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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5:06:06

문맹

파일:문맹-문해.png
문맹은 문해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1. 개요2. 한국사에서3. 세계4. 기타
4.1. 세계의 문맹률 지도
5. 문맹인 실존인물
5.1. 고대5.2. 중세5.3. 근세5.4. 근대~현대
6. 대중문화7.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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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맹(, illiteracy)은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모르는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이르는 말로 순우리말로는 '까막눈'이라고 한다. 반대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을 문해(, literacy)라고 한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의 비율을 문맹률(, illiteracy rate), 있는 사람의 비율을 문해율(, literacy rate)이라고 한다. 이는 이분법의 관계로, 문맹률과 문해율을 더하면 100%가 된다. 한국에서는 주로 '문맹률'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한편, 문해 능숙도(, literacy proficiency) 또는 실질적 문해율()이란 한 사회에서 문서를 읽고 그 의도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구성원의 비율을 말한다. 이는 단순히 글자를 읽고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의 비율을 말하는 문맹률과는 구별되며 문해율이 낮은 것을 실질적 문맹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통상적으로는 실질 문해율 개념이 자주 쓰이고 '실질 문맹률'이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는다.

2. 한국사에서

2.1. 고려 시대

조선시대와 다를 바 없이 교육을 받는 문벌귀족/ 권문세족[1]과 호족, 즉 토호들은 문자를 익혔으나 무관들의 대부분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문맹이 매우 많았으며 고려에는 조선과 달리 무과 시험이 없었는데, 이는 병호제(세습 군인)을 기본으로 하고 군공과 특채로 무관을 선발하는 일종의 수시채용 형태였기에 일반 서민이나 천민층의 비율이 비교적 높았다. 이들은 엄연히 관료로서 자격이 있는 귀족 계층이었음에도 대부분 문맹일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정중부 무신정변을 전후해 고려시대 문관들이 무관들을 천시하는 대표적인 이유였다.[2]

하지만 같은 무관이라도 명문가 출신들은 당연히 문자를 익혔다. 최씨 정권의 2대 지도자이자 무신정권 최장 재임 지도자인 최우는 글도 잘 알고 교양 지식도 매우 풍부한 지식인이었다.

사실 고려 때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문관이 무관보다 더 우선시된지라 문관들이 갑주 입고 전쟁을 지휘한 경우가 많았다. 고려사에서 장군으로 알려졌던 강감찬만 해도 사실 문신이었다. 그때 무신은 매우 천대받았다. 이의민 같은 천민 출신들도 무신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원나라 간섭기 직후 최영 등 권문세족 무신들과 신흥무인세력 이성계 등의 제후들이 등장하면서 무신들도 식자층이 많이 생겼다. 최영과 이성계도 마찬가지로 문해를 할 수 있는 무인이었다.

2.2. 조선 시대

조선시대에는 조정 차원에서 문맹률 통계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훈민정음이 보급되면서 한자보다 익히기 쉬운 글이 생겨났고 이에 따라서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문 등을 한글로 적어 고시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몇 집 건너 한 명 정도는 글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과거시험에 공식적으로 무과가 추가되어 무신에게도 문해력을 시험했기 때문에 까막눈 무신이 사라졌다. 이순신 같은 사람은 아예 난중일기를 남기기도 했고 조선 초기 명장 남이 역시 건주부 여진족 토벌 후 한시를 짓기도 했는데 이 시는 나중에 유자광에 의해 반역자로 무고당해 남이가 거열형으로 사형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의 문맹률도 어느 정도 낮아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여성이 쓴 편지가 다수 발견되었고 하급 장교가 아내에게 개인사를 적은 편지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양반층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여유있는 집안의 여성이라면 어느 정도 문해력을 갖춘 경우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과 이웃 나라들>이나 스카스 게일의 <전환기의 조선>에는 하층민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기록이나 " 중국이나 인도는 1,000명에 1명만이 글을 읽을 수 있는데 반해 조선은 읽기가 보편적"이라는 기록을 볼 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관아 또는 포도청에서 붙이는 방을 읽기 위해서 기초적인 한자독해는 필수적이었기에, 사극에서 나오는 것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 중에서도 천자문 정도의 기초적인 한자 교육을 마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1930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국세조사에서 시행한 연령별 문맹률을 연령별 교육기간과 연계하여 역추산할 시, 조선 후기 보편적인 교육을 받은 이들로 보이는 60세[3] 이상의 문맹률은 약 79%였다. 이 정도면 전근대 기준으로는 훌륭한 편.

조선 역시 개화 이후 근대교육을 실시한 19세기 후반부터는 식자율이 상승하여 구한말 ~ 일제강점기 초기 초등교육을 받은 25세~39세[4]의 식자율은 33.3%로, 이는 당대 라틴아메리카, 1870년대 일본이나, 18세기 프랑스와 유사한 수준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2.3. 일제강점기

일본은 본국에서 의무교육제도가 1885년부터 도입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으로 오는 일본인들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초등교육을 받아 가나 문자와 한자 수백 자 정도는 읽고 쓸 줄 알았다. 1909년에 조선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의무교육이 적용되었고, 덕분에 조선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문맹률이 낮았다.

반면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학교를 가지 못할 만큼 경제력이 열악했다. 경제력이 된다 해도 자녀 전부를 학교에 내보내는 경우는 좀체 드물었다. 설사 학교에 간다 해도 학비가 상당해서 가정에 상당한 부담이 되므로 기껏 학교를 다닌다 해도 중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5]

