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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시벨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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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핀란드의 공영방송 YLE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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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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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장 시벨리우스
Jean Sibelius
파일:external/65.media.tumblr.com/tumblr_ln4bzowQ9E1qfvq9bo1_1280.jpg
본명 요한 율리우스 크리스티안 시벨리우스
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
출생 1865년 12월 8일
핀란드 대공국 해멘린나
사망 1957년 9월 20일 (향년 91세)
핀란드 얘르벤패
국적
[[핀란드|]][[틀:국기|]][[틀:국기|]]
직업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배우자 아이노 시벨리우스 (1892년 결혼)
자녀 6녀
종교 무종교[1]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2. 생애3. 작곡 특징4. 사생활5. 절필에 대해6. 작품 목록
6.1. 오페라6.2. 관현악 작품
6.2.1. 교향곡6.2.2. 교향시6.2.3. 부수음악6.2.4. 기타 작품들
6.3. 협주곡6.4. 실내악
6.4.1. 현악 4중주6.4.2. 기타 작품들
6.5. 피아노6.6. 가곡6.7. 합창
7. 여담

[clearfix]
교향시 " 핀란디아"(Finlandia).
지휘는 핀란드 태생의 유카-페카 사라스테

1. 개요

국민음악의 대가로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본명은 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 Jean 프랑스어 Johan와 같은 의미이며 예명으로 사용한 이름이다. 친척 중에 Johan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어서 (...) 어렸을 때부터 장이라고 불렸다고... 그가 모어로 사용한 스웨덴어 핀란드어식으로 읽으면 얀 시벨리우스가 되지만 Jean은 프랑스어식 이름이므로 보통은 프랑스어식 발음법을 따라 '장'이라고 읽는다.

2. 생애

시벨리우스는 1865년 핀란드 대공국 타바스테후스[2]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핀란드계 군의관[3], 어머니는 스웨덴계였는데, 2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피아노와 작곡을 배워 9살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나, 특별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작곡에 소질을 보이기 시작하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음대 대신 법대에 입학한다.

하지만 법대에 입학하자마자 헬싱키 음악원에도 입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고, 법대는 중퇴했다. 1889년 음악원을 졸업하고 독일 제국으로 유학을 갔지만, 낯선 환경과 스승의 성향에 적응하지 못한데다 당시 그곳 음악계를 휩쓸던 리하르트 바그너, 구스타프 말러 등의 음악 사조에 상당한 부담을 느껴 으로 떠난다. 빈에서 시벨리우스는 그가 존경하는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1892년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로 취임하고, 결혼도 하게 된다. 같은 해 쿨레르보 교향곡[4]을 완성, 초연하여 인정을 받기 시작한 후 연달아 교향시 '엔 사가'(전설), '카렐리아 모음곡', '네 개의 전설'을 발표, 명성을 쌓아갔고, 1899년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교향시 '핀란디아'를 발표하게 된다.

핀란디아의 성공으로 그는 국민 작곡가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국가로부터 연금도 지급받게 된다. 그가 말년에 창작활동을 중단한 이유로도 제기되고 있다. 생활이 안정되자 교수직에서도 물러나고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교향곡 1,2번의 완성으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파일:아이노 시벨리우스.jpg
아이노 시벨리우스의 18세 시절(1888년) 사진.

아내 아이노 시벨리우스(Aino Sibelius, 1871. 8. 10 ~ 1969. 6. 8)는 남편보다 더 오래 살아서 9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근데 사진은 젊은 시절 찍은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 사진은 1888년 18세 당시.

그러나 갑작스레 귓병을 앓았고, 귓병은 4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1904년 헬싱키 교외의 얘르벤패로 집을 옮기고, 저택의 이름을 아내 '아이노(Aino)'의 이름을 따 아이놀라로 한다. 이후 핀란드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꾸준히 교향곡 3,4번, 현악사중주 D단조 등을 작곡하고, 영국,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며 전세계로 이름을 알렸다.

1915년, 그의 50세 생일을 맞아 핀란드 전국에서 축하를 받았고, 연금도 50,000 마르카로 증액된다. 교향곡 제 5번도 완성되어 탄생 축하 공연에서 초연된다. 그러나 그는 기존 교향곡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지향하였고 5번 교향곡도 개정을 거듭하였다. 한편, 교향곡 6,7번 역시 구상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핀란드가 독립을 하게 되고 이때의 혼란 속에서 그는 잠시 창작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생활도 다시 안정되었고, 다시 창작 활동을 시작, 1923년 교향곡 6,7번을 잇달아 완성한다. 특히 7번은 기존의 교향곡 형식을 탈피, 시벨리우스만의 형식으로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걸작으로 불려진다.

