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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콘라트 아데나워 | 마르틴 루터 | 카를 마르크스 | 한스, 죠피 숄 남매 | 빌리 브란트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아돌프 콜핑 | 루트비히 판 베토벤 | 헬무트 콜 | 로베르트 보쉬 | 다니엘 퀴블뵈크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콘라트 추제 | 요제프 켄테니히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카를하인츠 뵘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헬무트 슈미트 | 레진 힐데브란트 | 알리체 슈바르처 | 토마스 고트샤크 |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미하엘 슈마허 |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 귄터 야우흐 | 디터 볼렌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얀 울리히 | 슈테피 그라프 | 사무엘 하네만 | 디트리히 본회퍼 | 보리스 베커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프란츠 베켄바워 | 오스카 쉰들러 | 네나 | 한스 디트리히 겐셔 | 하인츠 뤼만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하랄트 슈미트 | 프리드리히 대왕 | 임마누엘 칸트 | 패트릭 린드너 | 하르트무트 엥겔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힐데가르트 폰 빙엔 | 하이노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 마를레네 디트리히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로베르트 코흐 | 요슈카 피셔 | 카를 마이 | 로리오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루디 푈러 | 하인츠 에르하르트 | 로이 블랙 |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 볼프강 아펠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알렉산더 폰 훔볼트 | 피터 크라우스 | 베르너 폰 브라운 | 디르크 노비츠키 | 캄피노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 프리드리히 실러 | 리하르트 바그너 | 카타리나 비트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프리츠 발터 | 니콜 |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 오토 릴리엔탈 | 마리온 돈호프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토마스 만 | 헤르만 헤세 | 로미 슈나이더 | 스벤 하나발트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빌리 밀로위치 | 게르하르트 슈뢰더 | 요제프 보이스 | 프리드리히 니체 | 루디 두치크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카를 레만 | 베아테 우제 | 트뤼머프라우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헬무트 란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알브레히트 뒤러 | 막스 슈멜링 | 카를 벤츠 | 프리드리히 2세 | 라인하르트 메이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하인리히 하이네 | 게오르크 엘저 | 콘라드 두덴 | 제임스 라스트 | 우베 젤러 | |||||
출처 | |||||||||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707070><colcolor=#ffffff>
독일연방공화국 제11대 연방부총리 요제프 마르틴 피셔 Joseph Martin Fisc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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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colbgcolor=#fff,#111> 1948년 4월 12일 ([age(1948-04-12)]세) | |
독일국 바덴뷔르템베르크주 게라브론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고등학교 중퇴 | |
직업 | 정치인 | |
소속 정당 |
|
|
의원 선수 | 5선 (하원) | |
지역구 | 비례대표 ( 헤센) | |
재임기간 | 제11대 연방부총리 겸 외무장관 | |
1998년 10월 27일 ~ 2005년 11월 22일 | ||
배우자 | 미누 바라티 (결혼: 2005~) | |
자녀 | 슬하 2명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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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oschka Fischer[1], 1948.4.12~독일의 정치인으로 동맹 90/녹색당원이다. 흙수저 출신으로서 중졸자로 출세해서 독일과 유럽에서 유명했던 인물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끌던 독일 사회민주당과 함께 세계 최초로 출범시킨 적녹 연정에서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2. 어린 시절
바덴뷔르템베르크주 게라브론에서 정육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은 헝가리에 원래 배경을 두었으나, 1946년 소련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수많은 독일인들과 함께 추방되었다.[2] 1965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난한 집을 가출하여 무작정 프랑크프루트로 가서 노숙하다가 한 사진관에 취업 사진가로서 도제를 받았지만 1966년에 그만두었다.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피셔는 부족한 시력으로 인하여 징병 또는 공익근무 활동을 하지 못했다.1967년 그는 독일 학생 운동과 진보 정치 운동의 활동가로서, 전설의 1968년에 먼저 주도 슈투트가르트에서, 몇달 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이하 프랑크푸르트)[3]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 # 제4강의실의 단골 토론 논객[4]이자 슈폰티(Suponti)[5] 멤버로서 프랑크푸르트의 만성적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빈집투쟁 도중 경찰과의 다툼[6], 그리고 1971년 자동차 제조회사 오펠의 노동자로 위장취업[7]하여 6개월만에 파업 주동자로 낙인찍혀 해고를 당했고, 그 후 책방 주인과 미숙련 노동 등을 이어가다가, 택시 운전기사(1976~1981)로 일하기도 했다. 몇번의 거절 끝에 1981년 당시 서독의 신생 환경 정당 녹색당원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밑바닥부터 출발한 인생이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한다.