게다가 그 시절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못 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여자의 문맹률이 더 높았다. 현재도 할머니들이 문맹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식민지기인 1910년대 1920년대의 통계를 보면 조선인의 문맹률은 99%로 나온다. 그러나 이 통계는 해석에 주의해야 하는데 1910년대~1920년대까지의 문맹률 조사는 일본어를 기준으로 조사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식민통치 초기에는 일본어 보급은 커녕 1919년 보통학교 취학률이 3.7%에 불과했을 정도로 # 초등교육조차 유명무실했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대다수는 일본어를 읽고 쓸 수 없었다.
문맹률[6] 한글 문해율 가나 문해율
합계 77.7% 22.2% 6.8%
남성 63.9% 36.0% 11.5%
여성 92.0% 7.9% 1.9%
연령 0-14세 89.6% 10.4% 6.7%
15-24세 65.7% 34.3% 14.0%
25-39세 67.6% 32.3% 6.5%
40-59세 73.4% 26.5% 1.9%
60세 이상 79.8% 20.1% 0.4%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조사된 조선인 문맹률.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문맹률이 대체적으로 70%대 후반-80%대 정도에 달했다고 추산되며, 1930년 일본 국세조사에서도 조선인들의 문맹률이 77%[7], 일본어 문맹률은 93%로 나타났다. 아동이나 청소년층들도 문맹률이 70%에 근접했고, 이는 30대-50대와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일본어 문해율만은 연령이 내려갈수록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지만 일본어 문해율이 가장 높은 연령대에서도 10%대에 그쳤고, 무엇보다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조선인 중 대부분(99.5%)은 한글 역시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전체 문맹률 수치에는 별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이를 볼 때 식민지 시기 근대교육은 문맹퇴치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식민지 당국의 근대교육 보급이 재조선 일본인의 교육 보급 및 식민통치에 협조적인 조선인을 양성하는 데 있을 뿐 일반 조선인의 교육 보급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총리 중 한 명인 이누카이 쓰요시 조차 "조선인은 노역자로나 알맞다." 라고 폄하했을 만큼, 일제는 조선인을 그저 값싼 노동력 정도로만 취급했다.[8]

1930년대 후반- 40년대 전반기에는 일본어 문맹률이 조금씩 낮아졌다. 당시 조선인들이 자녀의 출세를 위한 교육에 주목하면서 1920년대부터 학교를 늘려 달라고 했고, 더불어 일제가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해 학교를 증설한 영향이 컸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전비로 예산의 대부분을 쓰는 바람에 자국민을 제대로 못 먹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예산이 충분치 못하여 교육의 질은 별로 좋지 못했다.[9] 그리고 이런 모든 정책은 성인들의 문자 해독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서 성인층의 문맹률은 여전히 매우 높았다.

일제는 한글 문맹 퇴치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1940년대에 조선어 공교육이 완전히 금지되면서 한글 문맹이 더 늘어났다. 그 결과로 1945년 광복 직후의 조선인(분단 직전)의 문맹률은 78%에 달했다.[10] 정확히는 해방 당시 15세 이상의 인구 중 77%가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불취학자였으며, 13세 이상 인구 중 한글을 전혀 읽거나 쓸 수 없는 문맹자가 약 800만 명으로 전체의 77%를 차지했다.[11] 프랑스에게 지배당했던 프랑스령 알제리도 자원 배분을 피에누아르와 친불파[12]에게만 배분하여 대다수 아랍인들이 학교에 갈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인구가 문맹이었으며 베트남에서의 문맹률도 1945년에 80% 후반에 달했다.

조선총독부 후기에는 조선어 문맹률은 조사 대상에서 빠진다.

1920년대 말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구독자 확대를 목적으로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브나로드 운동을 벌이는데 자세한 통계가 남지 못했다. 그나마 이 브나로드 운동조차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당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이던 조선인 지식인들은 혹시 독립운동으로 인식되어 탄압당할까봐 고작 기본적인 숫자 계산이나 글자 읽고 쓰기 정도밖에 가르치지 않는 편이었는데 조선총독부는 그조차도 봐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못 배운 한' 때문에 해방이 되자 한반도에는 대학교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한반도에 대학교가 경성제국대학교 1곳 뿐이었고 그나마 입학생들의 70~80%가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일 만큼 조선인은 대학 교육에 소외되었는데, 해방이 되고 나서 불과 10년 후인 1955년에는 한국에 대학교가 무려 53곳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2.4. 대한민국

광복 직후 남한 지역의 문맹률은 12살 이상 전체 인구(10,253,138명)의 약 78%(7,980,922명)[13]로 높았다. 비교하자면 같은 시기 말레이시아(62%: 1947년 기준), 짐바브웨(64%: 1947년 기준)보다는 높고, 인도(86%: 1951년 기준)보다는 낮았다.

그리하여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문맹 퇴치를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삼았고, 이는 미군정에서도 계승하여 문맹 문제를 관장할 성인교육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문강습소를 설치 운영했다. 또한 공민학교를 설치하는 등 학령기를 초과해서 초등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한 아동/청소년 및 성인들을 위한 교육 정책을 펼쳤다.

문맹 퇴치 운동이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며 이전까지 금서나 마찬가지였던 한국사 서적과 국어독본책의 발행량이 크게 늘어 종이부족 문제까지 벌어질 정도로 교육열이 커졌고, 각 지역별로 공민학교와 국문강습소가 각 지역별로 속속 들어섰으며 농민단체에서도 농한기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글 교육에 나섰다. 이 때 공민학교는 1만 6,800여개가 설치되었고, 교사도 15,000명이 근무했다.

이러한 문맹 퇴치 운동은 1948년 제헌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었는데, 그 결과 1948년 문맹률은 정부 수립 당시 약 41.3%(542만명/남한 내 12세 이상 인구 1,308만명)으로 광복 직후에 비해 절반 이하 수준으로 떨어졌다. 링크1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해 문맹 퇴치가 잠시 휘청였지만, 전쟁이 끝나고 정국 안정화가 이루어진 후 바로 재개되어 농한기 농민들과 군입대한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농민들의 경우에는 2~3달간 교육시키는 방식이었고, 군대에서는 글을 읽지 못하는 병사들을 장교들이 별도로 교육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그 시절 군대에서는 병들에게 국어 교육뿐만 아니라 농기계 사용법까지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당시 시대를 겪어 본 노년층들과 그들에게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크게 받은 기성 세대들 사이에서 "군대에 가야 사람 된다"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다.

이상의 정책으로 1958년 문맹률은 4.1%까지 떨어졌다.