그리고 1925년, 그의 나이 60세를 기념, 연금이 다시 증액되었고 국민들의 모금으로 27만 마르카가 모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훈장도 받았고, 전 세계로부터 축하 메세지도 받았다. 그리고 1930년, 그의 나이 65세에 마지막 교향시 '타피올라'를 끝으로 그는 이후 27년간 창작활동을 중단한다. 다만 30년대 중반까지도 시벨리우스가 교향곡 8번을 만들려고 시도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의 인기는 식지 않아 70세, 80세 생일에도 큰 환영을 받았으며, 1957년 자택에서 91세의 장수를 누리고 숨을 거둔다. 사망 당일 시벨리우스는 아침에 일어나 어지럽다고 말했다. 침대에서 신문을 꼼꼼히 읽고, 아침 식탁에 앉았지만 기운을 잃고 쓰러졌다. 소식을 들은 딸들이 달려오자 ‘왔느냐’고 인사를 건넸다. 그날 저녁 아홉시, 시벨리우스는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가족들은 출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작품은 없으며, 따라서 <교향곡 8번> 원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성명에서 밝혔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후 그의 자택 앞뜰에 묻혔다.

3. 작곡 특징

국민악파 음악가답게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민족적 소재들을 많이 사용했다. 특히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인 칼레발라에서 따온 내용들을 주제로 한 곡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포횰라의 딸>, <레민캐이넨 모음곡> 등.

그가 일생의 3분의 2가까이를 20세기에 살았음에도 불구, 그는 후기 낭만주의에 기반한 국민악파 특유의 음악만을 작곡했다.[5] 화성이나 기타 음악적 형식에서 현대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일하게 그가 거부한 전통이 있었으니 그게 소나타 형식이었다.

그는 기존의 소나타 형식을 거부한 채 하나의 선율을 바탕으로 음악을 전개, 독자적인 피날레로 이르는 자신만의 형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교향곡을 작곡할 때도 점차로 형식을 파괴하게 되었는데, 7번에 이르러서는 아예 4악장 구성을 포기하고 단악장으로 작곡하기 시작했다.[6]

이렇게 봐서는 시벨리우스는 20세기에 한물간 낭만파와 국민주의 음악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 구태의연한 작곡가로 보이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는 당시 음악계와는 다른, 독특한 작곡가로 봐야 할 것이다.

후술된 것처럼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꿨던 만큼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4. 사생활

술, 담배를 매우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떼지 않았고, 그 결과 43세에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이 때 금주, 금연을 선언했으나, 수술로 암이 완쾌되자 바로 다시 술, 담배를 시작했다고.

시벨리우스의 술버릇은 상당히 나빴다. 최악의 에피소드 중 하나가 바로 연주회의 지휘와 관련된 일화다. 공연이 있던 어느날 오전에 시벨리우스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리허설을 끝낸 뒤 점심 때 샴페인을 너무 마셔서 인사불성이 되었다.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겨우 무대에 올랐지만, 리허설과 착각하여 공연 중에 연주를 중단시켰다. 객석에 있던 그의 아내는 결국 그 이후로 다시는 남편의 콘서트 투어에 동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음악원에 있을 때, 원래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목표로 작곡보다는 바이올린을 주로 했고, 교내 현악사중주에서 제2바이올린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바이올린을 그만둔 일화가 있었다. 교내 연주회에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독주를 맡게 되었는데, 너무 긴장한데다 흥분한 탓에 공연을 망친 것. 결국 자신은 바이올린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작곡과로 과를 옮겼다.

5. 절필에 대해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시벨리우스는 1930년 이후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곡을 발표하지 않다시피 했는데, 그가 왜 작곡을 중단했는지는 아직도 논란거리이다. 소나타 형식을 능가하는 자신만의 형식을 만들고자 했으나 한계에 부딪혀 작곡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연금만으로도 생활이 안정되자 작곡을 그만두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설로는 말년에 들어서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한데다가, 결정적으로 자기 작품에 대한 자신감도 줄어 창작 의욕이 감퇴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가설은 '당시 급변하던 음악계의 격랑에 시벨리우스가 따라가지를 못해서'라는 설명이 뒷받침한다. 실제로도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세사르 프랑크, 에릭 사티, 파울 힌데미트, 버르토크 벨러 등 오늘날 20세기 초중반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진 음악가들의 음악과 시벨리우스의 후기 낭만파적, 국민악파적 음악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7] 시벨리우스와 그나마 비슷한 성향을 보인 음악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정도지만, 라흐마니노프는 후기 낭만파라는 공통점은 있어도 시벨리우스와는 색채가 다른 편이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20세기 대편성 관현악의 대가로서 상당히 혁신적인 음악을 다수 작곡했다는 점에서는 구스타프 말러와 비슷하다.

