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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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1] 8월 10일 | ||
한성부 서서
용산방 동문외계 동문외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2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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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2년 10월 10일 (향년 32세) | ||
도쿄부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치가야 형무소[2] | |||
묘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 | ||
본관 | 공주 이씨 (李奉昌)[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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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이진규[4] 어머니 밀양 손씨 서모 주간란, 정봉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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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형 이범태 이복동생 이봉준, 이종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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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양자 이실[5] | ||
친인척 |
이은임(조카) 이세창(종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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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 173cm[6] | ||
학력 |
문창소학교 (졸업) 간사이공업전수학교 (야간학부 / 중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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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불교 | ||
조직 | 한인애국단 | ||
의거 | 사쿠라다몬 의거 | ||
서훈 | 건국공로훈장 복장[7] 추서 | ||
별칭 | 칭호(稱號)는 의사(義士) | ||
일본명 |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8]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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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의 친필 선언문[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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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앞에 선 이봉창 의사 (1931. 12. 1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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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11]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백범일지 中
대한민국의
한민족 출신
독립유공자.
윤봉길과 더불어
김구 휘하의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인물로 유명하다.
쇼와 덴노를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순국하였다."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백범일지 中
2. 생애
1900년 8월 10일 한성부 서서 용산방 동문외계 동문외(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아버지 이진규와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2년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 청파동(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 있던 천도교 계열의 미션스쿨인 문창소학교에 입학했고, 1917년 경기도 경성부 금정(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118번지로 이주하였다. 이후 가게 점원으로 일하다가 1919년부터 1924년까지 경성부 한강통(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동) 용산역에서 역무원 및 열차 운전 수습생 등으로 근무하게 된다.이후 이봉창은 4년간 용산역에서 근무하며 말단 노동자에서 역부(역무원), 전철수(선로 조작)를 거쳐 배차 담당자로까지 올라갔으나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승진 속도와 봉급 차이 등 조선인을 차별하는 열악한 처우에 심한 박탈감을 느껴 철도국을 사직하였다.
그 당시 일본인은 정말로 행운아였다. 1년 내지 1년 반 만에 용인(현 계약직 갈음)에서 고원(현 공무직 갈음)으로 쉽게 승급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조선인은 아무리 일을 잘하고 착실하게 근무해도 1년이나 1년 반 만에 도저히 전철수[12] 까지도 올라갈 수가 없었다.
사쿠라다몬 사건 이후 선생이 검사에게 진술한 당시 총독부 철도국의 조선인 차별 증언
1925년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부에서 어느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
木
下
昌
藏)'라는 일본식 이름도 얻었다.[13]사쿠라다몬 사건 이후 선생이 검사에게 진술한 당시 총독부 철도국의 조선인 차별 증언
젊은 시절의 이봉창은 일본을 정말로 동경했으며 조선인[14]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진심으로 일본인처럼 살고 싶어했다.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 될 거라고 믿어 일본어 공부도 매우 열심히 하여 현지인 수준으로 유창하게 하고[15] 일본식 이름도 얻어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용산역에서 근무하던 당시 3.1 운동이 일어났지만 당시 이봉창은 거기에 큰 관심이 없었던 평범한 소시민 청년이었다.