3. 녹색당 정치인으로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녹색당소속 독일 연방 하원 의원을 2년간[8] 역임하였다. 1984년 10월 18일 헤센주의회의 부의장 리하르트 슈튁클렌[9]에게 욕설을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85년에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주 정부 단위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도하고 녹색당이 연립정부를 꾸려 협력하는 적 녹연정이 출범하면서, 헤센 주 환경부 장관으로 취임하였는데, 이때의 의상이 당시에는 청바지 운동화로 매우 파격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다. 2003년 보궐선거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유시민이 이를 모방하여 백바지 차림으로 등원했다 보수적인 한국국회에 맞지 않아 욕을 먹기도 했다[10]이때(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태가 터지는데, 사민당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가기만 하다가 결국 이 사태로 헤센주정부가 붕괴하여 야당인 기민당과 자민당에게 잠시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고, 잠시나마 장관직을 수행했던 그는, 독일 녹색당 강경파와의 당내 내전에서 집권 가능한 준비들을 착실히 해나가야 한다는 온건파의 수장으로서 치열하게 당내 정적들과 싸웠다. 결국 1990년 통일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정당득표 5% 봉쇄조항에 걸려 의회 진출이 좌절되었고, 그는 이 충격적인 사태 이후 더욱 격렬하고 처절하게 근본파와 일전을 벌인 끝에, 1991년 전당대회에서 녹색당 부동의 1인자[11]로서 온건파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1991년[12]부터 1994년까지 헤센주 적록연정에서 확대개칭된 환경에너지부 장관으로서 재취임하면서 성공적으로 직무를 수행하였고, 1990년대 중반까지 거듭된 패배 속에 무기력에 가까운 정치력을 선보인 사민당 정치인들보다 더 높은 정치인으로서의 인기를 얻게 된다. 그는 녹색당을 독일 정치의 중도 및 개혁파로 폭넓게 옮기며 인구 8천만을 넘는 독일이라는 대국의 연방정부 참여를 위한 길을 닦으면서[13], 정치적 성공가도를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4. 부총리 겸 외무부장관
4.1. 제1기 적록연정(1998~2002)
결국 1998년[14] 9월 27일 일요일에 치러진 제14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녹색당은 6.7%(49석)을 얻었고, 298석(40.9%)을 확보한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제7대 총리과 더불어, 새정부 출범일인 10월 27일, 세계 최초의 적록연정 부총리이자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기에 이른다.' 68혁명'의 주역들이 당시 혁명 이론가 '루디 두취케'의 호소처럼 '제도를 통한 행진'을 생전에 강조하는데, 그때 많은 온건한[15] 이들이 사민당 혹은 녹색당에 참여하였고, 언론과 학교 등 일상의 최전선에 뛰어들어 피셔처럼 밑바닥에서부터 착실히 과거사 적폐청산 및 개혁에 동참해왔기에, 결국 이 세계 최초 연방정부 적록연정은 68세대의 승리라고도 역사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16]
1999년 피셔는 코소보 전쟁 조기종식을 위한 독일의 참전안을 전당대회에서 신임안과 연계시켜 처리하려 했는데, 그의 정책에 반발한 어느 녹색당원이 물감폭탄테러를 그에게 안겨, 얼굴과 어깨 등에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침착한 연설과 호소력에 힘입어, 분위기는 반전되었고, 참전안은 과반을 넘겨 통과되었다. 이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 등과의 협력에 힘입어, 끔찍했던 전쟁은 결국 밀로셰비치 기소와 더불어 공습중지 즉 종료되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터진 동시다발적 테러 행위 이후, 호전적으로 변화된 국제정세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는데, 아들 부시 미국 대통령 행정부의 콜린 파월 당시 미국 국무장관 등과의 협력[17]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파병하였다.
