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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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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 7위 8위 9위 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베르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하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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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 제6대 연방총리
헬무트 요제프 미하엘 콜
Helmut Josef Michael Kohl
파일:KAS-Kohl,_Helmut-Bild-14701-1.jpg
출생 1930년 4월 5일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 루트비히스하펜
사망 2017년 6월 17일 (향년 87세)
독일연방공화국 라인란트팔츠 루트비히스하펜
재임기간 제6대 총리
1982년 10월 1일 ~ 1998년 10월 27일(16년 26일)
학력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법학과 / 중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역사학 , 정치학 / 학사)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대학원 (역사학 / 박사)
종교 가톨릭
신장 193cm[1]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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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파일:헬무트 콜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정치 입문2.3. 총리로의 길2.4. 서독의 총리로서 (1982~1990)2.5. 통일 독일의 첫 총리 (1990~1998)2.6. 통일 후유증으로 인한 인기 하락과 정계 은퇴2.7. 이후의 삶
3. 기타

[clearfix]

1. 개요

서독 제6대 총리이자 통일 독일 초대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후로 가장 오래 재임한 독일 총리이기도 하다.[2] 탁월한 국제정치감각을 바탕으로 냉전의 종식과 함께 다가온 동서독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분단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총리였으며 이른바 '통일 재상(Kanzler der Einheit)'이라고도 불렸다.

2. 생애

2.1. 초기

1930년 4월 5일 바이에른의 루트비히스하펜(Ludwigshafen)[3]에서 경찰관의 삼남으로 태어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집안은 나치가 집권한 1933년 이후에도 가톨릭 중앙당[4]의 열렬한 지지자로 남아있었다. 그의 형 중 한 명은 2차 대전 당시 소년병으로 징집되어 서부전선에서 미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헬무트 콜 본인 역시도 징집되어 군사훈련을 받았으나 다행히도 전쟁이 끝나면서 어떠한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은 채로 군 경력을 마감하게 됐다.

2.2. 정치 입문

1946년 기민당의 설립 시기부터 청년 당원으로 열렬히 활동했던[5][6] 콜은 연방하원과 같은 중앙 정치 무대에서 주로 근무하면서 경험을 쌓은 전임 총리들과는 달리, 고향인 라인란트팔츠의 주정부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쌓기 시작한다. 특히나 1969년에는 39세의 나이로 라인란트팔츠의 주지사로 당선되는데, 이는 2015년 현재까지도 독일내에서 역대 최연소 주지사 당선 기록이다.

1973년 기민당 대표 자리에도 오른 콜은 야심만만하게 1976년의 총선에서 당시 헬무트 슈미트 총리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실제 선거에서도 전체 정원에서 49%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원내 제 1당 자리를 되찾았지만 독일 사회민주당 자민당이 연정을 연장하는데 합의하면서 총리에 오르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이 직후 콜에게는 정치 인생상 최초의 고난이 닥친다. 바로 당 내 라이벌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에게 총리 후보 자리를 뺏기고 만 것.[7]

2.3. 총리로의 길

하지만 고난이 기회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80년의 총선에서 슈미트에게 도전했던 슈트라우스는 1976년 콜이 얻었던 의석수에서 무려 20석을 잃는 대패를 당하면서 중앙 정계에서 은퇴한다.[8] 이제 기민당 내에서 라이벌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82년이 되자 부자증세와 노동시장에 대한 정책을 놓고 연정파트너였던 사민당과 자민당이 격하게 충돌했던 것이다.

정치 인생 내내 기회를 잡아채는 타이밍 감각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콜은 자민당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자민당 역시 기민당과의 새 연정 정부 구성 협상에 진지하게 임한다. 자민당의 후원을 손에 얻은 기민당은 1982년 10월 1일의 불신임 선거에서 여유롭게 헬무트 슈미트 내각을 붕괴시키고 사흘 뒤 새 기민-자민당 연정 내각의 총리로 콜을 선출한다. 기민당은 1969년 이후 13년만에 여당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불신임을 통해 상대방을 낙마시키고 자기가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은 2015년 현재까지도 독일내에서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게다가 자세히 말하자면, 자민당은 불과 한 달 전의 신임선거에서는 슈미트에게 지지를 던졌다가 한 달만에 태도를 돌변한 것. 이로 인해서 독일 내에서는 이러한 집권 과정이 합법적인 것인지에 대하여 엄청난 논란이 있었다. 사민당 일부에서는 헌법 재판소에 이러한 행위가 위헌이라고 제소까지 하기도 했다.[9]

