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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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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괴테 메달 백색.svg
한국인 및 한국계 외국인 괴테 메달 수상자
<rowcolor=#fff> 1995년 1998년 2007년
<rowcolor=#000,#ddd> 윤이상(독일) 백남준(미국) 김민기
* 괄호는 수상 당시의 국적

윤이상
尹伊桑 | Isang Yun[1]
파일:external/pds19.egloos.com/c0026408_4dd889d4d0be8.jpg
출생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2]
사망 1995년 11월 4일 (향년 78세)
독일 베를린
본관 칠원 윤씨[3]
직업 작곡가
가족 아버지 윤기현, 어머니 김순달
배우자 이수자, 딸 윤정, 아들 윤우경
학력 베를린 예술대학교
경력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수상 1990년 북한 조국통일상
1995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선정 올해 최우수예술인 공로부문
1995년 독일문화원 주최 괴테메달
링크 공식 홈페이지

1. 개요2. 생애
2.1. 한국에서2.2. 유럽에서2.3. 동백림 사건으로 인한 납치와 투옥2.4. 서독 망명 이후2.5. 타계와 유해 송환
3. 창작 성향4. 사생활5. 정치적 행보 및 논란6. 작품 목록
6.1. 대규모 교향곡6.2. 실내 교향곡6.3. 관현악6.4. 현악합주, 대/소규모 앙상블6.5. 협주곡6.6. 실내악
6.6.1. 2중주6.6.2. 3중주6.6.3. 4중주6.6.4. 5중주6.6.5. 7중주~10중주
6.7. 독주
6.7.1. 피아노/하프시코드/오르간6.7.2. 무반주 악기
6.7.2.1. 현악6.7.2.2. 목관
6.8. 가곡6.9. 합창6.10. 오페라6.11. 그 외
7. 수상 경력8. 기타

[clearfix]

1. 개요

한민족 출신의 독일 작곡가.

서양 악기를 통해 한국 전통 음악의 음향을 구현하려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중심음 기법 등 독창적인 어법을 구사하여 세계적인 작곡가로 발돋움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은 뒤 서독으로 귀화하였으며 1971년 독일로 국적도 바꾸었다. 고향을 그리워하였으나 경계인의 삶을 살았고 타계할 때까지 대한민국 땅을 밟지 못했다.

2. 생애

2.1. 한국에서

일제강점기인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태어났다.[4] 그러나 그가 산청에 머무른 시기는 고작 3년에 불과하며 1920년 통영군으로 이주하여 학창시절을 보냈고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고향을 충무( 통영)라 했기 때문에 그의 고향은 통영이 맞다. 모든 사람들이 다 출생지=고향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성장기 연고지를 고향으로 삼는 경우가 더 많다.

신식 학교에 다니면서 음악실에 비치된 풍금을 접하고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서양 음악의 기초 이론을 배우는 한편 남사당패 판소리 명창의 공연에 열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가가 배고프고 불행한 직업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음악 공부를 금지했고[5], 통영협성농상학원으로 아들을 진학시켰다.

하지만 입학 후 2년 뒤에 가족들의 뜻을 거스르고 경기도 경성부로 갔고, 옛 대한제국 소속의 군악대였다가 방송국 일을 맡고 있던 시위연대 출신의 연주가 겸 작곡가 최호영으로부터 화성학을 배웠다.

이듬해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들에게 상업 공부를 하면서 음악을 배워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후 1935년 일본 오사카로 유학하였고, 오사카 상업학교과 음악학원에 입학하여 첼로 작곡, 음악이론 등을 배웠다.

1936년 가족사로 귀국하였고,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공장에서 일하다가, 1938년 통영 화양학원(현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잠시 생활을 하였다.

1939년에 다시 도쿄 유학했고, 프랑스 근대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이케노우치 토모지로(池內友次郞)에게 작곡을 배웠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작곡 활동을 틈틈이 하는 한편 항일 지하조직에 가담해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4년 7월 불법 무기 제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고문[6]을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2개월의 단기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경찰의 감시를 피해 경성으로 옮겨가 인쇄소 식자공 등으로 연명했고,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가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부산고 등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했으나, 투옥과 오랜 도피 생활로 얻은 결핵이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6.25 전쟁 때는 투병 경력 때문에 징집에서 제외되었고, 계속 음악교사로 일하면서 전시작곡가협회와 그 뒤를 이은 한국작곡가협회에 입회했다.

