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9년 9월 16일 ~ 10월 18일 조지아 주 서배너에서 영국군과 대륙군+프랑스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영국은 이 전투에서 대륙군을 격파하고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에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했다.2. 배경
1778년 6월, 헨린 클린턴 소장은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해 전선이 확대된 상황에서 필라델피아까지 보급하기 어렵고 뉴욕까지 위험해질 수 있으니 뉴욕으로 철수하라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1만 병력을 이끌고 뉴욕으로 철수했다.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그런 영국군을 추격해 몬머스 전투에서 영국군 후위부대와 교전을 벌였지만 적이 뉴욕으로 철수하는 걸 저지하지 못했다. 이후 클린턴은 북미 식민지 방면 전쟁장관 조지 사크빌로부터 북부 식민지에서의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3,000명의 병력을 조지아와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파견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조지 사크빌은 남부 식민지 주민들은 북부에 비해 영국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편이니 영국군을 그쪽으로 보낸다면 호응을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이에 따라 클린턴은 상륙 작전을 준비하기로 화고 플로리다의 영국군 사령관 오거스틴 프레보스트 소장에게 플로리다에 주둔한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 상륙 작전에 가담한 후 당분간 남부 일대에 파견된 영국군을 지휘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1778년 11월 27일, 아치발트 캠벨 중령이 이끄는 영국군이 뉴욕 샌디후크에서 하이드 파커 함장이 지휘하는 영국 해군 편대의 호위를 받으며 출항했다. 캠벨의 영국군은 1778년 12월 23일 서배너 강 하구의 타이비 섬에 도착했다. 캠밸은 스코틀랜드 출신 부대 하나를 상륙시켰고, 그들은 두 명의 지역 주민들을 데려왔다. 이 두사람은 서배너 수비대의 규모와 미군 주둔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캠벨은 적의 방비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프레보스트 소장이 도착하기 전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했다.
12월 28일, 영국 함대는 서배너 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륙이 가능한 첫 지점인 기라르도 농장을 향해 진군했다. 기라르도 농장은 강에서 4분의 3마일 떨어진 언덕에 위치했고, 소규모 대륙군이 모여 있었다. 캠벨 중령으로부터 농장을 접수할 것을 지시받은 카메론 대위는 하이랜드 1개 부대를 이끌고 기라르도 농장으로 쳐들어갔다. 양측은 곧 총격전을 벌였고 카메론 대위와 하이랜더 7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대륙군은 곧 패주했고, 영국군은 기라르도 농장을 점령했다. 이후 캠벨은 3천 명의 병력을 상륙시켰고, 대륙군은 이에 맞서 영국군의 진군로에 위치한 다리를 파괴하고 기라르도 농장 근처의 언덕에 진을 쳤다.
양군은 한동안 서로를 마주보고 대치했는데, 콰미노 돌리라는 이름의 흑인 노예가 캠벨을 찾아와서 대륙군의 진영 후방에 있는 지점까지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고 알려줬다. 캠벨은 이를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본대를 적의 전면으로 진군시켜 대륙군의 시선을 잡아끈 뒤 별동대를 돌리가 가르쳐준 지름길을 따라 파견해 적의 후방을 요격하게 했다. 대륙군은 후방에서 갑자기 적의 총탄 소리가 들리자 삽시간에 전열이 붕괴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서배너로 도망치다가 강에 빠져 익사했다. 캠벨은 대륙군 진영을 점거하고 몇 개의 대포와 상당한 양의 물자 및 탄약을 포획했다. 한편, 하이드 파커 함장은 그의 함대를 서배너 강으로 거슬러 내려가 서배너 항구로 진군하게 했고, 그는 서배너 항구에서 대륙군 선박 몇 척을 포획했다.