다만 이 58년의 문맹률 통계는 맹점이 있었는데, 글을 읽을 줄은 아는데 쓰기를 못 하거나 심하면 자기 이름 석 자만 쓸 수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글을 정말 완전히 못 읽어서 사회생활에 지장이 있는 수준의 완전 문맹은 대부분이 퇴치되었지만, 부분적인 문맹자는 1960년대 초중반까지도 상당수 남아 있었다. 1960년 경제기획원의 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문맹률이 약 27%에 달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58년 통계와 달리 부분 문맹자도 문맹자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맹 퇴치 교육은 꽤 늦은 시점인 1970년대 초반까지 이뤄졌으며, 문맹률이 감소되었음에도 1967년 제7대 총선, 제6대 대선 때까지 선거 후보자 기호를 작대기로 표기하는 등 반문맹자들을 배려하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국민학교 진학률이 100%에 육박하게 되고, 창칼 파동 이후로 중학교 교육까지 보장되기 시작해서 1970년대에 대중화되었기에 정부 차원의 문맹 퇴치 정책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되었다.

1950년대생 이후의 문맹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14] 80대 이상의 고령층에서는 아직까지 글을 못 읽는 노인들이 여전히 일부 존재하는데 바로 이런 연유이다. 이런 문맹 노인들은 일제강점기 때 유년기를 보낸 탓에 교육에서 열외되었고, 나라가 혼란한 통에 글공부를 배울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들은 1990년대만 해도 꽤나 많아서 당시 어린이 드라마에서는 '우리 할아버지/할머니가 드디어 한글을 배우셨다'는 식의 대사가 자주 나오기도 했다. 2010년대를 넘어서도 아직 생존하고 있는 문맹 노인들에게 정부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글공부를 도우며 한글을 배우도록 돕고 있다.

평생 문맹으로 살아 온 어르신들이라고 해도 반드시 국어를 교육시켜야 하는 이유는 일상생활에서부터 큰 지장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문맹 어르신을 등쳐먹으려 드는 사기꾼들이 많기 때문이다. 무려 2022년에 전북 고창에서 글 모르는 어르신을 이용해 수억 원을 꿀꺽한 횡령 범죄가 발생했다. 세상 물정에 빠삭하고 머리 좋은 사람도 작정하고 사기치면 손쉽게 털어먹는 종자들인데, 문맹일 경우 특히나 범죄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당연지사다.[15]

한국의 문맹률에 대해 통계청이 공식적으로 잡은 통계는 1966년이 마지막이다. 1960년에 이미 의무교육 취학률이 96%에 달하면서 문맹률을 조사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져 더 이상 기초 조사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에서는 문맹률을 약 1% 이내 정도로 보고 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이 통계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사실 OECD에 들어가는 국가 정도 되면 대부분 문맹률은 1% 미만이 보통이고, 높아 봐야 5%를 넘지 않는 정도다. 고령층이거나 심각한 지적장애인 등이 아니면 사실상 문맹은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다.

물론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문맹인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대부분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며[16] 특히 할머니들이 그렇다.[17] 일제강점기와 그 직후의 한국 전쟁 세대들은 사회혼란으로 인해 의무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글자를 배울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남성들은 후에라도 군대를 간다든지 경제 활동을 위해 글자를 익힌 사람이 대부분이라 나이대에 관계 없이 남성 문맹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편이지만, 여성들은 문자가 필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적었으므로 그대로 평생 글자를 모른 채 사는 일이 많게 되었다. 또한 1920년대~ 1930년대 출생 세대들은 민족말살통치로 일제가 아예 한국어 교육을 못하게 막아버려서[18] 배우기가 쉽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이 때 한글을 못 배운 할머니들은 일본어는 일본어의 2개 문자인 가타카나/히라가나는 다 읽고 쓸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이런 할머니들도 일본어의 나머지 한 문자인 한자는 기본적인 것만 조금 알 뿐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런 노인 문맹은 종종 끔찍한 비극을 야기한다. 특히 농약 같은 독극물을 일상적으로 취급하는 시골에서는 가루형 농약이나 살충제 밀가루로 착각해 요리에 넣었다가 같은 자리에서 식사를 한 사람들이 몰살당한다거나, 독극물을 드링크 등으로 착각해 마셔버린다거나 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

문맹퇴치 교육이 몇 개월 단기과정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배우기는 했는데 진도가 안 나간다거나 글을 잘 쓰지 않는다거나 하는 이유로 까먹은 경우도 존재한다. 성인들도 일을 해도 겨우 먹고 사는 수준이었고 학교로 보낸다 해도 학생 수가 매년 폭증하여 학교 자체가 터져나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성인이 꾸준하게 교육받긴 힘들었다. 그래서 농한기나 일요일, 혹은 근무시간이 끝난 뒤에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문맹이라 불편할 텐데 왜 배우러 오지 않는가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이 문맹 노인들은 평생을 문맹 아닌 사람들과 비교당하고, 그런 본인들을 자학하며 살아온 신세다. 글을 몰라서 생기는 불편함보단 자기가 글을 모른다는 데에서 생기는 창피함이 더 컸고, 그 상태로 무려 수십 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로 글 못 읽는다고 인정하고 먼저 배우러 갈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은 것.

또 희귀한 경우이긴 하지만, 부모와 학교가 전부 관심이 없어서 중학생인데도 한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례가 TV에 나온 적이 있다. 이처럼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 것도 방임형 아동 학대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다문화 가정에서 한국어가 서툰 동남아 여성들의 자녀교육 무관심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한글을 깨치지 못한 아동들이 부쩍 늘었다.

21세기에도 시각장애인의 문맹률은 무려 86%[19], 청각장애인의 문맹률은 30%나 된다. 발달장애인 역시 비장애인보다 문맹률이 높은 편이다. 지능 자체가 낮은 장애인은 학교에 제대로 다니고 교육을 받아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발달장애라도 고기능 자폐나, IQ 40~70 정도인 경우는 글자를 아는 경우도 있으나, IQ 40 미만인 경우는 글자를 배우는 것이 매우 어렵다.[20]

2010년대 후반에 들어 인터넷 상에서 10-20대의 높은 실질 문맹률에 대한 우려가 종종 논의되곤 하지만 이렇다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거나 한 건 절대 아니기에 어느 정도 과장된 면이 있는 편이다. 만약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다면 스마트폰이나 키오스크 같은 건 다루지도 못한다. 넷플릭스 결제, 티켓 예매 같은 거나 주식 매매 같은 것도 당연히 문해력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된 건 한국의 세대 불문 처참히 낮은 독서율 탓이 크다.[21] 물론 지금보다 책의 위상이 높고 학교에서 독서 시간을 만들며 강제로 책을 읽힌 1980년대생인 30대-40대의 경우 문해율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한자어나 속담 등도 잘 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은 문해율 문서로.

