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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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전쟁(말비나스 전쟁) Falklands War Guerra de las Malvin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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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기 영토분쟁의 일부 | ||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 1982년 4월 2일 ~ 6월 14일 | |
장소 |
포클랜드 제도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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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영국 (공세)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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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수세)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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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
지휘관 마거릿 대처(통수권자) 테렌스 르윈(국방참모총장) 헨리 리치[1](제1해군경) 존 필드하우스( 함대 총사령관) 샌디 우드워드(317.8기동전대 사령관) 제레미 무어(상륙군 지휘관) |
지휘관 레오폴도 갈티에리(통수권자) 호르헤 아나야(해군참모총장) 바실리오 라미 도소(공군참모총장) 후안 롬바르도(남대서양 전구 사령관) 에르네스토 오라시오 크레스포(공군 제4여단장) |
전력 |
총병력: 29,700명[2] 함정: 111척 항공기 : 117기 |
총병력: 14,590명[3] 함정: 38척 항공기: 216기 |
피해규모 |
전사자: 255명 부상자: 775명 포로: 115명 구축함 2척 격침 호위함 2척 격침 상륙함 1척 격침 상륙정 1척 격침 컨테이너선 1척 격침 헬리콥터 24기 손실 전투기 10기 손실 민간인 3명 사망 |
전사자: 649명 부상자: 1,657명 포로: 11,313명 순양함 1척 격침 잠수함 1척 파손 화물선 4척 파손 경비정 2척 파손 헬리콥터 25기 손실 전투기 35기 손실 폭격기 2기 손실 수송기 2기 손실 |
결과 | 영국의 승리 | |
영향 |
영국의
포클랜드 제도 사수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 붕괴의 단초 |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과 전운 고조3.2. 아르헨티나의 선제 공격, 그리고 침공3.3. 영국의 반응3.4.
제국의 역습
4. 외전5. 결과6. 포클랜드 전쟁 당시 프랑스 관련 루머와 반박7. 기타8. 명칭 문제9. 대중매체에서10. 둘러보기3.4.1. 영국군 편제
3.5. 양국의 전략 차이3.6. 패러켓 작전3.7. 블랙 벅 작전3.8.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의 아르헨티나 순양함 격침3.9. 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3.10. 폭풍전야3.11. 산 카를로스 만 상륙전3.12. 엑조세의 마지막 발악3.13. 영국의 승리[clearfix]
1. 개요
포클랜드 전쟁[4]은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21세기 현대까지도 미사일 시대로 대표되는 현대 해전, 공중전의 교과서적 사례로 평가된다. 특히 정규군 해군 간의 대규모 해전은 포클랜드 전쟁 이후로는 없다.[5] 더불어 4차 중동전쟁과 함께 비핵보유국이 핵보유국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한 전쟁이기도 하다.
2. 배경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이 실효지배하고 있으나, 불분명한 영유권 역사로 인해 아르헨티나가 1950년대부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 일대를 둘러싸고 1960, 70년대까지 여러 차례의 영유권 협상이 있었으나 영국 측의 거부와 지역 주민들의 아르헨티나 귀속반대 여론으로 인해 모두 결렬되었다.1976년 쿠데타로 세워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오일 쇼크로 인한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자본과 외채를 대규모로 도입했다.[6] 하지만 1980년 금리 인상으로 이자율이 급상승하고, 기업 채무를 국가에서 갚도록 하는 정책을 펴면서 재정난은 극심해졌다. 이에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재정지출을 대폭 줄이는 정책을 도입하였으나, 외채는 더더욱 불어났고 사회 복지 정책의 실종으로 빈부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심각하게 악화된 경제 상황 때문에 국민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1978년 월드컵을 개최하고 해당 대회에서 온갖 무리수를 두어 자국 팀을 우승시킨 것 등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걸로도 불만을 잠재울 수 없어 당시 레오폴도 갈티에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등의 군부에서 내부적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돌려 단결을 꾀하자는 안이 대두되었고, 그 대상으로 아르헨티나와 역사적으로 라이벌/앙숙인 브라질, 칠레 등 주변 남미국가들이 거론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인근 포클랜드 제도의 영국군이 되었다. 물론 영국은 세계에서 꼽히는 강대국이지만, 아르헨티나는 여러 계산상 해 볼 만한 상대로 생각했다.
-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 앞바다에 있었으므로 아르헨티나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남극에도 인접해 영국 본토는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러일전쟁이나 미국 독립전쟁도 그렇듯, 거리가 멀면 국력 차이가 상쇄된 사례가 많다.
- 포클랜드 제도를 지키는 군대와 주민은 겨우 주민 1500명과 60만 마리의 양떼가 사는 곳에 영국 해병대 50명으로 소수여서 한꺼번에 기습하면 손쉽게 제압이 가능했다. 실제 전쟁에서도 기존 경비 병력은 쉽게 제압했다.
- 아르헨티나군도 전쟁 당시 나름대로 군 현대화를 거쳐 프랑스에서 수입한 쉬페르 에탕다르와 엑조세 대함미사일, 롤랑 대공 미사일, 미국산 CH-47 치누크, MD500, AAV-7A1, 심지어 영국에서 수출한 42형 구축함, 링스 헬기, L1A1 SLR 등을 장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력에 대해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외에도 독일제 209급 잠수함, 소련제 스트렐라 지대공 미사일 등 전 세계에서 무기를 구입해, 마치 걸프전 때의 이라크군처럼 전 세계 무기의 박람회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당장 영국과 사용하는 장비가 일치하는 것이 엄청 많았다.
- 영국이 강대국이라지만 1970년대쯤 되면 미국과 소련의 양강 구도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한물 간 나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제2차 중동전쟁에서는 대놓고 이집트와 미국, 구 소련 양강으로부터 굴욕을 당해 더 이상 옛날의 대영제국이 아니라는 인증을 전세계에 했었다.
- 영국 해군의 마지막 정규 항공모함인 오데이셔스급 아크로열이 퇴역하여 영국이 유사시 장거리 항공작전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점도 당시 영국 해군의 약점이었다. 반면 아르헨티나 해군은 영국제 항공모함인 콜로서스급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공작전이 제한적으로나마 가능했다는 점도 아르헨티나 군의 우세 예상에 한 몫을 했다.
- 무엇보다 영국이 몇 년 전에 IMF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경제력이 나빠진 점도 영국의 약세를 점쳐볼만한 점이었다.
여러 개전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작전 개시 전 포클랜드 제도는 본국으로 통하는 항공편도 없었고, 의료 서비스조차 본국이 아닌 아르헨티나에 의존해야 했다.[7]
3. 전개
3.1.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과 전운 고조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포클랜드의 영유권 문제를 주제로 정기적인 회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82년 2월 27일의 회담을 마지막으로 3월 1일에 아르헨티나는 영국에 '영유권 문제 해결 의사가 없다면 교섭을 중단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향후 모든 수단을 취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은 그 '수단'이 포클랜드 무력 점령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1982년 3월 19일 아르헨티나의 고철 수집상 콘스탄티노 다비도프(Constantino Davidoff)는 단순한 고철 수집을 명분으로 포클랜드 제도로 들어왔다. 문제는 이들이 마땅한 해상편이 없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해군 수송함에 타고 아르헨티나 국기를 올린 채 당시 포클랜드 제도의 일부였던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했다.[8] 이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방치된 포경 공장의 해체권을 얻었다고 주장했지만, 입국 절차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불법 상륙으로 취급되었다. 거기에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상황에서 상륙한 것을 영국의 남극관측대원이 발견하고 이에 항의하고 본국으로 알리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9] 국방TV의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좀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고철상들에게 항의하러 간 기지 대원들은 의외로 순순히 사과를 받고 술도 얻어먹고 돌아왔는데 섬이라는 특성상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고 '감히 우리 땅에 깃발을 꽂아?'라고 빡친 강경한 주민들이 아르헨티나의 민간 시설을 공격하고 건물벽에다 " 대영제국 만세", "까불면 코피 터질 줄 알아라!" 같은 낙서를 하고 떠났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은 각각 수십여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이들이 대치한 것이 최초의 충돌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해군참모총장이던 해군 중장 호르헤 이사악 아나야(Jorge Isaac Anaya, 1926 ~ 2008) 제독을 중심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개전 시점을 8~9월 정도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빠른 전개에 당황했다. 8~9월로 준비하던 이유는 아르헨티나는 엑조세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쉬페르 에탕다르를 비롯한 주력 무기의 도입이 완료되는데 비해 영국은 퇴역시킬 예정이던 군함들이 실제로 폐기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남반구는 겨울이라서 대형함정이 퇴역한 영국 입장에서는 브리튼 섬에서 겨울 바람으로 거칠어진 남대서양을 넘어오는 데 애로사항이 있어 영국이 반격하는 데 훨씬 불리해질 것이라는 나름대로 전략적인 계산도 있었다.[10] 하지만 3~4월에 경제난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다급해진 군부 정권이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침공을 서둘렀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관련 다큐(영어)
3.2. 아르헨티나의 선제 공격, 그리고 침공
4월 2일에 아르헨티나 해병대 및 특수부대 소속인 지상군 4,000명이 해군의 지원으로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침공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장의 영국군은 고작 영국 해병대 코만도 100여명으로 미미한 충돌이 있었으나 차이가 워낙 커서 이내 항복했다. 어떤 부대는 총독의 항복 명령에도 불응하고 다른 곳에서 전투를 이어나가다가 제압당했다고도 한다.아르헨티나의 의해 포로로 잡힌 영국 해병들 |
포클랜드의 총독 렉스 헌트 경(Sir Rex Hunt, 1926 ~ 2012) 은 예복을 차려입고 영국군에게는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아르헨티나 사령관에게는 영국 영토를 무단으로 침입하고 있으니 즉각 퇴거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르헨티나 군대는 헌트 경을 체포하여 우루과이로 추방했다. 헌트 경은 포클랜드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총독으로 부임했다.
포클랜드 제도에 국기를 계양하는 아르헨티나군들 |
3.3. 영국의 반응
암울한 분위기 속에 열린 회의에서 일부 각료들은 아르헨티나와의 ‘협상’을 원했다. 심지어 국방장관도 전쟁을 원치 않았고, 사직하겠다고 했다. 또한 영국의 가장 강력한 맹방인 미국 역시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남미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여러 독재 정권들을 보호해주고 있었는데, 당시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 역시 그런 정권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즉 미국 입장에선 자신의 동맹과 또 다른 동맹이 싸우게 된 꼴이었다. 심지어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대처 총리에게 직접 전화를 해 전쟁을 만류하기까지 했다.[11] 그때 대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단호히 거절한다.게다가 영국 해군참모총장 헨리 리치 제독도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왜 그러하냐”는 질문에, 리치는 “우리가 질질 끌며 조심조심하다 보면, 몇 달 내에 우리는 우리 말이 안 먹히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거기다 당시 영국 총리는 철의 여인, 보수당의 매파라 불릴 만큼 강경한 성향을 가진 마거릿 대처였다. 대처는 더 이상 자국의 영토가 잠식되고 대외 영향력이 침해당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면서 즉시 포클랜드를 탈환할 것을 군에 명령했다. 여기에 아르헨티나의 일방적인 침공으로 자국 군인들이 아르헨티나군에게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소식에 영국 국민들은 분노했고, 결국 영국 전역이 아르헨티나를 응징하자고 부르짖는 상황까지 왔다. 당시 영국의 경제난과 내적 혼란이라는 위기 상황에 영토 손실까지 더해지면 국민 정서와 국가 안정성은 안드로메다로 갈 것이 뻔했다. 게다가 독립한 식민지들과는 달리, 남아있는 영토들은 홍콩이나 차고스 제도 등 세계 곳곳에 위치한 요충지들이었다.
그리고 포클랜드 제도와 사우스 조지아 섬 역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섬이다. 남극 탐사는 보통 칠레를 통해서 남극으로 접근하는데, 이 두 섬은 세인트헬레나 어센션 트리스탄다쿠냐와 연계하여, 남미가 협조하지 않아도 남극 탐사를 가능하게 해준다.[13]
또한 영국은 이 섬들 덕분에 칠레나 아르헨티나처럼 드레이크 해협을 오가는 선박들을 통제할 수 있다. 이 해협은 파나마 운하가 차단될 경우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대체 항로의 가치를 지녔다. 실제로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중국 산동 반도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 동양함대가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태평양을 횡단하여 칠레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하자 영국은 순양전함 2척을 포클랜드로 급파했고 결국 포클랜드 해전에서 독일 함대를 격파했다.
여기에 1970년대 이후로 개발하고 있는 포클랜드 인근의 석유 자원은 덤이다.
영국은 섬 자체는 별 볼 일 없지만 상징성과 해역에서 가지는 위치가 남다른 곳을 여럿 확보해놨으며[14], 포클랜드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포클랜드 침공을 그대로 놔두면, 각 지역에 가시처럼 알박아놓은 섬들을 상대 국가들이 모조리 무력으로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선례가 될 것이 명백했으므로 영국 입장에서는 강경대응 할 이유가 충분했다.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영국 측에서 협상을 청하여 자신에게 설설 길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마거릿 대처의 선택은 전쟁뿐이었다.
