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친일파에 대한 내용은 이완용(1872)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c0c0c0><colcolor=#000,#ddd> 대한제국의 매국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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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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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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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후작 | |||
조선총독부 중추원 제2대 부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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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colbgcolor=#fff,#1c1d1f> 1858년 7월 17일 | ||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 (現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55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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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6년 2월 11일[3] (향년 67세) | ||
경기도
경성부 옥인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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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우봉 이씨 (牛峰 李氏)[6] | ||
자 | 경덕(敬德) | ||
호 | 일당(一堂) | ||
재임기간 | 제22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
1907년 6월 24일 ~ 1910년 8월 29일[7] | |||
제2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 |||
1912년 8월 9일 ~ 1926년 2월 1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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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부모 |
아버지 이석준 (생부)[8] ·
이호준(李鎬俊) (양부) 어머니 신씨 (생모) · 민씨 (양모) |
|
형제자매 |
친형 이면용 의붓형 이윤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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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양주 조씨 | ||
자녀 |
장남 이승구(李升九)[9] 차남 이항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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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인척 |
손자
이병길(李丙吉), 이병희(李丙喜),
이병주(李丙周), 이병각, 이병철(李丙喆) 손녀 이병윤 조카 이명구 자형 조성하 족질 이봉구 족척 이병도(李丙燾) |
||
소속 단체 |
[[독립협회|]] (제명)[10] |
||
작위 | 조선귀족 후작 | ||
약력 |
제2대 독립협회 회장 학부대신, 외부대신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조선귀족 백작, 중추원 고문 조선귀족 후작, 중추원 부의장 |
||
비고 |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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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이완용 |
1907년 이완용 내각 출범 기념 사진. 가운데 아이는 영친왕. 영친왕 바로 왼쪽 뒤에 있는 인물이 이완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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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의 관료이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본래 고종과 명성황후의 친미, 친러 측근 세력인 정동파의 일원이었으나 일본 제국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린 후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이후에 독립협회에 합류했지만 친러파이면서 친미파라는 이유로 지방 관찰사로 좌천당했고 여기에 횡령죄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이후 1901년 고종에 의해 사면복귀되지만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자 몇 년간 은둔해 있었다.
1905년 일본공사의 추천으로 학부대신으로 복귀해 친일파로 전향했다. 친일파로서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으며,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유일하게 모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후대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의 대명사격으로 일컬어지곤 한다.[11] 공식적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이가 완용'. 사실 이완용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쓰던 동시대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한국명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이완용/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관료로서의 능력과 본인의 영달을 위한 대세 판단력이 출중하나, 그것을 매국에 악용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완용은 생전에도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이완용과 비슷한 시기에 같이 매국 행위를 해 조선귀족 직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후 처신을 잘못하거나 재산 관리에 실패하여 일제강점기 중에 몰락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았다. 매국도 능력이 없으면 못 한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를 매국 행위와 개인의 이득을 위해 타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가하는 일에 사용했으니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것.갑오개혁 조차 말기인 을미개혁에 참석했고 광무개혁 당시 대신에 임명되지 못한 것을 근거로 "능력도 별 볼 일 없었던 게 아니냐?"는 시선도 있는데 애초에 광무개혁 시기의 이완용은 친러 세력의 견제와 독립협회 활동으로 러시아 쪽에 단단히 찍힌 인사였다. 거기다 1898년 전북 관찰사 부임 겨우 닷새만에 직무 태만에 각종 횡령 의혹으로 탄핵받아 파직당하고 부칙상을 이유로 이유로 1900 ~ 4년까지 낙향한 것이 원인이었지 그의 능력으로 부족으로 인해 배제된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이후 친일 매국 행적도 자기가 먼저 나서서 주도해 놓고 자기 책임이 아닌것 마냥 정세를 주도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보면 노련하다고 할수 있는 정치인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다만 부패한 관료였고 정세에 따라 편을 밥먹듯이 바꿔먹는 인물이었다는게 문제였다.
러일전쟁 이후 친러파가 몰락하고 미국마저도 도움이되지 않자 이완용은 자기 세력 유지를 위해 친일파로 급전향하게 되는데, 횡령혐의로 그동안 정계에 배제되었던 이완용은 일본공사의 주선으로 학부대신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을사조약 조약 찬성을 가장 먼저 앞장서면서 이토 히로부미 눈에 띄게 된다. 이후에는 일본 공사관과 통감부의 원조를 받는 앞잡이로서 각종 고위직에 앉혀져[12] 본격적으로 매국행위를 시작하게 되는데 고종의 강제 퇴위 주도,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본인이 알아서 나서거나 제안하였으며 여기에 더해 일진회 및 여러 우익 단체[13]를 뒤에서 조종하거나 권력 다툼을 벌이는 등 그야말로 양심 없는 친일 행각을 한다. 어느정도냐면 고종에게 유약한 모습을 보이며 일본이 보기에 덜 친일적인 박제순 내각 대신 일본인 앞에서 고종 폐위를 주장하고 친일에 적극성을 띄는 이완용을 내정의 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앉혔으며, 한일 병합은 물론, 무단 통치기 당시 악명높았던 헌병보조원 제도까지 다름 아닌 이완용 스스로가 먼저 일본에 제한한 것이었다. 이는 급격하게 흘러가는 정세속에서 책임을 지거나, 타협을 하거나 소신을 지키거나, 저항을 하기 보다 그저 일본에 붙어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14]
이런 행동은 병합후에도 이어졌으며 교육회의에서 조선인 중 홀로 조선어를 배제하자고 주장하는건 물론 3.1 운동[15]을 사실상 살해 협박이나 다름 없는 수준으로 비난하면서 한쪽으로는 조선인 보호는 거녕 총독부에 진압방법을 제안하는 등 그 행태가 독립협회에서 민권운동단체 대표였던 사람이 맞는지 의문일 정도다.[16] 거기에 권력욕과 금전욕도 상당하여 그의 일가가 조선의 금융과 토지를 차지하여 돈을 불리는데 몰두하였고 이로인해 독립까지 조선인들의 모욕의 대상이되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age(1926-02-11)]년 되어가는 지금 까지 국내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17]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관점에 따라서 이완용보다 더 악질이라 볼 수 있는 송병준[18], 윤덕영 같은 경우도 이 정도로 악명을 지속적으로 얻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악랄한 매국노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후손들도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까지 한 다음 외국으로 도망가는 악행을 저질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현대에 와서조차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나머지 넷은 몰라도 이완용 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으며,[19] 북한의 김일성과 함께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자 한민족의 반역자로 평가받고 있다.[20]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유다 이스카리옷,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모욕으로 통한다. 이완용의 유명세 때문에 이완용을 제외한 을사오적들은 이름 정도만 알려져 있고, 비을사오적 매국노들은 여러 자극적인 에피소드들을 남긴 송병준, 윤덕영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국권 피탈에 관여하지 않은 민영휘보다도 인지도가 떨어지는 상황이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우페이푸가 량스이를 비판할 때 모욕적 표현으로 쓰는 사례가 있었고, 심지어 당시 중화민국의 교과서에서도 등장했다. 그 중국에서도 진회나 오삼계 같은 급의 매국노로 보았을 정도로 이완용에 대해 관심이 높았던 것이다.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
호러스 뉴턴 알렌
호러스 뉴턴 알렌
"이완용은 갑이나 을, 어느 파에나 투신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고 이는 그 일신의 안전을 꾀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일본공사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일본공사
"이완용을 정말 싫어한다.
동년배나 하급자에 대한 교만함과 천해빠진 교활함, 편협한 고압적 태도, 당나귀 같은 완고함을 보이지만 권력자에게는 비굴하다. 그러지 않아야 되지만 이런 것들이 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했다. “사대부(士大夫)” 또는 양반들을 위해 별도의 학교를 설립하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그다. 박영효를 추방한 뒤 전하가 “칙임(勅任)”관 이상의 관리를 임명하는 권한을 갖고자 내각에 통보했을 때,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공화국의 말단관리까지도 임명한다고 임금에게 아부했던 자도 이완용이다. 그는 전형적인 소인배다."
1896년 1월 23일 윤치호 일기
이완용은 잔꾀를 부려 속임수를 쓰는 인간이다. 이완용의 형 이윤용은 비열한 인간으로 온갖 종류의 악행을 저질러 돈을 벌고 있다. 이완용은 자신의 평판을 더럽히지 않고 약탈품을 나눈다. 이완용은 이채연과 서재필 박사를 통해 서울에 있는 미국파의 지원을 받고 있다. 뱀 같은 이완용의 형 이윤용은 김홍륙의 밀접한 측근이고, 엄상궁을 통해 전하 측근이 되었다. 안경수와 권재형은 이완용의 관심사인 일본을 후원하고 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제거되면 일본군이 두 팔 벌려 이완용을 맞이할 것이다. 이완용은 냉정하고 계산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나는 절대 그런 자와의 교류를 이어가지 않고 있다.
1897년 7월 14일 윤치호 일기
1896년 1월 23일 윤치호 일기
이완용은 잔꾀를 부려 속임수를 쓰는 인간이다. 이완용의 형 이윤용은 비열한 인간으로 온갖 종류의 악행을 저질러 돈을 벌고 있다. 이완용은 자신의 평판을 더럽히지 않고 약탈품을 나눈다. 이완용은 이채연과 서재필 박사를 통해 서울에 있는 미국파의 지원을 받고 있다. 뱀 같은 이완용의 형 이윤용은 김홍륙의 밀접한 측근이고, 엄상궁을 통해 전하 측근이 되었다. 안경수와 권재형은 이완용의 관심사인 일본을 후원하고 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제거되면 일본군이 두 팔 벌려 이완용을 맞이할 것이다. 이완용은 냉정하고 계산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나는 절대 그런 자와의 교류를 이어가지 않고 있다.
