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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0:21:41

무신론

무신론자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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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알 수 없다 관심 없다 의심된다
불가지론 신론 무관심주의 회의주의
부정
없다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없다
무신론 반신론 교체신론
무의미
일관적인 정의가 없다 개념 자체가 없다 신은 신일 뿐, 사유도 말할 수도 없다
이그노스티시즘 신학적 비인지주의 무/신론
사건
전지전능하지 않다 부정한 후에 받아들여야 한다
약한 신학 재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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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무신론의 범위
3.1. 암시적 무신론과 명시적 무신론3.2. 오늘날 철학에서3.3. 무신론의 일부로서의 유신론
4. 신무신론5. 기독교 무신론6. 명칭 자체에 대한 비판7. 신무신론과 무신론 개념의 오남용
7.1. 파생된 오류들
7.1.1. 불가지론적/가지론적 무신론(agnostic/gnostic atheism)7.1.2. 유신론적/무신론적 불가지론(theistic/atheistic agnosticism)
7.2. 반론
8. 인구와 사회상
8.1. 한국 및 중국8.2. 일본8.3. 그 외 무종교인이 많은 나라
9. 편견
9.1. 편견의 예시와 반박
10. 타 사상과의 관련성11. 유신론 vs 무신론의 틀을 넘어선다면?12. 국가 무신론13. 여담14. 무신론자15. 외부 링크1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 Atheism
존재 부정하는 철학 사상.

무신론이 등장했던 시기에서 정의하는 신은 Personal god, 좁은 의미의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 같은 것을 말하며 기원전 5세기에 '신이 없다'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ἄθεος(아테오스)에서 유래했다. 고대에 더 큰 사회가 숭배하는 신을 거부한 이들에게 경멸적으로 쓰거나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

무신론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무종교는 불가지론적 입장[2]을 가진 사람도 많고, 교리에 신이 존재하지 않거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종교도 있기 때문에 때문에 종교가 없다고 무신론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단어의 기원과 이러한 이유로 앤서니 플루나 마이클 마틴 등의 철학자들은 무종교와 유의미한 차이가 없어 같은 것이라 이해한다. 그리고 실제로 덜 엄격하게 쓰이기 때문에 무종교와 혼용되는 것이 쉽게 관측된다. 따라서 일상적으로는 무신론이라는 말이 무종교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서방에서는 무신론을 'atheism'으로, 불가지론을 'agnostic'으로 구별한다.

무신론에 대해, 고지식적이거나 별로 아는 게 없는 사람들 또는 극단적인 신봉자들 중에선 평범한 무신론자를 반종교주의(대표적으로 반기독교 이슬람포비아)와 연관 짓는 경우가 있다. 무신론과 저들이 아예 교집합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무신론자이면서도 종교의 장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고 신을 안 믿으면서도 오컬트는 흥미롭게 여기는 등등 무신론자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다양하다. 유신론에서 신이 있지 않을까 하고 반신반의하는 신도와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광신도 등이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종교 = 유신론'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 안에서도 갈래가 나누어지긴 하지만) 유교, 불교 등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적 종교이다. 애초에 종교(宗敎: 높은 가르침)라는 용어가 원래 싯다르타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중국에서 만들어진 단어이니 '신'과는 관련이 없는 용어이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종교 = 불교인 셈인데 이제 와서는 "불교는 신을 믿는 게 아니니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다"라는 식의 말이 떠도는 게 아이러니.

유신론적 종교에 속한 신도라고 해서 모두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볼 수는 없다. 애초에 독심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에야 실제로 믿는지 안 믿는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라고 해도 경제·사회적 이익을 얻기 위해, 사회생활과 대인 관계 차원에서, 혹은 재산상 손해나 생명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기불릭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또는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종교의 존재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나 종교가 설파하는 교리 중 일부를 받아들이기 위해 종교인이 되는 사람도 있다. 초기 불교의 모습이 기독교나 이슬람 등과 다르게 철학적인 모습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사후 세계의 존재나 윤회 등으로 볼 때 불교가 종교가 아니라거나 무신론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3]

한편 무신론은 반신론(antitheism: 반유신론)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무신론이 위와 같이 신의 존재하는지에 대한 대답이라면, 반신론은 신에 대한 믿음의 모든 형태들을 공격하고 반대하는 입장(an opposition to belief in deities)이다. 반신론은 무신론과 달리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신을 거부해야 인간이 더 나아진다는 입장이다. 현대의 무신론자, 특히 소위 신무신론자라 불리는 인물들(대표적으로 리처드 도킨스)은 반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무신론의 발달에는 다른 이유도 있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의견이 많다. 자연 과학이 이전에는 인간이 닿을 수 없었던 세계를 비추고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합리적인 설명을 도출해 내면서, 이전에 그 설명을 대신하고 있던 신화 종교를 밀어내어 그 역할을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대 세계에서 번개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신의 권능으로 여겨졌고,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번개(천둥)의 신은 대부분 높은 위세를 자랑한다. 대표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 제우스( 유피테르), 북유럽 신화 토르, 힌두교 인드라. 그러나 오늘날의 발전된 과학은 신의 영역이었던 번개라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규명함으로써 '두렵고 경이로운 신의 권능'이 아닌 '합리적인 자연 현상'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비구름 속 온도 차이로 인해 전하가 양전하와 음전하로 분리되고,[4] 지면에는 구름 아래쪽의 음전하 때문에 양전하의 양이 증가한다. 이렇게 형성된 양전하와 음전하의 전자 교류로 인해 전기가 방출되고 이것이 번개이다. 우주의 규모 같은 것도 상상하긴 힘들 정도로 매우 커다랗지만, 이 역시 물리 법칙을 따른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현재 관측하지 못하고 확증하지 못하는 현상, 아직은 알 수 없는 현상 역시도 물리 법칙 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자연을 초월해서 무언가 있다라는 개념, '초자연'이라는 개념에 대해 부정적이다. 최종적으로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틈새의 신에 불과하다고 본다. 애당초, 신이 그냥 존재할 수 있다면, 우주도 그냥 존재할 수 있다.

근대 이후 북유럽 등지에 있는 국가들에서는 무신론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종교의 힘이 많이 미치는 곳에서는 무신론자가 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놓은 곳도 적지 않으나 리처드 도킨스 등 아예 '적극적 무신론자'가 나타날 정도로 사회상이 많이 변화하면서 사회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된 한 사고방식임은 부정하기 힘들다.

창작물에서는 아예 신이 없는 세상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들도 일부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신이 없는 세계관 문서 참고.[5]

2. 역사

무신론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 무신론을 뜻하는 단어 'atheism'은 '신이 없는'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ἄθεος(atheos)에서 유래하였다[6].

신앙의 자유가 흐릿한 시절에는 “무신론자”는 오늘날과 달리 멸칭으로 쓰였다.
그리스도교도 공인되기 전에는 비슷한 운명을 면하지 못했다. 2세기 중엽, 그리스도교의 한 순교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심지어 무신론자라고도 불렸다. 우리는 당신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 앞에서는 무신론자임을 고백하지만, 진정한 신과 관련해서는 아니다.” 그리스도교도들도 자기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불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출처: 김응종, “근대 무신론의 철학적 기원*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와 피에르 밸을 중심으로 - “, KCI, 2009, P.47, 링크
인용문을 보면 알겠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을 받지 못하던 시절, 기독교조차 무신론자라 불렸다. 이는 기독교가 정말로 신을 믿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가 없고 공인된 종교와 반드시 숭배해야 하는 신이 존재할 시절에는, 특정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거짓 신을 믿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에게도 이교도들의 신앙은 거짓된 신을 믿는 것이었다.[7] 물론, 현대에 법적으로든 사회적 시선에서든 신앙의 자유가 확고한 지역에서는 아무리 독실한 신자라도 더 이상 '무신론자'를 멸칭으로 쓰지 않는다.

(유럽에서) 체계적인 무신론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는 확답하기 어렵다. 역사 속에서 시대적•지역적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무신론의 정의, 그리고 다른 사상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보면 더욱 그렇다.

장 자크 루소와 세속적 인본주의의 역사를 들면서 "무신론은 생각보다 이신론과 덜 구분된다"[8]하는 경우도 있고, 스피노자와 피에르 밸이 세운 철학적 업적이 체계적 무신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9]

별도로, 시작이 그렇다거나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현대의 무신론을 이신론과 범신론과 일치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위의 가디언지에 실린 기사처럼 '무신론은 이신론의 분파다(Atheism is an offshoot of deism)'다 같은 약간 도발적인 제목을 쓰는 저자도, 무신론이 이신론의 신도 부정하는 것을 확실히 한다.[10] 또한, 범신론 혹은 다른 개념을 '신'이라는 단어로 치환하는 부류의 경우, 그런 언어 사용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기에 무신론자는 거부할 수 있다.[11]

선진국에서는 여러 요인으로 무신론자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다만 선진국보단 더 종교적인 개발 도상국이나 중진국의 출산율이 더 높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 눈에 띄게 늘어나는 편은 아니다.

3. 무신론의 범위

3.1. 암시적 무신론과 명시적 무신론

원론적으로 무신론은 모든 신적 존재와 영적 존재, 초자연적 존재,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신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도 무신론인가에 관해서 고찰하게 되면 무신론에 관해 크게 두 가지 범위를 둘 수 있다. 암시적 무신론과 명시적 무신론이 그것이다.

암시적 무신론은 유신론을 알지 못해도 무신론자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1772년 계몽주의 사상가 폴 티리 돌바크는 그의 저서에서 "모든 어린이들은 무신론자로 태어나며, 그들은 신에 대한 개념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후 1979년 자유 의지론 사상가인 조지 해밀턴 스미스 또한 비슷한 발언을 하였는데, "유신론에 노출된 적 없는 사람은 무신론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들과 아직 유신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 부류에 포함한다. 이 아이들이 신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스스로 무신론자로서의 자격이 있다."라고 시사하였다. 즉 갓난아이들은 자연을 유신론적 관점으로 바라보거나 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암시적 무신론자인 것이며, 스스로 무신론자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신론에 노출되지 않은 사람은 유신론을 알지 못하기에 무신론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 스미스가 시사하는 바이다. 그는 스스로 신적 존재에 대한 견해를 의식하는 것이 아닌, 유신론에 노출되지 않아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을 "암시적 무신론"이라고 했다.

이와 반대로 유신론을 이해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명시적 무신론이라고 한다. 어니스트 네이글은 조지 해밀턴 스미스의 무신론에 대한 정의를 반박하였는데, 스스로 유신론을 인식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명시적 무신론만을 진정한 무신론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강한 무신론자들만 명시적 무신론자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명시적 무신론자의 범위를 좁히게 된다. 신이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알고 있고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진지하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지만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만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서 (신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신의 존재를 아직 믿지 않는 사람도 약한 무신론 또는 부정적 무신론이긴 하지만 이들은 불신자(non-believer)라고 부를 수 있고 명시적 무신론자로 보아야 한다. 마법이나 외계인, UFO, 요정 등 각종 신비주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증거의 부재를 이유로 믿지 않아도 이들을 머글이나 UFO 회의론자나 신비주의 불신자로 보니까.

이에 대해서도 후술할 신무신론자들의 입장은 신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신이 존재한다는 사상을 알지 못해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로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며 이러한 암시적 무신론 또한 무신론으로서 인정해서 가장 무신론으로 인정하는 범위가 넓다.

비신론(非神論, nontheism) 또 무종교(unaffiliated, non-religious, Irreligion)란 분류도 있는데 이는 좁은 의미의 무신론뿐 아니라 암시적 무신론, 불가지론, 반신론 등 유신론(범신론을 포함한)의 모든 여집합을 집합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즉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애초에 신이라 초월적 존재에 대해 가정하고 그게 허구인지 실재하는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비신론은 애초에 신이나 종교라는 존재를 가정하는 것에서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무신론이라는 이름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용어다.

이는 서구에서는 특히 미국 등에서는 역사적으로 '무신론자'라는 용어가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무정부주의 등과 함께 엮여서 부정적으로 또는 특이한 사람[12]으로 인식되고 있어서 그런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탈피하고자 하고자 쓰이기도 한다. 이슬람 국가에서도 기독교도나 불교도는 용납하지만 무신론자는 알라를 부정하는 신성 모독 세력으로 간주해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종교가 없는 사람을 무신론자가가 아니고 무종교자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다. unaffiliated 는 무소속이라는 의미로 종교 관련 설문에서 특정 종교나 종교 단체에 속하지 않은 무종교자를 지칭하는 데 쓰인다. 또 비신론은 몇몇 진보적/현대적 종교에서 엄격한 종교적 교조(dogma)나 신비주의적 성격을 반대하는 것을 지칭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서양의 관점에선 유교나 불교, 창가학회 등은 비신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3.2. 오늘날 철학에서

애초에 통일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오늘날 철학계에서 다수 의견은 위와 같이 '암시적 무신론'과 '명시적 유신론' 구분을 유의미하게 바라보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라는 존재론(ontological)적 고찰에서 "-론"은 무엇을 믿지 않는가보다 무엇을 믿는가를 위주로 전개가 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소위) '약한 무신론'은 해당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화자가 신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는 (강한) 무신론자인지, 아니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그와 동시에 신의 유무에 대한 질문 그 자체를 유보해 둔 불가지론자인지를 적절하게 답해줄 수 없기 때문에 학술적 의미에서 철학적 정의로서는 부정확하며 부적절하다.

게다가, 애초에 암시적 무신론과 명시적 무신론의 구분법, 혹은 '강한' 무신론과 '약한' 무신론은 태생적으로 논리적 결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동일 논리적 과정을 반대 방향으로 전개하지 못한다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명시적으로,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않음을 '약한 무신론' 내지는 '암시적 무신론'으로 친다면, 그와 동일한 논리적 과정으로 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음은 '약한 유신론'이자 '암시적 유신론'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개념 정의가 본래의 의의, 목적을 상실하고, 명시적 형태로 믿음을 표하지 않은 모든 대상이 유신론적이면서도 무신론적이라는 모순적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개념 정의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약한/강한' 무신론, '암시적/명시적' 무신론 구분법의 모순을 꼬집기 위해 흔히 나오는 일종의 유희적 예제로 '아기는 무신론자인가 유신론자인가' 혹은 '바위가 무신론자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약한/강한 무신론, 명시적/암시적 무신론에 의거하면 주체적 판단 및 믿음을 표현할 능력이 없는 대상인 아기와 같은 존재나 바위와 같은 사물조차도 논리적으로 무신론자일 수 있으며, 동시에 내재된 논리적 모순에 의해 유신론자일 수도 있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암시적/명시적 무신론, 약한/강한 무신론의 구분법은 현재 그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즉, "신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화답은 각자가 '무엇을 믿는가'의 명시적 형태로 화답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앞 문장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신이라는 개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화답으로 주어질 수도 있지만 답의 범주를 제한하고 있다.)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 무신론 (강한 부정)
"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 유신론 (강한 긍정)
"나는 그에 대해 현재 판단을 할 수 없다고 믿는다" = 불가지론 (긍정/부정의 유보)

위의 삼종 구분법이 현재로서는 가장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직관적인 구분법인 동시에 문외한들 사이에서조차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해석임에 오늘날 철학은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이 경우, 불가지론은 물음에 대한 강한 긍정이 아니기에 신이 존재함을 믿지는 않지만, 동시에 강한 부정도 아니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믿지도 않는다. 이 경우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라는 일차 순위에 의문에 대해 직접적인 판단을 유보해 두며, 그 믿음은 '현재로서의 나는 그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이는 해당 존재론적 질문 그 자체에 대한 판단이자 믿음으로서 소위 이차 순위의 믿음(second-order belief)이 된다.

