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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23:26:35

공의회

한자 公議會
그리스어 Σύνοδος
라틴어 Concilium
영어 Council/Synod

1. 개요2. 사도회의3. 지역 공의회4. 보편 공의회
4.1. 첫 일곱 보편 공의회4.2. 가톨릭에서 인정하는 보편 공의회
5. 정교회의 주요 공의회6. 창작물

1. 개요

기독교에서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모여 교리, 의식, 규범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교회 회의. 불교에서는 결집이 공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2. 사도회의

사도행전 15장에서 공의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안티오키아 지방에서 일어난 할례, 율법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성 바르나바와 성 바오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자신들이 하던 일에 대해 보고하고 할례와 율법 문제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여기서 베드로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주장으로 인해 할례를 하지 않고 다만 우상과 피를 멀리하자고 결의한다.

다만 이 사도회의는 엄밀한 의미의 보편공의회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현대의 보편공의회 넘버링에서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1대로 헤아리며, (사도행전 저자의 관점에 의하면 사도조차 아닌[1])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회의 결과를 발표하는 등 후대의 보편공의회와는 이질적이다.

아돌프 폰 하르낙, 베르너 큄멜, 레온하르트 고펠트, 귄터 보른캄, 한스 콘첼만, 위르겐 롤로프, 라이너 리스너는 사도회의가 기원후 48년에 일어났다고 보았다 (Harnack,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2; Kümmel, 신약정경개론; Goppelt, Die Apostolische Und Nachapostolische Zeit; Bornkamm, 바울; Conzelmann, 초대기독교역사; Roloff, Neues Testament). 반면에 페르디난트 한, 알프레드 줄, 필리프 필하우어, 빌리 마르크센, 빌헬름 슈네멜허는 사도회의가 기원후 43-44년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Hahn, Das Verständnis der Mission im Neuen Testament; Suhl, Paulus und seine Briefe; Vielhauer, Geschichte der urchristlichen Literatur; Marxen,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Schneemelcher, Das Urchristentum). 43-44년 지지자들의 근거로는 마르코 10:38-39과 행전 12:2가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예, 할 수 있읍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기는 할 것이다.
마르코 10:38-39 (공동번역)
우선 요한의 형 야고보를 잘라 죽였다.
행전 12:2 (공동번역)
마르코 10:38-39는 대 야고보와 사도 요한의 죽음을 암시하며, 행전 12:2는 야고보의 처형만을 밝힌다. 따라서 행전 12:2 전통이 야고보와 동시에 거행된 요한의 처형을 몰랐다는 근거로 "요한의 형"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음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야고보와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아그립바는 44년에 사망했다. 사도회의와 바울로의 여행 시작 간의 기간이 4년 이상일 수는 없으므로, 이 경우에 사도회의는 기원후 43-44년에 일어났다. 그러나 48년 지지자들의 근거로는 행전 12:2와 갈라디아 2:9가 존재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은총을 인정하고,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친교의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갈라디아 2:9 (공동번역 개정)
행전 12:2와 갈라디아 2:9의 사도회의 장면은 사도 요한이 죽지 않았음을 부각한다. 다만 갈라디아 2:9에서 언급된 요한의 경우, 편지 전체에서 사실상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요한 학파의 영향에 따른 후대의 삽입으로 볼 여지가 있다.

3. 지역 공의회

라틴어 Concilium provinciale
영어 Provincial council
2~3세기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벌어진 시대부터 지역별로 이루어진 주교들의 회의. 대표적으로 성경 정경 외경을 결정한 카르타고 공의회가 있다.

4. 보편 공의회

보편 공의회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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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니케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에페소 칼케돈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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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츠 피렌체 제5차 라테란
트리엔트 이아시 예루살렘 제1차 바티칸 제2차 바티칸

