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word-break:normal" {{{#555,#aaa |
<rowcolor=#cd9f51> 1901 | 1902 | ||
앙리 뒤낭 | 프레데리크 파시 | 엘리 뒤코묑 | 샤를 알베르 고바 | |
<rowcolor=#cd9f51> 1903 | 1904 | 1905 | 1906 | |
- | ||||
윌리엄 랜들 크리머 | 국제법학회 | 베르타 폰 주트너 | 시어도어 루스벨트 | |
<rowcolor=#cd9f51> 1907 | 1908 | |||
에르네스토 모네타 | 루이 르노 | 클라스 아르놀드손 | 프레드리크 바예르 | |
<rowcolor=#cd9f51> 1909 | 1910 | 1911 | ||
- | ||||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 국제평화국 | 알프레트 프리트 | |
<rowcolor=#cd9f51> 1911 | 1912 | 1913 | 1917 | |
토비아스 아서르 | 엘리후 루트 | 앙리 라퐁텐 | 국제적십자위원회 | |
<rowcolor=#cd9f51> 1919 | 1920 | 1921 | ||
우드로 윌슨 | 레옹 부르주아 | 얄마르 브란팅 | 크리스티안 랑에 | |
<rowcolor=#cd9f51> 1922 | 1925 | 1926 | ||
프리드쇼프 난센 | 오스틴 체임벌린 | 찰스 G. 도스 | 아리스티드 브리앙 | |
<rowcolor=#cd9f51> 1926 | 1927 | 1929 |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페르디낭 뷔송 | 루트비히 크비데 | 프랭크 켈로그 | |
<rowcolor=#cd9f51> 1930 | 1931 | 1933 | ||
나탄 셰데르블롬 | 제인 애덤스 | 니컬러스 버틀러 | 노먼 에인절 | |
<rowcolor=#cd9f51> 1934 | 1935 | 1936 | 1937 | |
아서 헨더슨 | 카를 폰 오시에츠키 | 카를로스 라마스 | 로버트 세실 | |
<rowcolor=#cd9f51> 1938 | 1944 | 1945 | 1946 | |
난센 국제난민 사무국 | 국제적십자위원회 | 코델 헐 | 에밀리 그린 볼치 | |
<rowcolor=#cd9f51> 1946 | 1947 | 1949 | 1950 | |
존 모트 | 퀘이커 봉사협회 | 존 보이드 오어 | 랠프 번치 | |
<rowcolor=#cd9f51> 1951 | 1952 | 1953 | 1954 | |
레옹 주오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조지 마셜 | 유엔난민기구 | |
<rowcolor=#cd9f51> 1957 | 1958 | 1959 | 1960 | |
레스터 피어슨 | 도미니크 피르 | 필립 노엘베이커 | 앨버트 루툴리 | |
<rowcolor=#cd9f51> 1961 | 1962 | 1963 | 1964 | |
다그 함마르셸드 | 라이너스 폴링 | 국제적십자위원회 | 마틴 루터 킹 | |
<rowcolor=#cd9f51> 1965 | 1968 | 1969 | 1970 | |
유니세프 | 르네 카생 | 국제노동기구 | 노먼 볼로그 | |
<rowcolor=#cd9f51> 1971 | 1973 | 1974 | ||
빌리 브란트 | 헨리 키신저 |
레득토 (수상 거부) |
사토 에이사쿠 | |
<rowcolor=#cd9f51> 1974 | 1975 | 1976 | ||
숀 맥브라이드 | 안드레이 사하로프 | 베티 윌리엄스 | 메어리드 코리건 | |
<rowcolor=#cd9f51> 1977 | 1978 | 1979 | ||
국제앰네스티 | 안와르 사다트 | 메나헴 베긴 | 마더 테레사 | |
<rowcolor=#cd9f51> 1980 | 1981 | 1982 | ||
아돌포 에스키벨 | 유엔난민기구 | 알바 뮈르달 | 알폰소 가르시아 | |
<rowcolor=#cd9f51> 1983 | 1984 | 1985 | 1986 | |
- | ||||
레흐 바웬사 | 데즈먼드 투투 |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 엘리 비젤 | |
<rowcolor=#cd9f51> 1987 | 1988 | 1989 | 1990 | |
오스카르 아리아스 | 유엔 평화유지군 | 달라이 라마 14세 | 미하일 고르바초프 | |
<rowcolor=#cd9f51> 1991 | 1992 | 1993 | ||
아웅 산 수 치 | 리고베르타 멘추 | 넬슨 만델라 |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 |
<rowcolor=#cd9f51> 1994 | 1995 | |||
이츠하크 라빈 | 시몬 페레스 | 야세르 아라파트 | 조지프 로트블랫 | |
<rowcolor=#cd9f51> 1995 | 1996 | 1997 | ||
퍼그워시 회의 | 카를로스 벨로 | 조제 하무스오르타 | 조디 윌리엄스 | |
<rowcolor=#cd9f51> 1997 | 1998 | 1999 | ||
- | ||||
지뢰금지국제운동 | 존 흄 | 데이비드 트림블 | 국경없는의사회 | |
<rowcolor=#cd9f51> 2000 | ||||
