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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2:43:19

토머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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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버지니아 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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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8379242-641F-4E16-9EC4-4DDE7A61F63B.png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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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국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제국 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놀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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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AOL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미국인’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로널드 레이건 에이브러햄 링컨 마틴 루터 킹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6위 7위 8위 9위 10위
조지 W. 부시 빌 클린턴 엘비스 프레슬리 오프라 윈프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빌리 그레이엄 토머스 제퍼슨 월트 디즈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토머스 에디슨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존 F. 케네디 밥 호프 빌 게이츠 엘리너 루스벨트 랜스 암스트롱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무하마드 알리 로자 파크스 라이트 형제 헨리 포드 닐 암스트롱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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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파일:토머스 제퍼슨의 초상화.jp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743년 4월 13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버지니아 식민지 구치랜드 군
(現 버지니아주 구치랜드카운티)
사망 1826년 7월 4일[1] (향년 83세)
버지니아주 마운트 샬러츠빌
재임기간 제2대 부통령
1797년 3월 4일 ~ 1801년 3월 3일
제3대 대통령
1801년 3월 4일 ~ 1809년 3월 4일
서명 파일:토머스 제퍼슨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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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피터 제퍼슨 (1708 ~ 1757)
어머니 제인 랜돌프 제퍼슨 (1720 ~ 1776)
형제자매 여동생 루시 제퍼슨 루이스 (1752 ~ 1810)
남동생 랜돌프 제퍼슨 (1755 ~ 1815) 외 8명
배우자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2] (1748 ~ 1782)
자녀 의붓아들 존 스켈튼
장녀 마사 제퍼슨 랜돌프 (1772 ~ 1836)
차녀 제인 랜돌프 제퍼슨
장남(요절 추정)
삼녀 메리 제퍼슨 웨일스 (1778 ~ 1804)
사녀 루시 엘리자베스 제퍼슨
차남 비벌리 헤밍스 (1798 ~ ?)
오녀 해리엇 헤밍스 (1801 ~ ?)
삼남 매디슨 헤밍스 (1805 ~ 1877)
사남 에스톤 헤밍스 제퍼슨 (1808 ~ 1856)
학력 윌리엄 & 메리 대학교 ( B.A.)
윌리엄 & 메리 대학교 (LL.D.)[3]
종교 무종교 ( 이신론)[4]
신체 189cm[5], 84kg
최종 당적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문장 파일:Thomas_Jefferson_Arms.png }}}}}}}}}

1. 개요2. 약력3. 생애
3.1. 대통령이 되기 전3.2. 선거 출마3.3. 대통령이 되다3.4. 퇴임 이후
4. 가족관계5. 평가6. 기타7. 대중매체에서8. 선거 이력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권력에 관해서는 그 어떤 인간도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그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헌법의 사슬로 묶어놔야 된다.
- 토머스 제퍼슨 (1798, 버지니아-켄터키 결의안 중)

미국의 제3대 대통령. 미국 건국의 주역들 중 한 명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통령 뿐만 아니라 철학자, 사상가, 건축가, 교육자, 초대 국무부 장관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제퍼슨 민주주의라고도 불린다.

2. 약력

3. 생애

3.1. 대통령이 되기 전

파일:Thomas_Jefferson_1791.jpg
국무장관 시절의 제퍼슨

건국 초기의 미국 대통령들이 대부분 그렇듯, 제퍼슨도 부유한 농장주 가문 출신 사람이었다.[6] 그러다 성인이 되어서는 변호사가 되어 여러 문제를 다루게 되었고, 나중에는 식민지 의회의 의원까지 지내게 된다. 그러나 미국 식민지 영국 정부는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때 제퍼슨은 영국 본토가 식민지에서 벌이는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다.

