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000><colcolor=white> 역사 | 13개 식민지 ·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 · 보스턴 학살 사건 · 보스턴 차 사건 · 미국 독립 전쟁 · 미영전쟁 · 오리건 국경 분쟁 · 구축함과 기지 협정 · 대서양 헌장 |
외교 | 미영관계 · 미영불관계 · 미영일관계 · 미국-캐나다-영국 관계 · 상임이사국 · G7 · G20 · AUKUS · 파이브 아이즈,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 |
사회·문화 | 영어( 영문학) · 미드 아틀란틱 · 영국계 미국인 · WASP(미국) · 영미권 · 브리티시 인베이전 | }}}}}}}}} |
미국 독립 전쟁 American Revolutionary War[1] American War of Independence |
|
날짜 | |
1775년
4월 19일 ~
1783년
9월 3일 (종전으로부터 [dday(1783-09-03)]일) |
|
장소 | |
북아메리카 └영국령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 포함) 및 플로리다주 일대 중앙아메리카 └ 카리브해 연안 유럽 └ 발레아레스 제도, 지브롤터 및 지중해 연안 인도반도 인도양 및 대서양 |
|
교전국 | |
|
|
공동 교전국 | |
[[마이소르 왕국| ]][[틀:국기| ]][[틀:국기| ]][4] [[마라타 제국| ]][[틀:국기| ]][[틀:국기| ]][5] |
포르투갈 왕국[6] |
지휘관 | |
|
|
병력 | |
대륙군 및 민병대: 평균 40,000명[8] 프랑스군: 10,800명 스페인군: 12,000명 숫자 미상의 친미국파 인디언군 |
정규군: 48,000명 충성파 식민지군: 25,000명 독일 용병: 20,000명 친영 인디언군: 13,000명 |
피해 | |
|
|
결과 | |
미국 독립군-동맹국의 승리 파리 조약 체결(1783) |
|
영향 | |
미합중국 탄생 영국의 미시시피 강 이동 지역 상실 및 대영 제1제국 해체 이로쿼이 연맹 해산 및 노스웨스트 인디언 전쟁 발발 |
[clearfix]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또는 미국 독립 혁명, 미국 혁명은 1775년부터 1783년까지 8년간 벌어진 대영제국과 13개 식민지 사이의 전쟁이다. 전쟁의 결과 13개 식민지가 미국이라는 신생국으로 독립했다. 미국의 독립은 명예혁명,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근현대 민주주의 체제 성립의 뿌리가 된 사건 중 하나로 꼽히며, 세계 최초의 근대적 민주 국가를 설립하게 된 사건이다.2. 배경
근본적인 원인은 식민지와 본국 간의 갈등에 있다. 본래 영국과 북미 식민지의 사이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북미 식민지는 영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식민지 개척을 했던 19세기와는 양상이 달랐다. 인도 제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이민족에 대한 정치적 점령에서 비롯한 식민지라기보다는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처럼 자국민이 본토의 연장선 개념으로 개척한 자치령과 유사했다.물론 16세기의 로어노크 식민지 이주시도나 17세기의 제임스타운(Jamestown) 개척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성공한 식민 이주는 메이플라워호로 이주한 청교도들 이후였다. 본국은 북미 식민지에 총독을 임명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총독들은 본국 출신보다는 북미 식민지 태생의 이민 2세대나 3세대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각 식민지들은 영국과 영국의 국왕에게 충성한다는 조건하에서 자체적으로 의회와 주 정부를 구성하여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으며 영국도 이러한 방식으로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이 편했다.
그러나 영국의 중상주의 정책을 보조하기 위해 제정된 항해법이 점차 확대되는 식민지였던 미국의 경제에 족쇄로 작용하자, 미국의 식자층과 상인층을 바탕으로 반영감정과 혁명의 씨앗이 파종되었고, 1761년에는 이러한 경제권 제약에 대한 소송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물론 아직까지 이러한 움직임은 대중의 이해나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이렇게 파종된 씨앗은 이후 큰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3. 혁명의 시작
'프랑스-인디언 전쟁'(프랜치-인디언 전쟁, French and Indian War)[10]이 일어나자 북미 식민지와 영국 본국은 프랑스에 맞서 일치단결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양측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7년 전쟁에 포함되는 전역 중의 하나였고, 비록 영국이 승리했을지언정 7년 내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느라 재정이 버거운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이 전쟁에만 든 전비가 무려 650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면 수백억에서 수천억 파운드까지 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비용이다.[11]이러한 전쟁이 또 반복되었다가는 영국의 재정상황이 버티지 못하기에, 맨 먼저 1763년 미국 식민지인들이 원주민을 건드려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의 확장을 금지시키는 포고문이 발표되자, 미개척지를 개척하면 부와 땅을 얻을수 있던 식민지 대중들에게 반영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또한, 재정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영국의회는 1764년 설탕조례(Sugar Act)를 제정했고 이듬해인 1765년에는 인지조례(Stamp Act)까지 통과시켰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지조례였는데 식민지에 유통되는 모든 인쇄된 종이에 3페니의 인지를 붙여야 한다라는 게 법안의 핵심이었다.[12]
반면 그건 본국 사정일 뿐이기에 정작 식민지인들은 지난 전쟁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공헌했는데 돌아오는 보답이 이주제한과 증세된 세금이냐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물론, 본국 입장에서야 "식민지 거주민"이기 때문에 병역도 지지 않고 세금도 거의 안 내는 이들이 하지 말란 짓을 벌여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게 어처구니가 없었겠지만, 문제는 식민지에 정상적으로 그들을 대변하는 지역 정부로 인식되는 기구가 실상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식민지인들은 스스로 비용을 대서 개척한 자기 "사유재산"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건드리는 것에 좋은 반응을 단 하나도 보일 리가 없었다.
게다가 통찰력 좋은 지식인이 아니고서는 돈 빨리는 걸 눈치채기 어려운 간접세와 달리 인지조례로 부가된 인지세는 직접세였다. 직접세가 간접세보다 조세 저항이 크다는 건 너무나 간단한 이치이다. 본국의 인식 그대로 "촌놈"인 인구층도 돈 빨리는 걸 모를 수가 없었으니 간접세 방식으로 세금을 거둬들였던 영국치고는 참으로 멍청한 조세 정책이었다.
게다가 당대 신대륙 개척민들이 아무리 서유럽인들보다 압도적으로 부유했어도, 당시 13주는 지역별 인프라 차이가 극심했고 정상적으로 화폐가 유통되지 않는 장소들이 수두룩해 물물 교환이 남아있는 곳들이 굉장히 많았다. 13주의 자영농 생활 수준은 유럽 자영농을 아득히 압도했지만 그게 그들의 재산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엄연히 아직 완전히 안정되지는 못한 식민지인지라, 생산수단은 빠방한데 정작 자본이 없는 기이한 농업 인구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당시 신대륙 13주의 주민들이 자영농으로서 농업을 통해 얻는 기본적인 의식주가 풍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이를 가시적인 화폐로 환금할 수 있는 인프라는 형편없는 곳이었다. 화폐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단순히 생산력이 높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생산된 상품을 곳곳으로 운반할 수 있는 교통망과 운송업, 그리고 이 물품을 화폐로 계산하고 그 화폐가 신용에 기반해서 각지에서 똑같은 가치로 융통할 수 있도록 하는 금융업과 같은 인프라가 필요한데, 당시 13주의 이 인프라 상태는 매우 처참한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자기 사는 지역 내에서야 유럽 본토 서민들은 꿈도 못 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만 언제까지나 지역 시장에서 적당히 거래해서 쓰는 수준에 그쳤고, 그 엄청난 부는 13주 전체에 자유롭게 유통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육상 운송 비용이 끔찍하게 높았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육로로 30마일 운송하는 비용과 영국에서 미국까지 3000마일을 해상 운송하는 비용이 비슷했다. 설령 작정하면 화폐를 잔뜩 쌓을 만한 부농이라 하더라도, 기존에는 지역 시장에서 적당히 물물교환으로 거래하던 것을 화폐로 세금 내느라 화폐로 거래 가능한 시장까지 찾아가는 개고생을 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시간의 소모는 당연히 부가 비용을 또 발생하게 만든다. 이러니, 세율과 무관하게 시간이 소모된다는 것 하나로 엄청난 분노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시장 접근성 문제는 미국 독립 이후에도 이어진 문제일 정도로 심각했다. 미국 정부가 위스키에 세금을 부과하자 펜실베이니아 농부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여기에는 세금 마구 때리는 영국 싫어서 독립했더니 또 세금을 내라하네 하는 원초적인 반발심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농부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잉여 곡물을 변환해 생산한 위스키조차도 '물물교환'에 사용되는 유사 화폐였지, 돈을 받고 파는 상업 물품이 아니었는데 '돈'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니 환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위스키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그 현실을 미국 정부도 이해했는지, 주동자 중 겨우 2명만 교수형 판결을 받았고 그조차도 곧 사면되었으며, 위스키에 대한 세금은 유명무실해졌다. 이것만 보더라도 영국이 무차별적으로 세금을 거두려고 한 게 얼마나 무책임한 접근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무책임한 것 이전에 무식하기 그지 없는 비문명적인 행동이었다.
차라리 '거기 빌 씨는 위스키를 만드니까 위스키 몇 배럴 내시오', '거기 제임스 씨는 옥수수를 키우니 옥수수 몇 파운드 내시오'란 식으로 했으면 오히려 문제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식민지에 넘치는 게 상품이었으니까. 시장 접근성이 엉망인 상태에서도 배불리 먹고 살 정도로 상품은 넘첬다. 물론, 이러면 그 상품을 운송해서 영국 본토의 시장에 떠넘기는 골칫거리가 생기지만, 전쟁 비용을 부과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이었다.
비슷한 반발 사례로, 청나라에서 농부들에게 곡물로 받던 세금을 은(Silver)으로 내는 개혁을 했는데, 농부는 그냥 쌀 내던 것에서 쌀을 팔아서->은을 사서->세금을 내는 수고가 더해졌다. 당연하지만 쌀을 사고 은을 팔아줄 상인은 (거래 못하면 감옥가는) 농민을 압박해 값을 후려치며 농민 수입은 급감해 국가 전반에 혼란이 발생했다.
그렇다고 여기에 유럽 본토의 귀족들 같이 간단히 조세 업무를 대행할 대지주 세력이 정립이 되어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징세를 할 방법이 없는데 징세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 앞서 제정된 서부로의 확장 금지 포고로 인해 돈을 더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까지 막혀버렸으니, 두 가지의 시너지는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반대로 영국은 식민지인들이 전쟁에서 거의 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공을 영국군에게 돌렸다. 때문에 인지세는 "한 게 없으면 세금이나 내라"는 의도였다.[13] 식민지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식민지 자치 및 식민지인의 권리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세금 자체보다도 더 큰 문제는 식민지인들이 느끼는 차별 대우였다.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독립을 지지하기는커녕 생각조차 안해본 사람이 대부분이고 아메리카에 살지만 스스로를 영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전부였다. 인지조례가 제정된 1765년은 식민지인들 사이에 독립 의식이 널리 퍼지게 된 계기인 토마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 출판되기도 10년 전의 일이다.
인지세 자체는 이미 영국 본토에서 1712년부터 아무 문제없이 시행되고 있었다. 인지조례는 식민지인들만 차별해서 과세하는 법률이 아니라 식민지인도 영국 본토인과 동등하게 세금을 내라는 법이다. 하지만 식민지인들의 주장은 우리도 전쟁에 협력할 거 다 했고, 인지조례로 본토인들과 세금도 똑같이 내야하는데 왜 아메리카만 영국 의회에 대표를 못 보내냐. 이것은 부당한 차별이다.는 것이었고, 이것이 식민지인들이 느끼는 불만이었다. 1689년 승인된 영국의 권리장전은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의 대표없이 통과된 법으로 세금을 거두는 건 권리장전에 의해 불법이고 합법적인 영국인으로서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으므로 세금을 거두려면 아메리카 대표를 받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말이,
인지조례가 제정되자 뉴욕, 보스턴, 버지니아주 등 식민지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매사추세츠 의회는 아메리카 식민지 각 주에 편지를 보내 인지조례에 항의하는 대표단을 함께 만들자고 제안을 했다. 이에 식민지 주들이 동의하여 인지세 회의(Stamp Act Congress)가 결성되었고, 여기서 14개 조항의 권리선언문을 작성하고 청원문을 영국 의회에 보냈다. 그런데 이 권리선언문에서 무려 6개 조항이 영국 국왕과 영국 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있듯이, 이 때까지만 해도 식민지인들은 영국 의회가 아메리카 대표를 받아준다면 반발이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세금을 낼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 청원문은 영국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 오히려 영국에서는 인지조례를 폐지해 세금을 덜 받는 한이 있어도 아메리카 대표는 절대로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14]
영국의 이런 행동은 굉장히 어리석은 것이었는데, 따지고 보면 당시에 완장을 차고 나선 식민지 지식인들이 대표를 허락하라고 주장한 것은 본국과 13주 간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혜안이기도 했다. 애초에 식민지인들은 본국이 X랄하니까 뭉처있는 것일 뿐, 13주 전체를 묶어 대표할 수 있는 주체에 대한 총의는 전무했다. 그 결과 영국은 강압책을 쓰려고 해도 대체 누구를 탄압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즉 분노만 유발하고 억압 효과는 하나도 없는 어처구니 없는 억압책이었다.
