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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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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 | 英祖
파일:영조_어진.jpg
출생 1694년 10월 31일
(음력 숙종 20년 9월 13일)
한성부 창덕궁 보경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즉위 1724년 10월 16일 (29세)
(음력 경종 4년 8월 30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776년 4월 22일 (향년 81세)[1]
(음력 영조 52년 3월 5일)
한성부 경희궁 집경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원릉(元陵)[2]
재위기간 조선 왕세제
1721년 11월 15일 ~ 1724년 10월 16일
(음력 경종 1년 9월 26일 ~ 경종 4년 8월 30일)
조선 제21대 국왕[3]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
(음력 영조 즉위년 8월 30일 ~ 영조 52년 3월 5일)
서명
파일:영조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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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금(昑)
부모 부왕 숙종
모후 인원왕후, 생모 화경숙빈
형제자매 3남 중 2남
배우자 정비 정성왕후
계비 정순왕후
후궁 정빈 이씨, 영빈 이씨, 귀인 조씨
폐숙의 문씨, 상궁 이씨
자녀 2남 7녀 (2남 1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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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 화억옹주(和憶翁主, 1717 ~ 1718)
장남 - 진종(眞宗, 1719 ~ 1728)
차녀 -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 ~ 1758)
3녀 -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 ~ 1748)
4녀 - 옹주(1728 ~ 1731)
5녀 - 옹주(1729 ~ 1731)
6녀 - 옹주(1732 ~ 1736)
7녀 -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 ~ 1752)
차남 - 장조(莊祖, 1735 ~ 1762)
8녀 - 옹주(1735 ~ 1736)
9녀 -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 ~ 1808)
10녀 -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 ~ 1777)
11녀 - 화령옹주(和寧翁主, 1753 ~ 1821)
12녀 -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 ~ 1772)
종교 유교 ( 성리학)
광숙(光叔)
양성헌(養性軒)[4]
봉호 연잉군(延礽君)[5]
전호 효명전(孝明殿)
묘호 영종(英宗) → 영조(英祖)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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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
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
(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
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순경력홍휴
(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純景曆洪休)
중화융도숙장창훈
(中和隆道肅莊彰勳)
시호 조선: 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
(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
→ 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 장순(莊順)
섭정 왕세자 이훤 ( 1749년 ~ 1762년)
왕세손 이산 ( 17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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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조 어필.jpg
영조의 어필
1. 개요2. 생애3. 평가4. 어진5. 가계
5.1. 본가( 전주 이씨)5.2. 배우자/자녀
6. 여담7. 대중매체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21대 국왕으로 숙종 인현왕후를 모시는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 사이에서 차남[6]으로 태어났다.

조선 왕실 최초로 세자(世子)가 아닌 세제(世弟)로서 왕위에 오른 군주이다.[7] 즉, 혈연적으로는 숙종의 아들로서 직계비속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경종의 이복동생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서출이자 방계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약점이 있었다. 모친 숙빈 최씨는 궁녀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친형 경종의 재위 도중 신임옥사[8]가 일어나면서 죽을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영조는 1724년 30세의 나이로 비교적 늦게 즉위했지만 80세를 넘길 정도로 매우 장수했기 때문에 영조의 치세는 장장 52년에 달했는데, 이는 조선 왕사에 있어 최장 집권에 해당하며, 역대 조선의 국왕 중 최장수 군주였다.[9]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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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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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진

파일:attachment/yongjoseja123.jpg
파일:영조_어진.jpg
파일:영조_전신상.png
<colbgcolor=#bf1400> 연잉군 시절 영조[10] <colbgcolor=#bf1400> 조선 영조의 어진[11] <colbgcolor=#bf1400> 전주 어진 박물관에서 새로 그린 영조 전신 어진
연잉군 시절 영조의 초상화는 1714년( 숙종 40년), 영조가 20세 되던 해에 화사 진재해(秦再奚)가 그린 것이다. 초상화의 오른쪽 일부가 불에 탔는데, 표제가 오른쪽에 있었다면 신원을 밝힐 수 없었겠지만 다행히 왼쪽에 있어 매우 운좋게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보물 제1491호이다.

홍룡포를 입은 영조의 어진은 51세때의 모습으로 1900년( 대한제국 광무 4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 등이 원본을 보면서 그린 이모본(移模本)이다.

