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제60-76대 연방 상원의원
윌리엄 에드거 보라 William Edgar Bora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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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eaa7a><colcolor=#fff> 출생 | 1865년 6월 29일 |
미국 일리노이 주 재스퍼 | |
사망 | 1940년 1월 19일 (향년 74세) |
미국 워싱턴 D.C. | |
재임기간 | 연방상원의원(아이다호) |
1907년 3월 4일 ~ 1940년 1월 19일 | |
미 의회 외교위원장 | |
1924년 12월 1일 ~ 1933년 3월 3일 | |
학력 | 캔자스 대학교 (수료) |
종교 | 기독교 ( 개신교, 장로회) |
의원 선수 | 6 |
의원 대수 | 60, 63, 66, 69, 72, 75 |
정당 |
(1892-1896) (1896-1899) (1900-1940) |
배우자 | 메리 맥코넬 보라[1] |
자녀 | 외동딸 폴리나 롱워스 스트롬[사생아]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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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및 법조인이다. 국내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0년대에 중서부의 로버트 M. 라폴레트, 서부의 하이럼 존슨의 뒤를 잇는 진보주의자로 꼽혔던 거물 상원의원으로, 아이다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특유의 강직한 성품으로 '아이다호의 사자'라는 별명이 붙었다.2. 생애
2.1. 초기 생애
일리노이의 웨인 카운티 페어필드 근교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재스퍼에서 대농장주인 윌리엄 네이선 보라와 엘리자베스 웨스트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의 먼 조상은 마르틴 루터의 조강지처로 유명한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로, 직계조상이 176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학창시절에는 공부를 그리 잘하진 못했으며, 학교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10대 시절 전체를 방황하며 보내다가 아버지의 설득을 받은 끝에 미션스쿨을 졸업해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83년부터 누나인 수 보라 내외와 캔자스에서 동거하게 되며 일리노이를 떠난 그는 1885년 캔자스 대학교에 입학한 뒤 결핵에 걸려 휴학하던 도중인 1887년 매부이자 이미 법조인으로 활동하고 있던 안셀 M. 래즐리(Ansel M. Lasley)의 도움을 받아 정식으로 변호사 시험을 통과했으며, 1889년 그가 살던 도시인 리온(Lyon)의 시장의 눈에 띄어 시 변호사가 되면서 처음으로 공직을 맡게 되었다.
공직 생활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정치에 적성이 있음을 깨달은 뒤, 커리어를 쌓기 위해 그가 죽을 때까지 지역구로 삼게 될 아이다호로 떠났으며,[3] 1892년 공화당에 입당해 주 공화당 중앙위원회에 입성하며 거의 50년에 달하는 공화당원 생활을 시작했다.
2.2. 주 공직 생활
예나 지금이나 아이다호는 감자 농사와 귀금속 채광으로 유명한 지역으로, 특히 이 시기에는 미국 전역에서 거의 반 세기에 걸쳐 벌어진 대규모 노사분규 사태인 석탄 전쟁(Coal Wars)의 영향을 받아 아이다호 또한 각종 노사쟁의 및 파업 사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보라는 노동자들의 편을 들어 노동권의 증진을 호소하면서 유명세를 얻었으며,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선 지나치게 보수적인 윌리엄 매킨리를 보이콧하고 상대 정당의 대선 후보인 윌리엄 J. 브라이언을 지지하는 은본위제 공화당(Silver Republican)에 가담하면서 진보적인 성향이 확고히 자리잡았다.19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은본위제 공화당의 진보적 색채가 옅어지자 이에 실망해 공화당으로 복당했으며, 1902년에는 공화당 후보로 아이다호 연방상원의원 경선에 출마해 초기에 돌풍을 일으키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지역당이 뇌물을 받았다는 정황이 드러나는 등 석연치 않은 패배를 겪고 말았다.