3.4. 제국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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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제국의 역습 - 포클랜드 사태 HMS 허미즈가 남쪽으로 향하다 (뉴스위크 1982년 4월 19일자 표지) |
▲ 무어 장군(왼쪽)과 우드워드 제독(오른쪽) |
반면 영국 해군이 1982년 시점에서 영국이 함대 상공에 띄울 수 있는 전투기는 경항공모함 두 척에서 발진하는 시해리어 수직이착륙 전투기 20여대 뿐이었다. 수상함과 잠수함 전력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했음에도 아르헨티나군의 공습에서 상륙부대를 실은 수송선단을 지킬 수 있을지는 결코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F-4 팬텀 II만 1개 대대에 블랙번 버캐니어 공격기, 가넷 조기경보기[18]까지 운용하던 중형 항모 아크 로열만 있었어도 아르헨티나 공군의 위협 따위는 가볍게 물리칠 수 있었겠지만, 애초에 1979년 아크 로열 퇴역과 함께 함재기 대다수가 일선에서 물러나[19] 아르헨티나가 영국을 우습게 보기 시작한 것이 전쟁의 원인이었으니 쓸모 없는 가정이었다. 이때 영국 정부가 느낀 위기감이 어느 정도였냐면, 대처 총리는 개전을 결정하면서 수 척의 호위함정은 물론 경항모 한 척의 손실까지도 각오했다. 기동부대 지휘관이었던 우드워드 제독은 후일 자서전에서 인빈시블을 잃는 것은 감당할 수 있지만, 허미즈의 상실은 패전으로 직결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결과를 모두 아는 현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개전 당시 영국은 상당한 불안요소를 안고 있었고, 아르헨티나도 나름의 승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1982년 3월 지브롤터 앞바다에서 선진대를 형성하여 포클랜드 남쪽으로 가는 군함들 |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령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일대가 요새화돼 재탈환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므로 단기전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기동함대를 투입한 것이었다. 아울러 약 한 달 정도 소요되는 항해 기간 동안 외교적 해결을 시도할 경우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도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대처 총리는 영국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외교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먼저 아르헨티나의 침공 다음날에 UN 안보리에서 아르헨티나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20], 유럽 국가들의 대(對) 아르헨티나 수출 금지 조치를 유도했다.
대처 총리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국의 동맹이었던 미국의 지지까지 얻어냈다. 아르헨티나가 친미적 성향이긴 했지만 미국 입장에서 아르헨티나와 영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이빨이 빠진 사자라 하더라도 당연히 영국을 택했다.
아르헨티나 측도 4월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한 직후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사회주의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것처럼, 만일 지지를 잃고 사회주의 정권이 재집권하게 되면 이는 남미 전체의 공산화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논리로 지지를 이끌어내려했고 미국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남미의 반공 쿠데타를 묵인 및 지지했던 터라 남미 군부 정권들과 미국은 꽤나 돈독했다.[21] 포클랜드 전쟁 기간만 제외하고다.
당초 미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모두와 동맹이었고 갈등이 전쟁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더 메이그스 헤이그 2세(Alexander Meigs Haig, Jr, 1924 ~ 2010) 당시 국무장관이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런던을 오가며 중재했다. 미국은 '아르헨티나군이 철수한 후, 포클랜드 현지 주민들의 주민 투표로 귀속 국가를 결정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아르헨티나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불만을 돌리려는 침공으로 기껏 병력을 동원해서 '실지를 회복'했는데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철수하면 국민들이 외압에 굴복하는 것으로 여길까 우려했다. 또한 포클랜드 주민 대다수가 영국계로서 아르헨티나 귀속을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아르헨티나 입장에서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제안이기도 했다. 결국 4월 말 미국도 영국을 공개 지지하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를 포함한 제재안을 발표했다. 이로써 영국은 국제 사회, 특히 동맹국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아르헨티나가 저지른 행동이 빼도 박도 못하는 명백한 침략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제2차 중동전쟁 같이 영국에게도 구린 구석이 있었다면 모든 국가가 영국에 동조하지는 않았을 텐데, 원래 남미계 원주민들이 사는 섬도 아니었고[22],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 섬을 대뜸 무단으로 점령하니 영국이 국제 사회의 지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북대서양의 영국에서 남대서양의 포클랜드까지의 원정은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4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긁어모을 수 있는 선박과 항공기는 모두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호화 여객선 RMS 퀸 엘리자베스 2까지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이후 오랜만에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마거릿 대처와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각자의 정치생명을 건 전쟁을 시작했다.
3.4.1. 영국군 편제
- 제3코만도여단 상륙 이전
- 제5보병여단 상륙 이후
=====# 영국 지상군 #=====
-
제3코만도여단
3 Commando Brigade -
왕립해병대 제40코만도대대
40 Commando Royal Marines -
왕립해병대 제42코만도대대
42 Commando Royal Marines -
왕립해병대 제45코만도대대
45 Commando Royal Marines -
왕립포병대 제29코만도연대
45 Commando Royal Artillery -
낙하산연대 제3대대
3 Battalion, Parachute Regiment -
왕립해병대 코만도군수연대
Commando Logistics Regiment Royal Marines -
더 블루스 앤 로열스 (왕립기마근위대·제1용기병단)
The Blues and Royals (Royal Horse Guards and 1st Dragoons) -
B중대
B Squadron -
1수색소대
1 Reconnaissance Troop -
2수색소대
2 Reconnaissance Troop -
제12방공연대 T포대
T Battery, 12 Air Defense Regiment -
방공소대
Air Defense Troops -
강습중대
Raiding Squadron -
SBS
Special Boat Service -
2분대
2 Section -
3분대
3 Section -
6분대
6 Section -
3개의 전방항공통제반
Three Forward Air Control Parties -
제30정보통신연대 후방교선분견대
Rear Link Detachment, 30 Signal Regiment -
산악·북극전훈련간부단
Mountain Leader Training Cadre -
왕립수송단 제17항구대대 제대
Elements of 17 Port Regiment Royal Corps of Transport -
3개의 수솔지원단
Three Surgical Support Teams -
왕립공병대 제1우편택배연대 우편택배통신대분견대
Postal Courier Communications Unit Detachment, 1 Postal Courier Regiment, Royal Engineers -
왕립군수단제47항공파견중대 분견대
Detachment 47 Air Despatch Squadron Royal Logistic Corps -
왕립공병대 제59독립코만도중대
59 Independent Commando Squadron Royal Engineers -
왕립공병대 제33공병대대 제49
폭발물처리중대 분견대
Detachment 49 EOD Squadron, 33 Engineer Regiment Royal Engineers -
Y통신분견대
Y Troop Detachment Communications -
코만도부대 군악대
Commando Forces Band -
제5보병여단
5 Infantry Brigade -
스코츠 가드 제2대대
2nd Battalion, Scots Guards -
웰시 가드 제1대대
1st Battalion, Welsh Guards -
제7대 에든버러 공작의 개인 구르카소총병단 제1대대
1st Battalion, 7th Duke of Edinburgh's Own Gurkha Rifles\ -
왕립포병대 제97(로슨의 중대)포대
97 (Lawson's Company) Battery Royal Artillery -
왕립포병대 제4야포대대
4 Field Regiment Royal Artillery -
왕립공병대 제39공병대대
36 Engineer Regiment Royal Engineers -
왕립공병대 제9낙하산중대
9 Parachute Squadron Royal Engineers -
왕립공병대 제11야전공병중대
11 Field Squadron RE -
왕립공병대 제61야전지원중대
61 Field Support Squadron RE -
왕립공병대 특무단
Specialist Team RE -
우편분대
Postal Section -
육군항공단 제656비행대대
656 Squadron Army Air Corps -
왕립전자·기계공병대 제10야전작업장
10 Field Workshop Royal Electrical and Mechanical Engineers -
제81병기중대
81 Ordnance Company -
전방항공통제반
Forward Air Control Party -
육군급양단
Army Catering Corps -
왕립수송단 제407소대
407 Troop, Royal Corps of Transport -
왕립공군연대 제63비행대대
63 Squadron RAF Regiment
-
제317.0기동전대 / Task Group 317.0
상륙함: HMS 피어리스, HMS 인트레피드
-
제317.8기동전대 / Task Group 317.8
항공모함: HMS 허미즈F[34], HMS 인빈시블[35]
구축함: HMS 브리스톨, HMS 셰필드, HMS 코번트리, HMS 글래스고, HMS 카디프, HMS 엑세터, HMS 글래모건, HMS 앤트림
호위함: HMS 브릴리언트, HMS 브로드소드, HMS 액티브, HMS 얼래크러티, HMS 앤틸로프, HMS 아덴트, HMS 엠버스케이드, HMS 어벤저, HMS 애로우, HMS 안드로메다, HMS 아고넛, HMS 미네르바, HMS 페넬로페, HMS 야머스, HMS 플리머스
얼음 초계함: HMS 인듀어런스
초계함: HMS 리즈 캐슬, HMS 덤바턴 캐슬
조사함: HMS 헤클라, HMS 해럴드, HMS 히드라
제11기뢰대책전대 / 11th Mine Countermeasures Squadron[36]: HMS 코델라, HMS 파넬라, HMS 주넬라, HMS 노셀라, HMS 픽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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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4.3기동전대 / Task Group 324.3
잠수함: HMS 컨커러, HMS 커레이저스, HMS 밸리언트, HMS 오닉스, HMS 스파르탄, HMS 스플렌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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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 함대 보조 / Royal Fleet Auxiliary
급유선: RFA 올나, RFA 올메나, RFA 타이드스프링, RFA 타이드풀, RFA 블루 로버, RFA 애플리프, RFA 브램블리프, RFA 베이리프, RFA 플럼리프, RFA 페어리프
상륙함: RFA 서 베디비어, RFA 서 갤러헤드, RFA 서 게라인트, RFA 서 랜슬롯, RFA 서 퍼시벌, RFA 서 트리스트람
보급선: RFA 리젠트, RFA 리소스, RFA 포트 오스틴, RFA 포트 그레인지, RFA 스트롬니스
헬리콥터 지원선: RFA 엔가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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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 해상 보조 서비스 / Royal Maritime Auxiliary Service
예인선: RMAS 타이푼, RMAS 구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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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징발 선박 /
Ships Taken Up From Trade
여객선: SS 캔버라, RMS 퀸 엘리자베스 2, SS 우간다
카 페리: MS 엘크, MS 발틱 페리, MS 유로픽 페리, MS 노르딕 페리, MV 노르랜드, TEV 랑가티라, MV 세인트 에드먼드, MS 토르 칼레도니아
컨테이너선: MV 애스트로노머, SS 애틀란틱 컨베이어, SS 애틀란틱 커즈웨이, SS 컨텐더 베잔트, MV 미르미돈
화물선: MV 아벨로나 스타, MV 기스트포트, MV 라어테스, MV 라카온, MV 색소니아, MV 스트라테위, RMS 세인트 헬레나
유조선: MV 알베가, MV 앙코 차저, MV 발더 런던, MV 브리티시 에이번, MV 브리티시 다트, MV 브리티시 에스크, MV 브리티시 타마르, MV 브리티시 테이, MV 브리티시 테스트, MV 브리티시 트렌트, MV 브리티시 와이, MV 에버나, MV 포트 토론토, MV G.A. 워커, MV 스코티쉬 이글
지원선: MV 브리티시 엔터프라이즈 III, CS 아이리스, MT 아이리시맨, MT 샐비지맨, MV 스테나 인스펙트, MV 스테나 씨스프레드, MV 윔피 시호스, MT 요크셔맨
=====# 영국 공군 #=====
- 제1 (전투기) 비행대대 / No. 1 (Fighter) Squadron: 해리어 GR.3 10기
- 제18비행대대 / No. 18 Squadron: 치누크 HC.1 5기
- 제29비행대대 / No. 29 Squadron: 팬텀 FGR.2 3기
- 제39비행대대 / No. 39 Squadron: 캔버라 PR.9 2기
- 제42비행대대 / No. 42 Squadron: 님로드 MR.2 3기
- 제44비행대대 / No. 44 Squadron: 벌컨 B.2 2기
- 제47비행대대 / No. 47 Squadron: 허큘리스 C.1 3기
- 제50비행대대 / No. 50 Squadron: 벌컨 B.2 1기
- 제51비행대대 / No. 51 Squadron: 님로드 R.1 3기
- 제55비행대대 / No. 55 Squadron: 빅터 K.2 10기
- 제57비행대대 / No. 57 Squadron: 빅터 K.2 10기
- 제70비행대대 / No. 70 Squadron: 허큘리스 C.1 3기
- 제101비행대대 / No. 101 Squadron: 벌컨 B.2 1기
- 제120비행대대 / No. 120 Squadron: 님로드 MR.2 3기
- 제201비행대대 / No. 201 Squadron: 님로드 MR.2 3기
- 제202비행대대 / No. 202 Squadron: 시킹 HAR.3 1기
- 제206비행대대 / No. 206 Squadron: 님로드 MR.2 4기
- 제10비행대대 / No. 10 Squadron: VC10 C.1 14기
3.5. 양국의 전략 차이
▲ 영국 왕립해군의 기동함대 기함 HMS 허미즈가 포클랜드로 출격할 당시를 그린 그림 |
반면 영국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전쟁을 진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가렛 대처 총리가 직접 당시 칠레의 독재자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을 찾아가서 영국의 상황과 전쟁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피노체트를 설득했다. 그리고 피노체트로부터 칠레 영공에 영국의 항공기를 배치해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아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대처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을 돌며 영국은 가만히 있었는데 아르헨티나가 기습 침공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설득하고 다녔다. 그 결과 주요 국가들은 영국 편을 들거나 중립을 지키고, 최소한 아르헨티나 편을 들지는 않게 되었다.
