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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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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주요 민족: 예맥 · 삼한 · 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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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공화국
朝鮮人民共和國 | People's Republic of Korea
미승인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5-1948).svg 파일:조선인민공화국 국장.svg
파일:조선인민공화국 국기.svg
국기 국장
파일:한반도 위치.svg
조선인민공화국의 명목상 영토
1945년 9월 6일 ~ 1946년 2월 19일
(166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소비에트 민정청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표어 자주독립국가(自主獨立國家)[1]
위치 한반도
수도 경성(서울)
국가원수 주석
정치체제 민주공화제
언어 한국어
민족 한민족
1. 개요2. 배경3. 건국 선포 및 각료 명단4. 제1차 인민위원회 명단5. 선거 계획6. 미군정의 조선인민공화국 해체7. 와해된 원인8. 의의9. 여론조사10. 여담11. 대중매체에서12. 관련 문서13. 관련 논문

[clearfix]

1. 개요

조선인민공화국 여운형 선생이 주도하여[2], 일본제국 식민지 치하에 있던 한반도 조선민족이 세운 미승인정부이다.[3] 대한제국 일본제국에 강제로 병탄을 당한 뒤에 세워진 한민족의 단체 중, 백범 김구 선생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명목상의 정부역할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구체적인 조직도와 청사진이 존재하면서 그에 마땅한 인재와 인력규모를 가졌던 단체로써 상황이 잘 맞고 연합군과 협상이 잘만 맞았다면 현재 한반도 한민족의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었던 세력 중 하나다.

일본제국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에 발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기반으로 한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세워지기 전인 일제강점기 말, 일본제국의 조선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는 패전 이후에도 조선 일본령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인들을 총칼로 탄압하고 물자를 무리하게 공출했으며, 이로인하여 일본인에 악감정이 극에 달하게 만들었는데, 일본 본토가 공습으로 초토화되고 연합국이 조선의 독립을 결의하고 무조건항복을 요구자 아베 노부유키도 조선의 식민지 점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점유가 아닌 철수를 준비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한짓들이 아주 많기에 수도조차 불타오른 일본제국 본토의 지원가능성[4]이 전무한 상태에서 조선인 정치가들의 선동하에 조선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박해를 우려하였고, 조선에 남은 명사 중에 가장 유명한 여운형 선생과 협상하여, 조선인 정치가들이 일본인의 안전한 본토귀환을 보장하는 대신에 총독부는 조선인들이 자력으로 독립된 정부를 세우는 것을 방관하겠다는 약조를 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뒤를 이어 조선인민공화국이 탄생한 것이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1945년 9월 6일에 서울에서 선포되었으며, 이름만 비슷하게 지어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르게 다당제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설계되었던 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한민국의 수립직후부터 여러 난항을 겪으면서 현재 한반도에서 실행중[5] 지방자치제를 처음 시행한 집단인 만큼 한민족의 자치제도의 원류이다. 따라서 사실상 김씨 절대왕정국가로써의 인민공화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르게 진짜 민주공화국을 지향한 세력이다.

인공은 미군의 정권유지 명령으로 총독부에 의하여 와해되었고, 헌법을 제정하거나 의회나 중앙정부조직을 구성하지도 못하여 실질적 국가수립의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우파의 거두인 김구 이승만이 국외에 있던 이유로 조선공산당 재건파를 주축으로 좌익 주도로 구성되었으며, 총독부 휘하의 조선인 군대와 무기를 인수하지 못해서, 실질적인 무력을 창출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으나, 지방자치제도의 근간을 만들어냈다는 긍정적인 면도 존재한다.

국기는 태극기[6], 수도는 서울이었으며, 명목상 약칭은 '조선인공'이었다.