3. 세계

세계 문해율 지도[22]

한 나라의 교육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 중 하나이다. 교육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문자 등의 해독이고, 공용어를 읽고 쓸 수 있는 교육은 어느 나라든 초등 교육의 핵심이다. 문맹률이 낮을수록 그 나라에는 최소한의 교육을 받은 사람의 비율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문맹률이 높은 나라는 학교시설과 교사수 등 교육 인프라의 부족, 교육 기회에 있어서 성별, 계층, 지역 등의 차별, 아동 노동이나 조혼 등으로 인해 교육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몇몇 국가에선 의외로 문맹의 비중이 높아서, 연예인들 중에도 대본을 읽을 줄 몰라서 녹음한 것을 듣고 외웠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심각한 나라도 있다.[23] 단순 문맹이 아니라 난독증 때문에 대본을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톰 크루즈. 혹은 공용언어가 여러 개인 나라인 경우도 있고, 방언의 차이로 인해서 대본을 읽을 수 없는 나라도 있다. 보통은 집이 가난해서 교육을 못 받은 아이일수록 문맹이 되는데 과거 제대로 습자교육을 못 받아서 한자를 몰랐던 성룡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성룡은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자를 전혀 몰랐는데 글공부를 할 틈이 없어서였다. 그는 스타가 된 뒤 한자를 익혔다. 입말로는 무려 광동어 표준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 일본어 등 다국어 구사가 가능하지만 글은 정작 늦게 알았다. 이는 당대 중국 및 대만은 물론 영국이 통치하던 홍콩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 나라/지역들은 1930년대 1940년대에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이다.[24]

한 예로 중국본토만 해도 문맹률이 80%를 넘겼을 정도로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25] 대만일치시기 당시 대만이나 영국령 홍콩이던 홍콩은 이보다는 나았지만 난민 등이 많고 국가 분위기가 난리인 탓에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도 마찬가지로 문맹률이 처참했다.

그러다가 대만 국부천대 이후인 1950년대~ 1960년대에 걸쳐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이 보편화되면서 문해율이 급속히 높아졌으며 홍콩 역시 1967년 구룡폭동을 겪은 후 영국이 홍콩에 대해 신경쓰기 시작하면서 초등/중등교육 보급으로 문해율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국토가 위낙에 넓어 전국적인 교육체계를 갖추는데 시간이 걸렸던 중국 간체자를 보급하는 등의 방법을 써서 문맹률을 차츰차츰 낮추어 나갔고 2000년대 이후로 문맹률이 10% 아래로 떨어졌다.

신생 국가였던 소련은 문맹 퇴치에 성공하였다. 러시아 제국의 문해율은 24%였다. 소련 정부는 1922년부터 1937년에 걸친 대대적인 교육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1938년 소련의 문해율은 남성 90.8%, 여성 72.5%였다. 1950년대 소련의 문해율은 100%가 되었다.

북한에선 1945년 말에 문맹퇴치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불과 4년 만인 1949년에 문맹이 전부 퇴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이 집권 이후 제일 먼저 제기한 안건이 소학교 설치와 문맹퇴치였고, 교육문제를 직접 챙기면서 의욕적으로 추진한 결과이다. 비록 1949년에 문맹이 완전히 퇴치되었다는 것은 의심이 가지만 남한과 마찬가지로 문맹퇴치가 빨리 이루어진 것 자체는 사실이고, 탈북자들의 증언에서도 북한에서 글을 모르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 사실, 전체주의 국가인 북한의 특성상 글은 사상교육이나 체제 선전이 매우 중요해서 선전선동 문구를 잘 읽어야 하는 것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문맹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한편 튀르키예의 경우 문맹률이 이슬람권에서 가장 낮다. 이는 튀르키예의 국부인 아타튀르크 덕인데 아타튀르크는 문맹이 많았던 터키 라틴 문자를 도입하여[26] 이를 국민들에게 가르치는 일로 말년을 보냈다. 그는 죽기 전날까지도 전국을 순회하며 터키어 알파벳을 보급했다. 아타튀르크의 업적 중 대표적인 업적이 갈리폴리 전투 및 그리스군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 튀르키예 본토인 아나톨리아 반도를 외세로부터 지켜낸 일과[27] 라틴 문자를 도입해 문맹을 퇴치한 일이다. 튀르키예의 문맹률은 유럽 평균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높지만 이슬람권에선 가장 낮은 수준이다.

과거 이탈리아에서는 문맹인 사람들에게는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선거권은 '21세 이상인 남성으로서 글을 아는 자'에게만 부여했기 때문. 사실 이 규정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브라질 페루 같은 남아메리카 각 국가에서도 존재했고 미국도 흑인 참정권 박탈을 위해 의도적으로 시행했다. 미국에서는 흑인들에게 의도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내고, 백인들에게 쉬운 문제만 내는 식으로 대놓고 차별을 가했고[28] 중남미에서는 교육 인프라의 미비와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초창기에는 소수계층인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출신 백인들이나 운좋게 교육받은 사람들 정도가 되어야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보통선거가 시행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대원들 중에도 문맹이 많다. 2021년 기껏 탈레반이 정권을 탈환하고도 문맹이 발목을 잡는 중이다. 거기다 탈레반은 교육받은 기술자와 전문가들을 탄압하기 때문에 교육받은 사람들은 기껏해야 이슬람 신학교육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대한민국과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문해율 높은 나라 중 하나는 싱가포르다. 무려 인구의 98%가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 싱가포르의 문자가 라틴 문자+ 간체자+타밀 문자의 3개 문자가 있고 언어는 영어+ 표준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의 4개 언어가 병용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 이는 싱가포르의 철저한 교육 정책 덕분이다. 리콴유는 민족 통합 정책과 차별금지 정책, 이민 친화책, 공중위생 및 환경보전책, 강력한 치안유지 및 국가보안 정책과 함께 문맹퇴치도 중요시했으며 싱가포르의 공립학교는 타 영미권과 달리 질이 낮은 것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습자교육을 철저히 시킨다. 중국계 싱가포르인 젊은층이 입말로만 중국어를 써서 한자를 잘 모른다고는 하지만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켜녕 타 다민족/다문화 선진국들과 비교해도 문해율 높은 나라가 싱가포르다. 싱가포르의 실질 문해율은 매우 높다.