3.6. 패러켓 작전
4월 말에 접어들자 영국군이 드디어 반격을 개시한다. "패러켓 작전(Operation Paraquet)"으로 명명된 첫번째 작전의 목표는 사우스조지아 섬 탈환이었다. 군사적 의미는 크지 않지만 상징적 의미에서 결정된 임무였다. 본격적인 작전 개시 전 SAS를 파견해 섬에 주둔한 아르헨티나군 규모를 정찰하는 계획이 입안됐는데, 그 내용이라는 게 해군 대잠용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SAS 대원들을 포투나 빙하에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입안된 이유는 "아르헨티나 애들은 우리가 빙하를 가로질러서 쳐들어올 줄은 꿈에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언 스탠리 소령을 비롯한 해군 조종사들은 작전 내용을 전달받고 어이가 없었는지 "차라리 폴라리스 미사일을 날리는 게 더 빠를걸요"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주변에서 죄다 말리는데도 고집을 부린 SAS 대원들은 4월 21일 기어코 빙하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끔찍한 날씨 앞에 장사 없었고, 결국 22일 임무를 포기하고 귀환을 요청했다.▲ 추락한 웨식스 5 헬리콥터 |
한편 이 망신스런 소식을 마거릿 대처 총리에게 보고한 영국 국방참모총장 테렌스 르윈(Terence Lewin, 1920 ~ 1999) 제독은 "전쟁에서는 일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덧붙였고, 대처 총리는 "일이 그렇게 자주 잘못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는데요"라고 시니컬하게 답하며 한 편의 만담을 찍었다.
▲ 사우스 조지아의 관측소를 지키는 왕립해병대 |
모든 정보를 취합한 끝에 산타페가 아르헨티나군이 주둔중인 그리트비켄이나 리스 둘 중 하나로 입항할 수 있다고 판단한 영국 해군은 리스는 SAS 관측소에 맡기고 24일부터 그리트비켄을 헬기로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25일 아침, 마침내 웨식스 헬기의 레이더로 부상한 잠수함을 포착한 이언 스탠리 소령은 육안으로 산타페를 확인하자마자 폭뢰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밸러스트 탱크가 모두 파괴된 산타페는 잠항능력을 상실했다.
▲ 그리트비겐 항구에서 좌초된 산타페를 조사중인 해병대원 |
▲ 영국 해군에게 보호 받고 있는 산테페 승조원 포로들 |
▲ 탈환 후 유니언 잭을 게양하는 영국군들 |
3.7. 블랙 벅 작전
본격적인 전쟁은 5월 1일 시작됐다. 이날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의 비행장을 쓰지 못하도록 활주로에 폭격을 가하는 "블랙 벅 작전(Operation Black Buck)"을 시행했다. 1단계로 아브로 벌컨 폭격기가, 2단계로 함재기 시해리어가 동원되고, 3단계로 함포사격이 대미를 장식했다.특기할 만한 일은 1단계에서 대서양 어센션 섬에서 발진한 벌컨 폭격기가 몇 차례나 공중 급유를 받아가며 왕복 7천km를 날아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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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걸프 전쟁에서 미군 B-52가 미국 본토 - 이라크 - 영국 주둔 미 공군 기지를 날아가기 전까지는 세계 기록이었다.[37]
구체적인 목표는 활주로를 일시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활주로 중앙을 폭격하는 것이었다.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아예 폭격 코스를 활주로와 비스듬한 방향으로 잡았으며 교차점에서 21발 중 적어도 1발은 확실하게 명중하도록 계획하였다. 투하한 폭탄들은 대부분 빗나가거나 활주로 가장자리에 떨어졌지만 1발이 명중했다. 그린 구스 비행장과는 달리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경미한 피해를 입었지만, 대신 블랙벅 작전은 영국군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아르헨티나군의 심리를 강타했다. 벌컨 폭격기의 장거리 폭격에 놀란 아르헨티나군이 벌컨의 다음 목표는 본토의 전략목표가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20대뿐인 미라주 III 전투기들을 본토 방공 임무로 전환시킨 것이다. 물론 영국군은 아르헨티나 본토를 노리지 않았고, 아르헨티나 공군 전폭기들은 전투기의 엄호 없이 영국 함대를 공습해야 하는 아주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아르헨티나측 자료가 충분히 반영되기 전인 1980-90년대의 시각이 블랙벅 작전으로 아르헨티나 전투기들이 포트 스탠리 비행장 대신 본토에서 출격해야 했기 때문에 전투 공역에 진입해도 작전 가능 시간이 5분 이내였으며 그나마 애프터버너를 점화하여 속도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는 것이[38] 통설이었다. 그러나 5월 1일의 블랙벅 작전 이후 미라주 IIIEA 전투기들은 한 달 넘게 포클랜드 공역에서 유의미한 활동을 벌이지 않았으며, 전투기의 상공엄호 없이 영국 기동부대 상공으로 뛰어든 아르헨티나 공군기들은 모두 설계가 공대공 전투에 적합하지도 않고 기관포 외의 공대공 무장을 갖추지도 않은 대거와 스카이호크, 푸카라 전폭기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폭격을 가하여 영국 함선을 격침시킨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은 그야말로 능력자들이다. FAA의 지휘관은 베테랑 조종사 출신의 장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5월 1일에는 아르헨티나 공군과 해군 비행단도 상당한 규모의 전폭기를 발진시켜 영국 함정을 폭격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SP-2H 넵튠이 날아다녔기 때문에 그나마 영국 해군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고도[39]에서 실시한 이 날 공격은 영국 함대의 방공망에 걸려 피해가 막심했다. 그 후로 아르헨티나 공군은 저공 침투[40] 전술을 기본으로 삼는데, 이 때문에 신관 안전장치가 풀릴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여 불발탄이 대량발생, 명중탄 숫자에 비해 적은 피해밖에 주지 못했다. 스네이크 아이 같은 저고도 투하용 고항력 킷이 있었다면 불발탄 문제를 해소할 수 있었겠지만, 아르헨티나 공군은 스네이크 아이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스네이크 아이를 보유중이던 아르헨티나 해군항공대는 작전 가능한 스카이호크가 고작 8대로 너무 숫자가 적었고. 그래도 안 터진다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보통 500~1,000파운드(227~454kg) 짜리 쇳덩이들이 400kts(740km/h)의 속도로 날아드는 게 바로 이 불발탄들이다. 폭발만큼은 아니라도 명중했다 하면 상당한 피해를 주며 호위함 같은 경우는 침몰 직전까지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날에는 아르헨티나 전폭기들을 엄호하는 미라주 IIIEA 전투기와 영국 해군 시해리어 전투기 사이의 공중전 또한 벌어졌다. 첫번째로 도착한 양측 전투기 분대 사이에서는 미라주 IIIEA 전투기가 고고도에서, 시해리어 전투기가 저고도에서 머무르며 대치하는 상황이 양측 분대가 연료 사정상 교대할 때까지 이어졌다. 두 번째 분대 간에는 보다 적극적인 교전이 이루어져 미라주 분대가 강하하며 붐앤줌 공격을 시도했다. 시해리어 분대는 급기동으로 회피했지만 이탈하는 미라주에 대해 공격위치를 잡는 데에는 실패했고, 미라주 역시 재공격을 실시하지 않아 무승부로 끝났다. 세 번째 교전에서는 승패가 분명히 갈렸는데, 마찬가지로 붐앤줌 공격 시도 후 잠시 시저스 기동을 벌이며 선회하다 포기하고 이탈하는 미라주의 후미로 시해리어가 따라붙으며 AIM-9L 미사일을 발사했고 두 발이 모두 명중했다. 그 결과 미라주 IIIEA 한 대는 그대로 해면에 추락, 한 대는 대파당해 포트 스탠리 비행장에 비상착륙을 시도하다 영국군의 공습과 함포사격에 잔뜩 신경이 곤두선 아르헨티나군 대공포 사수들에게 적기로 오인당해 격추당한다.
5월 1일 하루 동안 아르헨티나 공군은 56소티를 동원해 영국 기동부대에 공습을 감행했으나, 지근탄 몇 발과 기관포탄을 명중시킨 것을 제외하면 전과는 미미했다. 영국 호위함들이 함포사격을 위해 해안선에 너무 접근했다가 아르헨티나 공군기의 공격을 받고 위축되어 주간 함포사격을 꺼리게 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반면 아르헨티나군은 미라주 III 전투기 2대, 대거 전폭기 1대, 캔버라 폭격기 1대, 푸카라 경공격기 1대가 피격, 도합 5대를 잃었다. 본격적인 항공전 첫 날의 결과는 영국의 판정승이었다.
3.8.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의 아르헨티나 순양함 격침
5월 2일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초로 극적인 해상 교전상황이 발생하였다. 영국 해군의 처칠급 공격원잠 HMS 컨커러(Conqueror)가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General Belgrano)를 Mk 8 어뢰로 격침시킨 것이다.영국 해군의 HMS 컨커러는 처칠급 원자력 잠수함의 3번함으로 1969년 진수되고 1971년 취역하였다.
▲ 영국 해군의 처칠급 공격원잠 컨커러(HMS Conqueror) |
▲ 아르헨티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ARA General Belgrano) |
그러나 영국 317.8기동전대 사령관 우드워드 제독은 여전히 벨그라노 전단의 존재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겨우 1년 전 훈련에서 본인이 자신의 기함이었던 카운티급 구축함 HMS 글래모건을 가지고 미 해군 항공모함 USS 코럴 시를 상대로 해냈던 것처럼 벨그라노 전단이 언제든 방향을 바꿔 기동부대의 감시망을 뚫고 항모 지근거리에서 출현, 기습공격을 가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GMT 5월 2일 0710시경 우드워드 제독은 영국 본토의 잠수함사령부가 직접 포클랜드 해역의 공격원잠을 통제하는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기함 허미즈에서 다음과 같은 전문을 통신위성에 업로드한다.
"발신 317.8기동전대 사령관, 수신 컨커러, 긴급 – 벨그라노 전단을 공격하라."
(From CTG 317.8, to Conqueror, text priority flash – attack Belgrano group.)
(From CTG 317.8, to Conqueror, text priority flash – attack Belgrano group.)
통신위성에 올라온 명령문을 확인한 해군본부는 명백한 월권행위에 깜짝 놀라 즉각 전문을 삭제했지만, 우드워드 제독이 벨그라노 격침을 시급히 원하고 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이에 함대사령관 필드하우스 제독과 국방참모총장 테렌스 르윈 제독은 대처 총리에게 승낙을 얻어 GMT 1230시부로 TEZ 바깥의 아르헨티나 함정에 대한 공격을 허가한다는 변경된 교전수칙을 통신위성에 전송한다.
영화 '철의 여인(The Iron Lady)'에서 헤네랄 벨그라노에 대한 공격을 허가할 때를 묘사한 영상. 앞서 언급한 봉쇄구역 이탈 문제 때문에 허가 여부를 두고 고민한다.