이후 미국 독립전쟁에서 그는 미국을 지지하였고,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해 인권 등의 문제에 대해서 작성하였다. 이렇듯 제퍼슨은 인권 문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억압적인 정책에 반대하였다.
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 It is it’s natural manure.
자유의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새로워져야 한다. 피는 즉 자유의 천연적인 거름이다.
1787년, 존 애덤스의 사위 윌리엄 스미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7]

그 후 버지니아 주지사와 프랑스 공사를 연연하고 국무장관의 자리에 올라 반연방주의(공화주의)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존 애덤스, 알렉산더 해밀턴 등의 연방주의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들의 대립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 독립전쟁 후 군비 등으로 생긴 채무를 각 주가 균등하게 나눠서 갚느냐, 아니면 각자 알아서 갚는가의 문제. 빚을 덜 진 주의 이익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제퍼슨은 해밀턴의 균등한 분배를 반대하였다. 결국 해밀턴은 수도 워싱턴 D.C.로 이전하자는 합의안을 이끌어 각 주가 빚을 균등하게 갚자고 타협하였다.

1794년에는 국무장관에서 물러났는데, 혁명 프랑스의 미국 공사 에드몽 주네가 (중립 포지션을 취하는) 미국을 비판하며 '혁명의 적 늙다리 워싱턴을 처형해야 한다!', '프랑스가 원하면 얼마든지 미국을 전복시킬 수 있다!' 며 패기롭게 떠들어댄 것이 컸다. 친불파 포지션이었던 제퍼슨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이었을 것이다.[8]

3.2. 선거 출마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불출마 선언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은 연방주의자들의 후보인 존 애덤스와의 대결에서 패배했으나, 당시에는 2등이 부통령이 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부통령이 되었고 당연히 제퍼슨은 사사건건 대통령 애덤스의 정책에 반대하며 그와 대립했다.

3.3. 대통령이 되다

... a wise and frugal government, which shall restrain men from injuring one another, which shall leave them otherwise free to regulate their own pursuits of industry and improvement, and shall not take from the mouth of labor the bread it has earned. This is the sum of good government, ...
... 현명하고 검소한 정부로서,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지는 못하게 하되, 그 외에는 각자에게 맡겨 자유로이 스스로의 근면과 발전을 자율적으로 추구하도록 하며, 노동을 통해 얻은 양식을 빼앗지 않는 것. 좋은 정부라 함은 이 모든 것을 합한 것이고, ..."
대통령 취임 연설 中

그 후 다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1801년 3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꽤 험난했다. 당시 선거에서는 토머스 제퍼슨과 에런 버가 선거인단에게서 정확히 동수(73표)의 표를 얻어 1801년에 하원 투표로 넘어갔는데, 35번이나 투표를 치르고도 대통령이 결정되지 않았다가 36번째 투표에서 메릴랜드, 버몬트, 델라웨어,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입장을 바꿈으로써 제퍼슨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은 연방주의자들이 그나마 제퍼슨보다 성향이 가까운 버를 밀어주다가, 연방주의자의 거두이자 버와 사이가 엄청나게 나빴던 알렉산더 해밀턴이 36번째 투표 직전에 입장을 번복하고 정적인 제퍼슨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미국에는 16개 주가 있었는데, 처음 투표 당시에는 8개 주가 제퍼슨을 지지했고, 6개 주가 버를 지지했으며, 2개 주가 기권을 했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과반수 주의 지지를 얻어야 대통령이 될 수 있기에 제퍼슨은 딱 한 주가 모자라서 첫 투표에서 대통령이 되지 못했지만 결과를 볼 때 제퍼슨이 대세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었는데, 버는 제퍼슨과 정적이었기 때문에 끝끝내 후보 사퇴를 거부했고, 결국 투표가 반복된 것이다.

버는 당시 헌법에 따라 2등 득표자로서 부통령이 되었지만 제퍼슨의 정책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 웃긴 건 에런 버는 제퍼슨과 같은 민주공화당 소속이었다는 것. 같은 당 소속인데도 버와 제퍼슨은 죽어라 싸워댔다. 사법부 역시 대부분은 전임 존 애덤스가 임명한 인물들이어서 사사건건 제퍼슨을 견제하였다. 그래서인지 제퍼슨은 해밀턴과의 협의로 연방주의자들과 타협해 내각 자리를 마련해주고[9] 1기 재임 시절엔 연방주의 기조도 무리하게 바꾸지 않는다. 허나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연방주의자들의 정책은 높은 과세로 인기를 잃은 데다 수장들이 정치를 은퇴하는 등 지도부가 사라져[10] 점차 소멸하여간다.