전신이 아니고 상반신만 있는 이유는 이 어진의 원본이 진전(眞殿)에 걸렸던 어진이 아니라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 육상궁에 걸렸던 초상화였기 때문이다. 즉 원래 상반신만 있는 그림을 보고 그린 것이라 상반신만 있는 것이다. 이 어진의 원본인 육상궁에 있던 영조의 초상화는 영조의 다른 어진들과 함께 부산 용두산 대화재때 소실됐는데 이 이모본만 유일하게 전혀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932호이다.
파일:tA7ctno.png
<colbgcolor=#bf1400> 《열성어진》의 영조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영조[12]의 초상은 동일인을 모사한 건지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어디 중국 불교 선문답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저 용모를 보라. 다만 영조는 어진 화사를 자주 했었고, 일제강점기까지도 어진이 6축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2축 외에 다른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있다. 수염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잉군 시절과 51세 때의 어진의 중간에 그려진 어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형수술을 하면 견적도 안 나올 정도로 다르게 생겼다. 그래도 매부리코와 치켜올라간 눈매, 약간의 사각턱 등 다른 영조 초상화나 연잉군 초상화와 이 그림을 "글로 묘사한다면" 비슷하게 나올 것 같기는 하다.

5. 가계

5.1. 본가( 전주 이씨)

5.2. 배우자/자녀

6. 여담

조중회라는 신하가 영조가 종묘 대신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에 먼저들렀다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간언을 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다. 영조가 "조중회를 당장 귀양보내라!"하고 노발대발하였는데, 하필 조중회가 충신 중의 충신이라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고 영조가 "당장 귀양 보내지 않으면 대신 네놈들을 귀양보내리라!"하고 역정을 냈는데 그러더니 갑자기 엉엉 울며 '내가 늙으니 저런 것들이 내 말을 안듣지.'라 하더니 연못 물에 빠져죽겠다면서 발만 잠기는 웅덩이에 들어간 채 군사들을 웅덩이 주위에 둘러서게 하여 신하들의 출입을 막았다.[43][44] 당연히 감히 왕명을 어길수도 없으니 다들 어쩌지 못해 당황만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알현을 허락받은 세손도 안절부절못하며 영조를 뜯어 말리는데도 영조는 조중회의 목을 베어와야만 연못에선 나오겠다고 버티었다. 세손은 조중회의 목을 가져오라고 신하들을 다그쳤으나 그렇다고 평상시 옳은 말을 자주 하는 충신의 목을 제대로 된 명분도 없이 벨 수는 없었다. 결국 타협책으로 조중회를 흑산도위리안치[45]하기로 하자 영조가 "이제야 속이 후련하구나!"라며 연못에서 걸어나와 당당히 입궐하였다. 그리고 이 난리를 쳐놓고는, 조중회가 흑산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불러들였다. 귀양 보내던 것까지 취소하고! 이 해프닝 이후로 사람들이 영조가 노망난 거 아니냐고 수군댔다고 한다.

7.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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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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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수립 전에 사망했으나 사후 황족 작위를 추증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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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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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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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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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왕 27명 중 최장수 [2] 다른 조선 왕릉과는 다르게 파묘(破墓) 자리를 쓴 능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3] 조선 왕 27명 중 최장 집권 [4] 이 호는 영조가 재위 전에 살던 사가(잠저)인 창의궁(昌懿宮)의 한 누각 이름으로 부왕 숙종이 친히 내려 지어주었다. 