종일 벨그라노를 추적하던 컨커러는 기동부대와 영국 본토 사이의 소동이 일단락된 후인 GMT 17:00시에야 잠망경 심도로 부상, 변경된 교전수칙을 수신했다. 컨커러 함장 크리스토퍼 레포드-브라운 중령은 공격하겠다는 전문을 발송한 후 그리니치 표준시 기준 5월 2일 오후 6시경 헤네랄 벨그라노 침로 측면 1400야드 거리에서 총 3발의 Mk 8 어뢰를 발사했다. 그 중 2발을 함수와 함체 후방에 피격당한 헤네랄 벨그라노는 피해가 컸기 때문에 불과 20분만에 함수가 꺾이고 대량의 해수가 들어차 침몰했다. 헤네랄 벨그라노는 어뢰가 폭발하면서 함선의 전기계통이 모두 고장나는 바람에 통신으로 구조요청을 할 수조차 없었다. 또한 침몰 현장은 기상이 안 좋아 가시성이 매우 떨어지는 상태였다. 때문에 당시 헤네랄 벨그라노에는 호위 구축함 2척 ARA 이폴리토 보우차르드(Hipolito Bouchard) 및 ARA 피에드라부에나(Piedrabuena)가[42] 붙어 있었음에도 열악한 기상에 구조 신호도 받지 못해 호위 구축함들이 순양함이 침몰한 사실을 몇 시간 동안이나 몰랐다. 결과적으로 323명의 승조원이 전사했으며 이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군 전사자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춥고 거친 해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함장 엑토르 본소(Héctor Bonzo, 1932 ~ 2009) 대령을 포함한 나머지 700여명의 승조원은 다행히 무사히 구조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해군의 디젤잠수함 ARA 산 루이스(San Luis)를 제외한 모든 아르헨티나 해군 함정들은 아르헨티나 본토에 위치한 항구로 철수했으며 이후 포클랜드 전쟁 동안 다시 해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 컨커러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前 미국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피닉스(CL-46)). 1982년 5월 2일 |
원자력 잠수함의 실전 격침 첫 사례 정도로 보이는 이 교전의 의의는 생각보다 크다. 아르헨티나의 해군 가용 전력 대부분이 투입되어 포클랜드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와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로 포클랜드 해역의 영국 항모기동부대를 협공하려던 시도가 취소된 후 철수하던 벨그라노가 격침당하자 아르헨티나 해군은 더이상 바다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됐고, 제해권과 제공권은 영국이 가져갔다.[43] 이로써 영국은 사실상 이렇다 할 방해 없이 포클랜드 섬을 공략하게 되었으며[44] 아르헨티나군은 전투기들 항속 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영국 해군에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교전수칙을 변경하여 TEZ 바깥의 아르헨티나 함정을 격침시킨 영국 정부의 결정은 영국에서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65년부터 1999년까지 영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 반대한 골수 반전파인 탬 디엘(Tam Dalyell, 1932 ~ 2017) 노동당 하원의원은 영국 정부가 페루가 제시한 평화협정안을 무력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태를 확전시키고자 공격을 지시한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을 제기했고, 전쟁이 끝난 후인 1983년 총선에서도 대처의 반대파는 벨그라노 격침이 총선 승리를 위해 대처가 고의로 사태를 확전시킨 증거라고 주장했다. 1983년 5월 공영방송 BBC 1의 시사 프로그램 네이션와이드(Nationwide)의 생방송에 출연한 마거릿 대처 총리에게 다이애나 시드니 굴드(Diana Sydney Gould, 1926 ~ 2011)란 평범한 시민이 이 문제를 따지고 든 게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
굴드는 대처 총리에게 왜 벨그라노가 TEZ 바깥에서 서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공격하도록 명령했냐며 힐난조로 질문했고, 처음에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벨그라노가 영국 기동부대에게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공격을 명령했다고 대답하던 대처도 굴드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단단히 화가 나서 "우리 해군 애들을 지키기 위해서 함대에 위협이 되는 적함을 격침시켰다고 총리가 비난을 받는 나라는 영국뿐일 것 같다.(I think it could only be in Britain that a Prime Minister was accused of sinking an enemy ship that was a danger to our Navy, when my main motive was to protect the boys in our Navy.)"고 쏘아붙이고 전화통화를 끝냈다.
결과적으로 이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이었다. 벨그라노 격침은 현장지휘관의 강력한 의사표명과 이에 동감한 총리의 최고 군사조언가 두 사람의 권고를 대처가 수용한 것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 정부 역시 1994년 헤네랄 벨그라노의 격침은 적법한 전시행위라는 사실에 동의했고, 2003년에 벨그라노의 함장이었던 본소 대령도 "헤네랄 벨그라노는 발견하는 모든 영국 군함을 격침시킬 것"을 명령받았던 전투 항행 중이었으므로 HMS 컨커러의 공격은 정당한 교전행위였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논란은 종식되었다. 본소 대령은 1983년에 대령으로 예편했고, 2009년에 76세로 사망했다.
컨커러의 헤네랄 벨그라노 격침은 2023년 현재까지도 교전 상황에서 원자력 잠수함이 어뢰로 군함을 격침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45]
3.9. 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
▲ 영국 구축함 HMS 셰필드(Sheffield) 함 |
이날 아침 아르헨티나 본토에서 출격한 SP-2H 넵튠 해상초계기는 헤네랄 벨그라노의 생존자를 수색하는 척 하면서 영국 함대의 위치를 레이더로 탐지했다. 만약 시해리어가 덤벼든다면 죽을 게 확실한 임무였지만 넵튠 승무원들의 기만이 먹혀들어 영국 해군은 장장 세 시간 가까운 정찰비행 내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뒤이어 리오 그란데 기지에서 이륙한 쉬페르 에탕다르 두 기가 초계기의 유도에 따라 영국 함대의 남서쪽에서 저공으로 침투했다. 수평선 아래 숨어 표적에서 28해리 거리까지 접근한 쉬페르 에탕다르는 잠시 상승하여 레이더로 영국 함정의 위치를 파악한 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엑조세 두 발을 발사했다. 엑조세는 영국 기동부대 18~30마일 전방에 돌출돼 있던 세 척의 42형 구축함을 향해 고속으로 돌진했다. 이 중 쉬페르 에탕다르의 접근을 눈치챈 글래스고와 코벤트리는 채프를 살포하여 회피할 수 있었지만, 셰필드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견시가 미사일 접근을 확인한 직후 엑조세 한 발이 셰필드의 전투정보실에 정확히 명중했고, 화재로 주요 기능을 상실한 셰필드는 네 시간 동안 불길과 사투를 벌인 끝에 버려지고 만다.
이 공격으로 함 총원 281명 중 20명이 전사하고, 26~63명이 부상했다. 다행히 함 내 탄약고에 유폭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서 승조원들이 몰살되는 사태는 피했고 배도 한동안은 물 위에 떠 있었다. 부상자는 헬기를 이용하여 HMS 허미즈로 이송했고, 21형 호위함인 HMS 애로우와 12형 호위함 HMS 야머스가 달려와서 외부에서 화재를 진압하다가 배를 포기하는 명령이 떨어지자 생존자들을 옮겨태웠다. 이들은 징발된 민간 유조선인 MV 브리티시 에스크호에 탑승하여 어센션 섬으로 이송되었다.
또한 영국 해군은 이 과정을 좀 더 면밀하게 조사한 끝에...
- 우연히도 함장과 대공전장교를 포함한 주요 승조원들이 CIC(전투정보실, 그러니까 지휘소)에 없었다.
- 위성 통신 장비인 SCOT의 신호가 쉬페르 에탕다르에 탑재된 레이더와 유사한 탓에 위성 통신을 할 때마다 이를 레이더 시그널로 인식한 ESM 장비 UAA-1이 전투기 접근을 경고하는 오보가 끊이질 않았다. 5월 4일 하루에만 이런 가짜 경보가 3, 4번이나 울렸고 마침내 쉬페르 에탕다르가 실제로 접근했을 때에는 대공전 통제함 인빈시블이 동료함 글래스고의 경고를 통신 장치 사용에 따른 오보로 판정했다.
- 하필 엑조세 공격이 가해진 순간 셰필드는 SCOT 위성통신장비를 가동중이라 UAA-1을 끄고 있었다.
- 저공 비행하는 엑조세 2기를 레이더가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이 때 셰필드를 격침시켰던 엑조세는 불발탄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2010년대 영국에서 최신 분석기법을 활용한 결과 탄두가 기폭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탄두 기폭으로 셰필드의 주요 기능이 마비된 이후 로켓 모터에 남은 연료에 불길이 옮겨붙으며 셰필드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사일이 전투정보실에 직격하는 바람에 셰필드의 데미지 컨트롤타워가 마비, 화재진압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셰필드는 후에 영국으로 예인 중에 피탄된 곳이 침수되어 6일 뒤인 5월 10일에 최종 침몰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아르헨티나는 셰필드의 침몰 사실을 영국 언론의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거리 정찰이 가능한 기종들은 전쟁 초반부에 전부 쓰지도 못하는 꼴이 나 버렸고[47], 장거리 레이더 또한 작동 불가 상황이라 믿을 건 실전에 투입되었던 조종사들의 증언이었는데, 이는 예로부터 신뢰도가 그다지 높지 못했다. 일단 불이 붙으면 격침이라는 식으로 잘못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쉬페르 에탕다르 조종사들은 발사 직후 방공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로 도주해서 피탄 결과를 정확히 알 방도가 없었다.
사실,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 전쟁 전체에 걸쳐 이렇게 부족한 면모를 많이 보였던 이유는 군대 조직 자체가 남미 패권 다툼을 위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속 장거리 전폭기도 없었고 재급유기도 단 2대였던 이유는 국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분쟁을 대비해 시스템을 구축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가 보유하고 있던 쉬페르 에탕다르와 엑조세는 각각 5기와 5발뿐이었다.[48]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는 대박이 나지 않는 이상 전황 자체를 뒤집기에는 턱없이 적었다. 물론 영국군이 상륙한 5월 중순 이후부터는 항공모함을 격침시켰다고 해도 털렸을 것이다. 지상군은 장비도 부족하고 예비군보다 못한 수준이며, 아르헨티나 해군은 항구에 짱박혀 있었다. 아르헨티나 공군 및 해군 항공대는 전쟁 전 자국의 42식 구축함을 이용해 가상전을 벌여보았으나 50%정도만 생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조금 어려움에 처했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해상전을 벌였으니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것이었다.
이후 셰필드 격침 전과를 기록한 엑조세는 옛 소련의 스틱스나 중국의 실크웜을 능가하는 대함 공격 수단으로 각광을 받는다. 42형 구축함과 같은 기존의 방공함들은 스틱스처럼 수백 미터 고도를 아음속으로 날아오는 함대함 미사일이나 AS-4 키친처럼 고고도를 초음속으로 날아오는 대형 공대함 미사일에 대한 대응에 집중하여 저고도 방공능력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편이었는데, 이 약점을 초저고도로 돌진하는 엑조세가 정확히 찌른 것이다. 이 사건은 시스키밍 대함 미사일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어, '셰필드 쇼크' 혹은 '엑조세 쇼크'라 불리며 이후 군함 건조에서 저고도 방공 능력과 CIWS를 위시한 최후 점방어능력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 쉬페르 에탕다르 |
▲ 피격당한 셰필드 |
3.10. 폭풍전야
헤네랄 벨그라노와 셰필드 격침으로 크게 한 방씩을 주고 받은 양측은 기상 상황이 악화된 5월 8일까지 휴지기를 가진 뒤, 조만간 예상되는 영국의 포클랜드 공격 과정에서 벌어질 결전에 대비해 5월 9일부터 다시 탐색전을 시작한다. 이날 트롤어선으로 위장해 영국 함대를 정찰하던 아르헨티나 해군 정보수집함 나르왈이 시해리어에 포착당해 격침당했고, 아르헨티나 공군기의 예상 침투 경로 전방을 초계하며 미사일 트랩을 전개한 코벤트리-브로드소드 42-22 콤보[49]는 접근하는 스카이호크와 퓨마 헬기에게 시다트 함대공 미사일 공격을 가해 퓨마 헬기에게 직격탄을 명중시켰다. 스카이호크 두 기 역시 회피 도중 해수면에 충돌했다.5월 10일 밤, 상륙작전의 사전 준비로 포클랜드 해안을 면밀히 정찰할 필요가 있었던 영국 기동함대는 21형 호위함 HMS 얼래크리티에게 포클랜드 해협을 항진하면서 기뢰가 부설돼 있는지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위함에게 소해장치가 있을 리 만무하니, 이는 기뢰에 의한 호위함의 격침도 가능한 위험천만한 임무였다. 지휘관 우드워드 제독이라고 누가 죽는 걸 보고 싶어서 이런 명령을 내린 건 아니고, 소해함은 없는데 상륙작전은 수행해야 하는 입장에서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50] 다행히 얼래크리티는 기뢰 대신 항공유와 차량을 실은 아르헨티나 해군 수송함 이슬라 데 로스 에스타도스를 발견, 포격을 가해 가라앉혔다.
얼래크리티는 살떨리는 임무를 마치고 마중나온 자매함 HMS 애로우와 해협 출구에서 합류하여 기동함대 본대를 향해 30노트로 줄행랑을 쳤는데, 마침 이 해역에서는 아르헨티나의 209급 잠수함 산 루이스가 매복중이었다. 절호의 공격 기회를 포착한 산 루이스는 11일 오전 1시 40분과 42분 SST-4 대수상함용 중어뢰 두 발을 발사했지만 작전기간 내내 승조원들을 괴롭히던 고장 문제가 또다시 발목을 잡았다. 한 발은 발사 자체가 되질 않았고 다른 한 발은 발사 직후 유도 와이어가 끊어져 수동유도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결국 어뢰는 닉시 예인기만기에 속아 호위함 대신 기만기를 날려버리는 데 그쳤다. 전속력으로 튀어오느라 소나가 먹통이던 얼래크리티와 애로우는 본대로 돌아와서야 닉시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래크리티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편의 호러쇼가 따로 없는 날이었다.