하지만 결국 일본인들 눈엔 그 역시 조선인일 뿐이었고, 조선인은 2등 시민에 불과하던 일본 제국의 사회에서 일본인들에게 끊임없이 차별을 받으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여기에는 쇼와 덴노 즉위식 당시 한글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일주일간 유치장에 갇혀 있었던 것이 큰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경찰은 재판소의 구속영장이 없이 직권으로 30일간 구속할 수 있었는데, 형식적으로는 30일째 아침까지만 가능하지만 28일이나 29일째 되는 날 타 경찰서로 이첩한 다음 새로 영장을 발부하는 식으로 편법을 써서 제한 없이 구금할 수 있었다. 히로히토의 즉위식은 1928년 11월 10일이었고 이봉창은 11월 7일~ 11월 15일까지 구금되었다. # # 유치장 생활에서 그는 그동안의 일본에 대한 동경을 깨끗이 접는다. 그야말로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이태왕(李太王)의 옥안(玉顔)을 뵌 적이 없으며
경술병합(庚戌倂合) 후 신일본인(新日本人)이 되어 천황 폐하의 성안(聖顔)을 뵌 적도 없다. 또 조선 역사도 안 배웠고 일본 역사를 가르쳐 받은 적도 없다. 일국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제왕의 성안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봉창은 순수하게 천황의 얼굴이 보고 싶어 즉위식에 참석하려 했건만 일본 경찰이 한글 편지를 발견하면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편지에는 별 내용이 없어 훈방되었으나 조선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16]"
교토 유치장 구경이나 오려고 돈 써서 여기 온 게 아니다. 나는 일본 국민의 자격으로 천황 폐하를 뵈러 온 것이 아닌가? 한글이 섞인 편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나쁜가? 역시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 주제에 일본 천황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다는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히게 된 것이다."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31세에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알게 되고
상하이에 있는 거류민단 사무실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와 접촉했다.[17] 그러나 워낙 일본인 같은 제스처, 능숙한 일본어[18], 임시정부의 멸칭이었던 '
가정부(假政府)'[19]라는 표현을 씀에 거리낌이 없어 임정 인사들의 의심을 받았다. 한글 편지 사건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일본인의 정체성으로 살고자 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유일하게
김구가 믿어줘 이봉창과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고[20] 이를 통해 진심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이동녕과
조소앙에게 질책을 듣기도 했다."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이때 워낙 일본인 같아서 임정의 직원들에게서 ' 왜영감'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 별명은 절대 허세가 아니었는데 일본인 사회나 마찬가지인 상하이 훙커우 지역에 거주한 지 1년도 안 되어 일본인 지인을 많이 뒀기 때문. 심지어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부장까지 지인으로 두었고 일본 영사의 내정까지 무상으로 드나들었을 정도였다. 이봉창이 의거를 하러 일본으로 갈 때 영사관 경찰부장이 추천서까지 써주고 부두까지 따라나와서 잘 다녀오라고 배웅을 나갔으니 말 다 했다. 이 사람은 사쿠라다몬 의거 후 본토로 소환돼 면직당했다.
임정 직원들과 함께 여관에서 한 술자리에서 자신을 밀정이라고 의심을 하거나 비판하는 태도를 보이는 요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직접 사와 대접까지 하면서 대인배스럽게 호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 때 이봉창 의사는라고 묻자 임정 요인들은 깜짝 놀라며 "용이할진대 아직까지 왜 못 죽였겠소(쉽다면 진작에 죽였죠)."라고 말하며 계책이 있는지를 묻자
내가 연전에
도쿄에 있을 때 어느 날 왜황이
하야마(葉山)[22]에 간다고 하기에 왕관(往觀, 가서 구경)하였는데 왜황이 내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이때에 나에게 총이나 작탄이 있으면 어찌할까'하는 감촉이 얼른 생겼었습니다.
이 취중진담이 천황을 암살한다는 엄청난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봉창 의사의 취중진담이 있은 지 며칠 후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23]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
김구와 이봉창 의사의 각별했던 모습이 나온다.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일리 법조계[24] 중흥여사로 청하여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살이 실패되어 왜 관헌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 돈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놓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을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참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시기는 1931년 12월 13일.
백범일지에는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슬퍼하는 김구를 향해 "자신은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며 위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동차 위에서 깊이 허리를 숙이고 떠났다고 한다.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을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참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2.1. 사쿠라다몬 의거
자세한 내용은 사쿠라다몬 의거 문서 참고하십시오.2.2. 순국
일본 언론에 공개된 이봉창 의사의 머그샷 | 얼굴이 가려진 채 일본 제국 경찰과 함께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이봉창 의사. |
1932년 9월 16일 일본 대심원(일본의 최고사법기관. 現 최고재판소.)에서 첫 공판이 열렸고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죄명은 소위 대역죄(大逆罪)로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2세였다.[25]
특히 의거 이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자들은 조선의 친일파였다. 재일 친일파의 대표격인 박춘금은 1월 8일 궁내성을 비롯하여 여러 일본 고위층 인사들을 방문해 불경범인이 조선인인 것에 대해 송구스럽다며 사죄했으며 9일에는 친일단체 120명을 소집해 궁성 입구에서 또 직접 사죄를 했고 국내의 친일 세력들은 1월 9일 서울의 요정 식도원에 모여 이봉창 의거에 대해 사죄하기로(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저 사건을 자신들이 했다고 알렸는데 그 결과 일제의 감시 때문에 각종 지원이 끊겨서 김구가 그림을 그려 팔며 힘들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감명을 받은 장제스의 지원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회생의 길을 얻고 남경중앙군관학교 분교에 조선인 훈련반도 보내고 돈을 지원받아서 보내기도 했다. # #
한편으로는 일본 본토의 고위 관료들에게는 이 사건은 재앙이었다. 실권이 전혀 없는 지금도 극우파에게 만세일계 소리 들으며 숭배받는 존재가 바로 천황인데 하물며 서슬 퍼런 제국 시절 천황의 상징성이나 위치는 당연히 지금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런 절대권위의 천황이 암살당할 뻔했으니 발칵 뒤집힌 건 당연지사. 당시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진 사퇴하고 해임당하는 일이 벌어졌다.[26] 한국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이자 순국이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중대한 보안사고였으니.
