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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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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
August II
파일:Augustus II the Strong.jpg
출생 1670년 5월 12일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사망 1733년 2월 1일 (향년 62세)
폴란드-리투아니아 바르샤바
재위기간 작센 선제후국 선제후
1694년 4월 27일 ~ 1733년 2월 1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697년 9월 15일 ~ 1706년 9월 24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복위)
1709년 10월 20일 ~ 1733년 2월 1일
서명
파일:아우구스트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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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3세
어머니 덴마크의 안나 소피 공주
배우자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1693년 결혼 / 1727년 사망)
자녀 아우구스트 3세[1], 요한 게오르크 폰 작센(사생아), 모리스 드 삭스(사생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루토프스키(사생아), 마리아 안나 카타리나 루토프스카(사생아), 안나 카롤리나 오르젤스카(사생아)
형제자매 요한 게오르크 4세
가문 베틴 가문
종교 기독교 ( 루터교회 로마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작센 선제후 즉위2.3.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선출2.4. 작센 선제후로서의 치세2.5.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서의 치세2.6. 사망
3. 가족 관계
3.1. 조상3.2. 자녀3.3. 내연녀와 사생아들3.4. 왕비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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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 겸 작센 선제후로, 강건왕 아우구스트 2세(der Starke)[2]라고 불렸다. 작센 선제후로서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670년 5월 12일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드레스덴에서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3세와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국왕 프레데리크 3세의 딸인 안나 소피의 두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680년까지 조부 요한 게오르크 2세의 별궁인 프레틴의 리히텐부르크 성에 지내면서 웅장하고 화려한 궁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여러 우수한 교사들로부터 다방면에서 교육받았다. 요한 에른스트 폰 크노흐로부터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익혔고, 독일의 작각가이자 음악 이론가인 크리스토프 베른하르트로부터 음악을 교육받았으며, 독일의 건축가이자 요새 전문가 울프 카스파 클렝겔로부터 군사 업무, 요새 건설 및 수학을 익혔다. 그 외에도 신학, 역사, 유럽의 대표적인 가문들에 대한 교육 등을 받았다.

어린 시절엔 형 요한 게오르크 4세와 함께 자랐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점점 빈번해지자 15살부터는 떨어져 지냈고,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폰 학스트하우젠(Christian August von Haxthausen)을 가정교사로 삼았다. 훗날 학스하우젠은 아우구스트 2세 치세 때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1686년 시녀 마리 엘리자베트 폰 브룩도르프와 연애했다. 마리는 이 사건이 발각된 직후 궁정에서 일시적으로 추방되었다가 요한 게오르크 3세의 용서를 받고 귀환할 수 있었다. 그해 가을 어머니와 함께 덴마크 국왕이자 외삼촌인 크리스티안 5세를 방문하기 위한 대규모 여행을 떠났다. 그는 마이센 백작으로서 가명을 쓰고 드레스덴에서 프랑크푸르트, 스트라스부르, 파리, 스페인, 포르투갈, 잉글랜드,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뮌헨, 인스브루크, 밀라노, 베네치아를 3년간 여행하고 1689년 4월 28일에 드레스덴으로 귀환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타국의 건축과 문화를 접했고, 외국어에 대한 지식을 늘렸으며, 궁중 예절과 외교 기술을 배웠다.

1690년 20세의 나이에 천연두에 걸렸지만 건강한 체질과 성공적인 치료 덕분에 빨리 회복되었다. 이후 3년간 팔츠 계승 전쟁에 참전해 라인 전선에서 활동했고, 으로 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 호프부르크 궁정에 머물렀으며, 1695년 대튀르크 전쟁을 진두지휘한 레오폴트 1세의 원정에 참가했다. 1693년 1월 20일, 바이로이트에서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와 결혼했다.

2.2. 작센 선제후 즉위

1694년 4월 27일, 형 요한 게오르크 4세가 정부 막달레나 지빌라 폰 나이츠슈츠의 임종을 지켜보다가 감염된 천연두로 사망했다. 요한 게오르크 4세는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로 즉위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대튀르크 전쟁에 작센군을 이끌고 참전했으며,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1696년 여름, 그는 38,000명의 제국군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 도나우강 요충지인 테메슈바르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던 중 파디샤 무스타파 2세가 60,0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접근해오자, 그는 8월 26일에 베가 강변에서 이들과 맞붙었으나 전략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 후 그는 제국군 총사령관 직위에서 사임했고, 사부아 공자 외젠이 그를 대신해 총사령관을 맡았다.

