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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어: Guerre civile tchadienne아랍어: النزاع بين تشاد والسودان
차드에서 1965년부터 2010년까지 벌어졌던 내전. 기독교도인 남부 차드인과 무슬림인 북부 차드인의 내전으로 시작되었다가 아랍권 국가로 변모한 이후에는 종족 간의 패권 다툼으로 이어져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2. 배경
차드는 1900년부터 1960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차드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이질적인 두 지역을 하나로 묶어버렸고 이것이 독립 이후에도 지속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60년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차드의 여러 부족들이 단결하였지만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각 부족들이 패권 쟁탈을 위해 충돌하며 갈라졌고 갈등이 봉합되지 않고 있는 것이 차드의 정세이다.3. 독립 이후
차드는 1960년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하고 사라족 출신의 프랑수아 톰발바예가 차드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일당독재 국가를 구축했다. 프랑수아 톰발바예가 집권하면서 남부 기독교도 차드인이 북부 무슬림 차드인을 탄압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북부 무슬림 차드인을 중심으로 반정부 운동이 벌어지고 1966년에는 차드 민족해방전선(FROLINAT)이 창설되어 남부 기독교인 정권 축출을 목적으로 활동했고 곧 차드는 내전에 돌입한다. 차드 민족해방전선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로부터 지원을 받아 활동했고 차드 중앙정부는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차드 내전은 리비아와 프랑스가 개입하는 국제 분쟁으로 발전한다. 이렇게 내전이 계속되는 동안에 1975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톰발바예 정부가 전복되고 톰발바예는 총살당한다.펠릭스 말룸이 새롭게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차드의 혼란은 계속 이어졌고 남부 차드인들이 실각하면서 북부 차드인들이 정권을 잡아 차드는 아랍권 국가로 변모했다. 1979년 남부와 북부는 인접 5개국의 중재 하에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과도거국일치내각을 수립했으며 펠릭스 말룸은 망명한다.
4. 차드 민족해방전선 내에서의 내분과 리비아-차드 전쟁
1979년 구쿠니 웨데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차드 민족해방전선은 내분에 빠졌다. 차드 민족해방전선은 구쿠니 웨데이를 중심으로 하는 인민군(FAP)과 이센 아브레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군(FAN)으로 나뉘어 파벌 투쟁이 벌어졌고 투아레그인들이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로부터 지원을 받아 차드 내전은 삼파전 양상으로 돌입한다.결국 1980년 북부군과 인민군 사이의 내분으로 내전이 재발했고 카다피가 웨데이를 지원하면서 군대를 파견했다. 카다피는 1981년 차드의 합병을 선언했다가 아프리카 단결기구의 비난을 받고 차드에서 물러났으며, 1982년 이센 아브레가 구쿠니 웨데이를 축출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1983년 다시 리비아가 북부군을 지원하고 차드 중앙정부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다시 차드 내전은 국제 분쟁으로 발전한다. 게다가 1983년에는 리비아가 차드를 침공하여 리비아-차드 전쟁이 발생했고 리비아가 패배한다. 1984년이 되면 구쿠니 웨데이의 인민군 내부에서도 분열이 발생하여 내전이 더 심화된다. 한편 이센 아브레는 차드를 통치하면서 4만 명의 정치범을 고문하고 살해하여 차드 내의 여론이 점점 아브레에게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5. 이드리스 데비의 집권 이후
이센 아브레는 리비아와의 영토 문제를 놓고 이드리스 데비와 갈등을 겪었다. 이드리스 데비는 결국 아브레와 갈라서기로 결심하고 리비아의 지원을 받아 애국구원운동당을 창설하여 수도를 장악하고 권력을 잡았다. 1990년에는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드리스 데비는 민주화 조치를 단행하고 1998년에 남부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차드 내전에 끝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다음 해에 다시 차드 민주주의 정의 운동(MDJT) 반군이 부상했고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이드리스 데비는 부정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낀 차드 국민들이 점점 차드 반군에 합류하기 시작했다.2003년 수단의 난민들이 차드로 흘러들고 국경분쟁이 빈발하자, 수단 정부에서 차드의 반군을 지원하고 차드 정부는 이에 맞서 수단의 반군을 지원하였다. 2008년에는 차드 반군이 대통령궁을 장악하여 이드리스 데비가 고립되기도 했다. 그나마 2010년에는 휴전협정을 맺고 내전이 일시적으로 멈췄지만 후유증이 지속되었다. 이드리스 데비는 독재정권을 유지하다가 2021년 6연임 확정 직후 군부대 시찰 도중 반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사후 이드리스의 아들인 마하마트 데비 이트노가 과도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18개월 동안 군정을 실시한 뒤 임시 대통령으로 재임했다가 대선을 통해 정식으로 대통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