행정적으로 보면 참정 못하니까 = 병역도 없으니까 식민지이니 딱히 이상할 건 없지만, 문제는 영국이 13주에 방위 의무를 세금으로써 부가한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명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물론, 영국은 괜히 식민지를 제대로된 "주"로써 승격해서 참정을 허락하면 유지비용을 더 많이 대줘야하니 그럴 생각이 없는 게 당연했지만, 대신 세금을 제대로 부과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영국이 차라리 아예 과감하게 형식적으로라도 의석 하나를 내줬으면 오히려 식민지에서 더 많은 부를 뜯어먹을 기회가 생길 상황이었는데, 눈 앞의 자존심에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찬 것이다. 대표를 선정하고 의석을 보장한 것을 명분 삼아 식민지에 병역을 부가하거나 세금을 더 물리거나 해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므로 영국 본토의 책임은 없게 되니, 설령 이러고도 불만이 폭주한다 가정한들, 실제 역사처럼 대륙군이 구성되어 반란을 일으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대표와 세금 문제로 연일 격렬한 항의와 시위가 벌어졌고, 북미 식민지의 거상들은 자신들과 거래하는 영국 상인들에게 인지세를 폐지하지 않으면 교역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북미와의 교역으로 이득을 많이 보고 있던 영국 상인들도 의회에 인지조례를 폐지해달라고 사정했고, 결국 인지조례는 곧 철폐됐지만 서부개척이 막힌 이상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은 영국 의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식민지인들의 조직적 반발로 의회의 결정이 되돌려지자 영국 의회에서는 "식민지 주민 주제에 이놈들 봐라?"라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이러자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물리는 법안을 잇달아 만들기 시작했다. 1770년에 이런 경향이 매우 강했는데 이를 "타운센드 법안"이라 한다. 타운센드 법안이 통과되자 식민지에서는 다시금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다시 법안은 폐기되었지만, 기묘하게도 홍차에 붙인 세금만은 폐지되지 않았다.
식민지 의회 대표를 보내는 방안이 아니더라도 식민지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예를 들어 의회에 일종의 로비 채널인 북미 식민지 대표단 같은 옵저버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외무장관을 임명할 때 북미 식민지 여론을 고려하거나 혹은 아예 북미 식민지 장관을 신설하고 명망있는 북미 식민지인을 초빙해 임명하여 북미 식민지의 이해관계를 정부 내각에 반영할 수 있는 채널만 만들어줬어도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영국은 대드는 식민지인들이 괘씸해 보인 나머지 거꾸로 '괘씸죄'를 적용하기 시작했고, 외무장관과 주요 내각에 북미 식민지에 강경한 입장인 인물들을 임명했다. 당연히 시간이 갈 수록 영국과 북미 식민지 간의 갈등이 커져서 버티기 힘든 수준에 이르게 된다.[15]
물론 이런 갈등을 사람들이 넋 놓고 바라보지는 않았다. 좋든 싫든 북미 식민지를 유지하는 게 영국으로서도 이득이었다. 당시 북미 식민지의 GDP는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 본토 GDP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를 자랑했다. 이러한 13개 식민지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유지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영국 수상을 지낸 바 있던 소(小) 윌리엄 피트는 영국에 체류중이던 식민지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과 접촉하면서 어떻게든 타협점을 모색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당시 수상이던 프레데릭 노스는 조지 3세의 동의를 얻어 식민지에 강경책을 펴려 했다.
거기다 계속 서부로 진출하려는 식민지인들과 이로 인해 벌어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충돌로 인한 비용 지출을 막기 위해 영국이 이를 저지함에 따라 갈등이 격화되는 와중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 1770.3.5.)으로 인해 이때까지만 해도 소수 세력이던 독립파들에게 "영국군이 식민지인을 죽였으니 더이상 횡포에 참지 말고 독립하자!" 라는 훌륭한 대의명분을 주고 말았다. 이것을 계기로 독립파는 소수세력에서 주세력급으로 목소리를 키웠고[16] 결국 반영감정이 심화된 가운데 독립파들이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1773.12.16.)을 일으키게 된다. 이 사건으로 제대로 열받은 영국은 결국 군대를 파병했고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폐지 및 영국 정부의 직할 통치 선언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는 1774년부터 두 번에 걸친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대륙회의는 사실 처음엔 어떻게든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자는 입장으로 모인 자리였지만, 영국의 입장은 "진압하겠다."며 매우 단호했고 독립파와 왕당파 사이에서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미국은 전혀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거친 자연환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은 대부분 영국군이 막아줬기에 식민지인들은 군대를 제대로 키울 여력도 되지 않았던 데다가 식민지인들 중 "굳이 전쟁을 해가면서 왜 독립을 해야함?" 부정적인 민중도 있었고 전쟁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거기다 전쟁 상대는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대영제국이었다. 물론 19세기의 막강한 위세가 18세기에도 그러했던 것은 아니고 다른 유럽 열강의 막대한 견제를 받았으나, 이미 세계에서 전쟁을 치르던 영국군과 식민지인들의 경력 차이는 비길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영국 본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각지에서 지키기 위한 민병대가 조직되기는 했으나 민병대는 본질적으로 내 고향만 지킨다라는 생각이 강했다. 게다가 이들을 규합해서 이끌만한 세력 주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인지조례의 경우 단 한 푼도 걷어들이지 못했으며, 악명 높던 타운센드 법도 3년 동안 고작 265파운드 정도밖에 걷지 못했다. 거기에다 보스턴 차 사건은 항목에서도 나와 있듯 홍차조례로 낮아진 가격에 불만을 품은 밀수업자들의 불법 행위였으며, 보스턴 학살 사건도 당시 분위기상 그들이 심리적으로 몰려있어 벌어진 우발적 사태로 인식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눈뭉치를 영국군에게 던졌다고 한다. 게다가 이 영국군[17]은 그날 밤 자신들의 몇 배나 되는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조롱과 협박을 당했으며,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당시 변호사)는 법원에서 살인 혐의로 기소된 영국 병사들을 기꺼이 변호했다. 기소자 중 두 명을 제외한 기소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두 명도 엄지손가락에 낙인이 찍히는 (당시 기준으로) 가벼운 형벌로 끝났다.
이때만 해도 미국인들은 사실 독립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었는데, 이는 토머스 페인이 미국 독립의 이득과 정당성을 주장한 그 유명한 소책자 <상식>을 내기 전까지 대중적인 분위기로 받아들여졌고, 워싱턴조차 반역은 입에도 내지 않았다. 그 유명한 "이것이 반역이라면 최대한 활용하자(패트릭 헨리)" 같은 발언은 지극히 후대에 와서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 물론 시민권 향상과 아메리카- 유럽 대륙의 분리 등 역사적 흐름을 봤을 때 이때가 아니더라도 언젠간 터질 일이긴 했다. 원래 수많은 역사는 내면에 감춰져있던 사회, 사상적 흐름들이 우연이 겹쳐지면서 터지는 것이기도 하다.
4. 전개(1775~1783)
|
미국 독립 전쟁의 전개를 요약한 영상. |
|
미국 독립 전쟁의 전개도. |
4.1. 독립 전쟁의 시작, 계란으로 바위치기
4.1.1. 1775년, 렉싱턴-콩코드 전투
독립전쟁의 시작은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 주에서 시작되었다. 보스턴 사람들은 영국의 매사추세츠 주 자치령 폐기에 격분했고 영국군에게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각지에서 민병대가 우후죽순으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은 토마스 게이지가 이끄는 4개 연대가 보스턴 시내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보스턴 밖까지 통솔권이 미치지는 못했다.보스턴의 영국 주둔군 지휘관인 토머스 게이지 장군(General Thomas Gage)은 병력이 너무 적어 증원 부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영국 군대가 보이기도 전에 식민지인은 재빨리 도망쳐버릴 것이라는 신중하지 못한 관리들의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는 민병대가 보스턴에서 18마일 떨어진 콩코드(Concord)에 많은 양의 탄약을 저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행동하기로 결정했으며, 1775년 4월 18일 밤 1,000명 규모의 병력을 렉싱턴으로 파견했다. 파견해 콩코드에 있는 민병대의 무기창고를 제압하고 민병대를 무장 해제시키도록 지시했다. 독립파에 속했던 폴 리비어는 영국군의 움직임을 알고서는 말을 타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든 채로 렉싱턴으로 가서 영국군이 쳐들어온다고 알려주었다.[18] 이에 렉싱턴의 민병대 77명이 소집되어 영국군을 기다렸다.
4월 19일 아침, 영국군이 렉싱턴의 초지에 이르러 민병대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실상 이 렉싱턴에서의 교전이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렉싱턴-콩코드 전투). 영국군은 렉싱턴을 지나 콩코드 근처 노스브릿지에서 민병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민병대에게 밀려 보스턴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하는 영국군을 각지에서 몰려들어온 민병대들이 공격했고 영국군은 궤멸직전에 보스턴 시내에서 지원군을 보내 겨우 보스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민병대들은 이제 보스턴 시내를 탈환하려는 구상을 하기에 이르렀다(보스턴 포위전). 대륙의회도 결국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을 규합하게 했다. 영국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윌리엄 하우가 이끄는 4500명의 원군을 파병했다.
4.1.2. 1775년, 보스턴 공방전
1775년 7월, 조지 워싱턴이 보스턴에 도착했다.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은 애국심과 총만 있던 오합지졸들이었고 워싱턴은 이런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최강 전력인 영국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19]비록 우발적으로 동원된 민병대의 특성상 무기, 탄약, 식량 등의 보급 문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포의 부족, 여기에 치열한 시가전에서 발생할 여러 불확실성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보스턴 진격을 포기했지만, 민병대가 규율이나 전투 경험이 부족하긴 해도 애국심으로 강화된 수적우세가 영국군의 숙련과 규율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증명했기 때문에 영국군 역시 보스턴에서 치고 나올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결국 지루한 장기 대치 끝에, 영국군에 대한 도발로 일어난 벙커힐 전투[20] 후 영국은 보스턴 포기를 저울질하기 시작했고, 학수 고대하던 대포를 확보한 대륙군이 다시 한 번 도체스터 고지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도발하자 영국은 마침내 보스턴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양측 사령관의 암묵적인 신사 협정[21]에 따라 영국군이 함대를 이용해 해상으로 철수한 후 대륙군이 진입하여 보스턴을 해방시켰다.
4.1.3. 1776년, 독립선언과 열흘의 기적
대륙회의가 대륙군을 조직해 영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으니 정식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해야한다는 얘기가 회의 내에서도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불을 붙인 것이 1776년 1월 토머스 페인이 발표한 상식이라는 책이었다.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한 상식은 베스트셀러가 되며 13개 식민지에서 독립 여론을 불붙였고 이에 대륙회의는 격렬한 논의 끝에 1776년 7월 2일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7월 4일 발표하면서 마침내 13개 식민지는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그러나 대륙회의가 야심차게 독립을 선언한 것과 달리 1775년 말 대륙의회가 주관한 캐나다 원정이 처참한 실패로 끝난( 퀘벡 전투) 후, 대륙군은 대대적으로 전력을 보강한 영국군의 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1776년 8월 27일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한 조지 워싱턴은 뉴욕을 영국군에게 내주고 간신히 후퇴했다. 이 후퇴도 비바람과 안개라는 날씨의 행운이 겹쳐서 정말 간신히 해냈다.
9월 16일 할렘 하인츠 전투에서 적의 추격을 격퇴했지만 10월 28일 화이트 플래인스 전투, 11월 17일 워싱턴 요새 공방전 등 연이은 전투에서 연전연패했다. 사실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기보다는, 우물쭈물 하다가 뉴욕 시에서 영국군 포위망에 갇혀서 아작날 뻔했던 게 더 큰 문제였다. 처참한 패배를 한 번이라도 당하면, 국력이 미약한 미국으로서는 독립 운동을 더 이상 지속할 여력이 없기 때문. 만약 베네딕트 아놀드가 캐나다에서 남하하는 영국군을 발쿠르 섬 전투를 통해 묶어놓지 않았다면, 대륙군은 늦어도 1777년 즈음에 패망했을 것이다. 게다가 뉴욕에서 후퇴할 때도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행운들이 연달아 겹쳐서 무사 퇴각이 가능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 직면한 조지 워싱턴 사령관은 물자 보급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영국의 약점을 이용,[22] 전투를 피하고 계속 시간을 장기간 끄는 소모전으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조지 워싱턴에게도 큰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대륙군(민병대)의 복무기간이었다. 특히 1776년에서는 단 한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했고 1776년 12월 22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민병대는 복무기간이 정해져 있으며 그 기간이 끝나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기간이 불과 10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전황이 나빴고 당연히 복무 연장에 동의할 병사들은 없어 보였다. 따라서 "사실상 대륙군의 해산날"인 12월 31일은 독립파와 조지 워싱턴 모두에게 최후의 날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 조지 워싱턴의 과감함 +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 작전이 기적처럼 이뤄지는 운이 합쳐져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조지 워싱턴의 급박한 열흘
이 전투가 바로 트렌턴 전투로 당시에는 통상적으로 겨울이 되면 연간 전쟁 계획은 종료되어 군대는 겨울 숙영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영국군은 병력을 나누어 여기저기에 나누어 배치해 겨울 숙영 상태에 들어갔고 이 점을 이용해 조지 워싱턴은 야간에 병력을 도하시켜 트렌턴에서 주둔하던 영국군 소속의 독일 헤센 용병을 기습해 성공한다. 큰 승리는 아니었지만 연전연패를 거두던 조지 워싱턴과 대륙군의 입장에서는 단비와 같은 승리였으며 이 승리로 인해 민병대들을 더 붙잡아 둘 수 있었다. 그리고 트렌턴 전투 결과에 화가 나 병력을 집결시켜 조지 워싱턴을 쫓아 나온 영국군 주력을 본 조지 워싱턴이 그들의 뒤를 우회해 프린스턴을 수비하기 위해 남겨진 영국군을 다시 기습하게 되는데 이 전투가 바로 프린스턴 전투다.