3.3. 무신론의 일부로서의 유신론

'유신론이라는 것도 결국은 무신론의 일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가령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야훼는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냥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믿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인간 버전의 무신론자 캐릭터를 그냥 한 단계 뒤로 미룬 것일 뿐이라는 것. '제작자를 만든 제작자를 만든 제작자...'라는 무한한 퇴행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어느 단계에서는 이렇게 무신론적인 구조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매트릭스 안에서 살며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는 미스터 앤더슨과, 매트릭스에서 벗어나서 접한 그 기계 제국이 현실일 것이라 믿는 네오는 결국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로.)

4. 신무신론

New Atheism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our_Horsemen.jpg

신무신론의 '네 기사(The four horseman)'[13]로 불리는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좌측 상단부터 시계 방향순). 아얀 히르시 알리를 추가하기도 한다.[14]

과거의 무신론 담론은 대개 포이어바흐에서 시작하여 논리 실증주의, 마르크스주의나 프로이트주의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 같은 곳에서 무신론에 관련된 오래된 서적들을 뒤져보면 거의 대부분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야기만 나온다. 인간이 신을 만들고 스스로 그 신에게 지배당했다든가, 유일신이라는 아이디어는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라든가 기타 등등.

오늘날의 신무신론 담론은 대개 이들과 관련이 있다. 도킨스나 데닛은 종교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이라는 전통 속에 있다는 전제하에 종교의 유익이 무엇이든지 간에 종교는 전적으로 인간의 정신 안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샘 해리스는 한술 더 떠서 자유 의지 같은 건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 의지나 윤리관 도덕적 행위라는 개념은 뇌의 화학적 작용에 불과하고 사회 관습에 따른 학습이라고 본다. 이는 창작의 자유와 예술적 감수성을 중시하는 비종교적 자유주의자들 성향과 거리가 먼 것이다.

기존의 무신론적 자유주의자들이 종교가 없어도 또는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인간성을 긍정하며 인본주의적 사고를 갖는 데 비하여 도킨스의 전제는 인간은 유전적으로 이기적이나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측면이라 기존의 무신론자들의 주장의 전제와 차이점이 있다. 현대 무신론의 특색을 몇 가지 들자면 과학적 회의주의며 신무신론자들은 주로 과학적 관점에서 글을 쓴다.

그 밖에도 사회 참여적 성격, 과학적 계몽주의 성향이 상당히 강하며, 종교 권위에 따른 인권 탄압 문제에 민감하다. 리처드 도킨스를 위시하여 현대 무신론의 주류이기도 하다. 다만 무신론자들 내에서도 이 노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황. 대표적인 신무신론자인 4기사의 대담 무신론자인 마이클 루스의 도킨스 비판

그렇다고 이들의 사고가 좌파적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샘 해리스만 하더라도 좌파 지식인 놈 촘스키 등을 비판하면서, 중동 국가와 미국은 동등한 도덕적 위치가 아니라며 미국은 패권 국가지만 착한 거인이라 주장한다. ( 촘스키-해리스 논쟁 참조)

과학주의가 신구를 나누는 큰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신무신론자들이 사회 참여적 태도를 보일 때도 흔히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개인적 인권의 보장에 중점을 둔다.

흔히 서구에서는 직접적으로 '무신론 연맹' 같은 표현을 쓰기보다는 '인본주의자 연맹'과 같은 식으로 단체가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단체가 휴머니스트 인터네셔널. 또한 국내와는 달리 서구에는 자유사상이라는 단어도 많이 퍼져 있는데 이는 무신론과 직접적으로 동의어라고 보기는 다소 힘들다. 굳이 따지자면 자유사상 내에 무신론이라는 개념이 핵심적으로 포괄되지만, 자유사상이 다루는 주제들이 신의 존재 유무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성 소수자들이 '즐거운'이라는 뜻의 'gay'를 남성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단어로 바꾼 것에 크게 고무된 후,[15] 무신론자들도 자신들을 의미하는 새로운 단어로 'bright'를 쓰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것이 흔히 알려져 있는 '브라이트 운동'(Brights movement)이다. 최초의 시작은 2003년, 캘리포니아의 교육자 게이세르트(P. Geisert)와 푸트렐(M. Futrell)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흔한 비판은 "무신론자들이 현명(bright)하다고 자부한다면, 그럼 종교인들은 멍청(dim)하다는 말이냐?"인데, 이에 대해 대니얼 데닛은 《주문을 깨다》에서 " 게이의 반대말이 '우울한(glum)'이 아니라 '스트레이트(straight)'인 것처럼, 우리가 현명하다고 자부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자동적으로 멍청하다고 표현되는 건 아니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즉, 흔한 스노비즘이나 엘리트주의까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브라이트 운동은 리처드 도킨스의 지지와 홍보 속에서 영국에서 인기를 얻었는데, 이들이 정모를 할 때에는 일반적인 'meeting'이라는 단어 대신 'meet-up'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그런데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온라인에선 참여 열기가 그렇게 뜨겁더니, 막상 뚜껑을 열어 보자 참석 인원수가 영 시원찮았던 것이다. 2003년 9월 첫 개최 당시에는 13명, 이후로는 2009년 7월이 되기까지 내내 4~33명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출처는 《신 없는 사람들》, 앨리스터 맥그래스, p.77.

그 기간 동안 오프라인에서의 수많은 대형 교회들에 매번 모여들었던 구름 떼 같은 신도들을 생각한다면, 브라이트 운동이 "무신론에 대한 대중적 호응을 얻는다"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게 아니냐는 내부적 자성도 있다.[16] 종교인들은 그 종교가 자신의 정체성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같은 종교를 가진 타인과도 끈끈한 유대감으로 결속되어 교류하기를 선호하는 반면,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이라는 개념에의 소속감이나 정체감에 크게 개의치 않기에 정기 모임의 필요성도 덜 느끼는 것일 수 있다.

5. 기독교 무신론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을 기독교에서 일부 받아들여 하나님은 죽었으니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는 신학 해당 문서 참조[17]

6. 명칭 자체에 대한 비판

고대 그리스어 atheos라는 형용사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이는 부정을 의미하는 a와 theos()의 합성어다. 재미있는 점은 정작 무신론자(atheist)로 불리는 사람들은 '무신론'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는 점이다.

이는 무신론이라는 말이 '이라는 게 있는데 그 신이란 건 없다.'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즉, 무신론이라는 말 자체가 신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무신론은 신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아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종국에 무신론이라는 단어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들에게는 산타클로스 요정이나 찻주전자 인격신이나 인격적이지 않은 신이나 모두 비슷한 확률로 존재할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어느 누구도 "산타클로스가 존재하나요?"라는 질문에 "산타클로스라는 개념은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할 확률은 극히 적어서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산타클로스론자입니다."라고 답하진 않는다. 그냥 "산타클로스는 없습니다."라고 할 뿐이다.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러셀의 찻주전자를 참고.

신이 없으므로 무신론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무신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무신론은 신이라는 관념과 신에 대한 믿음이 사회에 존재하기에 등장한 것이다. 만약 사람들에게 신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무신론도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신이 있느냐 없느냐와 관련 없이 신에 대한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므로 무신론자들이 원하지 않았는데 무신론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샘 해리스가 말한 '비점성술론자(non-astrologer)'나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무찻주전자론자(a-teapotest)' 같은 지어낸 말들은 이들이 무신론자라는 말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즉, 러셀의 찻주전자처럼 근거가 희박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atheist로 낙인찍혀야 하냐는 것이다. 낙인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한 게 아닌 것이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21세기에도 신의 존재가 교리에서 크게 작용하는 종교의 영향이 큰 국가에서는 atheist나 atheism에 상당히 부정적인 어감이 있다. 미국도 그러거니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에서는 테러리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부 국가에선 불가지론도 마찬가지로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회의감을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니 리처드 도킨스는 실제로는 불가지론자이고 원래 모든 것에는 불가지론자일 수밖에 없다고 분명히 못 박아두지만[18]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은 무신론적일 뿐 아니라, 일부러 무신론이라는 단순명료한 명칭을 페미니즘 운동의 저항 의식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일환으로는 한 유신론자가 히친스에게 "당신은 신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 같습니다."라고 발언했다가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왜 화를 냅니까?"라고 답변을 들은 사례가 유명하다. [무신론] Christopher Hitchens 인터뷰[19]

하지만 밑의 문단의 내용처럼, 이는 잘못된 용어 정의에서 출발한 비생산적인 논쟁이란 의견도 존재한다. 무신론은 "신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는 그 존재를 믿지 않는다"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 '신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는데 나는 그 질문에 아니라고 답한다"를 뜻하는,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말하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에 무신론이란 단어에 무신론자들이 불만을 가지는 건 단어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말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 문단 참조.

어쨌든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이라는 말이 어떠한 사상 내지는 종교적 뉘앙스가 함유된 단어라고 본다. 즉, '신을 안 믿는 놈들'이라는 뜻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무신론'이란 상식 같은 것이라, 무신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학계에선 그리하여 무신론을 여러 갈래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 한국에선 종교 안티와 무신론을 잘 구별하지 않으며, 불가지론과 혼동되는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흔히 무신론자로 인식되는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사상은 불가지론이라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100% 무신론은 유신론과 같이 믿음의 영역이기에 나는 7분의 6.9 정도 무신론으로 기울어진 불가지론자이다." 덕분에 이리저리 오해도 많이 받는다.

실질적으로 무신론이라는 말은 그저 방편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가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그리고 기꺼이 비신앙적인 태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얘기하는 대신 간단하게 "나는 무신론자다." 하고 말한다는 것이다. (출처: BBC 다큐멘터리, A Rough History of Disbeleif)

사실 비신앙적인 태도를 분명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무신론자가 맞다. 오컴의 면도날, 패러디 종교 등을 참고. 이런저런 단점들이 있지만 대체할 만한 마땅한 단어가 없고 이미 널리 퍼진 낱말이기에 그대로 쓰는 것뿐이라고. 그 대안으로 위에서와 같이 세속주의, 인본주의, 자연주의, 비신론 등이 제안되었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고, 여전히 무신론이란 표현이 가장 유명하다.

종교인들의 '무신론이라는 종교를 믿을 뿐'이라는 주장에 대한 무신론자의 반응은 간단하게 "'우표를 모으지 않는 취미'는 어떤 취미입니까?" 정도.

다만, 이 우표를 모으지 않는 취미의 비유는 다소 부족할 수 있는데, '종교 = 신이 있고 그것을 믿는 것'으로 정의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모순이다. 신은 단순히 인격신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 너머에 존재하는 신성한 성격을 지닌 존재 등으로 정의할 수 있고, 이 경우 단순히 '유일신 종교가 만들어낸 이미지로 대표되는 신이 없다'는 담론을 넘어 본래 무신론이 나타내고자 하는 담론에 근접하게 된다. 좀 더 정밀하게 반박하자면, 앞서 보았듯이 "믿음이 아니라 정반대인 의심(회의)이다" 같은 것들이 있으니 이쪽을 이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좀 더 완전하다.

애초에 종교인들이 무신론자를 저렇게 비판하는 것도 진짜 무신론이라는 종교를 믿는 자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무신론을 강박적이고 강압적으로 주장하고 강요하는 행태가 (설령 본인들이 생각하기엔 그것이 진리일지라도) 반대편에 서있는 종교 극단주의자들의 폭압적 행태와 아무런 차이가 없어서, 즉 극과 극은 통한다는 의미에서의 비판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런 식의 대답은 말장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제대로 대답한다면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 믿음이 아닌 의심을 가진 사람이지 신이 없음을 종교마냥 숭배할 마음이 전혀 없다" 쪽이 합리적인 대답이다.

무신론자들이 무신론이라는 명칭을 싫어하는 데에는 유신론자나 신의 존재를 상정하는 종교의 신도들이나 보수 언론 쪽에서 특히 이 명칭을 멸칭으로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통계에서 보여주듯이 미국 같은 나라에선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소개하는 순간 정말로 괴짜 내지는 차별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에서도 무신론은 테러리즘과 동급으로 취급받고 실제로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하기도 한다.

미국은 냉전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소련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효율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종교를 배척했던 반면, 소련을 견제하던 미국은 정반대로 국가적으로 종교를 밀어줬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자국민들에게 사회주의와 소련이 좋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했던 미국에게 종교는 정치적으로 가장 쓰기 좋았던 도구였고,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나 개종한 사람들에게는 '무신교 = 사회주의자 = 소련 = 나쁨'이라는 인식을 박제시키는 계기가 된다. 과거에 비해 나아지는 추세라고는 하나 현재까지도 영향이 남아 무신론자들을 좋지 않게 보거나 조롱의 의미로 쓰기도 하며, 미국의 정치인들은 종교 없이 정치생명을 유지시키기 매우 힘들다.

소위 보수 언론으로 일컬어지는 폭스 뉴스 같은 데선 종교가 없는 멀쩡한 사람을 데려다 놓고 직업 소개란에 '무신론자'라고 써놓기도 한다. 심지어는 세계적인 생물학자이자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를 불러다 놓고도 시청자들에게 '무신론자'라고 소개하면서 완전히 괴짜 취급을 해버리기도 했다. 그나마 근래 서구권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탈종교화 성향이 강해지고 각종 사회적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 역시 커지면서, 과거에 비해서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자유롭게 칭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많이 확산된 편이다.

7. 신무신론과 무신론 개념의 오남용

일정 부분 상기 항목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음을 유의할 것.
'무신론'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다의어이다.

심리적 감각에서 무신론은 무신론자가 되는 심리 상태를 뜻한다. 이때의 무신론자란 유신론자가 아닌 사람으로 정의되고, 유신론자는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이 관점의 무신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부족한 심리 상태.

반면에 철학, 특히 종교 철학에서 '무신론'은 표준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취급된다. 그러므로, 이 정의에 따른 무신론자는 판단의 유보를 넘어 신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에 이르러야 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감각의 용법은 유신론 철학자들뿐 아니라 많은 무신론 철학자들에게도 선호된다.

따라서 달리 이유가 없다면 철학자들은 무신론 'atheism'에서 'a-'는 '부재/없음'을 뜻하는 접두사가 아니라 '부정(negation)'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종교 철학의 형이상학적 질문들 중 가장 중요한 것에 해당되는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형이상학적 표준 정의 방법은 명백히 유용하다. 그 질문에 대해 가능한 직답은 단 두 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라는 대답은 유신론을 의미하며, "아니다"라는 대답은 무신론을 의미한다.

철학자들은 종종 '유신론'을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그 믿음의 참, 거짓에 대해 논쟁하는 것도 타당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경우 '믿음'의 의미는 '믿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태도나 심리적 믿음 상태가 아니라 믿음의 명제적 내용을 지칭한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efinitions of Atheism"
(부연: 이하 서술에서 형이상학적 유/무신론 정의에 쓰이는 표현인 '믿음', 인식론 범주에서 주관적 명제 태도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인 '믿음'을 혼용해서 읽지 않도록 유의할 것.)

신무신론의 대중적인 인기로 인해 무신론에 대한 대중적 담화가 촉발된 것은 긍정적인 효과라고 여길 수 있으나,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찮게 존재하며, 특히 가장 심각한 것은 이미 학계를 통해 분명하게 그 의미와 정의가 확정된 수많은 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심각한 오용과 곡해가 퍼진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0]

신무신론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바로 위에 정의된 바와 같은 '무신론'의 정의와 용례에 대한 비전문적인 접근과 잘못된 확장으로 인하여 대체로 불필요하고 심한 경의 무의미한 대중적 논쟁을 생산해 냈다는 점에 있다.