영조는 이를 그대로 자기 아호로 썼다. [5] 봉호로 알려진 왕이며, 연잉군이란 봉호는 황해도 연안(延安)에서 유래했다. [6] 숙빈 최씨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대부분 생각하지만, 이전에 태어났었던 영수(永壽)라는 아기가 있었으나 요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조 순서는 둘째이다. [7] 정종의 남동생 태종 순종의 남동생 영친왕은 왕세제, 황태제가 아니라 왕세자, 황태자 신분이었다. [8] 훗날 영조를 지지해준 노론 4대신이 집권 여당인 소론 측의 공격으로, 이때 사약을 받고 대거 죽었다. [9] 2위는 즉위기간이 6년이었지만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태조. [10] 그림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이 링크에서 다운로드 가능. [11] 그림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이 링크에서 다운로드 가능. [12] '영종'으로 적혀있어 의아해 할 수 있는데, 영조의 원래 묘호는 상술했듯 '영종(英宗)'이었다. 나중에 영조로 바뀐 것. 정조 역시 원래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후대에 '정조'로 바뀌었다. [13] 정조의 바로 밑의 이복동생이자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의 할아버지이다. 유배를 강화도로 가게 되면서 본인 은언군과 그의 일족이 신유박해로 풍비박산이 났고 은언군 또한 사약을 먹고 결국 죽는다. [14]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은 17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 단절의 위험을 미리 알고 했는지 몰라도 선견지명으로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후손인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그의 봉사손을 맡아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훗날 정조계의 헌종 효종계의 철종이 각각 1849년 1863년에 죽으면서 모든 왕통 직계가 단절되었는데, 선원록에 기재된 바로 법적상 은신군의 증손자이자 흥선군의 차남 이명복이 또 순조의 아들인 익종(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적하면서 왕위 계승을 하여 즉위하게 된다. 불행히 일찍 죽었지만 양자로 편입된 남연군 그 일가 덕분에 사후에는 거대한 후손들에게 제사도 제대로 대접받는 등 여러모로 큰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15] 경빈 박씨는 원래 사도세자가 제일 아끼는 후궁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부왕 영조로부터 정서적, 정치적으로 학대를 당하는 와중에 정신병이 들었고 옷을 입히는 시중을 하다가 의대증이 도진 사도세자에게 끝내 맞아 죽었다.한 맺힌 억울한 죽음 이로 인하여 임오화변이 결정적으로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16] 태어난 3년 뒤의 어린 아이였던 은전군은 당시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였던 영조로부터 갖은 질책과 학대를 다 받으면서 의대증과 같은 정신병이 발발하자 어머니였던 빙애, 즉 경빈 박씨를 때려 죽일 때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칼 치고 문 밖 (하엽생(荷葉生))연못에 던져버려 죽을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도 이를 알아챈 (은전군에게는 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에 의해 구해진다. 어머니가 맞아 죽은 것도 억울할텐데 1년 뒤 아버지 또한 임오화변으로 죽게 되면서 고아가 되어 상궁 손에 자라게 된다. 추후, 이복형 정조가 즉위한지 1년만에 존현각에 침입했던 사건인 '정유역변으로 주모자인 홍낙임(정조의 외삼촌)이 은전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자백하게 되어 결국 정조는 이복동생인 은전군을 눈물을 머금고 사약을 내려 강제로 죽게 하였다. 철종 대에 와서야 신원 복권되고 고종 대에 '효민(孝愍)'이란 시호를 내리게 되었다. [17] 《승정원일기》 1735책 (탈초본 92책) 정조 18년(1794년 청 건륭(乾隆) 59년) 9월 13일 (정유) 남공철에게 전교하기를,"선조(先朝, 영조)의 승은을 입고 70세가 넘은 사람으로 단지 이 사람만 있으니, 오늘 마땅히 기억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므로,노(老) 궁인 상궁 이씨의 집에 해조로 하여금 옷감과 식물을 특별히 제급(題給) 하게 한 뒤에 초기하라." 