대상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해 동반자살하는 케이스도 없는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케이스도 주변에선 말려야 될 판에 원하지도 않는 사람까지 죽여버리니 문제일 뿐. [8] 전국 7웅 위나라(魏)의 먼 시조. [9] 그러다 6대 황제인 정통제가 붕어하기 전에 순장을 금지하는 유조를 내려 명나라에서는 이후 순장이 실시되지 않는다. [10] 2000년대 KBS 사극 대왕 세종에서도 허조( 김하균 분)가 명나라 예부상서 여진 앞에서 대놓고 명나라의 순장 풍습을 디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11] 왕조교체기에는 전대 왕조를 학살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긴 한다. 물론 안 그런 케이스도 제법 있다. [12] 손자인 건륭제가 생전에 가경제에게 양위한 것도 자신은 감히 위대한 황제인 조부보다 더 오래 재위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실제론 태상황제로 죽을 때까지 몇년 더 막후 실세로 군림하긴 했다. [13] 헌데 정작 인신공양인 히토바시라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14] 창작 내용이긴 하지만, 실제로도 부여는 왕족 뿐 아니라 귀족들도 순장을 하는 나라였다. [15] 여긴 지구가 아닌 폴리랜드라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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