제퍼슨의 재임 기간 동안 벌어진 큰 사건으로는 미국의 영토를 크게 넓힌[11], 당시 나폴레옹과 한 루이지애나 거래가 있으며[12] 해적들을 토벌하기도 했다. 미국 시민권을 따기 위해 이민자의 체류기간을 5년에서 14년으로 늘린 외국인법이 폐지되었고, 보안법으로 체포된 기자들과 시민들도 석방시켰다.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하였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문명화시키려고 노력했다.[13] 정확하게 말하면 미시시피 강 동부 지역을 미국의 영토로 선언해 동부 인디언들은 백인 문화로 편입시키고 나머진 미시시피 서부로 몰아내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때문에 이때부터 상당수 원주민들과는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또한 클라크와 루이스 원정대(Lewis and Clark Expedition)를 보내어 미국 서부에 대한 과학적 탐사를 시키지만, 서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도 포함하고 있어서 당시 서부를 통치하고 있던 스페인과 은근한 신경전도 벌인다.

3.4. 퇴임 이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1826년 7월 4일 독립기념일 사망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몇 시간 후 그의 정적이자 친구, 전임 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도 세상을 떠났다.[14]

그의 묘비명은 이렇다.
파일:4585543.jpg
"HERE WAS BURIED
THOMAS JEFFERSON
AUTHOR OF THE
DECLARATION
OF
AMERICAN INDEPENDENCE
OF THE
STATUTE OF VIRGINIA
FOR
RELIGIOUS FREEDOM
AND FATHER OF THE
UNIVERSITY OF VIRGINIA."

BORN APRIL 2 1743 O.S.
DIED JULY 4 1826
"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이자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제안자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15]
토머스 제퍼슨이 여기 잠들다"

율리우스력 1743년 4월 2일 나서
1826년 7월 4일 졸하다

보다시피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은 안 적혀 있다. 세 가지는 가장 기억되고 싶은 자기의 흔적을 적은 것. 어차피 반연방주의자로서 대통령을 그렇게 기념할 만한 자리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4. 가족관계

파일:external/www.firstladies.org/8.jpg
제퍼슨의 첫째 딸 마사 제퍼슨 랜돌프의 초상화[16]
1772년, 8촌지간인 마사 스켈턴 부인[17]과 결혼하여 총 6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중 딸 2명, 마사와 메리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부부의 사이는 매우 좋았던 것으로 전해지나 안타깝게도 마사는 마지막 아이를 낳은 지 4개월 만인 1782년 9월 6일, 난산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이는 제퍼슨을 큰 비탄에 빠지게 했다. 아내의 죽음 이후 3주 동안 서재에 틀어박혀 정상적인 생활을 못했을 정도.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사는 임종 때 남편에게 자기가 죽은 뒤에도 재혼하지 않을 것을 부탁했고[18] 그는 아내에게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아내에게 한 약속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후 제퍼슨은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19]