첫 일곱 보편 공의회
가톨릭에서만 인정한다.
정교회에서만 인정한다.
}}}}}}}}} ||
한자 世界公議會
그리스어 Οικουμενικές σύνοδοι
라틴어 Concilium Oecumenicum
영어 Ecumenical council
세계적인 규모로 교회에 적용되는 공의회. 세계 공의회라고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의를 재확인하고 불분명한 점을 분명하게 하여 이단을 정죄하고 교회의 4대 속성인 단일성, 보편성, 지성성(至聖性), 사도전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보편 공의회가 열리게 된다. 대표적으로 아래 일곱 차례 공의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있다.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다음의 조건을 만족하는 한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이 있을 수 없다.[2] 이를 무류성(無謬性)이라 한다.
각각의 주교들이 무류성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상호간에 또 베드로의 후계자와 친교의 유대를 보전하면서 신앙과 도덕의 사항들을 유권적으로 가르치는 주교들이 하나의 의견을 확정적으로 고수하여야 할 것으로 합의하는 때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류 없이 선포하는 것이다.[40] 그것은 이제 주교들이 세계 공의회에 모여서 보편 교회를 위하여 신앙과 도덕의 스승들이 되고 재판관들이 될 때에는 더욱 명백해지므로, 그들의 결정에 신앙의 순종으로 따라야 한다.[4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25항 참조.

다만 교회법에서는 무류성을 넘겨짚는 것도 경계하고 있으므로 주의.
③ 어떤 교리도 무류적으로 확정된 것임이 명백히 확증되지 아니하는 한 그러한 것으로 이해되지 아니한다.
교회법 제749조 3항.

또한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후계자, 즉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이 보편 공의회로 확인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보편 공의회는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고 가톨릭에서는 해석한다.
주교단과 그 단장

22. 주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거룩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하나의 사도단을 이루듯이, 비슷한 이치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도 서로 결합되어 있다. 전 세계에 세워진 주교들이 일치와 사랑과 평화의 유대로 서로 교류하고 교황과 친교를 이루던 매우 오랜 옛 규율과[23] 공의회 모임 자체가[24] 주교단의 단체적 본질과 특성을 드러내 준다. 공의회를 통하여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든 공동으로 결정하고[25] 많은 이의 의견을 숙고하여 판단한다.[26] 여러 세기의 흐름 속에서 개최된 세계 공의회들이 그 단체성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 뽑힌 이를 대사제 직무로 올리는 데에 참여하도록 여러 주교들을 초대하는 오랜 권고와 관습 자체가 이미 그 단체성을 가리키고 있다. 주교는 누구나 성사적 축성의 힘으로 또 주교단의 단장과 그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로 주교단의 구성원이 된다.

그러나 주교들의 단체인 주교단은 동시에 그 단장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더불어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목자들이든 신자들이든 모든 이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은 온전히 유지된다. 교황은 자기 임무의 힘으로 곧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온 교회의 목자로서 교회에 대하여 완전한 최고의 보편 권력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주교단은 교도권과 사목 통치에서 사도단을 계승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사도단이 계속하여 존속하며, 그 단장인 교황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력의 주체로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단장 없이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며,[27] 또한 그 권력은 오로지 교황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행사될 수 있다. 주님께서 한 사람 시몬을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으며(마태 16,18-19 참조), 그를 당신의 온 양 떼의 목자로 세우셨다(요한 21,15 이하 참조). 그러나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저 임무는(마태 16,19 참조) 그 단장과 결합되어 있는 사도단에게도 부여되었음이 분명하다(마태 18,18; 28,16-20 참조).[28] 이 사도단은 여러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하느님 백성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며, 또한 한 단장 아래 모여 있으므로 그리스도 양 떼의 단일성을 드러낸다. 주교단 안에서 주교들은 그 단장의 수위권과 최고 권위를 충실히 존중하면서, 교회의 유기적 조직과 화합을 끊임없이 북돋아 주시는 성령에 따라, 자기 신자들은 물론 온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고유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 주교단이 지닌, 보편 교회에 대한 최고 권력은 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된다. 그러나 베드로의 후계자가 세계 공의회로 확인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계 공의회는 결코 인정되지 아니한다.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재하며 확인하는 것은 교황의 특권이다.[29]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주교들은 교황과 함께 그 동일한 합의체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나, 그것이 진정한 합의체적 행동이 되려면, 주교단의 단장이 주교들에게 합의체적 행동을 요청하거나 적어도 흩어져 있는 주교들의 일치된 행동을 승인하거나 자유로이 수락하여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22항.