한편으로, 시벨리우스는 급변하는 조류들을 이끄는 음악가들을 부러워하기도 한 듯하다. 자신의 일기에 "누구나 다 혁신적인 천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쓴 것을 보면, 역으로 늙은 자신은 이제 시대를 선도하는 천재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탄한 것으로 보인다. 시벨리우스가 장수한 것도 있지만, 똑같이 장수했으며 후기 낭만파에서 출발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창작 성향이 시대를 따라 변화해 간 것을 보면, 확실히 시벨리우스는 20세기 초중반에 태동하기 시작한 현대음악과는 성향도 맞지 않았고, 따라가 보려고 해도 순탄치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여러 증언을 보건대 시벨리우스는 <교향곡 제8번>을 작곡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작곡을 했음에도 없애버린 듯하다. 62세 생일을 지나고 두 달 남짓 지난 1928년 2월, 시벨리우스는 베를린 여행 중 부인 아이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교향곡 8번>이 될 '새 작품'에 대해 언급했다. "이 작품은 멋진 것이 될 거요. 오래 걸리겠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지." 이해 여름에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도 "새 작품을 쓰고 있어. 미국에 보낼 거야. 오래 걸리겠지만 좋은 작품이 될 거야." 라고 썼다. 그가 시사한대로 작업 속도는 느렸다. 9월에는 원고 일부를 악보 정리원에게 보냈다. 작곡가는 "전체 원고는 (보낸 원고의) 여덟 배 정도 길이가 될 거요"라고 알렸다. 그러나 이후 이 작품의 진척은 무한정 지연된다. 아마도 이 시점, 즉 1933년 말에서 1934년 사이에, 거의 완성된 새 교향곡의 운명에 알 수 없는 위기가 닥쳤을 것이다.

특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설적인 상임 지휘자이자 시벨리우스 스페셜리스트로 유명했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8]는 1930년부터 32년까지 시벨리우스에게 8번 교향곡이 언제 완성되느냐고 들들 볶았다. 실제로 시벨리우스는 8번 교향곡을 완성하려고 시도했고, 쿠세비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교향곡의 저작권 문제를 걱정할 정도였다. 31년에는 베를린에 다녀온 후에 새 교향곡을 32년 봄에 연주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 정보가 새서 보스턴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시벨리우스는 공황상태에 빠졌고 8번을 만들려던 생각을 접은 것으로 보였다.

1943년 초 이제 78세가 된 시벨리우스는 비서에게 말했다. "죽기 전에 거대한 작품을 마치고 싶다. 그런데 전쟁의 비인간성이 나의 작업을 방해한다. 전쟁을 생각할 때마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말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시벨리우스가 80세 생일을 맞이할 해가 밝았다. 결국 8월에 시벨리우스는 얄라스에게 "나는 <교향곡 8번>을 여러 차례 완성했고, 한 번은 태워 버리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긴 창작상의 침묵이 마지막 교향곡에 모든 힘을 쏟아 넣었기 때문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성된 이 작품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드니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문화평론가인 마크 맥케나는 "시벨리우스는 만년에 자기 자신의 기념비이자 핀란드 공화국의 상징물, 박물관 관리자로 역할을 마쳤다"고 말했다. 혹여 자신이 세워 둔 영광에 흠집이 갈 수 있는 행위는 (신작 발표를 포함해) 할 수 없었고,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시벨리우스의 딸인 카타리나의 회상과도 상응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나이와 더불어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하며, 지금가지의 작품보다 나은 곡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교향곡은 그에게 '짐'이 되었다. 언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지 아버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또한 시벨리우스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을 몹시 부담스러워했는데, 핀란드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은 것은 물론 미국에서도 열광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이것이 되려 창작의지를 꺾어버린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에서의 시벨리우스의 인기는 비유하자면 스타의 인기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고,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여러 오케스트라들에서 단골로 연주할 정도였다. 얼마나 연주가 많았는지 영화 " 로라"에서 데이너 앤드루스가 연기한 탐정 왈, "그들은 연주 직전에 프로그램을 바꿔서 오직 시벨리우스만 연주했다구요!"라는 대사가 나왔을 정도다. 앞서 언급한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첫 전성기를 이끌면서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을 정도였다.