하지만 마사 제퍼슨과의 결혼 당시 딸려온 마사의 이복여동생 겸 흑백혼혈 노예인 샐리 헤밍스와 아내 사후 오랫동안 내연 관계에 있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실제 샐리가 아버지가 불분명한 쿼터혼혈 아이들을 여러 명 낳은 건 사실이고,[20] 스캔들이 터진 게 제퍼슨의 아내가 이미 죽은 후인지라 샐리가 죽은 제퍼슨의 아내 대신 제퍼슨의 정부 노릇을 했다는 건 당시부터 오랫동안 미국 정가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이 떡밥은 당시부터 정적들에게 회자되었는데, 제퍼슨 본인은 샐리의 아이들에 대한 정적들의 비난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Sally-Hemings.png
샐리 헤밍스의 상상화[21]
그렇게 제퍼슨 사후 묻히는가 싶었는데 이 떡밥은 20세기까지도 유지돼서 1990년대 들어선 후손들의 유전자를 분석하기도 했다. 그 결과 제퍼슨 가문의 DNA를 물려받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토머스 제퍼슨의 아이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측은 샐리 아이들의 아버지는 제퍼슨의 형제라고도 주장한다. DNA 검사가 샐리 후손들이 제퍼슨 집안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만을 밝혔을 뿐이지 제퍼슨 본인의 피를 직접 물려받았는지는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토머스 제퍼슨이 가장 유력한 아버지 후보인데, 제퍼슨 친척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살았고, 그러다보니 당시 샐리를 임신시킬 수 있는 제퍼슨은 확률상 샐리를 바로 옆에 뒀던 토머스 제퍼슨이 가장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샐리도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제퍼슨의 처제라는 점과 샐리의 어머니도 백인 혼혈[22]이고 제퍼슨 장인의 몸종이었다. 골때리는건 첫 아이의 나이를 역산하면 샐리가 제퍼슨과 첫 성관계를 맺은 나이는 대략 10대 중반 쯤으로 추정된다.
파일:external/image.cine21.com/M0010037_poster_01.jpg
샐리와 제퍼슨의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95년작인 《대통령의 연인들》(Jefferson in Paris)[23]이란 작품이다.[24] 영화는 샐리의 아들 매디슨 헤밍스가 부모의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되는데 아내 사후 제퍼슨이 프랑스 파리에서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앞서 언급한 샐리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유부녀 화가인 마리아 코스웨이 부인과의 (실제로 있었던) 연애사도 다뤄진다.

5. 평가

A political visionary's expression of the American mind still inspires revolution around the world.
미국 정신에 대한 정치적 선지자(先知者)의 표현은 지금까지도 ​​세계에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타임지, 1999년 송별호에서 선정한 각 세기의 인물 중 18세기 인물로 토머스 제퍼슨을 선정하며. 기사 원문

토머스 제퍼슨은 그가 내세운 사상과 행적이 오늘날에도 평가를 받아 러시모어 산의 큰 바위 얼굴에도 새겨지는 등 대우를 받고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그가 내세운 공화주의 인권주의, 루이지애나를 매입해 미국의 영토를 크게 넓힌 점 등 미국의 성장(Growth)을 상징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미국에서 평가나 인지도가 높은 대통령 중 한명이다.[25] 리버럴이나 리버테리안들이 좋아하는 대통령이기도 하다.[26][27]

실제 그가 내세운 반연방주의 사상과 인권주의는 연방 정부의 지나친 권력 독점 횡포를 막고[28] 주 정부와 국민들의 권리를 수호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허나 한편으론 그의 지나친 중앙 정부 견제[29]로 인해 미국에 강한 정부가 없어 결국 남북 전쟁의 홍역을 치러야 했다는 비판도 있다. 또 본인이 대농장주로 노예들을 부리기도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30] 그가 내세운 인권주의도 결국엔 백인이나 특정 계급만의 인권, 자유 아니냐는 식으로 내로남불이라고 까는 사람도 있다. 어린 흑인 노예와 만나[31] 사생아까지 낳았을 확률이 높다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32] 이런 점을 들어 2020년 BLM 운동 당시 제퍼슨의 동상 역시 철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일부는 실현되기도 했다. #

사실 제퍼슨은 인종 문제에 관해 젊은 변호사 시절부터 매우 모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에는 보편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노예제를 부당한 것으로 보았으나, 제퍼슨 연구자들은 그가 몇몇 재판을 변호하면서 신념을 많이 수정했다고 지적한다. 직접 흑인 노예들과 교류를 해보니 도저히 지적인 대화가 가능하지 않았다고 느낀 것이다. 물론 이는 최소한의 기초적인 교육조자 받지 못했던 당시 노예들의 끔찍한 상황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제퍼슨은 이것을 흑인이라는 인종이 지닌 자연적인 결함으로 단정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흑인을 백날 교육시켜봐야 백인같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33] 덕분에 이런 인종주의자 딱지가 오늘날엔 그의 자유주의 이념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미국내 흑인 일반 대중의 제퍼슨에 대한 인식은 가식적인 백인의 전형이라는 평이 많다고 한다.