김대중 | ||||
}}}}}}}}}
- [ 21세기 ]
-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01 || 2002 || 2003 ||
}}}}}} ||
퀘이커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Quakers |
||
<nopad> 퀘이커의 문장[1] | ||
유형 |
<colbgcolor=#fff,#212121><colcolor=#000,#ddd>
기독교 개신교 |
|
창시 | <colbgcolor=#535353>창시자 | 조지 폭스 |
창시 시기 | 17세기 | |
지역 | 성도 | {도시이름} |
주요 신앙 지역 |
미국, 영국, 아프리카 | |
종교 중앙기관 |
명칭 | {중앙기관명} |
교주·수장 | {중앙기관장(들)} | |
소재지 | {중앙기관의 소재지(들)} |
규모 | 신도 | 대략 377,000명 [2] | ||
성소·성직자 | {종교에서 사용되는 성소명 + n개, 종교에서 사용되는 성직자명 + n명 등}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언어별 명칭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 한국어 | <colcolor=#000,#ddd>종교친우회, 퀘이커 | ||
영어 | Quakers, Quaker | |||
일본어 | クエーカー | |||
중국어 | 貴格會 | |||
프랑스어 | La Société religieuse des Amis, Quaker | |||
독일어 | Quäkertum, Religiösen Gesellschaft der Freunde | |||
러시아어 | Квакеры | |||
스페인어 | Sociedad Religiosa de los Amigos | |||
이탈리아어 | Quaccherismo | |||
라틴어 | Religiosa Amicorum Sodalitas | |||
아랍어 | جمعية الأصدقاء الدينية |
[clearfix]
1. 개요
영국의 조지 폭스가 1647년 몸이 진동하는 영적 경험을 한 후 창시했다는 개신교의 경건주의에서 시작된 한 종파이다. 퀘이커라는 명칭은 1650년 영국의 치안판사 베네트가 조지 폭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몸을 떠는 자들'이라 조롱한 데서 비롯되었다. 루터교나 빅뱅 이론처럼 원래 놀리려고 붙인 별명이 공식 명칭이 되어버린 경우다. 청교도 혁명 시대를 통틀어 사회적, 종교적으로 크나큰 지각변동을 겪었던 영국 사회에서는 기존의 성공회 (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회)가 군림하는 기성 종교에 큰 회의가 몰아쳐 다양한 비국교회 경향이 나타났다. 이들은 현대에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등으로 자리잡았으나 이에 환원되지 않은 비국교회 경향 중 브라운파(Brownists), 아담파(Adamites), 수평파(levellers), 개간파(Diggers), 가족애파(Family of Love), 제5왕조파(Fifth Monarchists) 등 대다수는 영국 혁명의 광풍이 지나가고, 사회도 안정되어 가면서 탄압과 회유, 재포섭 등을 통해 명맥이 끊겼다. 퀘이커 역시 영국 성공회 내부의 비국교회 경향의 일부로서 시작되었다.모든 개인의 마음속에 ' 내면의 빛'이 있다고 보고 이를 통해, 평등, 정의, 평화와 같은 선(善)을 이루고자 하였다. 1947년 영국 퀘이커 봉사 협회와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가 종교 단체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종교친우회(宗敎親友會)라고도 불리는데, 영어로 퀘이커의 원래 정식 명칭이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이기 때문이다. 약 2-3천 명의 교도가 있다고도 하며, 현재 서울과 대전에서 정기적인 모임이 이뤄지고 있고, 1980년대까지 있었던 부산 모임은 2020년대 기준 모임 재개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퀘이커 계열은 아니고 초교파 선교단체인 예수전도단[3] 에서는 가끔 'QQ'[4]라는 교제 방식을 취할 때가 있는데, 퀘이커교도들이 서로의 친교를 위해 묻는 몇 가지 질문이라고 한다.
17~18세기 초기 퀘이커 신자들의 이름 목록이 있다. 이름이 이상한 게 많다는 평이 있다.
2. 역사
조지 폭스의 퀘이커 창립 이래, 1650년대 잉글랜드 북서부를 중심으로 퀘이커 운동이 일어났으며, 퀘이커 교도들은 청교도 혁명 당시 다른 종파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정부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1681년 윌리엄 펜(Wiliam Penn, 1644.10.14 ~ 1718.7.30)은 찰스 2세에게 일부 북아메리카 땅을 사서, 펜실베이니아라 명명하였으며, 퀘이커 교도들이 편히 지낼 수 있는 땅으로 만들었다.