4.1. 첫 일곱 보편 공의회

가톨릭 정교회가 모두 인정하는 7차례의 보편 공의회.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처음 보편 공의회를 소집한 이후로,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소집하였다.
|| || 연도 || 명칭 || 소집자 ||<width=400> 주요 사항 ||
1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누스 1세 아리우스파 단죄, 니케아 신경 성립.
2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테오도시우스 1세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성립.
3 431년 에페소 공의회 테오도시우스 2세 네스토리우스파 단죄, 테오토코스( 하느님의 어머니) 논쟁 정리.
4 451년 칼케돈 공의회 아일리아 풀케리아 단성론 단죄. 그 외에도 제28조를 통해, 황제와 원로원이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새로운 로마'이기에 새 로마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로마에 이어 서열 2위로 격상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에게 로마 주교 다음가는 권위를 부여할 것이 논의되었으나, 이는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5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삼장 문제 토의, 칼케돈 공의회 교리 재확인.
6 680년
~
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콘스탄티노스 4세 단의론 폐기.
7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리니 성상 파괴주의 배척.

7개 공의회는 기독교의 교파나 기독교 계열의 종교마다 인정 여부가 각기 다르다.

4.2. 가톨릭에서 인정하는 보편 공의회

동서 대분열 이전에 최후로 개최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제외하면 모두 가톨릭 세계에 국한된 공의회들이며 교황이 소집하였다.
|| || 연도 || 명칭 || 소집자 ||<width=400> 주요 사항 ||
8 869년
~
870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황제 바실리오스 1세
교황 하드리아노 2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 추방. 테오도라 이그나티오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라가 물러나고 미하일 3세가 단독 황제가 되자, 테오도라의 오빠이자 실권자인 바르다스 이그나티오스를 추방하고 포티오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동방교회에 개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위는 바실리오스 1세에게 넘어가고, 바실리오스 1세는 서방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꾀하기 위해 포티오스를 추방하고 이그나티오스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불가리아 교회가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중 어디에 속하는지의 문제로 인해 서방교회와의 관계 개선은 물거품이 되었고, 10년 후 포티오스는 다시 총대주교로 복직한다. 포티오스 분열은 동서 교회 갈등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9 1123년 제1차 라테란 공의회 갈리스토 2세 최초로 서유럽에서 개최된 공의회.
10 1139년 제2차 라테란 공의회 인노첸시오 2세 대립교황 및 이단들에 관한 조항 추가, 페트로브루스파 단죄, 헨리코파 단죄.
11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 알렉산데르 3세 알비파 단죄, 교황 선거법.
12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인노첸시오 3세 왈도파, 카타리파 배척. 성체변화 정의.
13 1245년 제1차 리옹 공의회 인노첸시오 4세 신성 로마 제국 프리드리히 2세 파문.
14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 그레고리오 10세 콘클라베 제도화, 동서 교회 합일. 동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후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가 참가하여 동방교회는 신경의 '또한 성자로부터' 문구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의 신앙의 전통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동방교회의 신도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큰 소용이 없었다.
15 1311년
~
1312년
빈 공의회 클레멘스 5세 성전 기사단 해산.
16 1414년
~
1418년
콘스탄츠 공의회 그레고리오 12세
마르티노 5세
대립교황 폐위, 존 위클리프, 얀 후스 화형.
17 1431년
~
1445년
바젤 공의회
피렌체 공의회
에우제니오 4세
니콜라오 5세
동서 교회 합일 시도, 그러나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아르메니아, 시리아, 마론파와의 합일 모색.
18 1512년
~
1517년
제5차 라테란 공의회 율리오 2세
레오 10세
교회 개혁 시도, 큰 소득 없음, 종교개혁 저지 실패.
19 1545년
~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 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비오 4세
개신교 이단 단죄, 가톨릭 교의 재확인.
20 1869년
~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비오 9세 교황무류성 교의 명시
21 1962년
~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요한 23세
바오로 6세
교회의 현대화 개혁 등.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5. 정교회의 주요 공의회