이런 미국의 시벨리우스 인기에는 난해한 현대음악[9]에 대한 반동적인 성격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이를 간파한 (말러 - 쇤베르크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시벨리우스 음악이 훌륭한 음악이면 음악의 표준을 바꿔야 된다"라고 맹비난했기 때문에 시벨리우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들도 "이렇게 맹비난하면 욕만 먹을 뿐이니 수위 좀 낮추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이처럼 1930년대 이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시벨리우스의 인기는 높아졌지만, 반면 '시대의 발전을 놓친 퇴행적 작곡가'라는 악평도 커졌다. 이런 폭력적인 악평들 때문인지 시벨리우스의 다른 지인들도 그가 나이 들수록 민감해져 갔으며 사소한 비판에도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작곡계는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창시한 12음 기법이나 스트라빈스키의 야수주의, 즉물적 신고전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도 시대와 순조롭게 지내기 힘들었을 시대에 그는 오히려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다.[10]

따라서 그가 실제로 만년에 창작을 안했다기보단 이 시기에도 창작을 하긴 했는데 스스로 만족할 수 없어서 이 시기 창작된 작품들을 스스로 없애버렸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듯하다. 대표적인 예로 시벨리우스의 아내 아이노의 회고에 의하면 1940년대 초에 시벨리우스가 갑자기 카렐리아 모음곡의 일부를 비롯한 다수의 악보들을 마당으로 들고 나가서는 불싸질러 버렸다고 한다. 시벨리우스 본인의 증언까지 감안해 본다면 이때 교향곡 8번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들이 아깝게도 잿더미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시벨리우스의 창작 중단에는 20세기 현대음악의 조류에 대한 갈등, 미국의 엄청난(지나친) 인기에서 비롯된 고뇌가 가장 중심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시벨리우스 자신이 침묵한 탓에 정확한 진상이야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6. 작품 목록

13 pieces for piano

6.1. 오페라

6.2. 관현악 작품

6.2.1. 교향곡

교향곡 1번 E단조
교향곡 2번 D장조
교향곡 7번 C장조

6.2.2. 교향시

레미케이넨 모음곡 중 투오넬라의 백조

6.2.3. 부수음악

6.2.4. 기타 작품들

6.3.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6.4. 실내악

6.4.1. 현악 4중주

6.4.2. 기타 작품들

6.5. 피아노

6.6. 가곡

6.7. 합창

7. 여담

보통은 음악시간에 '국민악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배우게 되는데, 이 시기에 이 사람의 이름이 으로 사용되는 불상사를 겪는다. 물론 현악 전공자 입장에서도 바이올린 협주곡의 난이도 때문에 욕처럼 자주 읊는다.

딸 다섯(원래 여섯이었으나 3녀 크리스티는 어린 나이에 사망)을 두었고, 핀란드의 파워 메탈 밴드 스트라토바리우스 라우리 포라가 그의 증손자이다. 장녀 에바는 사업가 아르비 팔로헤이모(Arvi Paloheimo)와 결혼하여 남편 회사의 CEO가 되었고 차녀 루스는 루스 스넬만(배우인 남편 유시 스넬만과 결혼 후에 바꾼 성)으로 알려진 배우가 되었다. 4녀 카타리나는 에로 일베스(Eero Ilves)라는 변호사와, 5녀 마르가레타는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유시 얄라스(Jussi Jalas[16])와 결혼했다. 디자이너인 막내 하이디는 유시 얄라스의 형제인 건축가 아울리스 블롬슈타트(Aulis Blomstedt)의 아내가 된다.

아내 아이노 예르네펠트의 오빠들인 아르비드(Arvid Järnefelt 1861~1932)는 작가, 아르마스(Armas Järnefelt 1869~1958)는 시벨리우스의 친구이기도 한 작곡가이자 지휘자[17], 에로(Eero Järnefelt 1863~1937)는 사실주의 화가로 핀란드 문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녀의 어머니 엘리자베트(Elisabeth Järnefelt 1839~1929)가 많이 지원해주었다고 하며 시벨리우스의 처가인 예르네펠트 가문은 핀란드의 민족주의인 페노마니아 운동(Fennomania)의 선두주자였던 가문이었다.

또한 정신의학자였던 남동생 크리스티안 시벨리우스는 핀란드 현대 정신의학의 확립자라고 한다. 그의 아내 카이노 이하넬마 스완(Kaino Ihanelma Swan)은 작가이다.

아내 아이노를 흠모했던 소설가 유하니 아호(Juhani Aho)와는 말년에 친한 친구이자 이웃으로 지냈다고 한다.