이 두 전투들은 연이은 패배와 계속된 쫓겨다님으로써 나락으로 떨어진 대륙군과 식민지인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4.1.4. 1777년, 새러토가 전투
1777년 봄, 영국 정부는 캐나다에 주둔한 군대와 뉴욕에 주둔한 군대를 연계해 대륙군을 궤멸시킬 작전을 구상했다. 뉴욕의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 소장은 대륙의회가 있는 필라델피아를 단시일에 공략하려 했고, 캐나다 방면군 사령관 존 버고인 소장은 올버니에서 뉴욕까지 이르는 허드슨 강 유역 전역을 장악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두 장성들로부터 상이한 반란 진압 계획을 접수받은 식민지 국무장관 조지 사크빌은 두 계획 모두 승낙하고 동시에 진행하게 했다.정부로부터 승인을 얻어낸 존 버고인 장군은 1777년 6월에 캐나다에서 출발했다. 그는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채플레인 호수에서 올버니로 향했고, 베리 세인트 리저 장군이 이끄는 분견대 2,000명을 모호크 계곡을 통해 남하하여 올버니에서 자신과 합세하게 했다. 이후 그는 7월 초 전쟁 초반 상실했던 티콘데로가 요새를 탈환했다. 그러나 대륙군이 나무를 베고 길을 막았기 때문에 이동이 지연되었고, 보급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했다가 베닝턴 전투에서 대패해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한편 배리 세인트 리저 장군이 이끄는 분견대 2,000명은 모호크 고개를 지나가다가 스탠윅스 요새 공방전을 치렀다. 이에 니콜라스 허키머가 이끄는 뉴욕 민병대 800명이 스탠윅스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왔으나 8월 6일 오리스카니 전투에서 영국군의 매복에 걸려 패퇴하고 허키머는 전사했다. 하지만 그 사이 스탠윅스 요새 수비병들이 자신들을 포위하던 적 숙영지를 습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베네딕트 아놀드가 자신의 병력이 실제보다 훨씬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기만책을 쓰자, 여기에 넘어간 리저 장군은 캐나다로 퇴각했다. 이로 인해 존 버고인 장군은 아무런 증원 병력 없이 적지 한복판에 노출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 무렵, 윌리엄 하우 장군은 한동안 모리스타운에 주둔한 워싱턴의 대륙군과 대치하다가 7월 23일 뉴욕의 영국 함대에 병력을 싣고 34일 동안 항해해 필라델피아에서 남서쪽으로 90km 떨어진 체서피크 만의 엘크튼 근처에 1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워싱턴은 급히 11,000명의 대륙군을 이끌고 필라델피아로 달려가면서 존 설리반 소장의 별동대에게 본대와 합류할 것을 요구했는데, 설리반 소장은 하우가 떠난 틈을 타 아예 뉴욕을 탈환하기로 하고 8월 22일 스태튼 아일랜드 전투를 치렀지만 패배해 뉴욕 탈환에 실패했다.
이후 워싱턴은 필라델피아로 진군하는 영국군을 저지하려 노력했지만, 9월 11일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패배한 뒤 9월 25일 영국군이 필라델피아에 입성하는 걸 허용했고, 10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저먼타운에 주둔한 영국군을 급습했지만( 저먼타운 전투) 역시 패배했다. 워싱턴은 남은 병력을 수습한 뒤 포지 계곡으로 이동해 겨울 숙영에 들어갔고, 하우는 반란군의 본거지인 필라델피아를 점령한 공적을 세운 것에 만족하며 필라델피아에 머물렀다.
그러나 하우가 필라델피아에서 승리감에 취해 있을 때, 존 버고인의 영국군은 적지에서 고립되었다. 당초 식민지 국무장관 조지 사크빌은 존 버고인과 윌리엄 하우 장군이 제출한 두 계획을 모두 승인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사크빌은 정작 하우에게 버고인의 작전을 어떻게 협조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지시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협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다가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결국 존 버고인의 영국군은 9월 19일부터 10월 7일까지 진행된 새러토가 전투에서 대패한 뒤 대륙군 15,000명에게 완전히 포위되자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했다. 새러토가 전투는 일반적으로 미국이 영국과의 주력군과 회전을 벌여 거둔 첫 승리로 평가된다. 또한 아래에 언급하듯이 이 승리를 계기로 유럽 각국은 영국과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즉 새러토가 전투는 영국이 미국의 '반란'을 진압할 기회를 놓치고 '전쟁', 그것도 국제전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4.2. 국제전으로 확대되다
한편 이 시기 벤자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몇몇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로 건너가 영국과 전쟁 중인 미국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열강들은 처음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새러토가 전투 후 북미 식민지 독립 세력이 영국을 상대로 충분히 맞서 싸울 만한 역량을 갖췄음을 인정했다. 그 결과 영국이 7년 전쟁 후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걸 경계하던 프랑스,[23] 네덜란드, 스페인 등이 영국에 선전포고하거나 독립파를 지원하게 돼 전쟁은 북미 대륙에서 유럽과 인도 전선으로 확대되었다.특히 이 당시 영국의 외교적 고립은 매우 심각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7년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은 대놓고 영국을 적대했고 그나마 남은 우호국인 프로이센은 전쟁의 후유증을 회복하기에도 바쁜데다 7년 전쟁 때 영국이 프로이센에 대한 지원을 끊은데에 대한 보복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히려 미국 측에 장교단과 용병을 파견하는 등 영국의 뒤통수를 쳤다. 그나마 영국을 지원해 준 국가는 동군연합인 하노버를 비롯한 그외의 몇몇 독일 영방국가들이 있었지만, 국력의 한계로 영국에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서인도 제도에서는 부이예 후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1778년 9월 7일 도미니카 섬을 점령해 카리브 해에서의 영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 했고, 영국은 이에 맞서 1778년 12월 15일 세인트루시아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고 12월 28일 세인트루시아 섬을 점령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한동안 증원군을 모으며 세력 확대에 골몰하다가 데스텡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1779년 6월 18일 세인트빈센트 섬을 점령하고 7월 4일 그레나다를 점령하면서부터 전황이 프랑스에게 기울기 시작하더니 7월 6일 그레나다 해전에서 존 바이런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데스탱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에게 패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이에 영국 정부는 급히 카리브 해에 더 많은 함대를 파견해 반격에 나섰고, 이후 양측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차례에 걸쳐 해전을 치렀다.
한편, 영국은 과테말라 도독령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내기 위해 1779년 10월 16일~11월 29일 산 페르난도 데 오모아 요새 공방전을 치른 끝에 요새를 공략했지만, 전염병이 돌아 병사들이 죽어나가자 요새를 도로 포기하는 바람에 전략적으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80년엔 자메이카 주지사 존 달링이 니카라과의 그레나다를 공략하여 산 후안 강을 완전히 장악하여 신대륙의 스페인 식민지를 남북으로 두동강 낼 작전을 기획했다. 이에 존 폴슨 육군 소장과 호레이쇼 넬슨 해군 대령이 이끄는 원정군이 2월 3일 출발하여 3월 17일부터 4월 29일까지 산 후안 요새 공방전을 치른 끝에 함락시켰다. 그러나 원정군은 질병과 식량 부족으로 2,500명이 사망하는 참극을 겪다가 11월 8일 철수했다.
뉴올리언스의 스페인군 사령관 베르나르도 데 갈베스 장군은 이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미시시피강 하류 계곡에서 영국 요새 5곳을 공략했고, 스페인령 루이지애나 총독 페르난도 데 레이바는 1780년 5월 26일 세인트루이스 전투에서 영국-인디언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스페인군은 1781년 1월 7일 모빌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781년 3월 9일~5월 8일 펜서콜라 공방전에서 영국령 식민지인 웨스트 플로리다 주의 수도인 펜서콜라를 공략했다.
인도 전선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프랑스의 전쟁 개입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인도에서의 프랑스 세력을 완전히 축출할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 동인도 회사에게 고용된 영국인과 세포이 용병대는 1778년 8월 21일~10월 19일 퐁디셰리 공방전을 치른 끝에 인도에서의 프랑스 세력의 중심지 퐁디셰리를 공략했고, 1779년엔 말라바르 해안의 마헤 항을 점령했다. 그러자 마이소르 왕국의 군주 하이데르 알리가 영국이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던 마헤 항을 제멋대로 점령한 것에 분노해 1780년 7월 카르나틱 일대를 침공하면서 마이소르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하이데르 알리와 아들 티푸 술탄을 상대로 매우 고전했는데, 특히 1780년 10월 9일 폴릴루어 전투에서 인도에 진출한 이래 최악의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24]
4.3. 지지부진한 전황
이렇듯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열강들이 영국에게 엿먹이는 목적도 있었으나 미국 독립을 지지하며 전쟁에 개입하며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영국 정부는 필라델피아를 장악한 영국군에게 뉴욕으로 철수하고 그곳을 요새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덕분에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으로부터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이수받고 1778년 6월 몬머스 전투에서 뉴욕의 영국군을 상대로 선전했으며, 새러토가 전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윌리엄 하우 소장의 뒤를 이어 뉴욕의 영국군 총사령관이 된 헨리 클린턴 소장은 더이상 대륙군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뉴욕에 틀어박혔다. 이로써 전쟁의 양상은 미국에게 좀 더 유리해졌지만 좀처럼 끝이 나지 못한다. 이유는 양측 모두 내분이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미국 측은 전쟁의 장기화로 점차 돈이 부족해지면서 군인들에게 줄 월급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탈영병들이 속출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돈에 쪼들린 대륙군을 위해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는 군수물자의 가격 통제를 실시하지만 이는 밸리 포지의 교훈을 일으키게 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반란을 일으키려 하기도 했다.[25] 베네딕트 아놀드 같은 경우는 아예 미국을 배신하게 되며 훗날 그는 미국 최악의 매국노로 낙인찍히게 된다. 거기다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점차 반전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본국 영국 또한 전쟁의 장기화와 미국과 영국 본토와의 기나긴 거리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수송비용을 더불어 전쟁을 통해 늘어가는 빚과 아직도 항복을 하지 않는 미국의 근성, 군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점차 미국을 아예 독립시키자는 의견이 늘게 된다. 그럼에도 조지 3세와 영국 정부는 황금알을 낳는 오리인 미국을 포기하지 않고 대병력을 보내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그런데 새러토가 전투의 결과는 한편으로는 미국에게 더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다. 영국이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정하면서 또한 전쟁의 목적을 '반란을 진압하는 것'에서 '독립을 저지(미국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하는 것, 그리고 만약 어쩔 수 없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면 거기서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내는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조지 3세는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약속된 전쟁을 무한히 연장하여 그들의 불복종을 처벌할 것"이라며 뉴욕, 로드아일랜드, 퀘벡, 그리고 플로리다에 있는 요새에 3만 병력을 주둔시키고 식민지들의 항구를 파괴하고 해안을 따라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해 그들에게 반역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영국의 목적이 전자에 머물러 있을 때는, 조지 워싱턴이 그렇게 했듯이, 대륙군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넓은 북미 아메리카 대륙 여기저기로 도망다니다가 영국군이 방심했을 때 기습하거나 혹은 유리한 조건에서만 싸우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영국의 목적이 후자로 바뀌자, 대륙군은 영국군과 정면 대결을 벌여 축출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길이 요원해졌다. 급기야 1778년 말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에 파견된 영국군이 서배너 공방전, 찰스턴 공방전, 캠던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자, 독립 세력은 이대로 전쟁이 끝나게 되면 신생 독립국 미국이 13개 주에서 세력이 더 줄어들게 될 뿐 아니라 북쪽(캐나다)과 남쪽(이번에 영국군이 점령한 조지아,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일부) 양쪽으로 강력한 영국의 식민지와 맞닿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졌다.
하지만 독립세력에겐 다행히, 워싱턴이 남부로 급파한 너대니얼 그린 소장이 군대를 잘 수습한 후 영국군을 상대로 선전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는 영국군의 추격을 절묘하게 뿌리치면서 전력을 유지하면서 별동대를 꾸준히 파견해 영국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영국군은 그런 그를 상대로 15차례의 전투를 치렀지만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1781년 3월 15일에 벌어진 길퍼드 코트하우스 전투는 이러한 그린의 탁월한 전술적 감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린은 영국군을 상대로 대단히 분전해 상대에게 큰 타격을 입힌 후 영국군이 전력을 다해 공세를 가해서 전황이 점차 불리해지자 전혀 망설이지 않고 철수했다. 전투 자체는 영국이 이겼지만, 피해는 영국 측이 훨씬 더 많이 입었다.
또한 남부의 영국 충성파 민병대는 1780년 10월 킹스 마운틴 전투에서 독립 지지파 민병대에게 괴멸되었고, 그린과 함께 영국군을 상대로 분전한 대니얼 모건 장군은 1781년 1월 17일 카우펜스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영국군은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를 석권하려던 뜻을 접고 요새화된 교두보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요새에 틀어박힌 영국군을 몰아내지 않는 이상 전쟁이 지속될 것은 자명했고, 자칫하면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반 자체를 상실하면서 영국의 위협에 맞서 계속해서 프랑스에게 의존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서 데꿀멍한 영국으로부터 13개 주 온전한 독립과 여러 기타 권리를 공식적으로 승인받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뉴욕을 점령하고 있는 영국군 주력 병력은 쉽사리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고, 남부 파견 영국군을 각개격파하자니 남부 여러 지역으로 재빠르게 대병력을 수송할 수 있도록 제해권이 받쳐줘야 하는데, 상대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상대로도 전 지구적인 제해권을 잃지 않고 있는 영국이었다. 북미 대륙에 파견된 프랑스 함대는 아직 변변한 전공 하나 올리지 못하고 있었고,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영국 본토 침공과 지브롤터 포위를 시도했으나 그것 역시 영국 함대에게 막혔다. 그 외에 인도나 아프리카 등 영국 식민지에 대한 공격이나 반영 세력에 대한 지원 등을 통해 견제를 시도했지만 이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러 사건과 우연이 겹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4.4. 바위가 깨지다!
4.4.1. 체사피크 만 해전
체서피크 만에서 교전하는 영국 함대와 프랑스 함대. 이 전투에서 토머스 그레이브스가 이끄는 영국 해군은 패퇴했다.
1781년,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해상 수송에 앞서 제해권 확보를 위해 서인도 제도에서 프랑스 함대가 북상했으며, 프랑스 함대의 정확한 규모, 목적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출항 첩보를 입수한 영국도 견제를 위해 함대를 선제적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프랑스는 대담하게도 드 그라스 제독이 서인도 제도의 전 함대 전력을 다 이끌고 온 반면, 영국은 '미치지 않고서야 프랑스가 서인도 제도를 무방비로 비워놓고 전 함대를 이끌고 오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고 적당한 전력의 함대만 파견했다. 아래에 언급하겠지만 서인도 제도는 당시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영국의 '상식적인' 판단도 무리는 아닌 것. 그 결과 영국 함대는 체서피크 만에서 열세의 전력으로 프랑스 함대와 조우해야 했다. 또한, 그럼에도 (결과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 영국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었으나, 영국 함대 사령관 그레이브스 제독에게는 그런 열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한 차례의 체서피크 만 해전(9월 5일)을 치르고는 영국 함대는 후퇴해 버린다.