휴전 후 가족들과 다시 서울로 올라갔고, 작곡 교사로 활동하면서 잡지나 신문에 음악 관련 기고문을 발표하거나 실내악 작품을 쓰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55년에 현악 4중주 제1번과 피아노 3중주 두 작품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상금과 기타 여비를 더해 이듬해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에 유학했다.

2.2. 유럽에서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기대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고, 1957년에 다시 서독 서베를린으로 옮겨 베를린 고등음악학교(현 베를린 예술대학 음악학부)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12음 기법, 작곡을 배웠다. 이 때 스승들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실링과 요제프 루퍼, 보리스 블라허가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1959년에 베를린 음악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 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을 발표했고, 특히 후자는 현대음악 작곡가의 등용문으로 유명한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7] 이 성공으로 귀국 계획을 보류하고 계속 서독에 남아 작곡 활동을 진행했고, 동아시아 음악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프라이부르크 쾰른에 정주하였으나 재정 형편은 좋지 않았다.

한편 1959년 그에게 접근한 동독 스파이 소녀가 그에게 동독에는 많은 북한 사람들이 유학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했고, 윤이상은 통영과 일본에서 함께 음악을 공부했던 절친한 친구였던 음악가 최상한의 안부를 물어봤다. 쾰른 정주 시절 1963년 같은 통영 출신이자 죽마고우였던 작곡가 최상한과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는데, 이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는 떡밥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윤이상은 북한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 콘트라베이스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 친구를 만났지만, 당시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최상한과 이념과 사상으로 인한 서로 간의 입장 차를 좁힐 수는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서고분에서 사신도 벽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영상' 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가 되기도 했다.

1964년 미국의 포드 재단에서 진행하는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 대상으로 선정되었고, 서베를린으로 이주했다.

1966년 다름슈타트 음악제에 버금가는 현대음악제인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관현악 '예악' 이 초연되었고,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럽의 신예 현대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2.3. 동백림 사건으로 인한 납치와 투옥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되었고,[8] 다른 독일 주요 교포 인사들과 함께 고문[9]을 당한 뒤 북한의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1심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동백림 사건). 그러나 2심과 3심을 거쳐 간첩 혐의는 무죄로 판결나고 다만 국가보안법 위반(동조죄 및 탈출죄)으로 징역 15년으로 감형, 대법원에서 10년형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동백림 사건의 불법적인 체포 과정으로 한국은 인권 후진국이라는 여론이 국제사회에서 목소리가 높아졌고, 급기야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 대통령은 이 야만적인 짓을 그만두지 않으면 한국 대사를 추방하고 1964년 12월 박정희가 서독을 방문했을 때 약속했던 차관 제공도 취소하겠다고 했다. 윤이상이라는 인물이 이 정도로나 세계적인 영향을 일으킬 줄 몰랐던 한국 정부가 결국 1969년 3월 29일 형집행정지를 결정하고 윤이상을 석방하면서 서독으로 돌아갔고 1970년 815 특사로 잔형이 면제되었다.[10] 상세한 내용은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위원회 보고서 동백림 사건 진실규명 자료를 참조;[11]

투옥 중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을 완성했고, 악보가 독일로 보내져 초연되면서 구명 운동을 위한 국제 여론이 확산되어, 100여명의 음악가들이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작곡 및 지휘계를 주름쥐고 있던 거물 급 인물들인 스트라빈스키, 슈톡하우젠, 리게티 죄르지, 카라얀[12]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후 건강 악화로 서울대학교 종합병원에 입원했고, 투병 중에도 계속 작곡을 하는 한편 강석희 같은 젊은 작곡학도들을 비공식적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1969년 석방되어 서독으로 돌아간 2년 뒤 가족들과 함께 서독 국적을 취득했다.[13]

서울고법 형사5부(서승렬, 안승훈, 최문수 부장판사)는 2023년 5월 12일 유족들의 청구를 받아들여 윤 씨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2020재노25). 재심이 청구된지 3년 만이다. 법률신문

2.4. 서독 망명 이후

1972년에 모교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작곡과 명예 교수가 되었고, 뮌헨 올림픽 기념 문화행사를 위해 오페라 '심청' 을 작곡해 초연했다. 서독 외에도 미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작품이 연주되었고, 1977년에는 서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고, 이듬해 '광주여 영원히!' 라는 관현악 작품을 발표했다.[14]