2.3.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선출

1696년 6월 1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 도전하기로 결정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에 귀속시키고 싶었던 레오폴트 1세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치료를 명목으로 근처의 바덴으로 간 뒤 라프의 주교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앞에서 극비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유대인 금융업자 이사카르 베렌드 레만(Issachar Berend Lehmann)과 삼손 베르트하이머(Samson Wertheimer)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려 폴란드 대귀족들에게 뇌물 공세를 퍼부었다. 여기에 루스 차르국 표트르 1세에게 자신을 지지해주면 루스 차르국과 손잡고 스웨덴을 협공하겠다고 제안했고, 표트르 1세는 이에 따라 폴란드 귀족들에게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세우라고 종용했으며, 미하일 그리고리예비치 로모다노프스키에게 군단을 이끌고 리투아니아-루스 차르국 국경지대에 배치시키게 해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을 압박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은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장남 야쿠프 루드비크 소비에스키, 콩티 공작 프랑수아 루이 드 부르봉, 그리고 작센 공작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를 유력 후보로서 고려했다. 1696년 6월 17일 선거 결과, 콩티 공작 루이 드 부르봉이 13,641표를 받으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는 듯 했다. 그러나 콩티 공작이 프랑스 정부의 소극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제때 가지 못하는 사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8월 2일에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폴란드 귀족들을 포섭했다. 크라쿠프 정문에 이르렀을 때 콩티 공작의 지지자인 프란치셰크 비엘로폴스키에 의해 입장이 거부되자, 막대한 뇌물 공세를 퍼부어 성문을 열었다.

폴란드 세임 법에 따르면, 대관식은 바벨 성 금고에 보관된 휘장을 통해서만 거행될 수 있었다. 금고 문은 8개의 자물쇠로 잠겨 있었는데, 상원의원이자 크라쿠프, 포즈난, 칼리시, 빌뉴스, 트라카이, 산도미에시 주지사를 각각 맡은 인사 6명, 크라쿠프 성주, 그리고 왕실 재무관이 각각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이중 6명은 콩티 공작 편이었기 때문에 자물쇠를 해제할 수 없었으며, 억지로 열려 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이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금고 벽에 구멍을 뚫은 뒤 문을 그대로 남겨두고 휘장을 빼냈다. 1697년 9월 15일, 그는 모든 귀족의 특권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하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폴란드 추기경 미하우 스테판 라지요브스키가 대관식을 거행하길 거부했기 때문에, 쿠와이 주교 스타니스와프 동브로스키가 그를 대신해 바벨 대성당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새 국왕 아우구스트 2세의 대관식을 주관했다. 다만 아내 크리스티아네는 남편의 즉위로 형식상 폴란드의 왕비가 되었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남편의 권유를 거절하고 평생 폴란드 땅에 발을 딛지 않았으며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697년 9월 말, 콩티 공작이 프랑스 제독 장 바르가 지휘하는 6척의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그단스크 항구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9일 아우구스트 2세를 추종하는 군대가 접근해오자 올리바에 있는 본부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폴란드 귀족들은 절차상 문제를 제기하며 아우구스트 2세를 국왕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한 폴란드 추기경 미하우 스테판 라지요브스키를 지지했다. 이에 아우구스트 2세는 1699년 세임에서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하겠다는 맹세를 재차 하고 1,200명의 경비병을 제외한 모든 작센군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철수하겠다고 제안했고, 폴란드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여 그를 자국의 국왕으로 승인했다.