인민, 인민공화국이라는 단어가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북한의 존재 때문에 굉장히 부정적인 뉘앙스이겠지만, 광복 직후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호칭이 적격했다고 봤던 사람들이 다수였다.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적격한 국호 후보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이 70%의 지지를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설문조사는 미군정이 통치한 지 2년이 되어가는 1947년 7월 6일 시행된 점, 이미 파괴된 인민위원회를 선호한다고 응답한 점을 볼 때 단순히 국호를 묻는 투표가 아니라 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신임투표이다. 즉 당대 대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이미 미군정이 해체한 지 오래된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에 대한 선호를 보여준다.
<colbgcolor=#002664><colcolor=#fff>(1) 국호는?
1위 조선인민공화국 1708표 70%
2위 대한민국 604표 24%
3위 기타 8표 1%
4위 기권 139표 4%
(2) 정권 형태?
1위 인민위원회 1757표 71%
2위 종래 제도 327표 14%
3위 기타 262표 10%
4위 기권 113표 5%
(3) 토지개혁 방식?
1위 무상몰수 무상분배 1673표 68%
2위 유상몰수 유상분배 427표 17%
3위 유상몰수 무상분배 260표 10%
4위 기권 99표 5%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조선신문기자회가 서울시내 중요지점 10개소에서 통행인 2495명에게 실시한 여론조사 출처

2. 배경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였던 사람이고, 일제가 최후로 가파르게 넘어가던 1944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음에도 조선인들을 총칼로 억누르고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는 등의 악행을 계속해서 저질렀다.[7][8] 하지만 1945년 8월 9일 소련 선전포고하고 내려오자, 조선이 연합국에 넘어갈 것을 직감하고, 일본인들이 무자비한 공산군의 포로로 잡히게 두느니[9][10], 힘없는 조선인들과 협상해서 그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하에 여운형을 불러서 일본인들의 무사귀국을 위한 협상을 시도했다.

이처럼 큰 위기가 다가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지킬 필요가 생겼을 때, 조선인들 또한 서서히 긴장감과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국내외의 조선인 유력자들은 일제의 패망이 필연적이며, 그 필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선인 유력자들은 연합국이 들어오기 전에 그들과 협상할 자신들의 국가를 만들어야만 주권국가로서 그들과 협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식민지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고 있었고[11], 조선이 독립할 철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립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정부조직과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일제의 지배층과 조선인 유력자들의 이해관계가 어느정도 맞게 된 무렵, 아베 노부유키 여운형을 부른 것이다. 당시 여운형은 조선인의 나라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제가 패전시국에 조선인들을 학살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고[12], 다소 불합리한 조건을 받아들이더라도 일제가 헛짓을 못하도록 막겠다는 일념으로 협상에 임했다.

아베 노부유키와의 협상 결과로,
-전국적으로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각 석방할 것
-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등의 결과를 창출해냈는데, 악독한 아베 노부유키는 무력을 넘기지 않은 이렇게나 불합리한 협상조차도 용인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엔도 류사쿠 총감이 아베 노부유키를 설득해서 협상을 조인하도록 설득했고, 결국 협상이 체결되었다.

총독부와 조선인 유력자들의 협상이 체결되자, 여운형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의 발족을 위하여 준비를 시작하였다.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자, 건준이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안전한 귀국을 위해 조선인들의 활동을 묵인한 총독부 덕에 조선인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을 위한 공식적인 정치조직이 경술국치 이후, 최초로 설립된 순간이었다.

건준은 이미 이북에 들어온 소련과 협상하여 건국준비활동을 보장받았고, 소련도 일제의 공업시설과 일본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에 관심을 갖느라, 조선인들의 정치활동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건준을 방해할 생각을 딱히 하지 않았다.[13] 소련의 건준조직 인정에 힘입어, 건준은 연합국이 자신들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는데, 이미 조선인들에게 정통 조직[14]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고, 건준의 좌익 색채로 인해 우익들의 큰 지지를 못 받고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심지어 좌익들 사이도 여러 파벌로 갈라져 있어서 단결이 쉽지 않았다.

특히 귀국하지 못한 임시정부를 무시하기 힘들었기에 8월 초에 총독부와 협상을 마쳤음에도 조선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설립일인 9월 6일까지도 총선이라든지 헌법제정이라든지라는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지 못했다.[15]

결국, 임시정부의 귀국이 늦어지는 가운데 미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압박감에 9월 6일에 헌법도 제헌의회도 명백한 중앙관료조직과 군대도 없이 졸속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이 설립하게 된다.

조선인민공화국이 설립되는 순간까지도 군대와 경찰조직은 일제의 총독부가 가지고 있었고(38선 이북은 소련이 가져갔다), 중앙정부 좌석은 임시정부를 포함한 여러 조직에 공정히 배분한다고 상당수가 비어있었으며, 총독부치하의 관료조직은 월급을 주는 총독부의 영향력 내에서 계속 보신[16]했다.