참고로 스탠퍼드 철학 사전에서는 psychological state인 정의 또한 전달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정의로만 무신론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우회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데, 원문에도 없는 내용들을 왜곡해서 전달하는 동기를 가지고 있으니 아래 내용들을 읽을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무신론이란 '신이 있다'는 명제 - 즉, 유신론 -에 대한 부정으로, '신이 없다'는 명제, 즉, 유신론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으로 성립되는 개념이며, 'atheism'에 있어서 'a-'는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적으로 종종 통용되는 설명: 'atheism 에서 a-는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신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는 것, 즉, 신에 대한 회의적(skeptical) 태도 그 자체가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신무신론의 설명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는 신무신론이 등장한 배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대중적 목표 중 하나가 '회의주의(skepticism)'와 '무신론'을 대중에 일반화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회의론(skepticism)'이란 용어조차도 잘못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21]

즉, 대체로 기독교 문화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일종의 '정상 상태'로 규정하며, 그에 따라 기독교에 대한 부정이 일종의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는 서구 사회에서, 기득권화되어 여러 가지로 사회적 부조리, 억압의 원천이 되어온 종교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의 일환으로 대중의 탈종교화를 이끈다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성을 갖고 있는 배경에서 신무신론이 출발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정치적 목적성을 띠고 있다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문제는 분명하게 무신론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가지론이나 불분명한 태도를 지닌 사람들까지 모조리 '무신론'이라는 하나의 간판 아래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무신론 개념을 무리하게 확장시킨 결과 숱한 오남용을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22] 단적으로 말해, 상기 '명칭 자체에 대한 비판' 항목에 기술되어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무신론'의 정확한 개념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신론이란 '신이 있는데 신이 없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은 그러한 소리를 싫어한다"는 것부터 매우 잘못된 얘기다. 이 잘못된 얘기의 유래는 무신론자들에 대한 (일부) 유신론자들의 고전적인 비판 수법에서 기인하는데:
T(유신론자): "무신론이란 신을 부정한다는 소리 아닌가?"
A(무신론자): "그렇다."
T: "그렇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뭣하러 부정하는가?"
T: "신을 부정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신이 존재함을 가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논리를 사용하는 유신론자들은 (신무신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atheos'의 원래 의미가 '신에게서 버림받은 자들'을 의미함에 착안하여 2천 년도 전에 사용된 단어의 용례가 현재 통용된다는 식의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어 atheos의 가장 오래된 의미는 신의 가호를 잃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 경우 'atheos'의 '신이 없음'이라는 의미는 영어로는 '신에게 버림받은'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im Whitmarsh, Department of Classics and Ancient History, University of Exeter

따라서, 말할 것도 없이 상기 상황에서 A(무신론자)의 반론은 매우 간단하게, "여기서 '부정한다'는 것은 신이 존재함을 가정하고 그에 거역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부정하고 거부한다는 것이다" 한마디 설명으로 쉽게 해결되는 문제다. 인용한 스탠퍼드 철학 사전에서 강조한 무신론의 올바른 정의의 유용성이 바로 이러한 데 있다. 게다가, 애초에 상기 유신론자들의 논리는 '언어학적 오류(etymological fallacy)'에 해당되는 것으로 무신론에 대한 별로 유의미한 공격도 아니다.

문제는, 용어의 엄밀한 정의와 용례를 알지 못한다면 이처럼 간단하게 반박되는 것을 하지 못해서 "정작 무신론자들은 '무신론'이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학자, 종교학자, 철학자들이 '무신론'과 '유신론'이라는 용어를 아무런 문제 없이 잘만 써왔고, 각자가 스스로를 'theist', 'atheist'로 멀쩡히 잘 규정해 온 게 적어도 100년이 넘는데 어떤 무신론자들이 '무신론'이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말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애초에 '무신론'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자의적으로, 왜곡되게 정의한 경우에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오용과 혼동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철학에서 무신론과 유신론을 각각, 상기 스탠퍼드 철학 사전에서 인용한 대로 엄격하게 정의하는 것이다.

본 문서의 '오늘날 철학에서' 항목에 간단하게 앞서 서술된 바와 같이, '무신론', '유신론', '불가지론'은 각각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개인의 태도이자 하나의 명제로서 표현되는 믿음이다.

명시적으로 '신은 존재한다'를 믿는 사람이 유신론자, 명시적으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믿는 사람은 무신론자, 이런저런 이유로 해당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 그 답을 보류하고 있는 사람은 '해당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2차 순위의 믿음을 가진 불가지론자이다.

신무신론이 지닌 긍정성, 대중적인 순효과, 그리고 사회적 정의를 위한 각종 활약과는 별개의 것으로, 정작 그들이 화두로 끌어올린 '무신론'에 대한 신무신론자들의 이해는 상당히 조악하고 부정확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대의에 공감하는 것과, 그들이 말하는 내용의 정확성은 분리하여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신무신론자들의 무신론 정의,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거나 촉발된 수많은 유명한 전형적인 화두의 대중 논쟁은:
(1)부정확하고 자의적인 무신론의 정의로부터 출발하여
(2) 그 잘못된 이해로 인해 고전 철학이나 신학의 훈련을 받은 유신론자들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3) 반대 논리를 급조해 내 조악하게 반박한 결과
(4) 위의 과정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며 무신론에 대한 곡해와 오해를 더 많이 퍼뜨리는 과정에 가깝다.

앞서 살짝 언급한 바와 같이, 애초에 '회의론자(skeptic)'라는 용어부터가 히친스의 오용으로부터 출발해서 널리 퍼진 용어의 오남용에 해당하고, 불가지론에 대한 도킨스의 혼란스러운 설명도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철학적 자연주의의 차이에 대한 무지와 무신론, 불가지론 용어의 잘못된 정의에서 출발한 버벅거림에 가깝다. 애초에 도킨스의 입장이라면, 매우 간단하게 "나는 불가지론자입니다만, 반종교주의자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매우 쉽게 설명이 된다. 무슨 원래는 불가지론인데 입장상 무신론이라 이야기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느니 이런 궁색하고 혼란스러운 소리 필요 없이

다시 강조하지만, '명칭 자체에 대한 비판' 항목에 나열된 모든 내용은 올바르지 못한, 잘못된 용어 정의에서 출발하여 개념 혼동으로 인해 촉발된 비생산적 논쟁들이다.

7.1. 파생된 오류들

"왜 이 용어를 왜 이렇게 정의했는가" 그리고 "이 용어를 이렇게 정의할 경우 발생하는 문제는 없는가"라는 기준에 의해 현재 학계에서 정의한 '신의 존재에 대한 명시적, 명제적 부정으로서 무신론'에서 벗어난 (신무신론에서 파생된) 무신론의 정의는 많은 소모적 논쟁을 일으킴을 위에서 언급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불가지론적 무신론(agnostic atheism)과 가지론적 무신론(gnostic atheism)'이라는 근본 없는 해괴한 용어이며, 다른 곳도 아닌 나무위키의 불가지론 문서에서도 '4. 신에 대한 관점' 항목에 당당하게 소개되어 있는 '유신론적 불가지론(theistic agnosticism)'과 '무신론적 불가지론(atheistic agnosticism)'이라는 이상한 용어들이다. [23]

위 용어들이 '근거 없는 이상한 용어'라는 비판은 과장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인데, 애초에 '불가지론적/가지론적 무신론'이란 용어는 학계에서 용례 자체가 없다. 적어도, '무신론, 불가지론, 유신론'의 삼자 구분 개념이 확립된 19세기 말~20세기 초 이래 학계에서 위의 용어가 사용되는 경우는 오로지 "세간에 이런 이상한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한 이유로 문제가 있는 것들이다"라는 비판 및 비평의 맥락에서이다. 더구나, 애초에 정확한 출처가 불분명한 신조어, 급조어로 추정되는 것들이기에 인터넷 시대가 개막한 2000년대 이후에 논의가 되고 있다.

7.1.1. 불가지론적/가지론적 무신론(agnostic/gnostic atheism)

언급한 바와 같이 애초에 출처 불명의 용어라 왜,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용어가 만들어졌는지를 확증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 용어가 사용되는 상황, 맥락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 추정은 가능하다.

신무신론은 반종교, 탈종교 운동을 펼치면서 일련의 공통된 방향성을 띠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하여 그것에 대한 지식을 취하기 위한 인식론적 방법들 중에서 경험적 증거주의(empirical evidentialism)를 제외한 나머지의 가치를 극도로 축소하거나 제거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이는 통속적으로 '과학주의(scientism)'[24]로 불리는 일련의 태도를 낳았으며, 그에 따라 "과학적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모든 형태의 믿음은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인 것이다"라는 태도를 견지하도록 만든다.

물론 이것은 시작부터 Justified True Belief - 지식 = 정당화된, 참인 믿음 - 에 위배된다.

믿음이 상위 개념이고 지식은 그 하위 집합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믿을 수는 있어도, 무엇을 믿지 않지만 그것을 알 수는 없다[25] 따라서, 무엇인가를 아는 것, 그 '지식'을 얻는 모든 과정은 어떠한 것이든 '믿음'에서 출발한다.[26]

즉, 어떠한 것에 대해 아예 개념조차 없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의미론적 순수 상태(semantic innocence)'[27]에서 무엇인가의 개념에 처음 접하는 순간, (1) 그것을 믿거나, (2) 그것을 믿지 않거나, (3) 믿어야 할지 안 믿어야 할지 일단 좀 더 유보해야 한다고 믿거나 셋 중 하나에서 필연적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있어서 유신론, 불가지론, 무신론으로 나뉘는 것과 맥락이 완전히 똑같다.)

따라서, 신무신론에서 "내가 확실히 알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비이성적이다"라는 것은 애초에 시작부터가 잘못된 말이다. 철학적으로는 "내가 그것을 믿는 적합한, 합리적인 이유를 갖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믿는다면, 그건 비이성적이다"가 되는데, 신무신론은 그 '합리적인 이유'에 해당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오로지 '이미 과학적, 경험론적으로 밝혀 낸 것만이 합리적'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종교적 믿음을 겨냥한 것이며, 과학적, 경험적인 것을 제외한 여타 이유, 방법론의 모든 합리성을 부정한다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어떤 이유를 들던 그 타당성을 원리적인 차원에서 부정하고, 종교와 종교적 믿음 그 자체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도매금으로 규정할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다. 즉, 해당 논제에 대하여 토론이니 논쟁이니 할 것도 없이 원리적인 차원에서 '종교는 비합리적인, 부정적인 행위'라 매도하는 수단이 되며 실제로 위 논리는 그 맥락에서 사용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대한 자승자박이 발생한 것이, "그렇다면 당신들은 신이 없다는 것을, 당신들이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는 그 과학적, 경험론적 방법으로 증명했는가?"라는 반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 것.

부재의 증명은 상당히 까다로운 것으로 악마의 증명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대로 '부재의 증명을 요구하는 것' 그 자체가 논리적 오류라든가 거증 책임의 전가는 아니다. 우리가 대화를 하거나 사색을 함에 있어서 부재의 증명을 피하는 쪽이 불건전하게 쳇바퀴 도는 대화나 생각의 루프를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논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공동의 의사 진행 룰로서 세우는 것이지, 정말로 끝의 끝까지 가서 내가 기어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확언을 한다면, 상대방 쪽에서 부재 증명의 요구를 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따라서, 앞서 길고 자세하게 설명된 이유로 '무신론이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라는 전제 아래에서는, 과학적이고 경험론적인 증거만을 합리성의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서는 동일한 잣대로 부존재의 증명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증명되지 않은 사실 =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믿는 무신론자가 스스로가 똑같은 비합리성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신무신론은 '무신론이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라는 명제적, 명시적 정의를 '무신론이란 단지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을 뜻한다'로 자의적[28]으로 바꾼 것이다. 즉, "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 내가 언제 신이 없다고 주장했냐?"라는 태세 변경을 한 것. 과학적, 경험적 증거를 유일한 합리적 척도로 만들고, 그 후에 '신이 없다는 명시적 주장은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부재 증명의 요구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29]

그런데, 이렇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다시 또 발생한다.
(1) 신을 믿지는 않지만, 신이 없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 불가지론자랑 무엇이 다른가?
(2) 이미 최소한 120~130년 이상 아무런 문제 없이 정의된 대로 문제없이 존재한, "나는 신이 없다고 믿습니다"라는 확신을 내비친 무신론자들은 그럼 뭔가?

그래서 나온 것이 '불가지론적 무신론(agnostic ahteism)'과 '가지론적 무신론(gnostic)'이란 용어인 것으로 추정된다. 자의적 개념 변경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을 봉합하기 위해 자의적 개념을 두 개 더 추가한 것(...).

재차 강조하지만, 이미 본인들이 걸고넘어진 '신의 존재 증명의 문제'에 역풍을 맞는 것은 회피하기 위해 '신은 없다'는 명시적, 명제적 거부로서의 무신론의 정의를 (자의적으로) '신을 믿고 있지 않는 상태'로 변경했음을 염두에 두자. 그 필요성에 따라:
'불가지론적 무신론자'
(1) 신의 존재 여부를 경험론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으니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다 --> '불가지론적'
(2) 현재 신을 믿고 있지 않다 -- '무신론자'

그리고, 기존의 정통적인 무신론자들은...
'가지론적 무신론자'
(1) 신의 존재 여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이 없다고 주장한다. --> '가지론적'
(2) 현재 신을 믿고 있지 않다 --> '무신론자'

다시 말해서, 이전까지는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유신론자... 이렇게 존재하여 직관적이고 명확하게 나뉜 세 범주에서, '세상에는 오로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만 있다'는 두 가지 범주로 줄여버린 후에 불가지론을 무신론의 하위 범주로 강제 편입 시킨 것이다.

한국 용어로는 '무(無)'신론자인 사람들이 "무신론자들은 신이 없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거나, "무신론자는 무신론자라는 용어를 싫어한다"라는 웃기지도 않는 촌극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 것이다.

우습게도, '무신론(無神論)'이라는 용어부터가 이미 위와 같은 신무신론자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국에서 현재 사용되는 수많은 용어들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차용, 수입된 일본식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즉, 일본 근대화 시절에 서양의 철학 사상과 이론을 자국어로 옮기면서 'theism'은 '有神論'으로, 'atheism'은 '無神論'으로, 그리고 불가지론은 '不可知論'으로 옮긴 것인데, 이는 이미 그 시절부터 유신론, 무신론, 불가지론의 삼자 구분이 사용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정확한 번역을 위해 선택된 한자 '有', '無', '不可知'에서 알 수 있듯 각자 신이 '있다', '없다', '알 수 없다'라는 명시적이고 명제적인 믿음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가지론적(gnostic)'이라는 대단히 어색한 한글 단어가 이 항목에 사용된 이유는 애초에 불가지론에 반대되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서양의 용어에서도 'gnostic'은 'agnostic'에 대응하는 반대 개념이 아니며, 'gnostic'은 사실 'G'nostic으로, 오로지 영지주의의 맥락에서만 사용되는 용어이다. 즉, 고대 서양의 기독교 초기 시절에 존재했던 신비주의적 성향의 종파들을 전체적으로 일컫는 용어이며, 'agnostic'의 반대 개념으로 'gnostic'이 사용된 학문적 용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어 'gnos'의 본래 의미를 따와서 '불가지'의 반대 개념으로서 '가지'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은 어떠한 논문, 소고, 제안, 사례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인터넷 신무신론 커뮤니티에서만 등장한다. 만일 영어로 된 철학 용어를 잘 알지만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 경향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gnostic atheism'이라는 말을 보거나 듣는다면, 대체 영지주의적 무신론자가 무엇인가? 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히 용례가 없으니 옛 일본에서 이루어진 한자어 번역도 없고, 비교적 최근까지도 존재하지 않던 용법이니 한국의 철학계에서도 그런 번역어, 용어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지론적 무신론자'라는 어색한 용어는 서양에서도 동아시아에서도 똑같이 말이 안 되는 급조어이다.