5월 12일 새벽에는 글래스고-브릴리언트의 42-22 콤보와 스카이호크 공격기 사이의 혈투가 벌어졌다. 저공침투하는 스카이호크 첫 제파 세 대는 근접방어 역할을 맡은 22형 호위함 브릴리언트가 시울프 대공미사일로 모두 격추 혹은 추락시켰지만, 두 번째 제파의 공격에는 글래스고의 시다트가 기계고장으로 사격조차 하지 못하는 사이 브릴리언트의 시울프도 발사에 실패해 두 함정은 스카이호크 네 대에게 그대로 폭탄을 두들겨 맞는다. 천만다행으로 명중탄은 글래스고를 관통한 불발탄 한 발뿐이라 글래스고-브릴리언트 콤보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공군은 공격 후 귀환중이던 스카이호크 한 대를 대공포의 오인사격으로 추가 상실했다.
한편 아르헨티나 공군은 4월 말부터 서포클랜드 북쪽의 페블 섬에서 우편기용 잔디 활주로를 활용한 야전비행장을 개설해 소수의 푸카라 경공격기와 스카이밴 수송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문제는 페블 섬이 상륙예정지점 산카를로스 코앞이었다는 점이다. 영국 기동함대는 눈엣가시 같던 이 비행장을 당장 파괴하고 싶었지만, 민간인 주택들이 활주로와 딱 붙어 있어 공습은 위험부담이 컸다. 이에 SAS가 나서서 페블 섬 비행장을 처리하기로 한다. 11일-12일 사이 8명으로 구성된 정찰조가 침투해 주요 목표를 파악했고, 이 정보를 토대로 14일 밤-15일 새벽 웨스트랜드 시 킹 헬리콥터 두 대에 분승한 48명의 SAS 대원들이 비행장을 급습, 푸카라 경공격기 6대와 스카이밴 수송기 1대, T-34C 훈련기 4대를 모두 폭파하는 데 성공했다. 폭파 직후 대원들은 박격포와 HMS 글래모건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바로 퇴출했다. SAS의 손실은 전무했다. 4월 말 포투나 빙하에서 망신을 샀던 SAS가 그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 순간이었다.
5월 18일, 어센션 섬에서 출발한 상륙전단이 드디어 포클랜드 해역에서 기동함대와 합류했다. 여기에는 영국 공군의 해리어 부대와 헬기를 실은 Ro-Ro 수송선 아틀란틱 컨베이어가 포함돼 있었는데, 작전손실로 가용 시 해리어 숫자가 17대까지 줄어들어서 임무 수행에 큰 어려움을 겪던 항모들에게 아틀란틱 컨베이어의 합류는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다음날부터 산 카를로스를 포함한 포클랜드 섬의 주요 관측지점으로 SAS와 SBS 정찰대원들이 투입되어 관측소를 구축했고, 지상군 병력도 수송함에 분승하여 상륙 준비를 마쳤다. 포클랜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상륙작전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3.11. 산 카를로스 만 상륙전
▲ 산 카를로스 만에 상륙하는 영국군들 |
당시 상황을 다룬 영국 다큐 영상 |
영국 지상군 상황
5월 21일 영국군이 동포클랜드 서북쪽의 산 카를로스만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포클랜드 제도 최대 도시이자 총독부가 있는 동쪽 끝의 항구 도시 포트 스탠리를 목표로 영국 해병대 제3코만도 여단[51]과 영국 육군 제5보병여단[52]이 투입되었다.
▲ 피격당한 HMS 아덴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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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카를로스 만 해협에서 교전 중인 IAI 대거 | 영국 군함들 사이로 저공 비행하는 대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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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카를로스 항구로 이동하는 스카이호크 2기 | 영국에게 공격 받는 스카이호크 |
▲ 탄약고의 폭발로 격침당하는 HMS 안텔로프함 |
5월 25일 아르헨티나 독립기념일을 맞아 아르헨티나군은 다시 한번 쉬페르 에탕다르를 동원하여 영국 함대 본진에 2발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했다.
▲ 미사일에 피격당해버린 아틀란틱 컨베이어 |
같은 날, 아르헨티나 해군은 A-4 편대를 출격시켜 영국 함대와 산 카를로스에 파상공격을 가해왔다. 오전의 공습은 별 전과 없이 코벤트리의 시다트 대공미사일에 스카이호크 두 대, 육군 대공포에 한 대를 잃으면서 끝났지만, 오후의 첫 번째 공격은 영국 기동부대 본대 전방에 전개하여 엄호부대 겸 미사일 트랩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코벤트리-브로드소드 42-22 콤보를 정확히 덮쳤다. 당시 아르헨티나군 스카이호크는 2대씩 짝을 지어 공격했는데, 브로드소드의 대공 레이더는 딱 붙어 나는 두 전투기를 1대로 인식했다. 그러다 스카이호크가 회피기동을 위해 대형을 분리하자 표적이 갑자기 둘로 나뉘는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브로드소드의 전투체계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해버린다. 브로드소드 승조원들이 오류를 해결하려고 시스템을 리셋하는 사이 아르헨티나 공군기들이 브로드소드의 헬기갑판에 폭탄을 명중시켰지만, 브로드소드에는 행운이 따랐다. 폭탄이 불발한 채 관통하여 함체에 큰 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갑판에 주기되어 있던 링스 헬리콥터가 폭탄에 맞아 파괴된 것이 전부였다.
겨우 1분 뒤 두 번째 공격제파가 다시 두 함정을 노렸을 때는 시해리어가 스카이호크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코벤트리가 시다트 미사일을 쏘기 위해 시해리어를 치웠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저공목표 추적능력에 문제가 있던 42형 구축함 초기형의 레이더는 스카이호크 추적에 실패했고, 호위하던 22형 호위함 브로드소드도 시울프 미사일로 스카이호크를 조준하고 사격하려는 찰나에 회피 기동하던 코벤트리가 브로드소드의 화력통제 레이더 앞을 가리는 바람에 쏘지 못했다.
▲ 코벤트리함의 최후 |
5월 28일 상륙해안에서 뛰쳐나온 제3코만도여단 주력이 포트 스탠리 서북쪽의 틸 인렛으로 기동하는 사이 제2공수대대는 동포클랜드 섬 중앙의 좁은 길목인 구스 그린(Goose Green)에서 진격로의 측면을 위협하는 아르헨티나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영국군 피해는 제2공수대대장 허버트 존스 중령을 포함해 전사 18명, 부상 64명인 반면 아르헨티나군 피해는 전사 45명, 부상자 121명에 961명이 포로로 잡혔다. 영국은 SAS에 구르카까지 준비했지만 전투에서 패하고 지친 아르헨티나 육군은 구르카병들이 온다는 소문에 그들이 투입되기도 전에 투항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중 몇몇은 제발 구르카에게 넘겨 주지 말아 달라며 사정했다고. 정작 구르카 대원들은 '우린 저항하지 않는 자, 포로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라며 불쾌해 했다.
사실 구스 그린의 아르헨티나 육군 병사들은 대부분이 복무를 시작한지 수 개월째인 신병들로 전투력과 사기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고, 실제로 구스 그린 인근 고지군이 피탈되거나 비행장이 포위당하는 등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자 여력이 남았음에도 쉽게 항복해버리고 만다. 덕분에 상태가 멀쩡한 아르헨티나 육군 포로들이 가득한 사진이 남았다.
제해권을 영국이 장악한 이상 추가 지원이 없는 아르헨티나군은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군은 높게 쳐야 3,000명 인구의 포클랜드에 보병을 1만여 명, AML-90 같은 경전차나 LVTP-7 같은 중장비 소량을 겨우 수송했지만 제해권을 잃으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한 후속 보급이 매우 힘들었으며, 개인 화기조차 탄약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서경석 퇴역 장군이 집필한 <전투감각>을 보면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사례로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의 방한 장비가 부족한 것을 꼽고 있다. 포클랜드 전쟁이 아르헨티나의 선공으로 시작했으며 겨울에 치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알 수 있다.[54]
그러나 아르헨티나군 수송부대 조종사들은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영국군이 포클랜드 섬 주변의 제공권을 장악했던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보급 및 부상자 후송 임무를 수행했다. 제공권이 없어 한밤중에 악천후를 뚫고 호위기도 없이 수행한 조종사들은 영웅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군의 C-130이 초계 중이던 해리어에게 격추되기도 했다.
3.12. 엑조세의 마지막 발악
상륙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지상전도 불리하게 전개되자 아르헨티나군은 어떻게든 전세를 되돌려보고자 마지막 엑조세 미사일 1발을 이용해 항모를 격침시키려 시도한다. 하지만 엑조세 단 한 발로 항공모함을 가라앉히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고, 이에 해군항공대 스카이호크가 동행하여 엑조세의 발사 궤적을 따라 공격, 항공모함에 추가적인 타격을 가해 격침시킨다는 작전이 수립됐다. 5월 30일 리오 그란데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쉬페르 에탕다르 2기는 공중급유를 받은 뒤 포클랜드 제도 남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영국 항모의 예상 위치로 접근, 레이더상에 나타난 세 척 중 가장 크게 보이는 표적을 향해 엑조세 한 발을 발사한다. 스카이호크 4기 편대도 이 엑조세의 로켓모터 연기를 따라 영국 함대로 돌진했다.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이곳에 있었던 영국 해군 함정들은 항공모함이 아니라 HMS 엑세터, HMS 안드로메다, HMS 어벤저로 이루어진 호위전대였다. 여전히 기동부대에 비해 훨씬 대규모의 항공전력을 가진 아르헨티나군이 커다란 손실을 각오하고 단호하게 공격해온다면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우드워드 제독이 아르헨티나군의 예상과 달리 항모 두 척을 완전봉쇄구역 한참 외곽에 배치한 것이다. 이전까지 영국 기동부대를 정찰하던 아르헨티나군의 SP-2H 넵튠 해상초계기는 심한 노후화로 비행중 공중분해될 우려가 있다는 판정을 받고 5월 하순부로 비행 임무에서 해제된 상태였기에 아르헨티나군으로서는 이를 알아챌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영국 해군 호위전대는 레이더 탐지를 위해 잠시 상승한 쉬페르 에탕다르를 포착하자 즉시 채프를 살포하며 기만 및 회피에 들어갔고, 엑조세는 채프에 속아 아무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먼 수평선을 향해 사라져버리고 만다.
엑조세 공격에 뒤이어 스카이호크 4기 편대가 기동부대를 공습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날아들었지만, HMS 엑세터에게 두 기가 격추당하고 남은 두 기가 투하한 폭탄도 모두 빗나갔다. 42형 구축함 배치 2의 1번함인 엑세터는 기존 42형 구축함의 965형 대공레이더에 비해 저공목표 탐지능력이 향상된 1022형 대공레이더를 탑재하고 있었는데, 이 능력이 빛을 발해 다른 42형 구축함과 달리 저공에서 돌진해오는 스카이호크를 시다트 미사일로 격추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항모를 격침시키려는 아르헨티나군의 절박한 시도는 아무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실제 공격 결과와 무관하게 아르헨티나군은 "이번에 발사한 엑조세가 인빈시블에 명중했다!"라고 발표했다. 영국은 즉시 아르헨티나군의 주장을 일축했으나, 작전보안상 그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아서 한동안 아르헨티나 측의 발표대로 인빈시블이 손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공격 당시에 시킹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 중이던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가 엑조세 기만용 채프 살포 임무를 받고 인빈시블의 갑판 위에 있었다고 한다. 진짜로 공격에 성공했다면 앤드루 왕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3.13. 영국의 승리
▲ 포클랜드 제도에 다시 유니언 잭을 게양하는 영국군 |
6월 8일 영국 육군 웨일스 근위연대 1대대가 항공 호위가 부실한 상태로 포트 스탠리 남서쪽 피츠로이 일대에 상륙 작전을 펼치다가 상륙함(LSL) 2척이 A-4 공격기에 의하여 심한 피해를 입었다.
▲ A-4 스카이호크의 공격으로 불타오르는 서 갤러허드 |
아르헨티나군은 급히 차출한 민항기로 이루어진 미끼 부대로 해리어들을 농락하기도 했다. 민항기를 영국제 B-108 캔버라 폭격기로 오인하게 만든 것이다. 실제로 피로도를 쌓는 효과가 꽤 있어서 저공 침투하는 A-4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 전투중 산으로 이동하는 왕립해병대 제42 특공대원들 |
롱돈 산 전투 후 아르헨티나군의 마지막 방어선은 포트 스탠리 근방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포트 스탠리와 가장 가까운 텀블다운 산과 롱돈 산 바로 동쪽, 포트 스탠리의 북쪽에 있던 와이어리스 능선이었다. 6월 13일~14일 이틀 동안 텀블다운 산과 텀블다운 산 남동쪽의 윌리엄 산(Mount William), 윌리엄 산 동쪽의 새퍼 언덕(Sapper Hills)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에는 5보병여단, 3코만도여단이 투입되었고, 5보병여단 산하 스코츠 가드[56]가 주공을 맡았다. 5보병여단 산하 제7에든버러 공작의 구르카 연대는 텀블다운 산 남쪽에 있는 감제고지였던 윌리엄 산(Mount William)을, 웰시 가드[57]는 근처의 새퍼 언덕(Sapper Hills)을 공략하는 조공을 맡았다. 텀블다운 산을 지키던 아르헨티나 제5해병대대는 신병 위주의 급조 부대 투성이인 아르헨티나 육군의 포클랜드 파견부대들과 달리 영국군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잘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다.[58] 한편 같은 13일~14일 밤에 와이어리스 능선에는 3코만도여단 산하 2공수(낙하산)대대가 공격을 맡았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단 2명의 전사자만 낸 채로 와이어리스 능선을 점령함으로써 스탠리 인근의 고지들이 전부 점령되었다. 결국 스탠리를 수비하는 아르헨티나군은 텀블다운이 함락된 그 날(6월 14일) 항복했고,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의 많은 장비를 노획했다. 러일전쟁때의 일본군이 압수한 러시아 전함들처럼 영국군이 사용가능한 퓨마 헬리콥터나 경비함정등은 영국군에 편입해 사용되었다.