시벨리우스 기념비가 헬싱키에 있고, 이름을 딴 박물관이 투르쿠에, 생가가 해멘린나(Hämeenlinna)에, 아이놀라가 얘르벤패(Järvenpää)에 있다. 시벨리우스 기념비는 헬싱키역에서 멀리 떨어진 시벨리우스 공원에 위치해 있다. 시벨리우스 박물관은 투르쿠 대성당 주변에 위치해 있는데, 악기 전시를 지나서 안쪽에 시벨리우스 관련 전시실과 다큐멘터리 영상실이 있다. 시벨리우스 생가는 해멘린나 역에서는 20~30분 정도 걸어가야 하지만, 해멘린나 버스 터미널에서는 도보로 5분 내에 찾아갈 수 있다.[18] 아이놀라는 얘르벤패보다 아이놀라 역에서 하차하면 훨씬 가깝고, 시벨리우스의 후손이 실제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개방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홈페이지에서 확인 후 방문해야 한다.


[1] 기독교를 오직 '조상들의 종교'일 뿐이라 말했고, 1년에 한번 정도만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갈 정도로 종교에 관심이 없었다. [2] 핀란드어로는 해멘린나(Hämeenlinna). 해멘린나에는 여전히 시벨리우스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3] 혈통은 핀란드계이나 스웨덴어를 사용했다. [4] 교향시라고 볼 수도 있다. [5] 그의 교향곡 6번과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같이 들어보자. 참고로 드뷔시는 1894년에 작곡했고, 시벨리우스는 1923년에 작곡했다. [6] 근데 이 때가 1924년이었는데, 시벨리우스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던 구스타프 말러는 칸타타, 연가곡 형식을 교향곡에 사용했고, 단악장 형식도 이미 칼 닐센이 9년 앞서 사용했다. [7] 시벨리우스는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유치찬란하다고 맹비난한 바 있다고 한다. 스트라빈스키 역시 앙심이 남았던 모양인지, 시벨리우스가 죽었을 때 애도의 메시지를 남길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딱 잘라 거절했다. [8] 1874~1951,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유럽에서 미국에 건너가 성공한 첫 번째 지휘자겸 20세기 초반 미국 지휘계의 전설로 통하는 거장이다. 유럽 악단에서 지휘자로 활약하였고, 1924년부터 보스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지냈다. 쿠세비츠키 - 피에르 몽퇴 - 샤를 문쉬 - 에리히 라인스도르프로 이어지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황금기를 연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레너드 번스타인을 비롯하여 사뮤엘 에들러, 사라하 캐드웰 등 당대의 지휘자겸 작곡가를 양성하는데도 큰 공헌을 세웠다. 쿠세비츠키는 유진 올만디 이전에 미국에서 시벨리우스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의 권위자로 평가받았으며, 베토벤, 멘델스존, 프로코피에프, 스트라빈스키, 라벨, 드뷔시 등의 권위자로 평가받았고, 주로 고전낭만주의풍의 지휘의 표본을 보여주었던 지휘자로 평가받고 있다. 탱글우드 음악센터에서는 쿠세비츠키상을 재정하여 젊은 지휘자들에게 수여하고 있다. [9] 물론 리게티 죄르지, 존 케이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올리비에 메시앙, 피에르 불레즈,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같은 전후(戰後)의 진짜 난해한 음악들에 비하면 이 시대의 난해한 음악이라고 해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정도였지만, 후기 낭만파의 음악어법에 익숙한 대중들에게는 이런 음악도 충분히 당황스럽게 들렸을 것이다. 사실 쇤베르크 일파의 무조음악은 현대의 청중이 듣기에도 난해하다. [10] 출처 <클래식, 비밀과 거짓말> [11] 교향시로 보기도 한다. [12] 이 중에서 '슬픈 왈츠'는 따로 떼어져 연주회에서 연주되곤 한다. [13] 참고로 같은 제목으로 드뷔시는 오페라를, 쇤베르크는 교향시를 썼다. [14] 초판이 따로 있는데, 초연의 실패 후 연주를 금지시켰다가 사후인 1991년에야 다시 세상에 공개되었다. [15] 모두 5곡 구성이다. [16] 본명은 아르마스 유시 베이코 블롬슈타트Armas Jussi Veikko Blomstedt [17] 아내를 처음 만난 장소가 아르마스의 집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 여동생에게 첫눈에 반한 셈. 역시 스웨덴어 화자였던 아르마스는 핀란드에서 활동한 시벨리우스와 달리 일생 대부분을 스웨덴에서 활동했다. [18] 배경음악으로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계속 재생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