4.2. 제2기 적록연정(2002~2005)
하지만 대량살상무기(WMD) 존재가 불명확했던 이라크전에는 독일 여론의 격렬한 전쟁 반대 속에서 프랑스와 러시아등과 함께 참전하지 아니하였다. 이와 함께 이 해 여름에 터진 대규모 홍수에 효과적으로 대처[18] 하여 민심을 얻은 적록연정은, 2002년 9월 22일 제15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기적같은 재집권에 성공[19]하였다.그러나 제2기 적록연정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독일의 하르츠 개혁안들에 대한 여론의 악화와 이로 인한 사민당 내의 분당[20]및 지방선거 연전연패, 특히 2005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총선거에서의 충격적 참패로 인해 상원 의석마저 위험에 처하자, 도저히 국정을 이끌 돌파구를 찾지 못한 슈뢰더와 피셔는 결국 2005년 9월 18일 제16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조기선거)를 실시하였고, 언론과 세간의 예측을 뚫고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기사연합에 35.2%(226석) 대 사민당 슈뢰더 34.2%(222석), 불과 (4석)1% 차이로 석패하였으나 사실상 대선전하여, 기민기사-사민 대연정을 출범시키면서, 슈뢰더와 피셔 모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2005년 10월 13일 외무부 장관직을 사임하면서 30여년을 몸담은 독일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2004년 독일 경제장관이던 하이더마리 비쵸레크-조일(사회민주당)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용어를 들이대면 헤레로 족 사태는 집단학살"이라고 말하며 독일 정부 이름으로 사과하자, 이런 건 보상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반대한다고 하던 게 바로 요슈카 피셔였다. 웃기게도 이 요슈카 피셔가 이라크 전쟁 반대하고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난하더니만 정작 지 나라는 배상금 주면 안 된다라는 내로남불 자세를 보인 것이라 아르메니아 학살 가해국이던 튀르키예에서 비웃었다.
5. 정치 후의 생활
은퇴 이후 피셔는 녹색당의 최고 원로로서 현직에서 일하는 녹색당원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21] 2006년 9월부터 2007년까지 그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우드로 윌슨 국제 대학원에서 방문교수로서 외교와 국제관계를 강의하였으며, 2007년에는 아랍 민주 재단에 그 신탁 통치부의 설립원으로서 가입, 활동하였다. 2008년 이래로 워싱턴 D.C.에서 절친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주도하는 '올브라이트 그룹' 컨설팅 사무소에서 자문을 하고 있다. 2009년 리스본 조약이[22] 천신만고 끝에 통과된 이후인 2010년 9월 15일, 피셔는 유럽 연합의 연방화를 위한 작업을 지속하기 위하여 설립된 스피넬리 그룹(Spinelli Group)을 후원하였다.공영방송 ZDF(독일 제2 텔레비전 방송)에서 2003년[23]에 '위대한 독일인'(Unsere Besten)을 전문가들과 여론 투표에 의해 선정했는데, 정치인으로서 꽤 높은 52위에 올랐다. 그의 절친이자 상관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제7대 총리는 82위. 그러나 2014년 조사에서는 순위가 상승하여 37위(제7대 슈뢰더 총리는 23위)[24] #.
2011년에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한 전세계인의 경각심이 커지면서 독일내에서 녹색당의 지지율이 높아짐에 따라 정계은퇴 이후에도 독일총리로 하마평에 오르기도했다. 여론조사에서도 부동의 1위를 여러차례 유지하기도. 그러나 본인은 정계은퇴를 번복할 생각이 없으며 총리직에도 관심이 없다며 일축 https://n.news.naver.com/article/308/0000004514?sid=104
6. 개인 생활
- 그는 천주교인이지만 그렇게까지 독실하지는 않다고 밝혔으며, 슈뢰더와 같이 5번째 부인을 두고, 수도 베를린과, 정치적 고향 프랑크푸르트[25]에서 주로 거주하고 있다. 그의 고향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를 강력한 녹색당 아성으로 만들어낸, 독일 유일의 녹색당 출신 (3선) 주총리인 빈프리트 크레치만 주총리와는 공교롭게도 1948년생 동갑이다.
- 몸무게가 112kg까지 나가던 거구로 유명했는데, 1997년부터 달리기에 심취한 후, 아마추어 마라토너가 되어 몸무게를 1년만에 30kg 이상 감량하는 데에 성공하여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신의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썼는데, '나는 달린다'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출판되었고, 당시 국내의 마라톤 붐을 타고 나름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다. 이후 네번째 이혼을 겪으면서 다시 요요에 시달리며 몸무게가 불어나기도 했지만, 다시 달리기에 심취하여 몸무게를 감량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1]
본명(풀네임)은 '요제프 마르틴 피셔'(Joseph Martin Fischer).