허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퍼슨이 당대 심지어 현대의 시각으로 봐도 꽤나 진보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제퍼슨을 비롯한 반연방주의자들의 이러한 견해는 후에 권리장전(수정헌법)이라는 개념으로 도입된다. 종교관에서도 그의 자유주의적 성향이 묻어나는데, 당시만 해도 영국 성공회 국교로 두듯이 미국도 주에 따라 국교를 정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13개 주로 이뤄진 미국 연방을 운영하는 데에 기독교가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영국처럼 국교를 따로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 상충했던 것. 실제로, 메릴랜드는 가톨릭, 펜실베이니아는 퀘이커, 버지니아/뉴욕/조지아는 성공회가 공식 종교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퍼슨은 “진리는 위대해서 홀로 내버려둬도 승리한다. 우리는 성공회도, 가톨릭도 침례회도 아니다. 모두 크리스천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공화주의자들과 함께 국교제 폐지를 주장했고 정교분리 원칙을 못박았다. 이는 이신론적인 그의 종교관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제퍼슨은 중상주의를 주창한 해밀턴과 반대로 그 자신이 지주이기도 한만큼 중농주의를 주창했고, "나는 정부에 자신의 힘을 믿고 도전하며 법도 어길 수 있는 주식회사 재벌이 생겨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상인에겐 조국이 없다. 그들에겐 태어난 곳이 을 긁어모을 수 있는 땅만큼 사랑스럽지 않다.", "나는 확신한다. 은행이 군대보다 위험하다. 다음 세대가 갚아야 할 채권의 발행을 정당화하는 재정 이론은 후손들을 상대로 한 대규모 사기극일 뿐이다.", "정부가 돈 놀이하는 기관과 돈 많은 기업들 손아귀에 떨어지는 날, 민주주의와 미국 독립도 종말을 고할 것이다." 등의 말을 하며 재벌의 탄생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 그는 자작농을 공화주의 미덕의 모범이라 보고 도시와 자본가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여튼 현대 진영에선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 인물.
... it left to me to decide whether we should have a government without newspapers, or newspapers without a government, I should not hesitate a moment to prefer the latter. But I should mean that every man should receive those papers and be capable of reading them.
...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선택하겠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들이 신문을 받아 보고 읽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대통령 취임 14년 전, 신문사 사장 시절의 발언.
언론사를 운영했던 경력이 있다보니 당시에 남겼던 몇몇 말들이 아직까지도 언론 자유와 관련해 유명한 명언으로 회자된다. 대표적인 것이 상단에 인용한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 발언이다. 또 하나는 "언론이 자유롭고 국민 모두가 글 읽을 줄 아는 나라에서라면 만사가 안전할 것이다.". 언론 사상사에서도 신문이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한 인물로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6. 기타