하지만, 보라가 상원의원에 도전할 기회는 다시금 찾아왔다. 본래 같은 은본위제 공화당 소속이었다가 당이 해산한 후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에 합류한 현직 상원의원 프레드 두보이스(Fred Dubois)는 민주당 내에선 아웃사이더로, 공화당에선 배신자로 공격을 받고 있었으며, 그의 반모르몬교 성향 의혹이 터지자 이를 적절히 활용해 아이다호 남부에서 모르몬교도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 잠재적 경선 경쟁자인 프랭크 R. 구딩(Frank R. Gooding)은 그의 주지사 재선을 가로막지 않는 대신 자신의 상원의원 출마를 방해하지 않기로 원만한 합의를 보면서 성공적으로 상원에 입성했다.
2.3. 상원의원
2.3.1. 보라-헤이우드 재판
그가 상원의원직 임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맞닥뜨린 문제는 '빅 빌'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거물 노동운동 지도자인 빌 헤이우드의 재판이었다. 당시 막 창설된 IWW가 주도하는 파업을 이끌다가 전직 아이다호 주지사이자 보라의 친구였던 프랭크 스투넨버그(Frank Steunenberg)의 살인방조죄 혐의로 체포된 헤이우드는 법원의 노골적인 반노조 태도와 억지투성이인 수사 절차 때문에 무혐의인게 확실한데도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야 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보라의 진보적 성향을 고깝게 여기던 주 공화당이 그가 변호사로 일하던 당시 배임을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사건을 조작해 상원의원직 당선무효 재판을 함께 열면서 상황은 난전으로 흘러갔다.선거유세에서 '법과 질서'를 구호 겸 공약로 외쳤기에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을 상원에 출석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긴 보라는 이를 자신의 네임밸류를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 문자 그대로 상원의원 자리를 판돈으로 건 채 재판을 나라 전체가 주목하는 스케일로 키워버렸다. 또한, 바버 목재회사(Barber Lumber Company)와 관련해 제기된 750달러 가치에 상응하는 배임 혐의에 대한 기소장은 누가 봐도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악마의 편집이 가해진 내용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재판은 제쳐놓고 헤이우드 재판에서 노조 지도자들의 알리바이 유무를 확실히 하는 데 집중했다.
(중략) 이 순간 저는 아까 언급한 사건으로 의원직을 사임하는 조건으로 자격을 즉시 반환하고, 범죄 역사상 가장 기초적이고 참혹한 이 사건에 대한 기소를 제기할 것입니다.
두 재판이 함께 엮여 하나의 사건으로 비화했을 당시 윌리엄 보라가 진행한 인터뷰의 내용.
두 재판이 함께 엮여 하나의 사건으로 비화했을 당시 윌리엄 보라가 진행한 인터뷰의 내용.
여러분은 이번 사건에서 피고 측 변호인의 웅변에 감동을 받으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들은 놀라운 힘을 가진 이들입니다...
하지만, 변호인의 목소리를 듣고 잠시 동안 그들의 큰 영향력을 느꼈을 때, 주문이 깨지면서 또다른 장면이 저의 앞에 다가왔습니다. 지금 이 법정에 계신 분들의 삶에 10년의 세월을 더한 1905년 12월 30일 밤의 끔찍한 일이 다시 떠올랐고, 이는 그 목소리보다도 더욱 마음을 움직여놓는 어조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 차갑고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를 다시 느꼈고, 흩날리는 눈발을 마주했고, 마침내 어둠속에서 죽어간 친우의 시신이 마지막으로 놓였던 성소를 들여다보았으며, 그의 생명이 흘린 피의 흔적이 하얗게 변한 대지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아이다호가 불명예와 망신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살인, 아니 살인보다 몇천 배는 더 나쁜 것을 목격했고, 아이다호에서 무정부 상태가 처음으로 피비린내 나는 승리를 거두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곱씹으면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 변호의 재능이나 기술이 그때의 교훈을 잊어버리게 할 수도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이 지대한 시련과 의무에 충실해집시다... 하지만, 그날 밤 아이다호의 주민들이 여러분에게 부여한 의무보다 더 뛰어난 지성, 더 강렬한 남성성, 더욱 많은 용기를 요구하는 의무는 여태까지 결코 저에게 부과된 적이 없었습니다.
프랭크 스투넨버그 살인사건에 대해 훗날 윌리엄 보라가 진행한 연설의 연설문.