그런가 하면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전체 인구의 90%가 글자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그나마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가 고대 사회에서 문맹률이 낮았던 지역인데 아테네에서도 글씨를 읽거나 쓸 줄 아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0~15%에 불과했으니 나머지 전체 인구의 85~90%는 문맹이었다.[29]

이는 당연히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전 국민에 대한 의무교육 제도가 없었고, 비싼 돈을 낼 여유가 있는 상류층 사람들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연히 문맹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로마의 관리들 중에서도 글자를 제대로 쓸 줄을 몰라서 아예 돈을 받고 글자를 대신 써주는 아르바이트 업무조차 있었을 정도로 문맹률이 높았다.[30]

그리고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팔레스타인 유대 사회에서도 문맹률이 굉장히 높아서,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 같은 12사도들도 의사였던 사도 루카, 세관원[31]이었던 사도 마태오 정도를 빼고는 대부분도 문맹이었다. 신약성경 대부분의 저자인 사도 파울로스[32] 같은 경우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한 뛰어난 지식인이었고,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교리의 대부분은 사실 예수의 말이 아니라 파울로스(바오로/바울)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파울로스(바오로/바울)가 예수를 따른 사람들 중에서 의사였던 루카, 세관원이었던 마태오 등을 빼고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33]

한편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도 문맹으로 알려졌다. 무함마드의 경우는 그의 제자들과 아내 카디자 등이 식자층이 많아 무함마드의 입말을 받아 적어서 쿠란과 하디스로 만든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 무함마드가 문맹이 아니었단 반론도 있다.

아직까지는 시각장애인의 문맹률이 매우 높은 편인데 전세계 시각장애인 중 무려 95%가 글을 모른다고 한다. 점자는 배우고 익히기 상당히 어렵고, 다수의 나라에서는 점자를 사용할 여유도 없다.

선진국이라도 문맹자가 적은건 아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문맹자가 6백만명 넘는다. # 독일 인구의 13명 중 1명이 글을 모르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는 과거 대비 교육 인프라가 많이 발달해 2020년대 기준으로 웬만한 극빈국들도 성인 문해율이 60%를 넘길 정도다. 성인 문해율이 이 정도니 아동 문해율은 말할 필요도 없다. #

4. 기타

문맹 퇴치, 즉 문맹이 많은 지역에 글을 가르치는데 큰 공헌을 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유네스코에서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을 수여한다.

이 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유네스코가 한글을 높이 평가하여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세종대왕상은 1989년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상이며 유네스코의 세종대왕 상 사이트 상금도 대한민국 정부가 출연한 기금으로 운영된다. 단지 대한민국 정부가 만든 상을 유네스코가 문맹퇴치를 위해 수여할 뿐인데 노벨상이 원래 노르웨이에서 만들어진 후[34] 범세계적 단체인 노벨상 위원회에 의해 수상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문맹률과는 별개로 UN개발계획에서는 리포터로 전세계 문해율을 발표하고 있다. 2009년 보고에 따르면 문해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조지아다. 대한민국은 공동 21위다. 이 순위에서 한국을 포함해 중상위권 국가들은 모두 문해율이 99%에서 소수점 단위의 차이만 보이고 있으니 큰 의미는 없다.

OECD에서는 IALS(국제성인문해조사)이후 국가간 문해 능숙도나 컴퓨터 활용능력, 수리처리 능력 등 성인들의 능력을 측정하고자 하는 사업을 확대해서 PIAAC라는 것을 시작했고 여기에는 한국이 공식적으로 참여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각 국가마다 5천명의 인원을 선정해 진행된 1차 조사 결과 한국은 그 순위가 전체적으로는 중위권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35]만 보자면 36개국 중 일본, 핀란드, 네덜란드에 이어 4위에 속하며, 중장년층[36]부터는 OECD 평균에도 못 미치는 문해 점수를 보인다.

한국은 세대 격차가 가장 크게 나는 국가들 중 하나이다.

국립국어원에서 2008년 발행한 국민의 기초 문해력 조사 pdf 자료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문맹률은 1.7% 로 대다수 70대~80대 이상 노인들이였지만, 그 인구를 포함한 전 국민의 7%,약 260만명의 사람들이 국어 생활에 기초적으로 필요한 문해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고 적시하고 있다.(p116-117)

먼 미래에는 문맹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데, 문자 그 자체를 도태시킬 정도로 기술이 발달하거나 글을 배우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 그렇지만 아직 문명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문자를 대체 할 만한 소통수단이 없다는 게 문제다.

미래 학자 엘빈 토플러[37]는 현대의 문맹은 읽고 쓰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학습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특이하게도 글을 읽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은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우간다 독재자 이디 아민이 이 케이스였다. 중화권 일본의 젊은이들도 디지털 시대 들어 손글씨보단 키보드를 자주 사용하다보니 획이 많거나 자주 안 쓰이는 일부 한자를 상대로 이 현상을 겪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

4.1. 세계의 문맹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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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설명[38]
파랑 문맹률이 매우 낮음 (3% 미만)[39]
하늘 문맹률이 낮음 (3~10%)[40]
밝은장미색 문맹률이 다소 낮음 (10~25%)[41]
밝은연어색 문맹률이 보통임 (25~30%)[42]
연어색 문맹률이 다소 높음 (30~50%)[43]
갈색 문맹률이 높음 (50~60%)[44]
암적 문맹률이 매우 높음 (60% 초과)[45]
회색 자료 없음[46]

위의 지도에서 파란색~하늘색으로 표기된 나라들은 문맹률이 아주 낮은 나라들이며 짙은 적색계열 문맹률이 상당히 높은 나라들이다.