7.1.2. 유신론적/무신론적 불가지론(theistic/atheistic agnosticism)

이 용어들의 기원 또한 정확한 지점의 추적이 불가능하며, 역사적, 학문적 용례가 없고 오로지 인터넷상 일부 신무신론 커뮤니티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우선, 나무위키 내 불가지론 항목에도 기술되어 있는, '불가지론'의 정확한 용어 정의부터 짚고 넘어가 보자.
첫 번째 의미
본래 의미에서 'agnosticism'은 진화론을 선보인 찰스 다윈의 맹우로 유명한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인식론적 일반 원리(epistemic normative principle)였다. 즉, 일종의 과학 철학적 자세로서 과학적 검증 등을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해당 사실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믿음을 갖지 않는다는 원리이며, 그 자체로 신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에만 국한된 원리는 아니었다.

즉, 어떤 주의 주장, 믿음이라기보다는 헉슬리가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라고 제시한 것.
두 번째 의미
두 번째 의미는 위에 설명된 헉슬리의 일반 원리에 기반한 철학적 회의론(philosophical skepticism)의 일종으로, 하나의 인식론적 명제(epistemic proposition)이다. 이 관점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간이 알 수 없다 - 즉, '불가지하다' - 는 입장을 취한다. (어느 정도 연관성은 있어도) 오늘날 의미에서 '유신론'과 '무신론'과는 아예 궤를 달리하는 명제이다. 달리 말하자면, 보통 회자되는 '무신론', '유신론', '불가지론'의 의미와는 아예 관계가 없으며, '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아예 별개의 명제다. 'Agnosticism'의 번역어 '불가지론'과 완벽히 의미가 일치함에서 알 수 있듯, 해당 용어는 바로 이 두 번째 의미를 직역한 결과다.

불가지론 문서에선 해설이 누락되어 있으나, 쉽게 말해 오늘날 철학적 회의론이라고 알려진 것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던 적이 있으나, 곧 이 의미는 상실되었고 아래 세 번째 의미로 변화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철학적 회의론이라는 것이 더 정교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에 비해 이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된 '불가지론'이란 것은 그러한 정도의 깊은 담화를 촉발시키지는 못했기 때문. 굳이 말하자면, 이 두 번째 의미의 '불가지론'의 맥락을 이어온 오늘날의 개념이 있다면 스티븐 제이 굴드가 'NOMA' 개념을 제시한 것과 그 목적에 있어서 약간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의미
세 번째 의미에서 agnosticism이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례이다. 이 용례레서 '불가지론'이란 앞서 개요에 설명된 바와 같이 '신은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들에 대하여 유신론과 무신론이 각자 '그렇다' 혹은 '그렇지 않다'는 답을 내는 것과는 달리, 해당 명제에 대한 확답을 피하고 유보하는 입장이다. 흔히 문외한들 사이에서도 신에 대해 '있다', '없다', '모르겠다'라는 직관적인 세 가지 태도를 관찰할 때, 바로 마지막의 '(아직은) 모르겠다'는, 양자 중 어느 쪽도 거부한 제3의 입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불가지론'이며, 다시 강조하지만 현재 이쪽이 문외한, 철학자 할 것 없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례에 해당된다.

역시 불가지론 문서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이미 1903년도에 철학자 로버트 플린트가 그의 서적 《Agnosticism》을 출판했을 때 그는 책을 통해 이 세 번째 의미에서 벗어나 '불가지론'을 달리 정의할 것을 제시했는데 (물론 이 시도는 학계에서 거부되었다), 그 말인즉슨 헉슬리가 최초로 'agnosticism'을 사용한 것이 1869년이니, 대략 39년 후의 로버트 플린트의 시절엔 이미 철학계에서 이 세 번째 의미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는 뜻이며, 늦어도 19세기 말부터는 이 정의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본 문서의 앞부분에서 '무신론'의 정의를 내렸을 때 단순히 '현재 신을 믿고 있지 않은 정신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명시적으로, 명제로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주의 주장임을 드러낸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지론 또한 그냥 단순한 정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신론', '무신론', '불가지론'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자의 믿음, 태도, 자세이며,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서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안다, 모른다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불가지론'이란 것은 단순히 "아, 신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난 불가지론자다"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한다면, 탕수육을 먹는 방법을 두고 '부먹'파와 '찍먹'파가 있고, 부먹이 좋은지 찍먹이 좋은지 객관적으로 우위를 가리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중립'파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탕수육'이란 음식을 처음 접해본 외국인에게 "당신은 부먹파냐 찍먹파냐?"라고 물었을 때 그 외국인은 "난 부먹이 좋은지 찍먹이 좋은지 잘 모르겠으니까 걍 '모르니까 견해 없음'"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중립'파와 같은 범주에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중립'파는 '부먹'과 '찍먹', 대립하는 두 의견 양쪽 모두를 고려해 봤고, 그럼에도 어느 한쪽에 우위가 있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명시적, 명제적 의견이지, "잘 모르겠으니까 아무런 견해가 없다"는 정신 상태, 부정형 답변(negative answer)이 아니라는 것.

이를 다시 유신론, 무신론, 불가지론의 경우로 치환을 한다면:
문: "신은 있는가?"

유신론: "신은 있다."
무신론: "신은 없다"
불가지론: "신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답할 수 없다"[30]

이렇게 되는 것이지,
문: "신은 있는가?"

유신론: "신은 있다."
무신론: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불가지론: "모른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위에서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가 한 각각의 대답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정확한 대답인 것 같아도, 실제로는 질문 "신은 있는가"에 전혀 직접적인 답변을 한 것이 아니고 엉뚱한 대답에 가깝기 때문.

왜냐하면, 유신론자에게 있어서는 "신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신을 믿습니다"가 간접적인 대답이 될 수는 있지만[31], 무신론자에게 있어서는 경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에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그 견해에 대해 유추 가능 한 함의가 담겨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답변은 무신론자가 자신의 무신론을 드러내는 구실을 하지 못한다. 신을 믿지 않는 그가 무신론자인지 불가지론자인지, 혹은 다른 주의 주장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는 유신론자 아니다"라는 것뿐이다. 이런 "부정형 대답(negative answer)"은 어떠한 유의미한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령, 배스킨라빈스 31가지 맛 중 어느 맛을 좋아하십니까...라고 묻는 질문에 "난 딸기 맛은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격이다.)

또, 불가지론에 있어서 "어느 쪽도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유신론이 옳은지, 무신론이 옳은지 고려해 본 결과 어느 쪽도 자신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불가지론자는 "신은 있다"는 명제도, "신은 없다"는 명제도 참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현재 신이 있는지 없는지 답할 수 없다"라는 명제가 참임을 믿는 사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도,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유신론도, 그리고 답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불가지론도 모두 똑같이 '정당화의 의무(burden of justification)'[32]를 지닌다.)

그렇다면 이 분야를 평생 공부하는 전문가, 학자들이 고전 시대나 중세 시대에서 논의한 적도 없고, 근대 현대 시대에 논의한 바도 없고, 2010년까지는 찾아볼 수도 없었던 설명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 해답은 본 문서의 항목 중에서 해설한 무신론을 '신이 없다는 믿음'이 아니라 '현재 신을 믿고 있는가의 여부'로 자의적으로 재정의한 행동에서 파생된 것이다.

즉, 상기 항목의 '불가지론적/가지론적 무신론자'와 같은 맥락에 있다. 멋대로 '무신론자'의 정의를 바꾼 결과, "그럼 불가지론자와 뭐가 다른 것이며, 기존의 무신론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는 반론에 대해 '불가지론적/가지론적 무신론자'라는 급조어를 새로 만든 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 항목의 '무신론적/유신론적 불가지론자'라는 급조어는 위의 경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불가지론'의 의미조차 바꿔버린 것이다.

신이 없다는 확실한 생각을 표명하지 않았던 기존의 불가지론자들은 모두 무신론자들로 만들어버리고, 아예 '불가지론'의 정의조차 "불가지론은 신에 존재 여부에 대해 인간이 알 수 있는가 없는가의 질문에 대해 '알 수 없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는 불가지론 항목에 있는 용어 정의에서도 확실히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이미 100년도 넘는 예전부터 사용이 중단된 용례라서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불가지론'은 오늘날 철학에서 사용하는 용례가 자리 잡혔다.

위와 같은 무리수들을 종합해 보면 이게 얼마나 괴상한 것인지 한눈에 드러난다. '불가지론적 무신론자(agnostic atheist)'라는 정의와 '무신론적 불가지론자(atheistic agnostic)'라는 정의는 신무신론자들이 흔히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야매 용어들인데, 만약 저 용어 정의 방식을 서로 나란히, 같이 사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사람은 "신무신론자"로 세간에서 불리고, "무신론계에서 중요한 인물"이라고 무신론계 내외 모두에게 인정을 받으며, 본인도 불가지론자이지만 입장상 "나는 무신론자입니다"라고 얘기한다. 이는 불가지론적 무신론자라는 말인데, 위의 용어 정의에 따르면 또한 동시에 무신론적 불가지론자가 된다. 그러면 대체 도킨스는 무신론자인가, 신무신론자인가, 불가지론자인가, 불가지론적 무신론자인가, 무신론적 불가지론자인가? 이런 애매모호한 용어 대신에 학계의 표준적인 정의를 사용한다면, 깔끔하게 그냥 무신론자다.

굳이 첨언을 한다면, 신무신론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무렵에 "사천왕" 도킨스, 해리스, 데닛 등은 그들 모두가 숱하게 반복하는 언동에서 전통적인 의미로 "신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문제는 신무신론 관련 항목에서 해설했듯 이들은 각자 자기 분야의 전문가들이었지 신학자도, 철학자도, 이런 쪽의 인문학적 바탕이 없던 사람들이다 보니 종교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공격을 위해 "과학적으로 확증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비합리성"이라는 기준을 도입했고, 그로 인해 자승자박에 걸린 것 또한 설명한 바와 같다. [33]

"경험적인 증거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유추의 방식, 연상 등도 합리적인 자기 정당화의 수단일 수 있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다 보니 본인이 신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이면서도 대중 토론이나 논쟁 등에서 이 부분을 파고든 반론에 대해 "물론, 저도 신이 없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으니까 엄밀히 말한다면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는 불가지론자입니다만..."이라면서 신무신론계에서의 용어 혼동과 자의적 용어 정의의 남발에 불을 지핀 것이다. [34]

그러면서 "...하지만 종교는 폐단이며 인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 피력을 위해 활동하니까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이번에는 반신론, 반종교론과 무신론을 혼동했고 대답을 함으로써, 무신론자 코스프레를 하는 불가지론자 코스프레를 하는 사실 진짜 무신론자...가 된 것.

이들 유명 인사들의 이러한 삽질을 "그들의 활동은 존경하지만, 그들이 얘기한 이 부분은 좀 문제가 있네"라고 받아들이고 넘어가면 되는 문제였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 신무신론 유명 인사들을 아이돌화하고, 그들이 강연 등에서 하는 말, 써먹는 말을 그대로 자신의 논지로, 밈으로 만들어 그것만으로 반종교, 반기독교 주장을 펼치려다 보니 이러한 해괴한 지적 자폭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정리하자면, 왕성한 대중 활동을 하고 있던 유명 인사들이 개인적으로 부족한 부분들, 얕은 지식으로 인해 잘못된 얘기를 했는데, 그것을 지나치게 숭배하고 전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들도 똑같이 써먹으려다가 엄청난 지경의 더닝 크루거 효과에 빠져버린 것이다. 신무신론자라는 사람들이 과연 무신론자인지 불가지론자인지, 대체 무엇을 주장하는 것인지. 하는 언동은 분명히 무신론자 같은데 말로는 본디 불가지론자라고 해놓고서는, 다시 또 "하지만 입장상, 도의적으로 무신론자인..."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태도가 분명치 못하다거나, 제대로 모르고서 하는 소리 같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인터넷 시대에 도달한 그들의 지지자들은 그 모든 정의를 다 뒤섞어 버려서 그들이 한 말이 모두 동시에 성립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럴 바엔 걍 공부를 하지

당연히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서로 다른 개념, 주의, 주장들을 어떻게 동시에 성립되도록 할 수 있는가?[35] 그 원래 의미를 모두 파괴하고, 자의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구정하고, 그것을 모호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서, 아무 때나 서로 용어를 치환해도 성립할 수 있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36]

7.2. 반론

당장 인용된 스탠퍼드 철학 사전을 다시 보면 위의 주장은 용어의 사용에 대해 지나치게 보수적인 자세임을 알 수 있다.
"무신론"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다의어이다.

심리학적 감각에서 무신론은 무신론자가 되는 심리 상태를 뜻한다. 이때의 무신론자란 유신론자가 아닌 사람으로 정의되고, 유신론자는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이 관점의 무신론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결여된 심리 상태로 정의된다.

반면에 철학, 특히 종교 철학에서 "무신론"은 표준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취급된다. 그러므로, 이 정의에 따른 무신론자는 판단의 유보를 넘어 신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에 이르러야 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감각의 용법은 유신론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무신론 철학자들에게도 선호된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efinitions of Atheism"
원래는 이와 같이 용어의 다의적 측면에서 철학계 내부적 용법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하술되는 부분은 상당 부분이 형이상학적 정의를 사용할 때의 학문적 편의성을 언급하고 있다. 반면에 대중적 용법에서 "atheism"은 언제나 theism의 여집합을 의미하였으며, 이는 과거의 어학 사전들에 비추어 보아도 자명하다.

이미 철학적으로 잘 확립된 무신론 용어의 일반 용례를 무시하고 잘못된 규정으로 재정의하려 든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 비판은 애초에 어떤 철학적 정의가 시대나 학자들마다 새롭게 시도된다는 학술적 관례를 무시하는 비판이다. 유신론에 대한 개념 정의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새롭게 재정의되며 오늘날에 이르렀듯이, 앞으로도 새롭게 변할 수 있으며, 이는 무신론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철학계 외부에서 파생된, 불가지론이 포함된 흐름에 신무신론 명칭이 붙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며, 용어의 혼돈은 기존의 연역 논증 방법론에서 과학과 같은 귀납적 합리성이 포함되는 방법론으로 지평이 바뀌는 과정인 것이다. 이를 마치 신무신론이라는 주체가 어떤 정치적 기획으로 무신론의 의미를 재정의한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근거 없는 과도한 음모론이다. 오히려 주제를 형이상학적 명제로서 다루는 기존의 철학 학계 관성의 틀 안에서만 신무신론을 규정하는 것은 누명 씌우기일 수밖에 없는 게, 반증 가능성을 내포하는 과학적 관점의 주장은 태생적으로 대상에 대한 명제적 판단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학술 용어란 시대나 전공 분야, 심지어 학자에 따라 정의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일종의 심리 상태를 지칭하기도 하는 용어가 철학 사전에 수록된 형태로만 정의되어야 한다는 건 독단이자 오용에 가깝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속 용어들은 어디까지나 철학계에서 통용되는 개념 정의의 정리 요약이지, 적 용어처럼 현실 규정적인 것이 아니며, ( 형이상학적)실재론적 정의인 것도 아니다. 애초에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이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규정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백과사전이지 철학계의 법전 같은 것이 아니다.

8. 인구와 사회상

무신론자의 수를 정확히 아는 것은 힘들다. 답변자가 생각하는 무신론의 정의에 따라 결과가 바뀌며, 일부 문화권에서는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밝히는 것이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을 포함한 비종교인이 낮을 수밖에 없는 국가는 무신론자가 공식적으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동 이슬람권 국가들이다. # 특히 광신도로 악명 높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도 전 세계의 모든 종교가 함께 무신론과 싸워야 한다라고 할 정도이다. 최근에 무신론자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징역 10년에 태형 2,000대를 선고받는 일도 발생했다. # 물론 자국인 사우디인이라서 가능했지 외국인 무신론자는 이렇게까지는 못 한다. 국외로 추방하는 정도?