정교회에서는 동서 대분열 이전 일곱 차례의 공의회만을 '세계' 공의회로서 인정한다. 이는 가톨릭 세계에서 개최된 공의회들뿐 아니라 동방 정교회 세계에서 개최된 공의회들 역시 동일하며, 한국정교회대교구의 설명에 따르면[12] 정교회는 각 교파 간의 화합과 통합을 강조하는 에큐메니컬적인 존중의 차원에서 동방 정교회 세계에 국한된 아래 공의회들을 '보편 공의회'로 부르지 않는다. 또한 이들 공의회에서 채택된 문서들은 정교회의 교리가 맞지만, 보편 공의회의 권위에 종속된다고 설명한다.
|| 연도 || 명칭 || 소집자 ||<width=400> 주요 사항 ||
692년 퀴니섹스툼 공의회 유스티니아누스 2세 명목상 제5차, 제6차 공의회에서 해결되지 못한 교리 문제들을 정리하기 위한 공의회.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교황 세르지오 1세에게 여기에서 결의된 102개조를 승인할 것을 강요했으나 교황은 거부했다. 이에 황제는 교황을 체포하려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오늘날 이 공의회는 정교회에서는 제5차, 제6차 공의회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고, 가톨릭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879년
~
880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바실리오스 1세 위에서 가톨릭교회가 인정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10년 후에 개최. 이그나티오스의 사후 포티오스를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인정. 또한 서방 교회에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또한 성자로부터'를 넣은 것을 규탄( 필리오케 문제).
1341년
~
1351년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요안니스 6세 헤시카즘 인정.
1642년 이아시 시노드 파르세니오스 1세[13] 칼뱅주의 단죄.
1672년 예루살렘 시노드 도시테오스 2세[14] 루카리오스의 칼뱅주의 교리 접목 시도 단죄, 정교회 신앙고백 채택.

6. 창작물


[1] 루가복음서-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로(광의의 사도 개념 선호. 바울로 자신 포함.)와는 달리 '사도'라는 말을 최협의의 의미(오직 12사도. 바울로 제외.)로 사용한다. 예외적으로 사도행전 14장 4절 및 14절에선 바울로를 apostolos(사도)라고 부르지만, 여기선 말 그대로 '파견된 자(apostolos)'라는 의미일 뿐, 본격적인 직무명으로서의 사도(apostolos)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울로가 루가에게는 여느 사도들처럼 진짜배기 사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는 열둘이니,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부터 예수 부활까지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들이다(1,21-22 참조). 루가는 사도 칭호를 이 열두 사람에게 국한하기 때문에, 바울로에게는 사도 칭호 부여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루가가 바울로와 바르나바를 사도로 칭하는 경우가 한 번 있는데(14,4.14), 사도 칭호를 좀 헐값에 내주었다고 하겠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사도들, 즉 교회가 선교 과업을 위해 가려내어 파견한 "사자들"(13,2-3),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들의 사자들이다.』(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467-468p) [2] 사소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오류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거나 신자를 잘못 인도할 정도로 크지 않다는 말이다. [40]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아드님」, 3, Dz 1792(3011); 교회에 관한 제1의안에 붙여진 주해(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의 말 인용): Mansi 51, 579C; 또한 제2헌장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수정안과 더불어 클로이트겐의 해설: Mansi 53, 313AB; 비오 9세, 교서 Tuas libenter, Dz 1683(2879) 참조. [41] 구교회법 제1322-1323조 참조. [23]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5,24,10, 『그리스 기독교 저술가 총서』(GCS), 2,1, 495; SC, Bardy 편, 2, 69; 에우세비우스의 저술에 나오는 디오니시오, 「교회사」, 7,5,2, GCS 2,2, 638-639, Bardy 편, 2, 168-169 참조. [24] 옛 공의회들에 관하여: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5,23-24, GCS, 2,1, 488 이하, Bardy 편, 2, 66 이하. 여러 곳; 니케아 공의회, 제5조, 「세계 공의회 결의문집」(COD), 7 참조. [25] 테르툴리아누스, 「금식」, 13, PL 2,972B; CSEL 20, 292면, 13-16행 참조. [26] 성 치프리아노, 「서간집」, 56,3, Hartel, 3 B, 650; Bardy 편, 2, 154 참조. [27]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치넬리 공식 보고서, 『공의회 교령집』(Mansi), 52,1109C 참조. [28]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제2초안, 제4장, Mansi 53,310; 수정 초안에 대한 클로이트겐 보고서 Mansi, 53,321B-322B; 치넬리 선언 Mansi 52,1110A 참조; 또한 성 대 레오, 「설교집」, 4,3, PL 54,151A를 보라. [29] 구교회법 제222조; 제227조 참조. [12] 신학, 한국정교회대교구, 2016년 9월 14일 열람. [13] 당시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 [14] 당시 예루살렘 정교회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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