보다시피 아프리카 중동, 남아시아 일대에서 빈곤뿐만 아니라 식민지배 및 독립 이후 현지 기득권층들의 우민화 정책까지 맞물려 문맹률이 비교적 높은 편임을 알 수 있다.

선진국들은 문맹률이 보편적으로 개발도상국에 비해 낮은 편이다. 대한민국, 대만,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 선진국들은 문해율이 아주 높은데 교육 격차가 적은 덕이다.

북한, 러시아/ 벨라루스 중앙아시아 구소련, 중국, 쿠바를 비롯한 옛 공산권도 대체로 문맹률이 낮은 편이다. 이는 과학적 공산주의와 인민의 나라를 표명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이념적으로도 문맹 퇴치가 필요했던 현실적으로도 인재 양성과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자 육성에는 교육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상 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지속적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실시해 문해율을 높였다.

또한 소련은 다민족 · 다문화 국가로서 연방 구성국과 무수히 많은 민족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공용어와 공용 문자를 제정했다. 다만, 소련의 교육 제도에는 소수민족들에 대한 동화를 꾀하는 성격이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중국 역시 문자 개혁을 실시해 간체자를 보급하고 교육에 힘썼다. 대만보다는 문해율이 낮지만, 중국의 엄청난 인구를 생각한다면 낮다고 지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시각장애인들은 국가 상관없이 문맹률이 매우 높으며 발달장애인들도 시각장애인들만큼은 아니지만 비장애인들에 비해 문맹률이 높은 편이다. 이는 그들의 신체적 문제와 더불어 점자 교육을 시키는 체계가 아직 그리 발달하지 않은 탓이 크다.

문맹률은 전세계적으로 빠를게 개선되고 있는 중이다. 2010년대만해도 문맹률이 50%가 넘어가는 국가가 30~40개국이나 되었는데 2020년대로 와서는 12개국으로 줄어들었다.[47]. 웬만한 개발도상국에 속한 국가들도 선진국과 비슷한 95% 이상의 식자율을 보이고 있으며 식자율이 90%가 넘는 국가만 해도 120개국이나 된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않은 최빈국 개발도상국 하위권에 있는 웬만한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도 70~80%대 식자율을 보이고 있다.

5. 문맹인 실존인물

생존 당시 문자가 없던 사회속에 있던 인물과[48] 전근대사회에서 굳이 글 쓸 일이 없었던 서민들은 제외한다.

5.1. 고대

5.2. 중세

5.3. 근세

5.4. 근대~현대

6. 대중문화

서브컬처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속성이다. 이고깽만 하더라도 언어나 문자 장벽으로 고생하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초반에 언어장벽에 부딪히더라도 나중에 말을 할 수 있을 때 쯤이면 글도 다 깨우치는 경우가 많으니 코난 더 바바리안 같은 경우처럼 컨셉 자체가 야만인인 경우 빼면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문자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한 작품에 출연하는 인물이나, 문해 개념이 없는 동물 캐릭터는 제외.[53]

서브컬처 커뮤니티에서는 애니를 많이 시청해서 일본어를 듣고 말하는 건 대충 가능한데, 정식으로 일본어를 배운 적은 없어 일본어로 된 글은 읽지 못하는 오타쿠를 문맹이라고 놀리기도 한다.[72] 근데 사실 이게 전근대 사회에서 문맹이 탄생하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뼈 있는 농담.