3. 건국 선포 및 각료 명단

건준의 결성 초기부터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여운형•건국동맹과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적 친화성, 그리고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자들의 친분관계도 바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소련의 서울 진주 소식이 크게 작용했다. 여운홍에 따르면 여운형은 8월 15일 아침에 엔도를 만난 뒤 정백과 함께 돌아와 단독으로 담소를 나누었으여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기 때문에 사태가 달라졌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중략) 이에 여운형과 건준 참여세력들은 사회주의 계열을 적극 참여시켜 소련군의 남한 진주에 대응하는 국가건설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1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것을 마치 여운형의 것을 빼앗았다고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여운형이 소련 진주 소식을 듣고 사회주의 계열 인사를 적극 참여하게 한 것이다. 또한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를 빠르게 전국적으로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해방 직전까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이 대중 속에서 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부터 해방까지의 국내 독립운동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이 이끌었다. 경성콤그룹 뿐만 아니라 건국동맹도 구성원 다수가 이전부터 계속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던 사람들이다.

일단 9월 6일에 졸속으로 국가를 선포한 3일 뒤인 9월 9에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미군정은 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인수받았다. 이보다 5일 뒤인 9월 14일에 건준 중앙인민위원회는 역시나 총선 등의 정당한 절차로 제헌의회를 만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미군정과 소군정의 협조를 받아 총독부의 행정조직과 경찰조직을 공식적으로 인수하지도 않은채, 중앙정부 관제와 각료 명단을 공포했다.

이러한 중앙정부 관제와 각료조직도는 여운형이 아닌, 박헌영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공표되었으며, 명목상으로는 임정과 각 파벌조직들의 균형을 맞춘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상 조선공산당이 실권을 쥐고 있는 형태였다.
그러나 인공의 수립이 조공의 일방적인 독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도 인공 수립에 적극 관여하였다. 여운형은 9월 6일의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개회사와 격려사에서 비상한 시기에 연합국의 진주에 대비하여 "연합국과 절충할 인민총의 집결체"로서 인공이 수립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여운형은 또한 "혁명가는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인민이 승인만 한다면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정부는 그대로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여운형은 북한에서의 "소군정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국의 공동방침으로 해석"하여 남한에서 "미군 역시 조선인민에게 맡길 줄로 예상"하는 낙관적 정세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여운형은 일제시기부터 혁명단체와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과도정권을 수립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권구상은 인공과 다르지 않았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5
여운형은 인공 수립에 합의한 뒤 건준 내부의 반발에 부딪치자 조각발표를 보류하려고 하였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인공 대표대회에서 인사도 했고 인공 부주석의 지위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7

여운형은 아무것도 몰랐고 박헌영만이 주도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여운형이 요양중이었던 것은 맞으나 각료 명단은 여운형과 합의하였으며 발표만이 박헌영의 독단이었다.[17] 발표도 여운형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다.
인공 수립 당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각도 관공서와 일본인 공사 재산을 압수하고 일군을 무장해제시켜, 모든 것을 조선인민에게 맡길 뿐 그 목적이 없는 듯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소군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군의 공동한 최고방침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미군도 38도 이남에 진주하여 오면 역시 조선인민에게 모든 것을 맡으라 할 줄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맡을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급히 인민대표회의를 열어 국호를 결정하고 정부조직법을 결정하며 인민위원을 선거하였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9

보듯이 고위층을 보면 좌우가 합작한 내각을 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임시정부 출신은 명목상의 고위직만 얻었고, 실상 주요 요직은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나 좌익세력이 차지하였다.[27] 당시 이승만, 김구는 아직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김성수, 김병로, 조만식, 신익희 등의 우파인사들도 이름은 올라갔지만 실제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이전에 이미 송진우 등 일부 우파 인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환국환영회 및 국민대회준비회(국준)를 조직하고 9월 8일 경에 조선인민공화국 타도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우파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이승만도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 방송을 통해서 정식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주석 취임을 거절했고 김구 김규식도 11월 말경 공식적으로 입각을 부인했다.