2.4. 작센 선제후로서의 치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때, 작센 귀족들은 단순히 형식적으로 개종했을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루터교회 신자로 남겠다는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은밀히 작센에 오랫동안 확립된 귀족들의 영향력을 꺾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706년 총신들로 구성된 비밀 내각을 구성해 중앙 정부의 권력 강화를 꾀했고, 작센 신분제 의회에서 활동하는 신흥 부르주아를 대거 끌어들어 귀족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직접세를 승인할 권한이 있는 의회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하기를 꾀해 간접세 창설을 시도했다. 이에 대한 저항이 강했지만, 그는 1703년 일반 소비세 창설에 성공했다. 여기에 국가 재정을 감사하고 규제하기 위해 1707년 모든 국고에 대한 중앙 감사 기관인 고위 회계청을 신설했다.

1712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바르샤바 대사로서 자신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되는 데 기여했고, 기병대장이자 전쟁장관으로서도 활약한 야코프 하인리히 폰 플레밍을 야전 원수이자 추밀원 의장으로 선임해, 병권과 통치권을 사실상 위임했다. 플레밍은 1728년에 사망할 때까지 작센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정계에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정부에 고용된 공무원들의 신뢰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고, 의회와 정부의 재정을 분리했다.

또한 독일의 중상주의 사상가 파울 야코브 마페르거를 경제장관에 선임해 경제 정책을 수립하게 했다. 작센은 마페르거의 주도하에 중상주의 원칙에 따라 수출 지향적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그의 치세 동안 작센에는 마이센 도자기 공장, 올베른하우어 무기 공장을 비롯해 거울, 총, 천, 금 및 은접시, 다마스크 천, 페인트 및 백지 등 총 26개의 제조소가 설립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경제 발전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상업 대학을 설립하려 했지만 그가 사망한 지 2년 뒤에야 대학이 설립되었다. 또한 1698년에 라이프치히에 독일 최초의 국영 은행을 설립했고, 1715년에 국영 복권을 창설했으며, 1722년 작센 우체국 체계가 개편되었다. 이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 내 영방국가들 중 가장 앞선 정책이었다.

1717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아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세습시키기 위해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임을 선포했다. 이에 여러 작센 귀족이 분노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부르주아 세력의 호응에 힘입어 진압에 성공했다. 이리하여 작센 선제후국은 루터교회를 국교로 정하면서도 정작 선제후는 가톨릭 신자인 기묘한 상황이 굳어졌다. 당시 작센은 독일 개신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작센 선제후는 개신교 선제후들 중 상석으로 제국의회에서 개신교 진영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이 개종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가톨릭 신자가 제국의 개신교도를 대표했다. 이후 베틴 가문의 알브레히트계는 에른스트계와 달리 21세기 현재까지 가톨릭을 믿고 있다.

1724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기존의 작센 선거 헌법을 대체할 새로운 법전인 코덱스 아우구스테우스(Codex Augusteus)를 반포했다. 여기에 1728년 새로운 작센 의회 규정을 반포해 작센 귀족들의 권리를 더욱 제한했으며, 또한 자신이 작센에 부재하는 동안 작센 출신이 아닌 인사를 작센 총독으로 세우고 자신의 총신들이 그를 보좌하게 해, 작센 귀족들이 자기가 없는 틈을 타 세력을 키울 여지를 없앴다. 한편, 그는 1696년 유대인으로서 궁정 재무관에 선임된 이사카르 베렌드 레만의 요청에 따라 1430년 추방된 이래 작센에 발을 들이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작센에 돌아와서 공동체를 결성하도록 했다.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드레스덴은 그의 치세 동안 북유럽의 문화와 예술 중심지로 육성되었다. 츠빙거 궁전, 필니츠 궁전, 모리츠부르크 궁전, 후베르투스부르크 궁전 등 오늘날 드레스덴 및 근교의 관광지 대부분이 그의 치세에 조성되었고, 1727년에 세계 최초의 공공 박물관[3]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 전까지의 박물관은 소수의 초청자들에게만 공개되는 개념이었기에 의의가 크다. 그리고 아우구스트 2세의 가장 큰 업적은 유럽의 도자기 기술의 발달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일본과 중국산 도자기에 심취하였으며,[4] 그가 수집한 컬렉션이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 주최 '왕이 사랑한 보물' 특별전으로 대한민국에서 공개된 바 있다. 또한 수입 도자기를 모방하여 백자의 자체 생산에도 노력하여 유명한 마이센 자기의 기틀을 닦았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호화로운 궁중 무도회, 마스체라를 쓴 베네치아식 발리 , 호화로운 궁정 모임, 게임, 정원 축제를 후원했다. 그의 궁정은 유럽 전역에서 사치스러운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드레스덴 에서 여우 647마리, 산토끼 533마리, 오소리 34 마리, 살쾡이 21마리 를 던져 죽이는 유명한 동물 던지기 대회를 열었다. 이명인 강건왕에 알맞게 힘이 장사였던 그는 한 손가락으로 물매 끝을 잡고 다른 쪽 끝에는 그의 궁정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을 잡음으로써 용력을 과시했다.