1897년 7월 14일 윤치호 일기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 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日派, 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일당기사(一堂紀事) 中』[21]
이완용은
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었다. 이완용과 교류했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자신에 일기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강직하여 대체가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극찬하지만 나중에는 기계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이는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좋게 말하면 기계처럼 철두철미하다는 뜻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공감 능력이 없고 오직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볼수 있다. 실제로 이완용은
민비 쪽 관계자 였기에
갑신정변을 피했고
을미개혁의 일원이었지만 여전히 실권자였던 고종에 의도에 따라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숙청시켜 실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친일파를 척결할 때 돌봐주었던
이하영을 주일공사로 파견하는 등 여전히 일본 쪽에도 선을 대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그가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의 추천으로 1905년 9월 10일 학부대신이 되어 내각으로 복귀하게 되고 두달 뒤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서게되는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황제대신 통감부가 주도하는 내각이 만들어지자 왕으로서 권위가 없는 고종을 가장 먼저 배반하는 행동을 보였으며 하루만에 체결된
정미 7조약으로 인해 주권이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드는 의병들을 탄압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즉, 역사적 결과를 통해 본다면 이완용은 이념이나 신념을 신경쓰지 않는
현실주의[22] 정치인이자
이기주의자였고 일본도 이를 알고 있기에 그를 꽂아준 것이다.『일당기사(一堂紀事) 中』[21]
미국인 콜부란씨가
한성 안에 전기철도를 경영할 때에 이완용과 이윤용 등 네 사람이 서로 결연하여 외면으로 한미합자라 하였으나 (…) 육십만 환은 그 회사로 보내고 사십만 환은 네 사람이 나누어 먹은 형적도 있고 (…)
대한매일신보 1910.05.26
대한매일신보 1910.05.26
러시아 공사관으로 돌아왔을 때 이완용이 민상호가 있는 자리에서 내게 화를 내며 말했다. “왜 내게 영수증을 가져오지 않았소? 당신이 그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너무 놀라 나직히 대답했다. “학부에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4,000달러의 소재를 밝혀줄 그 영수증을 방치해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감께서 가지고 계신 4,000달러의 영수증을 학부에 보내시면 됩니다.” 그러자 그 영감탱이 외부대신은 나를 경멸하는 말투로 “
내 영수증! 뭐라고? 당신은 그 돈을 환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어디 당신이 할 수 있는지 봅시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완용은 걸어 나갔다.
7시 쯤 알렌 박사를 방문했다. 알렌 박사의 영수증이 논란의 핵심문제가 되어 이완용과 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그에게 말하자 천만 뜻밖에도 알렌 박사는 그 돈은 이완용 자신(!)의 돈이라는 것을 밝힌 쪽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알렌은 이완용의 “선언”이 순전한 사기임을 알고 씁쓸해 했다. 그런데 좀 그럴듯한 말로 이완용이 전하를 설득해 그에게 4,000달러를 주도록 했는지, 아니면 학부대신이 되면서 그가 영수증을 없애야 했는지, 둘 다 매우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다.
1896년 2월 28일 윤치호 일기
지난밤에 허치슨(Hutchison)[23]이 이완용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이렇게 말했다. ʻʻ이완용은 돈 문제에 관해서는 아주 비열합니다. 몇 달 동안 이완용의 아들에게 식사를 제공했지만, 그 사람은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30달러 가량 새해선물을 주었지만, 이완용은 호두 백 개를 보답으로 주더군요. 그 사람의 아량을 되새기기 위해서 그 호두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지요.ʼʼ
1897년 11월 11일 윤치호 일기
외국인 거류지에서 감리서까지의 큰 도로를 포함한 가치있는 땅은 모두 이완용과 팽한주 같은 도둑들이 소유하고 있다. 이완용과 팽한주는 몇 년 전 이완용이 외부대신이었을 때, 정부가 공공 부지로 몰수할 것이라고 땅주인을 협박하여 헐값에 사들였다. 그 뒤 그 악당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면서 미터 단위로 그 땅을 중국인에게 팔아넘겼다. 감리서 앞 도로에서 조선인 거주자는 점점 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그 악당들을 강압해서 감리서 부근 땅을 적정한 가격에 정부에 팔게 하고, 그 뒤 정부가 그 땅을 조선인에게만 파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희망은 전혀 없다![24]
1900년 12월 18일 윤치호 일기
그렇게 말하면서 이완용은 걸어 나갔다.
7시 쯤 알렌 박사를 방문했다. 알렌 박사의 영수증이 논란의 핵심문제가 되어 이완용과 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그에게 말하자 천만 뜻밖에도 알렌 박사는 그 돈은 이완용 자신(!)의 돈이라는 것을 밝힌 쪽지를 내게 보여 주었다. 알렌은 이완용의 “선언”이 순전한 사기임을 알고 씁쓸해 했다. 그런데 좀 그럴듯한 말로 이완용이 전하를 설득해 그에게 4,000달러를 주도록 했는지, 아니면 학부대신이 되면서 그가 영수증을 없애야 했는지, 둘 다 매우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다.
1896년 2월 28일 윤치호 일기
지난밤에 허치슨(Hutchison)[23]이 이완용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이렇게 말했다. ʻʻ이완용은 돈 문제에 관해서는 아주 비열합니다. 몇 달 동안 이완용의 아들에게 식사를 제공했지만, 그 사람은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30달러 가량 새해선물을 주었지만, 이완용은 호두 백 개를 보답으로 주더군요. 그 사람의 아량을 되새기기 위해서 그 호두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지요.ʼʼ
1897년 11월 11일 윤치호 일기
외국인 거류지에서 감리서까지의 큰 도로를 포함한 가치있는 땅은 모두 이완용과 팽한주 같은 도둑들이 소유하고 있다. 이완용과 팽한주는 몇 년 전 이완용이 외부대신이었을 때, 정부가 공공 부지로 몰수할 것이라고 땅주인을 협박하여 헐값에 사들였다. 그 뒤 그 악당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면서 미터 단위로 그 땅을 중국인에게 팔아넘겼다. 감리서 앞 도로에서 조선인 거주자는 점점 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그 악당들을 강압해서 감리서 부근 땅을 적정한 가격에 정부에 팔게 하고, 그 뒤 정부가 그 땅을 조선인에게만 파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희망은 전혀 없다![24]
1900년 12월 18일 윤치호 일기
돈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동양 최고의 정치인이 됐을것이다.(則爲東洋第一流政治家 一堂若無甚愛財)
『일당기사(一堂紀事) 中』
그렇다고 성실한 현실주의 정치인도 아닌데, 같은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윤치호는 개인적으로 이완용을 의도가 순수하지 못할 뿐더러 강자에게 빌붙는 부패한 인물로 봤으며 이때문에 단순히 싫어하다 못해 극도로 혐오하였다. 어느정도냐면 자신의 일기에 이완용 언급되면 대부분 험담이며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함께 뱀으로 묘사될 정도다. 그리고 실제로 이완용은 을사조약 이전부터 제멋대로 이권을 팔아버리거나 나라돈을 횡령한 정황이 있는데 이미 학부대신으로 있었던 1895년 해외 위탁금을 착복한 일이나 지방 관찰사로 좌천되었을 때도 직무 태만 뿐만 아니라 지방민을 착복하여 20만냥을 챙겼다는 횡령혐의로 낙향/독립협회에서 제명된다. 또한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에게 내주면서 1만5천달러를 받았다던가 미국인 콜브란이 전차회사를 설립할 때 옥새를 위조해 고종의 내탕금 40만원(현시가 80억원)을 횡령하는 의혹을 받는 등 끊임없는 횡령 스캔들에 휘말린다. 웃기게도 이런 돈에 대한 문제는 일제 상대로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교육세 납부고지서가 오자
버티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에 지쳐버린 경성부 측에서 감액 통보하고 나서야 납부하여 학교평의회를 분노게 하였다.
# 나라 팔아서 일가 전체가 조선 최고의 부자가 되었음에도 말이다.『일당기사(一堂紀事) 中』
다만 이런 부패함과 별개로 개인적으로는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25]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26]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27]
옥인동의 이완용 자택(1909년) 출처 | 이완용 사망 당시의 자택 모습 출처[28] |
총리 대신 이완용씨는 전라도 김제 만경 등지에 민유전토를 광점 매석하는데 장차 외인에게 전매하여 대이익을 회수할 계획이라더라
대한매일신보 1908. 12. 15
사실 이완용은 재산 중 물려받은 금액이나 은사금으로 받은 금액은 상대적으로 미미하였고[36] 거의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벌어들인 것이었다. 당시 이완용은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의도의 7.7배 정도 면적의 땅을 보유했으며 그는 토지를 사정 받은 뒤 5년 내에 매각하는 방법으로 부동산의 98~99%를 해방 전 팔아 치워 현금화 했다. 예를 들어 전북 지방의 땅을 사정 받은 뒤, 해당 지역에 일본인 지주들이 대거 진출해 땅값이 오르면 대부분 되파는 식이다. 좋게 말하면 당시 식민지배의 충격의 여파를 이용한 투자의 귀재지만 이붓형과 조카가
한성은행 [37]은행장으로서 정경유착을 하고 브로커 역할을 한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이완용이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450억 원이 넘는데, 이는 병탄 이전 자기 일가의 재산에 비해 3배나 늘어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1908. 12. 15
이럼에도 이완용은 생전에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한문이라면 눈 감고도 한시 몇 편 줄줄 쓸 만큼 통달했을 사대부 입장에선 어지간한 단어는 다 한자어인지라 문법 몇 개만 익히면 되는 일본어는 전혀 배우지 않고, 완전 이질적인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배워 익힌 걸 감안하면 굳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영어는 처음엔 육영공원에서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큰 활약을 못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보다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나 테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거나 통역사와 함께 다녔으며,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과 했다.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아서 그가 공직에 있을 때 아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토나 테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1906년 학부대신(오늘날 교육부장관) 재임 시절 공교육에 일본어 수업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수업시수가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일본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4. 가족관계
이완용과 그의 가족들.[38] |
- 친부: 이호석 (1822 ~ ?)