특히 김규식 허헌과의 담화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설립에 대해 여운형 측은 자신과 어떠한 의견도 교환하지도 않았고, 미국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임명시킬때는 당사자의 의사를 물어보는데 자신이 일방적으로 인공의 외무부장으로 취입당한것은 불법적이라며 여운형과 인공 측에게 일방적으로 취임당한것에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위 각료명단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인공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름을 도용당한 데 불과하고, 실제 취임한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28] 건준 당시 우파 대표로 부위원장이었던 안재홍은 건준을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고, 건준위를 2차 개편해 김병로, 이인 등 우익 인사들을 합류시켜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여운형을 설득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이를 거절하면서 안재홍과 우파 세력이 건준을 떠나게 된다. 이 때문에 비교적 좌파에 포용적이었고 건준위 합류를 생각했었던 김병로도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조선인민공화국 정부라는 것은 실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없는 명목상의 것에 불과했다.

여하간 건준은 일제 법률의 완전 폐기, 친일 민족반역자의 토지몰수, 철도·통신·금융기관의 국유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강과 27개조 시정방침을 발표했다.[29]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거창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인공"은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후보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지지율 33% 21% 18% 16% 12%
후보 김일성 최현배 김규식 서재필 홍남표
지지율 9% 7% 6% 5% 5%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대통령 내무부장 외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만식 김일성
사법부장 문교부장 경제부장 교통부장 노동부장
허헌 안재홍 백남운 최용달 박헌영
*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여론조사 제1호에서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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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에 포함된 부처는 대한제국 당시 7부(내부, 외부, 탁지부, 학부, 군부, 법부, 농상공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당시 7부 1국(내무부, 외무부, 재무부, 학무부, 군무부, 법무부, 교통부, 노동국)을 조합한 듯 하다.

그 당시 해방정국에서 민중들이 바라는 내각과 거의 유사한 점에서 최고위층만큼은 민중의 지지를 받을 인사들로 구성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상술한 것과 같이 그들이 참여의사를 밝히지도 않았는데 인공에서 명의를 일방적으로 도용했다는 것.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에 대해 좌파조직이라는 비난이 대두되자,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여운형은 먼저 국내의 혁명동지를 규합·단결하여, 국가건설을 준비하고, 해외 혁명동지들이 입국하면 이들과 함께 혼연 일체의 과도정권을 세우려 하였다. 출처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 조선을 건설함에 있어 구태여 빛깔을 문제삼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 모두가 합력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 조선인민공화국이라면 적색으로 아는 사람은 소학교 1학년과 같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갈라지면 넘어지고 뭉치면 일어선다. 한민당·국민당·건국준비위원회 등이 손을 잡고 국민 총력을 집결해야 하며 이것을 인민 대중은 원하고 있다. 그리고 사대주의 배외사상은 절대로 배격해야 한다.
여운형 #

4. 제1차 인민위원회 명단

<colbgcolor=#002664><colcolor=#fff>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 출처

중앙인민위원은 공산당 38명,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은 공산당 15명으로 공산당이 많다.

5. 선거 계획

인공은 대표성의 문제를 선거로 극복할 계획이었다.
인공은 10월 3일 총선거를 통한 제2회 전국인민대표회의를 46년 1월 소집한다는 취지문을 발표하였다. 곧 전국적인 총선거를 통해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함으로써 인공의 대중적 지지와 대표성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었다. 물론 1945년 9월 6일의 제1회 인민대표자회의에서도 인공이 전 인민의 광범한 민주주의적 선거로 선출되지 못하였으므로 '임시혁명정부'이며 "혁명시기에 대응하는 과도적 존재"라는 입장에서 "늦어도 2년 이내로 될 수 있는 빠른 기간 내에 제2차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결의"하였다.
(중략)
인공주도세력에게 1946년 3월 1일 제2차 전국인민위원회 대표회의의 선거는 인민의 총의를 물어 완전한 정부의 실현, 또는 신국가를 건설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인공은 선거에 실패한다면 승리한 정당에게 정권을 내어주고,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는다면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하겠다는 비장한 입장을 밝혔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86~87