하였다. [18] 문종(고려)이 이런 케이스다. 정종(고려 10대)이 죽기 하루 전에 전위했다. [19] 이게 무슨 소리냐면 왕이 고자라 애를 못 만든다라는 소리다! [20] 평안도 출신 김신달리 형제의 후손으로, 정황기 만주에 편입되었다. 조선 사신들 말마따나 뿌리는 잊지 않았는지 조선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편의를 많이 봐줘서 명사 편찬 과정에서 인조반정이 찬탈 내지 반역으로 기록되는 것을 막기도 했다. 건륭제의 후궁 숙가황귀비는 이 사람의 종손으로, 이 가문은 가경 연간에 만주식 성인 긴기야씨를 사성받는다. 종손인 김간 역시 건륭 연간 많은 업적을 남긴 권신이어서 청사고 열전에 이름이 오를 정도의 강건성세 네임드 중 하나다. [21] 재위 기간(1724년 ~ 1776년)을 포괄하였는데 그렇다고 무조건 을 완전히 금지하지 않고 약술은 마실 수는 있었다. 다만 금주령에 대한 처벌이 문제였는데 그 정도가 심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대표적으로 병마절도사 윤구연인데, 이 사람은 역사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을 마시다가 걸린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소지하고 있는 술단지에서 알콜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즉결처형을 받았던 것이다. 이 경우는 굉장히 억울한 것이 금주령을 막 반포했을 시 영조가 본보기로 보이려고 일부러 이랬다는 점이다. 심지어 당파를 막론하고 신하들이 "그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사형을 만류하며 변호하자 영조는 되려 그 사람들을 파직시켰을 정도다. 결국 나중에 금주령이 느슨해진 이후에 은근슬쩍 윤구연은 사후 복위되는데, 이미 사형당한 사람이 복위되었다고 되살아나는 건 아니고 직위만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사실 이 사건만 보면 영조가 아무리 전제군주제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독재에 가까운 면모가 보인다. 애초에 영조 성격이 원래 이런 것도 있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즉시 금주령을 해제하고 금주령을 발포하라는 일부 신하들의 요구도 무시했다. 애초에 정조는 영조와는 달리 지독한 애주가였던 것도 한 몫 하겠지만... [22] 다만 이게 검소하다고 볼 수는 없다. 절제된 식사인 것은 분명하나 승정원 일기를 보면 영조는 전복, 송이버섯, 고추장을 즐겼고 고기도 꿩고기 같은 것을 즐겼는데, 검소하게 먹진 않았다. 심지어 금주령을 내리고 본인은 몰래 술을 마쳤는데 이 술도 비싼 술이었다.(...) [23] 다만 현대인과 당시 사람들의 식사량을 생각해보면 현대 기준으로는 그다지 소식이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한민족의 식사량 참고. [24] 다만 가체를 금지한 것은 궁중 한정이다. 어디까지나 사치를 금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공식 행사 때는 가체를 착용했다. 가체 금지령에 대한 세세한 사항을 정해놓지 않았던 탓에 정작 시행 시간이 7년 밖에 못되어 실패했기에 나중에는 가체를 다시 전면 허용했다. [25] 근데 이게 사실이라면 영조가 생각이 없다라고 봐야 한다. 분명히 즉위 도중에 구리와 주석은 수입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았으면서도 이런 지시를 내린 걸 보면 영조가 괜히 위선자라는 평가를 받는게 아니다. 최소한 은 당시에 조선에서 채굴이 가능했다. 다만 상징성 때문이라면 그럴수도 있다. 금과 은이 조선에서 나는건 맞지만 조선은 공식적으론 금과 은이 나라에서 잘 안 난다고 우겼다. 이유는 원나라-고려 시절에 금과 은을 조공으로 바치느라 고생해서. 그래서 그냥 아얘 안 난다고 우기고 근거를 위해 제대로 채굴도 안 했다. 그리고 당연히 명나라에는 금과 은 대신에 돗자리, 인삼 등을 조공으로 바쳤다. 근데 이제 와 금과 은을 대량으로 채굴했다가는 거짓말할 것이 뽀록날게 아닌가. 문제는 왕이 직접 금은으로 된 물건을 쓰면 아래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왕부터가 구리나 주석을 쓰면서 검약 퍼포먼스라도 하면 아랫사람들도 "그래도 왕이 검소하게 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사치를 하기는 좀..." 라며 그나마 억제라도 하지[47] 그런것도 없다면 "왕이 쓰는데 나정돈 좀 써도 되겠지?" 라는 심정으로 더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중국(청나라)에 조선이 금은이 많다는 말이 돌 것이다. 그럼 고려처럼 금은을 삥뜯길 수 있다는 공포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생긴다. 