2.4. 서독의 총리로서 (1982~199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_145_Bild-F073617-0004%2C_Mainz%2C_CDU-Bundesparteitag%2C_Kohl.jpg

콘라트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를 자처했던 만큼[10] 그는 당연히 아데나워의 유럽우선주의 외교노선을 선호했고, 이는 그가 미국 영국보다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위주의 외교정책을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임 헬무트 슈미트가 프랑스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과 평생에 걸쳐 우정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콜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동반자 관계였다. 특히나 1984년 베르됭에서 베르됭 전투의 전몰자들을 기리면서 미테랑과 콜이 오랫동안 손을 맞잡고 있던 모습은 단순히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만이 아니라 유럽 연합의 초석을 닦은 장면으로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고 마냥 아데나워의 외교노선만을 따랐던 것은 아니어서 1987년에는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정상회담을 갖으며 빌리 브란트 동방 정책 역시 계승하려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다만 이 시기 콜은 두고두고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하는데 바로 늦게 태어난 자의 은혜(Gnade der späten Geburt)가 그것이다. 대충 설명하자면 자신과 자신보다 어린 세대(193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반유대주의와 나치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시대가 끝날 무렵에 태어나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았기 덕분이라는 요지의 이 발언이었다.

당연히 제3제국 시기 적극적인 반나치활동을 펼쳤던 사람들에게 미친듯이 까였고 여기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방독 당시 무장친위대가 매장된 묘지에 참배한 사실까지 겹치면서 서독 내부에서 총리가 올바른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불을 뿜었었다. 이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개인들의 판단이지만, 콜에게는 일종의 흑역사인 셈.

어쨌든 콜은 무난무난하게 1983년의 선거와 1987년의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3선 총리가 됐지만 5년 뒤 빌 클린턴의 선거문구가 보여주었듯이 대중들은 화려한 외교적 행보보다는 자신들의 지갑에 더 관심이 있는 법이었고, 대중적으로나 당내에서나 콜의 인기는 점점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한다.

자매정당인 기사련과 연정 파트너 자민당도 콜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89년에는 당 내의 반대파들이 콜 대신에 새로운 인물을 총리 후보로 내세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지만 하늘은 콜의 편이었던지 거대한 역사적인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독일의 재통일(Wiedervereinigung)이었다.

2.5. 통일 독일의 첫 총리 (1990~1998)

1990년 3월에 동독에서 자유선거[11] 치러지게 되었다. 선거운동 기간 중에는 예상 외로 독일 사회민주당이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점진적인 통일을 주장한 사민당에 비해 조속한 통일과 화폐통합을 내세운 콜의 공약이 결국엔 판세를 뒤엎어버리는데 성공, 기민당과 자민당이 압승을 거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12] 통일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왔고 그 영향으로 5월에 치러진 동독 지방선거에서는 기민련이 부진했었다. 그러나 콜 총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동서독 1:1 마르크 교환정책을 펼치면서[13] 동독 지역주민들의 재산을 보전시킴과 동시에 [14] 외교적으로도 강대한 독일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영국과 프랑스 등[15]은 물론이고,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은 소련과 폴란드를 구 영토에 대한 영유권 완전 포기선언으로 설득에 성공하면서 통일에 장애물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간다. 마침내 10월 3일에 동독과 서독은 다시 하나의 국가가 된다. 그리고 2개월 뒤 통일후 첫 총선에서 기민당은 과반수를 훌쩍 넘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1비율의 동독 화폐 교환은 동독 노동자의 상대적 임금을 인위적으로 인상시키면서 동독의 경쟁력을 하락시켰고 서독의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되면서 동독 주민에대한 사회보장비 지출을 대폭 늘리게 되어 이후에 독일 경제에 커다란 재정부담을 주어 과도한 국가부채로 이어지게 된다.

동서독 통일에 따라 독일 총리관저인 연방총리청를 신축하게 되었는데, 헬무트 콜은 당시 독일 국내의 반발을 물리치고 유리궁전 양식으로 지었다. 하지만 막상 본인은 새로운 연방총리청에 입주해보지 못했고, 본인의 후임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2.6. 통일 후유증으로 인한 인기 하락과 정계 은퇴

그러나 급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한 만큼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서 콜 총리는 빠른 속도로 동독과 서독 양 측에서 인기를 잃어나가기 시작했다.