일단 체사피크 만 해전 자체는 영국 함대가 참패한 것은 아니다. 체서피크 만 해전에 실제 투입된 24:19라는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국 함대가 전열이 붕괴되면서 쫓겨간 것이 아니라 일주일 후에 스스로 퇴각 결정을 내린 것이고, 손실 역시 전투 종료 후 상태가 안 좋은 전함 한 척을 자침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참패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물론 이는 수송작전에 참여했던 바라스(Barras) 함대가 임무를 마치고 합류하면서 36:18의 압도적인 전력 우세 속에서도 프랑스 함대가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지 않았기에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국에게 닥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4.4.2. 요크타운 전투와 전쟁의 종결
요크타운의 항복. 1797년 존 트럼블 그림.
체서피크 만의 제해권이 일시적으로 프랑스 함대에게 넘어간 사이,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가 이끌게 된 요크타운 요새에서 주둔하던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가 그 2배가 넘는 대규모의 미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좀 더 부연하면, 요크타운 포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9월 20일부터고, 9월 첫째주에는 아직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필라델피아 근처에 머물러 있었고 해상 수송도 시작하기 전이었다. 게다가 8월 30일까지는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뉴욕과 아주 가까운 스태튼 아일랜드 서쪽에 있었고, 여기까지는 미국-프랑스 연합군이 뉴욕 시를 공격할 때 취해야 하는 공격로와 동일하기 때문에 영국군은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즉, 정확히는 9월 5일 체사피크 만 해전이 일어났을 때 요크타운의 포위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이전에 요크타운 요새 주변 지역에는 라파예트 휘하의 병력에 프랑스 함대에서 상륙시킨 해병을 합쳐 고작 3,000명밖에 없었는데 그 병력으로 9,000명에 달하는 영국군을 포위한다는건 어불성설. 또한 영국 함대가 출항할 때는 요크타운이 포위될 거라는 것을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체서피크 만 해전의 패배는 결과론적으로 요크타운의 포위를 막지 못한 결과를 낳은 것이지, 요크타운의 포위를 보고 영국이 구원함대를 내보냈는데 체서피크 만 해전에서 패배한 게 결코 아니다.
체서피크 만 해전 및 요크타운 요새 포위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프랑스 함대 규모와 대규모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요크타운 요새임을 알게 된 영국은 구원을 위해 대대적으로 병력과 함대를 준비했지만, 10월 5일까지 도착하겠다던 구원군이 도착할 기미가 없자 희망을 잃은 콘월리스는 10월 19일에 마침내 GG를 쳐 버린다. 이 사건 이후 영국에선 전쟁 지지자들이 크게 줄게 되었고 영국 의회에서도 마침내 전쟁 반대파가 우세해졌다. 그동안 영국 의회에서도 전쟁 지지파와 전쟁 반대파 사이에서의 법안, 결의문 등에 있어서 표결 대립이 끝없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전쟁 지지파가 항상 승리했으나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국과의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조지 3세와 영국의 적이다'라는 궁극의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상황이 되었다. 국왕에게 막대한 실권과 영향력이 남아있던 전근대적 입헌군주제 시절이기는 했지만 저 결의문 하나로 모든 것이 뒤집혔고, 영국 정부는 즉시 기존의 전쟁 수행 계획을 포기하고 미국과의 평화협상과 철군 준비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다. 아울러 막후의 강력한 전쟁 지지자였던 조지 3세 역시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앞에서 '여러 사건과 우연이 겹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라고 표현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얘깃거리들이 있다.
- 원래 남부 파견 영국군은 남부 지역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는데, 만약 그 상태에서 미국-프랑스 연합군이 한 곳을 포위 공격했다면 영국군은 고작 2,000-3,000명 수준의 병력만 잃게 되므로 별 타격이 없다. 그런데 식민지 민병대 게릴라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 콘월리스가 상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병력을 이동시켰고, 상관인 클린턴은 콘월리스의 독단 행동을 묵인했으며, 그 결과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가, 그것도 대규모 상륙 작전이 용이한 해안에 인접한 요크타운 요새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또한 9,000명이란 병력의 손실은 영국이 무시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게 되었다.
- 콘월리스가 독단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상황에서 이미 영국의 '남부 전략'은 수정이 불가피했다. 남부 전략은 병력을 분산해서 남부 식민지 지역을 폭넓게 점령하겠다는 것인데, 그와 반대로 병력을 한 곳으로 모으면 요크타운 거점을 제외하고는 남부 식민지 지역은 도로 식민지 민병대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그 얘기인 즉, 굳이 콘월리스가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를 데리고 요크타운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제해권을 확보할 강력한 영국 함대도 있었으니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프랑스 함대가 북상하기 전에 콘월리스의 병력을 안전한 뉴욕 시로 철수시킬 수 있었고, 그럴 경우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닭쫓던 개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체사피크 만 전투와 요크타운 포위 사이에는 20여 일이라는 기간이 존재한다. 그 기간 사이에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인지하고 영국군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어도 최악의 참패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구원군이 도착한 건 콘월리스가 항복한 지 단 5일 후였다.
- 조지 워싱턴은 가능성이 희박한 뉴욕 시 공격에 집착했다. 당시 뉴욕 시는 주둔 중인 영국군만 11,000~14,000명이고 수년 이상 요새화된 도시였기 때문에, 공성전을 하려면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최소 40,000명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프-미 연합군이 그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영국군을 쳐바르고 전쟁 끝냈을 것이다. 물론 뉴욕이 향후 협상 테이블에서 가질 가치는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상당했지만, 일단 그 시점에서 뉴욕 공격은 미친 짓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조지 워싱턴 장군에게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 목표를 정할 최종 결정권을 주라고 로상보 장군에게 지시했으나, 로상보는 조지 워싱턴의 뉴욕 시 공격 제안을 끈질기게 반대했다. 마침내 조지 워싱턴은 '프랑스 함대가 지해권을 확보하는게 중요하니까 함대 사령관인 드 그라스 제독이 상황에 따라 어디로 함대를 몰고 오느냐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한발 물러섰는데, 이번에도 로상보는 몰래 드 그라스에게 체사피크 만으로 함대를 이끌고 오라고 전문을 보냈다. 로상보 장군의 오지랖이 그렇게 넓지 않았다면 역사는 바뀌었다.
- 앞에서 설명했듯이 체사피크 만 해전의 승리는 본진을 비우고 전 함대를 이끌고 나온 드 그라스 제독의 대담함 덕분이지, 북미 전역의 영국 함대가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체사피크 만 해전의 영웅인 드 그라스는 얼마 후 영국 함대에 패해 본인까지 포로로 잡히게 되는데, 만약 이런 프랑스 함대의 패전이 단 몇개월 전에만 일어났다면 역시 요크타운 전투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크타운 전투 이후로도 당시 시대적 한계와 정치적 문제로 인해 독립전쟁은 2년 더 이어졌으며 요크타운 전투 이후 종전까지의 2년동안 발생한 사상자 수가 전쟁 개시 이후 요크타운 전투 이전까지의 6년 가까운 기간동안의 사상자들의 수보다 더 많았다.
미국이 불리한 가운데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다른 원인에는 장교저격이 있다. 당시 미군은 관행을 무시하고, 적극적으로 장교를 저격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으며 영국군의 장교단을 약화시켰다. 현대에도 '민간인은 공격하면 안 된다' 혹은 '전쟁 전 선전포고', '포로에게는 제네바 협약에 따른 대우' 등과 같은 나름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이 당시에 유럽의 국제 전쟁의 규칙 가운데 하나는 전쟁에서 부득이한 상황(눈먼 포탄, 총탄에 맞는 경우 등)이 아니면 장교는 대개 귀족이니 포로로서 대우하고, 전쟁종료와 함께 협상 후 풀어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당시의 시대를 반영한 것인데, 귀족은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층으로서 정치가, 법률가, 군인 이외의 직에 종사하면 사실상 귀족의 신분을 박탈당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서유럽 국가의 장교 계급은 연공서열을 중시한 계급 매관제였다. 따라서 군인이 곧 정치가이며 정치가가 곧 군인이 될 수 있고, 귀족은 유럽세계에서 그들만의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 국가를 떠나 교류하였다. 당대 독일, 러시아 등의 국가도 궁정에서 프랑스어를 사용, 귀족도 주권국, 슈탄데스헤어, 일반귀족으로 구분하여 유럽 전체에서 통혼하였고, 주권국의 경우 부계로든 모계로든 어느 왕실과도 8촌 이내로 묶여 있었다. 일반 귀족 또한 귀천상혼에 의해 각국의 귀족과 교류하고 통혼하였으니... 추가로 19세기 말에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사항과 가문 전체가 수록된 책자까지 간행되었다.
여기에 서유럽에 산업혁명이 전파되고, 유럽의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며 유럽= 문명국이 사실상 공식화되던 시대였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장교 저격은 부대의 지휘계통을 마비시키는 효과적인 전략이지만[26] 위에서 언급한 당대 유럽의 분위기에서 장교 저격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대에 금기시하는 민간인 학살인 대도시 전략폭격이나 다를 바 없는 파격적인 수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영국 또한 이를 신사답지 못한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사실 이 외에도 독립군들은 유럽의 귀족 문화를 전혀 모르던 민병대가 주축이다 보니 장교 저격 이외에도 유럽 전장에서는 통용되어 온 '관습'을 전혀 지키지 않았고 이것들이 승리와 연결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이 때문에 비신사적 행위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5. 결과
|
《미국 헌법 서명 장면(Scene at the Signing of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Howard Chandler Christy), 1940, 캔버스에 유화 건국의 아버지들이 1787년 9월 17일 당시 미국 헌법을 서명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 미국 헌법 서명 장면이다. 당시 서명식에 참석한 55명의 건국의 아버지들 중 39명만 그려졌다. 그림 오른쪽 연단 위에 서있는 인물이 바로 조지 워싱턴이다. |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787년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제정, 1789년 9개주 이상의 비준을 통해 발효됨으로써 오늘날의 미합중국이 성립되었다. 한편 새 연방은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를 요구했고, 전 대륙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제헌회의의 의장으로 재선출되면서 새로운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미국 헌법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때 대통령제라는 정치체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워싱턴은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때문에 이 지위가 무엇이고 역사적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군주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시민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은 실질적인 통치행위 외 여러 의전에서 타국의 군주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시민들은 조지 워싱턴에게 '종신' 대통령을 해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의지만 있었다면 종신 대통령을 하거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미국인의 황제'가 될 여지도 갖추었으나, 많은 건국의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공화주의를 존중하였고[27] 2선으로 8년만에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퇴임으로 생긴 관습 덕분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고, 나아가 대통령제 시스템의 선례도 마련되었다.[28]
워싱턴은 7년 동안 총사령관[29]으로 대륙군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7년 동안 자신의 저택은 요크타운 포위를 앞두고 프랑스 장군들을 접대하는 겸 해서 겨우 딱 한 번 들렀을 정도로 항상 대륙군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고, 종종[30] 전투가 벌어지는 위험천만한 최전선까지 달려가 병사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는 바람에 부관들이 억지로 말고삐를 잡고 끌고 나왔던 적이나 도망치려는 대륙군 병사들의 길을 가로막다가 공격당한 뻔한 적도 있었다. 여기에 전황이 나빠지자 원래 매년 받기로 했던 상당한 금액의 총사령관 급료를 미국 독립 후 총사령관 활동을 위해 지출한 경비를 실비 정산만 해서 받는 것으로 바꾼 것도 조지 워싱턴 본인이었다. 그 정도로 미국 독립운동에 독보적인 공헌을 했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될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것이다.[31][32]
자세한 내용은 조지 워싱턴 문서 참고하십시오.
한편 파리 조약에서 미국의 영토는 미시시피 강 동쪽까지로 인정되었다.[33] 그러나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순순히 떠날 리 없었고, 이는 결국 노스웨스트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 ~ 1795)을 유발하게 된다.
친영파( 왕당파) 미국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하거나 매국노로 몰려서 린치를 당했다. 그 중 상당수는 영국의 해외령이었던 캐나다와 뉴펀들랜드로 도피했다.
6. 프랑스의 지원
이 당시 전문적으로 세세한 부분을 따져보지 않고 표면적인 부분만 봤다면 이렇게 오해하기 쉽겠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프랑스가 영국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것 자체는 맞고 프랑스 자체적으로 이를 극복할만한 수단이 없던 것도 사실이며 미국의 독립 전쟁이 이 수단이 되어줄 수 있기에 프랑스가 상당히 지원해준 것도 사실이지만 오히려 협상 자체는 언제나 프랑스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프랑스에 협상가로 찾아왔던건 벤자민 프랭클린인데, 이들의 상대로 프랑스측에서 내보낸 인물은 외무장관인 '샤를 그라비에 베르젠'이라는 닳고 닳은 정치인 겸 협상가였다. 이 당시 정치 초짜인 미국과 왕조가 여러번 바뀌면서도 기틀은 유지했던 정치 고인물인 프랑스의 위치를 보자면 토끼 하나 잡자고 사자를 보낸 격. 실제로 벤자민과 사절단이 울고불고 사정해도, 현 상황과 프랑스의 열등감을 꼬집어 그를 감정적으로 만들려 해도, 다 안먹히자 반쯤 협박인 행위까지 할 수 있는 수란 수는 다 쓰고도 베르젠은 끄떡도 안하고 본래 자신이 생각했던 범위인 통상 조약, 동맹, 원조, 차관만 확약하고 선을 딱 그었으며 심지어 이후 이미 추가 지원군을 파병시켜주고 있는 와중에도 물질적 지원이 아닌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는 미국측에게 계속 답을 미루는 척하는등 협상 자체는 시종일관 벤자민이 베르젠에게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벤자민이 프랑스에서 영국에 대한 열등감과 친미 여론을 고조시켰던건 효과적인 한 수고 뭐고간에 베르젠을 상대론 아무것도 안먹혀서 그나마 시민들 상대로 어그로라도 끌어서 프랑스 정부를 약간이라도 움직여보자는 생각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34]
심지어 종전까지도 프랑스는 현대에서 일반인들이 착각한 것과 달리 '나라가 흔들릴 정도'의 지원을 보낸 적은 없다. 코르시카 정복한다며 10만을 보내고, 훗날 나폴레옹이 아이티 재정복한다며 6만을 보냈다가 태반이 사망하던 프랑스는 미국 파병군 1만쯤 보냈다고 흔들리는 나라가 아니었다. 미국이 처음 들고 일어날 때부터 첩보원들을 보내 몰래 관찰한 것을 시작으로 렉싱턴-콩코드 전투 이후 미국의 독립이 아예 무리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중립'을 표방하는 한편 뒤로는 물질적 지원을 해주고 있었고[35] 트렌턴, 새러토가 전투 이후 생각보다 미국이 분전하는 걸 보고 스페인까지 끌여들여 미국-프랑스-스페인 3자동맹을 결성시켰으며[36] 이 이후에 지원군을 파병시켰지만 이조차 종전 때까지 영국이 미국 영토에 보낸 군사의 절반도 안된다. 실제로 미국 독립작전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자는 외무장관이자 프랑스측의 협상가로 참여했던 '샤를 베르젠'이었는데 이는 국가의 수령이 아닌, 외무장관 선에서 처리가 가능할 정도로만 지원해줬다는 뜻이 된다.[37]
다만 이 때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예상 못한 몇가지가 있었고 이게 결국 양국 모두에게 나름 큰 악영향을 끼쳤다.