1982년부터 남북한 양측에서 윤이상 음악의 공연이 개최되기 시작했고,[15] 1983년부터 87년까지는 매년 교향곡을 한 곡씩 발표했다. 1987년에는 70회 생일 기념으로 서독 각지에서 기념 행사와 음악회가 개최되었으나,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인해 점차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휴전선에서 남북 음악가들이 공동으로 공연하는 아이디어를 남북 양측에 제의했으나, 양측 이견이 너무 커 무산되었다. 그 대신 1990년에 남북의 예술인들이 예술단을 구성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가며 공연했고, 분단 이후 개최된 남북 간의 첫 교환 공연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당뇨 합병증이 악화되어 폐렴 등의 추가 질환이 발생했고, 산소호흡기와 휠체어 없이 생활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1994년에 예음문화재단 주최로 남한에서 '윤이상 음악축제' 가 개최되었는데, 이 때 남한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여 귀국 계획을 접어야 했다. 또한 과거 그의 정치적 행보들이 조명되며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모든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해 마지막 작품이 된 '화염 속의 천사' 를 완성하고 이듬해에 도쿄에서 초연했다.

2.5. 타계와 유해 송환

그러나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고, 폐렴이 재발하여 1995년 11월 4일에 베를린에서 타계했다. 결국 독일로 출국한 이후 사망할 때까지 한 번도 대한민국 땅을 밟지 못한 셈. 장례는 유언에 따라 불교 의식으로 진행되었고,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베를린 가토우 지방 묘역(Landschaftsfriedhof Gatow)에 안장되었다.[16] 이후 유족들과 관계자들이 고인이 평소 원했던 통영으로 이장을 추진하던 중,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김정숙 여사가 베를린 묘소에 동백나무를 헌화한 것을 계기로 마침내 타계 23년 만에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 2018년 3월 20일 통영국제음악당 부지 내에 안장되었다.[17] 다만 보수단체 등의 반발을 우려하여 행사는 조촐하게 진행했다. 이는 여전히 한국에서의 윤이상의 입지가 확고하지 않고 정치적 논란이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윤이상의 사망 이후 그의 아내 이수자와 딸 윤정은 평양, 독일 등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으며, 윤이상 기념사업의 중심지인 통영도 자주 방문하고 있다.

3. 창작 성향

유년기 때부터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을 골고루 들을 수 있었던 환경 때문인지, 이후 독일로 옮겨가서도 이러한 양상을 계속 유지했다. 초기 작품들에서는 뚜렷한 민요나 전통음악 풍의 선율을 들을 수 있으며, 동시에 쇤베르크 버르토크의 현대적인 기법을 절충시키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독일에서 발표한 첫 작품들은 12음 기법 등 서구 현대음악 기법의 강한 영향력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동양의 전통 음악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음의 떨림이나 호흡이 길고 음의 움직임이 적은 선율, 이를 표현하기 위한 특수 연주법 등을 가미해 나름대로 독자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 초기 작품은 너무 연주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종종 연주자들로부터 불만을 듣거나 심지어 공연을 거부 당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교착적 음향'의 경우, 초연 연습 때 단원들이 윤이상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온갖 욕을 했을 정도였다. 지휘자가 나서서 달래보았지만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는데, 결국 윤이상이 무대 위로 올라가 첼로 파트의 어려운 대목을 직접 연주해 보이자 잠잠해졌다. 가까스로 공연이 개최되기는 했지만, 청중석에서도 야유와 환호가 뒤섞여 나올 정도로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이는 단순한 기교의 과시 문제가 아니었고, 실제로 윤이상은 여타 현대음악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성악가들과 기악 연주가, 지휘자들과 여러 차례 토론하면서 작곡을 진행했다. 윤이상과 친분을 맺었던 음악인들 중에는 각기 해당 악기의 본좌로 손꼽히는 하인츠 홀리거( 오보에), 오렐 니콜레( 플루트), 에두아르트 브루너( 클라리넷), 지크프리트 팔름( 첼로),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 바이올린), 우어줄라 홀리거( 하프) 등이 있었다. 이런 괴수대가들을 위한 곡이다 보니, 기교적으로 넘사벽에 가까운 난이도가 될 수밖에.

그리고 초연 후에는 기악과나 성악과 학생들의 수업을 함께 지도하면서 '결코 연주 불가능한 곡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했고, 1980년대에는 꾸준한 연습과 교육의 결과 학생들도 연주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2000년대 들어서는 독일 음대 관현악단도 윤이상 관현악곡을 연주하고 있을 정도다.

