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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

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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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
(이석기 내란선동 사건)
통합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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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 및 반란 }}}}}}}}}}}}

<colbgcolor=#BC0021><colcolor=#fff>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제2대 총책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제2대 군사부장
이덕구
李德九
파일:이덕구 어린 시절.jpg
출생 1920년
전라남도 제주도 신좌면 신촌리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1]
사망 1949년 6월 7일[2] (향년 29세)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 교래리 623고지 인근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본관 전주 이씨[3]
학력 미오키모리국민학교 ( 졸업)
닛신상업학교 ( 졸업)
리츠메이칸대학 ( 경제학 / 중퇴)
종교 무종교
사상 사회주의
경력 일본 제국 육군 관동군 소위
신촌중학교 체육교사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인민해방군 3·1지대장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총책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정당
[[남조선로동당|
파일:남로당_노랑.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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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제주 4.3 사건의 주역[4] 중 한 명. 본관은 전주(全州).

2. 생애

1920년 전라남도 제주도 신좌면 신촌리(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서 부유한 지방 유지인 아버지 이근훈(李根薰, 1881. 5. 19 ~ ?)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삼봉(1881. 6. 7 ~ ?)[5]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6] 위로 큰형 이호구(李鎬九, 1904. 6. 13 ~ ?)와 둘째 형 이좌구(李佐九)가 있었는데, 이호구는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제16대 신촌리1구장으로 재임했으나 제주 4.3 사건 이전에 사망했고, 이좌구는 이덕구와 함께 4.3 사건의 광풍에 휘말려 화를 입었다.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미오키모리국민학교를 거쳐 히가시오사카시에 있던 일신상업학교(日新商業學校)[7]를 졸업했고, 교토의 리츠메이칸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으나 4학년 재학 중이던 1943년 학병으로 징집되어, 관동군 소위로 8.15 광복을 맞았다. [8]

1945년 귀향한 뒤 1946년 3월 지역유지들과 함께 조천중학원을 세워 역사와 사회, 체육 담당 교사로 근무했다. 이듬해인 1947년 3.1 운동 추모 집회 당시 경찰의 총격과 이에 항의하는 3.10 총파업에 참가했다. 이후 경찰에 파업주동자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이때 고막이 터지는 고초를 겪었다. 석방 이후 한라산에 들어가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 3·1지대장에 선임되었고, 북제주군 제주읍, 조천면, 구좌면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김달삼이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시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러 간 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이덕구가 제주도 남조선로동당 무장대의 사령관이 된 후, 지서 습격과 경찰관을 비롯한 인명 살상이 점점 늘어났다. 1948년 9월 15일을 기점으로 남조선로동당 무장대는 다시금 군경과, 우익인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군경과 서청에 의한 민간 학살도 더욱 늘어났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는 1948년 10월 11일 제주에 경비사령부를 설치, 토벌작전을 단행했다. 10월 24일, 이덕구는 토벌군과 통치기관들에게 포고문[9]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장병, 경찰관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펴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이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부리를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말라. 귀한 총자 총탄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제주도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 쫒겨내기 위해!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 인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의 포고문[10]

그의 선전포고 이후 인민유격대가 국군 제9보병연대 6중대를 공격해 국군이 2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11월 2일에 발생한다. 정부에서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국군은 강경진압작전을 전개했다. 많은 사람이 계엄고등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언도자는 후에 처형되고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육지의 형무소로 이송돼 복역했다. 군경과 서청으로 이루어진 토벌군이 무장대 차림으로 마을에 들이닥쳐 좌익들을 죽이는가 하면, 무장대가 군경 토벌군의 군복을 입고 나타나 토벌군 행세를 하며 우익들을 죽였다. 이덕구가 지휘하는 주력부대는 기습 공격을 가하고, 도청을 방화하고 지서를 습격하면서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으나, 이미 무장대원이 1백여 명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유격대는 '최종항전'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덕구 부대에서는 많은 이탈자가 생겨 조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주읍을 공격하려고 준비를 갖추었지만 치명적인 타격을 받음으로써 재기불능 상태가 되었다. 1949년 3월에 설치된 유재흥 휘하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동시에 "산에서 내려와 투항하는 자에게는 더 죄를 묻지 않겠다"며 회유책을 함께 시행했고, 5월 15일에는 사령부를 해체해도 될 만큼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무장대는 점점 자멸해 갔으며, 특히 이덕구가 이끈 인민유격대가 우연히 진압군과 정면충돌한 사건인 녹하악 전투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