파일:$2 front.jpg

7. 대중매체에서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779 미국 주지사 선거 버지니아주 반연방주의 무투표 당선 당선 (1위) 초선
1780 재선
1792 미국 부통령 선거 미합중국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4 (3.03%) 낙선 (3위)
미국 대통령 선거 0 (1.52%, 4명) 낙선 (4위)
1796 미국 부통령 선거 68 (33.17%) 당선 (1위) 초선
미국 대통령 선거 31,115 (46.6%, 68명) 낙선 (2위)
1800 미국 대통령 선거 41,330 (61.43%, 73명) 당선 (1위) 초선
1804 미국 대통령 선거 104,110 (72.79%, 162명) 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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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치인 존 애덤스 · 알렉산더 해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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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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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애덤스와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2] 마사 제퍼슨 여사 사후엔 후술되어있듯 마사 제퍼슨의 이복여동생이기도 한 샐리 헤밍스와 정부 관계로 지냈다는 의혹도 있다. [3] Legum Doctor. [4] 예수를 스승으로 믿었지만, 조지 워싱턴처럼 명목상만으로도 성공회 신자가 아니고 그냥 예수의 신성, 기적, 삼위일체 모든 것을 부정한 이신론자이다. # # [5] 예나 지금이나 키가 매우 큰 장신이다. 이 거대한 키 때문인지 파티에서 언제나 돋보였다. [6] 친척으로는 에드먼드 제닝스 랜돌프, 페이튼 랜돌프, 윌리엄 & 메리 대학교의 설립자 윌리엄 랜돌프, 리처드 블랜드가 있다. [7] 임팩트가 있었는지 해당 문구는 이후 세계 각국에서 인용되었는데, 한국만 해도 4.19 혁명 직후 사상계에서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식으로 부분 재인용되어 쓰였고, 19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가들의 입에 자주 회자되었던 명언이기도 했다. [8] 사실 프랑스도 미국 독립전쟁에 20억 리브르 이상을 썼는데, 미국이 미적미적 중립을 취하니 열불이 나는 게 당연했다. 물론 해군 말아먹은 주제에 처형이니 전복이니 외친 주네의 발언은 그 시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정신나간 발언이긴 하다. [9] 이때 연방파들도 대선 패배의 후유증 등으로 해밀턴파와 애덤스파가 싸우고 있었다.(...) [10] 애덤스와 존 제이는 공직에서 은퇴했고, 해밀턴은 1804년 부통령 에런 버와의 결투 도중 사살(...)당한다. 사실 이때만 해도 성격이 온화한 편이었던 제퍼슨은 에런 버도 정적보단 부통령으로 대우해주고 있었는데, 자기한테 말도 안하고 결투가 허용되는 다른 주 가서 부통령이 전직 재무장관을 사살한 사건에 충격받은 나머지 이후부턴 에런 버를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는데 총력을 쏟아붓는다. [11] 항목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미국 영토 기준에선 나라 크기를 2배로 늘리는 수준이었다. [12] 사실 프랑스 입장에선 웃픈게, 미국 독립 전쟁 지원해주다 재원이 쪼그라들어 대혁명을 맞고 왕정이 무너졌는데, 그 재원 충당하고자 나폴레옹이 선택한게 루이지애나를 싼값에 미국에 넘기는 것이었다. [13] 허나 이에 대해선 비판도 있는데, 노예제를 반대하고 무역도 금지했으나 정작 현존하는 노예는 주의 자율에 맡긴다는 식이었고(지금 와서 보면 안일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당대 반연방주의자로 주의 권리를 존중했던 제퍼슨은 설령 그게 잘못된 거라 할지라도 주 자체적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보고, 자유주들을 늘려가 노예 허용주들을 여론으로 압박하다 보면 언젠간 자연스럽게 노예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봤다.) 심지어 그 자신도 노예를 소유한 대농장주였기 때문이다. 뮤지컬 해밀턴에서도 이 점을 들어 해밀턴에게 신나게 까였다. [14] 애덤스는 제퍼슨이 몇시간 전에 죽은 줄 모르고 죽기 직전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있...(Thomas — Jefferson — still surv — )"이라는 말을 남겼고,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제퍼슨 본인은 애덤스에 대한 특별한 언급없이 "오늘이 4일인가?"라며 날짜를 물어보고 죽었다. [15] 여담으로 이렇게 버지니아대를 설립한 걸 자랑스러워했지만, 정작 훗날 버지니아대에서는 노예제를 반대했다지만 그래도 노예를 뒀던 제퍼슨을 기념하는 게 맞느냐는 여론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 [16] 모친인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은 초상화가 없고 실루엣만이 남아있다. 떠도는 초상화는 몇 있는데 다 이 딸 마사 제퍼슨 랜돌프의 모습을 참고한 상상화로 추정된다. 