2.4.1. 마이센 도자기

위에 언급한 것처럼 아우구스트 2세는 중국, 일본산 청화백자에 심취해 거액을 들여 백자를 수집하다가, 작센에서도 백자를 만들어볼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화학자 에렌프리트 폰 치른하우스(Ehrenfried Walther von Tschirnhauß)에게 거액의 자금을 주며 백자 연구소를 만들어 연구하였으나 처음에는 성과가 나지 않았다.

백자 제조에 돌파구가 열린 것은 요한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의 합류 덕분이었다. 만 18세 청년으로 자칭 연금술사였던 뵈트거는 프로이센에서 연금술 행각을 하다가 프리드리히 1세에게 감금당해 강제로 금을 만들라는 처지에 처하게 되자, 이대로 있다간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판단하여 탈옥, 드레스덴으로 도피하게 된다. 뵈트거의 화학 능력을 알게 된 아우구스트 2세는 1707년 뵈트거를 치른하우스의 조수로 삼아 백자에 대해 함께 연구하게 되고, 1708년 치른하우스가 사망한 후 뵈트거가 수석 연구자가 된다. 그러던 중 뵈트거는 작센 영토 내에서 고령토 산지를 찾게 되고, 자기 생산에 필수적인 고열 가마의 구조도 터득하게 된다.[5] 1710년 드디어 유럽 최초의 경질 백자인 마이센 도자기의 생산에 성공한다. 하지만 과로와 정신적인 압박에 시달리던 뵈트거도 백자 생산에 성공하자 긴장이 풀렸는지 1719년 36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이후 마이센 도자기는 1722년부터 정식으로 상품화되어 출시되며 작센 선제후국의 문장에 들어있는 '교차된 검'을 상표로 사용할 권리를 받게 된다.

2.5.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서의 치세

아우구스트 2세는 스웨덴령이 된 리보니아를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되돌려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신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절대군주제를 도입하려 했다.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되기 전에 표트르 1세가 자신이 국왕으로 선출되는 것을 도와주는 대가로 스웨덴을 협공하겠다고 제의했다. 이후 국왕이 된 그는 1698년 라와 루스카에서 표트르 1세와 비밀 회담을 가지고 스웨덴에 대한 구체적인 협공 계획을 논의했다. 그러면서 폴란드 귀족들이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킬 경우 표트르 1세가 진압을 도와주고, 반대로 루스 차르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아우구스트 2세가 진압을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1698년 3월 24일에는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크리스티안 5세와 상호 방위 동맹을 맺고, 상호 지원을 위해 8,000명의 군인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크리스티안 5세가 얼마 후 사망하자, 아우구스트 2세는 1699년 9월 25일 덴마크-노르웨이의 새 국왕 프레데리크 4세와 만나 스웨덴에 대한 공격 및 방어 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1699년 11월 11일에는 표트르 1세와 함께 스웨덴에 대한 공격 및 방어 동맹을 맺었다.

1699년 6월, 아우구스트 2세는 피츠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만나 150,000 탈러를 받는 대가로 브란덴부르크군 엘빙을 점령하고 폴란드가 이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 브란덴부르크군은 이 합의에 따라 도시를 점령하려고 2차례 시도해 두번째에 성공했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이 대거 반발하자, 그는 재차 프리드리히 3세와 협상한 끝에 1699년 12월 17일에 300,000탈러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 넘겨주는 대가로 엘빙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뒤이은 대북방전쟁으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그 돈을 지불하지 못하게 되자, 브란덴부르크군은 1703년 엘빙의 시골 지역을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1700년, 아우구스트 2세는 세임의 승인을 받고 루스 차르국, 덴마크와 함께 스웨덴에 선전포고하고 일제히 공격했다. 루스군 잉에르만란드 핀란드로 진군했고, 덴마크군은 스코네로 진군했으며, 작센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리보니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스웨덴 국왕 칼 12세는 먼저 잉글랜드 해군의 도움을 받아 코펜하겐 북부에 기습 상륙해 덴마크군을 격파하고 코펜하겐을 포위하여 덴마크를 이탈시켰다. 뒤이어 발트해를 가로질러 에스토니아 페르나우에 상륙한 후 현지 수비대와 합세한 뒤 나르바 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루스군을 궤멸시켰다.

