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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2:33:22

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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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金朱烈 | Kim Ju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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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43년 10월 7일[1]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 92
(現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92)
사망 1960년 3월 15일 (향년 16세)
경상남도 마산시 중앙동3가 2-52 남선전기[2] 마산지점 앞
(現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243) #
시신 발견 1960년 4월 11일 (실종 27일째)[3]
경상남도 마산시 신포동1가 459 중앙부두 앞바다[4]
사인 3.15 의거 최루탄 피격에 의한 사망
본관 김해 김씨
학력 용정국민학교[5] (졸업)
금지중학교 (졸업)
마산상업고등학교[6] (명예졸업 / 37회)[7]
비고 4.19 혁명의 주요 인물
가족 할아버지 김태종 (1879 ~ 1951) | 할머니 밀양 박씨 (1882 ~ 1958)
아버지 김재계 (1922 ~ 1965) | 어머니 권찬주 (1920 ~ 1989)
큰누나 김영자 (1936 ~ ) | 작은누나 김경자 (1941 ~ 1987)
형 김광열 (1942 ~ 1985) | 남동생 김택열 (1954 ~ 1991), 김길열 (1955 ~ )

1. 개요2. 생애3. 죽음4. 기타

[clearfix]

1. 개요

행악이 사직을 흔들어도 말없이 견뎌온 백성
가슴가슴 터지는 분노 천둥하는 우뢰인데
돌아갈 하늘도 없는가 파도 푸른 목숨이여
시조 시인 이영도, 《고 김주열군 영전에》(1960)
김주열 군의 주검에

보기 위한 동공대신
생각키 위한 슬기로운 두뇌 대신
포탄이 들어박힌 중량을 아시는가?
비인간과 올가니즘(Organism)이 빛은
이위일체의
이 기괴한 신
청마 유치환, 《안공(眼孔, 눈구멍)에 포탄을 꽂은 꽃》(1960)
대한민국의 학생 민주화 운동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인물.

2. 생애

1943년 10월 7일,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4남 2녀 중 차남(넷째)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 직후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죽었으면서도 비교적 많은 사진이 남아 있는 이유는 그 시절에 이미 사진기와 전축을 가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권씨는 경상남도 함양군 사람으로 ‘함양댁’이라 불렸으며 이는 그의 PK 지방과의 인연을 암시하고 있다. 1956년 금지동초등학교, 1959년 금지중학교를 졸업했고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해 남원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몇 달 동안 다니다 그만두고 재수를 시작했다.

1년 후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져 가세가 서서히 기울자 그는 서울로 올라가 학비가 별로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실패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지만, 형 김광렬의 친구이며 형같이 따르던 하용웅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을 하는 것이 지름길이다."라는 권유를 받고 마산상업고등학교(현재 마산용마고등학교)에 다시 원서를 냈다.

마산상업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돌아와 1960년 3월 14일로 예정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창원시 마산합포구로 갔지만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의 연기를 종용해서 3월 16일로 연기되어 있었다. 그래도 하용웅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합격했음을 확인하였지만 당시에는 마산에서 남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서[8] 첫 차를 타지 못하면 도중에서 유숙해야 했기 때문에 곧장 남원으로 귀향하지 못했다.

당시 그의 이모할머니는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었는데 자유당 부정선거로 인해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아 종일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의 부정선거가 들통났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하자 이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와서 두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 보라고 했다. 이에 형제는 시위에 합류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3.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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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시신이 발견된 장소[9] 당시 시신의 모습


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을 들은 어머니 권씨는 마산으로 달려가 아들을 계속 찾아 헤맸는데 20일 넘게 아들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어머니로 인해 마산에서 그의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하고 4월 11일 남원으로 돌아왔다. 이 와중에 별별 소문이 다 났는데 이름 모를 경찰관이 어머니에게 찾아와서 "나도 김주열 군 또래 아우가 있답니다. 주열 군이 사라진 게 남의 일 같지 않네요. 자세히 알면 확실히 가르쳐 드리는데 저도 모르겠고 소문으로 듣자하니 주열 군이 시위 도중 살해되어 시체가 경상남도청 앞 호수에 버려졌다는 소문이 있더군요."라는 말을 하고 서둘러 사라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권씨가 이걸 크게 외치면서 시위대가 경상남도청 앞 연못과 물탱크를 경찰들과 같이 샅샅이 찾아봐도 끝내 찾을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한 권씨는 남편이 위중하다는 편지를 받고 남원으로 돌아갔는데 바로 그날 11시경 마산의 중앙 부두에서 홍합 낚시를 하던 어부 김기돈의 갈고리에 걸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신으로 떠올랐다. 사망한 지 1달 가량 지났지만 당시 바닷물이 굉장히 차가워서 거의 냉동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았다. 링크 참조(시신 사진이니 주의)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고 그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기자 허종(1924 ~ 2008)이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으며 시신이 그로 확인되자 '용공 분자의 난동과 좌익 폭동'으로 내몰린 창원 시민들의 울분이 다시 터져 올랐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이후 전개는 4.19 혁명/진행 문서 참조.

시신이 발견된 후에도 경찰은 사건을 덮는 데 급급했다. 화가 난 어머니가 '주열이 시신을 이기붕 집 마당으로 가져가 묻겠다'고 하자 경찰이 시신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은 채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에서 몰래 빼내 남원 선산으로 가져와 장례도 없이 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0] 경찰이 에워싼 채 매장해 가족들이 보지도 못했다.

한 달 뒤인 1960년 5월 8일 권씨는 마산 시민에게 "자식 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 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됐다면 남은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게 있겠습니까"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며 "존경하는 이 나라 어머니 여러분. 그리고 마산시민 여러분의 그 거룩한 뜻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4. 기타

3.15 의거 62년째인 2022년 말에야 시위 참여자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막내아들 김길열은 국가보훈처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국가유공자로 등록해 달라고 신청했는데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다가 희생된 형의 뜻을 온전히 기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3.15 의거가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역할을 했다고 본다.

[1] 1944년생으로 표기된 자료도 많지만 한 차례 재수를 했고 빠른 생일도 아니므로 1943년생일 가능성이 높다. [2] 줄여서 흔히 남전이라 불렸다. 김주열 사망 이듬해인 1961년 7월 한국전력으로 통합되었다. [3] 시신 발견 소식이 알려지자 2차 마산의거(4월 11일)가 일어나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안대로 220 ( 신포동1가) 창원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 카카오맵 로드뷰 [5] 現 금지동초등학교. [6] 마산용마고등학교. [7] 입학하기 전 사망(당시에는 입학식이 4월초였다). 1995년 37회 졸업생으로 명예졸업장 추서. [8] 당시 경전선은 마산항제1부두선 구간을 통해 마산합포구(구 마산) 시내까지 한참 들어왔다가 스위치백으로 마산 밖으로 나가는 구조였으며 진주역에서 순천 방면으로는 아직 미완공 상태였다. 진주-순천 구간은 1968년에야 완공되었고 마산역이 마산 시내에서 지금 위치로 옮겨진 건 1970년대 이후다. [9] 현재는 창원시 및 김주열 기념 재단측에서 인양장소 안내비, 추모공원, 동상까지 건립하여 번듯한 추모공간이 되었다. [10] 민주화 시대 이전에 민주열사들의 시신이 이런 식으로 처리되는 사례는 대단히 자주 있는 일이었다. [11] 사실 당시에도 4.19 혁명이 헌법에 실렸고 4.19 혁명을 '4.19 혁명'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4.19 의거'로 불림으로써 '5.16 군사혁명'이라 불리던 5.16 군사정변 대비 소홀히 취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