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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4 19:47:40

박진경(군인)

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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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진경.jpg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박진경이다.

1. 개요2. 생애3. 논란4. 기타

1. 개요

朴珍景
1920년 ~ 1948년 6월 18일

대한민국 건군기 군인. 제주 4.3 사건의 초기 강경진압작전에 책임이 있는 인물로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본관은 밀양(密陽). #

2. 생애

1920년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에서 대정익찬회 간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여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과에서 공부하였다. 태평양 전쟁 때에는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에서 일본군 38군단 소속으로 복무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대학에서 영어과를 졸업한 경력을 살려 조선경비대에서 활동하여 미군정의 호감을 샀다. 그리하여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인사국장과 11연대장 등을 거쳤다.

1948년 5월 6일 제주 4.3 사건 당시 김익렬의 뒤를 이어 조선경비대 제9연대장이 되었다.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과 선무공작을 중시하던 김익렬과 달리 박진경은 강경한 진압작전을 펼쳐 제주도민 수천여 명을 무차별 체포하였다. 그가 부임한 지 한 달 열흘만(1948년 5월 6일 ~ 6월 18일)에 소위 '포로'만 6,000여 명에 달했다. 이로 인해 1948년 6월 1일 대령으로 재빠르게 승진한다. 하지만 6월 18일, 승진축하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는 도중 새벽 3시 15분경 부하 문상길 중위 등에 의해 총알 2발을 맞고 암살됐다. 문상길은 이후 재판에서 박진경이 "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그의 진압작전을 비판했다. 한편 미국 CIC에서 9연대 장병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부분의 군인들이 존경하는 군인으로는 김익렬, 증오하는 군인으로는 박진경을 각각 꼽았다고 한다. 김익렬은 훗날 이 설문조사 결과를 자신의 수기에 적어놓았다. 박진경의 장례식은 육군장 제1호로 치러졌으며 문상길을 비롯한 암살자들은 재판을 받고 1948년 9월 23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3. 논란

제주 4.3 사건 진압 당시에 사망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경상남도 지역에서 국가유공자로 취급되어 왔었다. 당장 제주도에서는 충혼묘지에 그의 추도비가 1952년 세워졌고, 1968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남해군 군민공원에는 1990년 그의 동상까지 세워졌다. 특히 그의 고향인 남해에서는 그의 양자인 국회의원 박익주의 영향력까지 겹치며 '창군 영웅'으로까지 여겨졌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4.3 당시 그가 시행했던 무차별 체포작전이 정말로 4.3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냐부터 이전 사령관인 김익렬과의 비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남해에서는 2005년에 그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움직임이 시민단체들로부터 일었으나 동상은 현재도 여전히 남아 있다. 2017년에는 창원시의 현충일 추념식에서 박진경의 위패가 경남대표로 올라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한편 연구가 박명림은 그의 토벌작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였다.
박진경은 이러한 무차별 체포 작전은 경비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일반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유격대와 그들을 분리시켰으며 유격대를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전은 민중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경비대에 대한 상대적 호감을 반감으로 전환시켰으며 경비대 내부를 동요시켰고 유격대에게 경비대도 경찰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더 큰 대립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들을 더욱 깊은 산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사태를 오히려 장기화시켰다는 점에서 실패였다."

4. 기타

SBS 드라마 야인시대 75화에서 9연대장이 좌익에게 피살당했다며 잠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