- 모: 풍산 홍씨 - 홍퇴영의 딸, 영의정 홍봉한의 증손녀 / 영산 신씨 (1827 ~ 1893) - 신석우의 딸
- 형: 이면용
- 형수: 여흥 민씨 - 무판관 민두진의 딸
-
본인: 이완용(1858 ~ 1926) - 이호준의 양자로 입적
본인의 평판이 워낙 나빴던 탓에, 그의 아들 이승구[41]가 26세로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을 해서 아들이 자살한 것이라는 조롱성 루머가 돌았다. 이 내용은 매천야록에도 기재되어 있어서 흔히 이 에피소드를 사실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본래부터 몸이 허약해서 을사조약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에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해당 기사.
양부에게는 효자였다고 한다. 공무로 바빴음에도 10리가 넘는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며 양아버지 이호준을 문안하였고, 양 이복형[42]인 의붓형 이윤용이 서자였음에도 서로 우애가 돈독했다고. 가문 시조묘를 찾아 복원하기도 했다.
5. 여담
- 일제강점기 때 화장실의 낙서에는 이완용에 대한 엄청난 욕과 성드립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고 한다. 당시 화장실 낙서들. 이완용의 식당/요리옥/요리점이라는 낙서가 꽤 많이 보이는데, 한 마디로 '이완용=똥이나 먹을 놈'이라며 욕하는 것이다.[43]
-
순종 때인 1908년, 이완용은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중에는
윤원형 같은 진짜배기 간신도 있지만 붕당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도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 한 사람들,
세조 때의 이징옥,
광해군 때
북인(대북)의 영수로
인조반정 때 처형된
정인홍, 조선 초기의 정치가
유자광 등도 있었다. 상당수가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인데, 고종 친정 직후부터 명예회복 운동이 불었으나
최익현 등이 결사 반대했었다. 이후에도 이완용은
박지원,
정약용,
남이 등 그동안 신원받지 못했거나 재야의 명성에 비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신원하고 시호를 수여하는 작업을 행했다. 이완용의 이러한 복권 사업은 그가 매국노라서 그동안의 간신들을 복권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니 명목상의 신원이나 해주자는 정리 작업에 가깝다. 일부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완용이 친일 노론의 수괴라서 조선에 해악을 끼친 간신들을 복원시켰다고 우기기도 하는데 간신, 역적으로 낙인찍힌 것 말고는 아래 명단에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그 노론에게 당했던 소론, 남인계 등의 인사들도 적지 않다. 아래는 그 명단과 당파 및 기타 설명.
- 좌의정(左議政) 서흥 부원군(西興府院君) 한효순(韓孝純, 대북)
-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 대북)
-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탁남)
- 이조 판서(吏曹判書)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 영남 남인)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광좌(李光佐, 소론)
-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趙泰耉, 소론)
-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조태억(趙泰億, 소론)
-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최석항(崔錫恒, 소론)
- 좌의정 충정공(忠靖公) 유봉휘(柳鳳輝, 소론)
-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소론 준론)
-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도응(金道應)
-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후겸(鄭厚謙, 영조 때의 외척)
-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하재(金夏材, 정조를 모독한 노론)
- 좌승지(左承旨) 안기영(安驥泳)
-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정호(權鼎鎬)
- 부호군(副護軍) 조중호(趙中鎬)
-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 김삿갓의 할아버지)
-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이희화(李喜和)
-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남인)
-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징(李義徵)
-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
-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
- 사옹원 판관(司饔院判官) 원용성(元用星)
- 감역(監役) 허욱(許煜)
-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
- 승지 정해(鄭楷)
- 예조 참의(禮曹參議) 서종하(徐宗廈)
-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성시(尹聖時)
-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소론 준론)
- 형조 판서 이사상(李師尙)
- 이조 참의 윤연(尹㝚)
- 훈련 대장(訓練大將) 윤취상(尹就商, 소론 준론)
-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
-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
-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 교리(校理) 윤상백(尹尙白)
- 지평(持平) 윤지(尹志, 위의 윤취상의 아들이자 나주괘서사건의 주모자. 소론)
- 목사(牧使) 이하징(李夏徵, 소론 준론)
- 동부승지(同副承旨) 유수원(柳壽垣)
- 대사헌 심악(沈䥃)
- 판윤(判尹) 박찬신(朴讚新)
- 포도 대장(捕盜大將) 조동정(趙東鼎)
-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
- 정언(正言) 이명조(李明祚)
-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
- 이조 판서 윤휴(尹鑴, 청남)
-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 지평 이동양(李東讓)
- 정언(正言) 이범제(李範濟)
- 현감(縣監) 이공윤(李公胤)
- 승지 이중술(李重述)
- 진사(進士) 이하택(李夏宅)
- 승지 이보욱(李普昱)
- 승지 김호(金浩)
- 현감 박필현(朴弼顯, 소론 준론)
- 병사(兵使) 박태신(朴泰新)
- 감역(監役) 정권(鄭權)
- 부수(副率) 조현빈(趙顯彬)
-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
- 감사(監司) 권첨(權詹,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노론)
-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사로(李師魯)
-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垣)
- 승지 이재화(李在華)
- 정언 이우화(李宇和)
- 주서(注書) 권숭(權崇)
- 이조 참판 김정관(金正觀)
-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 감사 정사효(鄭思孝, 소론. 이인좌의 난 때 박필현 측과 내통했으나 정작 난이 터질 때 박필현을 배신했다.)
- 정언 권집(權䌖)
- 부사(府使) 김주태(金柱泰)
- 통제사(統制使) 김윤(金潤)
- 좌부승지(左副承旨) 채동술(蔡東述)
-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 승지 박홍도(朴弘道)
이 복권도 전부 다 해 준 것이 아니라서 양정, 남곤, 임사홍, 김안로, 박영문, 신윤무[44], 허균, 목호룡[45] 등 복권 대상에서 빠진 인물들도 많았다.
-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역대 총장 명단[46]에 이완용이 포함되어 있다. 컨트롤 + f키를 이용하여 직접 찾아보자. 참고로, 같은 을사오적인 박제순도 있다. 덕분에 성균관대는 "친일파가 총장한 학교"라고 놀림받는다. 단, 이 당시의 '대사성'의 실질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사성이 당대 성균관을 총괄하던 직책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총장과 비슷한 급의 인물이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실제로 대사성이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으나, 이후 성균관은 고위급 진출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뻘코스 취급을 받고 그에 따라 대사성의 지위도 급격히 추락했다. 고종 때 와서는 어느 정도 실력만 되면 관례적으로 붙여 주는 직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실제 저 페이지에 들어가보면 고종 재위 기간인 15,886일 동안 대사성이 무려 344명이었다. 1인당 평균 46.18일(1달 반 정도) 재직한 셈. 또한 조선은 직책 수는 많고 관료 수는 적었기 때문에 한 관료가 수많은 직책을 맡는 일이 허다했다.
- 이완용과의 관계를 오해받는 사례들로는, 같은 집안인 것뿐인 역사학자 이병도[47] 는 물론이고, 이완용의 고향이 아닌데 고향으로 잘못 알려진 전라도[48],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에 관한 루머[49] 등이 있다.[50]
-
이병도는 이완용과 같은 감찰공파(監察公派)긴 하지만, 공통 조상이 감찰공파 파조 이기(李圻)로 촌수로 따지면 무려 30촌이나 된다.[51] 이 정도면 그냥 남이다.[52] 25세 '병(丙)'자 돌림도 23세 '용(用)'자 돌림과 두 항렬 차이가 나니 조카는 절대 될 수 없다.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이병도 개인의 행보는 동정의 여지가 없다. 일단 자신의 친일 행적도 그렇고, 이완용과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기 위해 했던 짓,[53] 이완용을 모 인터뷰에서 익산의 아들(?)로 만들려는 시도는 역사학자라 할 수 없는 저열한 짓이었다. - 루머의 마지막 피해자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이다.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철(李丙喆)과 삼성그룹의 이병철(李秉喆) 전 회장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 본관도 다르다. 이완용의 손자 이병철은 작위를 세습한 이항구의 아들로서 우봉 이씨인 반면, 삼성그룹 이병철 전 회장은 경주 이씨 판전공파에 의령 향반 출신인 이찬우의 아들이다. 이완용과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이찬우를 이완용의 늦둥이 아들 정도로 끼워맞추려는 사람까지 보인다.
- 졸렬한 행보와는 달리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배짱 있고 침착한 인간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지인과 함께 마당에 나와있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져서 나무가 부러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지붕 아래로 뛰어가는데 혼자만 태연하게 있으면서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희귀한 일인데 같은 곳에 2번 떨어지는 건 더 드문 일이다."라고 했다고 한다.[54]
- 이덕일은 "이완용이 노론 최후의 수장으로, 노론 세력을 대표해서 나라를 팔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노론이었으면 위의 인물들을 사면복권시켜 줄 리 없다. 사실 조선 말기부터 외척의 세도 정치가 활성화되면서 붕당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고, 서인/동인/남인/북인/대북/소북/노론/소론/벽파/시파 따지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그마저도 혁파되고 아예 외세에 놀아나게 된 근대화 시기였으니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
외국인
중국에서도
매국노로 악명을 떨쳤었다. 중화민국 북경 정부 시절인 1921년,
안직전쟁으로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을 몰락시키며 중국의 패권을 잡은
봉천군벌과
직예군벌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때 봉천군벌의 수장이던
장쭤린은
진윈펑 내각의 사퇴 이후 자신과 친한 교통계의 수장인
량스이를 국무총리에 임명,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게 당시 말 많던 산동반도의 소유권 문제하고도 연결되어 중국 사람들이 내부에서 반발이 심했다. 거기다 방금 전까지 적이던 돤치루이의 안휘파 인물을 대량으로 사면하기까지 하자 직예군벌의 수장이던
우페이푸는 이를 비난하면서 전보를 보내곤 과거 중국의 여러 매국노와 더불어 이완용을 같이 언급하면서 량스이를 욕한다.[55] 이는 심지어 단순 사례나 인터넷 밈이 아닌 학술적 연구[56]까지 된 일이기도 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량스이는 기회를 틈타 내각을 차지했다. 일본 대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일 의논한 것을 뒤집었는데 동경에서 주중국 일본 대사에 훈령한 것을 보면 외교부에 일본 차관을 요구토록 하고 일본이 추천한 사람을 쓰게 했다. 량스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여론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외직 경험도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일본의 요구를 허락하고 철로를 되찾기 위해 마침내 차관을 일으키고 주미 각 대표가 이에 따르도록 훈령했다. 철로는 일본인 경영으로 귀속토록 하고 수천만 원의 채권을 일으켰다. 역대 내각이 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그가 했다. 지난날 인민들의 통곡이 쌓여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저질렀다.