[2]
그리하여 그의 별칭(요슈카)는, 헝가리식 애칭 요스카(Joska)에 기원을 두었다고 한다.
[3]
신연방주(구동독)의
브란덴부르크 주에 '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Frankfurt an der Oder, 오데르 강가의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가 존재한다. 그러나 워낙
넘사벽급으로
독일과
유럽 그리고
세계에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위상이 크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줄여 '프랑크푸르트'라고 일반적으로 부른다. 여담으로, 이 도시는
경제를 대표하는
유럽중앙은행(
ECB)의 본부와,
노동을 대표하는
독일
금속
노조(IG Metal, IGM. 세계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노조 조직.)의 본부가 서로 갈등과 협력의 관계 속에서 공존하는
유럽의
심장
이기도 하다. 출처: Thomas Geoghegan(토마스 게이건,
미국
노동
전문
변호사),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4]
말이 좋아서 청강생 논객이지 한국으로 치면 가짜대학생 신분이다.
[5]
독일어에서 슈폰스(Spons)의 2격에 해당하는
단어로서, 독일혁명투쟁단을 의미한다.
[6]
'피셔 과거사 논란'. 2001년을 뜨겁게 달군 정치적 이슈이기도 했지만, 결국 무죄(혐의 없음)를 받는다.
[7]
1970~
1980년대
대한민국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민주화
투쟁 인사들(운동권)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훗날 정치가 등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8]
원래 임기는 4년인데, 1980년대 당시 독일 녹색당을 주도하던 강경파의 주장이 먹혀들어가면서 2년씩 교대로 임기를 채우는 기괴한전통을 만들어냈으나, 이를 비정상적 정당운영 행태로 파악한 피셔와 온건파가, 치열한 논쟁 끝에 훗날 파기하였다. 현재는 정상적으로 4년 임기를 모두 채우도록 하고 있다.
[9]
체신청
장 등을 역임한 독일의 정치인.
[10]
물론 21세기 현재의 독일 정치는 복장에서부터 정책들까지 상당히 많이
녹색당화되었다.
[11]
당시에는 당대표 직함이 없던 시절이라서, 당 대변인이 녹색당의 대변인으로서 활약할 뿐이었으나, '막후 실력자(보스)'로서 피셔의 정치생활은 크게 빛을 보게 된다. 이후 결국 남성 및 여성 공동당대표제로 당이 크게 변모하였고, 2021년 4월에는 여성 공동당대표인
아날레나 베어보크를
제20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총리
후보로 지명하기에 이른다.
[12]
이 전 해인 1990년에는
니더작센 주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주총리가 이끄는 지방정부 차원의 적록연정이 8년간 이어졌고, 이 실험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결국 연방 전국 차원으로서 세계 최초의 적록연정을 피셔 부총리와 함께 수립하게 된다.
[13]
이 과정에서 요슈카 피셔 본인(
체중감량 및
마라톤 도전 성공) 및
당의
개혁과정에 관하여 다룬
책이 있다. 출처: '나는 달린다'
#.
KNN의
도서 관련
프로그램 '
행복한 책읽기'(행책)에서도
2019년 10월 27일 방송에서 소개된 바 있다.
[14]
이 해
프랑스 월드컵에서
독일이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에게 충격의 패배를 당했고, 축구 경기 결과가 좋지 못할 경우 정부가 흔들린다는 가설이 다시 입증되면서, 헬무트 콜의 16년 장기집권도 종식되었다. 장기집권에 의한 국민들의 피로도가 누적되고, 그에 비해 신선한 이미지로 언론들을 상대하는 슈뢰더와 피셔의 노력에 힘입어,
독일
역사상
투표에 의해 물러난 첫 사례라고 한다(출처:Guido Knopp, '통일을 이룬 독일 총리들'
#.).
[15]
여기서 일부 삐뚤어진 이들은 - 예를 들어 '
바더 마인호프 그룹' 등 -
적군파(RAF) 무장혁명투쟁형
테러리스트가 되어, 1970년대 특히 '독일의 가을'(란트슈트Landshut의
루프트한자
항공기
납치
사건 등)에
헬무트 슈미트
총리와
빌리 브란트
당
총재와, 당시 긴밀하게 협조한 야당 지도자
헬무트 콜 등과 더불어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힘들고 괴롭게 하였다.
