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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34:45

요제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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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왕]: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점령하고 오스트리아 대공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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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드라시 2세 벨러 4세 이슈트반 5세 라슬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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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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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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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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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레오폴드 프랑수아 2세 }}}
백작 · 공작 ·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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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제2대 황제
요제프 2세
Joseph II
파일:Anton_von_Maron_006.png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이름 요제프 베네딕트 안톤 미하엘 아담
(Joseph Benedikt Anton Michael Adam)
출생 1741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쇤브룬 궁전
사망 1790년 2월 20일 (향년 48세)
오스트리아
재위기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1765년 8월 18일 ~ 1790년 2월 20일
독일왕
1764년 3월 27일 ~ 1790년 2월 20일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국왕
1780년 11월 29일 ~ 1790년 2월 20일
서명 파일:요제프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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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파르마의 이사벨라 (1760년 결혼 / 1763년 사망)[1]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 (1765년 결혼 / 1767년 사망)
자녀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크리스티나
아버지 프란츠 1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형제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즉위 전3. 치세
3.1. 공동통치기3.2. 단독 통치기
4. 가족
4.1. 조상4.2. 자녀4.3. 가족과의 관계
4.3.1. 아내들4.3.2. 부모형제들
5. 여담

[clearfix]

1. 개요

만사는 백성을 위하여 행하되, 백성에 의해서 행해져선 안된다.[2]
Alles für das Volk, nichts durch das Volk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주. 부국강병을 위하여 여러 개혁을 실시하여 대표적인 계몽군주로 꼽히고 있지만, 현실과 괴리된 급진적인 개혁의 추진에 대한 반발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말 그대로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이상주의적인 군주였다.

2. 즉위 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tin_van_Meytens_%28workshop%29_Joseph_II_in_his_youth.jpg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어린 시절 초상화

프란츠 1세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으로, 덕분이 일찍부터 후계자 교육을 받아 여러 분야에서 학식이 뛰어났고 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765년, 아버지 프란츠 1세가 급사한 뒤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어 요제프 2세로 대관식을 치렀다.[3]

3. 치세

3.1. 공동통치기

아버지처럼 완전한 허수아비 신세는 아니었지만 선임 통치자인 어머니의 공동 통치자로서 2인자, 즉, 콩라인이었다. 일단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으나 당시 황권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실질적인 권력은 자신의 영지에서만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세습령의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작위는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의 세 자리였다. 이 작위를 모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가장 중요한 결정권도 어머니가 행사했고, 그의 위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자라는 애매한 자리였다.[4]. 남편도 허수아비, 아들도 허수아비. 그의 재위 기간 25년 중 15년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애와 겹치고, 그 기간 동안 그는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 통치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 했다. 그래도 나름 반항하여 어머니와 자주 충돌했고 폐위시키겠다는 협박도 쳐봤으나 오히려 어머니에게 "폐위당할래?"라는 협박을 받기도… 대체 누가 황제야

모자간의 대립은 정치관과 사상의 차이에서 왔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끝에 유럽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토 확장보다는 제국의 안정을 중시했고 아들의 젊은 혈기와 성급한 성격에 대해 항상 우려했다. 반면에 요제프 2세는 여느 다른 유럽 젊은이들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의 빠로, 프로이센 왕국을 본받아 전제적 계몽주의를 수용해 왕권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펴고자 하였다.[5] 종교관과 사상에 있어서도 어머니는 경건하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적인 가톨릭 신앙의 정치적 수호자로서 역할에 열의를 보였던 전형적인 17세기의 합스부르크 가톨릭 군주였으며, 폴란드 분할에서 보여주듯 이런 교파주의적 도덕관과 대외관에 민감한 모습을 보였던 반면 아들은 계몽주의의 세속주의적 이성주의를 추구하며 이에 따라 국익이나 팽창을 위해서는 종교적, 역사적 우방이고 나발이고 없는 근대주의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모자간에 불화가 있었다고는 해도 이 동안 요제프 2세는 주로 제국 의회[6]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발표할 연설문을 작성하곤 했다. 이 연설문에도 자기 자신의 정치사상이 그대로 들어갔다.