굳이 무슬림만 그러는 건 아니고 나이지리아 같이 기독교도가 절반인 국가도 무신론자에게 제재를 가한다.

이슬람권에서는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밝힐 경우 죽음이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이슬람교는 같은 아브라함 종교에게는 관대한 편이지만[37], 무신론자에 대해서는 대단히 배타적이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이슬람교가 가장 진실된 종교이다. 유대교와 기독교 등 뿌리는 같은 유일신교는 같은 알라를 믿지만 그 방법이 잘못된 종교 정도의 취급이고 기타 다신교는 훨씬 낮게 보지만 그래도 신적 존재의 존재는 인정하고 알라를 다른 방법으로 숭배한다고 여기거나 다른 이름으로 신을 부르거나 여러 가지 알라의 면을 각각의 신으로 여기는 셈이기에 그 아래로 친다. 불교처럼 신이 아닌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는 더 나쁘게 보지만 그래도 종교적 믿음이 있으니 참작을 하는데 무신론자는 그마저도 없으니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개쌍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슬람권에서 종교에 관한 질문을 받을 경우 무신론/무종교더라도 적당히 불교, 기독교 신자인 것처럼 둘러대는 게 낫다. 신념을 위해서 순교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슬람 국가 정치권에서는 기독교도들은 싸우면서 든 정도 없지 않은 오랜 이웃이지만 무신론은 서구식 근대가 낳은 괴물이란 인식이 강하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란 현대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발흥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건도 그렇고, 냉전 시기만 하더라도 아랍, 이슬람권 기득권의 주적은 기독교계 서방이 아니라 자국 내 사회주의자, 진보주의자였다 보니 이들을 두들겨 패면서 미국과 비슷한 무신론자=빨갱이 프레임이 강력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2010년대를 돌아보면 참 격세지감을 느낄 만한 일이지만 냉전 시기만 하더라도 지역학 학계 설립 같은 부드러운 문화적 영역에서 하드한 현지 무장 단체 지원까지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 진영과 아랍-페르시아권의 이슬람주의자들과 전제 군주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권 현지 좌파에 맞서 동맹 관계에 가까웠고,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아직까지 적어도 정부 차원에선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를 노골적으로 이중적으로 이용하는 나라들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전략 자원 확보 같은 경제적 동기와 같이) 이 시절 정책의 유산이다. 노엄 촘스키나 크리스 헷지스 같은 좌파적 세속주의 지식인들이 현대 폭력적 이슬람주의 담론을 얘기할 때 피상적인 서구적 세속주의 vs 이슬람주의 이분법 자체를 배격하고, 극단적으론 " ISIL이나 알 카에다나, 반쯤은 미국이 스스로 만들어낸 괴물이다"라고 비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뜬 주장이다.[38]

비종교인 비율이 높은 나라는 과거 공산권인 에스토니아가 70%로 1위고 세속화된 북유럽 국가와 과거 공산권 국가 내지 현재에도 공산 국가들의 비율이 높다. 독일의 경우 공산권이던 동독의 경우 70%가 무종교이지만 서독 지역은 25% 정도고 독일 평균은 33% 정도다. # 상위 10개 국가 중 구공산권 국가가 5개, 북유럽 3국, 나머지 둘은 중국과 일본이다. #

미국도 공식적으로는 세속주의긴 하나 종교의 영향력이 높은 나라라 무신론자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지금도 미국 국회에서 무신론자 의원은 한 기수에 한두 명이 될까 말까다. 다만 이는 진심으로 기독교를 믿어서라기보단 구냉전기 시절 미국 국민들의 반공주의 때문이었다.[39] 물론 9.11 테러로 주류 백인 사회에서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무신론자보다 더 나빠지긴 했지만, 적어도 무슬림들의 지지는 받을 수 있는 무슬림 정치인에 비하면 무신론자를 표방하며 정치적 지지를 얻기는 힘들다. 다만 2010년 중반에 들어서는 무신론자가 대통령이 되어도 좋다고 응답한 비율이 58%로 조사되어 나오는 등 무신론에 대한 인식은 이전에 비해 좋아진 편이다. 그리고 지금 미국은 백인 기독교가 많이 쇠퇴했으며, 라틴 아메리카 출신 이민자들 덕분에 기독교 국가라는 이미지가 이어지고 있다.[40]

그 외에도 종교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정확하다고 인정받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실린 2005년의 조사에 의하면 종교가 없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1.9%를 차지하며 무신론자는 2.3% 정도라고 한다. 이 숫자에는 불교나 도교처럼 무신론과 유사해 보이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가정하지는 않으나 완전한 무신론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도교도 무신론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의 경우 여러 여론조사 결과 대체로 아무리 많아도 무신론자 혹은 무교인의 비율은 20% 남짓으로 보인다. 다만 교육수준이 높아질수록 비율이 올라가긴 한다. 한때 1998년 네이처지에 미국국립과학원 소속 과학자들에게 신을 믿는지 여부를 물어본 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원문 그에 따르면 인격신을 믿지 않는 과학자가 약 72%, 불가지론적 혹은 회의적인 사람이 약 20%, 믿는 사람이 약 7% 정도였다.

다만 이 논문에 대한 비판에서도 나오듯이 설문 문항이 좀 애매해서 범신론자나 이신론자 같은 부류까지 믿지 않는 쪽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비종교인에 속할 수는 있지만 무신론자라고 하기는 좀 그러니 알아서 감안하고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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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미국 과학 진흥회(AAAs) 회원 약 2,500명을 상대로 한 다른 조사의 결과로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자각하고 있는 사람은 약 17% 정도, 딱히 무신론자라고 자각하진 않아도 불가지론이나 기타 종교에 관심없는 비율은 48%까지 나온다. 어느 쪽 자료를 보더라도 종교에 회의적인 비율이 약 16%[41]정도 나오는 일반인에 비해서는 어쨌든 월등히 높은 비율인 것 같다.

2005년 라이스 대학교 부교수 Ecklund가 미국의 과학자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종교적 차이점을 조사[42]했다.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을 모두 포함해 과학자 1,646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일반 대중과 과학자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래는 원서[43]에 나와있는 표 중 하나이다.
당신의 신에 대한 믿음은 다음 중 어느 것에 가깝습니까? 과학자(%) 일반인(%)
"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34 2
"나는 신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고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30 4
"나는 초자연적이고 절대적인 어떤 힘(Higher Power)을 믿지만, 그것이 신은 아닙니다." 8 10
"나는 가끔 신을 믿을 때가 있습니다." 5 4
"나는 의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신을 믿습니다." 14 17
"나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9 63
여담으로 이 연구 결과를 가지고 50% 가까운 과학자들이 종교적이라고 기사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원서를 보면 알겠지만 해당 %는 실제로 그 과학자가 해당 종교를 믿는다고 한 게 아니라 해당 종교적 전통에 속해 있다고 답한 것이다. 쉽게 말해 한국인 상당수가 유교 신자가 아님에도 제사를 지내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2013년 영국의 왕립 과학원 회원 248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신의 존재를 강하게 믿는 사람이 약 8% 정도,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이 약 78% 정도로 나온다. 원문 종교색이 강한 편인 미국에 비하면 오히려 훨씬 더 세속적인 분위기인 것 같다.

오경환 신부의 말에 의하면 의외로 자연 과학자보다 인문 계열의 학자들 중에서 무신론자의 비율이 더 높다고 한다. E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인 신과 다윈의 시대 인터뷰 도중 "천문학이나 물리학을 공부한 사람 중에는 무신론자가 적다고 나왔습니다. 오히려 사회 과학과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 중에 무신론자가 더 많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유신론자가 3분의 1 수준인 셈이다.

실제로 영어권 국가들의 Ph.D급 철학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를 분석한 논문에서는 철학자의 72.8%가 무신론자 혹은 무신론에 경도되었다 밝혔으며, 세부 전공이 종교 철학인 철학자들을 제외하면 무신론자의 비율은 80%가 넘어갔다. 출처

현 세대에서 가장 안정적인 정치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북유럽 국가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의 무신론자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축에 속하는 건 생각해 볼 만한 사항이다.[44] 실제 Eurobarometer Poll의 2010년 설문에 따르면 스웨덴에서 신이 있다라고 답한 비율은 오직 18%, 핀란드에서는 신이 있다라고 답한 비율이 22%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 나라에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국 국기를 바꾸자는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아이러니한 게 이 나라들 국기가 다름아닌 십자가, 그것도 세로로 세우면 교회 십자가 상징이 되는 옆으로 치우친 형태이다.

지역적으로 가장 무종교인의 비율이 높은 곳은 동아시아로, 2010년 기준으로 무종교인 비율이 50% 이상이다. 위키 물론 이들 중 무신론자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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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무신론자 비율 지도

자연적 및 지정학적 조건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대체로 강수량이 고르고 지진이나 화산 걱정도 없으며 전쟁 위협도 적은 지역들에서 무신론 인구가 많고, 반대로 자연재해가 연간 단위로 일어나고 전쟁 위협도 잦은 지역에서는 그러한 재난을 통해 신의 분노를 느낀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 자연히 종교 인구의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8.1. 한국 및 중국

한국의 종교적 현황을 살펴보면, 특이하게도 미국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동아시아 국가치고 유독 기독교가 상당히 퍼져있지만 기독교 일색에서 벗어난지가 얼마 안 되는 구미권에 비해 종교의 다양성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교회와 절, 점집, 서낭당, 기타 토속 신앙을 한 동네에서, 심하면 바로 옆 건물 줄줄이로 보는 것이 가능하며, 아마도 청동기 시절 이전부터 존재했을 무당이 인터넷 세계까지 진출한 상황이다.

구미권의 보수 기독교나 엄격한 이슬람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한국은 불교를 믿는 할머니와 유교를 중요시하는 할아버지, 무신론인 아들과 교회 다니는 딸, 무슬림인 외국인 며느리가[45] 한 가족으로서 공존하는 것이 가능한 나라다.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 때문에 기독교가 창성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 인구의 비율로 보면 유럽에 비해 기독교 인구가 훨씬 적은 편이고 무종교 인구가 상당히 많다. 2016년 통계청 조사 기준으로 57%의 인구가 무종교이다.

2013년에 전 세계 57개국 5만 1,927명에게 설문 조사 한 결과 한국 무신론자 비율이 15%로 상위 5위권이라고 한다. 또한 2015년에 전 세계 65개국 6만 3,900명에게 조사한 결과 한국인 49%가 무교거나 무신론자로 세계 12위라고 한다.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한편 2015년 통계청 센서스 조사 결과 한국의 무종교인은 56%이다.

이웃 나라 중국의 경우 인구의 약 절반이 무신론자라고 한다. 이는 종교를 거부하는 공산주의 유물론적 사유가 큰 원인이 된다. 그런데 최근 개신교 인구가 늘고 있으며, 여기에 한국 목사들이 한몫한다고 한다. (도올 김용옥, 『도올의 중국일기』). 종교를 권장하지 않던 중국 정부에서는 개신교의 증가에 당황하여 도교 불교 같은 재래 종교로 맞불을 놓는 상황이라고 한다.

한편 서울대학교에서 무신론과 자유사상을 표방하는 동아리가 결성되기도 했으며, 이들이 만든 '전도 거부 카드'가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다. # Freethinkers 참조.

한국이나 중국에서 무신론자의 비율이 높은 이유는 유교에서 바탕한 국가의 독자적 사회 규범이 다른 문화권의 종교가 행했던 사회 규범의 역할을 완전히 가져갔기 때문이다. 유교는 여타 종교와는 다르게 일찍부터 신앙보다는 사회 규범으로 기능해 왔고, 종교가 가진 주술적, 기복적 요소가 거의 없다. 근본적으로 충, 효와 인덕 지식 등을 지고의 가치로 숭상하고 개인의 영혼이나 내세 등 현세적 위계 구조 밖의 초월적 개념을 경시하는, 현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종교다.[46] 조선의 유교는 불가지론과 강한 명시적 무신론의 중간 즈음의 경향을 가져 불교의 부처 등 초자연적 초월자나 사후 세계 등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조선은 특히 불교나 기독교 무속 등 다른 기복적이고 초월적인 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유교를 믿으면서도 동시에 불교나 무속 신앙 등을 여전히 믿었지만, 백성들 사이로 퍼진 주술, 기복이라는 신앙의 요소와는 별개로 한국과 중국만의 독자적인 사회 규범으로 국가를 유지해 왔으며, 지배층과 지식 계급에서는 이런 신앙을 가진 것을 어리석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배척했지만, 그렇다고 백성들한테까지 그를 강요하진 않았다. 사회 규범만 준수하면 미신을 믿는 것 자체로 그리 크게 죄를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도 조선 서울에는 (이방 종교의 특징인) 우상이나 신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세속화로 인하여 유교적 전통마저 약화된 현대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특정 종교가 압도하는 종교적 분위기가 없고, 유교 문화는 도덕적 사회 규범으로서만 희미하게 남았고 가족적 종교나 주변에서의 적극적 종교 전파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무신론자를 포함한 무종교인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

8.2. 일본

일본에서는 64~80% 정도가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 무교자라고 응답했다.

8.3. 그 외 무종교인이 많은 나라

비교적 무종교인(nonreligious) 비율이 높은 국가로는
대체로 에스토니아, 체코슬로바키아[53]같이,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구소련이나 구소련 공화국/위성국이 높은 편이고 북유럽 국가들도 높다.[54]

영국도 무신론 입장에서 상당히 특이한 국가인데 공식적으로는 성공회가 잉글랜드의 국교이고 소속 종교 설문 조사를 하면 60-70%가 성공회나 가톨릭 등 기독교 계통이라고 나오지만, 이는 전통적 유아 세례 풍습 때문이고 실제 신자 비율은 유럽권에서도 낮은 편이다. 자신이 종교적이냐고 질문하면 종교적이라는 비율은 30%에 불과하여 세계적으로도 가장 낮은 수준이고, 비종교적(non-religious) 비율이 53%가량이고 무신론자라고 확신하는 비율도 13~18%나 된다. 그래서 사회도 종교 분위기가 옅고, 교회 등 종교 기관 출석도 매우 저조하기에 세속적 분위기가 짙은 사회이고 리처드 도킨스 등 무신론 운동도 활발한 편이다.

이란도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하면서 타 종교를 탄압하고 있지만, 정작 이란인 중 절반 정도가 자신을 무종교자라고 여기고 있고, 시아파는 33%, 전체 이슬람 종파 전부 4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미국은 주로 리버럴 성향의 고학력층이 많은 대도시 지역에서 무종교인들을 접할 수 있으며, 최대 50~70%는 종교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주로 매사추세츠, 뉴욕과 같은 동북부와 오리건, 워싱턴 같은 곳에서 주로 보인다. 교회 출석률은 상당히 낮은 편이며, 있어봤자 노년층으로만 가득 찬 경우가 부지기수다.