퀘이커교 전도사인 존 울먼(John Woolman, 1720 ~ 1772)은 전도 여행을 하며 퀘이커교의 교리에 따라 남녀평등, 아메리카 원주민과 우호적인 관계, 노예 제도 반대, 전쟁 반대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퀘이커 정신은 그의 사후 1774년 발표된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교리상 노예 제도에 반대했기 때문에 남북 전쟁 전에 남부의 흑인노예를 캐나다로 탈출시키던 지하조직 지하철도에도 퀘이커 교인들이 다수 가담하였다. 그외에도 여성 참정권 운동 등 여러 사회개혁 운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맡았다. 퀘이커는 일찍이 1986년에 코네티컷에서 결의를 통해 동성결혼을 받아들였다. 물론 여전히 동성애를 죄라고 보고있는 퀘이커 단체도 소수 존재하는데 주로 복음주의파 퀘이커들이다.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퀘이커가 평화와 성실, 정직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보니 정치나 마케팅에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가령 미국에 존재하는 식품회사 브랜드 Quaker가 한 예.[5]
3. 교리
다음의 내용은 IVP 아가페 신학사전(2001, (주)아가페 출판사)의 퀘이커교 신학 항목의 내용을 바탕으로 썼음을 밝힌다.초기 퀘이커교의 신학 사상은 청교도와 재세례파의 요소를 포함했다. 신학자 조지 폭스는 신약 시대부터 가견 교회의 배교를 가르쳤고(딤후 3:1-5) 또 그리스도가 이미 오셔서 참교회를 모으신다고 주장하였다. 외형적인 신학은 구원할 힘이 없는데 그 이윤 우주의 내면의 빛(요 1:9-18)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고 계속해서 성경의 진리를 계시하고 (요 16:13) 비폭력을 요구하고 철저하게 동등할 것을 명하고 모든 인습적인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명령한다는 것이다. 그 빛은 불신자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구원의 활동을 하였다.
외형적인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순결한 내면의 예배에 부적절한 옛 예언의 잔존이라 배척하였다(요 4:24) 퀘이커 교도들은 신조들이 빛의 조명을 받지 않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지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였고 전가된 의와 전적부패와 같은 교리들을 부정하였다. 참교회는 예배에 모여서 조용히 성령께서 즉흥적인 기도나 설교나 증거를 하도록 감화해 주시길 기다렸다. 성직은 무급으로 임명없이 남녀 누구나 맡을 수 있었다.
이후 체계적인 신학적 사상이 갖추어진 것은 신학자 로버트 버클리에 의해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의 저서 Apology for the True Christion Divinity에 의해서 나왔다. 그의 저서에서 성경과 교부들의 글들을 인용하여 퀘이커교의 특징의 증거들을 신약의 기독교 핵심 진리라 주장하였고 이 증거들에서 다른 모든 공식적인 교리들의 타당성을 찾았다. 그리하여 이런 상황이 너무 확신되자 나머지 퀘이커 교도들은 재세례파의 교리와 유사한 것을 버리고 다른 지적인 분위기를 받아들이지 않게 된 19세기 초까지 중요한 신학적 발전이 없었다.
오늘날의 전세계 퀘이커교의 절반 이상이 복음주의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18-19세기초 신학자 조셉 존 거니의 영향이 컸다. 성경의 무오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은 전통적인 퀘이커교의 교리와 조화를 이뤘지만 계속적인 계시와 교리상의 평화주의 그리고 빛을 통한 속죄는 복음주의 원리와 조화시키지 못했다. 퀘이커교의 이 분파는 목사 청빙은 했으나 임명은 하지 않았고 교회 의식의 증거는 반대하나 프로그램에 의한 예배는 사용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비복음주의적 퀘이커교도 분파는 18세기 정적주의적 퀘이커교에서 일부 파생한 합리주의적 신비주의적 자유주의적 경향과 결합하였다. 보편적인 빛의 교리가 확장되었고 성육신 교리가 희석되었고 모든 종교의 기본적인 조화가 강조되었다. 인류가 하나라는 생각 아래 이 분파는 다른 퀘이커 교파가 선교에 적극적이듯이 사회적 참여에 관심이 많고 활동하게 되었다.