동구권이 체제 전환 후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16]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대적인 금리인상과 긴축정책으로 경기 침체와 실업자 증가, 복지정책이 후퇴하는 상황이 겹치고[17] 구매력이 이전보다 더욱 더 떨어지면서 동독 물건이 잘 팔려나가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게다가 소련마저도 붕괴되는 바람에 동독 물건을 팔 만한 수출시장 자체가 꽉 막히다시피한 상황이 되었다.

그렇다고 동독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서독이나 타 서유럽 국가에서 잘 팔리지도 않았고, 거기다 동서간 인건비 격차도 줄어나가는 바람에 동독이 가지고 있던 값싼 인건비라는 장점도 급속히 상실되면서 버티기 힘들어졌다. 결국 경쟁력을 상실한 동독 지역 기업들은 줄이어 파산하고 민영화와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동독 지역 실업률은 30%대에 이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마침 통일 직후 공공요금 현실화라는 명목아래 공공요금이 서독 수준으로 폭증하는 사태가 겹치던 참이었다.

동독인들은 동독인대로 통일이 되면 잘살게 될 것이라는 환상이 처절하게 깨지며 분노했고, 서독인들은 서독인대로 통일에 대한 혜택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채 세금만 올라가면서 불만에 가득찬 상황이 되며 동서간의 심리적 거리는 통일 전보다도 훨씬 벌어졌고 헬무트 콜의 지지율도 급속히 하향세를 타게 된다.[18] 그럼에도 1994년 총선에서 간신히 4선에는 간신히 성공했지만 사민당이 연방상원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서 콜의 정치적 운신에는 엄청난 제약이 걸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5선에 도전한 1998년 총선에서 결국 콜은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에게 참패, 1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끝에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통일과정에서 기민당이 막대한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조달했다는 스캔들이 터진 것도 이 시기 헬무트 콜의 추락을 부채질했다. 이 시기 당대표가 된 앙겔라 메르켈은 자신을 '나의 소녀(mein Mädchen)'라 부를 정도로 총애했던 자신의 정치적 후견인인 콜을 아주 냉정하게 당에서 사실상 쫓아낸다.[19]

2.7. 이후의 삶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AKR20170701061151082_01_i_20170701221504600.jpg

2002년 공식적으로 정계를 은퇴한 콜은 뇌졸중으로 투병했다. 2015년 11월 10일 전임자인 헬무트 슈미트가 타계하면서 생존한 전임 독일 총리로는 최고령자가 되기도 했으며, 2017년 6월 16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7월 1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유럽의회 의사당에서 유럽연합장(葬)으로 거행되었다. # 이후 라인강을 따라 그의 고향인 독일 라인란트팔츠 슈파이어로 옮겨져 장례 미사를 치렀고, 초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의 이름을 딴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3. 기타