그렇게 덴마크와 루스 차르국을 잠잠하게 만든 뒤, 칼 12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향해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먼저 리보니아의 중심지 리가를 포위한 작센군을 격파했다. 뒤이어 1701년 7월 드비나 강변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상대로 승리한 뒤 리투아니아로 진입했다. 당시 리투아니아에서는 리투아니아 정계를 좌지우지하던 사피에하 가문의 전횡에 분노한 리투아니아 소귀족들이 내전을 일으켰다. 이들은 1700년 11월 18일 빌뉴스 인근 올키에니키 전투에서 사피에하 가문 군대를 격파하고 사피에하 가문의 영지를 약탈했다. 이에 리투아니아의 대원수 카지미에시 얀 사피에하와 추종자들은 칼 1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칼 12세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아우구스트 2세 폐위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해 동의를 얻었다.

아우구스트 2세는 이에 대응해 1701년 2월 말 비르제에서 표트르 1세와 만난 뒤 며칠간 술을 마시고 대포 사격 대회를 벌였다. 대회 결과는 아우구스트 2세의 승리로 끝났고, 두 사람은 동맹을 독자적으로 탈퇴하지 않고 스웨덴과 단독 평화 협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표트르 1세는 아우구스트 2세에게 상당한 양의 금을 제공하고 8,000명의 루스 정예병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는 표트르 1세가 제공한 금을 사용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스웨덴과의 전쟁을 지속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듯 스웨덴과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는 1701년 1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1657년까지 폴란드 국왕의 명목상 봉신이었던 프로이센 공국을 독립 왕국인 프로이센 왕국으로 개편하고 스스로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를 칭했을 때 축하 사절을 보냈다.

1702년 7월 19일, 칼 12세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클리슈프 전투에서 폴란드-작센 연합군을 궤멸시켰다. 뒤이은 1703년 5월 2일 폴투스크 전투에서도 스웨덴군이 압승을 거뒀다. 스웨덴군은 여세를 이어가 바르샤바, 포즈난, 크라쿠프를 포함한 폴란드의 중부 지역을 점령했다. 1703년 6월 8일, 아우구스트 2세는 루블린에서 특별 세임을 소집해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의 군사적 무능으로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맹비난에 직면했다. 급기야 전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장남이며 슐레지엔의 올리바로 망명가 있었던 야쿠프 루도비크 소비에스키가 칼 12세와 합류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려 하자, 작센군을 파견해 브레슬라우에서 야쿠프를 생포한 뒤 플라센부르크와 쾨니히슈타인에 잇따라 감금시켰다. 야쿠프는 1706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 더 이상 도전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고 풀려났다.

1703년 10월, 아우구스트 2세는 표트르 1세와 또다른 협약을 맺고 30만 루블과 12,000명의 루스 보조군을 지원받았다. 전체 거래는 비밀로 유지되었으며, 보조금은 보증 및 담보로 보장된 6% 대출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1704년 1월, 아우구스트 2세에 반대하는 폴란드 귀족들이 바르샤바에서 무장 연합을 결성하고 세임을 개최한 뒤 아우구스트 2세의 폐위를 선언했다. 칼 12세는 이를 틈타 포즈난의 총독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제안했고, 귀족들은 바르샤바 인근에서 경비를 명목삼아 선거장을 포위한 스웨덴군의 압력을 받으며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의 왕위 등극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후 포즈난 주교 미코와이 시비엥치키의 주관하에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에 아우구스트 2세는 1704년 1월 29일 추종자들을 모아 산도미에시 연맹을 결성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신민들에게 스웨덴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했고, 칼 12세가 다른 곳에 간 틈을 타 8월 2일에 바르샤바를 일시적으로 탈환하고 미코와이 시비엥치키를 체포해 작센의 바우첸에 감금시켰다. 그러나 1704년 10월 칼 12세가 바르샤바로 재차 진군하자 작센으로 철수했다. 1705년 폴란드로 돌아온 뒤 그니에즈노에서 세임을 열어 상원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706년 2월 3일 프라우슈타트 전투에서 작센-루스 연합군 20,000명이 스웨덴군 9,400명을 상대로 맞붙었다가 적병 1,500명을 사상시키는 동안 15,000명이 죽거나 사로잡히는 처참한 패배를 당했고, 칼 12세는 여세를 이어가 작센으로 진격해 드레스덴을 위협했다.