3.2. 단독 통치기

1780년 11월,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자 마침내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전제적 계몽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서 보여준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가적 한계를 체험한 그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개혁은 당시에는 굉장히 진보적이었는데, 1781년, 농노를 해방하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해방된 농노에서 얻은 세수 기반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1784년에는 라틴어가 신민들의 언어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헝가리 의회에서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했으며[7], 이에 따라 자연스레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용어가 독일어로 변경되었다.[8] 그리고 예술과 학문을 부흥시키고 중앙집권제도의 강화 및 행정제도의 개편 등에 있어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단행했다. 1787년에는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등의 잔인한 형벌을 금지했으며, 이는 그의 사망 후인 1795년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요제프 2세는 가톨릭교회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제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1781년에 실시한 종교 관용령(Toleranzpatent)이다. 이 정책을 통해 예배의 자유를 보장하였으며,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도 유대교, 정교회, 루터파, 칼뱅파 등 국교인 가톨릭 이외의 종교를 믿는 것이 가능해졌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다르게 유대인에게도 다소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 유대인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할 것을 허가하는 등 법제적으로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눈치를 보며 살 필요가 없어졌다. 때문에 그의 공적을 기려서 프라하의 유대인 거주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 '요제포브' 혹은 '요제보브'라고 불린다. 그는 프리메이슨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자기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지는 않았다.[9]

그러나 요제프 2세의 개혁정치는 제대로 된 기반 없이 성급히 행해졌던 것이었기에 상당수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반대로 내부의 혼란만 가중되는 결과를 빚었다. 중앙집권정책과 독일어 공용화는 예로부터 지방간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치가 행해졌던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귀족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세속주의 정책도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사 국내 지지를 잃어버렸고 후술하듯 각 지방의 반란이 잇달았다. 한마디로 의도는 좋았으나 목표만 높았던 현실감각 없는 군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1772년에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했으며 1774년에는 오스만 제국 산하 봉신국인 몰다비아 공국 북부를 점령하여 이듬해 양도받아 부코비나 공국을 수립했다. 둘 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생존해 있던 공동통치기간의 일인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폴란드 분할이나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 등 영토 확장에는 다소 소극적이었고 주로 요제프 2세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그는 독자적으로 대서양으로의 해양 진출을 꾀하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10]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1781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와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 발칸 반도를 분할하기로 합의하여 1788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에 나섰으며, 바이에른의 병합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요제프 2세의 대외정책은 실패로 얼룩졌다. 전염병의 창궐[11]과 반란[12]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반란의 확산과 프로이센의 압력으로 인해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고 철수해야 했다. 바이에른 병합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영방국가들의 반발로 결국 포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력 강화는 현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폭동이 일어났다. 특히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의 네덜란드 지역은 혁명의 영향을 거세게 받으며 독립을 선언하면서 그의 네덜란드 정책도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은 요제프 2세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우려가 옳았던 셈이다. 그가 섣불리 추진했던 개혁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역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을 약화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요제프 2세를 무조건 무능하다고 볼 수 없으며, 그의 개혁은 죽음 직후 후퇴된 것을 제외하면 장기적으로는 결실을 맺었다. 특히 그가 이 정도의 개혁이라도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합스부르크 제국이 분할되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철을 밟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중앙집권화에 실패하고 지방 귀족들의 이권에 휘둘려 국가까지도 해체되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와는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은 나중에 오스트리아 제국을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편될지라도, 오스트리아 중심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요제프 2세의 실패로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을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되기 전까지 다민족 국가로서의 중심을 세우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계속된 실패로 인해 요제프 2세는 심신이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말년에는 프랑스에서 터진 혁명의 영향력을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결국 1790년 1월, 개혁을 중단한다고 선언했고 나중에는 건강까지 악화된 터라 2월 들어 49세의 나이로 에서 사망했다. 지치고 낙담한 그는 자신의 묘비명을 "여기 모든 것에 실패한 요제프 2세가 눕다"로 새기게 했다. 유언은 "온 유럽에 항구적인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노라."였다.