6. 미군정의 조선인민공화국 해체

미군정은 인공이 수립되어 활동하자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공식 성명을 통해 38선 이남에는 오직 미군정이라는 한 정부만 있을 뿐이며, 조선인민공화국은 권위와 세력과 실체가 전연없는 것이며, 인공지도자들을 "괴뢰극의 막후에서 연극을 조정하는 사기한"이라고 비난하고 해체를 명령하였다. 이에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는 조선에서 통일적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우리의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로서 군정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며 군 행정을 방해하려는 의사는 없다고 밝혔다.
(중략)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는 일반대중에게 신임과 지지를 획득하는 방법으로 신임총투표, 일반국민선거를 제안, 확정하고 새로운 주권의 확립을 기도하였다

미군정은 아놀드장관의 성명을 통해 인공의 이러한 시도를 허위선거라고 규정하고, 선거는 "대중을 유도하는 자칭 정치가의 유희물"이 되기에는 너무도 신성한 것(중략)"이라고 비난하고, 선거의 중지를 요구하였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70~71
아놀드 군정장관이 모욕적인 성명을 통해 인공 자체를 부정한 뒤에도 미군정과의 협조전술을 계속 유지하였다. (중략) 이에 인공은 미군정이 지방 점령정책을 실시하면서 인민위원회를 탄압 해체하는 상황에도 수세적으로 대응하였다. 대표적으로 수원에서 박송극 인민위원장의 구금에 항의하여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남원에서는 미군정이 무력으로 인민위원회를 탄압하여 대중봉기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정면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1945년 11월에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회의에서 지방 인민위원들의 지방사정 보고에서도 드러나듯이, 전국적으로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인물들에 대한 검거와 구속, 발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인공 중앙은 어중간한 태도를 유지했다.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80

이에 여운형은 미군정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게 되었다.
여운형: 조선은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은 아직 해방되지 않아 여기에 비합법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넨꼬: 어떻게 해방이 안 됐습니까?
여운형: 해방이라고 되기는 했지만 미국인들로부터 다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넨꼬: 왜 그렇습니까?
여운형: 최근 남조선의 반동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여운형: 1945년 8월 15일 오전 7시에 전 정무총감인 엔도가 조선인민의 대표들을 불러 “4~5일 후면 서울에 붉은 군대 선발대가 도착할 것이며,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우리가 무장해제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8월 15일 오후 서울에는 붉은 군대가 서울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시민들은 붉은 군대를 조용히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실망했으며, 38선이 획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더욱 불만스러워 했습니다.
로마넨꼬: 당신은 우리의 활동이 군사적인 것이며, 우리는 명령받은 바로 그 지역까지만 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여운형: 나는 38선 이남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감옥에 있는 정치범들을 석방시키는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정치범들이 주축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당신은 북조선에서 인민위원회가 발전해 가는 것과 같이 미군이 진주한 남조선에서도 그러리라고 믿습니까? 그러나 실제 사실은 다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로마넨코 소장과 여운형의 미소공위 재개문제 논의

7. 와해된 원인

와해된 가장 큰 이유는 크게 건국 이전의 이유와 건국 이후의 이유로 나눌 수 있다.

건국 이전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최소한의 무력조직, 특히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조직을 인수하지 못한 것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군대를 구성할 만한 무력을 인수하지 못했더라도 독자적으로 건준을 제압할만한 총독부의 무력은 거세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한 건준은 시간을 너무 끌었다. 총독부와의 협상은 8월 초에 끝냈는데, 해방 당일인 8월 15일에도 갈피를 못잡고 있었고, 파벌관리에 실패하여 결국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는 9월 초까지도 제헌의회에 대한 논의가 나오지 않았다. 임정을 포용할 생각이었다면 임정의 핵심 인사를 빠르게 귀국시켜서 제헌의회와 중앙정부를 미군이 오기 전에, 하다못해 미군이 행정력을 온전히 장악하기 전에 만들었어야 했다.