국권이 희생되고 운송권이 중단되는 데 어찌 외인을 후대하고 어찌 조국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량스이는 끼리끼리 무리 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 장방창[57][58][59]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남녀노소 전국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바로 중국 대표에게 급전을 쳐 원래 계획을 밀고 나가도록 하자.
'만주군벌 장작림' 中
이렇게 전문에서 언급할 정도면 당대 중국인들이나 식자층도 "이완용 = 나라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인식했고 그 이름도 유명했다는 이야기.[60] 이 글을 보면 알 수 있듯 중국에서 이완용은 진회, 오삼계 같은 악마들과 동렬의 매국노로 취급받았다.[61]
- 충격적이게도 이완용이 배향공신이 되어 최소 5년 간 종묘에 모셔지는 대참사가 실제로 일어났다. 그가 사망한 직후인 1928년 5월에 대한제국 시기의 고위 관료와 황실 인사들이 후보 추천과 투표를 거쳐 순종의 배향공신으로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서정순 4인을 정한 후, 순종의 후사였던 황태자 이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62] 그러나 며칠 후 이왕직 장관 한창수[63]의 주장에 따라 김병시, 이경직이 보류되고 이완용이 추가되었고[64], 배향공신 논의에 참여했던 고위 관료 출신과 황실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자 7월에 이왕직은 배향공신의 종묘 배향을 일단 보류했다. 하지만 1940년 3월 11일에 송근수, 12일에 이완용, 13일에 서정순을 종묘에 배향하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으며[65], 이왕직에서 간행한 기록물에 이를 등재했다. 물론 1945년 해방 후에 이완용의 신위는 당연히 출향되었다. 김병시, 이경직의 종묘 배향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아서 다수 기록물에 순종의 배향공신이 송근수, 서정순 2인만 기재되어 있다.
- 매우 부정적 의미로 유명하다 보니 괜히 죄 없는 후대의 동명이인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어서 더욱 비난을 받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이미 이완용이란 이름은 배신과 매국의 상징이 돼버린 것이다. 다른 매국노들은 몰라도 이완용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매국노?"라고 할 정도로 다른 방향으로 유명해진 사람.[66][67]
- 동명이인은 물론 이름이 똑같거나 연상이 될 정도로 비슷한 이름이라서 주변으로부터 피해를 당해 개명신청을 한다면 범죄자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거의 100% 허가해 준다고 봐도 되는데, 개명 허가받기 힘들던 2000년도 이전에도 웬만해선 허가해 줄 정도였다. 즉 이름이 '완용' 인 사람은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68] 만일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쓴 독립운동가였다면 아마 "완용" 이라는 이름은 특이한 이름도 아니니 작명에서 소망했을 것이다.[69]
- 동 시대에 같은 이름에 조선귀족 자작 위를 받은 친일파가 있었다. 종실 이완용으로,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의 현손이자 봉사손이다. 다만 이름 끝 글자의 한자가 다르다. 이 문서의 이완용은 '李完用'으로 쓰지만 동명이인 이완용은 '李完鎔'으로 쓴다.
- 이름이 이완용이란 이유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로 나올 정도다. # 물론 일부 방송 프로그램에 의하면 이름 때문에 하도 놀림을 받아 이미 해탈했는지 그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듯 하다. (링크의 마지막 이미지)
- 동명이인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왔는데, 그 이완용 후보는 뒤에서 1등으로 낙선했다.
-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다른 이완용 후보가 출마했는데, 이 사람도 뒤에서 1등으로 낙선했다.
- 매국노의 동명이인이 박한 취급을 받는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저지른 베네딕트 아놀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들은 종전 200여 년이 넘은 지금도 까이기도 한다.
- 이완용이 베네딕트 아놀드의 이름과 비슷해질 거라는 예언은 윤치호가 했는데, 11월 17일자 윤치호 일기를 본다면, 그 조약에 서명한 사람은 미국인들이 베네딕트 아놀드를 혐오하듯이 혐오될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 중국의 경우 진회가 여기에 해당.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를 넣지 않는다.
- 독일의 경우도 아돌프라는 이름이 과거에는 흔했으나, 아돌프 히틀러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쓰이지 않으며 이미 아돌프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 사람들도 절대다수가 개명을 했다. 실제로 미국의 한 막장 부모가 첫째 자녀의 이름을 '아돌프 히틀러'로 지었다가 아동 학대로 간주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4명의 자녀들에 대한 양육권을 박탈 당했던 사례가 있다.[70]
- 이완용의 땅 중에 국가에서 귀속시킨 것이 10,900m2(3천 평 남짓)인데, 이는 그의 땅의 0.05% 정도다. 몰수원칙상 그가 받은 은사금과 이자를 고려한 금액만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1992년 소송을 걸어 되찾았고, 증손자 이윤형[71]은 소송으로 되찾은 땅을 최대한 빨리 팔아버린 뒤 캐나다로 이민갔다. 땅을 돌려줬다는 이유라는 게 민족정기보다 민사법이 더 앞선다는 논지였다. 이후 이윤형은 2002년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은둔 생활을 하다가 2005년 5월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고는 전국 각지에 분포한 이완용 명의의 토지를 찾아다니며 소송을 지속해왔는데, 2006년 4월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이윤형이 증조부의 재산을 찾고자 하는 이유는 '재단을 하나 만들어서 조금이나마 증조부님 명예도 회복해드리고 싶고 국가적으로 좋은 일에 쓰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이 보도가 나간 후 항의가 빗발친 나머지 재단을 설립할 의욕이 끊겼다고 하고, 이후 근황은 불명.[72] 한편 이윤형의 아들은 2005년 11월 기준으로 단칸방에서 살아갈 정도로 완전히 몰락한 상황이었다고 전해진다.[73]
- 2011년 5월 20일 이완용에 대한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출판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완용은 '합리적인 근대인'이었기에 '충군(忠君)'과 '애국'을 위해 용기를 내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그로 인해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하면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황제와 황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 # 이로 인해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이완용을 옹호하고 재평가한 매국행위 변론 서적이라는 낭설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윤희가 이 책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의 이성을 비판 없이 충실히 따라갔을 때 얼마나 가증스런 역적이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바로 이완용과 근대에 대한 진짜 비판을 가하려고 한 것."이라고는 하는데 독자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듯 하다.
- 2013년 1월 중순경 한국어 위키백과 이완용 문서에 이완용을 매국노로 평가한 부분을 삭제하고 조선을 근대화시킨 위인이라는 류의 내용을 추가하며 미화하려는 지속적인 반달이 행해졌다. (정보없음 부분) 이후로도 잊혀질 때마다 특정인들에 의해 문서가 훼손되고 있으며, 이는 본 문서도 마찬가지라 편집에 1단계 제한이 적용되었다.
-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에는 이완용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있었다. 일단 이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기 전에 세워진 거다. 1898년경, 부안군 줄포면에 큰 해일이 밀어닥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는데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였던 이완용이 직접 부안으로 내려와 참상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줄포 시가지가 생길 수 있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는데, 이후 이완용이 매국노가 되면서 이러한 공덕은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역시나 광복 후 이 공덕비는 수차례 수난을 당했으며, 본래 서 있던 자리가 아닌 줄포면사무소 뒤편에 반파된 채로 보관되고 있다. 다만 공덕비는 그 조병갑이 동학농민운동을 벌어지게 했던 원인인데다가 그 시기 이완용은 지방에서 거액을 횡령했다는 의혹을 받아서 정말 전라도관찰사 부임 닷새만에 민생을 해결한 것으로 세워진건지 의문이 드는 일이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9번지는 2003년 건축된 이완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건물이다. 출처 실제 이완용의 자택이 옥인동에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해당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그 집터에는 옥인교회 · 아름다운재단 · 길담서원 등이 들어서 있다.
- 심지어 죽을 때도 일제에 자신의 재산을 바쳤다. 다른 사안에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으나, 재산 문제에만 분명한 유언을 남겨서,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에게 사회사업 기부금으로 3만 원이 전달 되었다고.[74]
- 아들에게 유언으로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가 되거라" 라고 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알고 보니 엔하위키 시기에 벌어진 문서 훼손이 최초 출처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확히는 4순위 근거를 반영하는 주장과 관련된 토론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로그 중 가장 오래된 시기인 2011년 7월 이전에는 해당 어록이 아예 발견되지 않은 게 확인되면서 발굴되었고, 그 전 엔 퍼진 게 없던 것이 발견된 것.[75] 그 사이에 상당히 퍼진것이 확인되고, 문헌 오염 당한 내용 자체가 화제가 된 경우였던 데다, 제도권 언론사 MBC 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을 정도.[76] 다만, 해당 문서 훼손은 엔하위키 로그 중 로그가 누락된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 나무위키에 크롤링 될 때 넘어온 것이라서 문서 훼손의 정확한 주체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문헌오염 자체는 친미를 비난할 목적으로 인용되거나[77], 일뽕들이 이완용을 재평가하자고 주장할 목적으로 인용하는 등, 문헌 오염 자체는 성향에 관계 없이 발생하였다.
* 이 사진이 이완용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이 사진의 인물은 일본의 제3·9대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이완용의 사진이 아니다.