4. 가족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요제프 2세
(Kaiser Joseph II.)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츠 1세
(Kaiser Franz I. Stephan)
<colbgcolor=#ffffe4,#323300> 로렌 공작 레오폴드
(Léopold, duc de Lorraine)
로렌 공작 샤를 5세
(Charles V, duc de Lorraine)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Eleonore von Österreich)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Charlotte d'Orléans)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duc d'Orléans)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Prinzessin von der Pfalz)
마리아 테레지아
(Kaiserin Maria Theresia)
카를 6세
(Kaiser Karl VI.)
레오폴트 1세
(Kaiser Leopold I.)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von Pfalz-Neuburg)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
(Herzog Ludwig Rudolf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Christine Luise von Oettingen-Oettingen)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1녀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
(Erzherzogin Maria Theresia)
1762년 3월 20일 1770년 1월 23일
2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Christine)
1763년 11월 22일 1763년 11월 22일

4.3. 가족과의 관계

4.3.1. 아내들

첫번째 아내는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의 딸 파르마의 이사벨라[13]로 정략결혼으로 맺어졌다. 그러나 요제프는 뛰어난 미모에 재주도 많은 재원인 이사벨라를 무척이나 사랑하였고 부부사이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사벨라가 21세에 두 번째 출산 직후 천연두에 걸려 요절한 뒤, 죽은 아내를 마냥 그리워하던 요제프는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이사벨라는 요제프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편의 여동생, 즉 시누이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장 사랑받은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열렬히 사모하는 레즈비언이었다. 이것을 알게 된 계기도 이사벨라를 잊지못한 요제프가 재혼을 한사코 거부하자, 보다 못한 크리스티나가 진실을 알려주는데, 크리스티나는 요제프 2세가 받을 충격뿐만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던 이사벨라에게는 물론 동생인 자신에게 배신감이 들지 않을거라고 생각한 건지, 본인에게 쓴 이사벨라의 연애편지를 보여주며 모든 진실을 알려줬다. 안 그래도 성격이 까칠했던 요제프 2세는 인생에서 가장 사랑한 첫 아내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이후로 더욱 냉소적이고 인간불신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이후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의 딸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했으나, 부부 사이는 매우 소원했고 요제파 역시 천연두에 걸려 요절한다. 그리고 이사벨라가 남긴 유일한 자녀로서 매우 귀애했던 딸 마리아 테레지아(쁘띠 테레즈)마저 늑막염에 걸려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죽는 참척의 고통을 겪는다. 이런 일을 연속적으로 겪으며 요제프는 결국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의 사후 제위는 남동생으로 토스카나 대공이던 레오폴트 2세가 이어간다.

4.3.2. 부모형제들

차갑고 냉정하며 거의 인간 불신에 가까운 성격이었다지만 가족들과는 대체로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제위를 물려받을 장남이자 계승자이긴 했으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총애는 커녕 외면받았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총애받던 카를과 크리스티나와는 사이가 나빴던 반면 똑같이 차별당하며 비슷한 처지였던 누이와 나머지 동생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큰누나 마리아 안나와는 원래는 좋은 관계였으나 자신과 결혼한 파르마의 이사벨라와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요제프와 안나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안나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어머니의 냉대로 인해 외로운 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해준 아버지 프란츠 1세가 똑같이 뛰어난 미모에 지적이고 프랑스 혈통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황실에 입성해 처지가 비슷한 며느리인 이사벨라를 사랑해주자 질투했던 것이다. 이사벨라는 시누이인 마리아 안나의 차가운 태도에 깊은 상처를 받아 다시는 그녀를 믿지 않았으며, 마리아 안나와 달리 자기 부인인 이사벨라를 마음 깊이 사랑했던 요제프 역시 마리아 안나와 멀어졌고, 이는 남매가 화해하기 전까지 앙금으로 남아 마리아 안나의 자선 사업을 요제프가 방해하거나 재산 문제로 다투게 되는 등의 갈등이 있었다. 때문에 요제프가 즉위한 후에 안나는 쫓겨나다시피 수녀원에 들어갔는데, 이후 두 남매는 화해를 했지만 그래도 안나는 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특히 자신보다 14살이나 어린 나이이자 거의 조카뻘인 막내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를 딸처럼 여겨 사이가 좋았다. 동생 바보였던지라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에 동행했고 이후 남편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불임이라는 소문이 돌 때 여동생을 위해 팔켄슈타인 백작이라는 가명[14]을 자칭해 직접 프랑스로 진상을 확인하러 갔다. 루이 16세를 만나 대화하고서는 "프랑스 국왕은 처음에 딱 봤을 때는 바보 같았는데 차분하게 길게 이야기를 나눠 보니 이 사람이 생각보다 지성인임을 알겠더라"라는 평가[15]를 남겼다고. 진상은 그의 성기능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성관계를 극구 기피하는 성향이었던 것이고, 요제프 2세의 설득에 따라 그와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 자녀들이 생기게 되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처럼 마리 앙투아네트의 철부지 행동에 뒷목을 여러번 잡고 특히 프랑스 방문때 프랑스의 국민들의 처참한 삶과 불안한 정국을 직접 목도하면서 부르봉 왕조와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무척 걱정하며 수십 조항에 달하는 권고문을 남겼다.[16] 요제프 2세와 대화를 나누었던 프랑스 지식인들은 그가 계몽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고 한다.