퀘이커교의 분열은 원 메시지가 변화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의 해석상의 대립에 따른 것이다. 오늘날의 자유주의 퀘이커와 복음주의 퀘이커는 현대신학적인 신학 사상에서 나오기 보단 17-18세기의 신학자들이 정립한 신학 정립이 퀘이커교의 논거로 여기는 양쪽 진형의 운동에 의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니토베 이나조는 퀘이커이면서도 평화주의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신토와 불교적 가치에 긍정적이라 무사도를 집필하기까지 했다. 현대 서구권의 퀘이커교도들도 유니테리언처럼 종교혼합주의 성향을 띠는 경우를 숱하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퀘이커의 교리는 개신교계 정통교파에게 크게 비판받는다. 물질적인 장소로써의 교회, 종교개혁가 개인의 주장에서 비롯된 신학, 전통, 관습을 무조건 버리는 형태의 교회는 역설적으로 성경에 대한 자의적 해석, 더 나아가 주류 교단에 반하는 해석까지 용인하게 되고 모임과 교제에 소홀해져 신앙 자체가 자멸할 수 있는 치명적 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퀘이커 계열 목회자, 교회들은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점조직화되어서 교세가 매우 미약해졌다. 퀘이커 자체의 신학 연구가 매우 지지부진한 이유가 이런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발 그만 좀 싸우고 신학 좀 연구해서 단점을 고쳐라."라고 자신의 교단을 비판하는 퀘이커교도가 많다. 너무 미약한 교세와 취약한 신학은 퀘이커교도들에게도 심각한 문제점으로 인식되는 듯.
4. 의식
▲영화 〈우정어린 설득〉에서 묘사된 퀘이커교도들의 예배의식. 중간중간에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이 삽입되어 나오는데 이는 퀘이커 교도인 주인공이 사는 동네의 이웃 감리회 교회의 예배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퀘이커들의 예배와 매우 대비된다.
이름의 유래와 달리 퀘이커교도들의 예배는 매우 조용하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마치 명상하듯 가만히 앉아있다가, 성경을 읽은 뒤 자신이 느낀 것을 말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worship)라 부르지 않고 '모임'(meeting)이라고 부른다.[6]
5. 매체
-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으로, 수업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라고 요구하는 근본주의 퀘이커 교도들과 한 과학교사 사이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가 나온다.
- 밴드 오브 브라더스: 금욕적이고 고지식한 면모를 보이는 리처드 윈터스가 퀘이커 교도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묘사가 나오고 윌리엄 가니어가 리처드 윈터스와 가벼운 갈등이 생겼을 때, 퀘이커 교도라고 비아냥거리는 장면도 있다. 그런데 윈터스가 병사들 사이에 자신이 퀘이커 교도라는 소문이 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자신이 퀘이커교도가 아니라고 설명해주기도 했다.
- 세븐 사이코패스: 마틴 맥도나의 2012년 작 영화. 거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인 주인공의 친구 한스( 크리스토퍼 워컨 분)는 폴란드계 퀘이커 교도다.
- 모비 딕: 허먼 멜빌의 소설. 스타벅은 1등 항해사이며 퀘이커 교도이다. '스타벅스'의 브랜드 이름이 여기서 따온 것.
- 우정있는 설복(Friendly Persuasion)[7]: 1956년작 고전 영화. 남북 전쟁 당시 퀘이커 교도들의 고뇌를 다룬 이야기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제로 하였음에도 3공 시절 국내 개봉됐다. 게리 쿠퍼가 주인공인 제스 역을 맡았다.
- 하이눈: 1952년작 고전 영화로 게리 쿠퍼와 그레이스 켈리가 주연이다. 켈리가 퀘이커 교도여서 무법자들과 싸우지 말고 그냥 떠나자고 남편 쿠퍼를 채근한다.
- 비포 선라이즈: 제시가 셀린에게 오스트리아 성당에서 퀘이커교 결혼식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6. 퀘이커 교도
- 니토베 이나조
- 데이먼 알반
- 리처드 닉슨
- 아서 스탠리 에딩턴
- 엘리자베스 블랙웰
- 월트 휘트먼[8]
- 제임스 딘[9]
- 제임스 터렐[10]
- 조안 바에즈
- 조지프 리스터
- 존 돌턴
- 주디 덴치
- 함석헌
- 허버트 후버
[1]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퀘이커 문서
[2]
2017년 기준
[3]
로렌 커닝햄이 1960년에 설립한 세계 최대 규모의 청년 선교단체. 한국에서 오대원(David E. Ross) 목사가 1973년에 설립한 예수전도단과 통합하였다.
[4]
Quakers' Question
[5]
다만 해당 회사 설립자는 퀘이커 교도가 아니었다. 한편 퀘이커 신자가 설립한 유명한 초콜릿 회사는 많은 편이다. 가령
KitKat이 있다.
[6]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2014-01-07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7]
1968년 한국 개봉 제목.
[8]
어렸을 적엔 퀘이커 교도로 자랐지만, 성인이 된 후엔 기독교적 무신론·범신론자가 되었다.
[9]
9살 때 어머니를 잃은 후, 퀘이커 공동체에 사는 고모네 집으로 보내져 퀘이커 교도인 고모와 고모부 밑에서 자랐다.
[10]
1943년 태생의 미국 예술가. 빛과 공간의 예술로 유명하며, 한국의
뮤지엄 산에도 자신의 작품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