먼저 영국은 미국의 전력을 너무 낮게 잡았다. 실제로 그 당시 미국도 여러가지 내적 문제를 품은 상황이긴 했지만[38] 영국이 그걸 알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전쟁 초반 영국은 13개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조금만 밟아주면 알아서 사그라질 아랫 것들의 사소한 반항' 정도로 치부했다. 결국 강경책으로 나가면서도 처음부터 전력을 쏟아부어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았고 그 결과 이 당시 저력으로는 세계 최상위에 속하던 영국이, 식민지가 일으킨 반란 하나를 빠르게 정리하긴 커녕 승패를 주고 받으며 고착상태가 되게 만들었다. 이는 곧 기회를 보던 프랑스와 (프랑스가 데려온) 스페인이 '한번 해볼만 한데?'라고 생각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고, 거기에 영국측이 보낸 군대의 수뇌부인 '찰스 콘월리스'와 '헨리 클린턴'이 각각 큰 실책들을 저지르면서 패색이 짙어지고 결국 패배를 인정, 이로서 북미 13개주라는 광대한 식민지를 상실함은 물론, 프랑스와 스페인에게도 별개로 식민지를 어느정도 내주는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13식민지의 인구나 경제력만 봐도 당장 대영제국의 대도시 중 2개가 13식민지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영국은 수천km 바깥에 위치한, 거대한 농업지대+열강급 대도시를 가진 반란군을 진압할 골든타임을 놓쳤다고밖에 할 수 없다.
프랑스 쪽에도 문제는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전쟁이 '지나치게' 장기화된 것과 대륙회의의 지배력이 각 주 정부들을 하나로 모을 정도로 강하진 못했다는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군수물자와 돈은 더욱 필요해졌는데 대륙회의가 닥달해도 주 정부들이 계속 소극적으로만 지원하니까 결국 미국 독립 세력도 프랑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 역시 이제 와서 전쟁에서 빠질 수도 없는 처지라 지원을 할 수 밖에 없게 됐는데 이게 아직 국력을 완전히 회복하진 못한 프랑스 입장에선 나름 타격이 되었다. 심지어 종전 이후에 미국에 파견되었던 프랑스 장교와 병사들이 자유와 박애 정신을 배워 프랑스 본국에 퍼트렸고 이건 중앙 정부도 감당할 수 없는 폭탄이 되었다.[39]
다만 프랑스 '왕국'(부르봉 왕정)은 몰라도 프랑스 국가 자체의 멸망을 우려할 정도의 일은 끝내 없었고, 어찌되었거나 프랑스가 지원하였던 미국이 마침내 승리하여 식민지 독립을 이뤄내면서 적대국가이던 영국에게 역사상 유례가 없는 빅엿을 먹일 수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소기의 목표는 이뤄낸 셈이었다. 실제로 이 일을 기억하고 있는 프랑스는 이후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선물로 그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로 보내줬을 정도였다.
7. 역사적 평가
7.1. 긍정적 평가
시민 혁명이라는 관점에서는 유럽 한복판에서 일어난 프랑스 혁명보다는 인지도가 덜하지만, 최초로 근대적 공화국을, 그것도 고도의 안정성을 바탕으로[40] 수립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혁명이다.미국 독립전쟁의 실제 동기와 명분 사이에 괴리가 있다고 하여 전쟁의 의의와 결과를 폄하할 수는 없다. 우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이 있었다고 한들 아메리카 식민지는 국왕과 귀족이라는 본토의 봉건적 계층에 예속되어 있었다는게 중요하다. 즉 철저하게 본토인들의 의지에 따라 자치권이 박탈 가능한 상태였으며, 이러한 상태를 무력으로 바꾸었다면 혁명이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세금 내기 싫어서 일으킨 전쟁이라며 미국 혁명의 혁명성이 폄하되어야 한다면, 잉글랜드 내전(이른바 청교도 혁명)이야말로 찰스 1세의 폭정은 대외적 명분이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청교도들이 자기들 기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루터파이든 국교회이든 가리지 않고 가톨릭이라 몰아붙인 수사에서 일어난 내란이니 더더욱 혁명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도 결국 이전부터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자본가들이 전통적 귀족 계급을 몰락시킨 '있는 자들의 밥그릇 싸움'이니 혁명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잉글랜드 내전은 그렇다쳐도 프랑스 혁명의 혁명성마저 완전히 부인할 사람은 적다. 미국 혁명이 대외적 명분과 실질적 이유가 따로 놀았다고 한들, 혁명성을 부정해버릴 수는 없다.
신생 아메리카 합중국은 성문헌법이 통치하였고, 혈통적 신분을 부정했으며,[41] 권력의 분립과 상호견제가 이루어졌다. 봉건적 문화가 상당한 본국의 지배를 무력으로 뒤엎고 이러한 신생 독립국이 탄생했으니 충분히 혁명이라 할 만하다. 한나 아렌트처럼 프랑스 혁명보다 미국 혁명을 더더욱 높게 평가하는 정치학 연구자도 있다.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자유(freedom)와 해방(liberty)을 혼동하였기에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전체주의의 씨앗을 남겼다고 평했으나, 미국 혁명은 자유와 해방을 구분하였기에 고도의 안정성과 민주정을 쟁취한 성공한 혁명이 되었다고 본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20세기 유럽의 지식인보다도 미국의 지식인들이 미국 혁명을 프랑스 혁명의 견지에서 해석하고, 미국 혁명이 프랑스 혁명의 교훈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 혁명을 비판하는 것이다. 슬픈 진실은 파국으로 끝난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를 만든 반면 그렇게도 성공적이었던 미국 혁명은 국지적인 중요성밖에 가지지 못한 사건으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혁명론>
한나 아렌트, <혁명론>
7.2. 비판적 평가
사실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관점의 역사에서는 영국 정부의 탄압[42]에 대항한 정착민들의 고결한 항쟁으로 묘사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단 " 건국의 아버지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그 외 현재 미국 의회의 뿌리가 된 식민 의회(Continental Congress)의 회원들은 각 지역사회 내지는 사회계층을 대표할만한 (전직)정치인 내지는 군인, 재력/사업가 등 소위 "지식인" 계층들이였으며, 어떤 식으로든 본국인 영국과 깊은 연줄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여러 출신과 국적의 사람들이 아메리카에 자리 잡으면서 "영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얕아지고, "아메리카 정착민"의 정체성이 확립하던 시기에, 영국 정부의 조세 정책에 이권이 약해진 것에 빡친 사람들이 자기들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만하다는 생각에 '자주권을 위한 혁명' 프레임을 명분삼아 정착민들을 선동해서 벌인 내전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43] 전쟁 발발 조짐이 보이기 전부터 영국 국왕과 식민 의회의 주된 대립은 "당신네들 보호 및 자치권 보장을 위해 전쟁을 했으니 세금을 좀 더 내시오"에 대해 일방적인 "부당한 조세정책 철회하라!" 가 아니라, "우표나 차같이 쌩뚱맞은걸로 식민령에나 때릴 관세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려 하지 말고 사람 보내줄태니 조세를 하더라도 제발 우리 피드백좀 받아서 현실적인 정책을 가지고 와라"가 "No taxation without represntation"의 주된 골자였다.[44][45] 쉽게말해 "우리도 영국인이니 아무리 명목상 식민지라지만 같은 백인들끼리 이러지는 맙시다"(식민지 야만인 취급은 하지 말아달라)라는 뜻이였다. 상황이 전쟁으로 격화된 것도 "같은 영국인들끼리 좀 잘해보자"고 대륙 측에서 먼저 나왔는데 더 강압적으로 나오니까 "끝까지 야만민족 대하듯이 포함외교로 나오겠다는거지? 그럼 총칼로 승부 봐야지"라는 명분을 만들어준 꼴이였기 때문이다.[46] 흔히들 알고 있는것과는 다르게 본격적인 전쟁으로 격화되기 전[47] 아메리카 이주민들이 주장하던 "자유" 혹은 "평등한 대우" 는 어디까지나 "전제군주에 대한 거부" 내지는 "공화정의 필요성" 같은 이념적 논리가 아니라 "같은 영국인으로서 대우받을 권리"를 이야기 하는거였다. 게다가 이 <상식론>도 민주정이 보편화된 지금에서야 상당히 선진적인 매체로 보이겠지만 그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극단적인 이념의 선동물이였고, 식민 주민들은 여기에 열광해서 너도나도 총을 잡고 항전을 결의한 계기가 됐다.[48] 결과적으로는 "독립을 위한 전쟁"이 되었지만 전쟁 중기까지만 해도 비록 "독립선언문" 이라는 선전포고를 하기는 했어도 '동등한 처우를 요구하는 차원의 식민지 주민들의 실력행사/반란'의 성질이 더 짙었다.[49]
조금 다른 시각으로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프랑스로부터 지키려고 영국이 무리해서 경제력(즉, 국력)을 소진하는 바람에 힘의 공백이 생긴 틈에 "이참에 한번 독립해서 부와 힘을 키우자"는 암묵적 동의 하에 식민지 지배층이 벌인 분리주의 내전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한계는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여러 시민혁명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식민지의 분리주의 움직임이 서서히 보일 적부터 영국군에서 일찍이 퇴역한 조지 워싱턴이 영국군 정복을 입고 식민 의회에 출석했다는 일화가 있다. 분리전쟁을 전제로 하고, 그때 군사 지휘를 해서 새로 설립되는 질서에서 한가닥 잡으려 했다는 의도로 해석된다.[50]
당장 전쟁 직후 독립된 미 식민지는 조지 워싱턴과 벤자민 프랭클린의 개입 없이는 전제 군주제 내지는 각 주의 대표들이 선출한 왕이 다스리는 입헌 군주정 국가로 갈 뻔 했다. 엄청난 인기로 인해 어어하다 초대 왕이 될 찰나 조지 워싱턴이 죽어도 국가 원수는 하기 싫어서 선출된 의회와 국가원수가 이끄는 공화국가로 가야 한다고 건국의 아버지 및 다른 식민 의회 양반들을 어찌어찌 설득해서 결국 공화정 국가로 건국은 했는데, 투표에서 선출당해버려(…) 임기 두번 마치고 사임했다.
당대 사상가들이 추구했던 목표가 현실에 부딪혀 흐지부지된 것들도 상당 부분 있다. 독립 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토머스 페인만 하더라도 계급을 비롯해 인종, 민족, 종교, 성 차별을 모두 타파하고, 보편 복지의 필요성까지 역설했는데, 미국 기준으로만 보더라도 저 문제들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상황이고, 심지어 이권 문제와는 거리가 먼 공화국 건국이란 목표도 개인의 영향력 기대어서 겨우겨우 해결한 수준이었다.[51]
이러한 시각에서 발전하여 미국 혁명의 혁명성에 회의적인 의견도 있다. 이에 의하면 혁명이라고 하면 말그대로 사회적이든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무엇인가 혁명적인 전환이 있어야 하는데 미국 독립전쟁은 말그대로 일개 식민지가 경제적 원인을 주요 요인으로 한 독립 전쟁에 불과하는 것이다. 최소한 혁명으로 불리려면 잉글랜드 내전처럼 왕당파로 불리는 구 귀족체제에서 의회파로 대변되는 시민세력으로 정치세력이 변동되고, 이로인해 영국의 경제정책이나 기타 정책들이 바뀌었으며 무엇보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격변하는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부분을 잘 꿰뚫는 미국인들도 영국이란 체제를 통째로 엎은거는 아니고 그냥 이주민들이 유혈저항으로 독립한 뒤 새로운 공화국을 채웠다는 점을 중시하면서 주로 보수측에서 미국을 "The American Experiment"라고 부르곤 한다.[52] 완전무결의 이념적 혁명이 아니라 우리들끼리 먹고살겠다고 냅다 독립한게 지금까지도 이어지다가 어쩌고 보니 최강 패권국이 됐다는 거고, 중대한 사유가 없는 한 현재의 체제를 버려선 안된다는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8. 여담
-
오늘은 어떤 중대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문 발표일에 영국왕 조지 3세가 일기장에 쓴 글이라는 미국에서 꽤 유명한 속설이지만, 사실 조지 3세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단, 저런 말을 어디에 썼다고 해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하다. 전보조차 없던 시절에 미국 독립선언문이 발표 당일 영국까지 전해졌을 리는 없잖은가? 미국 독립 선언서가 영국 의회에 도착한 것은 1개월이 넘은 뒤인 8월 10일이다. 그나마도 외교서신이나 교섭단이 식민의회 명의로 직접 전달한 것도 아니고, 식민의회의 지시에 따라 식민지 곳곳의 신문에 인쇄된 게 얼떨결에 영국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아메리카령 소식의 일부로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의 반란 주모자 양반들이 주체도 모르고 독립선언을 내질렀다!" 는 식으로 퍼지면서 영국 의회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거다. 이 일화는 원래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일어난 1789년 7월 14일 루이 16세의 일기장에 "Rien(일 없다)"이라고 쓴 것이 미국 버전으로 와전된 것이다(그 일기장이 현대에 남아 있다). -
놀랍게도 100세 넘게 장수한 노병들의 사진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레뮤얼 쿡(Lemuel Cook)이며 브랜디와인 전투와 요크타운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각각의 발발년도가 무려 1777년과 1781년이다. 생몰년일은 1759년 9월 10일 - 1866년 5월 20일인데 어느 정도냐면 나폴레옹보다 10년 먼저 태어난 거다. 미국의 탄생을 위해 싸웠고 미국의 통합을 직접 눈으로 본 셈이다.