- 안타깝게도 이재명 의사가 죽일 수 있을 뻔했으나 그 당시 일본에서 매우 높은 위치였기 때문에, 수술을 받아서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대신 한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다는 업적 아닌 업적을 얻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이재명 의사가 22살이어서 총을 빼앗았으나 결국 칼로 시도하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이재명 의사가 체포되고 나서 김구가 엄청 후회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암살하려 한 곳은 서울 종현천주교회당(오늘날 명동성당)인데, 이완용은 여기에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 "좋은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낫다."는 말을 이완용이 했다는 말이 돌지만, 실제로 이완용이 한 말은 아니다. #
이완용의 친필. |
- 그의 친일 행적과는 별개로 서예에 능해 구한말의 명필가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필체에 대해 예술의 전당 학예연구사인 이동국 씨는 "이완용은 행서와 초서가 뛰어났다."고 밝힌 바 있으며, 그 동안 공개된 이완용의 필적을 보면 그는 행서를 즐겨 쓴 편이다. 행서는 정자체인 해서와 흘림체인 초서의 중간 서체로 미적인 감각이 뛰어난 우수한 글씨체라 할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인 <일당기사(一堂紀事)>에 의하면 경북 김천 직지사의 대웅전 및 천왕문[78], 창덕궁 함원전 등에 걸린 현판 10여 종의 글씨를 썼다고 기록했다. 또 독립문 현판의 獨立門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친일파 연구가 정운현은 "필체는 이완용이 아니라 동농 김가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삶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글씨의 수준과는 별개로 가격은 바닥을 긴다. 물론 그가 원체 명필이었던 까닭에 아예 휴지값까진 아니다.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수집가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 2~30만원, 비싼건 40만원 선에 거래된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나라를 팔아먹지 않은 독립운동가였다면 최소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은 했을 글씨라는 말도 된다. 서예는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도 중요하지만, 글쓴이의 인품·평판도 값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79] 글씨가 쓴 사람의 성품과 평판이 반영된다고 보기 때문이다.[80]
- 얼마나 악질이었는지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사이에서조차 독고다이 신세였다고 한다. 물론 생전 일본어를 단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이나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았던 것 때문에 친일파 내에서조차도 부정적으로 볼 여지와 별개로 이완용이 상당히 악질적인데다 사회성과 대인관계도 그다지 좋지 못했던 양반이란 것을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사항.
6. 관련 어록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부등켰던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아야지.
1926년 2월 13일[82] 동아일보 1면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부등켰던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아야지.
1926년 2월 13일[82] 동아일보 1면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우리는 미국 같은 부강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해야지,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폴란드 같은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83]
1896년 7월, 독립협회 강연 중. 그러나 정작 한국을 남의 나라의 노예로 만들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 강연 중. 그러나 정작 한국을 남의 나라의 노예로 만들었다.
해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때는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이완용이 일장기에 써 넣은 글, 송태조 조광윤에게 바치는 영일시를 인용해 일본을 찬양한 구절
이완용이 일장기에 써 넣은 글, 송태조 조광윤에게 바치는 영일시를 인용해 일본을 찬양한 구절
이토 히로부미: 甘雨初來霑萬人(감우초래점만인)
단비가 처음 내려 만사람을 적셔주고
모리 타이라이: 咸寧殿上露華新(함녕전상로화신)
함녕전 위에 이슬 빛이 새로워지니
소네 아라스케: 扶桑槿域何論態(부상근역하론태)
부상[84]과 근역[85]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이완용: 兩地一家天下春(양지일가천하춘)
두 땅이 한집을 이루니 천하가 봄이로다
190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열린 연회에서 한일합방의 주역들인 통감 이토 히로부미, 궁내대신 모리 타이라이,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기승전결 한 줄씩 돌아가며 지은 합작시[86]한일합방 사이퍼
단비가 처음 내려 만사람을 적셔주고
모리 타이라이: 咸寧殿上露華新(함녕전상로화신)
함녕전 위에 이슬 빛이 새로워지니
소네 아라스케: 扶桑槿域何論態(부상근역하론태)
부상[84]과 근역[85]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이완용: 兩地一家天下春(양지일가천하춘)
두 땅이 한집을 이루니 천하가 봄이로다
190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열린 연회에서 한일합방의 주역들인 통감 이토 히로부미, 궁내대신 모리 타이라이,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기승전결 한 줄씩 돌아가며 지은 합작시[86]
아아,[87] 조선 동포여. 세상 말에 죽음 중에서 삶을 구한다는 말이 있더니 지금에 조선인민은 삶 중에 죽음을 구하니 이 어찌된 일이오. 얼핏 알아듣기 용이하도록 일언을 진하노니 제군은 잠깐 정신을 수습하고 잘 듣기를 바라노라.
(중략)
독립운동이라는 선동이 허설許說이라 망동이라 하는데 대하여는 각 유지인사의 천언만어가 끊이지 않아도 일향자각치 못하니 근자에 여余(=이완용)가 다시 말해도 제군의 귀에 들어가지 아니할 줄 스스로 의심하여 췌언(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거니와
(중략)
처음에 무지몰각한 아동배가 선동하고 그 후에 각 지방에서 역시 소문을 듣고 치안을 방해하는지라 당국에서 즉시에 엄중이 진압하려면 피해가 없겠냐마는 몰각자 부류를 돌아가게 하고 관대한 수단을 사용하여 일차 유고諭告와 이차 유고가 내려와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기자기질其子其姪(어린 것들)이 여전히 몰각한 행동이 있어 일차 효유하고 효유에 따르지 않으면 다음으로 그것을 책責하니 책한 후에 따르지 않으면 필경에 달지초지撻之楚之(매를 들어 때린다)는 어린 것들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어린 것들을 선도코자 함이요, 둘째, 다른 어린 것들에게 오염치 못하게 함이라.
이차 유고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아니라 관청을 침범하여 난폭한 행동을 하니 당국에서 엄중이 조치함은 부득이한 것이니라. 근일에 모모처에서 듣기로는 많은 인민이 죽고 다쳤다하니 그 죽고 다친 인민 중에는 혹 주창한 자도 있겠지마는 그 다수는 부창부수한 자로 여余는 믿고 있노라. 농사 때가 임박하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한 즉 안락이 있을 것이요, 망동을 따라하면 즉 죽고 다침이 목전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삶 중에 죽음을 구함이 아닌가. 자신이 삶 중에 죽음을 구할 뿐아니라 망동함으로 인하여 그 부근에서 횡액으로 죽고 다침에 이르는 자가 많이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눈뜨고 못 볼 일이오, 귀로도 듣지 못 할 일이로다.
(이하 생략)
1919년 4월 3.1 운동 당시 발표문. #
(중략)
독립운동이라는 선동이 허설許說이라 망동이라 하는데 대하여는 각 유지인사의 천언만어가 끊이지 않아도 일향자각치 못하니 근자에 여余(=이완용)가 다시 말해도 제군의 귀에 들어가지 아니할 줄 스스로 의심하여 췌언(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거니와
(중략)
처음에 무지몰각한 아동배가 선동하고 그 후에 각 지방에서 역시 소문을 듣고 치안을 방해하는지라 당국에서 즉시에 엄중이 진압하려면 피해가 없겠냐마는 몰각자 부류를 돌아가게 하고 관대한 수단을 사용하여 일차 유고諭告와 이차 유고가 내려와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기자기질其子其姪(어린 것들)이 여전히 몰각한 행동이 있어 일차 효유하고 효유에 따르지 않으면 다음으로 그것을 책責하니 책한 후에 따르지 않으면 필경에 달지초지撻之楚之(매를 들어 때린다)는 어린 것들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어린 것들을 선도코자 함이요, 둘째, 다른 어린 것들에게 오염치 못하게 함이라.
이차 유고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아니라 관청을 침범하여 난폭한 행동을 하니 당국에서 엄중이 조치함은 부득이한 것이니라. 근일에 모모처에서 듣기로는 많은 인민이 죽고 다쳤다하니 그 죽고 다친 인민 중에는 혹 주창한 자도 있겠지마는 그 다수는 부창부수한 자로 여余는 믿고 있노라. 농사 때가 임박하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한 즉 안락이 있을 것이요, 망동을 따라하면 즉 죽고 다침이 목전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삶 중에 죽음을 구함이 아닌가. 자신이 삶 중에 죽음을 구할 뿐아니라 망동함으로 인하여 그 부근에서 횡액으로 죽고 다침에 이르는 자가 많이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눈뜨고 못 볼 일이오, 귀로도 듣지 못 할 일이로다.
(이하 생략)
1919년 4월 3.1 운동 당시 발표문. #
7. 대중매체에서
행적의 질이 매우 나쁜 인물이다 보니 대중매체에서도 매우 안 좋은 꼴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7.1. 영화
- 가수 문희준의 외조부 이향은 왕년에 이완용 전문 배우로 알려졌는데 1959년 전창근 감독의 《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신상옥 감독의 《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1966년 이규웅 감독의 《마지막 황후 윤비》, 1972년 주동진 감독의 《 의사 안중근》 등 총 6편의 영화에 해당 배역으로 출연했다.
- 1959년 개봉한 영화 《한말풍운과 민충정공(윤봉춘/남홍일 감독)》에서는 배우 허장강이 연기했다.
- 1963년 개봉한 영화 《백년한》에서는 배우 김희갑이 연기했다.
- 1971년 개봉한 영화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에서도 배우 허장강이 연기했다.
- 1979년 개봉한 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는 배우 이영화가 연기했다.
- 2004년 개봉한 영화 《도마 안중근》에서는 배우 성형진이 연기했다.
- 2006년 개봉한 영화 《 한반도》에서는 배우 우상전이 연기했다.
- 2015년 개봉한 영화 《 암살》에서도 배우 우상전이 연기했다. 과거 장면에 잠깐 등장하는데 역관없이도 일본말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 2016년 개봉한 영화 《 덕혜옹주》에서는 배우 이황의가 연기했다.