하지만, 변호인의 목소리를 듣고 잠시 동안 그들의 큰 영향력을 느꼈을 때, 주문이 깨지면서 또다른 장면이 저의 앞에 다가왔습니다. 지금 이 법정에 계신 분들의 삶에 10년의 세월을 더한 1905년 12월 30일 밤의 끔찍한 일이 다시 떠올랐고, 이는 그 목소리보다도 더욱 마음을 움직여놓는 어조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 차갑고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를 다시 느꼈고, 흩날리는 눈발을 마주했고, 마침내 어둠속에서 죽어간 친우의 시신이 마지막으로 놓였던 성소를 들여다보았으며, 그의 생명이 흘린 피의 흔적이 하얗게 변한 대지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아이다호가 불명예와 망신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살인, 아니 살인보다 몇천 배는 더 나쁜 것을 목격했고, 아이다호에서 무정부 상태가 처음으로 피비린내 나는 승리를 거두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곱씹으면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 변호의 재능이나 기술이 그때의 교훈을 잊어버리게 할 수도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이 지대한 시련과 의무에 충실해집시다... 하지만, 그날 밤 아이다호의 주민들이 여러분에게 부여한 의무보다 더 뛰어난 지성, 더 강렬한 남성성, 더욱 많은 용기를 요구하는 의무는 여태까지 결코 저에게 부과된 적이 없었습니다.
프랭크 스투넨버그 살인사건에 대해 훗날 윌리엄 보라가 진행한 연설의 연설문.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포함한 공화당 수뇌부의 대부분이 조용한 미국 중부지대에서 벌어진 이 거대한 사건을 주목하는 동안 보라는 점점 더 빠르게 전국구 수준의 인기를 얻었으며, 비록 누가 봐도 무죄인 헤이우드의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증거로 사용한 유개화차의 채택이 기각되면서 재판은 무혐의로 종결되었지만 보라는 자신의 배임 혐의 재판을 승소로 끝마치는 한편 헤이우드 재판 당시 자신이 한 연설과 인터뷰를 언론계에서 종사하는 지인들을 통해 신문과 팸플릿으로 편집해 대거 출판하면서 초임 상원의원인데도 불구하고 강렬한 명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2.3.2. 1910년대의 고립주의적 진보주의자 활동
보라는 폭력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노동3권의 지지자였으며, 헤이우드 재판으로 척을 지게 된 IWW와는 달리 친정부 및 온건 성향 노조단체인 AFL과는 30여 년에 걸친 임기 내내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동시에 그는 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주권주의자이기도 했으며, 연방정부의 역할 확대를 전제조건으로 삼는 여러 진보적 개혁과 중앙은행 및 연방준비제도, 연방무역위원회 설립을 반대하는 모습 또한 보였다.급진주의의 영향을 받아 확고한 자유무역 지지자였던 그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행정부가 추진한 수입관세법인 페인-알드리치 관세법(Payne-Aldrich Tariff act)에 다른 서부 및 중서부의 공화당 진보파 의원들처럼 격렬히 반발하며 관세의 인하 또는 폐지를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 태프트 대통령과 척을 지게 되었다. 또한 의원직을 '지역당이 아닌 주민들이 선출하는 게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정헌법 제17조의 통과에도 적극 찬성했는데, 배임 혐의 재판 이후 보수주의자들이 주도하던 지역당을 미리 밟아놔서 경선 통과와 본선 승리에 아무런 위협 요소가 없어졌기에 이후 임기에서 낙선 걱정 없이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 대통령들을 신나게 보이콧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을 탈당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자신과 성향이 맞는다고 판단한 그를 진보당에 초대하려 시도했지만, 이미 은본위제 공화당의 지리멸렬한 모습에 학을 뗀 보라는 진보당이 망할 게 뻔하다고 판단해 합류를 거절하고 대선에 출마한 루스벨트, 태프트, 윌슨 세 사람 중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1912년 대선에선 아귀다툼을 벌이던 진보당과 공화당 양쪽이 모두 처참하게 망했고 우드로 윌슨이 어부지리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비록 보라를 비롯한 지역 정치인들의 묵인 하에 아이다호에서 윌슨이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보라는 주의회의 간접선거에서 무난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1912년 