- 메르세데스-벤츠 MB 1112/13/14 트럭 100대
- 메르세데스-벤츠 유니목 20대
-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 20대
- 파나르 AML-90 수색정찰장갑차 12대
- 롤랜드 지대공미사일 발사대 1기
- 타이거캣 지대공미사일 발사대 3기
- 급조 엑조세 발사대 1기
- 시터CITER 155mm L33 견인곡사포 3문
- 오토멜라라 Mod 56 105mm 견인곡사포 10문
- 오리콘 GDF 35mm 쌍열대공포 15문
- 라인메탈 Rh202 20mm 쌍열대공포 15문
- AN/TPS-43 3D 이동식 대공탐색레이더 1기
- 스카이가드, 슈퍼 플레더마우스 화기통제레이더 및 RAIST 지상감시레이더 10기
- 수량 불명의 블로우파이프 보병휴대대공미사일
- 수량 불명의 SA-7 그레일9K32 스트렐라-2 보병휴대대공미사일[59]
- 아구스타 A.109 2기
- 벨 212 2기
- UH-1H 8기
- CH-47 치누크 1기
- SA 330 퓨마 1기
- FMA IA 58 푸카라 경공격기 10기
- MB-339 훈련기/경공격기 1기
- PNA아르헨티나 해안경비대 이슬라스 말비나스 경비함 1척[HMS]
- 개인화기 11,000정
- 7.62 mm 탄약 400만발(구스 그린에서 11,000발 노획)
- 105mm 포탄 11,000발
4. 외전
4.1. 알헤시라스 작전
La Operación Algeciras u Operación Gibraltar
참고 기사
그동안 1급 기밀로 분류되어 철저히 비밀에 싸여있었으나 2003년경 공개된 작전으로 아르헨티나 특수부대가 지브롤터에 있는 영국 함대를 공작으로 폭파시키려 했다가 실패한 작전이다.
1982년 4월 아르헨티나 해군은 영국 해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지브롤터에 정박해있는 영국 군함을 특수작전으로 폭파시켜 포클랜드 해협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작전을 세웠다. 호르헤 아나야 제독의 지휘아래 아르헨티나 공작조는 위조여권을 사용해 신분을 숨기고 지브롤터와 마주하고 있는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에 잠입하여 거점을 설치했다. 그들은 지브롤터까지 잠수한 채 헤엄쳐 간 다이버들이 이탈리아산 흡착기뢰(limpet mine)를 군함에 설치하고 빠져나오는 작전을 세웠다.
처음엔 공작조는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가는 유조선을 폭파시키려고도 했지만 기름 누출에 따른 해협 오염과 스페인의 반발을 살거라고 예상했던 아나야 제독에 의해 거부되었고 이후 지브롤터를 오가는 함대를 보고하면서 기회를 엿봤지만 협상 중이라는 본국의 지령에 따라 꾸물거리면서 시간을 낭비했다.
또 알헤시라스에서 렌터카와 호텔을 자주 바꾸면서 거액의 현금을 쓰는등[61] 부주의하게 행동하여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샀고 통신량이 증가하던 마드리드의 아르헨티나 대사관을 도청하고 있던 영국 정보부에 그 작전이 노출되어 이는 즉각 스페인 정부에 통보되었다. 당시 스페인 총리였던 레오폴도 칼보소텔로는 프랑코 정권 잔여세력의 군부 쿠데타 시도를 진압하고 민주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는 스페인 민주주의 정착과 경제발전을 위해 영국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공작조가 지브롤터의 영국 전함을 폭파시키면 스페인이 외교적 분쟁에 휘말려 들 것을 우려했다. 더해서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외교 분쟁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브롤터를 두고 영국과 갈등하고 있었던 스페인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스페인계 식민 후손인 아르헨티나를 버리고 영국 편을 들 수는 없었고 결국 사태를 스페인 정보부의 개입 없이 경찰들만 동원해서 조용히 처리하기로 결심한다.
그간에 알려진 사실로는 아르헨티나 은행강도(혹은 마약밀매 마피아)들을 수사하다가 부주의한 행동을 남발하는 공작조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신고가 들어와 우연히 체포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2003년 나온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는 신고와는 별개로, 도청으로 아르헨티나를 감시하고 있던 영국 정보부와 스페인간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체포된 아르헨티나 공작조원인 페르난데스 해군 대위가 자신은 아르헨티나 공작조이며 전쟁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했으나 그걸 믿지 않았던 스페인 경찰은 '당신이 아르헨티나 해군이면 난 교황의 조카요~' 라고 이죽거렸다. 이후 내무부의 지령이 떨어지자 화들짝 놀란 스페인 경찰은 '당신들이 아르헨티나 공작조인 걸 알았다면 잡지 않았을텐데... 지브롤터는 영국놈들한테 뺏긴 땅이요.' 라면서 우호적으로 나왔다고 한다.
체포된 공작조에 대한 대우는 좋았고 내무부는 경찰들에게 이 사건을 절대 노출하지 말고 조용히 처리하라고 하였다. 사건을 묻어버리고 싶었던 스페인 정부의 결정에 따라 이들은 어떠한 재판이나 심문도 없이 조용히 아르헨티나로 추방되었다. 관련 기록은 모두 파기되었고 그나마 남은 자료는 기밀로 남았다가 훗날에 공개되었다.
4.2. 키홀 작전
Operation Keyhole
포클랜드 전쟁 이전부터 포클랜드 제도, 사우스 조지아 제도와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분쟁지역이었기에 1955년 툴레 섬에 기상관측소를 건설하였으나 같은 해 옆 같은 툴레 제도의 쿡 섬의 화산 폭발로 철수하였었다. 그래서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은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 남부 영국령 사우스툴레 제도를 다시 점령하여 툴레 섬에 '코르베타 우루과이'라는 군기지를 건설하였다. 이 군기지는 지역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라디오 기지, 기상관측소, 핼리패드와 아르헨티나 국기 게양대 등의 시설들과 상주 주둔군을 포함하였다. 하지만 결국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아르헨티나의 패전 후 영국은 툴레 제도를 포함한 섬들의 영유권을 강화하기 위해 키홀 작전을 개시하였다. 키홀 작전의 주 골자는 툴레 제도의 재탈환 및 해군 정찰을 통한 아르헨티나의 영향력 소거였는데, 당시 6월 14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에서 항복을 선언한 후에도 이 코르베타 우르과이 기지의 주둔군은 철수하지 않았기에 이 키홀 작전 도중 영국 해병대 제42코만도가 헬리콥터로 툴레 섬에 상륙, 주둔하던 군인 9명과 민간인 한명을 무장해제시켜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이동 후 아르헨티나 본토로 추방시켰다. 작전 끝! 인줄 알았으나...
제 42코만도가 툴레 섬의 주둔군을 추방시킬 때 툴레 섬의 코르베타 우루과이 기지는 그대로 두고 기지의 국기게양대에 게양된 국기만 아르헨티나 국기에서 유니언 잭으로 바꾸고 기지는 버려졌었다. 하지만 6달 후 그해 12월 HMS 헤카테가 지역을 정찰하던 도중 코르베타 우르과이 기지의 국기 게양대에 유니언 잭 대신 아르헨티나 국기가 다시 게양되어 있던 것이 알려졌다. 이 기지의 국기를 누가 교체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르헨티나가 이를 자국의 영유권 주장에 다시 사용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은 HMS 아리아드네를 파견하여 기지를 철거하였다.
5. 결과
▲ 1982년 7월 21일 영국 시민들의 열렬한 환대와 함께 영국 남부 포츠머스 항으로 개선하는 원정 기동 함대 기함 HMS 허미스 |
포클랜드 전쟁의 전사자는 영국 측에서 255명, 아르헨티나 측에서 649명이 발생했다. 이후 21세기까지 양측 참전 용사 중 자살자의 수가 전사자를 넘었다는 말도 있지만 영국 국방부에 따르면 포클랜드 참전 군인의 7%, 즉 95명이 자살과 관련된 죽음을 맞았다.
이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6월 11일 마지막 공세 때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한 포클랜드의 영국인 주민 3명이다. 그 외에도 아르헨티나 해군에 동원당한 민간인 선원 16명이 사망했다.
불만 여론을 무마하려 전쟁을 일으킨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전쟁 내내 이기고 있다고 선전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역대급 참패를 당했다는 비보를 전해야만 했다. 항복 다음날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가 패배했다는 요지의 치욕적인 대국민 연설을 했다. 연설문에 패배한 사실이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문맥을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시민들이 패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진압되었지만 이미 갈티에리는 사면초가였다.
갈티에리는 6월 18일 레이날도 비그노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비그노네 역시 이듬해 1983년 여러 반정부 세력의 공격을 받아 몰락했다. 이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의 국가수반부는 완전히 개판이 되었는데 2년 동안 대통령이 4명[62]씩이나 바뀔 정도로, 그러니까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작자들이 임기를 고작 1년조차 못 채우는 지경까지 갈 정도로 정치가 망가졌다. 이로써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반인륜적인 전횡으로 국가를 공포로 몰아넣은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후 아르헨티나에는 라울 알폰신을 대통령으로 삼은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영국에서는 막대한 전비를 쓰고 사상자도 꽤 나오긴 했지만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같은 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 포클랜드 전쟁은 겨우 3개월간 벌어진 단기전이며, 영국군 전사자가 255명, 부상자도 775명에 불과해 미군 전사자만 5만명 단위로 나온 베트남전과 피해 규모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민주당 행정부를 끝장낸 베트남전과 달리 포클랜드의 명백한 승리는 보수당 정권을 연장시켰다. 무엇보다 명분도 실리도 없이 손해만 본 베트남 전쟁과 달리 포클랜드 전쟁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영국이 반드시 군사적 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었고, 오히려 나서지 않으면 차례차례 영토가 넘어갈 판국이었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전쟁으로 인식되었던 데다가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며 승전한 전쟁이기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전쟁 이전 70년대 영국 경제는 오일 쇼크로 연평균 20% 이상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영국병으로 낮은 생산성과 평균 10.1%의 실업률로 재정이 악화되어 연간 2.8%의 저성장을 기록하며 1인당 GDP가 세계 18위까지 떨어졌었다. 반면 1980년대 후반부터 경제가 다시 살아나 2016년 기준으로 세계 13위에 올랐다. 즉 양극화 심화로 인해 여러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어도, 영국 경제는 IMF 금융지원을 받던 1976년보다 포클랜드 전쟁 이후에 훨씬 발전했다. 예를 들어 1970년대까지 말 그대로 파탄났던 영국의 농업은 1980년대 이후로는 성공적으로 기계화되어 2000년에는 2%의 노동력만으로 국내 필요량의 60% 정도를 생산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살아났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국이 전쟁하다가 경제를 말아먹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편 포클랜드 전쟁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를 휩쓰는 방아쇠였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만으로는 전세계의 신자유주의화가 어려웠으나 마가렛 대처가 승전에 힘입어 재집권한 덕분에 수월히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 군인들과 함께 포클랜드 탈환 기념 사진을 찍는 마거릿 대처(가운데) |
이러한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내내 이어지던 경제 호황에 크게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이전보다 경제적 양극화를 더욱 강화하고 대침체의 발생에 일조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양립한다.
6. 포클랜드 전쟁 당시 프랑스 관련 루머와 반박
관련 문서: 프랑스의 역대 사기 행각 전설-
아르헨티나에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 조합을 판매한 프랑스가, 영국에 엑조세의 정보를 넘겨줬다!?
-> 프랑스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기습하자 즉각 주문받았던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의 인도를 중지했으며, 영국에도 정보를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동맹국과 고객 양쪽의 의리를 모두 지켰다. 무엇보다 영국은 이미 70년대부터 엑조세를 도입해 운용 중이었으므로 정보를 더 얻을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논할 가치가 없는 까내리기만을 위한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오히려 주문한 물품을 다 받지도 못했는데 단 5발의 대함 미사일만으로 급하게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쪽이 이상한 것이다. 안티들 중에는 위 떡밥이 논파되면 어쨌든 고객에게 물건을 넘기지 않은 것은 배신이다! 프랑스는 나쁜 나라다!라고 비난하는 2페이즈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는 프랑스의 독단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내린 조치로, 독일 역시 아르헨티나에 구축함의 인도를 전쟁 동안 보류했다.