7.2. 연극
- 1976년 연극 《손탁호텔》에서는 배우 이병묵이 연기했다.
- 1996년 연극 《제국의 광대들》에서는 배우 이치우가 연기했다.
7.3. 드라마
- 1979년 KBS 8.15 특집극 《 대한국인》에서는 배우 정래협이 연기했다.
- 1980년 MBC 8.15 특집극 《의친왕》에서는 배우 남성훈이 연기했다.
- 1982년 KBS 대하드라마 《 풍운》에서는 배우 조재훈이 연기했다.
- 1982년 MBC 드라마 《갑부실록 - 공주갑부 김갑순》에서는 배우 김길호가 연기했다.
- 1984년 KBS 대하드라마 《 독립문》에서는 배우 김진해가 연기했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서는 배우 변희봉이 연기했다.
- 1985년 KBS 국군의 날 특집극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서는 배우 박규식이 연기했다.
- 1986년 KBS 드라마 《님의 침묵》에서는 배우 이순재가 연기했다.
- 1990년 KBS 8.15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서는 배우 박경득이 연기했다.
- 1990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 편에서는 성우 박태호가 연기했다.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 김구》에서는 배우 김재건이 연기했다.
- 1995년 KBS 대하드라마 《 찬란한 여명》에서는 배우 노영국이 연기했다.
- 1996년 SBS 3.1절 특집극 《안중근》에서는 배우 이환지가 연기했다.
- 2001년 KBS 특별기획 드라마 《 명성황후》에서는 배우 강주상[88]이 연기했다. 나름대로 조선의 안위를 걱정하는 충신으로 나오는데, 주인공이 명성황후다 보니 그가 친일파로 변절하기 이전만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친러파였던 행적이 묘사되어, 툭하면 국왕 부부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명성황후에게 꾸짖음을 당하는 장면이 제법 나온다.
- 2018년 tvN 드라마 《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이 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이완익이라는 배역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배우 김의성이 연기했다. 이후 진짜 이완용이 등장하는데, 배우는 정승길이 연기했다. 여기서 이완용은 실제와 마찬가지로 일본어를 전혀 못하고 영어만 유창하게 말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 tvN 《 SNL 코리아》의 코너 GTA경성에는 플레이 가능한 3캐릭 중 하나로 등장했지만[89] 게임 클래스와의 시너지가 겹쳐 좋게 그려지지 않았다. 초장에는 권위를 악용해서 지나가던 일본 순사를 두들겨패지를 않나, 기생집에서 기력 회복을 해 댄다. 염천교 거지패를 처리하라는 퀘스트를 받아 이동을 해야 하는데 조작법 실수로 김첨지의 인력거를 뺏어 직접 끌고 가는 신세가 되고 전투에 들어가서 무기를 준비하는데 자꾸 삑사리가 나서 깻잎과 불로초만 들다가 그 와중에 김춘삼의 낭심샷 집중 공격에 고자가 된다.[90] 그 다음부터는 기생과 어울릴 수 없게 되는 바람에 빡쳐[91] 악랄한 짓을 벌이다가 등장한 각시탈에게 총을 쏘며 저항하지만 쇠퉁소에 총알이 다 튕겨나가고[92] 가뜩이나 없는 곳을 계속 가격하는 이크에크샷으로 응징당한다.
- 《 GTA》 3.1절 편에도 최종 보스로 재등장하는데[93] 플레이어 캐릭터인 독립운동가[94]가 버튼 액션에 실패하자 마구 패지만 시간을 넘어 등장한 윤형빈의 주먹에 한방에 뻗는다.
7.4. 게임
7.5. 만화
- 네이버 웹툰 《 스페이스 킹(웹툰)》의 등장인물 안용이는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이완용과 비슷한 행보를 걷는다.
- 다음 웹툰 《 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각성한 고종 밑에서 유능한 신하로서 활약한다. 능력치 자체는 좋았던 실제 역사를 감안하여 외국어에도 능통하며 영국과의 협상도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기회주의적 면모 역시 고증되어 실제 역사를 알고 있는 고종이 "역사가 바뀌어도 넌 그대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끔하며 이에 따라 고종이 크게 믿지는 않는다.
7.6. 소설
- 대체역사소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중화제국과의 전쟁에 군중들이 환호하는 와중에 첫 등장한다. 주인공 이형 덕분에 역사가 바뀌게 되어 매국노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였지만 후에 미국 사절단이 인천항을 떠나는 모습을 보는 와중에 정계에 진출해 과잉된 애국주의를 이용해 권력을 쥐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국익과 반하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의지를 내비치면서 이미 다른 방면으로 싹수가 노랗다는 모습을 거나하게 인증해버린 꼴. 하지만 미래인이 빙의한 고종이 이완용의 존재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관료가 되는 길은 진작에 막혔다. 그래서 다른 방면으로 출세할 방법을 모색하다 여흥 민씨 가문의 사위로 들어가고 언론사 사장으로 취직하지만 이후에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냈다가 국내 정국은 물론 한미영 삼국 외교까지 혼란에 빠뜨리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만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남산의 국정원에 다녀와야 했고 고종에게 원래 역사에서 자신이 매국노가 된다는 것을 듣고 절규한다. 설상가상으로 장모 민자영과 정을 통해 사생아를 낳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한일보>의 최익현에게 거하게 까이고 전국민의 공적이 된다. 이에 아내 몰래 해외로 도망치려다가 기차역에서 자신을 알아본 김구에게 떠밀려 기차에 치여 산산조각나 죽는데 남은 시체 조각 중 제일 큰 것이 가방을 쥔 손이었다고 한다.
- 대체역사소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열강이 된 대한제국 치하에서 주인공 광무제 이선에게 충성하고 있다. 열혈한 대한제국주의자로서 청나라에서 대한제국의 이미지 세탁과 분열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이익을 추구하며 나름 외교관으로 크게 활약하며 외교대신의 직까지 오른다. 이후 총리대신이 되기를 꿈꾸지만 전생에 그의 행적과 인품을 아는 이선에게 딱 그 정도의 쓰임만 받고 있다. 1917년 10월 30일 대한제국 특명전권대사로서 대청(북청)을 상대로 제2차 한청협약을 성사시킨다. 이후 대청국 외무고문으로 임명됨으로서 청국의 외무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된다. 총리대신을 꿈꿨다가 잘 안되자 깨끗이 포기하고 바로 아시아의 세실 로즈를 목표로 잡았는데 얼마 안지나 이완용에게 불만을 품은 청나라 아시아주의자 청년에게 하얼빈에서 스톨리핀과 같이 암살당하면서 최후를 맞이한다.
- 대체역사소설 《 매국노의 원수 자식》에서는 미래인이 빙의한 삼남 이대일의 활약과 나비효과 때문에 본의 아니게 혜택을 보았는데 ,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에 억류되어 있다가 피의 일요일 사건을 막게 되었고(미리 군중에 숨어놓은 수하에게 일부러 총을 맞는 연극(물론 헐리우드식)), 일단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무승부가 되자 평화협상에 참가한 공과 고종이 신돌석과 홍법도 등의 의병장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한 것처럼 누명을 씌우려고 하자, 조선에 피의 일요일이 될까봐 지부상소를 써서 의병장들을 풀어주게 되어,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우국지사로 착각을 받아 존경을 받고 있다. 러일전쟁에서 고생해서 그런지 이제 일신의 영달보다는 보신주의에 신경을 쓰게 돼서, 조용히 사는 게 꿈이 되었다.
- 대체역사소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현실과 유사한 보신주의자로 등장한다. 이전 생에서 학식이 짧았던 주인공 김귀남도 그의 이름은 알고 있어서 항상 경계하는 편. 어쩌다 보니 안동 김문 및 김옥균과 척지게 되었는데 마침 안동 김문이 대만에서 대만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는 횡포를 부리자 이걸 이용해서 공격한다. 이때 김옥균과 개화당이 주장하는 '민족주의'에 대해 이완용은 ' 결국은 힘없는 토인들을 겁박하여 저들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짓'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게다가 이후엔 진심으로 반식민주의 운동가가 되고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모아 단체를 만드는데, 그 인물들이라는 게 이근택, 송병준, 박제순 등 현실의 을사오적들. 한 술 더 떠서 단체의 이름은 일진회.
- 대체역사소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조지원이 한성 정부를 세우자 재빠르게 전향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다. 이후 조지원의 눈에 들기 위해 만주로 가서 국민 그룹의 기반을 닦았고, 관동대지진이 터질 무렵엔 일본으로 건너가 콜레라균을 수십 리터를 방생하는 바이오 테러를 저지른다. 이후에도 랴오중카이 중국 총통 저격, 만주 소요 사태의 배후, 푸이 황제의 고문 조언자 등으로 배후에서 많은 공작을 펼쳐서 공적을 세운다. 하지만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탓에 조지원에 의해 암살당한 후, 대한민국 최초로 국장이 치러졌으며, 그의 자를 딴 이경덕의 노래가 퍼진다.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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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 태조 | 정종 | 태종 | |
세종 | 문종 | 단종 | 세조 | |
사육신 | 생육신 | 논개 | 권율 | |
홍길동 | 임꺽정 | 삼학사 | 박문수 | |
한석봉 | 김홍도 | 김병연 | 김정호 | |
영조 | 정조 | 정약용 | 전봉준 | |
황진이 | 홍경래 | 김옥균 | ||
안중근 | 이완용 | 윤동주 | 지석영 | |
손병희 | 유관순 | 안창호 | 방정환 | |
김두한 | 이상 | 이중섭 | ||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 ||||
민족대표 33인 | 김좌진 | |||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 ||||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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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씨개명으로 등록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完用). 성인 '이(李)'를 리노이에(李家)로 바꾸었다. 또 이름인 '완용(完用)'을 일본 한자음으로 읽었다.
[2]
現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558. 원주민의 구증을 토대로 밝혀진 주소다. 이 지역에
판교신도시가 지어졌는데, 이 와중에 이완용 생가 터가 아파트랑
학교에
파묻혔다.