9. 편견

유일신교 전통이 없는 동아시아 유물론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는 구공산권 국가 혹은 범신론적 가치관이 자리 잡은 나라에서는 무신론자에 대한 편견이 심하지 않지만 유일신교적 전통이 확고한 일부 유럽 지역, 미국이나 이슬람권 등지에서는 무신론자가 심한 편견을 기반으로 한 차별을 당하기도 한다. 특히 중동 지역의 대다수 국가 같은 근본주의적인 국가에서는 사형이나 징역, 또는 그에 준하는 큰 응징이 따르며,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주변인들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중동 국가로 여행하거나 비지니스 차 방문할 때에는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해도 기독교와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나, 적어도 불교 유교 신자라고 소개하는 것이 좋다. 기독교도는 그래도 같은 뿌리를 가진 '성서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나마 취급이 낫고, 불교나 유교도 생소하긴 하지만 만리타향인 동북아시아에서 왔고, 불교는 유일신 종교와 갈등거리 될 일도 적은 편이니 그런 종교를 가졌다고 이해라도 해주는 반면, 무신론자는 이해를 못하며 경멸하는 눈으로 본다.[55]

인도, 파키스탄처럼 온갖 신과 문화가 섞여서 공존하는 세계관을 가진 남아시아는 더욱더 골 때리는데, 여긴 어쩌면 중동보다도 더욱 더 무신론자에게 관대하지 못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남아시아인들은 무슬림들처럼 신앙으로서의 종교와 윤리, 규범으로서의 종교를 구분하는 행위를 잘 안 하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는 건 신앙도 윤리도 규범도 없는, 심하게 말하면 ‘당신은 개나 돼지냐, 아님 무생물이냐?’라는 반문을 듣기 딱 좋은 최악의 답변이다. 이 사람들에게 종교는 컴퓨터의 OS나 휴대폰의 OS와 똑같다고 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당신에게 종교를 묻는 것은 ‘당신이 어떤 신앙, 윤리, 규범을 따르며,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 기준을 맞추는 처음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트는 질문이다. 만약 현지 인도인에게서 종교가 뭐냐는 질문을 들었다면, 실제로는 무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유교나 불교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 선교나 집단 구분을 하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다. #.

다만 인도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카스트 제도와 무신론에 대한 적대적인 인식이 해체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볼리우드에서 나오는 영화 중에는 피케이같이 대놓고 종교인을 조롱하는 영화가 버젓이 나오기도 하고, 케랄라는 아예 무신론과 유물론이 주류인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인도 공산당의 장기 집권으로 지역 발전이 원활히 이루어진 곳이라, 무신론자에 대한 적대적인 인식 역시 그만큼 적다.

또한 미국은 선진국치고는 종교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나라이다. 《 만들어진 신》에 따르면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을 미국에서 조사한 적이 있는데, 어떤 미국 대통령 후보자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충분한 능력과 자격은 갖추었지만 흑인이거나, 여성이거나, 비주류인 로마 가톨릭 신자이거나, 유대인이거나, 동성애자이거나, 무신론자일 경우, 그에게 투표하겠냐고 물었는데 라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가장 적었던 경우는 무신론자인 후보자였다. 또한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종교인들은 무신론자들을 근본주의자 만큼이나 불신한다.

이러한 성향이 생긴 이유는 딱 하나, 미국이 20세기 냉전 때 반공주의의 대표 주자였기 때문이다. 건국 때부터 (공산주의와는 경제적 정책 면에서 여러모로 대치되는)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성향이 강했으며, 심지어 파시즘도 초창기에는 반공 사상이라는 이유로 옹호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 냉전 때는 반공답게 인종 평등과 노조와 복지가 공산주의 같다면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니, 국가 무신론을 내세운 소련과 대치하며 살아온 미국인에게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56] 공산주의를 무신론과 동일시하는 건 억지임을 인정하는 사람들 역시, 무신론은 극단적인 유물론에 입각해 인간의 감정과 도덕을 부정하고 인명을 경시하도록 하여 미국을 그저 돈만 많은 소련처럼 만들 거라며 달갑게 보지 않는다.[57]

다만 2015년 미국에서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무신론자라도 대통령으로 투표할 수 있다는 사람이 58%에 달했다. # 이는 매카시즘이 몰아치던 1958년도에 비하면 40%나 늘어난 수치라고 한다.

몇몇 종교인들 사이에서는 모든 무신론자들이 화가 나있고 공격적이며 교조적이라는 편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교육학 박사 Christopher F. Silver가 2012년 1,153명의 무종교인들[58]을 조사하고 6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59] 실제 성향을 조사한 결과, 이 중에 종교인들의 편견에 부합되는 공격적이고 교조적인 성향이 높은 부류는 4번째의 반신론자였다. 이 부류는 전체 무종교인의 약 15% 정도를 차지했다. 즉, 대부분의 불가지론자, 무신론자는 일반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비종교인 자녀들이 종교인들의 자녀보다 더 이타적이고 관용적이라는 연구도 있는데 그 요인을 종교인 자녀들은 종교의 도덕적 면죄부 효과로 자신을 변호하기 때문이라나. 즉 도덕적 담론에서 종교를 배제하고 세속적으로 다루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신론자들과 유신론자들이 서로를 무작정 부정하며 비하와 매도를 일삼고 각자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도 편견이다. 정중하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토론하는 경우도 많다.

9.1. 편견의 예시와 반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종교에 의존하는 도덕과 같은 것이 무신론자들에게는 단순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무신론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반박한다. 아래의 각 항목들은 종교인들의 시각과, 거기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반박 순으로 쓰여 있다. 반대로, 몇몇 긍정적인 오해 등이나 편견은 무신론자중에서도 극성 무신론자 혹은 무신론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반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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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타 사상과의 관련성

"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공산주의는 철저한 반종교적인 사상이 되었는데, 저 말을 한 마르크스는 무신론자(또는 무신론적 불가지론자)였으며 종교를 부정적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논란이 있으니 자세한 건 문서를 참조할 것. 아무튼 포이어바흐의 논제를 수용해 종교의 폐지를 촉구하긴 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마르크스 주의에서도(러셀의 지적에 의하면) 크리스트교적 부분이 많이 나타난다. # 단 크리스트교와 마르크스주의의 비교는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비판도 듣는다는 것 역시 기억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구공산권 국가들에서는 나라에 따라 정도는 다르지만 대부분 종교의 기세가 강하지 못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의 구소련 국가의 종교인 비율은 낮은 편이다. 소련의 경우 종교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포교 활동을 할 경우는 범죄로 처벌하는데 종교 믿지 말라고 권유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한편 동유럽 공산 국가들의 경우 대체로 형편이 훨씬 좋아서 기독교 정당이 존재한 곳들도 있었다. 북한이나 옛 캄보디아 같은 경우는 종교 자체가 금지되고 종교를 믿다가 걸릴 경우 사형을 당하기도 하는 등 심하게 처벌했다.

그래서 공산권이 붕괴한 이후에도 구공산권 국가들에서는 무신론자의 비율이 여전히 높은 편이다. 독일의 경우에도 구 동독 지역은 무신론 비중이 확연히 높게 나타난다. 북한의 경우가 가장 심해서 탈북자들 이야기를 보면 ( 김일성 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할 가능성도 있어서는 안 되므로) 인간 외의 신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 자체를 탈북하기 전까지 듣도 보도 못했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종합한 끝에 무신론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신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도 없었던 것이므로 통일이 된 후 북한 지역에 포교 활동이 시작된다면 오히려 종교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아나키즘과도 관련이 있다. 공산주의가 최종적으로는 무정부 상태를 목표로 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실제 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의 방법과 국가에 있어서의 생각이 다르기는 하지만.[86] 아나키즘의 슬로건이 'No gods, no masters'인 것처럼 정신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87]

철학사적으로 보자면 무신론은 근대 철학에서 신본주의에 대항한 인본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인본주의는 차별, 억압 등에 반대하며 거기에 뿌리를 둔 무신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방법론적 자연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자연 현상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방법이다 보니, 쓸데없이 신을 끼워 넣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신론은 신을 믿지 않는 것이고,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신을 끼워 넣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꽤 연관성이 크다. 다만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신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사상은 아니지만 진화 생물학 측에서 무신론자들이 많이 나온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찰스 다윈이 시작한 진화론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통계적이다. 즉 진화론은 어떤 변이체가 있을 때, 그 변이체가 나중에 생존하게 될지 멸종하게 될지 분명히 결정해 주지 않는다. 단지 통계적으로 그럴 개연성이 있다는 것 정도만 말해준다.

이렇게 확률적인 이론이 우주의 결정론적 질서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신의 권능도 드러내지 못한다. 진화론은 대충 뒤죽박죽 섞여있는 것들, 잡동사니들에 대한 법칙일 뿐이다. 만약 이것이 역시 과학 이론이라면 더 이상 과학은 신의 권능을 드러낼 수 없고, 그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제 과학은 점점 더 신학에서 멀어지게 된다. 더욱이 자연은 신이 설계한 법칙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선택이라는 확률적인 메커니즘에 의해서 변화한다. 따라서 자연의 변화는(설령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의 의도와 필연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닌 것이 된다. 더욱이 자연 변화의 목적이 신의 의도를 실현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자연은 목적 없이 진화한다.

허셀 왈, 이차적으로는 아마도 일상에서 예수쟁이에 염증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된 것처럼 학문적으로도 창조론자들이나 지적 설계론자들의 폐해를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면 1차적인 단순한 이유지만 어린 시절 자신이나 소중한 사람이 아픔을 겪는 것을 보고[88] 신에게 기도했으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해서 "결국 신 같은 건 없었다."라면서 신을 불신하고 무신론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엔 본인이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아예 반신론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11. 유신론 vs 무신론의 틀을 넘어선다면?

무신론에 관련된 논쟁은 유일신을 산정하는(현대에 두드러지는 것은 유일신 중심) 종교 내에서 특히 큰 논쟁거리가 된다. 기독교의 주장에 따르면 신은 어떠한 물리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전지전능자이며, 참된 만물의 시작이자 절대적인 유일함이다. 사회 정의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도 결국 신의 뜻에 부합하냐의 여부에 있기 때문에 신을 부정함은 윤리관을 포함하여 세계관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르네상스 이후 민주주의와 다양한 사상들로 발전하기 이전까지는 이러한 도덕론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고 실제로 작용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와 달리 절대적인 신의 개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특수 형이상학적인 것, 종교적인 요소, 신적인 숭배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자가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논어에 저 구절이 기록된 것은 그게 당시 사회에서 '매우 특이'했기 때문이다. 사실 동아시아에서도 무신론과 비슷한 ‘무귀론’, 즉 귀신이란 없다는 주장을 편 사람이 더러 있었다. 처음 불교가 들어왔을 때 중국 학자들은 도대체 영혼이 윤회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계속 따졌었고 남북조 시대의 학자 범진이 자신의 저서 《신멸론》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칼날과 날카로움의 비유를 통해 주장한 적이 있었다[89]. 조선의 선비들도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불교 짝퉁이 들어와서 천당, 지옥 같은 헛소리를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 용어를 번역할 때 불교의 용어를 많이 차용했다. 천주, 천당, 지옥, 장로 등은 원래 불교 용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이 《천학문답》을 지어 천주교를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신앙의 대상, 즉 동아시아의 귀신(鬼神), 음양, 오행 등에 그리스도교 세계관에서의 만큼 절대적인 의미가 있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고, 따라서 무신론이라는 담론의 필요성도 매우 적었다. 그러나 이들이 현실적으로는 인격신적인 성격을 지닌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기만도 어렵고, 신성(神聖)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어 일정한 의식을 통해 종교적인 대상으로서 일정 부분 '숭배'되었던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교에는 인격신으로서의 절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원같은 경우엔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라는 곳이 있으며, 공자 맹자는 거의 필수적으로 이 제사에 포함된다. 다만 유교는 본질적으로 정치사상이며 후대에 철학적인 성격도 강하게 띠었기 때문에, 종교의 성격은 부수적인 성격으로만 자리하며 '숭배'보다 '존경'의 뜻이 크다. 하지만 '성인의 덕이 미쳐 만물의 화육을 돕는다', '임금의 덕이 미치지 못해 하늘이 재앙을 내렸다'(천인상관설), '하늘이 사명을 내려 왕조를 세우셨다'(천명론) 하는 식의 내용은 짤없이 종교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태극, 음양, 오행 등에 대한 태도 또한 '만물을 생성하고, 만물의 기본적이고 바른 성질이 되며, 인간으로서 이를 바르게 따라 추숭해야 할 것'으로 보는데, 인격신이라는 점 외의 신적 성격을 상당히 강하게 갖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례로 이를 이용해 가톨릭 선교사들은 유교와 그리스도교를 연결지으려는 노력을 통해 보유론이나 색은주의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었다. 이처럼 복잡하고 복합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유교가 종교로 분류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단적으로 결론을 제시하는 것도 무리에 가깝다.

유교, 불교를 넘어서면 더욱 복잡하고 머리 아픈 사례들이 종교학과 무신론의 정의를 휘젓고 있다. 범신론과 인격신(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등)이 복잡하게 얽힌 힌두교의 사례는 어떠한가? 신의 존재를 산정하지만, 그것이 온 세계의 존재들에 내재하며 나와 타자의 올바른 관계만으로 종교성이 실현된다고 보는 동학의 사례는 어떻게 볼 것인가? 도(道)와 기(氣)의 운행을 이해하거나 이용함으로써 종교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도교는 얼마나 종교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이 체계 내에서 신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처럼 유럽 외의 세계에서 실존한 종교성과 신성은 매우 복잡하고 정의에 대해서도 매우 다양한 담론이 존재한다. '동아시아는 무신론 세계'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서 대표적인 예만 하나를 소개하자면, 종교학자 월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성(聖)이라는 체험을 제사 의식을 통해 계속해서 재확인하며 세속(俗)에 영향을 미치고 종교 체험을 함께 하는 것이 종교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 경우 유교와 같이 논쟁이 큰 경우 또한 종교에 포괄된다. 이러한 담론을 생략하고 '유일신 종교처럼 절대신이 없다 → 동아시아는 무신론 세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재 종교학계의 수많은 신성과 종교성에 대한 담론을 무색하게 하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무신론 또한 종교의 성격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시각과 정의를 내리고 이러한 담론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유일신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뛰어난 도덕성, 영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시각은 유일신 종교를 반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16 ~ 18세기까지 시누아즈리가 유행하던 무렵, 유럽의 여러 학자들이 중국의 사회를 접하면서 크리스트교 세계를 비판한 주요 근거가 이것이었고, 19~20세기 영적 신비와 뉴에이지 등이 유럽 세계에서 큰 관심을 끌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12. 국가 무신론

일반적으론 인류의 역사 동안 유신론 관련 사상이 패러다임을 지배해 왔지만, 20세기 들어 나타난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에 따라 국가 무신론이라는 대규모 무신론자 권력이 등장한 바 있다. 이에 의한 병폐도 상당했는데 대표적인 것은 알바니아 엔베르 호자세계 유일의 무신론 국가라고 주장하며 모든 종교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특정 종교만 금지하거나 탄압한 게 아니라 유신론 자체를 금지하고 탄압한 독특한 사례다. 종교 자체가 있는 사람을 대규모로 처형하고 고문했고 1967년 한해에만 1,600여 명의 종교 지도자들이 처형됐다. 수만 명이 강제 수용소로 갔다. 그리고 적도 기니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대놓고 국가의 모토를 '마시아스 응게마 외의 신은 없다'로 바꾸며 수도에 있던 대성당을 무기고로 바꿔놓고는 모든 종교인들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 대혁명 시기의 홍위병들 또한 구시대적 봉건 사상을 제거한다는 기치 아래 종교와 종교인들을 탄압하고 종교 시설을 파괴한 전적이 있다. 이 당시 6,000여 개의 티베트 불교 사찰이 파괴되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국가적인 검열 행위는 아니었다.

엔베르 호자와 폴 포트 같은 일부 인물이 극단적 국가 무신론을 추구한 것이지 소련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종교를 어느 정도 용인하는 세속주의였다.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사례는 더욱 그러하다.