5. 여담



[1] 이사벨라의 남동생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가 요제프의 여동생인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하였으므로 겹사돈이다. [2] 그의 계몽군주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어록.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와 비교하면, 군주제와 민주정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3] 여담으로 이 대관식을 지켜본 사람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위대한 문학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였다. [4] 황제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될 수 있겠지만,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여러 영방국가들이 독립적인 행보를 취해온 지가 이미 백년이 넘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칭호는 이름만 남은 자리일 뿐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영토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 지벤뷔어겐 대공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이었고 모자의 공동통치기간에 추가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이 있었는데 이 영토들의 군주는 요제프 2세가 아니라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심지어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만 후보로 나올 수 있게 반세습화 되었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태자가 없는 선거군주제였기 때문에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에서는 태자도 아니었다. 조악하게나마 한국사에 비유하자면 마리아 테레지아가 상왕이고 요제프는 상왕이 죽어야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5] 심지어 1769년에는 극비리에 국경을 넘어 적국인 프로이센에서 프리드리히 2세를 방문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열광적인 추종자인 요제프 2세를 마치 아들처럼 환대해 주었으며, 2박 3일동안 통치술에 대해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6]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이다.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용어를 거리낌 없이 차용했다. [7] 헝가리어가 아닌가 하면, 당시 헝가리 왕국의 영토는 지금의 헝가리 영토보다 훨씬 방대했기 때문에 헝가리인 외에도 북부 슬로바키아인, 트란스카르파티아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에르데이 루마니아인, 남부 국경지대 세르비아인 등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수 세기에 걸쳐 이주한 독일인 등도 있었기에 헝가리어가 아닌 오스트리아에서 사용하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 했다. 물론 이는 제국 전반에 걸쳐 언어를 단일화하여 오스트리아와 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마디로 과거 소수민족들의 문화와 자치를 존중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정책을 펼친 셈이다. [8] 헝가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지 않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였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이나, 독일계와 독일어를 쓰는 귀족들이 다수 있던 보헤미아 왕국은 굳이 독일어를 의무화할 필요가 없었고, 헝가리 왕국 하나에만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한 것이 아닌 헝가리 왕국을 시발점으로 하여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 등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에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하려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9] 1738년 이래로 가톨릭 신자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면 자동 파문을 당한다. 즉, 가톨릭 군주가 함부로 가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0] 현재의 벨기에 룩셈부르크. [11] 전선을 시찰하던 요제프까지 말라리아에 걸렸을 정도다. [12] 네덜란드와 헝가리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3]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한 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파르마 공국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로 넘어갔고 이사벨라의 아버지 펠리페 왕자가 파르마 공작이 되면서 그녀 역시 파르마 공녀가 되었다. [14] 다만 무지렁이 백성이 아니고서야 팔켄슈타인 백작이 요제프 2세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팔켄슈타인 백작위 자체가 부친 프란츠 1세의 작위 중 하나로 그의 사후 자식인 자신이 물려받은 것이었기 때문. 그렇기에 대부분의 프랑스 백성은 그가 요제프 2세임을 알았고 그의 방문은 프랑스 전 신민의 관심을 모았다. 요제프 2세는 또 신민의 관심을 받는 법을 잘 알던 지라 프랑스 체재 중 베르사유 궁에 국빈으로 머물지 않고 파리에 숙소를 마련했고,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사람을 만나 큰 이슈가 되었다. 참고로 이 팔켄슈타인 백작위는 러시아 제국에 갔을 때도 써먹었다. 이쯤 되면 외교용으로 신분을 명목상으로나마 가리기 위한 작위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15] 루이 16세 항목 참조. [16] 이 중 한 구절에서 혁명이 언급된다. 프랑스의 불안한 정세를 경고하며 왕과 왕비가 잘 처신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했다. 결국 요제프의 예상은 최악의 형태로 실현되고 만다. [17] 생활언어는 독일어였지만, 당시 오페라는 주로 이탈리아어로 불렀다. [18] 배우는 미국 배우 제프리 존스, KBS판 더빙 성우는 박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