집 터에는 중학교가 들어선다는 내용으로 보아 백현마을8단지아파트와
신백현중학교 사이로 추정된다.
과거 푯돌을 세우려고 추진하기도 했다. 2023년에
실제로 푯돌을 세웠다가 며칠만에 다시 철거했다.
[3]
13시 20분
[4]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5]
1909년
이재명 의사의 암살 미수 이후 폐에 상처를 입어 매년 겨울철만 되면
폐렴과
천식 등으로 고통스러워 했다. 1926년에는 호전되는 듯이 보여 1월 12일 총독부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서 다소 무리를 했었고 부축을 받으면서 귀가했다. 이후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1926년 2월 11일 이완용은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으로 인해 사망했다.
[6]
우봉 이씨 23세손 ○용(○用) 항렬. 본래 참판공파(參判公派)였으나 감찰공파(監察公派) 집안으로 양자를 갔다. 2002년판 우봉이씨세보 중에 인권(仁卷, 1권) 821(八二一)쪽에 이름이 있다.
[7]
임기 중
이재명의 암살시도로 부상을 입게 되었다. 당시
내부대신이었던
박제순이 임시로 내각총리대신을 맡게 되었고, 이완용은 치료를 받은 후 다시 내각총리대신으로 복귀했다.
[8]
이명은 이호석(李鎬奭)
[9]
계몽운동에 참가했고,
경술국치 이전에 사망하였다.
[10]
1898년 7월 11일 제명되었다.
[11]
대부분 을사오적이 누군지 물어보면 다른 인물들은 몰라도 이완용은 아는 경우가 많다.
[12]
본인 뿐만 아니라 이완용 가문 자체가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였다.궁내부대신
이윤용은 형, 탁지부대신
임선준은 사돈, 승녕부총관(황제의 비서실장)
조민희는 처남, 승녕부시종은 차남
이항구였다. 이 때문에 이완용 내각은 가족정부라고 비꼬아지고는 했다.
[13]
이들은 일본이 내세우는
아시아주의를 굳게 믿고 내각과 의회가 유지되는 합병을 하거나 일본 주도로 실력을 키워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합병이후 집회취제령으로 전부 토사구팽 당했다. 특히 일진회 회장이었던
이용구는 자신이 조국을 파는데 일조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폐인이되어 사망했다.
[14]
적어도
필리프 페탱은 아무것도 할수 없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보호하고 자기가 생각하던 프랑스를 만들고자 했기에 동정여론이라도 있었지만 이완용은 밖에서는 동포를 운운하고 뒤에서는 조선을 일본화 하고자 하는 지배자와 구 권력층인
조선귀족의 비위를 맞추다 못해 권력투쟁까지 했다.
[15]
당시 격문을 보면 알수 있듯이 이완용이 제안한 현병통치와 헌병보조원의 폭정이 3.1운동 원인중 하나였다.
[16]
사실
만민공동회에서 대통령제나 공화정 같은 급진적 주장은
서재필,
윤치호 등이 한 것이고
헌의 6조도 이완용이 낙향 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 당시 이완용은 외교관으로서 해외에 이권 판매를 하는 것을 주로 했고 착복까지 하여 제명된 것을 보면 민권향상 보다 지도층과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 행동했던 인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
[17]
구글에
매국노 이미지 검색을 하면 대부분의 사진이 이완용 관련사진일 정도이다(...).
(캡쳐 이미지) 때문에 이씨를 제외한 다른 성씨에서는 완용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소수 있지만 그래도 하필 이름이 완용이라서 거북하다며 개명을 신청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씨 문중 중 완용이라는 이름을 쓰는 바람에 동명이인인 이완용이 되어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18]
이완용이 본격적인 매국노선을 탈 때의 라이벌로
일진회로 친일경쟁을 한것으로 유명하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어전 회의에서
고종 황제의 면전에 대고 "
덴노께 사죄해야 한다.", "자결을 하라!"는 등의 망발을 퍼부었으며 이후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 황제가 즉위하여 이완용 내각이 들어선 후엔 농상공부대신 ·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 ·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행적만 보면 이완용과 맞먹는 수준의 매국노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이완용만 못한데, 왜냐하면 그 독한 친일파 종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의 악질이라 일제 입장에서도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웠던 작자여서 은근슬쩍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본래 신분도 천해서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라 말 그대로 똥오줌 못 가리고 양아치 짓을 서슴지 않고 다녔고, 그래서 꼴에 먹물 좀 먹었다고 말귀는 알아듣고 최소한의 눈치가 있는 이완용이 더 부리기 쉬워 이 쪽을 더 이용해 먹었다. 더구나 이쪽은 무려
강화도 조약 때부터 친일이였기에 더욱 지독한 셈이다.
[19]
특히 이지용과 박제순의 경우(다만 박제순은 을사조약 한정.) 어느정도 정상짐착의 여지가 존재하여, 그들의 후손들은 이완용의 후손들처럼 폐를 끼치는 일이 별로 없거나 오히려 그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는 정반대다.
[20]
그도 그럴 것이, 이완용은 '국권피탈 3조약에 모두 찬성한 것을 넘어 체결에 직접적으로 참여 + 강제병합 후에도 일제의 학정에 아이디어를 제공 + 35년(을사조약 직후까지 포함한 40년) 동안 동포들을 지옥에 집어넣었음 + 그럼에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죗값과 비교하면 매우 편하게 죽음' 때문에 영원히 한국인들의 지탄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21]
1927년 이완용 1주기를 기리기 위해 처조카이자 비서였던 김명수가 출판한 이완용 평전 내용이다. 물론 김명수도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인물이다.
[22]
다만 현실주의자 자체가 매국노 성향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로
서재필은 합리주의, 엘리트주의, 친미, 친일인사인데다 아예 일가가 갑신정변으로 몰살당했다. 이 때문에 무지몽매한 조선 대중과 왕을 대놓고 경멸했는데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했다. 무엇보다 본인도 이완용의 선을 넘은 매국에 분개했다.
[23]
관립외국어학교의 분교인 영어학교의 영국인 교사다. 한국 내에서
운동회를 최초로 연 사람이기도 하다.
[24]
실제 동시기에 땅을 부당하게 빼앗은 것은 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나온바 있다.
#
[25]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린다는 표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26]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임금을 비롯한 중전, 대비급의 인물들이나 할 수 있었고, 실제
선조 때 서인
정철의 경우,
후궁이 이런 짓을 한다고 대놓고 깠다가
역관광당한 예가 있다.
[27]
이런 물림상 문화는 전근대 중국과 일본에도 존재해서 중국 황제와 일본 천황의 점심상, 저녁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식사가 차려졌었다. 특히 청나라 황제의 수라상은 그야말로 진수성찬 그 자체여서 환관과 궁녀들까지 다 먹고도 남을 정도였고,
메이지 덴노는 점심 때 양식을 즐겨서 시종들도 양식을 먹을 수 있으니 양식 점심이 가장 기대되는 시간이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현대 일본 황실에는 사라진 문화다. 지금은 그냥 가족끼리(천황 가족, 상황 가족, 황사 가족, 친왕 가족 모두 따로) 그 끼니에 먹을 양만 차려서 각자 먹고 있다.
[28]
당시엔 사치품이자 지위의 상징인 자동차들이 줄줄이 서 있는 것을 보아, 지위나 재산 등을 가늠할 수 있다.
[29]
오일 머니 같은 불로소득이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재산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검약은 곧 재산의 치부의 기본이다. 자수성가한 재벌 1세들 중에는 검약한 사람들이 많았다.
[30]
당시 기준으로도 화려해서 데라우치 총독 외 새로 총독이 부임할때마다 이곳에서 연회를 벌였고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 2세가 조선에 방문했을 때도 이곳에서 연회를 즐겼다. 그의 재정 사정이 어려워져 소유권이 넘어갔고 후에 백인제가 이를 매입한거다.
[31]
1910년 기준 조선 최고의 명문가이던
이회영 일가가 만주로 떠났을 때 처분한 전 재산이 2023년 가치로 78억 원 남짓이었고, 1933년 기준 매국노 부호의 대명사인
윤덕영의 재산이 2023년 가치로 67억 원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완용이 얼마나 갑부였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이회영은 급하게 처분하느라 제값을 받지 못한 것이었으니 이회영의 실제 재산 수준은 이완용보다도 높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민영휘의 재산은 이완용 재산의 20배 가량인 6000만 원이었고, 소비자물가지수 기준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4800억~7800억 원에 달했다.
[32]
이때의 어차가 한국 최초의 어차는 아니다. 이미 몇 년 전 고종의 칭경예식을 위해 시범 용도로 왕실에 들여온 포드 A형 차량이 최초였는데 생긴 게 지금과 많이 다르기도 하고 초기의 자동차인지라 진동이나 소음이 심해 고종도 당시엔 한두 번만 타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프랑스 영사관에서 쓰던 르노 자동차를 왕실에서 들여 운행하기도 했다.
[33]
현행
재규어의 고급브랜드. 2000년대 동그란 눈의
재규어 XJ때만 해도 8기통 모델 중 다임러라는 최고급 에디션이 남아있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모기업인
다임러 AG와는 관련이 없는 별개의 브랜드이며, 당시엔 벤츠 S600 급은 되는 최고급 차량이었다고.
[34]
현행
크라이슬러에게 인수된 브랜드. 크라이슬러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고급 스페셜 버전 중 하나도 이름이 오버랜드다.
[35]
Wolseley. 현재는 망한 영국 브랜드
[36]
한일 신협약 때 10만 원, 합병 때 15만 원의 은사금을 일본에게서 받았다.
[37]
이 시기 한성은행은
조선귀족들이 받은 은사공채 상당수를 예금하고 친일파들이 대주주로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 팔아 받은 돈을 자본삼아 돈을 굴린것이며 이완용의 친인척들이 이를 관리한거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조선귀족 은행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3.1운동 당시 예금이 대거 빠져나간다.
