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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코트디부아르 내전 Crise politico-militaire en Côte d'Ivoi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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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디부아르 내전의 일부 | ||
기간 | ||
2002년 9월 19일 ~ 2007년 3월 4일 | ||
장소 | ||
[[코트디부아르|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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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사후의 정치적 혼란 로베르 게이의 선거 불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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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및 교전세력 | ||
코트디부아르 COJEP[1] |
FNCI[2] | 프랑스 |
지휘관 | ||
로랑 그바그보 | 기욤 소로 | 자크 시라크 |
결과 | ||
평화협정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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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코트디부아르에서 진행된 내전.2. 배경
1960년 식민지배가 종식된 후 코트디부아르는 펠릭스 우푸에부아니가 33년 동안 권좌에 군림했다. 이 시기의 코트디부아르는 "코트디부아르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이러한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프랑스에 의존적인 경제 구조가 한몫했고 결국 1978년부터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고 제2차 석유 파동으로 석유값이 급등하는 사태까지 겹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는 침체되어 1987년 파산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이런 가운데 1993년 우푸에부아니가 사망했고 당시 국민의회 의장이었던 앙리 코낭 베디에가 우푸에부아니의 뒤를 이었지만 베디에에게는 우푸에부아니에 비견되는 카리스마가 부족했고 정치적 혼란까지 벌어졌다. 한편 우푸에부아니는 재임 시절 주변국에서 들어온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는데 경기가 침체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 불만의 화살이 향했다. 베디에는 재임 시절 "코트디부아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외국인과 무슬림 탄압이 베디에의 재임 시절에 벌어졌다. 베디에가 강조한 정체성으로 인해 결국 베디에의 정적이었던 로랑 그바그보와 알라산 와타라는 1995년 대선을 보이콧했고 베디에는 재선에 성공했지만 요동치는 민심을 무마할 능력이 없었다.
1999년 로베르 게이의 쿠데타가 벌어져 베디에가 축출되었다. 2000년 실시된 대선에서 로베르 게이는 로랑 그바그보를 제외한 다른 후보들의 출마를 금지했으나 야당 후보들이 로랑 그바그보를 지지했기 때문에 로베르 게이는 대선에서 낙선했다. 로베르 게이는 대선 결과에 불복하여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 봉기가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