광복 후 김구가 1946년 일본 정부에게서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에 윤봉길 의사 등과 함께 안장하였다. 이봉창 의사는 서울 용산구 출신인 만큼 삼의사 중 유일하게 고향에 안장된 셈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020년 10월 효창동에 이봉창 의사의 기념관이 세워졌다. 역시 그의 고향이 용산구임을 반영한 것이다. 기념관의 이름은 '이봉창 역사울림관'이며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에서 가깝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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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거 전 결의를 다지는 실제 사진은 근엄한 분위기를 내는 중앙 사진이었다. 세간에 흔히들 알려진 우측 사진은 합성된 사진이다. # 잘 보면 턱선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손과 수류탄도 사진이 아니라 펜으로 그려 넣은 그림이라 자세히 보면 사진이 아니라는 티가 난다. 후방 태극기와 결의문도 펜으로 조악하게 그린 흔적이 보인다. 이는 해방 후 1946년 3월 출간된 <도왜실기>의 한국어 번역판에 처음 등장한 일종의 삽화인데, 원판이었던 1932년 출간된 중국어판에 실린 중앙의 사진이 흐릿하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기에 왼쪽 사진에서 얼굴을 따 오고 펜선을 곁들여 수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 결의의 순간에서도 활짝 웃는 이봉창의 모습은 유쾌한 성격이라던지 삶과 죽음을 초월한 비범한 표정이라는 등 미사여구를 덧붙이기 좋은 소잿거리로 종종 쓰이기도 했다.
- 아이러니하게도 원래 모범적인 황국신민이 되어 일본 사회에 섞여들어가길 원했던 이봉창이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극심한 차별로 현실을 깨닫고 독립운동가가 된 것은 일본의 통치의 모순성을 보여준다.
- 병약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말라리아를 앓아 관절염이 생겨 환절기 때 마다 관절이 아팠다고 하고 일본에 체류할 당시에도 각기병 외의 여러 병에 시달렸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와 탁구같은 운동들을 좋아했다고 하며 거사 전에는 골프까지 즐겼다고 한다.
- '모던보이'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 본인 스스로도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육신의 쾌락을 충분히 즐겼다고 자부할 정도로 여자와 마작과 같은 도박을 좋아했다고 한다. 다음은 일제 경찰의 심문 조서에 남은 선생의 행적으로 일제 당국의 주관이 들어있음을 감안하면서 읽는 것이 좋다.
다이쇼 13년(1924년) 4월 - 계집질과 마작으로 빚을 져서
용산역의 조차(操車)[27]과를 퇴직금을 얻을 목적으로 퇴직함. 쇼와 5년( 1930년) 3월 - 가명을 '마쓰이 가즈오'로 바꾸고 상경해 도쿄도 교바시구 미나미오다하라정의 채소절임 가게에 취직한다. 7월에는 도쿄도 혼고구 모리카와정의 모리야 가방 가게로 전직한다. 쇼와 5년(1930년) 12월 - 중화민국 상하이직할시 민행로로 망명한다. 영창공사의 축음기 외판원으로서 일한다. |
- 이러한 성격은 훗날 사쿠라다몬 의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경찰은 천황의 행차 전날 밤 모든 경찰력을 총동원헤 도쿄 관내에 있는 음식점, 여관, 유곽, 절 등 위락시설과 빈 집까지 샅샅이 검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봉창 의사는 거사 바로 전날 열차를 타고 도쿄를 벗어나 가와사키의 유곽에서 잠자리를 가졌고 당일날 아침 첫 차로 다시 도쿄에 침투했다. 거사후 검사와의 조사에서 "전날 우리가 수색작전을 벌였는데 어떻게 발견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나? 딴데 가서 잤는데 ㅎㅎ" 라고 대답하자 검사도 이봉창 의사의 치밀함에 놀랐다고.