이젠 스웨덴군이 작센마저 석권하려 하자, 아우구스트 2세는 어쩔 수 없이 1706년 9월 알트란슈타트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포기하겠다는 비밀 협약을 칼 12세와 맺었다. 하지만 당시 그는 루스 사령관 알렉산드르 다닐로비치 멘시코프와 루스군 9,000명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감히 드러낼 수 없었다. 그해 10월 29일, 칼리슈 전투에서 루스군-아우구스트 2세 연합군이 스웨덴-스타니스와프 1세 동맹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칼 12세는 알트란슈타트 협약을 폭로했고, 루스군은 아우구스트 2세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본국으로 철수했다. 당초 협약을 파기하려 했던 아우구스트 2세는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작센으로 철수했고, 1,800명의 스웨덴 포로를 돌려보냈다.

칼 12세는 이후에도 1년간 작센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고, 아우구스트 2세는 이에 대해 항의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는 관심을 돌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해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 가담해 릴 공방전에 참전했다. 그러던 1709년 7월 8일, 스웨덴군이 폴타바 전투에서 표트르 1세에게 참패했고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급히 작센으로 돌아온 뒤 작센군을 이끌고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돌아와서 스타니스와프 1세를 바르샤바에서 축출하고 왕위를 되찾았다. 그해 10월 20일 토룬에서 표트르 1세와 동맹을 맺고 그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여러 이권을 넘기기로 합의했다. 1711년 11월 18일에는 스웨덴령 포메른 분할에 대해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프레데리크 4세와 합의를 맺었고, 작센군 수장으로서 포메른을 침공해 전역을 장악했다. 1713년에 얀 스타니스와프 야브워노프스키가 오스만 제국- 크림 칸국을 끌여들여 자신을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미자, 그를 전격 체포한 뒤 쾨니히슈타인 요새에 가두게 했다.