1949년 6월 7일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 교래리 623고지 인근에서 무장대로부터 이탈한 부대원의 밀고로 출동한 경찰과 교전 중에 사망하였다.[11]
⚠ 사진 주의 ⚠
파일:이덕구.jpg
△ 사살된 직후의 모습.
파일:이덕구2.jpg

이덕구의 시체는 관덕정 앞에 내걸렸는데, 옆에는 "이자는 공비의 수괴 이덕구로서 대한민국 국시를 범한 반역자이다.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라고 적어 붙여놓았으며, 가슴께 주머니에 숟가락을 꽂아 놓았다고 한다. 이후 여름이 되어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자 시체를 끌어내려 산지천 남수각 상류 지점 부근에서 화장했는데, 다음날 비가 내려 불어난 냇물이 유해를 다 쓸어가버려 끝내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12]

제주도에는 이덕구 산전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원래의 지명은 북받친밧으로 1948년 11월 20일 제주읍 봉개리가 군경의 소개작전으로 초토화되자 봉개리, 용강리, 회천리, 도련리 등의 주민들이 집단 피신했던 곳으로, 군경의 선무공작에 의해 대부분의 피난 주민들이 귀순한 1949년 3월 봄 이후에는 무장대사령부인 이덕구 부대가 잠시 주둔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아직도 당시 사람들이 썼던 깨진 그릇들과 파편들이 남아있다. #

3. 여담

4. 관련 문서




[1] #. 인근의 북촌리와 함께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신계선,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도 이 마을 출신이다. [2] 제주시 회천동에 있는 이덕구 가족묘지에 있는 이덕구의 비석에는 6월 9일에 사망한 것으로 새겨져 있다. [3] 계성군파(桂城君派)-회은군파(懷恩君派) 15대손 ◯구(九) 항렬. 아버지 이근훈(李根薰)은 14대손 ◯훈(薰) 항렬, 아들 이진우는 16대손 ◯우(雨) 항렬. [4] 제주 4.3 사건에 대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정의는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사건의 원인을 3.1절 발포사건이라 불리는 당시 제주 경찰의 과잉 진압에 강조점을 두느냐,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남조선로동당 무장대의 4월 3일 제주 경찰서 습격 사건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좌우간의 의견은 상이해지며, 본 항목에서 '주범'이라고 말한 것은 4.3사건으로 양민들이 희생되는 과정에서 군경 및 서청과 함께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 분명한 남조선로동당 무장대의 지휘관으로서 그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4.3 사건 당시 학살에 개입한 군경이나 서청 인사들, 심지어 미군정 인사들 역시도 엄밀하게는 제주 4.3 사건의 주범이라 정의될 수 있다. [5] 김완호(金完鎬)의 딸이다. [6] 전주이씨계성군파세보 권2 316쪽에는 이덕구가 첫째 작은아버지인 이중훈(李仲薰, 1888. 5. 29 ~ ?)의 장남으로 오기돼 있다. [7] 현재 닛신고등학교로 개칭되었다. [8] 백선엽이나 박정희 등과 같이 만주 군관학교나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게 아닌 강제징집되어 소위로 임관했으므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라 강제징병의 희생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9] 미국의 학자 존 메릴은 이를 무장대가 군경에 대해 보낸 '선전포고'로 해석했지만, 선전 포고가 아닌 '호소문'이라는 반박도 존재한다. [10] 여담으로 이때 제주신보 김호진(金昊辰, 1920 ~ 1948) 편집국장이 이 이덕구의 포고문과 담화문을 인쇄해주었다는 혐의를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고 전해졌는데, 각종 문헌조사를 한 결과 유인물의 명칭과 내용, 인쇄시기와 살포시기에 대한 내용은 일정하지 않고, 삐라의 살포 배경 및 이유 등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김호진이 당시 무슨 죄로 어떻게 판결을 받아 처형이 집행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가 1945년 8월 15일부터 1949년 3월까지의 국내 20개 중앙지가 보도한 4.3사건 관련 기사들을 분석해 보았지만 관련 기사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 # [11] 일부에서는 자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시신이 깨끗하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관자놀이에 총알 자국이 난 것 말고는 시신에 별다른 총상이 없었다고. [12] 이덕구의 외조카 강실의 증언 [13] 정확히는 이덕구의 큰형 이호구의 부인이 거창 신씨 신수란이고, 신수란의 다섯째 남동생 신우성(愼禹晟, 1920. 7. 29 ~ 1990)의 장남이 바로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