대선과 양원 선거가 모두 민주당의 대승으로 끝난 이후, 보라는 처음으로 의회 외교위원회에 들어가 여태까지 맡아본 적 없는 대외정책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보라는 당시 미국의 중남미 패권외교가 침략에 불과하고 윌슨 행정부의 정치이상주의 외교 또한 멕시코 침공과 히스파니올라 점령 등의 정책을 펼치는 동안에는 실체가 없는 위선에 불과하다면서 민주당 정권과 크게 충돌했고,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에 대해 부패하기 짝이 없는 수구파 정치인이라면서 그를 혐오하긴 했지만 멕시코인들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은 미국 정부가 아닌 멕시코인들의 몫이라면서 멕시코 혁명 개입을 반대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협상국 진영에 거액의 융자를 지원하면서 전쟁 개입을 시사하던 윌슨 행정부의 모습에 보라를 포함한 고립주의자 세력은 우려를 표했고 루시타니아 호 침몰사건과 영국 해군의 유럽행 미국 선박 검역에 격노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참전 자체에는 어떠한 영토나 식민지 요구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찬성했지만,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과 미국의 국제연맹 가맹에는 거부표를 던졌다.
결국 이러한 보라의 태도는 그를 공화당 보수파가 시어도어 루스벨트만큼이나 싫어하는 인물로 만들었으며, 결국 이후의 대선 출마 시도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시고 찰스 에번스 휴즈나 프랭크 B. 윌리스, 로버트 M. 라폴레트 주니어와 같은 진보 성향의 후보를 대신 지지하는데 머물러야 했다.
2.3.3. 1920년대~대공황 시기
1차대전의 발발과 종전 이후 불개입주의를 천명하는 비타협파의 수장이 된 보라는 자신이 선거에서 가장 선호하는 대선후보 및 정치인을 국제연맹 반대파로 놓는 원칙을 정하게 되었다. 그는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보수파에 의해 고립되어 경선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친구이자 국제연맹 반대파인 하이럼 존슨이 탈락하고 워런 G. 하딩이 경선에서 승리를 거두자 그가 강력한 고립주의 지지자였음에도 국제연맹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만으로 지지하는 것을 꺼렸다.워런 G. 하딩이 임기 도중에 사망하고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자, 확고한 보수주의자였던 전임자와는 달리 덜 보수주의적으로 보였던 쿨리지를 지지하는 모습을 초기에 보였으며 연두교서를 통해 소련과의 무역관계 설립을 촉구하는 데 협력하기도 했다. 이후 1922년 티포트 돔 스캔들이 폭로되자 쿨리지에게 협력해 하딩의 후원자이자 당내 거물이었던 법무부장관 해리 M. 도어티(Harry M. Daugherty)를 함께 쳐내고 그 대가로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 않겠냐고 쿨리지에게 제안받기까지 했는데, 로버트 M. 라폴레트에게 동조하던 보라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1920년대 중후반에 보라가 보였던 가장 뚜렷한 정치적 행보는 바로 부전조약의 통과였다. 전쟁을 불법화해 미국의 대외분쟁 참전을 영구적으로 막는 것이 평화적인 번영의 해답이라고 보았던 보라는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이념에 큰 영향을 받아 프랭크 켈로그의 켈로그-브리앙 조약 체결 시도에 적극 협력했으며, 이전까지 국제연맹을 비롯한 각종 국제조약에 반대했던 비타협파가 조약에 대거 찬성한 덕분에 부전조약은 쉽게 통과될 수 있었지만 이 조약이 제대로 된 효능을 보는 일은 없었다.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지받던 허버트 후버를 개입주의자라는 이유로 그닥 내켜하지 않아하던 그는 대안으로 오하이오 출신 진보주의자 상원의원인 프랭크 윌리스(Frank Willis)를 지지했지만 그가 급사하면서 후버를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했는데, 이는 친기업, 반금주법 성향의 민주당 후보였던 앨 스미스나 수구적 집단인 공화당 보수파에서 내놓는 후보들보다 당시까지만 해도 적당적당한 중도개혁주의자로 취급받던 후버를 비판적 지지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공황이 터지고 난 뒤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포함한 다양한 보호무역주의 법안을 후버 행정부가 통과시키자 정부에 크게 실망한 그는 허버트 후버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고 민주당과 공동투쟁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보너스 군대를 진압하는 등의 멍청한 정책이 아닌 다양한 구호정책의 시급한 통과를 촉구했다.