동백림 사건 이후에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이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 등을 작품에 반영하게 되었고, 작품의 메시지가 강해지는 대신 음악의 어려움이 경감되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가사가 들어가는 곡의 경우, 노자의 도덕경이나 성경 등 동서양 종교/철학서의 인용 외에 넬리 작스나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 같이 나치에 의해 탄압 당한 유대인/반체제 인사의 시를 사용해 그러한 메시지를 강화했다.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의 경우 독일 유학 후 최초로 한국어 가사를 택했는데, 이 곡에서는 백기완이나 고은, 문병란, 박봉우, 박두진, 양성우, 김남주 등의 재야/민족계 문학가들의 시를 주로 사용했다.

1980년대부터는 신낭만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듯 작품이 더 유순해지고 받아들이기 한결 편한 곡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렇다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령 마지막 작품인 '화염 속의 천사' 의 경우, 1980년대에 분신 자살한 학생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한 곡이라고 분명히 발표했다. 표제에 반영되던 아니건 간에, 윤이상 자신의 악곡 해설문을 보면 핵전쟁의 위협이나 인종차별, 인권유린, 환경오염 등의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다는 내용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부터는 실험성이나 전위적인 면이 줄고 작품의 구조가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하는 등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도 있다.

시대 별로, 그리고 작품 별로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동서양의 기법을 모두 받아들여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창조한 업적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다. 지금도 독일에서 활동한 동양인 현대 작곡가들 중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고, 유럽 현대음악계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호소카와 토시오를 비롯한 많은 후학들도 그의 어법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1996년에는 독일을 거점으로 하는 '국제윤이상협회' 가 만들어졌고, 지금도 윤이상 작품의 보급과 연구, 연주, 녹음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4. 사생활

윤이상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약 다섯 달 전에 결혼했는데, 상대는 부산사범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던 이수자(리수자)[18]였다. 중매가 아닌 연애 결혼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데, 처음에는 윤이상이 결핵 환자였다고 해서 이수자 집안의 반대가 대단히 심했다고 한다. 결혼 직후 딸인 윤정이 태어났고[19], 아들인 윤우경은 1954년에 태어났다.

한국에서는 상당한 애처가였고 가정적인 인물이었지만, 독일로 옮겨간 후 서구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진 탓이었는지 아내와 아이들이 1961년과 1964년에 각각 독일에 와서 합류한 후에는 종종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가족 관계가 회복되자마자 터진 동백림 사건은 윤이상에게 육체적/정신적인 상처를 남겼고, 이 때를 전후해 당뇨병을 비롯한 여러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성격은 다소 신경질적이고 엄격했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작곡할 때는 절대 정숙을 요했기 때문에 번잡한 주택가에서 살 때는 자주 짜증을 냈다고 한다. 교육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는지, 제자들도 '엄한 서당 훈장만큼 무서웠다' 고 회고할 정도. 하지만 사제 관계를 떠나 학생들에게 유학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개인적인 문제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대인배 기질도 있었다고 하고, 특히 동양인 유학생들에게 큰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항구 도시에서 살았던 것 때문인지 생선이나 조개 등 해산물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하는데, 식욕도 왕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담배는 결핵과 당뇨병으로 인해 거의 손대지 않았고, 감자를 싫어해 독일 유학 초기에 굉장히 고생했다고 한다. 2차대전 후 독일에서는 구황 작물로서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하고 섭취했는데, 처럼 매일 식탁에 감자가 올랐을테니 꽤나 곤욕을 치렀을 듯...