거기다 사치재로서 금은의 수요가 늘어나면 어느 시점에서는 조선 내의 금은으론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점이 올 것이고 결국엔 타국에서 수입해와야 할 것이다. 그나마 조선이 금과 은으로 금화와 은화를 만들어 화폐로 유통하는 국가라면야 어떻게 경제에 도움이 될수도 있겠지만 조선이 그정도로 경제가 발전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조선은 이미 상평통보 발행을 위해서 구리를 수입해 쓰는 상황이고. [26] 특히 솔잎주는 당시에는 비싼 고급 술이었다. [27] 참고로 주석은 알루미늄 이전에 호일로 쓰던 생각보다 비싼 금속이었다. [28] 현대로 치면 송로버섯, 푸아그라, 캐비어를 선호하면서 자기가 검소하다고 언플한 셈. 심지어 송이버섯, 전복, 고기, 메추라기 고기는 21세기인 현재에도 값비싼 최고급 음식 재료다. 그나마 지금은 흔하디 흔한 고추장마저 이 시기에는 비교적 덜 흔했다. [29] 참고로 위에 언급한 겸손하다는 엘리자베스 1세도 수많은 보석을 사들여서 수집품으로 모아두었다고 한다. [30] 사육신 세조수양대군이라는 봉호로 낮추어서 불렀던 것이라든가, 폐위되어서 묘호를 받지 못한 광해군이나 연산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폭군이나 암군을 즉위 이전의 봉호로 부르면서 깎아내리는 것은 적어도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제법 유구한 전통이다.[48] 그래서 현대에도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 보편적으로 평가가 나쁜 폭군 내지 암군이었거나 그 정도는 아니지만 작정하고 까려면 충분히 깔 여지가 많은 인물들을 묘호가 아닌 봉호로 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시대 순서대로 하자면 수양대군, 하성군, 능양군, 연잉군(영조). 실제로 이인좌의 난 때도 반군들은 영조를 연잉군이라고 깎아서 불렀다. [31] 봉호도 아닌 (본명)를 대놓고 부르는 이성계 이방과, 이방원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한데 이 경우는 이들을 깎아내리는 의도로 쓰는 것이 아니라 주로 '고려의 신하'와 '조선의 왕'이라는 그들의 2가지 상반된 정체성 중 '고려의 신하' 쪽을 강조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다. 실제로 태조, 정종, 태종은 태어날 때는 왕족이 아니라 고려의 신하였으며 조선의 임금이 아닌 고려의 신하로서도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들인만큼) 한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본명이 많이 쓰일 수밖에 없다.[49]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저 셋을 제외한 나머지 조선 임금의 휘를 '이X', '이XX' 식으로 대놓고 부르는 경우에는 얄짤없이 깎아내리는 의도로 쓰인 것으로 해당 인물을 묘호는커녕 봉호로 불릴 자격도 없는 자, 다시 말해 연산군이나 광해군만도 못한 쓰레기로 취급하는 극도의 멸칭이다.[50] 더군다나 '태정태세문단세'로 시작되는 묘호는 잘 알려져 있는 반면, 휘는 피휘 문제로 인해서 해당 글자가 봉인되어버리는 불편을 최소화해주기 위해서 일부러 일상 생활에서 안 쓰이는 소위 벽자로 지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32] 철종 어진의 경우는 입술 부분이 소실되었고 원종 어진은 귀 부분이 탔으며 순종 황룡포본 어진도 왼쪽 얼굴 상당부분이 불탄 채로 건져졌다. [33] 어디까지나 조선 국왕 중 가장 장수한 거지 영조보다 오래 산 역사적 인물들은 찾아보면 의외로 많다. 장수왕, 강감찬, 최충, 최우, 일연, 황희, 효령대군, 정인지, 정인홍, 이원익, 송시열, 허목 등. 그나마도 정인홍 송시열 등은 노환도 아니고 사형 집행으로 사망했다. 정인홍 송시열이 사형을 안 당했으면 90살을 넘을 가능성이 높았다. [34] 다만 의학과 공중 보건이 발달한 현대에는 80살을 넘기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35] 사실 식사를 매우 규칙적으로 한 것도 장수 비결로 뽑힌다. 영조의 경우 하루 세 번 간식과 식사를 재철로 만든 채식 위주로 항상 꼭꼭 씹어먹으면서 검소하게 먹었는데(원래 다섯 번이던 것을 영조가 줄인 것. 또한 도 현미, 보리, 흑미, 수수, 콩밥 위주의 잡곡이었으며 여름이면 밥을 에다 말아먹었고 가뭄이나 홍수가 들면 백성들의 굶주리는 생각을 하며 반찬을 잔뜩 줄이고 간장만으로 식사를 했으며 생강, 대추, 녹두, 인삼도 즐겼다고도 한다.) 대신들과 회의를 하다가도 식사 시간이 되면 수라상부터 받았다고 한다. 다른 왕들은 아침은 부득이하게 거르거나 야식을 즐기는 등 식사가 불규칙했지만 영조는 소식을 하되 끼니만큼은 절대 거르지 않고 무조건 제때 꼬박꼬박 챙겼다. 