정부는 여인과 그녀의 아픈 아이들을 먹여살리는 것이 그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악한 시민으로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믿는 이가 있습니까? 그것은 무력한 이들에게 비겁하게 책임감을 전가할 뿐입니다. 저는 이를 분하게 여기고 거부합니다.
윌리엄 보라가 정부 주도 구호법안의 통과를 놓고 반대파에게 한 발언.
윌리엄 보라가 정부 주도 구호법안의 통과를 놓고 반대파에게 한 발언.
2.3.4. FDR 집권과 말년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후버가 다시 한 번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자, 공화당 중진에게 실망한 보라는 후버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진보적이고 정열적인 민주당의 후보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대안으로 보게 되었으며, 그가 대선에서 당선되자 다른 공화당 진보파와 함께 루스벨트 행정부가 첫 100일 동안 실시한 정책들에 적극 협력했다.미국판 금산분리법인 글래스-스티걸 법(Glass-Steagull legislation) 통과에 크게 기여한 보라는 공화당에 남아 1기 루스벨트 행정부의 법안 통과를 놓고 벌어진 공화당측 필리버스터를 해산시키는 등 양당 간의 정치적 조율을 담당했으며,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과 같이 자신이 보기에 지나치게 연방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법안들에는 반대하면서도 미소 외교관계 수립 같은 다른 법안들에는 대부분 찬성표를 던지면서 루스벨트 행정부를 비판적 지지했다.
이후, 마지막으로 출마를 노려볼 수 있었던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경선 후보로 출마한 보라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일부 정책을 지지 및 유지하겠다 선언하고 공화당 중진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면서 당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오리건, 네브래스카, 위스콘신, 웨스트버지니아, 펜실베이니아 5개 주에서 예비선거 승리를 거두고 인생 동안 대선후보에 가장 가까운 자리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서 반덴버그(Arthur Vandenburg), 프랭크 녹스와 함께 알프 랜던이 대선후보로 출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연합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 중도 및 보수파가 랜던에게 결집하면서 경선에서 대패했으며, 그대로 뜻을 접고 대선에서 루스벨트를 지지했다.
아이다호가 대선에서 루스벨트에게 몰표를 주긴 했지만 여전히 주민들의 표심은 보라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그는 공화당이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겪은 1936년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와 1대1로 맞붙어 60퍼센트가 넘는 큰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33년부터 상원 내 최선임 원로가 되어있던 보라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연방대법원 내 보수파 무력화 시도인 코트 패킹(court packing) 사건 당시 루스벨트의 대법관 정원 확대 시도가 삼권분립의 파괴라면서 이를 극렬히 반대해 부결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그와 동시에 보수파 정치인들을 포함한 공화당 전체를 반루스벨트 명분을 내걸고 이끄는 것은 거부하면서 타협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나치 독일에서 집권한 히틀러 정권이 점차 유럽 전역에 대한 야욕을 펼치는 동안, 여전히 고립주의자였던 그는 유럽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아직 자기들끼리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위에 불과하다고 믿었고 뮌헨 협정 당시에도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저지른 주권 침탈의 규탄보다는 상황을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영국 및 프랑스 정부에 대한 불만 표출에 집중했다.
주여, 제가 히틀러와 대화를 나눌 수만 있었다면 이 모든 일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윌리엄 보라가 남겼다는 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윌리엄 보라가 남겼다는 말.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다가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약 4개월이 지난 1940년 1월 19일 수면 도중 발생한 뇌출혈로 사망했다.