13. 여담

종교 심리학자 아라 노렌자얀(Ara Norenzayan)에 따르면[90] 무신론에는 4개 유형이 있다고 한다. 즉 종교적인 마음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형(mindblind atheism), 단순히 무관심한 유형(apatheism), 세속적 사회에서 자라나 종교와는 인연이 없는 유형(incredulous atheism), 마지막으로 직관적 추론을 거부하고 가능한 한 정보들을 분석하고 회의하려는 유형(analytic atheism)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2014년 제정된 법에 의해 무신론이 '테러'로 규정된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게 사우디는 테러리즘 지원 의혹을 강하게 받고 있는 국가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무신론이 공산주의로 취급되어 불법이라고 한다. 무슨 종교이든 하나는 믿고 있어야 한다. 수하르토가 제정한 판차실라에 의한 것으로, 정확히는 이슬람, 불교, 힌두교, 개신교, 가톨릭, 유교만 인정이 되며 나머지 종교는 불법으로 간주된다. 다만 수하르토 독재 시절도 벗어난 데다 현대 인도네시아는 아체지역을 빼면 대체로 세속적이라 그런지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동아시아의 세속주의와는 성향이 달라 무신론자 자체는 적지만, 이슬람 극단주의마냥 종교를 열렬하게 안 믿는다며 냉담자를 잡진 않으니 무신론자라고 해도 종교를 속이고 종교 활동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만 인도네시아 사정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여기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기술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포교하기에 쉬운 대상으로도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미 종교가 있는 사람을 개종시키기보단[91][92] 무신론자를 신자로 만들면 장기적으로는 무신론의 세력 약화[93]를 가져올 수 있고, 무신론자들을 '아직 신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 내지는 '잘 설득하면 자기 종교로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14. 무신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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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외부 링크