[38]
가운데에 검은 양복을 입은 자가 이완용이며, 나머지는 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병주(셋째 손자),
이병길(첫째 손자),
이항구(둘째 아들), 이병희(둘째 손자), 이병철(넷째 손자)이다.
[39]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반민족행위자에 조부 이완용, 생부 이항구와 함께 3대가 모두 선정되었다.
[40]
이병철(李丙喆). 형제들도 모두 항렬자 丙을 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李秉喆)과는 동명이인이다. 한자도 다르다.
[41]
협성회 등 구한말 계몽운동에 참여했으나 1905년 26세에 사망했다.
[42]
이완용의 양아버지 이호준의 아들.
[43]
출처: 변은진. (2011). 일제 전시파시즘기(1937~45) 조선민중의 '불온낙서' 연구. Han'guk Munhwa (Seoul, Korea), (55), 309-344.
[44]
중종 초기 정막개의 고변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인물.
[45]
김일경과 함께 역적 취급을 받았지만 김일경만 복권되었고 목호룡은 빠졌다. 다만 김일경은 양반이고 목호룡은 풍수지리를 보던 중인 출신이라...
[46]
정확히 말하면 성균관 대사성.
[47]
다만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있다.
[48]
이는 최근 인터넷 상에서 악질적으로 창궐하는 전라도 관련
지역드립에 이용되기도 한다. 실제 이완용은
경기도출신이다.
[49]
애초에 경주 이씨인 이병철은 우봉 이씨인 이완용과 본관부터가 다르다. 이병철이 삼성 경영진들을 상대로 '전라도 사람은 뽑지 말며 뽑더라도 요직에 앉히지 말라' 운운했다는 썰. 당연히 사실무근인 루머에 불과하며, 당장 현재 삼성의 요직에도 전라도 출신들이 적지 않다.
[50]
비슷하게
노재봉 전 국무총리도 아버지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다만
민복기 전 대법원장의 아버지가
경술국적
민병석인 것은 사실이다.
[51]
그나마도 이완용이 입양되기 전 생가 기준으로 하면 이완용은 참판공파(參判公派)인데다가 이병도와 이완용 간의 촌수는 36촌 지간으로 더욱 멀어지게 된다.
[52]
흔히 말하는
사돈의 팔촌이 예의상으로 따지는 친척 관계 중 가장 먼데 그보다도 훨씬 먼 사이다.
[53]
예를 들어 박물관에 멀쩡히 전시 중이던 이완용의 관뚜껑을 태워없앤다든지. 이장할 때 나왔던 부장품 중 하나였다.
[54]
고대 신화도 아니고 근대 실존 인물의 이야기이니 과학적인 시선으로 보면, 매우 위험하다. 번개는 높이 솟은 물체에 집중적으로 내리치며 내리친 뒤 지면으로 퍼지기 때문에 신체와 바닥에 모두 접촉한 도체가 있다면 감전사했을 것이고 마른 하늘이라지만 번개가 이미 내리친 곳은 플라즈마화돼서 전도성이 더 좋다.
[55]
물론 우페이푸 역시 그저 당대의 평범한 군벌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그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했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에서도 최소한 항일 의식만큼은 있었던 것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평가를 내리기는 한다.
[56]
국경을 넘나들던 친일파 - 이완용과 근대 중국의 매국노 담론(1905~1945)
[57]
북송시대 대신으로 금나라 병사가 개봉을 포위하자 화전을 주장하고 강왕과 함께 금나라로 인질로 갔다가 장초국 괴뢰황제로 세워진 인물이다. 보면 알겠지만 나라를 주도적으로 팔아먹은 이완용과 나란히 놓기엔 애매한 부분이 제법 있는 인물이며, 황제가 되려는 것을 거부했다가 금나라가 도시의 사람들 죽인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된 것 인데다, 그마저도 도중에 도망쳤다.
[58]
원래 매국노가 아닌데도 이런 식으로 까이는 일이 많다. 당장 그 유명한 을사오적만 해도 적극 찬성한 대신은 먼저 찬성한 이완용 그리고 이지용 둘 뿐이고 며칠 동안 저항하다 한 것인데 앞뒤 맥락이 다 무시되고 졸지에 일제 앞잪이로만 본다. 물론 녹봉 받아가면서 결국 동의한 건 문제가 있지만 앞의 나름 저항한게 대놓고 없던 일이 되는 건
김석원과
이지용을 동일인물로 보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59]
장방창이 처형당한 이유는 황제의 후궁을 취해서라 매국노와 관계없다.
[60]
당대 중국에서 일본 관련해서 조선 문제가 어떻게 되는지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지기도 했었지만.
[61]
서양에서 독재국가에 대해 언급할 때 '~의
북한'이라는 언급이 많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62]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純宗孝皇帝純明孝皇后祔廟主監儀軌)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3일자 '四人抄啓別單書入之意敢稟答曰知道' 4인을 초계하여 별단으로 들이니 품의에 대해 답하시기를 알았다.
[63]
역시 일제강점기 때의 악질 친일파 중 하나이다.
[64]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9일 '下敎曰忠文公金炳始忠肅公李耕稙姑爲保留內 閣總理大臣李完用添書以入' 하교하기를, 충문공 김병시, 충숙공 이경직을 보류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추가 기재하여 넣으라.
[65]
종묘숙직일지(宗廟宿直日誌) 1940년 3월 11일, 12일, 13일 기사
[66]
하지만 당연히 그런 이름을 지어준 부모의 책임도 존재한다.
[67]
이하영도 친일파지만 그리 유명하거나 심하진 않아 현재에도 많이 쓰인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이 뒤바뀌어 여자에게 많이 쓰인다.
[68]
그도 그럴것이 학창시절만 하더라도 이름 하나 때문에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될 우려가 크며
입시나
취업에서도 이름 하나 때문에
광탈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 이름 잘못 지어서 인생이 완전히 망하게 된다.
[69]
실제로
독립유공자 중 김완용(1918~2013)이라는 사람이 있다.
#
[70]
이 사례는 2024년 8월 18일자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뤘던 적이 있다.
[71]
이병길의 아들로, 1970년대 초에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역임했는데 이 무렵에 이완용 명의였던 땅 30만 평을 당시
박정희 정부에 압류당한 바가 있다. 이후 1975년 공부를 위해 캐나다로 이민가
극동건설 캐나다 지사장을 역임하는 등 건설 분야에서 일했다고 한다.
[72]
다만 이윤형도 토지 반환 소송에 대해 양심의 가책은 느꼈는지 "
국민이 반대한다면 포기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73]
이와 비슷하게 송병준의 증손자 송준호(송병준 재산 찾기 소송을 벌인 송돈호의 이복형)도 폐인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한 요양시설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74]
"이완용은 죽기 전에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단지 재산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유언이 있었다 하는데, 죽은 지 며칠 후인 16일 그의 유언에 의해 사회 사업 기부금으로 3만 원이
사이토 총독에게 전달되었다." - 역사비평(계간 22호, 1993년 가을)에 실린 임대식의 "이완용의 변신과정과 재산축적" 164쪽.
을 참조.
[75]
이완용의 행적을 살펴보면 저런 유언을 남기고도 남은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사실 이완용은 죽을 때까지 일제의 앞잡이이자 사냥개로 살았다.
[76]
그래서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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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예를들어
한미자유무역협정 관련등으로 친미=친일 주장 시.
[78]
2008년에 문화재청이 직지사 대웅전을 보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이완용이 현판을 썼다는 이유로 논란이 된 바 있었다.
[79]
쉽게 예시를 들자면 두메산골 사는 김 아무개의 잘 쓴 서예와 독립운동가 윤봉길의 대충 휘갈긴 낙서 중 어느 것이 더 값비쌀지 생각해보자.
[80]
이완용과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경우 뤼순 감옥에서 남긴 글씨들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일단 경매에 나왔다 하면 대한민국 원화 기준 억 단위는 가볍게 찍는다.
김구의 글씨도 수천만 원이고 비교적 덜 유명한
신익희의 작품도 최소 수백만 원의 가격에 거래된다. 반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글씨는 고작 30~40만 원이다.
[81]
이완용이 죽어서 염라국에 갔으니, 이승에서 한 짓을 빗대 저승에서도 염라국을 팔아먹을 것 같다는 뜻이다. 이완용의 기회주의적 행보를 고려하면, 심히 뼈 때리는 발언이다.
[82]
이완용의
사망 2일 후.
[83]
당시 폴란드는 3차 폴란드 분할로 인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의 식민지 신세였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23년뒤인 1919년 폴란드는 독립을 이루었다.
[84]
원래는 중국 전설에서 동쪽 바다에 있다는 나라를 뜻하며 일본을 의미하는 말로도 쓰였다.
[85]
무궁화나무가 피는 땅이라는 뜻으로 조선을 뜻한다.
[86]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이완용의 친필로 이 시문을 새긴 비석이
덕수궁 함녕전 후정(後庭)에 세워져 있었으나 해방 후 철거되었다. 시 내용은 함녕전시첩(咸寧殿試帖)에 실려 있다.
[87]
嗚呼
[88]
본명은 강인기.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용검 역, 2014년 KBS 드라마 <
정도전>에서는
진안대군 역, 2015년 KBS 드라마 <
징비록>에서는 중봉
조헌 역.
[89]
게임 캐릭터와 플레이어 배우 모두
김민교.
[90]
옆에는 같은 친일파인
심영이 누워서 절규하고 있다.
[91]
고자가 되기 전에는 맞을 때마다 사과하더니 고자가 된 후에는 일본 순사들도 그를 적대한다. 하지만 출동만 하고 잡지는 못하고
권총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애초에 지나가던 순사를 이유없이 때렸던 전과 달리 일단 도시 전체에서 난동을 부려 출동한 것이기 때문.
[92]
자세히 보면 튕겨냐는게 탄두가 아니라
탄피다. 그것도 소총탄
[93]
사족으로 여기에는
이지용도 등장한다.
[94]
무려 각시탈로 변신한 상황인데도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