5. 정치적 행보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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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 당시의 모습. 윤이상은 김일성을 정치적 은인으로 생각했으며, 북한은 윤이상을 철저히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초기 윤이상은 항일 민족주의 활동을 벌일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지만, 이후의 행보는 혼란스럽다. 루이제 린저가 구술한 '상처 입은 용' 을 보면, 해방 직후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문화예술 쪽에서 활약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실망하고 탈당했다는 내용이 있다. 윤이상은 한국전쟁 중에 피난지가 된 부산에서 반공을 주제로 한 노래도 만든 바 있었고, 종전 후에는 육군 장교들과 함께 전쟁 고아들을 위한 위문품이나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동백림 사건은 윤이상이 피해자임이 확실하지만, 윤이상이 독일로 건너간 이후의 사회 활동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서독에서 생활하던 중인 1959년 동독 스파이 소녀가 그에게 처음 접근한 이래, 그는 동독과 북한 인사들과 자주 접촉하였다. 1963년 옛 친구와 서대묘의 사신도를 보기 위해 처음으로 북한에 다녀왔다. 그런데 윤이상의 북한행은 동백림 사건 당시 그를 납치하려고 독일에 간 중앙정보부 요원들조차 몰랐고,[20] 이것이 대한민국 언론에 퍼진 것은 재판 과정의 보도 때였다. 가시지 않은 한국전쟁의 상처와 냉전으로 인한 반공주의가 강화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무슨 목적이었건 북한에 갔다는 사실은 문제로 여겨졌다.

동백림 사건 당시 '반공'을 위해 각종 국제법을 무시한 중앙정보부의 활동은 되레 외국에 안 좋은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고,[21] 윤이상 구명을 위한 서명 운동에는 심지어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같은 거물 인사들까지 참가할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왔다.[22] 서명 운동에 참가한 다른 음악계 명사들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오토 클렘페러, 한스 베르너 헨체, 볼프강 포르트너, 보리스 블라허 등 약 15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인 여론은 대부분 사전 검열로 인해 한국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고, 윤이상이 독일로 돌아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동백림 사건 수사 종결 후, 윤이상의 음악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장학생들을 받아들여 가르치거나, 외국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단편적인 소식 정도는 간혹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그의 귀국을 불허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그가 작곡한 '심청'이 공연된 후 한때 박정희 정부와 윤이상 사이에 해빙 무드가 조성된 적이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성공적인 음악가인 그를 인정하여 그의 귀국과 공연을 허용했고, 윤이상도 고국에서 공연 기회가 마련되자 이를 반겼다. 그리하여 1973년 서울신문사 주최로 윤이상 음악제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 윤이상 주변 사람들은 그가 남한 정부에 항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윤이상은 귀국 음악회 개최를 포기했다. 윤이상은 일본에서 김대중 남치사건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1982년에 대한민국 음악제를 통해 윤이상 작품만으로 꾸며진 연주회가 두 차례 열리기도 했지만, 윤이상은 전두환 정부의 초청을 거절했다. 결국 해금 기회를 맞았었던 윤이상 작품이 수록된 음반과 악보는 여전히 수입 금지 혹은 제한 품목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 말기였던 1970년대 후반에는 특히 반 윤이상 조류가 극에 달했는데, 지휘자 임원식이 독일에 초청 받았을 때 '무악' 을 지휘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모 음악 잡지에서 유명 필진들을 대거 동원해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임원식은 한국 음악계에서 급작스럽게 스캔들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사상 검증' 논란에 휘말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여론을 주도한 잡지의 발행인이 윤이상과 부산사범학교 시절 음악교사로 함께 일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임원식은 동백림 사건 때도 윤이상의 무고를 주장한 증인으로 재판에 출석했기 때문에, 이미 예전부터 적정한 때를 노리는 반대파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자 윤이상은 1979년 이후에는 거의 매년 북한을 방문하여 한달 이상 장기 체류하곤 했다.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고 나서는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반발심이 커지고 이에 상대적으로 북한에 대해 관심이 더 생긴 걸로 보기도 한다.

군사정권 기간 동안 오히려 윤이상 음악의 평가와 연주, 연구에 열을 올린 쪽은 북한이었고,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는 평양에서 초연되었다. 북한 역시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기 딱 좋은 유명 인사로 간주하였고, 그의 음악을 널리 연주하는 등 적극적으로 포섭하였다. 그의 불협화적인 음악 어법이 북한 음악계에선 금지되다시피한 점을 생각해보면 본인에게 안타까운 일.