16. 관련 문서



[1] 일부 철학자들은 인격신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론자'라고 불렸다. 고로 무신론은 '신론자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2] 불가지론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종교가 없는 일반인들은 '신이 없다고 확언할 수도 없지만, 신이 있다고 믿을 이유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것이 종교적 불가지론이다. [3] 다만 불교는 영혼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는 인정하지만, '초월적인 절대자'로서의 신은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의 신앙 대상이 되는 부처는 세계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아 불도(佛道)를 이룬 성인'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종교 자체의 방향성이 '신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며 실천해야 한다'가 아니라 '끊임없는 성찰과 수행을 통해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에 가까우며, 진리를 깨닫게 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과 인간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종교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4] 양전하는 구름 위쪽에, 음전하는 구름 아래쪽에. [5] 단 여기서 세계관이라는 것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문예 창작적 의미에서 '상상 속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가깝다. 엄밀히 말하자면 뉘앙스의 차이가 조금 있기는 하나 가상 세계를 뜻하는 단어로 '세계관'을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니버스의 번역어로 사용된다. [6]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고대 그리스 시절에도 무신론은 사람들한테 별로 좋게 여겨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인들은 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을 진지하게 숭배했으며, 그런 신들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발언을 하면 신성 모독이라고 간주하여 분노하였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했던 아테네에서도 태양을 가리켜 신이 아니라 그저 타오르는 불덩어리일 뿐이라고 주장한 철학자는 아테네 시민들의 분노를 사서 신성 모독죄를 지었다고 비난을 받으며 추방되었다. [7] 별도로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를 비롯하여 여러 종교가, 자기 기준에서 이교도들의 철학을 무조건 배척한 것은 아니긴 하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경우 신학(theology)이란 개념이 나온 건 그리스 철학자 시대가 아니라 훨씬 이후로 무신론이니 이신론이니 나뉜 것은 기원후 기독교가 퍼지고, 4세기경 로마 제국 국교가 기독교가 된 것과 관련 있다. 초기 기독교 교부 철학은 신플라톤 주의를 받아들여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이어주는 중재자(logos)를 신의 존재로 설명했기 때문에 그리스 로마 시대 현인들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같은 철학자들은 기독교와는 원래 전혀 상관없지만 이러한 이유로 중세 시대 교회 철학에서도 매우 존중받았다. 당연히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각은 무신론과 다른 취급이었다. [8] 참고 서술: Atheism is less distinct from deism than it thinks. It inherits the semi-Christian assumptions of this creed. Atheism derives from religion? Surely it just says that no gods exist, that rationalism, or 'scientific naturalism', is to be preferred to any form of supernaturalism. Actually, no: in reality what we call atheism is a form of secular humanism; it presupposes a moral vision, of progressive humanitarianism, of trust that universal moral values will triumph. (Of course there is also the atheism of Nietzsche, which rejects humanism, but this is not what is normally meant by 'atheism') 출처 : Theo Hobson, ”Atheism is an offshoot of deism”, The Guardian, 2014.2.3, 링크 [9] 참고 서술: 무신론자들은 고대 세계 이래 존재해 왔지만, 체계적인 ‘무신론’이 등장하는 것은, 뤼시앵 페브르에 의하면, 데카르트 이후이다. 철학이나 과학과 같은 “심성적 도구”를 구비한 근대인들은 무신론을 체계화시키는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면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당당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동안 무신론자라는 말은 비판과 비난의 도구였거나 ‘욕설’로 사용되었지만, 이제는 “서명과 자랑”이 된 것이다. 1686년에 장 르클레르는 지난 시대의 무신론자들은 도덕적인 차원에서 교회를 비판했지만 이제는 철학과 역사적 비판의 무기를 가지고 교회를 공격한다고 말했다. 유럽인들은 17세기 후반에 “의식의 위기”를 겪었다. 본고에서 다루려고 하는 스피노자와 밸은 이 같은 ‘위기’를 전 존재로 겪은 사람들이다. 스피노자는 당대에 이미 “가장 체계적인 무신론자”라는 평을 받았으며, 밸의 『역사적 비판적 사전』은 18세기 무신론자들의 교본이었다. 이 두 철학자의 '무신론'을 검토하여 근대 무신론의 발생 경로를 확인하려는 것이 본고의 의도이다. 출처: 김응종, “근대 무신론의 철학적 기원"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와 피에르 밸을 중심으로 - “, KCI, 2009, P.47, 링크 [10] 참고 서술: 한편으로 무신론은 이신론보다 더. 일관성이 있습니다 –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을 깔끔하게 제거합니다. (원문: On one hand atheism is more coherent than deism – it neatly eliminates the supernatural.). 출처 : Theo Hobson, ”Atheism is an offshoot of deism”, The Guardian, 2014.2.3, 링크 [11] 참조 서술: 이에 대한 고찰로 무신론이 무엇인지, 무신론에 대한 불가지론적 또는 종교적 대응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적절한 주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무신론자는 신이 있다는 것이 거짓이거나 아마도 거짓이라고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무신론의 더 적절한 묘사는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신을 믿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더 복잡한 주장이 있다. (어떤 이유가 강조되는지는,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다르다), 의인화된 신의 경우, 무신론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거짓이거나 아마도 거짓이기 때문에 신에 대한 믿음을 거부한다. 의안화되지 않은 신(루터와 칼뱅의 신, 아퀴나스, 마이모니데스의 신)에 대해, 무신론자는 그러한 신의 개념이 무의미하고, 이해할 수 없고, 모순되고, 일관성 없기 때문에 신에 대한 믿음을 거부한다. 일부 근현대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 의해 묘사된 신에 대해, 무신론자는 문제되는 신의 개념이 단지 무신론적 실체를 감추는 것이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을 거부한다. 예를 들어, '신'은 단지 사랑의 다른 이름이거나, '신'은 단순히 도덕적 이상의 상징적인 용어라는 주장. {원문 : Reflection on this. should lead to a more adequate statement of what atheism is and indeed as well to what an agnostic or religious response to atheism should be. Instead of saying that an atheist is someone who believes that it is false or probably false that there is a God, a more adequate characterization of atheism consists in the more complex claim that to be an atheist is to be someone who rejects belief in God for the following reasons (which reason is stressed depends on how God is being conceived): for an anthropomorphic God, the atheist rejects belief in God because it is false or probably false that there is a God; for a nonanthropomorphic God (the God of Luther and Calvin, Aquinas, and Maimonides), he rejects belief in God because the concept of such a God is either meaningless, unintelligible, contradictory, incomprehensible, or incoherent; for the God portrayed by some modern or contemporary theologians or philosophers, he rejects belief in God because the concept of God in question is such that it merely masks an atheistic substance; e.g., “God” is just another name for love, or “God” is simply a symbolic term for moral ideals.} 출처 : Kai E. Nielsen, “atheism”, Encyclopedia Britannica, Last Updated: Mar 30, 2023, 링크 [12] 예를 들어 '게이'가 일반인들에게 특이하게 받아들여지듯이. [13] 요한묵시록에서 등장하는 '네 기사'에서 착안한 별명으로, 이 넷이 나눈 담화를 한 편의 책으로 엮은 《The Four Horseman》(국내 정발명 《신 없음의 과학》.)도 존재한다. [14] 이 네 기사들은 2007년 무신론자 국제 연합 연례 회의에서 처음으로 만났으며, 아얀 히르시 알리와 생존한 세 기사(크리스토퍼 히친스는 2011년 작고)는 2012년 멜버른에서의 세계 무신론 대회에서 처음으로 안면을 텄다. [15] 이런 것을 두고 'pejoration'이라고 부른다. 의미 변화 항목 참고. [16] 이에 대해 종교 신자들은 예배에 참석하고 믿음을 다짐으로써 구원받으려는 확고한 동기가 있는 반면, 무신론자들은 굳이 무신론 때문에 오프라인 모임까지 나가서 시간과 비용을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는 어려워서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종교인(물론 개신교인)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며, 예배에 참석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개신교 교리에 있어 기초적이지만 흔한 착오이다. [17] 그들이 니체를 받아들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니체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 사실 애초에 기독교 신자들과 주류 기독교는 당연히 이런 신학을 부정한다. 하느님이 죽었다는 소리를 태연하게 하니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단 파문을 받아도 할 말 없는 소리이기 때문. [18] 다만, 이에 대해선 입증 책임을 유신론 진영에 떠넘기려는 책임 회피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무신론자라고 생각하고, 그의 저서를 분류하는 카테고리 또한 무신론일 뿐 아니라 그의 주장 자체가 무신론적이기에 도킨스 자신이 주장하는 '무신론에 가까운 불가지론'은 단순한 말장난일 뿐이라는 것. 무신론에 가까운 불가지론은 과학자 입장에 근거한 표현이기도 한데, 과학이 귀납 논리에 기반을 둔 이상 어떤 존재가 없다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신이 없다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보장되지 않고 개연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식이기에 저런 표현을 했다는 것. 예컨대, 어떤 사건의 용의자 A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갖는 수사관이 그가 범인이라는 결정적 물증이 없을 때, 누군가 그에게 "그 용의자가 범인인가요?"라는 질문을 하면, 그 수사관은 "수사관으로선, 그가 범인이라는 결정적 물증은 없으므로 범인이라 단정하지 못하나, 개인적으론, 범인이라고 생각한다"라 답하는 것처럼 도킨스 역시 자신의 과학자로서의 입장을 고려하여 저런 식의 발언을 했을 것이다. [19] 사실 신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무신론이라기보다는 반신론 악신론에 더 가깝다. [20] 개념의 오용과 곡해가 신무신론의 대중적 인기에 기인했다는 건,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사실 신무신론이 유행하기 이전부터 유신론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개념의 오용과 곡해는 존재해 왔다. 아이러니한 점은 유신론자들의 이러한 오용과 곡해를 신무신론 측에서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적잖게 있다는 것. [21] 신에 대한 회의적 태도 그 자체가 무신론이라는 설명은 신무신론만의 설명은 아니다. 신무신론 이전부터 일부 유신론자들 사이에서도 통용한 설명이기도 하다. [22] 신무신론에서 무신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불가지론을 무신론으로 둔갑시켰다는 건 오해의 소지가 많은데, 이미 그 이전부터 불가지론을 무신론의 일종으로 보는 시각이 유신론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해 왔다. 신무신론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무신론 철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게 아니듯, 유신론자들이라고 해서 유신론에 대한 이해도가 높진 않기 때문이다. 되레, 일부 신무신론 측에선 불가지론자들을 유신론자들의 위압에 굴복한 겁쟁이나 피해자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는 등 자신들과 결이 다르다는 식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애초에 이러한 개념 오남용은 신무신론에 의해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적대하는 양 진영 간이 합작해 만든 촌극이다. [23] 스탠퍼드 철학 백과 에서는 유용한 '인식론적 불가지론'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theistic gnosticism, atheistic gnosticism이 유용할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24] 과학 만능주의, 혹은 과학 절대주의라고도 불리운다. 과학적 방법론이 현실을 해설하기 위한 신뢰도 높은 척도임을 넘어, 유일한 척도로 치부되는 주의, 사상을 뜻한다 [25] 예를 들어, "이 세상에 사과가 존재함을 안다"면서 그와 동시에 "난 사과가 존재함을 믿지 않는다"라는 것은 형용 모순이다. [26] Justified True Belief는 현재 가장 믿음, 지식의 관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설명이며, '게티어 문제'처럼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해도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통용된다. [27] 예를 들어, 신대륙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과 아예 아무런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그 개념조차도 없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태를 '의미론적으로 순수한 상태'라고 한다. (Oppy, 1992) [28] 앞서 논한 바와 같이, 이에 대한 어떠한 학문적 연구도, 고찰 과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인터넷상에서 기원한 정의 변경. [29] 귀납 논리적 관점에서 보면 신무신론이 저런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추정할 수 있는데, 신무신론 입장에선 신이 있다는 명제는 참이 아닐 확률이 높다. 그러나 참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이 반드시 참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 때문에 신이 있다는 명제가 참이 아닐 확률이 높아서 믿진 않지만, 신이 없다는 명제가 참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없다고 단정하진 않는다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 [30] 고로, 1순위의 질문에 대해서는 유보할 수밖에 없으며, 불가지론자의 믿음은 "현재 유신론도, 무신론도 참이 아니다"라는 두 견해에 대한 견해로서 '2순위의 믿음'이 된다 [31] 어떤 존재가 없다고 믿는데, 동시에 그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형용 모순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32] 흔히 신무신론에서는 '거증 책임(burden of proof)'이라는 용어를 오남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거증 책임'은 법률적 용어, 개념이다. 주의 주장, 믿음, 생각에 대해서는 거증 책임이 아닌 '정당화의 의무'가 있을 뿐이다. [33] 위 서술에서 데니얼 데닛도 철학자도, 인문학적 바탕이 없던 사람이라고 똑같이 치부했으나 그는 전문 철학자이며, 인문학적 바탕이 없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34] 다만, 이러한 용어 혼동과 자의적 용어 정의는 신무신론이 유행하기 이전부터 기독교 근본주의, 정확히는 학술적 이해도가 떨어지는 유신론자들 사이에서도 흔하게 있어온 일이었다. 불가지론을 무신론의 일종 혹은 무신론으로 가는 지름길로 치부하여 불가지론자에 속하는 철학자나 과학자들을 무신론자로 치부하는 경향은 유신론자들 사이에서도 적잖게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신무신론의 용어 혼동이나 자의적 용어 정의들의 유래를 찾아보면 그런 유신론자들의 용어 혼동이나 자의적 정의에서 유래하는 게 적지 않게 존재한다. 신무신론은 유신론자들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을 지적하면서도 정작 그들 자신은 그들이 비판해 온 유신론자들이 잘못 쓴 용어를 그대로 차용했다는 사실은 신무신론이 학술적 사회 운동이라기보다는 기성 종교의 반감에서 유래한 안티 운동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 [35] 애시당초 신무신론이라는 게 9/11 테러를 기점으로 일어난 반종교 정서에 편승한 일종의 유행에 가깝기 때문에 개념, 주의, 주장들에 엄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철학적인 무신론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종교적 반감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무신론이라는 명칭 자체가 신무신론에서 스스로 붙인 이름이라기보다는 21세기 들어 유명한 무신론 작가들의 팬덤 활동에 대해 외부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외부에서 붙여진 이름하에서 일종의 진영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실체를 갖는 사회 운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시류에 편승한 문화 논쟁이었고 근본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파급력은 존재하지 않았다.이에 대해선 2010년 올라온 칼럼 왜 나는 신무신론을 믿지 않는가에서, 톰 플린은 소위 "신무신론"이라는 것이 새롭지도 않을뿐더러 어떤 운동조차 아니며, 신무신론에서 새로운 것이라고는 오직 무신론에 대해 다룬 출간물이 유명 출판사에서 간행되고, 그것이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읽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왔다는 사실뿐이라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서는 크리스토퍼 히친스 역시 "신무신론에 새로운 것은 없으며 단지 최근에 일어났을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리처드 도킨스와 같이 "무신론 대빵" 정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에도 번역된 그의 저서인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는 신 존재 증명을 부인하거나 신의 부재를 주장하는 내용은 없다. 해당 책의 내용은 100% 신의 이름으로 벌어진 악행 - 즉 종교의 해악 - 을 지적하는 것이다. 오히려 해당 책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나는 이런 잘난척하는 부류를 마냥 긍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36] 신무신론 진영에선 과학적 사고를 중시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주장을 펴는 경향이 많은데, 과학적 사고란 결국 귀납 논리적이고 때문에 잠정적이고 그것이 반드시 참이라는 걸 보장하진 않는다. 문제는 이들이 믿음이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도 과학적 사고를 견지하는데, 이건 본인들의 신념도 예외가 아니다. 요컨대, 이들에겐 무신론은 참이라는 피상적이고 막연한 신뢰감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참이라는 신념은 존재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이란 귀납 논리를 기반으로 하며, 귀납 논리에선 그 어떤 결론도 결국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참임을 보장하진 않는 잠정적 결론이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도 연역적이라기보다는 귀납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과학적으론 불가지론을 주장하면서도 개인적으론 무신론자라 칭하는 이중적 입장 태도를 보인다. [37]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중세 시대에도 이교도에게 인두세만 물렸을 뿐 박멸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38] 하지만, 이슬람교가 주류인 국가 중에선 터키나 몇몇 세속주의가 강한 국가를 제외하면 동시에 아주 강력한 크리스티아노포비아 국가이기도 하다는 점도 있다. [39] 반대로 중국은 무신론을 공식화했기 때문에 종교를 가지면 정치인이 될 수가 없다. [40] 라틴 아메리카는 전통적으로 가톨릭 문화권이긴 하나, 개신교의 영향력도 꽤 크다. [41] 무신론 (2%), 불가지론 (2%),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 (12%) [42] Ecklund, E. H., & Scheitle, C. P. (2007). Religion among academic scientists: Distinctions, disciplines, and demographics. Social Problems, 54(2), 289-307. [43] Ecklund, E. H. (2010). Science vs. religion: What scientists really think. Oxford University Press, p16. [44] 물론 이들 국가들이 무신론 때문에 안정적이라는 이야긴 아니다. 반대로 안정적이기 때문에 자발적인 무신론자들이 늘어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안정적인 사회에서, 국가에서 강제한 무신론이 아니라 자발적인 무신론자가 늘어난다는 사실 역시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사항일 것이다. [45] 참고로 샤리아에 따르면 무슬림 여성은 같은 무슬림 남성과의 결혼만 허용되지만, 세속주의 성향의 무슬림들은 이를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다. [46] 이는 논어의 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이라는 구절에서 특히나 두드러진다. 공자가 귀신을 꺼린 것은 공자가 살던 시절 종교의 행태가 인신 공양을 일삼는 막장 그 자체였다는 데서 기인한다.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삼은 공자 눈에 귀신들이 하는 일이라곤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사람 잡는 것 외엔 아무 쓸모가 없었다. [47] 신사 관계자들의 경우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나 [48] 예를 들자면, 여고생이 신사에서 무녀로 아르바이트를 한다든가 하는 등. [49] 그리고 이런 표현들은 자연스럽게 타 동북아 서브컬처 향유자들에도 침투했고, 알게 모르게 일반에서도 종종 쓰는 표현이 되었다. [50] 의외로, 약 30년 전까지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같은 나라로 존재했던 이웃 국가인 슬로바키아는, 여전히 60%가 가톨릭 신자다. 체코인과는 구별되는 슬로바키아인의 특징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51] 프랑스 사회에는 라이시테라는 정교분리를 철저하게 지키면서 특히 공적인 장소에서의 종교 활동(전도를 필두로 하는 종교적 색채가 드러나는 행위 일체)은 원천 금지 하는 사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라이시테가 있기에 프랑스에선 무슬림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프랑스에는 아예 종교 기반 정당도 불가능하다.) 공적인 장소에서 종교를 드러내지 않는 신자들도 있는지라 비율의 전부가 무신론자를 포함한 무종교인이라고 아예 확신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지만, 단지 종교를 조사하는 것뿐인 조사에서의 라이시테라면 무응답이나 응답 거부로 빠져나갔을 확률이 큰 데다가, 라이시테 자체를 감안하고 조사했을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다. [52] 무신론, 무종교, 영성 포함 [53] 현재는 체코 공화국만. [54] 단, 구소련의 위성국들이었던 폴란드 헝가리, 리투아니아등은 반대로 여전히 기독교가 70~80%가까이 될 정도이고,(폴란드 & 리투아니아도 20세기에서 가톨릭교회가 민족 결집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공산 정권 시기 이후에서도 신앙이 유지되었다.) 아예 아르메니아의 경우는 기독교 계열의 한 종파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가 국교인 곳으로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교인이라는 것이 아르메니아인의 정체성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이들 때문에 제법 의외라는 반응도 있는 편. [55] 물론, 사우디 등 몇몇 국가는 가장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기독교 계열 신자들이다. 오히려 무신론자는 말로만 경멸을 받는데 기독교 신자는 죽이거나 폭행하는 일도 벌어질 정도. [56] 하지만 스푸트니크 쇼크 때는 예외였는데, 이때는 미국이 과학 중심 교육을 강화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져서 창조론을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등 종교가 상대적으로 배척받았다. [57] 유교가 괴력난신을 부정하지만 무신론이 아닌 종교의 범주로 보는 것도 이러한 사고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신적인 것을 섬기지는 않지만 인의 도덕을 중시하는 마음처럼 물질적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인간의 정신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58] 무신론자가 아니다. 무종교인 + 불가지론자 + 무신론자 + 반신론자 등등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59] 다만 학술 저널에 올라온 연구가 아니고 사적으로 진행한 연구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60] 프리드리히 니체가 기존의 그리스도교를 니힐리즘으로 규정하고 지상의 삶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61]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자살을 옹호하거나 삶의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62] 나의 투쟁이나 그의 행적을 통해 히틀러의 종교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서전 등을 토대로 보면 그냥 철저하게 종교를 이용하며 유신론자인 척을 했다는 의견도 있다. [63] 다만, 강경한 무신론자/반신론자, 혹은 반기독교주의자가 주장하는 "히틀러는 기독교인이다."라는 것은 불확실하다. [64] 물론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피트 스타크라는 공화당 측의 무신론자 의원이 나오는 등 비종교인들의 영향도 어느 정도 커지고 있긴 하다. 현재 뉴욕 시장 빌 더블라지오도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무종교인이라고 한다. [65] 러시아 정교회와 그 지도자인 모스크바 총대주교 소련 공산당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반발한 반공주의 성향의 재외 러시아인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에서 참러시아 정교회(Russian True Orthodox Church)가 출범했다. [66] 여러 발생 가능한 사건들이 주어진 확률만큼 모두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A가 99.99%, B가 0.01%라면 1,000,000개 중 A가 999,900번, B가 100번에 근접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소리. [67] 정확히는 우주 전체가 지금과 같은 모습인 것은 정말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현대 물리학에서도 아직 연구 중인 분야다. 즉,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게 종교이고 신중하게 결론을 유보하는 것이 불가지론이라는 것이다. [68] 물론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연구자나, 지지자라고 해서 전부 무신론자는 아니다. [69] 사실 무신론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교만의 전제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교만(오만)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 으뜸 죄악으로 여겨졌다. [70]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할 무종교인에 대한 조사 중 ' 반신론자(anti-theist)' 유형에서 나온다. [71] 무지한(지금 자신이 하는 짓이 얼마나 큰 패악인지 모른다면 무지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신도들은 정말로 신앙을 바탕으로 이런 전쟁에 참전하지만, 이런 전쟁을 벌이는 고위층은 애초에 철저한 이해 계산을 토대로 전쟁을 벌인다. 한마디로, 말이 '성전'이지 실제로는 신앙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비열한 전쟁이다. [72] 이 주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도덕과 종교의 관계 항목 참고. [73] 예를 들어 구약에는 야훼가 유대인들의 타민족에 대한 학살이나 강간, 약탈 행위를 방조하고 장려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물론 현대의 보편 종교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고대인의 시대적 한계라고 규정하고 옹호하지는 않으나, 성서 무오설과 같이 근본주의적인 사상을 신봉하는 신자의 경우에는 시대착오적인 부분까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따르기도 한다. [74] 예를 들어 한때 일부 어그로꾼(?)들이 유도 선수 김재범 씨에게 마구잡이로 악플을 남겨서 사회적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이유는 그저 단지 그가 교회에 다니고, 시합 때 기도를 올리는 모습 때문이다. [75] 신성 모독이라는 행위가 때로는 아주 온건하게 타 종교인과 무종교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혼자 독실하게 믿는 신자도 화를 내게 하는 행위인 걸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심하면 패드립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이 바로 타 종교인 혹은 무종교인의 신성 모독 관련 행위이다. [76] Cragun, Kosmin, Keysar, Hammer, & Nielsen, 2012. [77] 그렇지만 이후 지상 최대의 쇼에서 언급된 것에 따르면, 자신은 창조설 신봉자들이 짜증 나는 거지 종교에까지 적대적이진 않으며, 과학과 종교가 양립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기존의 강경한 입장에서는 한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78] 특히 한국 사회에 퍼진 반기독교 성향과 겹쳐져서 퍼진 오해와 선입견이기도 하다. [79] 예컨대 자신의 경험들을 예시로 들며 인간이 어떤 현상에 초자연적 의미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원리를 인지 심리학적으로 설명한 심리학자의 칼럼을 두고 필자가 나약하다는 둥 논지와 무관한 비아냥 댓글을 단다든지.... [80] 더 나아가 과학과 이성을 내세우는 무신론자 중에서도 단순히 무신론자 지식인들이 쌓아놓은 이미지에 편승하려 간판만 걸어놓는 경우도 있다. 가령 무신론자가 " 진화론으로 종교는 거짓임이 드러났다"고 주장하다가, 막상 자신은 중등 교육 과정에 나오는 유전적 부동이나 하디-바인베르크 법칙, 유전자 변이 메커니즘 등 생물학의 기본 개념에 대한 지식도 갖추지 못해서(...) 오히려 곤란에 처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는데, 이를 정말 이성에 근거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81] 단순히 안 믿는 사람들은 비종교인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한다. [82] 이는 대부분 현실 사회주의라는 특정 정치 체제하에서 자행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신론과 관계없는 교조주의 탓."이라고만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일련의 종교 탄압은 스탈린 시기 대숙청이나 대기근처럼 공산주의자들의 정치 경제관이라든지 혼란한 시대상 때문에 일시적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종교관에 근거하여 '전투적 무신론자 연맹' 같은 단체를 앞세워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반종교적 무신론은 제1인터내셔널 당시부터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만연한 경향이었기에 스페인의 CNT-FAI와 같은 아나키스트들에 의한 종교인 탄압과도 맥이 닿는다. 이것을 신을 안 믿는 것 빼면 천차만별인 무신론이라는 빅텐트 일반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지만, 무신론 중 특정 조류(마르크스-레닌, 바쿠닌 등의 무신론)와의 연관 관계까지 정치적 목적의 일탈 정도로 일축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기독교권의 반유대주의 역사를 두고 이것이 유신론 일반의 문제인지,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문제인지, 그렇다면 그들의 교의와 얼마나 연관성이 있는지 따질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83] 간혹 이를 부정하기도 하지만 이는 정치인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의 이름을 이용해 벌인 악행이 종교의 책임이라는 주장과 다를바가 없다. 탈레반이 비마얀 석불을 파괴한 테러는 탈레반의 문제지 무슬림의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중공은 무신론자라는 놈들이 부활 드립을 치고 있으니 무신론이라는 이름만 가져다 걸어둔 사례도 있는 게 아닌지 의문스러운 사례도 있다. [84] 사건이 벌어진 단체 《American Atheist》는 그래도 아직 잘 운영 중인 듯하다. [85] 경찰 조사 결과 동물 학대, 미성년자 성희롱 등의 전과가 있었다고 한다. [86]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국가가 종국적으로 없어질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아나키즘은 국가를 당장 없어져야 할 존재로 본다. [87] 종교 아나키즘을 제외한 대다수의 아나키즘은 신도 하나의 강제적인 권위이자 지배로 본다. [88] 주로 심각한 질병 등 목숨을 잃을 상황에서 많이 발생한다. [89] "형체라는 것은 신(神)의 바탕이고 신(神)이란 형체가 쓰이는 것이다. 신이 형체에 있는 것은 마치 날카로움이 칼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며, 칼이 없는데 날카로움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어찌 형체가 없는데 신이 존재하겠는가?" [90] Norenzayan & Gervais, 2013. [91] 특히 독실한 신자일수록,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신자일수록 난이도는 더 올라간다. [92] 일반적으로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간의 개종보다 토착 종교와 샤머니즘, 다른 계통의 종교인들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 개종하는 것이 훨씬 쉽다고 여겨진다. 권위에 복종할 것을 권유하는 교리가 많고 순교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 토착 종교와 비교해 순교까지 해 가며 널리 포교하고 구원받을 것을 강조하는 아브라함 계통의 특성상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가 토착 종교를 누르고 주류 종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로아스터교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지배 세력인 이슬람 제국의 통치하 크게 쇠퇴했고 그 자리는 현재 이란의 국교이자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인 이슬람교가 차지하고 있다. 지금은 불교 같은 도 계통의 종교 문화권인 동아시아는 워낙 세속주의가 강해 종교가 힘을 쓰기 어렵고, 인도는 이슬람교도가 많은 곳들은 이미 파키스탄이라는 다른 국가로 분리되었고 힌두교가 13억의 인굿발로 든든한 주류 종교로 자리 잡은 현재로서 다른 종교의 힘이 적으며, 기존에 토착 종교를 신봉하던 신대륙들은 대항해 시대 이후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포교해 이미 기독교로 개종시켰거나 기독교를 믿는 백인들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동남아시아는 국가 무신론이거나 불교가 동아시아보다 더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곳이라 남은 건 무신론자밖에 없다. 게다가 후진국도 아닌 선진국 기준으로 세대가 지날수록 샤머니즘 같은 토착 종교나 불교 같은 본고장에서 힘을 잃어가는 종교는 없어지거나 매우 크게 약화되는 데 비해 무신론자의 수는 계속 늘어난다. [93] 극단적 종교주의자 중에서 다른 종교인보다 무신론자를 더 혐오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신무신론자, 반신론자들은 아예 종교 자체를 몰아내자는 운동을 많이 하는 형편이니 유신론자 입장에서는 위협으로 느껴지기 쉽다. [94]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장편 소설로 주요 주제가 바로 무정부주의와 무신론에 대한 비판으로, 악령 또한 무정부주의와 무신론을 의미한다. [95] 무신론자들이 창설한 비정부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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