2.4. 여담
- 또다른 고립주의적 진보주의자인 헨리 캐벗 로지 시니어[4], 하이럼 존슨과 함께 20세기 초반 3대 고립주의자로 같이 묶이는 경우가 많다.
- 복지의 확충에는 찬성하지만 연방정부의 강화에는 반대하고, 여성 보통선거권에는 찬성하지만 수정헌법의 확대에는 반대하며, 사적제재 처벌에는 찬성하지만 반사적제재법 법제화에는 반대하는 등 당대 정치인들 중에서도 강한 반골 성향을 띠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여성의 참정권을 규정하는 수정헌법 제19조의 통과에 계속해서 반대표를 던져 통과 직전까지 간 법안을 몇 차례나 무산시킨 적이 있다.
-
노골적이진 않아도 어느 정도의 반유대주의 성향을 띠었다.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이전부터 유대인들을 박해하면서 유대계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오자 미국인들 사이에서 실업률이 크게 상승할 거라며 인도주의적 의도와 상관없이 이민을 더 받는 것을 반대했으며, 히틀러를 좋은 정치인으로 여기기도 했다.[5]
심지어, 1939년엔 개인적으로 호감을 품고 있던 히틀러를 만나 유럽의 분쟁을 해결해주지 않겠냐고 부탁하기 위해 주미 독일 대사관에 연락해 특사를 제안했고 독일 측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받아들이려 했지만 결국 무산된 적이 있다.
- 고립주의자들 사이에서 명망높은 인물이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에는 찬성을 표했다.
- 자신의 미 중부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카우보이 모자 같은 복장을 착용하고 다녔다.
- 전직 아이다호 주지사 및 연방상원의원 출신 정치인인 윌리엄 J. 맥코넬(William J. McConnell)의 딸인 메리 맥코넬[6]과 선거유세 도중 결혼했지만 아이는 없었으며, 대신 정치적 멘토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장녀이자 절친 사이였던 앨리스 루스벨트(Alice Roosevelt)[7]와 불륜을 벌여 사생아인 폴리나를 낳았다. 호적상으로는 앨리스와 그의 남편인 니콜라스 롱워스 3세(Nicholas Longworth III) 사이에서 출생한 아이로 되어있었지만 일가친척들이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이라 아예 보라의 딸이라고 불렸다고.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06 | 아이다호 연방상원의원 선거 | 아이다호 |
|
50명[A] | 당선 (1위) | 초선 |
1912 | 아이다호 연방상원의원 선거 | 75명[A] | 재선 | |||
1918 | 아이다호 연방상원의원 선거 | 63,587 (67.21%) | 3선 | |||
1924 | 아이다호 연방상원의원 선거 | 99,846 (79.50%) | 4선 | |||
1930 | 아이다호 연방상원의원 선거 | 94,938 (72.42%) | 5선 | |||
1936 | 아이다호 연방상원의원 선거 | 128,723 (63.36%) | 6선[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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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95년 결혼.
[사생아]
[3]
이 당시 정처없이 서부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가
오마하에서 한 도박사와 우연히 만나 운명적인 조언을 들은 덕분에 최종 목적지를
보이시로 정하게 되었다는 썰이 존재한다.
[4]
헨리 캐벗 로지의 아버지이다.
[5]
물론 2차대전이 발발하고 히틀러의 만행이 밝혀지기 전까지 나치 독일에 대한 국제적 여론이 상당히 좋았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1930년대 당시 히틀러는 수렁에 빠진 독일의 경제를 빠르게 복구한 훌륭한 지도자로 여겨졌다.
[6]
일명 '작은 보라'. 윌리엄 보라 본인도 장수한 편이지만 그녀는 더욱 장수해, 1976년 무려 105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7]
대한제국에 외교 사절로 왔다가
홍릉에서 석마를 탄 사진을 찍는 등 온갖 기행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A]
1914년 이전에는 주의회에서 연방상원의원을 간접 선출했으므로 당시 획득한 선거인단수를 기입함.
[A]
1914년 이전에는 주의회에서 연방상원의원을 간접 선출했으므로 당시 획득한 선거인단수를 기입함.
[10]
1940.1.19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