[16]
전술했던 2001년 '피셔 과거사 논란' 당시 많은 68혁명 동료들이 그를 지원하고 지켜주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끝에, 이 논란은 결국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피셔가 무너지면 우리도 피를 본다'는 절실함에서 그를 측면지원한 셈.
[17]
물론, 피셔는 역대 독일 외무부 장관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전통의 이웃나라
프랑스와의
외교적 공동자세를 맞추는 데에도 신경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8]
1960년데
엘베강 범람 및 홍수때
함부르크주 내무부 수장으로서 모든 지휘권한을 총동원하여 피해를 최소화시킨
사민당의 해결사
헬무트 슈미트는 훗날 제5대
독일 총리(재임 1974~1982)가 된다. 한때
자당 슈미트 정부의 핵정책에 반발했던 청년 사민당(Jusos) 지도자이자
법률가
슈뢰더와, 그 후폭풍으로 창당한
정당의 수장인 피셔가 이때의
리더십을 복기, 요긴하게 활용하였다는 평가.
[19]
이때
기민기사연합(248석)에 불과 약 6천표를 앞선 1위
사민당(251석)이 38.5%를 나란히 득표하였으나, 녹색당(55석, 8.6%)과
자민당(7.4%, 47석)과의 싸움에서 녹색당이 결국 승리하면서, 적록연정은 306석으로 과반을 넘어 재집권하게 된다.
[20]
적록연정 첫 재무장관이자 1990년 총리후보였던 오스카 라퐁텐이 이끄는 선거연합, WASG. 이들은 독일 민주사회당과의 합당을 통해
좌파당으로 거듭나게 된다.
[21]
2021년 한때 간발의 차로 제2위의 높은 지지도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얻은
녹색당은, 역사상 최초로, 당 연방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아날레나 베어보크를 9월 26일
제20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의
총리
후보로 옹립하였는데,(6월 11일~13일 전당대회에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을 예정) 이 과정에서 그녀와 피셔가 나란히 조언을 주고받는 사진들이 많이 보인다.
[22]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에의
국민투표에서
유럽
헌법안 등의
EU
개혁에 반대하는(부결), 유럽연합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
독일로서는 충격적인 결과가 잇따라 나오자,
메르켈 등 뜻있는 유럽인들이 모여 여차저차해서 정치적 타협을 이끌어낸다 - 2009년 리스본 조약의 탄생배경.
[23]
한창
하르츠 개혁이 노동조합/은퇴자 등을 중심으로 한 여론의 반발 속에 진행중일 때임을 감안하도록 한다. 참고로 이 개혁은 독일 역사상, 노사정위원회에서 중재인 역할에만 그쳐왔던 정부가, 노사 합의 결렬에 격분하여 적록연정 단독으로 추진한 사상 최초의 사례. 여담으로 옆의 이웃
프랑스
국민들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독일 하르츠법률들과 유사한) 개혁안 및 유류세 인상 등에 반발하여,
코로나19사태에도 불구하고 2018년부터 현재까지 아직도
노란 조끼(Gilles Jaunes)부대가
프랑스 각지에서
시위중이다. 물론,
마크롱 대통령의 경제개혁안이, 프랑스의 경제지표 개선이라는 가시적이며 실질적 성과로 나타나자, 지지율이 조금씩 회복하며 2022년 4~5월 재선을 조심스럽게 꿈꾸고 있다는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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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조사에서,
슈뢰더는 무려 23위로 종전보다 59계단 상승,
상전벽해의
기적을 이뤄냈다. 2014년이면, 슈뢰더와 피셔가 만들고
메르켈(여성 1위)이 마무리한 아젠다 2010이 대성공을 거두어 실업자 수가 5백만에서 3백만명 이하로 뚝 떨어지며
독일의
경제
기적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시점. 물론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2021년 현재에도 독일 경제상태는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괜찮은 편. 다만 2014년 조사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분리되어 조사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도록 한다. 여담으로, 2014년 조사에서 남성 1위는
헬무트 슈미트
제5대
독일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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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 오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며, 마인강 조깅 코스를 걷거나 달리는 모습을 볼 확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