말년의 윤이상은 병으로 몸이 약해진것과 겹쳐 친북 경향이 강해졌고, 첫 방북 당시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94년에는 김일성이 사망한 후 윤이상은 김일성을 위대했다고 표현한 조전을 북한에 보냈다.
실제로 김일성 주석이 와서 말하면 거대한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단지 멀리서 그를 볼 수 있을 뿐인데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민중은 전쟁 후 오랫동안 굶주리고 빈곤하여 잠을 잘 다락방도 없었지요. 그런데 김일성이 모든 것을 지도하여 그들이 더 이상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도록 했으며 집도 지어주었습니다. 그것도 옛날의 오두막집이 아니라 진짜 기와집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의심할 나위 없이 많은 성과를 올렸고 지도자의 자격을 증명했으며 또 개인적인 위광을 과시했습니다.
윤이상- 루이제 린저 대담, 상처 입은 용, 1988

윤이상의 이런 행적으로 인한 입국 금지는 '문민정부' 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민주화를 이룩한 조국에 쉽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윤이상은 정부로부터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이라 했던 것을 사과'하라는 요구를 받자 거부했다고 한다. 조갑제가 개인적으로 극우 성향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가짜뉴스를 쓰는 사람은 아니므로 직접 읽고 판단하는 것이 좋다. 먼저, 생전에 김일성한테 쓴 편지들은 각주의 기사 참조. [23] 서유럽에서 북한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고 사르트르 같은 인물도 선제북침설을 지지할 정도로 북한에 대한 낭만적 이미지가 서유럽 지식인계층에 퍼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6.25전쟁을 직접 겪고 부산에서 피난생활까지 한 윤이상의 최말년 행적은 동백림 사건의 영향과 6. 25전쟁 이전 시대 사람이라 통일이 최우선 가치여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도 지나친 면이 있다.[24]

결국 건강 악화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안게 된 윤이상을 고향 땅 통영을 영영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다만 윤이상 본인도 계속해서 북한을 방문하면서 김일성이 북한 인민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해낸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고 칭찬하면서도 동시에 '나쁜 건 아닌데 뭔가 이상한 변화'가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동시에 우려도 표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생전에 북한 주민들의 참상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도 겉으로는 윤이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윤이상은 서방 간첩이라고 비난했다. [25]

윤이상 본인은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에서 자신은 절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북한과 오로지 문화적 연계만 있을 뿐이라고 강변했으나 윤이상의 바람과 다르게도 북한에서는 윤이상의 현대음악에 대한 업적보다는, 정권 친화적 통일운동가로서의 행보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대부분의 현대 음악 사조를 '부르주아 반동적' 이라고 규정한 북한 정권이 유독 윤이상에게만 호의적이었다는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년 가을마다 윤이상 음악회를 열고 있고, 윤이상 음악연구소와 연구소 부속 관현악단 윤이상관현악단까지 꾸려가고 있다는 점에서 음악적인 지원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실제로 북한은 유명한 괴작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는 윤석민이라는 가명으로 두 번에 걸쳐서 영화화 할 정도로 대단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26]

윤이상은 작품 활동 외에도 빌리 브란트 같은 정치계의 거물들과 만나 한국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하기도 했고, 루이제 린저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77년, 린저는 윤이상의 전기 상처받은 용(Der verwundete Drache)을 출판한다.[27] 한민통이나 범민련 등 재야 운동가들의 조직에서도 의장을 맡는 등 민주화/통일 운동에 참가한 경력도 갖고 있었다. 윤이상은 1990년 남/북/해외 민간통일운동 연대체를 목표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이 출범하자 해외본부 의장을 맡았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들을 '반국가/친북한 활동' 으로 규정하고 있던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이러한 행적이 혹평 사유가 되었다. # #

정치적인 논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던 이런 사실과 별도로, 1980년대 후반에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의 해금과 함께 윤이상 음악에 대한 해금도 같이 진행되었다. 그와 함께 거부 일변도였던 국내의 윤이상 음악에 대한 평가도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고, 윤이상에게 직접 배웠던 강석희와 백병동, 김정길 등이 한국 작곡계의 거물 인사가 되면서 간접적으로도 공적이 언급되는 등 많이 호의적인 쪽으로 선회했다. 한국 출신으로서 가장 세계적인 위치에 있는 지휘자인 정명훈도 교향곡 제3번의 세계 초연을 비롯해 여러 무대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윤이상의 관현악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윤이상 사후 11년이 된 2006년 노무현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가 '동백림 사건은 부정 선거로 악화된 국민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확대되고 과장되었다'고 발표했고, 이듬해 2007년에는 이수자가 1969년 이후 처음으로 남한을 방문, 노무현 대통령과 만났다.