명목상 국가를 수립하고 중앙관제를 조직했음에도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할 관료조직을 구축하는 데 있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조선인민공화국이 지방자치제를 규정했고, 실제로도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조직한 인민위원회에서 자치를 실시했다. 하지만 인민공화국은 일국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중앙관료조직을 구축하지 않았고, 이미 만들어진 총독부의 조선인 관료조직조차 인수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총독부가 행정력을 미군정에 넘긴 이후에도 조선인 실무관료들은 임시정부의 명령도 인민공화국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정치싸움만 하고 월급은 주지도 않으면서 제대로 된 청사진을 제시하거나 정상적이고 통상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인민공화국이 조선민족의 독립되고 단일된 정부를 가지기 위해서라도 필요했음에 불구하고, 이 명목상 공화국 선포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쳤다. 미군정이 공화국 각료들이 국민들이 직접 참정권을 행사하여 구성된 것이 아니므로 이들이 국민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다. 비단 조선인민공화국뿐만 아니라 모든 독립운동 단체들을 승인하지 않았다. 비 공산주의 진영 출신 독립운동가들도 미군정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은 제대로 된 정부 기능조차 하지 못하였다. 결국 미군정은 조선총독부를 그대로 이어받아 미 군정만이 38선 이남에서의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하고, 남한지역 내의 모든 정당, 독립운동 단체들에게 강령과 간부명단을 등록하게 했으며, 인민공화국도 하나의 정당으로 등록하도록 명령했다. 10월 10일 미군정은 최후통첩으로 인공에 해체나 명칭 변경을 요구한다. 인공은 11월 말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열어 명칭에서 '국'을 빼는 방안을 논의하고 명칭 사수를 결정했다. 이후 미군정은 물리력을 동원해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를 해체하기 시작했다.[30]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합작이 무산되며 사실상 인공은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이북에서 소련은 미국과는 달리 처음에는 평남 인민위원회와 협력하였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소련이 미국의 신탁통치 제안에 동의하자 평남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조만식은 이를 반대해 소련 및 김일성을 비롯한 신탁 찬성파들과 갈등이 생겼다. 결국 소련은 조만식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시켰고, 이후 생사불명 처리하였다. 인공이 폐지되고 이북에는 북한의 건국을 위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세워졌다.

결국, 지나치게 졸속으로 출범한 것이 인공이 와해된 가장 큰 원인인 것이었다. 미군정이 통치를 선언한 후 서울에 도착한 날이 9월 9일, 건국 선포 시기는 9월 6일이었다. 또 이 시점 역시 광복 직후 고작 3주 후였고, 각료가 발표된 건 또 1주 후였다. 한 나라를 이끌어갈 중책들을 고작 한 달만에 면면한 심사 없이 등용한 것이었다.

독립운동가 사이에서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보수주의 등 다양한 이념이 존재했는데, 조선인민공화국은 각 진영 사이의 충분한 논의 없이 급조되었다. 각료 중 2/3 이상이 조선공산당 재건파나 좌파 출신이고, 나머지는 아직 귀국하지 않았거나 참여를 거부한 인사들이었다. 또한 소군정이 진행되던 북한의 인사들도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

8. 의의

자주적인 한반도의 통일 정부를 세우려고 했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지방자치 부분에 있어서 특히 의의가 있었다. 인공이 조직됨에 따라 지방에 있던 기존에 전국적으로 활동했던 건준 지부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인민위원회는 미군이 진주한 뒤에도 해당 지방 주민들의 지지 속에 치안을 담당하는 등 '지방정부'로서 활동한 곳이 꽤나 많았다.[31] 이 인민위원회는 치안,행정 능력이 '우리 스스로도 이끌어 나갈 수 있음'을 능력으로 보여준 사례로 의의가 있다.[32] 이러한 인민위원회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대중들에게 상당한 신망과 지지를 받고 있었다. # 비록 서울의 중앙인민위원회는 좌익 인사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우익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지방의 인민위원회 경우는 좌익들만이 아닌 지역에서 양심가로 명망 높은 우익 세력 인사들도 대거 적극 참여했기 때문에 우익으로부터도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 예를 들어 중국, 소련, 일본 등지에 이민, 징용이나 징병 등 나갔다가 돌아오는 귀환민들의 행렬은 광복 후 수 개월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었던 무렵에 인민위원회는 이들을 맞이해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주고 아직 철수하지 않은 일본 군, 경을 견제하는 등 적지 않은 행정력을 발휘했고 남한지역 주둔 미 군정의 병력 배치가 완료되는 1945년 말까지 실질적인 지방 행정기관처럼 활동했었다.