레뮤얼 쿡이 얼마나 오래 살았나면 한국 기준으로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사도세자가 사망한 임오화변 사건 3년 전 영조 35년에 태어나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난 해 고종 3년에 사망한걸 생각하면 체감이 확 온다. 현대 한국사로 비유하면 쿡은 독립군에서 복무한 후, 광복 후 17명의 대통령을 본 셈인데, 대한민국은 광복 이후 2022년 1월 기준으로 불과 12명의 대통령이 거쳐갔다.[53]
# 이들의 더 많은 사진은 위 사이트 참고. 대부분 100살을 넘겼다!
- 미군은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는데, 양측 합쳐 1천명 이상 동원된 대규모 전쟁 중 미군의 사상자가 더 많은 유이한 전쟁 중 하나다. 당시 세계적인 초강대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을 상대로 오합지졸 민병대 병력이 태반인 미군이 싸웠기 때문. 남은 하나는 미영전쟁.[54] 1차, 2차 대전은 물론 베트남전, 걸프전 등 모두 상대 군인들은 미군보다 높은 손실을 입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교환비 미군 대 독일군 = 1 대 1.4 로 그나마 가장 높은 교환비를 기록했다.[55][56]
- 독립전쟁 당시 흑인 노예들도 참전했다. 독립파와 왕당파로 나뉜 식민지 주인들처럼 이들도 둘로 나뉜 것. 단순히 주인을 따라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지만,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주인으로부터 도망쳐서 상대 진영에서 복무한 사례도 있었다. 미군과 영국군 양측 모두 흑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 노예 신분의 해방과 봉급을 조건으로 모병하였기 때문이다. 독립파 흑인 중 유명한 참전자로는 벙커힐 전투 때 영국군에게 포위당하자 기지를 발휘해서 영국군 지휘관을 저격하고 동료들과 함께 탈출한 피터 세일럼(Peter Salem)이 있다. 영국군에서 복무한 흑인 중 미국 노예주로부터 탈출한 노예 출신 흑인들의 경우, 본래는 종전 후 조약에 따라 미국 측이 이들을 붙잡아서 원래 노예주인들에게 되돌려주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영국군 측은 이들의 신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지켜서 이 영국군 출신 흑인 및 가족들은 영국령 캐나다 등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미국의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미국독립전쟁에 흑인들도 참여하여 영국과 싸웠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 뉴욕에서 9.11 테러로 무너졌던 세계무역센터의 재건 과정을 통해 새로 세워진 제1동의 높이가 1776피트인데, 여기서 1776은 바로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이 독립한 1776년을 뜻한다.
9. 창작물
9.1. 당시를 다루는 작품
- 영화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 2000년작. 멜 깁슨, 히스 레저 주연. 독립전쟁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배경으로 한다.
- 영화 혁명: 1985년작. 알 파치노 주연. 불의 전차를 연출한 휴 허드슨 감독 작품으로 의미도, 목적도 모른 채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 갔던 "탐"이라는 인물을 통해 바라본 전쟁서사시.
- 드라마 존 아담스: 2008년작, HBO. 폴 지아마티, 로라 리니 주연. 존 애덤스를 중심으로, 미국의 독립과 건국 과정을 배경으로 한다.
- 게임 어쌔신 크리드 3: 2012년작. 어떤 미친 역덕후의 살신성인에 힘입어 오히려 이 문서보다 해당 게임의 문서가 독립전쟁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더 많은 편이다(...). 일부 작중요소가 가상인 것을 제외하고 실제 있었던 일과 소소한 요소들을 보는 정도로는 괜찮은 편이다. 어쌔신 크리드 3/게임 관련 정보 참조.
- 드라마 TURN: Washington's spies: 2014년작. 미국 독립전쟁 시기 만들어진 정보 집단 Culper Rings와 첩보원의 활약이 묘사된다.
- 게임 스타크래프트 2: 테란 유닛 해방선의 무장 콩코드 포와 렉싱턴 미사일은 미국 독립 전쟁 최초의 격전지에서 따온 이름이다.
- 게임 시드 마이어의 콜로니제이션, 문명 4 콜로니제이션: 신대륙의 식민지 개척자가 되어 원주민과 싸우면서 결국엔 독립을 쟁취하는 게임. 동시기를 다루고 있다.
-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대전사 캠페인의 첫 번째가, 원주민으로 미국 독립전쟁에서 싸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게임 유럽전쟁 4: 시나리오 모드의 일부인 미국의 굴기 편에서 미국 독립전쟁을 다루며 정복 모드에서도 1775년 편에서 다룬다.
- 뮤지컬 해밀턴 1막: 주인공 해밀턴과 워싱턴 장군, 프랑스 소속의 지원군 라파예트 장군 등 독립 전쟁 당시의 주요 실존인물들이 주인공인 만큼 1막은 이 독립 전쟁을 주로 다루고 있다. 뮤지컬의 메인 넘버인 Yorktown에서 마침내 요크타운 전투로 승리를 거두고 미국이 독립하게 된다.
- 게임 마인크래프트 애니메이션 주민이야기도 이 사건을 본 떠 만든 신대륙 전쟁 영상이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얀디고 부족은 아메리칸 원주민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9.2. 그 외
- 애니메이션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에서는 현실과는 달리 벤저민 프랭클린이 영국의 브리타니아 장군에 의해 회유되는 바람에 미국 독립 전쟁이 실패하여 역사에서는 워싱턴의 반란으로 기록된다.
- 게임 폴아웃 4에서 커먼웰스 미닛맨의 메인 퀘스트는 미국 독립 전쟁이 모티브다.
- 대체역사물 사도세자는 편하게 살고 싶다에서는 보스턴 차 사건이 보스턴 감귤 사건으로 바뀌긴 했지만[58] 어쨌든 원역사와 동일하게 일어난다. 다만 조선과 신대륙의 교류가 늘어난 덕에 조선의 영향력이 좀 짙은 편이다.
10.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1934년 이전 미국 자유주의 관련 문서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주요 이념 | 고전적 자유주의 · 급진주의 | |
연관 이념 | 1934년 이전 | 공화주의 · 대중주의 · 민주주의 · 사회자유주의 · 세속주의 · 이신주의 · 진보주의 · 자유민주주의 · 자유방임주의 · 자코뱅주의 · 잭슨 민주주의 · 제퍼슨 민주주의 · 폐지주의 · 평등주의 · 초월주의 | |
1934년 이후 | 자유지상주의 · 재정보수주의 · 진보주의 · 현대자유주의 | ||
연관 개념 | 건국의 아버지들 · 개인주의 · 도금 시대· 미국 혁명 · 반연방주의(( 주의 권리) · 법 앞의 평등 · 서프러제트 · 자결권 · 자연권 · 자유국제주의 · 자유민주주의 · 자코뱅주의 · 작은 정부 · 지방자치 · 진보 시대 · 종교의 자유 · 친프랑스 · 표현의 자유 | ||
정당, 계파 | 국민민주당 · 공화당*( 급진파) · 공화파** · 민주공화당 · 민주당*( 잭슨 민주주의) · 반행정당 · 버번 민주당 · 자유공화당 · 진보당( 1912년 · 1924년) | ||
인물 | W. E. B. 듀보이스 · 랠프 월도 에머슨 · 로버트 M. 라폴레트 · 벤저민 프랭클린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앤드루 잭슨 · 우드로 윌슨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보라 · 찰스 섬너 · 토머스 제퍼슨 · 프레드릭 더글러스 · 하이럼 존슨 · 해리엇 터브먼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
▼ 현대 미국의 자유주의 | |||
미국 정치 관련 문서 (
사회주의 ·
현대자유주의(
←1934년 이전) ·
자유지상주의 ·
보수주의(
대안 우파)) * 진보 시대에는 주류, 그 외 시대에는 당 내 계파 자유주의/분파 |
}}}}}}}}} |
미국의 대내외 전쟁·분쟁 | |||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건국 ~ 20세기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전쟁·분쟁 | 교전국 | |
독립전쟁 ,1775 ~ 1783, |
<colbgcolor=#fff,#191919> 영국 하노버 선제후령 브라운슈바이크 이로쿼이 | ||
유사전쟁 ,1798 ~ 1800, |
프랑스 제1공화국 | ||
1차 바르바리 전쟁 ,1801 ~ 1805, |
오스만 제국 | ||
미영전쟁 ,1812 ~ 1815, |
영국 | ||
2차 바르바리 전쟁 ,1815, |
오스만 제국 | ||
미국-멕시코 전쟁 ,1846 ~ 1848, |
멕시코 | ||
태평천국의 난 ,1850 ~ 1864, |
태평천국 | ||
제2차 아편전쟁 ,1856, |
청나라 | ||
남북전쟁 ,1861 ~ 1865, |
아메리카 연합국 | ||
시모노세키 전쟁 ,1863 ~ 1864, |
조슈 번 | ||
포르모사 원정 ,1867, |
파이완족 | ||
신미양요 ,1871, |
조선 | ||
하와이 침공 ,1893, |
하와이 왕국 | ||
미국-스페인 전쟁 ,1898, |
스페인 | ||
미국-필리핀 전쟁 ,1899 ~ 1902, |
필리핀 제1공화국 | ||
의화단의 난 ,1900 ~ 1901, |
의화단 청나라 | ||
멕시코 국경 전쟁 ,1910 ~ 1919, |
멕시코 | ||
니그로 반란 ,1912, |
쿠바 PIC | ||
니카라과 점령 ,1912 ~ 1933, |
니카라과 자유주의자 | ||
아이티 점령 ,1915 ~ 1934, |
아이티 반군 | ||
도미니카 점령 ,1916 ~ 1924, |
도미니카 공화국 | ||
제1차 세계 대전 ,1917 ~ 1918, |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
러시아 내전 ,1918 ~ 1920, |
소비에트 러시아 극동 공화국 | ||
제2차 온두라스 내전 ,1924, |
온두라스군 | ||
제2차 세계 대전 ,1941 ~ 1945, |
태평양 전쟁 ,1941 ~ 1945, |
일본 제국 태국 필리핀 제2공화국 | |
북아프리카 전역 ,1940 ~ 1943, |
이탈리아 왕국 나치 독일 비시 프랑스 | ||
서부전선 ,1941 ~ 1945, |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비시 프랑스 | ||
추축국 석유 차단 작전 ,1940 ~ 1945, |
나치 독일 루마니아 왕국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 ||
그리스 내전 ,1944 ~ 1948, |
그리스 공산당 | ||
6.25 전쟁 ,1950 ~ 1953, |
북한 소련 중국 | ||
1958년 레바논 위기 ,1958, |
레바논 국가 운동 | ||
피그만 침공 ,1961, |
쿠바 | ||
베트남 전쟁 ,1964 ~ 1973, |
북베트남 베트콩 | ||
라오스 내전 ,1964 ~ 1973, |
파테트라오 북베트남 |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1968, |
북한 | ||
EC-121 격추 사건 ,1969, |
북한 | ||
도미니카 내전 ,1965 ~ 1966, |
헌법론자 파벌 | ||
캄보디아 내전 ,1970 ~ 1975, |
크메르 루주 베트콩 북베트남 |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76, |
북한 | ||
엘살바도르 내전 ,1979 ~ 1992, |
FMLN | ||
시드라 만 사건 ,1981~1989, |
리비아 | ||
그레나다 침공 ,1983, |
그레나다 쿠바 | ||
레바논 내전 ,1982~1984, |
시리아 이란 헤즈볼라 | ||
리비아 공습 ,1986, |
리비아 | ||
사마귀 작전 ,1988, |
이란 | ||
파나마 침공 ,1989, |
파나마 | ||
1989년 필리핀 쿠데타 시도 ,1989, |
반민주 필리핀 군부 세력 | ||
걸프 전쟁 ,1990 ~ 1991, |
이라크 | ||
모가디슈 전투 ,1993, |
통일소말리아회의 | ||
민주주의 유지 작전 ,1994 ~ 1995, |
아이티 | ||
보스니아 내전 ,1995, |
유고슬라비아 스릅스카 공화국 | ||
무한 도달 작전 ,1998, |
수단 알 카에다 | ||
사막의 여우 작전 ,1998, |
이라크 | ||
코소보 전쟁 ,1999, |
유고슬라비아 | }}}}}}}}} | |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21세기 이후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전쟁·분쟁 | 교전국 |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 ~ 2021, |
<colbgcolor=#fff,#191919> 탈레반 정권 알 카에다 호라산 이슬람 국가 | ||
이라크 전쟁 ,2003 ~ 2011, |
이라크( 후세인 정권 및 저항 세력) 알 카에다 및 저항 세력 시아파 무장 세력 | ||
파키스탄 드론 공습 ,2004 ~ 2018, |
알 카에다 탈레반 정권 파키스탄 탈레반 | ||
소말리아 군사 개입 ,2007 ~ 현재, |
알샤바브 알 카에다 | ||
2006년 3월 18일 조치 ,2006, |
소말리아 해적 | ||
머스크 앨라배마호 피랍 사건 ,2009, |
소말리아 해적 | ||
아프간 주둔 미군-파키스탄군 교전 ,2009 ~ 2012, |
파키스탄 | ||
제1차 리비아 내전 ,2011, |
리비아 | ||
SY 퀘스트 피랍 사건 ,2011, |
소말리아 해적 | ||
니제르 군사 개입 ,2013 ~ 현재, |
알 카에다 ISIS 보코 하람 | ||
이라크 내전 ,2014 ~ 2017, |
ISIS | ||
제2차 리비아 내전 ,2015 ~ 2019, |
ISIS | ||
시리아 내전 ,2017 ~ 현재, |
ISIS | ||
샤리아트 공군기지 공습 ,2017, |
시리아 | ||
카샴 전투 ,2018, |
시리아 바그너 그룹 | ||
2018년 4월 시리아 공습 ,2018, |
시리아 | ||
바그다드 국제공항 공습 ,2020, |
이란 카타이브 헤즈볼라 | ||
순교자 솔레이마니 작전 ,2020, |
이란 | ||
2023년 이라크·시리아 주둔 미군기지 공격 ,2023, |
이란 시리아 인민동원군 | ||
홍해 위기 , 2023 ~ 현재, |
최고정치위원회 이란 | ||
번영의 수호자 작전 ,2023 ~ 현재, |
최고정치위원회 | ||
머스크 항저우호 공격 사건 ,2023, |
최고정치위원회 | ||
2024년 예멘 공습 ,2024 ~ 현재, |
최고정치위원회 | ||
친이란 민병대의 주요르단 미군기지 공격 ,2024 ~ 현재, |
미상 친이란 민병대 | ||
2024년 미국의 이라크·시리아 공습 ,2024 ~ 현재, |
이란 인민동원군 | }}}}}}}}} |
영국의 대외 전쟁·분쟁 | |||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전쟁·분쟁 | 교전국 | |
<colbgcolor=#012169>
영국-스페인 전쟁 ,1585 ~ 1808, |
<colbgcolor=#fff,#191919> 스페인 제국 | ||
335년 전쟁 ,1651 ~ 1986, |
네덜란드 | ||
영국-네덜란드 전쟁 ,1652 ~ 1784, |
네덜란드 공화국 | ||
대북방전쟁 ,1700 ~ 1721, |
루스 차르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 ~ 1714, |