이후 캠벨 중령은 조지아 일대에 일련의 군사 작전을 벌였고, 대륙군은 적의 공세에 밀려 몇 주 만에 조지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영국군은 조지아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고, 많은 조지아 주민들이 조지 3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영국군에 몰려들었다. 상황이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자, 대륙의회는 남부의 미군을 지휘할 사령관으로 매사추세츠 주 출신의 벤자민 링컨 소장을 임명했다. 하지만 링컨은 적과 당장 싸우기에는 전력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충분한 전력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후 조지아에 도착한 프리보스트 소장은 캠벨 중령으로부터 지휘권을 이양받은 뒤 1779년 4월과 5월 찰스턴을 공략하기 위해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진군했으나 적에게 저지되었고 단지 사우스 캐롤라이나 해안의 포트 로얄 섬만 공략한 채 6월 말 조지아로 돌아왔다. 그 사이 프랑스군과 합세한 대륙군은 본격적으로 조지아 주를 탈환하기 위해 서배너에 주둔한 영국군을 향한 공세를 기획했다. 이리하여 미국 독립 전쟁에서 미국 남부 일대에서 벌어진 첫번째 대규모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지휘관: 어거스틴 프레보스트 소장
- 병력: 3,200명 + 전함 8척
3.2. 대륙군+프랑스 연합군
- 대륙군 사령관: 벤자민 링컨 소장
- 프랑스군 사령관: 데스탱 백작 장 바티스트 샤를 앙리 엑토르
- 병력: 대륙군 정규명 600명, 대륙군 민병대 750명, 프랑스 정규군 3,500명
4. 전투 경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이자 러틀리지 주지사인 동시에 찰스턴의 대륙군 지휘관인 몰트리 장군은 조지아를 탈환하기 위해 서인도 제도의 프랑스 해군 사령관인 데스탱 백작에게 대륙군의 조지아 주에 대한 공세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테스탱 백작은 요청을 받아들이고 20척의 전열함, 포함 2척, 프리깃 11척, 육군 6천 명을 운송하는 수송선을 이끌고 미국 남부를 향해 진군했다. 데스탱은 진군 도중에 HMS 익스페리먼트와 HMS 아리엘 호를 비롯해 영국군에 대한 급료 및 물자를 실은 수송선 2척을 포획했다. 1779년 9월 8일, 데스탱의 함대는 일부 대륙군 선박과 함께 서배너 강 하구에 도착했다. 프랑스군의 접근을 경계한 프레보스트 소장은 즉시 조지아 주 전역에 흩어져 있던 병력들을 모두 서배너로 불러들이고 주변의 농지로부터 징발된 수백 명의 노예들을 이끌고 서배너 마을 외곽에 참호와 목책을 건설하게 했다. 또한 프레보스트 소장은 프랑스 함대가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걸 저지하기 위해 영국 선박 몇 척을 강 상류 지점에 가라앉히고 통나무 수벽을 건설했다.9월 12일, 데스탱 백작은 3,500명의 병력을 서배너에서 5마일 떨어진 지점에 상륙시켰다. 그 후 그는 9월 16일에 서배너에 도착했고 링컨 소장이 이끄는 대륙군도 저녁 무렵에 도착했다. 데스탱 백작은 서배너 수비대에게 프랑스 국왕에게 항복하라는 통지문을 보냈다. 프레보스트 소장은 아군이 전부 집결할 때까지 시간을 끌기로 하고 데스탱 백작에게 항복 여부를 결정할 때까지 24시간 동안 기다려달라고 통보했다. 이후 병력을 어느 정도 모은 프레보스트 소장은 데스탱 백작의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데스탱과 링컨은 적을 포위하기로 결정하고 요새 남쪽에서 1마일 쯤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설치한 뒤 포위 공격을 위한 참호 공사를 시작했다.