7. 관련 링크


[1] 조선시대의 양반과 같은 귀족 계급이다. [2] 그런 수준이였기에 군대 내 소통을 위한 필담은 불가능했다. [3] 1870년대 이전의 세대로 최소 고종 초기에서 최대 철종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4] 1891년~1905년생 [5] 2천만 국민 중 80∼90%가 문맹자였던 1920년대, 1928년 3월 16일자 「동아일보」에는 “어찌하면 우리는 하루 바삐 이 무식의 지옥에서 벗어날까. 어찌하면 이 글장님의 눈을 한시 바삐 띄어볼까…….”라는 기사를 통해 ‘글장님 없애기(문맹퇴치) 운동’을 선언했다. 4월 2일에는 안재홍, 방정환, 최현배, 최남선 등 명사 30여 명의 강연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조선총독부가 3월 29일 문맹퇴치운동 금지령을 내리며 막았다. 링크1 [6] 여기서는 한글과 가나를 둘 다 모르는 비율. [7] 다만 이 수치 자체는 일반적으로 문맹률을 계산할 때는 빠지는 아동 인구를 포함해서 높게 나온 면도 있다. 당시 15세 이상 조선인 문맹률은 69.9%였다. [8] 조선총독부 등 일본 식민지배 당국은 1910년대에 독립운동의 산실이 될 수 있는 서당을 강경하게 탄압했다. 서당이 한학뿐만 아니라 근대식 신학문과 한국사도 교육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한 것이 탄압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서당이 없어진 시골에 공립학교가 들어선 건 아무리 일찍 잡아도 1920년대로 약 1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9] 당시 일본은 전비만으로 국가 예산의 80% 넘게 쓰고 있는 상황이었고 1940년대가 되면서 국가 예산의 98%를 전비로만 사용했다. [10] 1947년 미 군정청 조사 결과. [11] 다만 여기에는 일본어만 배운 사람도 한글 문맹자로 간주되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해방 후에는 판검사들도 한글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판이었다. 변호사들은 조선인 변호 등을 하며 조선인들과도 소통했기 때문에 한글과 한국어를 할 줄 알았지만 판검사들은 대부분 일본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의 고등문관시험으로 입직한, 사실상 일본인이나 다름없이 살았기 때문에 그냥 일본어가 모어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성인 문맹률이 70%를 넘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12] 세파르딤, 아르키 [13] 지역별 문맹률은 서울, 경기가 68%, 전라남도-제주도는 77%, 충청남도 78%, 경상남도 78%, 강원도 80%, 경상북도 80%, 전라북도 81%, 충청북도 83%였다. 동시기 북한의 12세 이상 문맹자는 230만 명 정도였다. [14] 이마저도 대부분이 지적장애인이라 애초에 교육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15] 문맹 퇴치 교육에 대한 수필 《팔순에 한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에서는 친구가 내민 서류에 도장 찍었다가 바로 그 친구에게 집을 빼앗긴 노인의 사례까지 있을 장도였다. [16] 2008년의 통계에서 노인 문맹률이 6.6%로 집계되었다. 노인 인구에 고학력층이 계속해서 유입되는 동시에 문맹자들은 유입 없이 사망으로 빠지고 있으므로 현재는 이보다 낮을 것으로 추산된다. [17]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한자는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반대로 한글을 제대로 못 쓰는(아예 모르는 건 아니고 맞춤법을 엉망으로 쓴다든지 한다는 뜻) 특이한 사례도 가끔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도 아직 서당이 적게나마 남아 있어 소학교 대신 서당을 다녔던 경우 나중에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하면 이런 경우가 생길 수 있었고 민족말살통치 기간에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한글보다 일본어를 먼저 배워 한자 히라가나, 가타카나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한글을 배운다고 해도 20세기 초기의 조선어 맞춤법은 분철이 아니라 연철이 주류였기 때문에 분철 독해에는 문제가 없어도 쓰기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18] 1938년 3월 15일 조선어를 수의과목(선택과목)으로 격하하고 몇 년 뒤에는 아예 삭제했다. [19] 후천적 요인으로 시각장애인이 되거나 약시인 경우는 거의 문맹이 아니다. [20] 2019년 7월 1일부로 정신건강의학부문 장애등급은 중증으로 통일되었다. [21] 타 선진국들과 비교해볼 때 한국의 독서율은 선진국 최하위 수준으로 처참하게 낮다.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들도 매출이 줄어들었을 정도로 책을 안 읽는 추세라 문제시되고 있다. [22] 동아시아, 북미, 유럽, 오세아니아 등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선진국들은 기본적으로 양호하다. [23] 대부분 아프리카 등 최빈국 [24] 성룡이 태어났던 1950년대에도 중화권은 문맹률이 매우 높았다. [25]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6년 이후 그나마 괜찮아졌다. [26] 튀르키예는 오스만 튀르크 시절 이래 아랍 문자를 쓰고 있었으나, 자음이 중심이 되고 모음 표기를 거의 하지 않는 아랍어와 달리 모음의 개수가 많고 중요한 튀르키예어를 표기하는데 있어 아랍 문자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거기다 아랍어/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단어의 경우 철자법이 상당히 괴리되어 있어 아랍 문자를 읽을 줄 알아도 맞춤법에 따라 쓸 줄 아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27] 세브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을 반식민지로 만들며 동쪽의 청나라처럼 만들었던 열강은 갈리폴리 패전으로 전부 튀르키예 본토에서 쫓겨났다. 그리스군 역시 참패하고 에게 해의 섬들만 가져갈 수 있었다. [28] 그 어려운 문제를 맞히는 흑인이 나오면 그냥 두들겨 팼고, 설령 투표권을 인정받아 투표소에 가도 흑인이 투표를 왜 하냐고 대낮에 총으로 쏴죽이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29] 현대에 저 정도 문맹률을 보이는 집단은 시각장애인 정도에 불과하다. [30] 서기 184년,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스 호르무 마을에서 근무했던 로마 제국 서기관 페타우스는 "지방 서기관인 나 페타우스가 이 서류를 제출합니다"라는 문장조차 제대로 쓰지를 못해서 계속 마지막 단어를 빠뜨렸다.. 출처: 성경 왜곡의 역사/ 바트 어만/ 청림 출판 [31] 개신교에서는 세리라고 번역한다. 세리는 세관원의 옛날식 표현이다. [32] 개신교에선 대부분 사도 바울, 가톨릭에선 사도 바오로로 호칭한다. [33] 원래 초대 기독교에서 사도 파울로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른바 파울로스(바오로)파는 예수를 구세주로 섬기는 것 이외에는 유대교의 율법을 그대로 지키던 율법파보다 훨씬 교세가 약한 소수 세력이었다. 그러다가 율법파가 서기 70년대에 로마 제국에 맞선 대규모 반란에 가담했다가 로마군에 의해 전멸당하고 나서, 살아남은 파울로스파가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 오늘날 기독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었다. 출처: 그리스도교의 탄생/ 정기문 지음/ 도서출판 길 [34] 노벨은 정작 스웨덴 사람이었으나 그의 인생은 말년에 대부분을 노르웨이에서 살았다. 