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 | ||
사국 동맹 전쟁 ,1718 ~ 1720, |
스페인 제국 |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 ~ 1748, |
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 양시칠리아 왕국 프로이센 왕국 | ||
7년 전쟁 ,1754 ~ 1763, |
프랑스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스웨덴 제국 스페인 제국 | ||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 ,1775 ~ 1782, |
마라타 동맹 | ||
미국 독립 전쟁 ,1775 ~ 1783, |
미국 | ||
프랑스 혁명 전쟁 ,1793 ~ 1802, |
프랑스 제1공화국 | ||
나폴레옹 전쟁 ,1803 ~ 1815, |
프랑스 제1제국 | ||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1803 ~ 1805, |
마라타 제국 | ||
미영전쟁 ,1812 ~ 1815, |
미국 | ||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 ,1817 ~ 1818, |
마라타 동맹 | ||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839 ~ 1842,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
제1차 아편전쟁 ,1840 ~ 1842, |
청나라 | ||
영국-시크 전쟁 ,1845 ~ 1849, |
시크 왕국 | ||
크림 전쟁 ,1853 ~ 1856, |
러시아 제국 | ||
태평천국의 난 ,1850 ~ 1864, |
태평천국 | ||
제2차 아편전쟁 ,1856 ~ 1860, |
청나라 | ||
영국-페르시아 전쟁 ,1856 ~ 1857, |
이란 숭고국 | ||
세포이 항쟁 ,1857 ~ 1858, |
세포이 반란군 무굴 제국 | ||
사쓰에이 전쟁 ,1863 ~ 1864, |
사쓰마 번 | ||
시모노세키 전쟁 ,1863, |
조슈 번 | ||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878 ~ 1880,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
줄루 전쟁 ,1879, |
줄루 왕국 | ||
제1차 보어 전쟁 ,1880 ~ 1881, |
트란스발 공화국 | ||
마흐디 전쟁 ,1881 ~ 1899, |
마흐디국 | ||
영국-이집트 전쟁 ,1882, |
아라바 파샤 반란군 | ||
영국-잔지바르 전쟁 ,1896, |
잔지바르 술탄국 | ||
파쇼다 사건 ,1898, |
프랑스 제3공화국 | ||
제2차 보어 전쟁 ,1899 ~ 1902, |
트란스발 공화국 | ||
의화단의 난 ,1900 ~ 1901, |
의화단 청나라 | ||
티베트 침공 ,1903 ~ 1904, |
청나라 | ||
제1차 세계 대전 ,1914 ~ 1918, |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만 | ||
러시아 내전 ,1918 ~ 1920, |
소비에트 러시아 극동 공화국 | ||
아일랜드 독립전쟁 ,1919 ~ 1921, |
아일랜드 공화국 | ||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919,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
터키 독립전쟁 ,1919 ~ 1923, |
튀르키예 대국민회의 | ||
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
<colbgcolor=#012169>
서부 전선 ,1939 ~ 1945, |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1943 | |
북아프리카 전역 ,1940 ~ 1943, |
이탈리아 왕국 나치 독일 비시 프랑스 | ||
동아프리카 전역 ,1940 ~ 1941, |
이탈리아 왕국 | ||
영국-이라크 전쟁 ,1941, |
이라크 왕국 | ||
페르시아 침공 ,1941, |
이란 제국 | ||
태평양 전쟁 ,1941 ~ 1945, |
일본 제국 태국 버마국 자유 인도 임시정부 | ||
그리스 내전 ,1944 ~ 1948, |
그리스 공산당 | ||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1945 ~ 1946, |
인도네시아 | ||
말레이시아 비상사태 ,1948 ~ 1960, |
말레이시아 공산당 | ||
6.25 전쟁 ,1950 ~ 1953, |
북한 소련 중국 | ||
제2차 중동전쟁 ,1956, |
이집트 | ||
제1차 대구전쟁 ,1958 ~ 1961, |
아이슬란드 | ||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대치 ,1963 ~ 1966, |
인도네시아 | ||
아덴 비상사태 ,1963 ~ 1967, |
NLF FLOSY | ||
베트남 전쟁 ,1964 ~ 1975, |
북베트남 | ||
제2차 대구전쟁 ,1972 ~ 1973, |
아이슬란드 | ||
제3차 대구전쟁 ,1975 ~ 1976, |
아이슬란드 | ||
포클랜드 전쟁 ,1982, |
아르헨티나 | ||
걸프 전쟁 ,1990 ~ 1991, |
이라크 쿠웨이트 공화국 | ||
보스니아 전쟁 ,1992 ~ 1995, |
유고슬라비아 | ||
코소보 전쟁 ,1999, |
유고슬라비아 | ||
시에라리온 내전 ,2000 ~ 2002, |
RUF 라이베리아 |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 ~ 2020, |
탈레반 정권 | ||
이라크 전쟁 ,2003, |
이라크 | ||
제1차 리비아 내전 ,2011, |
리비아 | ||
이라크 내전 ,2014 ~ 2017, |
ISIS | ||
시리아 내전 ,2017 ~ 현재, |
시리아 알 카에다 ISIS | ||
홍해 위기 ,2023 ~ 현재, |
최고정치위원회 | ||
번영의 수호자 작전 ,2023 ~ 현재, |
최고정치위원회 | ||
2024년 예멘 공습 ,2024 ~ 현재, |
최고정치위원회 | }}}}}}}}} |
네덜란드의 대외 전쟁·분쟁 | |||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D1D1D; margin: -6px -1px -11px" |
<colcolor=#fff> 전쟁·분쟁 | 교전국 | |
<colbgcolor=#ff9900>
네덜란드 독립전쟁 1568 ~ 1648 |
<colbgcolor=#fff,#191919> 스페인 제국 | ||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 1601 ~ 1661 |
포르투갈 왕국 | ||
30년 전쟁 1618 ~ 1648 |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 ||
335년 전쟁 1651 ~ 1986 |
영국 | ||
영국-네덜란드 전쟁 1652 ~ 1784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1672 ~ 1678 |
프랑스 왕국 스웨덴 제국 | ||
9년 전쟁 1688 ~ 1697 |
프랑스 왕국 |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 ~ 1714 |
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 | ||
사국 동맹 전쟁 1719 ~ 1720 |
스페인 제국 |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 ~ 1748 |
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 양시칠리아 왕국 프로이센 왕국 | ||
미국 독립 전쟁 1775 ~ 1783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
프랑스 혁명 전쟁 1792 ~ 1795 |
프랑스 제1공화국 | ||
나폴레옹 전쟁 1803 ~ 1815 |
프랑스 제국 | ||
벨기에 혁명 1830 ~ 1831 |
벨기에 저항군 프랑스 국민의 왕국 | ||
시모노세키 전쟁 1863 ~ 1864 |
조슈 번 | ||
제2차 세계 대전 1941 ~ 1945 |
<colbgcolor=#ff9900>
서부전선 1940 ~ 1945 |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1943 비시 프랑스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 |
태평양 전쟁 1941 ~ 1945 |
일본 제국 | ||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1945 ~ 1949 |
인도네시아 | ||
6.25 전쟁 1950 ~ 1953 |
북한 중화인민공화국 | ||
트리코라 작전 1961 ~ 1962 |
인도네시아 소련 | ||
걸프 전쟁 1990 ~ 1991 |
이라크 쿠웨이트 공화국 | ||
코소보 전쟁 1999 |
유고슬라비아 | ||
제1차 리비아 내전 2011 |
리비아 | ||
시리아 내전 2017 ~ 현재 |
시리아 알 카에다 ISIS | ||
번영의 수호자 작전 2023 |
최고정치위원회 | }}}}}}}}} |
스페인의 대외 전쟁·분쟁 | |||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D1D1D; margin: -6px -1px -11px" |
전쟁·분쟁 | 교전국 | |
<colbgcolor=#c60b1e>
이탈리아 전쟁 ,1495 ~ 1559, |
<colbgcolor=#fff,#191919> 프랑스 왕국 | ||
프레베자 해전 ,1538, |
오스만 제국 | ||
네덜란드 독립전쟁 ,1568 ~ 1648, |
네덜란드 공화국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 ||
레판토 해전 ,1571, |
오스만 제국 | ||
영국-스페인 전쟁 ,1585 ~ 1808, |
잉글랜드 왕국 | ||
30년 전쟁 ,1618 ~ 1648, |
네덜란드 공화국 오스만 제국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스웨덴 제국 | ||
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 ~ 1659, |
프랑스 왕국 | ||
포르투갈 독립 전쟁 ,1640 ~ 1668, |
포르투갈 왕국 | ||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1672 ~ 1678, |
프랑스 왕국 스웨덴 제국 | ||
9년 전쟁 ,1688 ~ 1697, |
프랑스 왕국 |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 ~ 1714, |
네덜란드 공화국 합스부르크 왕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
사국 동맹 전쟁 ,1718 ~ 1720,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왕국 | ||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3 ~ 1735, |
합스부르크 왕조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 ~ 1748,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네덜란드 공화국 러시아 제국 | ||
7년전쟁 ,1754 ~ 1763, |
프로이센 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포르투갈 왕국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샤움부르크리페 공령 | ||
미국 독립 전쟁 ,1775 ~ 1783, |
영국 | ||
프랑스 혁명 전쟁 ,1793 ~ 1802, |
프랑스 제1공화국 → 영국 신성 로마 제국 네덜란드 공화국 러시아 제국 | ||
나폴레옹 전쟁 ,1803 ~ 1815, |
프랑스 제1제국 | ||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 ,1808 ~ 1833, |
리오데라플라타 볼리비아 칠레 그란콜롬비아 멕시코 페루 파라과이 | ||
멕시코 재정복 시도 ,1821 ~ 1829, |
멕시코 공화국 | ||
코친차이나 원정 ,1858 ~ 1862, |
대남국 | ||
스페인-모로코 전쟁 ,1859 ~ 1860, |
모로코 | ||
도미니카 복원 전쟁 ,1863 ~ 1865, |
도미니카 공화국 | ||
친차 제도 전쟁 ,1865 ~ 1866, |
칠레 페루 에콰도르 볼리비아 | ||
쿠바 독립전쟁 ,1895 ~ 1898, |
쿠바 반군 미국 | ||
필리핀 혁명 ,1896 ~ 1899, |
카티푸난 필리핀 혁명군 미국 | ||
미국-스페인 전쟁 ,1898, |
미국 | ||
리프 전쟁 ,1921 ~ 1926, |
리프 공화국 | ||
독소전쟁 ,1941 ~ 1944, |
소련 | ||
이프니 전쟁 ,1957 ~ 1958, |
모로코 | ||
녹색행군 ,1975, |
모로코 | ||
걸프 전쟁 ,1990 ~ 1991, |
이라크 쿠웨이트 | ||
보스니아 전쟁 ,1992 ~ 1996, |
유고슬라비아 | ||
코소보 전쟁 ,1999, |
유고슬라비아 | ||
이라크 전쟁 ,2003 ~ 2017, |
이라크 | ||
제1차 리비아 내전 ,2011, |
리비아 | }}}}}}}}} |
[1]
미국 내에서는 이렇게 불리는게 일반적이다.
[2]
미국을 지지하는 측과 영국을 지지하는 측으로 나뉘어 분열이 일어났다.
[3]
당시 독일 소국들중 일부는 용병산업을 국가 주요산업으로 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독립전쟁시기 상당수가 영국을 대상으로 용병 장사를 했다. 이들 중에 헤센-카셀,헤센-하나우 출신들이 가장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 군인들도 그냥 헤센인이라고 통칭돼서 불렸다. 단
하노버
선제후령의 경우
용병보다는 영국의
동군연합 국가였기에 선제후가 국왕으로 계신 나라를 돕기 위해 파병한 것에 가깝다. 또한 브라운슈바이크 공국도 경제적 이득을 위해 용병을 파병했지만, 하노버 왕실의 방계였고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대공이 조지 3세의 누나와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과 동맹관계였다.
[4]
1780년 ~ 1784년의 제2차 영국-마이소르전쟁
[5]
1775년 ~ 1782년 제1차 영국-마라타전쟁
[6]
1776년 ~ 1777년
[7]
콘월리스의 부관이었으며 훗날 요크타운에서 조지 워싱턴에게 콘월리스와 함께 항복했다. 영국으로 간 뒤 지브롤터 수비대장으로 있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항복하여 조지 워싱턴과 나폴레옹에게 항복한 진귀한 기록을 달성했다. 영화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에서 나오는 콘월리스의 부관이 찰스 오하라이다.
[8]
전쟁기간 복무한 총원은 20만명
[9]
탈영병 대다수가 해군이기에 많아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10]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쟁의 발발 원인은 한 식민지 출신 영국 장교가 우발적으로 프랑스 외교관을 살해한 데서 시작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정체불명의 식민지 출신 영국 장교의 정체가
조지 워싱턴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만약 조지 워싱턴이 전쟁의 발발 원흉(?)이었다면 결국 그의 우발적 살인이 미국 독립이라는
나비 효과를 일으킨 셈. 한편으로
북미 원주민이나
인도 사람과 무관한 전쟁이었다는 것.