특히나 아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쫄쫄이 굶고 있는 와중에도 지혼자 잘 챙겨먹었다는 것이다. [36] 다만 몸보신을 할 때만큼은 , 전복, 건어물, 새우젓, 조기, 민어, 굴비를 비롯한 해산물, 탕평채, 두부, 꿩고기, 메추라기 고기, 사슴꼬리, 신선로 등을 먹어 단백질 보충도 확실하게 해 주어서 균형잡힌 알맞은 식단을 짰다. [37] 고추장으로 유명한 전라북도 순창군 서울대학교 선정 전국 최장수 지역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38] 이를 근거로 진짜 왕통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극소수의 견해. [39] 영조는 나이를 먹으면서 여기서 발전하여 치매까지 걸리기도 했다. 허나 나이를 감안하면 치매에 걸려도 이상할게 없는 나이다. [40] 아랫배에 병이 생겨 배가 땡기듯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병증. [41] 여기서 또 권극한테 남병사 윤구연이 죽은 것을 책임을 돌려 타박하는데 권극의 말은 사실 임금의 뜻에 맞게 영합한 것에 가깝고, 윤구연은 사실 영조가 금주령을 범한 본보기로 죽인 것이다. # 자수한 이들 중에 나머지는 용서해주고 권극만 처벌한 것은 금주령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42] 여담으로 영조만이 아니고 숙종부터 조선왕들 중에는 화나면 무서운 군주들이 많았다.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왕후도 질겁할 정도였고 경종은 평소엔 어벙했지만 정말로 화나면[51] 주변에서 쩔쩔맬 정도였고 정조도 영조 못지않게 욕설을 갈겼고 화낼땐 크게 화냈으며 순조는 평소엔 조용하지만 자기가 고집부리고 싶을때는 주변 의견 씹어먹고 행하기 일쑤였다. 현종비 명성왕후랑 성격이 비슷한데 이쪽 성격이 유전된 모양. [43] 빠져죽겠다면서 웅덩이에 발만 잠갔다는 내용으로도 노망이 났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영조 본인은 웅덩이의 깊이를 인지하지 못 하는 것이다 [44] 하지만 이 때가 한겨울이었다. 아무리 발만 잠기는 깊이라 해도 동상이 걸리거나 고뿔에 걸릴 수도 있고, 노인이라 자칫하면 폐렴이나 동상 후유증 같은 걸로 사망할지도 모르니 신하들은 애가 탈 수 밖에 없었다. [45] 귀양 중에서도 가장 급이 높은 걸로, 가족이나 제자 등이 함께 갈수도 없고 집 주변에 가시나무를 심어 출입을 금하며 밥만 겨우 받아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46] 정조는 1752년(영조 28년)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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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비슷한 예시로 모로코의 경우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일부다처제를 하지만 정작 상류층에서도 아내가 여럿인 사람은 별로 없는데 이유는 현 모로코 국왕이 결혼을 하며 알라 앞에서 맹세하건데 짐은 그녀만을 아내로 받아들일 뿐이다. 라고 선언해서다. 이걸 확정짓는게 한 왕족의 인터뷰인데 그는 여러 아내를 둘 수 있는 부자임에도 그래도 폐하께서 한 아내만 바라보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여러 아내를 두는건 눈치없지 않냐고 말했다. [48] 사실 조선시대도 필요없이 중국부터가 이랬다. 조선은 그저 중국의 관습을 수입한 것 뿐이고. 다만 봉호로 부르는건 조선부터가 맞다. 중국식 그대로 하면 황제국 칭호가 되니까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이 그 격식에 맞게 어레인징 버전으로 사용한것 뿐이다. [49] 그리고 이 세 사람이 특별히 하대받을 정도로 악인도 아니다. 태조는 조금 갈리긴 해도 왕으로서의 업적이 이정도로 평가절하받을 정도는 아니고 정종은 그냥 태종 허수아비고 태종은 업적이 많은데다 아들을 잘 뒀다. 세종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설명 끝. [50] 비단 왕만이 아니라 그 시대 기준으로 생이름을 부른다는건 결례였다. 혹은 자신과 특정 누군가를 지칭할때 자신은 생이름으로 타인은 자나 호 같은 것으로 부르는건 명백히 자신을 낮추고 그 사람을 높여부르는 것이었다. [51] 예시로 대리기간 중에 갑자기 느닷없이 승지고 뭐고 꺼지고 나문하라고 말할 때가 있었는데 주변에서는 너도나도 쩔쩔매며 어쩔줄 몰랐고 왕이 된 후에 노론측에서 상소를 올렸을 때 마음에 안 드는 구절이 나오자 "결탁이니 교통이니 하는 소리는 무엄하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하자 노론은 찍소리도 못했다. 그리고 김일경의 상소가 올라오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노론측 인물들을 싸그리[52] 갈아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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