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극렬 프랑스 안티들은 위 두 가지가 모두 반박당해도 전쟁 중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 끝났으면 주문한 물건은 줘야지요? 돈만 먹고 모른 척한 프랑스 나쁜 놈!이라며 마지막까지 반격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나자 약속을 지켜 주문한 물건을 정확히 넘겨줬다.
- 프랑스가 공군 합동 훈련을 통해 영국에게 아르헨티나의 주력기인 미라지의 비행 성능과 기타 정보를 넘겨줬다!?
아르헨티나는 자력으로 엑조세를 운용하지 못했다.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된 물건이라 그동안 A-4 스카이호크와 비유도 폭장만 사용하던 아르헨티나는 상당한 기술 장벽으로 슈페르 에탕다르에 설치된 발사대 자체도 제대로 튜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다소에서 파견한 기술진들이 포클랜드 전쟁 시에도 그대로 남아서 셋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다만 당시 프랑스의 방산업체 관계자가 발언한 포클랜드 전쟁에 관한 충격적인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우리 프랑스의 미사일에 희생되는 것이
영국군의 함정이든
아르헨티나군의 함정이든 그것은 프랑스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 프랑스의 관심은 단지 이 11만 파운드짜리 값비싼 미사일이 가급적 많은 함정을 격침시킨다면 프랑스 국민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주게 되는 것이다.
- 토크멘터리 전쟁사 제 134부 영국vs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II 일본 모형잡지 하비재팬으로부터 재인용
- 토크멘터리 전쟁사 제 134부 영국vs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II 일본 모형잡지 하비재팬으로부터 재인용
하지만 원래 방산업체라는 곳이 그렇게 전쟁으로 무기 파는 곳인데 이를 비판하면 모든 방산업체와 군대가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프랑스는 2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으로 거의 모든 인프라가 박살나 있었다. 모든 게 풍족하던 유럽 내에서도 특히 풍족했던 'La Grande Nation'[64]은 이미 역사책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경제를 단기간에 부양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물색하다 방산업체를 대대적으로 밀어주고 있었다. 즉 저 발언은 방위산업의 본질과 당시 프랑스인들의 솔직한 마음을 대변해준 것이기도 하며 실제로도 이후 엑조세 미사일을 비롯한 프랑스제 무기들이 대박을 쳐서 경제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다만 이전에도 미라주 III 등이 중동전을 포함한 여러 국제 분쟁에서 좋은 전과를 올려 잘 판매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다시 조명되는 정도였다.
7. 기타
- 전후 양국은 단교 상태였다가 1990년 2월 5일 재수교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각자 포클랜드 제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영유권을 주장하는 내용을 공교육에도 포함시켜 국민들에게 중요하게 가르친다. 한편 아르헨티나도 경제가 어렵고 아르헨티나군의 현대화 상황도 힘들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제2차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평가되지만, 최근들어서 중국이 아르헨티나와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예의주시하고 있다.
- 전후 아르헨티나 전사자 중 섬에 남겨진 시신 236구를 영국에서 가져가라고 했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들은 이미 '고국'에 있으며, 또 영국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포클랜드의 영국 주권을 인정하게 된다는 논리로 전사자 유골의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따라서 아르헨티나 전사자 유골은 그대로 포클랜드 다윈 묘지의 아르헨티나 전사자 구역에 묻혀있다.[65] 2016년에 신원불명의 유골들의 DNA 검사를 마치는데 합의하고 2017년에 최종보고서를 썼지만 여전히 유골 반환에는 아르헨티나 내부에서 이견이 있다.
- 포클랜드 전쟁 당시 2만개의 지뢰가 깔렸는데 전후에도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다. 2020년에 마지막 지뢰를 해체하고 드디어 지뢰가 완전히 제거됐다고 선포했다.
- 포클랜드 전쟁 때 영국 언론의 무분별한 전황 보도가 아르헨티나의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자[66] 언론에서 자체적으로 통제한 것을 다루는 정훈 교육 자료도 있다. 즉 전시에 국민의 알 권리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고민해보자는 내용이다. 당시 BBC는 언론의 중립을 유지하면서 '아군'이 아닌 '영국군'이라고 불렀으며, 알 권리만을 지나치게 추구하여 군사 작전을 실황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영국군은 종전 후 군사기밀 누설을 이유로 BBC에 고소장을 날렸다.
-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던 에이스인 피에르 클로스테르망은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을 교육했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를 지지했다가 영국 국민들에게 배신자라고 욕먹었다.
- 마가렛 대처는 영국군 전사자 258명의 가족들에게 일일이 추도편지를 작성하였다. 일과시간은 물론이고 본인의 휴가도 반납해 가며 희생자 각자의 개인사와 전사자의 죽기 전 상황을 상세히 적은 정성들인 편지였다.
- 아르헨티나 군부에서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는데 이는 완벽하게 빗나갔다. 호주와 캐나다는 영국에 여러 군사적 지원을 제안했으며, 뉴질랜드의 경우 아르헨티나군의 장비 정보를 넘기는 것은 물론 아예 군함을 보내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전쟁 발발 후 인도양에 배치된 영국 해군이 포클랜드 전장으로 출동해 전력 공백이 생기자 이를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메워줬다. 동시에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호주, 뉴질랜드는 아르헨티나와 수교를 끊거나 경제 제재를 가하는 외교적 경제적 압박도 병행했다. 이 때문에 포클랜드 전쟁을 영연방과의 충돌로 해석하기도 한다.
- 당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은 제식 소총이 똑같아서 영국군은 노획한 아르헨티나군의 탄약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군은 벨기에제 FN FAL으로, 영국군은 FN FAL의 라이센스 버전인 L1A1으로 무장했고 둘의 차이점은 영국군의 L1A1은 반자동 사격만 가능했다는 것인데, 덕분에 영국군은 아르헨티나 군의 FN FAL을 잔뜩 노획해가서 그동안 목말라했던 완전자동 사격이 가능한 제식 소총에 대한 수요를 어느정도 채웠다.
- SA80 소총에도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북아일랜드 분쟁에서 영국은 L1A1을 대체할 새로운 돌격소총을 개발할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IMF 경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이미 대처 내각이 예산을 삭감한 데 더해 포클랜드 전쟁까지 치르자 영국 국방부는 말 그대로 주머니가 텅텅 빈 상황에서 SA80을 개발하게 된다. 거기에 없는 돈을 마련한다고 국립 조병창을 민영화하여 상당수가 해체되거나 대량 해고로 대규모 축소될 상황이었다. SA80의 개발회사인 로열 오드넌스(구 엔필드 조병창)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리가 없었다. 결국 개발진들은 SA80의 아버지뻘인 XL64E5를 5.56mm NATO 탄을 쓸 수 있도록 한 XL70E3을 내놨지만 조악한 재료로 안전성이나 신뢰성이 극악이었다. 다행히 현재는 HK에서 개수한 L85A2로 개조되면서 나아졌다.
- 영국 해군이 아르헨티나 공군의 A-4 공격기를 보포스 포로 격추하면서 컴퓨터로 작동하는 사격통제장치가 있다면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이 검증되었다. 대공포로 사용하던 보포스 40mm 포가 중소형 전투함에서 여전히 주력으로 운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 전함들은 100mm 이상급의 거대주포보다는 대공포나 부포로 쓰이던 40mm, 75mm 급을 주포로 채용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부포 자리에 어뢰와 대함미사일을 배치하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또한 주로 방공함에 장비되던 다양한 미사일 방어 체계들이 함의 체급에 상관없이 기본 사양으로 탑재되기 시작했다.
-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간 한국인 교포들이 아르헨티나에서 겪은 일들을 묶어서 펴낸 <아르헨티나 코리안 문학 선집: 소설>에는 포클랜드 전쟁 당시 에피소드가 실려있다.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에서 아르헨티나 전국의 모든 노동조합들한테 거리로 나와서 포클랜드 전쟁을 지지하는 시위를 하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한국인 교포들이 아르헨티나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자 길거리로 나와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후에라 포클랜드(떠나라 포클랜드), 볼베레 말비나스(돌아오라 말비나스)!"라는 구호를 외치며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군부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인 바 있다. 이 장면이 아르헨티나 방송국 TV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바람에 주한 영국대사가 한국 외무부 장관을 방문하여 "한국인들이 저렇게 포클랜드 전쟁을 지지하는 시위를 공개적으로 벌이고 있으니, 혹시 한국이 아르헨티나에 무기를 지원해 준 것이 아니냐?"라고 항의를 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또한 실제로 포클랜드 섬에 아르헨티나 군대가 상륙하기 얼마 전, 아르헨티나 무역 회사가 한국에 와서 닭털이 들어간 야전잠바 3천 장을 제작해 갔다고 한다(...).
- 과거에는 예비군 정신교육의 단골 소재였다. 아르헨티나가 무리하게 영국하고 싸우다가 참패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직면해 대국민 혼란이 일어난 대신, 승전국인 영국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 지금은 시간이 흐르다보니 보다 최신 버전의 다른 사례도 많아져서 잘 쓰이지 않는다.
- 탑기어 시즌 21 에피소드 8~9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무대로 펼쳐졌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의 티에라 델 푸에고의 우수아이아라는 곳에서 나가라고 강요받았다. 제러미 클락슨이 탄 포르쉐의 번호판(H982 FKL)이 포클랜드 전쟁을 기반으로 놀리려고 일부러 만들어진 가짜 번호판이라 우기는데 칠레 국경으로 떠날 때 아르헨티나 우익들이 위협 운전을 한 것은 물론 계란부터 시작해서 돌까지 던져대 차 유리가 깨지는 등 여러 일화가 있었다.
-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은 언론 통제로 정확한 사실을 잘 모르다가 스페인에 와서야 패전 소식을 듣고 숙소에서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4년 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8강에서 잉글랜드를 만나 전설적인 골로 승리하고 종국에는 우승까지 차지하여 패전의 한 속에 있던 아르헨티나의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에 대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국가대표 경력 참고.
- 2022년 4월 아르헨티나는 전쟁 종결 4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 # 전사자 추모식을 열었다. # 아르헨티나 대통령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는 영토 보전을 회복하는 것이 절대 우선순위라고 천명했다.
- 2022년 6월 한편 영국에서도 보리스 존슨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전쟁 종결 40주년 추모식이 열렸으며 #, #, 11월 전쟁 승전 40주년 기념으로 프린세스 로열 앤이 섬을 직접 찾아 추모비에 헌화했다. 아르헨티나의 정부는 불쾌감을 표시하며 맹반발했다. #
8. 명칭 문제
한국에서는 당시 서방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칭하나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라고 불리기에 포클랜드 전쟁/분쟁에서 아르헨티나 편을 드는 나라들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이라 하고 있다. 실제로 영국이 이겨서 포클랜드 제도는 포클랜드 제도로 남게 되었고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인과 대화할 때 등에는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특히 한,일간의 독도 문제에 있어 영국 정부는 일방적으로 일본의 편에서 '일본해'와 '다케시마'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현 상황에서는 한국정부도 굳이 포클랜드, 포클랜드 전쟁라는 명칭만 인정할 것이 아니라 '말바나스' 도 병행 표기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으며, 여론이 일기도 했었다. [67]
중국의 경우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에서 공식적으로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으며, 때문에 포클랜드 전쟁을 '마도 전쟁'(马岛战争)으로 표기한다. 그리고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기반을 완성한 요즘에는 이 전쟁을 아르헨티나가 고유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말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정당성=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가져간 정당성"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
9. 대중매체에서
- An Ungentlemanly Act - 전쟁 10주기인 1992년작 영국에 방영된 TV 영화로 전쟁 초기에 섬 총독관저를 지키던 영국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로 영국쪽 미디어의 관점은 해프닝 또는 코믹으로 다뤄지는 반면, 아르헨티나쪽은 비극, 역사물로 다뤄지고 있다.)
- 마스터 키튼 - 설정상 주인공 히라가 다이치 키튼은 영국 육군 예비역 SAS 상사로, 포클랜드전에 소집돼 참전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키튼은 그 당시의 기억을 그다지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키튼만이 아니라 당시 키튼의 전우들도 고통스러운 과거로 여기고 전쟁 자체가 높으신 분들의 농간으로 벌어졌다는 뉘앙스를 준다. 데빗 보빗 에피소드에서는 참전 부대 소속 부대원들이 등장한다.
- 1988년작 영국 BBC 드라마 텀블다운. 콜린 퍼스 주연. 한국에서도 KBS에서 현충일 특선영화로 '포클랜드의 생과 사'라는 제목으로 방영했었다.
- 2005년 개봉한 아르헨티나 영화 '포탄의 섬광' - 아르헨티나군 내부문제를 비판하고 그저 명령대로 갔다가 죽어가고 고생하는 아르헨티나군 눈으로 자국을 더 비판하고 있다.