그러나 스타니스와프 1세를 지지하는 자들은 여전히 강고했고, 친 루스 파벌의 위세가 갈수록 강해져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작센군을 대거 끌어들였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절대군주제를 도입하려는 시도로 간주되어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715년, 귀족들은 타르노그로드 연맹을 결성한 뒤 작센군 철수를 요구했다. 그는 1716년 8월 루블린에서 귀족들과 타협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그해 10월 그단스크에서 표트르 1세와 만나 폴란드 귀족들과의 분쟁에서 루스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표트르 1세는 루스군을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장기 주둔시키겠다고 제안했고, 아우구스트 2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후 표트르 1세는 그레고리 표도로비치 돌고루코프를 사절로 파견해 아우구스트 2세와 폴란드 귀족들간의 중재 역할을 맡게 했다. 루스군의 압력에 직면한 귀족들은 1716년 11월 6일 바르샤바에서 아우구스트 2세와 협정을 맺었고, 1717년 2월 1일에 열린 세임은 이를 통과시켰다. 협정에 따르면, 작센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철수하되 야전 원수의 군사 동원 및 전쟁 발동권을 제한하고, 군대 숫자를 24,000명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1719년, 아우구스트 2세는 갈수록 강해지는 루스 차르국의 영향력 때문에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정치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것에 견디지 못하고 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와 만나 영국, 오스트리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반(反) 루스 차르국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1720년에 열린 두 차례의 세임에서 아우구스트 2세의 계획이 루스 차르국과 프로이센의 사주를 받은 귀족들의 반대로 인해 좌초되면서 무산되었다. 이에 깊이 상심한 그는 "폴란드를 팔아버리겠다!"라고 공공연히 외쳤고, 재무관 레만과 마이어를 여러 열강에 보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하는 것을 논의하게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24년 7월 16일, 토룬에서 개신교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예수회가 설립한 대학을 파괴하고 에배당과 성화를 모독했다. 이에 법원은 해당 시의 개신교 시장과 사건 관계자 10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아우구스트 2세는 재판 중에 고의로 반 개신교 감정을 품은 군중을 선동했고, 가혹한 선고에 분노한 이웃 국가들이 자신이 절대군주제를 도입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기를 바라면서 사형수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1729년, 드레스덴에 대총사 중대를 설립해 아우구스트 2세가 수장이 되었고, 알렉산드르 야쿠브 루보미르스키를 사령관으로 선임한 뒤 1730년에 바르샤바로 옮겼다. 이 부대를 설립한 목적은 베틴 가문에 충성하는 장교를 양성하는 것이었지만, 그가 사망한 직후인 1733년에 해체되었다. 1730년 6월, 그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함께 묄베르크 인근의 군대 사열식을 참관한 뒤 상호 우호 협약을 맺었다. 1732년 9월 13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양국간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아우구스트 2세 사후에 베틴 가문과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서 배제하고 포르투갈 왕자 마누엘을 새 국왕으로 선출하기로 합의하자, 폴란드 추기경 테오도로 포토츠키는 그해 11월 23일 오스트리아와 동맹 협약을 체결해 혹여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협공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려 했다.

2.6. 사망

1733년 2월 1일, 과음과 방탕한 생활로 인해 몸이 망가진 아우구스트 2세는[6] 1733년 2월 1일 오전 4시 바르샤바 왕궁에서 당뇨병의 후유증과 상처 부위에 괴저가 발생하면서 감염과 패혈증을 일으킨 끝에 사망했다.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내 평생은 범죄를 지속적으로 저지르는 것이었다.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의 유해는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내장은 바르샤바의 카푸친 교회에 안장되었으며, 심장은 드레스덴의 궁정 교회에 안장되었다. 사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경쟁자였던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가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 복위하자, 아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면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3. 가족 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아우구스트 2세
(Augustus II)
<colbgcolor=#fff3e4,#331c00>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3세
(John George III, Elector of Saxony)
<colbgcolor=#ffffe4,#323300>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2세
(Johann Georg II, Elector of Saxony)
작센의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
(John George I, Elector of Saxony)
프로이센의 막달레네 지빌레[7]
(Magdalene Sybille of Prussia)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막달레네 지빌레
(Magdalene Sybille of Brandenburg-Bayreuth)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 크리스티안
(Christian, Margrave of Brandenburg-Bayreuth)
프로이센의 마리[8]
(Marie of Prussia)
덴마크의 안나 소피 공주
(Princess Anna Sophie of Denmark)
프레데리크 3세
(Frederik III)
크리스티안 4세
(Christian IV)
브란덴부르크의 아나 카타리나
(Anne Catherine of Brandenburg)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조피 아말리
(Sophie Amalie of Brunswick-Lüneburg)
브라운슈바이크칼렌베르크 공작 게오르크
(George, Duke of Brunswick-Calenberg)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나 엘레오노레
(Anna Eleonore of Hesse-Darmstadt)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아우구스트 3세
(August III)
1696년 10월 17일 1763년 10월 5일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9]
슬하 5남 7녀[10]

3.3. 내연녀와 사생아들


아우구스트 2세는 이외에도 수많은 사생아를 두었다고 전해지는데, 심지어 365명이 넘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그가 자기 자식으로 인정한 사생아는 8명이었다. 얼마나 여색을 밝히고 자식이 많았는지 자신이 하룻밤을 보낸 여성이 알고 보니 자기 자식이었다는 악소문도 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삭스 백작 모리스[1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작센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한 요한 게오르크 폰 작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루토프스키가 아우구스트 2세의 대표적인 사생아다.