통영시에서는 해마다 윤이상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통영국제음악제가 개최되고 있고, 윤이상의 이름을 딴 국제 음악콩쿠르나 작곡 경연도 열리는 등 예술적인 차원에서는 거의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5.1. 오길남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오길남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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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북한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일가족 4명이 모두 월북했다가 1986년에 오길남 혼자서만 탈북한 사건. 오길남은 '윤이상이 자기 일가의 월북과 자신에 대한 재월북 회유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윤이상 일가는 '오길남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맞서고 있다. 이 사건을 요약을 하자면 오길남의 주장에 정확한 근거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윤이상 일가의 오랜 친북 행보로 인해 반발이 효과를 못보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6. 작품 목록

6.1. 대규모 교향곡

교향곡 1번 (1983)

교향곡 2번 (1984)

교향곡 3번 (1985)

교향곡 4번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 (1986)

교향곡 5번 (1987)(바리톤 독창 포함)

6.2. 실내 교향곡

*실내교향곡 1번 (1987)

실내교향곡 2번 '자유에 바침' (1989)

6.3. 관현악

관현악을 위한 '바라' (1960)
대관현악을 위한 '예악 (1966)

6.4. 현악합주, 대/소규모 앙상블

실내 합주를 위한 '협주적 단편'

6.5. 협주곡

첼로 협주곡 (1975~76)
플루트 협주곡 (1977)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이중 협주곡 (1977)
하프, 플룻과 관현악을 위한 '서주와 추상' (1979)
클라리넷 협주곡 (1981)
바이올린 협주곡 1번 (1981)
하프와 현악 합주를 위한 '공후' (1984)
오보에 협주곡 (1990)
바이올린 협주곡 3번 (1992)

6.6. 실내악

6.6.1. 2중주

6.6.2. 3중주

6.6.3. 4중주

6.6.4. 5중주

6.6.5. 7중주~10중주

6.7. 독주

6.7.1. 피아노/하프시코드/오르간

6.7.2. 무반주 악기

6.7.2.1. 현악
6.7.2.2. 목관

6.8. 가곡

6.9. 합창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독창, 합창과 대관현악을 위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1986~87)
소프라노, 여성 합창단과 5개의 악기를 위한 '화염속의 천사와 에필로그'(1994)

6.10. 오페라

6.11. 그 외

경주고등학교, 부산대신중학교, 경상대학교, 고려대학교, 부산고등학교, 통영고등학교, 통영여자고등학교, 마산고등학교, 배영초등학교, 통영여자중학교, 욕지중학교, 해동중학교, 경주중고등학교, 진해남중학교, 통영초등학교, 진남초등학교, 충렬초등학교 등의 학교 교가, 양정고등학교 제2응원가 등을 작곡하였다.