그래서 노벨상 위원회는 오슬로에 소재한다. [35] 어린 세대인 16세-24세의 10대 및 20대이다. [36] 2020년대 기준으로는 49세~50세 이상이다. [37] 제 3의 물결이라는 베스트셀러 저자인 미래 연구가이다. [38] 위의 지도 옆 색인에 나온 수치는 문해율로, 100%에서 해당 숫자를 빼서 문맹률을 구하면 된다. [39] 대한민국, 북한, 일본, 몽골, 싱가포르(지도에서는 하늘색으로 칠해진 오류가 있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스라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몰도바, 불가리아,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체코, 독일,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이탈리아, 산마리노, 바티칸,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 안도라, 모나코,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그린란드, 캐나다, 미국, 쿠바, 세인트키츠 네비스, 바베이도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트리니다드 토바고, 가이아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호주, 뉴질랜드, 마셜 제도, 통가, 사모아. [40] 중국, 대만, 베트남,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몰디브, 키프로스, 그리스, 코소보,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몰타, 포르투갈, 튀르키예, 짐바브웨(이쪽은 교육 제도를 통해 초등학교 입학률이 93%나 된다.), 세이셸, 멕시코, 나미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바하마, 세인트루시아, 그레나다, 코스타리카, 브라질, 파나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칠레, 파라과이, 누벨칼레도니, 피지, 팔라우. [41] 미얀마, 말레이시아, 오만, 카타르, 바레인, 레바논, 요르단, 리비아, 상투메 프린시페, 적도기니, 콩고 공화국, 케냐, 레소토, 모리셔스, 도미니카 공화국, 자메이카, 앤티가 바부다, 도미니카 연방, 온두라스, 수리남, 프랑스령 기아나, 페루, 볼리비아, 미크로네시아 연방. [42] 캄보디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튀니지, 가봉, 르완다, 탄자니아, 보츠와나, 에스와티니, 카보베르데, 벨리즈,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솔로몬 제도, 바누아투. [43] 라오스, 인도, 모로코, 알제리, 수단 공화국, 지부티,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카메룬,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앙골라, 잠비아, 말라위, 마다가스카르, 과테말라. [44] 동티모르, 예멘, 모리타니, 라이베리아, 가나, 토고, 부룬디, 에리트레아, 코모로, 아이티, 파푸아뉴기니. [45]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말리, 세네갈, 감비아, 기니비사우, 기니, 시에라리온, 부르키나파소, 베냉, 니제르,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남수단,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모잠비크. [46] 팔레스타인, 사하라 아랍 민주공화국, 나우루, 키리바시, 투발루. [47]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베냉, 기니, 부르키나파소, 소말리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아프가니스탄, 말리, 니제르, 남수단, 차드 [48] 예를 들어 잉카 제국의 경우에는 '키푸(quipu)'라고 끈을 묶어서 정보를 기록하는 결승문자가 있기는 했지만, 정규적 기준으로의 문자는 없었다. [49] 陳伯之, 생몰년 미상, 남조 양 시기에 활약한 장군이자 진호아의 아버지. [50] 실제로 천계제는 목공예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이었고, 수준도 건청궁의 목재 미니어처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고 한다. [51] 참고로 상술한 천계제 치하에서 사실상 실권자였던 사람이 바로 위충현이었다. 즉, 천계제 시기는 문자 그대로 문맹 황제 치하의 문맹 실권자의 천하였다는 초유의 시대였던 셈이다. [52] 다만 문맹인 것과는 별개로 타고난 머리는 좋았다고 한다. [53] 동물 캐릭터라도 의인화된 캐릭터거나, 문자를 사용한다는 설정이 있으면 당연히 논외다. [54] 물론 인간 세계에 적응한 후에는 문맹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55] 그나마도 리더인 올가 이츠카 한자만 알고있다. [56] 국내 기준으로는 이 소설이 나오던 시기의 세대들이 가장 잘 기억하는 문맹 캐릭터일 것이다. [57] 오죽 그녀의 삶이 기구하고 비참했으면, 마초 기질이 강한 상남자 클라우디오 마나우스가 샤를로트의 하소연을 듣고 너무 불쌍하다며 통곡했을 정도다. [58] 물론 게임의 배경이 되는 17세기만 해도 중국이나 조선을 제외하면 공교육에 대한 관념이 희박했던건 감안해야 한다. 동시대의 유럽 원주민들도 알파벳만 간신히 떼고 어릴 적부터 온갖 잡일에 동원되던 시대에 집시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59] 영화판 한정. 맥베인과 똑같이 생긴 캐릭터(아놀드 슈왈제네거 패러디)인데 나왔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나는 지도를 하지 독서는 하지 않아(I lead, not read!)"라는 말이 나온다. [60] 2008년판에서 새해아침에서 고길동이 일기쓰라고 공책을 주었는데 날씨를 꾸물꾸물이라고 적은거 보면 문맹으로 나왔다. [61] 참고로 고대 그리스인에서는 책과 문서를 혐오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하고 논쟁하고 토론해야 지식인이지 방구석에서 혼자 책만 읽으면 골방철학자가 된다는 논리였는데, 쉽게 말해 현대의 TV가 바보상자라 불리던 것과 같다. [62] 젊은 시절에는 신문을 부하에게 대신 읽어달라고 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다만 교동보통공립학교를 다닌 적은 있는 데다가 후에 정치인이 된 후 신문을 혼자서 읽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계에 진출하면서 글을 깨친 듯 하다. [63] 1부 한정. 2부에서는 편지를 읽을수가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64] 나중에 눈물의 곡절에게 한글을 배우게 되며, 신문을 혼자서 읽는 장면이 나온다. [65] 복수 예고장을 보내기 위해 작성하려는데 자기가 문맹이라서 똑똑한 렌코츠에게 자기가 말하는대로 받아쓰게 했다. 그리고 시대의 무대가 무대인 만큼 그를 제외하고도 꽤나 많은 인물들이 문맹일 것으로 추정된다. [66] 알파벳만 배웠더니 마법의 힘으로 머릿속에서 일본어로 자동으로 변환되어서 하루만에 글을 익힌다. 메이드 신분인 시에스타가 독서를 한다는 것에 루이즈가 놀라는 등 작중 세계의 평민 문맹률이 매우 높아 이세계에서 온 걸 숨기고 있었음에도 크게 의심받진 않았다. [67] 동생 진석의 뒷바라지와 어려운 집안 살림 때문에 학업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초반에 같이 구두닦이를 하던 용석이 진석에게 맞춤법을 묻자, "나한테 글자 묻지 말랬지?"라며 면박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어머니께 쓴 편지를 보면 맞춤법이 서툴긴 해도 아예 글자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68] 물론 정체를 생각하면 노예 코스프레를 위한 구라였을 가능성이 높다. [69] 원판에서는 라멘 메뉴. [70] 문맹이라는 사실이 작품의 핵심을 담당한다. [71] 작중 그래도 귀족 집안 자제인 레온에게 너한테 문맹 탈출은 무리라고 대놓고 디스를 당했다. [72] 하지만 이렇게 애니 시청만으로 일본어를 익혔다고 주장하는 오타쿠들은 듣고 이해하는 건 대충 가능하더라도 말하기 능력은 수준 이하일 때가 많다. 어느 언어에서건 말하기 능력은 실제로 소리내서 대화를 주고받아야 늘기 때문. 그리고 애니메이션 시청만으로는 대화 주제도 상당히 제한적이기에 일본어로 사랑과 정의에 대해 열변을 토할 수는 있으면서 우체국 가는 길 물어보는 법은 모른다던가, 성인 남성인데 귀여운 여고생같은 말투를 쓰고 있다던가 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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