특히 가장 의의가 있었던 것은 소작료 개혁 관련이었다. 서울의 중앙인민위원회가 결정한 소작료 3:7제는 특히 농민들의 환호 속에 받아들여졌다.[33] 이는 미군정이 10월 5일 군정법령 제5호로 법제화 한 '소작료를 생산량의 3분의 1만 내면 된다'는 1/3제를 공포한 것도 이 인민위원회에서 내세웠던 '3:7제'가 농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었던 점에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광복 정국 당시 사람들은 정권 형태가 '군정 체제'[34]보다는 '인민위원회'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었다. #

9. 여론조사

당대 대중의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미군정에 대한 선호도를 알 수 있는 여론조사들이다.

조선인민공화국은 강제 해산으로 계획했던 선거는 못 했지만 선거가 실시되었다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colbgcolor=#002664><colcolor=#fff>(1) 국호는?
1위 조선인민공화국 1708표 70%
2위 대한민국 604표 24%
3위 기타 8표 1%
4위 기권 139표 4%
(2) 정권 형태?
1위 인민위원회 1757표 71%
2위 종래 제도 327표 14%
3위 기타 262표 10%
4위 기권 113표 5%
(3) 토지개혁 방식?
1위 무상몰수 무상분배 1673표 68%
2위 유상몰수 유상분배 427표 17%
3위 유상몰수 무상분배 260표 10%
4위 기권 99표 5%
1947년 7월 6일 조선일보가 실시한 설문 조사 출처
<colbgcolor=#002664><colcolor=#fff>(1) 군정에 대하여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1위 기권 4686명 98%
2위 위생 시설 96명 2%
(2)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1위 식량 정책 2534명 53%
2위 산업 운영과 주택 관리 1482명 31%
1946년 8월 11일 한국여론협회가 종로, 본정 입구, 노량진에서 통행인 478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출처