7. 수상 경력

8. 기타



[1] 독일 민증에 적힌 이름이다. [2] #. 다만 실질적인 고향은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 [3] 41세 상(相) 항렬로, 국회의원 윤상현과 같은 항렬이다. 족보명은 윤상영(尹相永). [4] 당시에는 여성이 출산 전후에 친정에 머무르는 관습이 있었으며, 산청은 윤이상 모친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5]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는 양반이었기에 양반 집안의 장손이 음악을 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불쾌하고 천박하게 생각했다. [6] 당시 동료들은 사지를 불로 지져지고, 들짐승처럼 거꾸로 매달린 채 얼굴에 두툼한 수건을 얹어지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뿌려지는, 윤이상이 받은 고문보다 더 심한 물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중에는 물고문을 받다가 숨이 막혀 기절한 동료도 있었다고 한다. [7] 작품 출품은 하지 않았지만 1958년에도 참가했는데, 이 때 훗날 전위예술가이자 비디오 아티스트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백남준을 만나기도 했다. [8]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이 대부분 부적절한 방법으로 국내에 압송되었다. 정부기관에서 유학생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상을 주겠다라는 말에 속아서 귀국한 경우도 있고, 억지로 협박해서 끌고 간 경우도 있었다. 이는 분명 국제법 위반이다. [9] 북한이 만든 윤이상 영화를 보면 나쁜 박정희 독재정권의 요원들에 의한 고문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고문 내용은 일반인들의 상상과 달리 윤이상을 앉혀놓고 단순히 흥겨운 팝송을 틀어준 것이다. 이에 자본주의 미국의 한심한 팝음악을 못 견디는 고결한 민족주의자 윤이상이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른다는 설정인데 정상인들이 보기엔 어처구니가 없다. 이런 영화를 정색하고 만들어서 대중의 세뇌용으로 상영까지 한다는 점에서 북한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경직된 독재체제인지가 오히려 여실히 드러난다. [10] 무죄가 아니고 형 집행 면제다. [11] 국가보안법 탈출죄 동조죄 적용 - 417페이지, 423페이지 [12] 당시 작곡가로서의 스트라빈스키는 생존해 있던 작곡가들 중 거의 최고참이자 최고의 작곡가로 꼽히고 있었고 지휘자로서의 카라얀의 명성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뛰어났다. 리게티와 슈톡하우젠도 이름 날리던 작곡가인것은 당연한 일이고. [13] 독일은 미국과 같은 이민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당시 외국인, 특히 동양인이 독일인과 결혼도 하지 않고 독일 국적을 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서독 정부가 윤이상의 예술적인 입지와 위상을 인정한 것으로, 한국 정부의 재차 납치 계획 등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14]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작품 이전에도 같은 재독 작곡가였던 박영희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관현악곡인 '소리' 를 1980년에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발표한 바 있다. [15] 엄밀히 하자면, 남한에서는 '재개' 되었다고 해야 한다. 동백림 사건 이후에도 '낙양' 을 비롯한 작품들이 서울에서 이따금 공연되었던 기록도 있다. [16] 윤이상은 슈판다우 지구의 병원에서 타계했고 묘지 소재지는 가토우 지구다. 공원묘역이 여의도 면적 만해서 묘소였던 곳을 찾기가 힘들다고. [17] 통영 도천동에 있는 윤이상기념관도 통영 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히길 원했던 고인의 뜻에 맞지만, 거긴 현행 장사법 상 묘소를 마련할 수 없다. 300m 내 인가 밀집 지역이 있기 때문. 게다가 그 위치에서는 앞의 아파트에 가려서 통영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18] 본인이 자신의 이름을 리수자라고 표기하였다. [19] 독일 네오클래식,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인 Popol Vuh의 보컬로 활동하기도 했다. # # [20] 실제로 서울 압송 전,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사전 심문을 하던 요원들이 윤이상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놀랐다고 한다. [21] 1960년에 홀로코스트 핵심 인물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검거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보 기관인 모사드가 행한 작전이 비판을 받은 것도, 국제법을 무시한 절차 때문이었다. [22] 물론 스트라빈스키는 '그 사람 공산주의자 아니냐' 하며 서명 운동에 마지못해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23] 관련기사 [24] 이 때문에 김일성 우상숭배를 비판하다가 1957년에 소련으로 망명하여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하방된 음악가 정추(1923~2013)는 자신을 카자흐스탄의 윤이상이라고 부르는 일각의 표현에 "저는 북한 체제를 반대한 망명자고, 윤이상은 사이비 사회주의 독재국가를 찬양한 사람입니다. 나를 그와 비교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윤이상 같은 변절자가 아니에요."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25] 에드거 스노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자주 초청하면서도 정작 내부적으로는 그를 CIA 간첩으로 평가했던 마오쩌둥과 비슷하다. [26] 당시 이 영화에서는 북한의 수준이 보이는데 중정 요원들이 윤이상을 창고 같은 장소에 감금해서 고문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지만 그 무시무시한 고문 내용이란 게 미 제국주의자의 팝송을 틀어주는 것이다. 의자에 앉아서 팝송을 강제로 듣는 윤이상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한다. 하나의 시리즈는 앞에서 설명한 동백림 사건 묘사, 다른 하나는 사실은 윤이상 윤석민에게 남한에 숨겨 놓은 사생아 아들이 있었는데 북한 공작원들이 손써서 북한의 품으로 데리고 온다는 코미디 스러운 이야기이다. [27] 이에 대해서 린저의 전기작가인 산체스 무리요는 윤이상의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감명받아 친구가 되어놓고 동시에 김일성을 옹호했다고 린저의 이중성을 비판했다. [28] 윤이상은 피아노를 위한 작품은 적게 남겼는데(윤이상의 작곡 기법의 특징 상 피아노로 구현하기 힘듦),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나운영은 적지 않은 수의 피아노곡을 남겼다. [29]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나운영도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겼다. [30]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위키백과 참조 [31] 독일 베를린 출신의 여가수로, 맹인이었다. 빈터펠트의 아버지는 프로시아의 중위였다. 빈터펠트는 프레이부르크 음대와 베를린 음대에서 교편을 잡았고 수많은 오페라 가수들을 배출한 유명 오페라 가수이면서 음악 교수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