3.4. 왕비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파일:Christiane Eberhardine of Brandenburg-Bayreuth.png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Christiane Eberhardine von Brandenburg-Bayreuth( 1671년 12월 19일 ~ 1727년 9월 4일)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 크리스티안 에른스트의 맏딸로, 1693년 1월 20일 21세의 나이로 당시 작센의 공자였던 아우구스트 2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트 2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신앙 생활에 충실한 아내를 지루하다고 여겼고, 그녀는 남편이 끊임없이 정부를 들이고 신앙에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3년 후인 1696년 10월 17일에 아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공자를 낳았는데, 이것은 그녀가 34년간의 결혼 생활 중에 경험한 유일한 임신이었다.

1694년 아우구스트 2세가 형 요한 게오르크 4세의 뒤를 이어 작센의 선제후가 되었을 때 크리스티아네도 작센의 선제후비가 되었다. 그러나 1697년 남편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2세에 선출되자, 크리스티아네는 아버지와 남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대관식은 커녕 폴란드에 발을 디디는 것조차 거부하며 개신교 신앙을 끝까지 이어갔다. 이에 1698년 3월, 아우구스트 2세는 개신교 신자가 대부분인 그단스크에서 아내와 만나 개신교인으로 남을 수 있는 자유, 개신교 성직자를 데리고 가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할 자유를 약속했으며, 외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단, 그 성직자는 공직을 입은 채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녀도 공개적으로 개신교 교회를 방문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아네는 왕비가 되기 위해 신앙에 불성실할 일은 없을 거라며 이번에도 거부했다.

아우구스트 2세는 작센을 종종 방문해 그녀와 공식 행사에서 함께 하곤 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접촉을 하지 않고 각자 떨어져 살았다. 크리스티아네는 고아들을 지원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많은 친척 아이들을 자신의 궁정에 불러들여서 친히 교육했다. 그녀에게 교육받은 대표적인 왕족으로는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의 아내이자 표트르 2세의 어머니인 브라윤슈바이크볼펜뷔텔의 샤를로테 크리스티네[12],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6세의 왕비인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조피 막달레나, 그리고 동프리슬란트의 왕자 게오르그 알브레히트의 아내인 브란덴부르크쿨룸바흐의 조피 카롤리네 등이었다. 경제 분야에도 활동적이었는데 1697년 콘스탄틴 프레멜(Constantin Fremel)이 설립한 프레츠쉬(Pretzsch)의 유리 공장 운영을 이어받았고 오렌지 농장을 설립했다.

말년에는 여성 귀족들을 위한 개신교 수도원을 계획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1727년에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프레츠쉬 교회에 안장되었지만, 장례식에는 남편도, 아들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톨릭에 대한 개신교 수호의 상징으로서 작센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당대의 개신교 설교자들은 그녀를 외로운 성에 사실상 죄수로서 고립된 개신교 순교자로 떠받들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그녀의 죽음을 기념해 칸타타 <공주님, 조금만 더 남아주세요(Laß, Fürstin, laß noch einen Strahl)>를 작곡하기도 했다.

4. 여담



[1] 아내 크리스티아네에게서 낳은 유일한 적자다. 나머지 자식들은 전부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2] 폴란드어로는 August Mocny. [3] 유명한 대영박물관은 1759년 개장했다. 다만 '공공 전시'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계 두 번째인데, 바티칸에서는 1506년부터 라오콘 상을 대중에 개방하였기 때문이다. [4] 특히 중국산 청화백자에 환장하여 근위용기병 1개중대와 청화백자를 바꿀 정도였다. [5] 전임자 치른하우스는 고열 가마의 구조를 생각해 내지 못해 볼록렌즈로 태양빛을 집광하여 그릇 하나하나에 직접 쬐서 온도를 올리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한다. [6] 아우구스트 2세의 키는 176cm였는데, 말년에 당뇨병을 앓아 사망할 무렵에 몸무게가 110kg에 달했다고 한다. [7]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막내딸. [8]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차녀. [9] 요제프 1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의 장녀. [10]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아말리아, 프란츠 크사버 왕자, 테셴 공작 알베르트 카지미어 [11] 삭스는 프랑스어로 작센을 의미한다. [12] 마리아 테레지아 율리아네 마리의 이모이기도 하다. [13]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또한 괴상한 성격과 가치관의 소유자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