-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의 전기를 다룬 2011년 개봉작으로, 메릴 스트립이 대처를 연기했다. 영화 자체는 전기 영화라서 전투 모습은 당시 자료 영상으로 대체한다.
- 탑기어 - H982 FKL 사건
- TV Pública에서 방영한 TV 영화 Combatientes
- 넷플릭스 드라마 ' 더 크라운(The Crown)'의 시즌 4 에피소드 4 가장 사랑하는 것은('Favourites'), 에피소드 5 실직자('Fagan')
-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의 주인공의 아버지도 포클랜드 전쟁에서 전사했다.
- 게임 프로젝트 리얼리티에 등장한다.
- 스웨덴의 메탈밴드 Sabaton의 Back in Control
- 아르헨티나에서 만든 인기 교육용 애니메이션 ' 삼바의 놀라운 여행'에도 관련 영상이 있다.[68]
- 2018년작 1982:말비나스 전쟁(원제: 신만이 아는 아르헨티나 군인) - 관련 영상, 전투 영상, 전투 영상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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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 평가 | |||
가족 | 아들 마크 대처 | |||
정책 및 사상 | 대처주의 · 신자유주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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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세계대전 중
말레이 해전에서 침몰한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장 존 리치 대령의 아들이다.
[2]
육군 10,700명, 해군 13,000명, 공군 6,000명
[3]
육군 10,100명, 해군 3,421명, 공군 1,069명
[4]
아르헨티나 쪽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이라 부른다.
[5]
그 이후의 해상 전투들은 분쟁지역의 우발적 충돌, 혹은 국력차로 인한 일방적인 학살 수준으로 전면전 수준은 아니다.
모스크바함 격침 사건은 러우 전쟁 중의 일이기는 하나 대규모 해전이 아닌 점에서 비슷한 사례로 들기는 어렵다.
[6]
사실 칠레
피노체트 정권이 시행한 것을 그대로 도입한 신자유주의의 원조격 정책이다. 차이점이라면 칠레 군부는 무분별한 외채와 외자 도입에 이자율 상승이 겹치면서 경제가 파탄날 뻔했지만 구조조정에 성공하면서 일단 한숨 돌렸고 군부가 물러는 났어도 일정 수준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아르헨티나 군부는 구조조정에 실패한 와중에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면서 철저하게 패망했다는 점이다.
[7]
당시 영국은 무상 의료 서비스를 하고 있었지만,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이 펼친 임금 삭감 정책 덕택에 아르헨티나의 의료비용이 외국인들 기준으로는 획기적으로 낮아져 본국 운수비용을 감안하면 큰 차이가 없었다.
[8]
현재는 별개의
속령으로 분류되어 있다.
[9]
위키피디아의
사우스 조지아 침략 항목 참고.
[10]
특히나 포클랜드 인근 남극해 지역은 세계에서도 손 꼽힐정도로 거친 바다다. 후술 되겠지만 영국도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듯이 작전을 준비하여 실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1]
전쟁을 그만두고 UN에 넘겨서 해결하자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12]
알래스카 역시 포클랜드와 마찬가지로 본토와는 떨어져 있는 땅이기에 든 예시다.
[13]
칠레는 남극을 탐사하려는 국가들에게 협조적인 편이어서, 아직까지 이 지정학적 영향력을 실제로 행사한 바는 없긴 하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남극 관련 인력을 사우스 조지아 섬에 파견하고 있다.
[14]
영국 문서에서 행정구역 항목의 해외 영토로 표기된 섬들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포클랜드 전쟁 당시에는 이 목록에 홍콩까지 있었다.
[15]
대한민국 해군의
해군작전사령관에 해당된다.
[16]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나, 영국군의 원수인 엘리자베스 2세는 불만족스럽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고 한다. 자신의 차남 앤드루 왕자가 참전하게 되었으며 앞선 앤서니 이든 총리가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다가 국제 역풍을 맞고 비난받았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여왕의 입장에선 전쟁 자체를 진행하는게 굉장히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17]
비록 사출기가 1대뿐인 20,000톤급 항모에 전쟁 당시 30년이 넘은 중고함정이라고는 하나 썩어도 준치라고 전쟁 직전의 영국 해군이 보유한 해리어와 헬기만 운영 가능한
경항모들보다는 여러모로 나은 편이었는데 실제로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측이 순양함 격침 후에도 계속 해상에
항모전단을 배치했다면 포클랜드를 수복하려고 하던 영국측에 더 큰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일 정도였다.
[18]
Fairey Gannet AEW.3. 대잠용 프롭기 하부에 조기경보 레이더를 단 초창기 함상 조기경보기였다.
[19]
블랙번 버캐니어 공격기는 살아남아서 걸프전까지도 운용됐지만 F-4의 경우에는 아크로열이 퇴역하면서 해당 기종을 운용하던 892 비행대대도 해체되고 남은 기체는 공군의 111 비행대대로 이전된 상태였다.
[20]
미국, 영국, 프랑스가 찬성했고 중국과 소련은 기권했다. 당시 비상임이사국인 파나마만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21]
이 당시 아르헨티나군 사진을 보면 미국 장비가 많다.
[22]
아르헨티나의 인구층중 대부분이 백인 계열이며, 이들 대부분은 유럽계 이민자 혈통이다. 즉, 원래 살던곳이라는 주장도 불가능했다.
[23]
남대서양기동부대,
함대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Fleet) 존 필드하우스
해군
대장
[24]
상륙기동전대, 상륙전 준장(Commodore Amphibious Warfare) 마이클 클랩 해군
준장
[25]
상륙군, 제3코만도여단장(Commander, 3 Commando Brigade) 줄리안 톰슨
해병
준장
[26]
항모 / 전투전대,
제1전단 제독(Flag Officer First Flotilla) 샌디 우드워드 해군
소장
[27]
사우스조지아 전대, HMS 앤트림 함장(Captain of the HMS Antrim) 브라이언 영 해군
대령
[28]
잠수함 전대,
잠수함 제독(Flag Officer Submarines) 피터 허버트 해군
중장
[29]
남대서양기동부대, 함대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Fleet) 존 필드하우스 해군대장
[30]
상륙전 / 지역 수송, 상륙전 준장(Commodore Amphibious Warfare) 마이클 클랩 해군준장
[31]
지상군, 코만도부대 소장(Major General Commando Forces) 제레미 무어 해병소장
[32]
항모 / 전투전대, 제1전단 제독(Flag Officer First Flotilla) 샌디 우드워드 해군소장
[33]
잠수함 전대, 잠수함 제독(Flag Officer Submarines) 피터 허버트 해군중장
[34]
시해리어 FRS.1 16기,
해리어 GR.3 4기,
시킹 HAS.2 4기, 시킹 HAS.5 12기, 시킹 HC.4 6기
[35]
시해리어 FRS.1 12기,
시킹 HAS.5 10기
[36]
트롤 어선을 징발해 임시 음향 및 소나 장비를 장착함.
[37]
미군은 전선에 가까운 해외 기지를 이용할 수 있어서 초장거리 비행이 필요없었다. 다만 보안상의 문제로
1999년 유고 공습과 2001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B-2 스피릿이 아예 미 본토에서 목표지역 사이를
논스톱 왕복비행하기도 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인도양
디에고 가르시아 섬의 기지를 이용하여 그나마 비행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
[38]
연료가 부족하여 본국으로 귀환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활주로가 짧아 미라지가 이착륙하기에는 무리인 곳이다. 그래도 미라지 1대가 연료 부족으로 비상 착륙을 시도했으나 새벽부터 영국군의 공습과 해상포격에 시달렸던 대공포 사수들이 오사로 격추시켰다. 그래도 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 기간 중 영국군의 해리어 4대를 격추했다.
[39]
15,000 피트 이상, 3만 피트 이하
[40]
고도 약 100피트
[41]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총 7척 중 피닉스를 포함하여 무려 5척을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에 공여 또는 매각했다.
[42]
이 두 척 또한 미국에서 공여받은 구축함이다. ARA 이폴리토 보우차르드는 미국의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Borie(DD-704)였으며 1972년 아르헨티나 해군으로 재취역했다. ARA 피에드라부에나도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Collett(DD-730)였으며 1977년 재취역했다. 두 척 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에 모두 참전한 역전의 노장이었다.
[43]
항공모함조차 항구에 짱박혀버리자 함재기들도 본토 기지에서 출격하게 되어 간당간당한 항속거리 내에서 작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함재기들이야 전부 A-4이었으나 영국도 미사일을 제외하면 해리어 또한 공중전에 유용한 기종은 아니었다.
[44]
게다가 첫 날 이후로 최첨단 레이더 시스템까지 망가져 영국 해군 함정들이 포격 거리로 접근하기 전까지 알아챌 수도 없었다.
[45]
원자력 잠수함이 첫 진수를 한 1954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포클랜드 전쟁처럼 대규모의 해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굵직한 전쟁은 꽤 많았지만 거의 모두 육상전이나 공중전이 주가 되었고 해전이 주가 된 전투는 포클랜드 전쟁이 유일하다.
[46]
1분 38초에 명중 장면이 나온다.
[47]
어차피 대부분 노후화되어 정확도에 문제가 좀 있었다.
[48]
게다가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의 통합 작업을 하기 직전 전쟁이 나면서 본사 엔지니어들이 전부 철수해버렸고, 아르헨티나 기술자들이 일일이 추측해가면서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49]
장거리 함대공미사일 시다트를 탑재한 42형 구축함이 광역방공 및 조기경보를 맡고, 시울프 대공미사일과 신형 펄스 도플러 레이더, 엑조세, 고성능 소나로 무장한 22형 호위함이 저공/해안 인접 항공기에 대한 근접방어 및 혹시 모를 대함/대잠전에 대비하는 작전방식.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 해군이 미사일 트랩 겸 레이더 피켓으로 매우 자주 써먹었다.
[50]
이 시기 영국 해군 지휘부는 합참의장, 제1해군경, 기동부대 지휘관 모두 초급장교 시절 2차대전을 겪은 베테랑들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나면 배가 가라앉고 사람이 죽는다"는 걸 본인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이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51]
제40, 42, 45 해병 코만도, 육군 낙하산 연대 제2, 3대대 증원, 해병대 SBS 제2, 3, 6분대 증원, 육군
SAS D, G중대 증원
[52]
Scots Guards 연대 2대대, Welsh Guards 연대 1대대, 제7에든버러 공작의
구르카 연대 1대대
[53]
수직이착륙을 위해 컨테이너선 전방을 방염처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컨테이너선에서 해리어를 운용한다는 사실이 워낙 놀랍다보니 아틀란틱 컨베이어를 항공모함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2척의 항공모함에게 헬리콥터와 해리어를 전달하는 것이 임무인 항공기 수송선이다.
[54]
포클랜드 제도는 남극에 가깝고 섬이라 바람도 많이 불어서 꽤 추운 편이다.
[55]
흔히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동서로 나뉘어있다고 인식하므로 의아해 할 수 있으나, 칠레 남단을 보면 푸에고 섬 근해에서 대서양 방향으로 열려있는 해안선(
마젤란 해협)이 확보되어 있다. 때문에 영국군 전폭기들이 이쪽을 돌아다니려면 칠레의 허가가 필요했다.
[56]
Scots Guards.
영국군 근위대를 구성하는 4개 보병연대 중 하나다.
[57]
Welsh Guards. 스코츠 가드와 마찬가지로 영국군 근위대 중 하나다
[58]
이 전투는 1988년에 BBC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나름 유명한 전투였다. BAFTA 9개 부문 노미네이트에 3개 부문 수상일 정도로 성공적인 드라마였다.
[59]
카다피 통치 하의 리비아에서 5월 말에 구입함
[HMS]
노획 후 영국 왕립해군 소속함 '타이거 베이'로 함명 변경
[61]
그것도 항상 미국 달러로만 결제해 더더욱 의심을 샀다.
[62]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알프레도 오스카르 생장(권한대행), 레이날도 비그노네
[63]
히틀러를 막는 데 실패하여 2차대전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64]
라 그랑드 나시옹, '위대한 조국'은 프랑스인들이 자국을 부르는 별명으로
유럽이 세계를 주도하던 당시 특히 앞서나가던 자부심을 드러낸다. 프랑스가 강대국의 지위에서 내려오고 자국 내외의 문제로 휘청이는 현대에도 꾸준히 쓰이며 프랑스인들의 애국심과 자국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65]
2002년에
앤드루 왕자가 참배를 했으며 아르헨티나 참전용사와 유가족들이 찾아와서 성묘를 한다.
관련 위키
[66]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에도 프랑스 언론들이 프랑스군의 작전계획을 전부 떠벌리고 다녀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한 적이 있었다.
[67]
2000년도 이후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도 명칭 문제에 있어 검토한 사실이 있다.
[68]
당연히 아르헨티나에서 만들었으니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옹호하는 프로파간다성 내용이다.
[69]
텀블다운 전투의 영화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