10월 3일, 참호 공사가 완료되었고 프랑스군의 포병대가 자리를 잡았다. 다음날, 프랑스 포병대는 박격포 9문과 대형 포 37문을 동원해 서배너 시가지를 향해 포격했고, 이와 동시에 서배너 강 하구에 있던 프랑스 함대도 포격을 가했다. 프레보스트 소장은 프랑스군과 대륙군에게 서배너 시의 여자와 아이들 만이라도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연합군은 이를 거부했다. 포격은 5일 동안 지속되었고 읍내가 심하게 파손되었지만, 영국군이 건설한 요새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
프랑스군 소속 포위 기술자들은 데스탱 백작에게 요새에게 타격을 입힐 만한 거리에서 참호를 파려면 열흘이 걸릴 거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데스탱 백작은 존 바이런 제독이 이끄는 영국 서인도 제도 함대가 자신의 함대를 공격할 것을 염려했고, 악천후가 발생할 것도 염려되었기에 그렇게 오래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데스탱 백작은 링컨 소장과 의논한 끝에 10월 9일 새벽 4시에 수비대를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데스탱 백작은 딜롱 백작, 스탠딩 남작, 노아유 백작이 지휘하는 세 개의 부대를 차출해 그 중 2부대로 요새를 기습하고 나머지 한 부대는 예비대로 남기기로 했다. 또한 대륙군은 맥킨토쉬 장군이 이끄는 제1 사우스캐롤라이나 정규 연대와 존 로렌스 대령이 이끄는 제2 사우스 캐롤라이나 정규 연대, 그리고 조지아 민병대를 기습 작전에 투입시키기로 했다.
기습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딜롱 백작이 이끄는 부대는 서배너 요새의 북쪽 지점에서 서배너 강과 영국군 포대 사이를 기습 돌파한다. 그리고 조지아 민병대는 영국군의 반대 측면에서 가짜 공세를 펼쳐 적의 시선을 잡아끌고, 나머지 부대는 데스탱과 링컨의 지휘하에 스프링 언덕에 설치된 요새를 공격한다. 그러나 이 작전 계획은 곧 영국군에게 누설되었다. 찰스턴 연대 소속이었던 제임스 커리 중사가 고위 장교들이 이 작전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전해듣고 몰래 영국군 진영으로 가서 연합군의 작전 요점과 공격 시기를 알려준 것이다. 이에 프레보스트 소장은 척탄병 제 60연대와 제 71 하이랜드 대대를 스프링 언덕 요새로 파견해 수비를 강화하게 했다.
10월 9일, 연합군은 약속대로 새벽 4시에 작전을 개시했지만 안개가 짙게 끼는 바람에 진군이 지연되었고, 정해진 위치에 가까스로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밝았다. 게다가 딜롱 백작의 부대는 안개를 헤매다가 본래의 진로가 아닌 요새 전면에 나타났고, 곧 수비대로부터 무지막지만 포격을 받자 전의를 상실하고 숙영지로 퇴각했다. 또한 계획대로 적의 시선을 잡아끌 가짜 공세를 펼쳐야 할 조지아 민병대 역시 평원으로 나갔다가 적의 포격 세례를 받고는 숙영지로 철수했다. 이렇듯 별동대가 맥없이 철수하는 동안, 대륙군과 프랑스군 주력은 스프링 언덕 요새를 향해 돌격했지만 적의 무지막지한 저항에 직면하여 많은 손실을 입었다. 제2 캐롤라이나 정규 연대는 먼저 요새 앞에 도착해 성벽을 기어오르려 했지만 적의 거센 반격에 격퇴되었고 수많은 장병과 장교들이 전사했다. 뒤이어 제1 캐롤라이나 정규연대가 공세를 펼쳤으나 역시 격퇴되었다.
이때 프레보스트 소장이 파견한 착턴병 제 60연대와 제 71 하이랜드 대대가 스프링 언덕에 도착해 적의 측면을 급습했다. 적의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대륙군은 숙영지로 도주했다. 프랑스군은 공세를 준비하다가 대륙군이 궤멸되는 것을 보고 공세를 포기했다. 또한 폴란드 출신의 카스미르 풀라스키 대령은 2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아군을 추격하는 적을 막아섰지만 포격을 받고 전사했고, 그가 이끌고 간 기병대는 그의 시신을 숙영지로 데려갔다. 이리하여 기습 작전이 실패하자, 데스탱 백작은 서인도 제도로 철수했고, 링컨 소장은 프랑스군이 떠나버렸으니 서배너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0월 16일에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서배너 공방전은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