[11]
2013년 9월 1파운드는 1700원 내외이니 가장 적은 숫자인 100억 파운드라고 하더라도 17조 2,482억 원, 5000억 파운드라면 862조 4,100억 원.
[12]
심지어
플레잉 카드에도 인지를 붙여야 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스페이드 에이스만 유난히 도안을 크고 화려하고 복잡하게 그리는데, 이때 붙인 인지의 흔적이다.
[13]
사실 각 주마다 공여한 역할의 차이가 있기는 했다. 버지니아나 뉴욕 같이 전방에 인접해 있던 주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제공한 반면, 뉴저지 같은 주는 기여도가 영국에 비해 훨씬 적었다.
[14]
식민지 측의 주장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가상 대표(Virtual Representation)' 이론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의회에 선출된 의원은 자신을 뽑아준 지역이나 국왕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대표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영국 의회는 아메리카를 포함한 영국령 전체의 대표이므로 아메리카 대표없이도 영국 의회의 결정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이론이었다. 당연히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말도 안되는 개소리 취급받았으며, 영국 내부에서도 식민지에 우호적인
윌리엄 피트(1708) 같은 정치가는 헛소리라고 비판했다.
[15]
영국은 미국이 독립한 이후 식민지 경영전략을 수정해서, 식민지의 독립운동은 탄압하되 식민지에 보낸 영국인 총독을 루트로 해서 식민지의 여론을 영국 본국 정책에 반영시키는 유화책으로 돌아섰다. 나중에 가면 식민지 현지인을 총독으로 임명하기도 한다.
[16]
사실 보스턴 학살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었지만 독립파들은 이 사건을 아주 잘 활용했다.
[17]
당시 'lobsterback(가재 등짝)'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당시 영국군 제복이 빨간색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18]
정확히는
여기와
여기 참고. 폴 리비어가 한 말이 "The British are coming!"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는 "The Regulars are coming out."이라고 한다.
[19]
심지어 장교급이라고 있는 인물들조차 보고서를 어찌 써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국 워싱턴이 일일이 다 가르쳐줘야 했다고... 또한 군기도 개판이라 미국 독립군의 서열 2위였던
찰스 리의 경우엔 전쟁 중에 적진 근처의 술집에서 문란한 파티를 벌이다가 다음 날 아침 영국군 순찰병에게 체포되기까지 한다. 결국 미국 측은
미인계를 써서 영국군 장교를 납치한 후 맞교환하며 그를 구해낸다.
[20]
영국군이
승리하긴 했지만 피해가 더 커서 수적열세를 더 악화시켰다.
[21]
말이 신사 협정이지, 실제로는 해상 철수 중에 공격하면 보스턴에 불을 질러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22]
당시는
범선 시대고 영국 본토와 미국 간의 거리는 구글 지도로 재보면 5000km가 넘는다. 그리고
전보라는 개념도 없어서 연락관이 지원 요청서를 작성하여 영국행 배에 올라 직접 전달해야 했다. 현대의 항공기는 몆십 시간만 타고 가면 되지만 범선시대에는 한 번 보급물자와 지원군을 실어서 도착하면 과장 섞어서 달 단위로 걸렸다(...). 그야말로 거의 현지 원정군으로만 전투를 치러야 하는 셈.
[23]
사실 이쪽은 1777년부터 비공식적으로 미국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24]
이 때 영국군에게 패배를 안긴
마이소르 왕국은 로켓병기를 적극적으로 동원했는데 이에 영국군은 감명을 받아
콩그리브 로켓을 개발하게 된다.
[25]
미국은 이러한 막장상황을 타개하고자 타국에 인원을 파견하여 복권을 잔뜩 사오게 했다. 이때 사온
복권들은 미 화폐 기념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그 수가 수백장에 이른다.
[26]
2차대전 이후 소위, 중위가 계급별 전사비율로 보면 압도적이며
베트남전에서 소위의 평균 생존시간은 1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장교가 저격의 제1순위이다.
[27]
독립전쟁 시기 의회에서 재정부족으로 군대에 제때 봉급을 줄 수 없게 되자 화가 난 군인들이 '대륙회의를 뒤집어 엎고 장군님을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워싱턴에게 보냈는데, 워싱턴은 군인들을 진정시키며 자신은 왕이 될 생각이 없고, 이럴 때일수록 어쩔 수 없이 의회에 따르며 차차 보상해주겠다고 애쓴 적 있다.
[28]
후임 대통령인
율리시스 그랜트,
그로버 클리블랜드,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몇몇 후보가 3선에 도전하긴 했으나 4선까지 성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을 제외하고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심지어 이 경우도
2차 세계대전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마저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도중 사망했다. 이후 1951년 수정헌법 22조로 대통령의 2선 제한이 확정되었다.
[29]
만약 미국 독립 운동이 실패한다면 반역죄로 사형당할 가능성이 무척 높은 자리이다.
[30]
특히 전열이 붕괴되려는 상황일 경우.
[31]
당시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이 1인당 2표씩 행사하며 투표하고 싶은 2명에게 각각 1표씩 투표하는 방식으로 1위가 대통령, 2위가 부통령으로 당선되는 방식이었는데 워싱턴은 모든 선거인단에게서 1표씩 받았다. 득표율은 50%이지만 모든 선거인단이 워싱턴에게 표를 던졌으므로 사실상 만장일치이다.
[32]
워싱턴이 이런 사람이었기에
트렌턴 전투 이후 복무 계약이 만료된 민병대를 잠시나마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트렌턴 전투의 승전으로 사기가 올라간 와중에도 많은 민병대원들이 계약이 끝나고 떠나려 했지만, 워싱턴이 10달러 보너스를 약속하며 한 달만 더 머물러달라고 부탁했기에 남은 것이다. 연속된 패전 끝에 트렌턴 전투라는 작은 승전을 겪고도 떠나려 했던 자들이 당시 기준으로 적지 않은 돈이라고는 해도 고작 10달러를 위해 목숨 건 군 생활을 연장했다고 보긴 어렵고, 워싱턴의 됨됨이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33]
기존의 공식적 영역은
애팔래치아 산맥까지였다. 물론 그 서쪽에도 이미 미국인들이 진출해 있던 상황이었다.
[34]
심지어 이것도 '협상하라고 보냈는데 인기몰이나 하고 있냐' 라는 식으로 동료와 의원들의 거센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고 중간에
파면당하기까지 했다. 벤자민 입장에선 다행히도(?) 벤자민의 후임으로 찾아온
존 애덤스는 오히려 그 고집불통인 면모 때문에 베르젠에게서 뭘 더 얻어내기는 커녕 까일대로 까이고 베르젠이 몰래 미국 정부에 압박 준 것으로 인해 인사이동당해야 했다.
[35]
다만 이 때는 해군전력이 영국보다 확실히 열세라 한창 해군을 키우느라 움츠리고 있던 시기인 것도 한몫했다.
[36]
정확히는 미국과 프랑스 둘이 직접적인 동맹을 맺었고 지브롤터 때문에 영국에게 물먹은 적이 있는 스페인은 '프랑스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참여했다.
[37]
영국은 반대로 왕인 조지 3세가 직접 참여해서 인선이나 파병 병력 등 전쟁에 관련된 대부분을 자기가 직접 조정했다.
[38]
제일 대표적인 문제는 미군이 가난했지 미국이 가난하진 않았다는 것. 언뜻 보면 전쟁통에 이게 뭔 소린가 싶겠지만 이 당시 미국은 현재같이 중앙권력이 강하기보단 어찌저찌 기워낸 것에 가까울 정도로 중앙정부가 각 주의 정부에 행사하는 그 지배력이 크지 않았다. 당장 어느날 조지 워싱턴이 의회에 가던 중에 미군이 굶어가며 영국군과 목숨걸고 싸우는 와중에도 필라델피아의 시민들이 태연하게 사치를 즐기며 호화스럽게 사는걸 보면서 골때려하며 기록을 남길 정도였고, 미국을 지원하러 파병된 유럽인들이 '이렇게 잘먹고 잘살면서 반란? 제정신이야?' 라면서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최소한 미국 서민들의 식생활은 유럽 중산층보다 위였던 것이다.
[39]
원정 갔던 군인들의 사상수입은 특이한 게 아니어서,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 장교들 중 일부도 귀국 후 어설프게
혁명을 시도했다가 진압당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고
[40]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가 공포정치와
쿠데타, 자국민 학살,
군주정
복고 등을 겪은 것과 비교하면,
미국의 체제는 정말 기묘할 정도로 안정성있게 지속되었다. 이 정도로 안정성 있는
공화정 체제를 세운
시민 혁명은 찾기 어려운데 이는 미국 독립전쟁이 프랑스 대혁명처럼 내부의 지배구조를 근본부터 재구축해야하는
혁명이 아니라 내부의 자치정부는 유지한 채 외부와의 연결고리를 끊으려 했던 혁명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미국조차도 각자 다른 나라 수준이었던 주들간의 연맹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나라로 통합하고자 했을 때 심각한 갈등을 벌이다 끝내
거대한 내전이 발발했다는 것은 그만큼 내부의 권력구조를 바꾸는 행위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41]
물론 사회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명문가와 엘리트들이 있으나, 이건
21세기의 서방 국가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변함없다. 중요한 점은
왕족 -
귀족 -
중인 -
평민 -
노예 5단계로 구성되는 혈통적
신분을 법으로 부정했다는 데 있다.
[42]
이때 자주로 예시를 드는게 그 유명한 "대표 없는 곳에 세금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이다.
[43]
이 관점에서 <상식론>은 본격적으로 독립주의/공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전쟁으로 치닫게 한 훌륭한 선전물이였고, 내용 자체도 시작은 "영국의 정책은 부당하고 세습군주제가 어쩌구.." 하다가 결론은 "여기 자원이면 충분히 영국하고 맞장떠서 이기고 먹고살기 충분하다. 맨날 영국한테 삥뜯기면서 살바에는 그냥 독립하는게 낫다"라는 식으로 끝낸다. 애초의 책 자체도 책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할 정도로 짧고 선전용 팸플릿이라고 보는게 더 타당하다.
[44]
식민 주민들도 멍청이들도 아니었고, 애초에 영프 전쟁의 제 1 전선이 북쪽의 영프간 식민지 경계였다. 북부에서는 병력까지 자원해서 나갔고 남부 식민지들도 조금이나마 물자 지원/징발도 있었다. 그래서 대륙 의회와 독립전쟁의 대의명분과 배경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영국이 무리하게 조세를 감행한 시점부터 이미 힘의 균형 공백이 발생했음을 인지하고 불공정한 조세 등의 트집삼아 독립을 하겠다는 "암묵적 동의"가 이뤄진게 아니었겠냐라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45]
영미 역사책에서는 잘 안다뤄지지만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영국 본토에선 독립선언문(=선전포고문)을 아직 받지 못했으므로) 온건파가 주도한 평화적 해결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46]
자꾸 외국인 취급할거면 그냥 진짜로 독립해버리고 그 다음 상황에 대해선 니들 항상 하듯이 총칼로 해결보겠다는거다.
[47]
정확히 말하자면 토마스 페인의 <상식론>의 출간 이전까지
[48]
그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제국주의적 정책이 역으로 튄 뒤 자신들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자칭 대테러 문명사회 세력의 맹주를 자처하는 미국은, 본인들도 이념적 극단주의에 기반한 비정규전 반란(Insurgency)을 통해 건국된 나라임을 망각하는 듯 하다"는 말을 (주로 영미권 밖의) 역사/정치 논객들로부터 들을 수 있다.
[49]
그리고 이런 영국 정부의 실책으로 영국 정부와 식민지 백인들과의 충돌은 추후 100년뒤
보어 전쟁으로 또다시 반복된다
[50]
다만 그도 이 무력충돌의 결과로 새로운 독립 국가가 생기거나, 자신이 최초의 국가원수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냥 역사책에 자기 이름을 남기고 명예를 챙긴 뒤 조용하게 생활하는 게 그의 목표였다는게 보편적인 견해다.
[51]
토마스 페인이 현세 기준으로는 제일 선진적이고 깨어있는 지식인이였지만 그시절엔 애초에 독립파중에서도 제일 급진적인 이단아로 이미 낙인 찍힌 상태였다. <상식론>도 이사람 작품인걸 기억해야 한다. 이념적으로 그와 주파수가 비슷한 사람은 그나마 (다행히) 조지 워싱턴이였고, 건국 후 바통터치를 받아서 겨우겨우 공화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받고 한다.
[52]
반대로 소련은 흔히 "Communist Experiment"라고 부른다. 미국인들, 특히 보수권이 소련과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이유중 하나가 미국은 사회경제학적 이유로 독립하고 별도의 정치체계를 구성한 신생국인 반면, 소비에트 연방은 어찌됐든 진정한 '혁명'으로 기존 체제를 엎은 나라기 때문이다. 자국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기에
메카시즘이 흥한 것이였다.
[53]
다만 대한민국은 중간에 독재정권이 들어선 영향이 커서, 대수로만 따지면 쿡의 경우는 20대, 대한민국은 2022년 1월 기준 19대이다. 대략 1920년대 후반에 태어나서 10대 후반에 독립군에 참여하고, 2022년 새 대통령 취임을 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54]
둘 다 영국이 적이었다는 게 특징.
[55]
물론 독일이 통상적으로 전장에서 어드벤티지를 가지는 방어자 입장인 것도 컸지만, 압도적인 제공권 + 포병 + 병력 열세인 상황에서 1:1.4이라는 교환비를 기록한건 대단한 일이다.
[56]
더군다나 미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한 1944년은 이미 독일의 역량 및 질적인 면에서 심각한 차질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당장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과의 전쟁에서 1:5 이상의 압도적인 교전비를 기록하다 1944년부터는 교전비가 1:2 미만으로 내려오는 신세로 전락하던 때다.
[57]
새러토가,
렉싱턴,
요크타운,
타이콘데로가,
벙커힐, 트렌턴,
베닝턴
[58]
원역사에서는 차에 붙은 관세 인상에 대한 반발이 원인이었다면 여기서는 조선에서 들여온 감귤 조림을 압수해서 그걸 되찾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났다. 원역사보다 더 어이없게 일어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