10. 여담

11. 대중매체에서

12. 관련 문서

13. 관련 논문



[1] 단순히 자신들이 독립국임을 나타내는 표어였기 때문에 존속했더라도 얼마 안가 변경되었을 것이다. [2] 권력욕심에 정신나간 박헌영이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여운형 선생으로부터 주도권을 뺏어온 뒤부터는 사실상 박헌영이 주도하게 된다. 박헌영은 주도권을 뺏은 뒤, 조선인민공화국에 공산주의 색체를 덕지덕지 바른 덕에 미군정으로부터 공산주의 세력이라는 의심을 받게 만들었고 이는 조선인민공화국을 미군정이 재활용의 여지없이 강제해산조치를 하게 만든 계기가 된다. [3] 미승인국가로 보기에는 정부인사로 지명된 사람들의 다수가 내각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군사권과 경철권도 없었으며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영토와 인구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개 시민단체(혹은 정당)로 보기도 애매한 것이 주요 도시에서는 총독부 관료 경찰 미군정 전까지 통제권을 유지했지만 지방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명패를 달고 자치를 행하려던 조직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4] 군을 움직일 수송역량 자체가 부족했다. 본토결전을 결의한 시점에서 중국과 동남아에 배치한 병력을 본토로 재배치하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5] 북한도 명목상으로는 지방자치제를 시행한다. 어떤 면에서는 실제로 지방자치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크나큰 착각으로 그냥 역량부족으로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한 통치행위를 포기한 것이다. [6] 당시 사용하던 건준의 깃발을 국기로 쓰기도 했다. [7] 일본 정부 무조건항복을 하기 전까지 일본이 내건 종전 조건 중 하나가 조선의 식민지 영유권 유지였다. 따라서 1944년에 부임한 아베 노부유키가 받은 지령은 조선의 치안력 유지였을 확률이 높다. [8]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유권유지 망상은 소련의 대일선전포고로 인하여 물거품이 되었다. [9] 여운형과 초기 협상을 완료했을 때는 이미 소련이 청진을 점령하고 남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10] 소련치하 일본인들의 운명이 상당히 가혹했다는 것을 보면 이 생각은 일본인들을 지키기 위한 매우 옳은 생각이었다. [11] 1차대전 식민지들은 명목상 국제연맹에 의하여 신탁통치를 받은 뒤, 일정기간 후 독립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실상 독립한 것은 제국에 지배당하던 유럽인들 뿐. 대부분의 패전국 식민지들은 승전국의 식민지로 재편입되었다. [12] 실제로 총독부는 일본인들의 안전한 철수만 고려했지 해방될 조선인들을 배려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증거로 귀국자금을 얻기 위해서 돈을 무제한으로 찍어서 얼마 없는 조선인 자본을 망가뜨리고 식민지 조선의 경제를 파괴했다. [13] 이때까지만 해도 소련은 조선이 연합국에 의해서 그냥 독립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김일성이 소련과 함께 들어왔지만 딱히 이들로 뭔가 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미국과 소련간에 갈등이 시작된 이후에 바뀐다. [14] 좌익들은 임정에 큰 애착이 없었지만 특히 우익은 임정의 정통성을 높게 봤다. [15] 헌법제정도 제헌의회 출범도 결국 해산되는 순간까지 하지 못했다. [16] 다만 총독부의 관료조직과 별개로 각 지방은 조선인의 자치조직이 구성되고 있었으며 조선인 관료들은 이에 어느정도 협력하고 있었다. [17] 출처: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7 [18] 가인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애산 이인(초대 법무부장관)과 함께 3대 항일 인권 변호사로서 조선인 인권 보호를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들이다. 허헌의 호가 긍인이라 이 셋의 호와 이름에 모두 인이 들어가서 일명 '삼인'으로 불렸다.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한제국과 일제의 변호사 자격증을 모두 취득했다. 1926년 조선 최초의 6개월간 민간인 세계일주를 다니기도 했다. 신간회나 건준에 적극 참여하며 온건좌파의 성향을 띠었으나, 결국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냈다. 1951년 익사. [19] 이후 월북. [20] 연해주 고려공산당 출신 남로당 간부. [21] 1927년 원산 총파업으로 이름을 알린 좌파인사. 보성전문학교( 고려대 전신) 교수로 조선건국동맹 때부터 참여하였다. 이후 월북하여 북한 헌법을 기초하였으나 숙청당했다고 추정된다. [22] 이재유 그룹의 활동가이며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인 독립운동가. [23] 사무국이나 서기부로 표기된 자료가 있다. 리강국이 서기인 것은 확실하다. [24] 보성고보를 수석졸업하고 독일 유학했던 엘리트 출신으로 독일 공산당(KPD) 당원이기도 했다. 국내에서 공산당, 독립운동 활동을 하다가 연인인 간첩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하였으나 역시 숙청당했다. [25] 공산당 ML파, 역시 월북 후 숙청. [26] 고려공산동맹 중앙위원,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공산주의 운동가.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 등 좌익 활동을 이어가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했고 1949년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전향하였으나 6.25 전쟁 와중 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27] 이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 주창한 '8월 테제'에 따른 것이다. '8월 테제'란, 초창기에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세력을 포용하면서 나아가 최종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단계적 전략 요지의 내용을 담은 선언을 말한다. [28] 각각 한국문화대백과 자료대한민국사에서 확인 가능하다. [29] 이 정강정책은 조소앙이 기초해서 임시정부가 내걸고 있던 삼균주의와 상당히 유사하다. [30] 이는 미군정의 흑역사가 되었다. 당시 미군 장교였던 리처드 로빈슨 대령은 "우리는 인민위원회라는 것을 공산주의 단체로 여겨 해체시켰지만 알고 보니 이들은 그저 순수한 민간인들이었다. 우리가 이 단체를 해체시킨 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였다."며, 회상했다. [31]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에 따르면, 38선 이남의 조사 대상 138개 군 가운데 128개 군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 가운데 약 절반에 해당하는 69곳의 인민위원회가 자치 관리를 했다. [32]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현재는 정년 퇴임으로 석좌 교수)에 따르면, 광복 직후에 이러한 자치 기구가 없었다면 굉장히 커다란 혼란이 있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33]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주제 하에서 소작료를 5할, 많게는 6~8할까지 내 절대적인 빈곤에 신음했던 농민들이 3할만 소작료로 내면 된다는 주장에 '정말 이것이 해방이구나'하고 감격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34] 당시 군정 체제 때는 일제 강점기 당시 경찰로 복무했던 친일 경찰 출신들이 다수 점유했었고, 이 친일 경찰들은 당연히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다. [35] 여운형은 은퇴한걸로 나온다. [36] 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