문제의 호칭으로 인한 콜의 급발진 장면

파일:praesident-boris-jelzin.jpg
[1] 역대 독일 총리 중 독일 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함께 최장신이다. [2]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왕/북독일 연방 의장/독일제국 황제에 의해 임명된 총리였고 따라서 의회나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전무했지만 콜은 4년마다 꼬박꼬박 선거를 치렀음에도 16년을 재임했다. [3] 오늘날에는 행정 구역상 라인란트-팔츠에 편입되어 있다. [4] 2차 대전 이전 기민당의 전신격 정당. [5] 당의 설립시기부터 헌신했던데다가, 고향과 종교 등 여러 면에서 통하는 면이 있던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가 콜을 무척이나 예뻐했으며 대놓고 정치적 후원자를 자처할 정도였다. 콜도 스스로를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 정도로 여겼었다. [6] 당시 콜의 연령은 16세. 아데나워는 이 당시 칠순 할아버지였던 고로, 자신과 여러 면에서 잘 통했던 손자뻘인 콜이 안 예뻐보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7] 슈트라우스는 정확히는 기민련의 바이에른 지역 자매정당 기사련의 당수였고, 그 자격으로 바이에른 주총리를 지내고 있었다. 콜은 기민련의 대표였고, 이 당시에도 기민련 대표직은 그대로 유지했으나 기사련 대표 슈트라우스를 기민련-기사련 연합의 총리후보로 추천키로 결정된 탓에 콜은 기민련의 대표지만, 자당이 선거에서 이겨도 총리에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8] 어디까지나 '중앙', 즉 총리직에 다한 야망을 버린 것이다. 이후로도 자신이 맡고 있었던 바이에른 주지사 자리는 유지한다. [9] 독일 헌재는 이 집권과정에 위헌요소가 없다고 판결했다. 다만 이러한 과정이 추후에도 반복되어 정치적 혼란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앞으로는 제약을 두게 했다. [10] 나이로는 아데나워의 손자뻘이다. [11] 동독주민들에게는 1933년 나치집권 이후 거의 60년 만에 경험해보는 자유선거였다. [12] 대표적인 예로는 낙태 문제를 들수있다. [13] 사실 당초 시뮬레이션에서는 3:1로 교환해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콜이 자신의 인기문제와 동독지역의 경제 공동화 문제같은 정치적 사안까지 고려하면서 밀어붙인다. 애초당초 1:1 화폐통합이 1990년 의회 선거에서 내걸었던 공약이었던지라 콜 총리 입장에서 미루면 미룰수록 손해보는 장사라 밀어붙었던 것. [14] 사실 타 동구권 국가들 주민들의 예금이 체제전환 후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대다수가 휴지조각이 되었다는점을 고려하면 어느정도 현명한 조치라고 볼수도 있다. 당장 러시아만 해도 체제전환 과정에서 예금이 쓰레기가 되는 참사가 발생하여 구매력이 폭락하고, 평생직장또한 옛말이 되었으며 치안마저 개판이 되어버리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동독은 1:1 교환으로 예금이 쓰레기가 되는 참사는 면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동독지역의 산업경쟁력이 서독에 비해 월등히 밀린게 문제였지... 다만 이 조치는 비슷한 시기에 개혁개방을 한 동유럽 국가에 대해 동독 지역의 산업 경쟁력을 잃게 만들어 장기적으로 동독 지역 발전에 장애가 된다. [15] 프랑수아 미테랑 마거릿 대처 모두 처음에는 독일 통일에 엄청난 거부감을 보였다. 2차 대전을 젊었을 때 경험한 당사자들이니 무리도 아니다. [16] 동구권 국가 대부분에서 국가가 주도하던 제품 생산이 아직 충분히 민영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억눌려왔던 시민들의 소비 욕구가 폭발하면서 파멸적인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찾아왔다. [17] 당장 러시아만 해도 소련 붕괴직후인 1992년 물가상승률이 2000%에 달하는 상황이었고, 당시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정이 나아진 건 1990년대 중반-2000년대의 일이었다. [18] 이를 두고 콜의 전임자였던 헬무트 슈미트는 언론기고문에다가 "이 친구는 총리로 재임하고 10년만에야 경제의 중요성을 비로소 깨달았다."라고 개탄했다. [19] 사실 mein Mädchen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총애라긴 뭐한 게, 현대에 이 표현은 총리가 장관(메르켈은 당시 장관이었다)에게 쓸만한 표현은 절대 아니다. 당장 한국에서 대통령이 여성 장관을 ‘우리 딸’이라고 지칭하면 반응이 어떻겠는가 요새도 이따금 Mädchen이나 Fräulein이라는 표현을 잘못 썼다 성희롱으로 고소를 당한 남성들에 대한 독일 현지 언론보도가 나오곤 한다. [20] 물론 이 시절은 아직 콜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이다. [21] 어머니와 함께 강간당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22] 작은아들 페터 역시 아버지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2011년 5월의 일화를 털어놓았는데, 당시 페터는 딸을 데리고 독일 남서부 오게르샤임의 아버지 집을 찾았다. 리히터가 화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고 콜 전 총리가 있는 거실을 가리켰다. 휠체어에 앉아있던 콜 전 총리는 손녀의 손을 잡고 매우 기뻐했지만 약 10분이 지나자 아들에게 “가는 게 좋겠다”고 속삭였다. 그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또 곤란해질 것”이라고 했다. [23] 훗날 콜의 여러가지 주요 문서, 메모, 편지, 서류 등 물품의 소유권에 대해서 가족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유언대로 리히터에게 단독 상속받게 하는 대신 전 부인의 아들인 발터 콜과 페터 콜, 그리고 손자들에게 100만 유로(약 13억 3,000만 원)를 주고 상속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24] 독일어권에서는 박사학위 소지자에게 Doktor라는 호칭을 붙여주는게 사회적으로 관례이긴 하다. 콜의 정치적 후계자이자 역시 물리학 박사 소지자인 메르켈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Frau Merkel이 아니라 Frau Doktor Merkel라는 호칭으로 불릴 정도. [25] 이름은 같았던 전임자가 지성인의 이미지가 강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26] 1990년대 중반까지 쓰였던 국내의 모 고교영어 교과서에도 비슷한 바리에이션이 있다. 여기서는 대답이 '조지 워싱턴'이었다. [27] 옐친은 을 좋아하기로 유명했고, 소시지는 술 안주로 좋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