다만 실제로 마사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전해진다. [17] 결혼 전 성은 웨일스. 변호사이자 농장주인 존 웨일스의 딸이었다. 1766년 18살의 나이로 변호사 배서스트 스켈턴과 결혼하여 존이라는 아들을 두었으나 2년이 채 안 되어 남편이 사망하여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아들인 존마저 마사가 재혼하기 몇 개월 전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 [18] 남아있는 자녀들에게 새어머니가 생기는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마사 본인이 새어머니들과 불편한 관계였던 경험이 있어서라고. [19] 다만 외교관으로서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영국계 이탈리아인 화가 마리아 코스웨이 부인에게 진지한 연애 감정을 가진 적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20] 실제 매디슨 헤밍스, 이스턴 헤밍스 등은 훗날 자기가 제퍼슨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21] 샐리 헤밍스는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다. [22] 샐리의 조부모 4명 중 3명이 백인이었다는 점 등이다. 그래서인지 생전 모습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피부도 하얀 축에 들었다고 한다. [23] 제퍼슨이 프랑스 대사로 파리에 머물 때 얘기. [24] 실제 샐리처럼 혼혈인 탠디 뉴턴이 샐리 역을 맡았다. 뱅상 카셀이 나오기도 하고 귀네스 팰트로도 나온다. [25] 미국에서 인지도 높고 업적 좋은 대통령을 손꼽으라 하면, 워싱턴, 링컨, 두 루스벨트 등과 함께 자주 꼽히는 대통령이다. [26]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실 클린턴의 중간 이름이 제퍼슨이기도 하다. 한편, 공교롭게도 르윈스키 스캔들 당시 유전자 검증은 제퍼슨 자손들의 유전자 검증과 같은 기술로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27] 당대 사상적으로 대립한 존 애덤스가 미국 전통 보수주의의 뿌리 중 하나라면, 제퍼슨은 미국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의 시초 중 한명으로 여겨진다. [28] 미국이 오늘날까지 독재자 없이 굴러가는 역사를 만든 장본인 중 한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신생국 연방 정부의 과한 중앙집권화를 제퍼슨이 경계하면서 독재의 씨앗을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 [29] 일례로 미국 행정부는 대통령 경호 같은 걸 전담하는 부서가 대통령의 권력 강화를 부른다는 이유로 한동안 만들지 않았다. 때문에 미국 대통령들은 지속적인 신변 위험에 시달렸다. 자세한건 미국 비밀임무국 항목 참고. [30] 제퍼슨은 노예제 반대론자로 재임 시절 노예 무역도 금했지만, 정작 주의 권리를 과하게 옹호하다 보니 노예제같은 본인조차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는 사안까지 주가 자체적으로 알아서 그들끼리 해결할 문제라고 봐 방치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는 자유주들을 늘려가 노예 허용주들을 여론으로 압박하다 보면 언젠간 자연스럽게 노예제도 사라질 것이라고 봤지만, 현실은 여러 희한한 이론들이 등장하면서, 수십 년 후 남북전쟁이란 댓가를 치르고 나서야 결국 미국에서 노예제는 사라진다. 물론 반대로 보면 결국 피를 봤다는 점에서, 제퍼슨도 당대에 전쟁 아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봤기에, 반연방주의란 그럴듯한 명분으로 이 문제를 방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31] 상기되어있듯 부인 사후 엮인거면 불륜은 아니다. 사실 샐리의 나이를 추정하면 부인 생전엔 사실상 꼬마라서 엮일 건덕지도 없다. 샐리 항목에 따르면 1782년 부인 사후 7년이 지난 1789년부터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32] 실제 오늘날 미국 대중매체에선 제퍼슨을 십대 흑인 소녀를 노리는 변태(...) 백인 노인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는 모양. [33] 사실 이러한 시각은 당시 미국은 물론 서양권 전반에서 흔히 공유되던 시각이긴 해서, 동시대 미국 지식인들은 흑인 소녀 필리스 위트리(Phillis Wheatley)가 인상적인 문학 작품을 썼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그녀를 필라델피아에 데려와서 장기간 관찰, 시험했을 정도였다. [34] 넓게 보면 이성을 중시한 자유주의 신학자로도 볼 수 있다. [35] 조지 워싱턴이나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 알렉산더 해밀턴 등 다수가 이신론자였다고 평가받는다. [36] 미국 독립에 큰 기여를 한 토머스 페인도 당시 목사들에겐 이신론자를 넘어 무신론자라고까지 선동당하며 많이 까여서, 제퍼슨과 함께 '양 톰'(두 톰)이라고 공격 받은 적이 있다. 그나마 대통령까지 하며 정치적으로 성공해 함부로 까진 못한 제퍼슨과 달리, 페인은 사인이라 온갖 가짜뉴스의 희생양이 되었다. [37] 지금이야 미대륙은 다른 곳 못지 않게 맹수들이 우글거리지만, 당시만 해도 카더라밖에 없었지 직접 본 사람은 없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