- 1980년대 중순에 이봉창 의사의 조카가 힘들게 살아갔던 것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과거 자료에서 이봉창 의사의 부인이 1980년대 중반에 서거했다고 했지만 이봉창 의사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 신문에 실린 인물은 이봉창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형 이범태의 장녀인 조카 이은임 씨임을 말하고 있다. #
- 비슷한 인물로 조명하가 있다. 조명하는 쇼와 덴노의 장인으로서 당시 일본의 국구였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28]를 독극물 묻은 칼로 찔러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국내가 아닌 타국( 대만)에서 의거를 일으킨 점도 비슷하다.
-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인 배경식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봉창 의사의 최고 업적이라 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의열 투쟁의 길로 나가게 한 것과 함께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일으키게 한 것이라고 뽑았다.[29]
- 같은 한인애국단 단원이자 후배격인 윤봉길 의사와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윤봉길 의사 집안과 연관이 있다. 해방 이후 이봉창 의사가 미혼의 몸으로 순국하고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져 이봉창 의사의 기념사업은커녕 추모제도 제대로 치러지지 않자 윤봉길 의사의 셋째 동생인 윤남의 선생이 빈병을 주워모아 행사 자금을 모으고[30] 박정희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썼다. 결국 탄원서를 받고 놀란 박정희 대통령이 최규하 총리에게 지시한 것을 계기로 1975년 처음 정부 차원에서의 추모제를 열었다. 이를 기점으로 기념사업이 겨우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윤봉길 의사 집안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로 이 의사가 역사의 뒤안길로 묻혔을지도 모를 것이다. #
국군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 장교였던 나의 상식에 의하면, 아무래도 그 거리가 100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표적물을 보통
수류탄을 던져 가지고 실수 없이 명중시키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약간 구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보통 수류탄 대신에 마미(蔴尾) 수류탄을 구해서 이 동지한테 주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마미 수류탄은 보통 수류탄에 비해서 폭발력이 약하다는 것이 좀 단점이긴 하지만, 그 대신 중량이 가벼워서 멀리까지 던질 수 있는 데다가 불발탄이 없고, 또한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휴대하기가 간편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 수류탄을
도쿄까지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로 당시 김구 선생과 나는 보통 고심한 것이 아니었다.
김홍일,『대륙의 분노 -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273쪽
김홍일,『대륙의 분노 -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273쪽
- 이봉창 의사의 의거에 쓰인 수류탄은 김홍일(당시 쓰던 가명은 왕웅)이 만들었다. 이봉창 의사에게 수류탄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도 김홍일이라고 한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 중장까지 지내게 되는 그는 1931년에 중국 국민혁명군 소속의 상교(대령)으로, 상하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며 무기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봉창 의사는 2개의 폭탄을 준비했는데 1개는 김홍일을 통해 상하이 병공창에서, 1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한테 보내서 얻어온 것이라고 한다. 1개는 의거용, 다른 하나는 자결용이었다.
마미(麻尾) 수류탄 |
-
이봉창 의사는 마미(麻尾)라는
수류탄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무게가 가벼워 멀리 던질 수 있고 휴대가 간편하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불발탄이 없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폭발력이 다소 약하다는 단점도 있었다.[31] 백범
김구는 훗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전에 이봉창 의사의 의거 실패를 기억하여 일단 위력이 제대로 나오는 폭탄을 부탁했는데 그걸 받아간 윤봉길 의사는 폭탄 한 개로 무시무시한 전적을 올렸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봉창과 윤봉길이 의거에 사용한 폭탄 모두 상하이에 있는
중화민국 병공창에서 제작한 것이다. 이봉창 의거 당시 창장은 자신들이 건네주었던 폭탄 화력이 미약하여 암살 미수에 그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윤봉길에게는 시험을 거듭한 폭탄을 성심성의껏 제조하여 20여 개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폭탄 제조에 대한 썰은 총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김홍일 중장이 직접 제작했다는 썰이고 다른 하나는 김홍일 중장이 폭탄 제조자 왕바이슈[32]를 주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홍일 장군이 대만대사로 활동하던 중에 왕바이슈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이 때 왕바이슈가 이봉창 의사의 폭탄을 제조해 주었다고 하였기에 대체로 김홍일이 중국 병기공창 주임으로 있을 동안 왕바이슈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김구의 요청에 따라 왕바이슈와 김구를 이어 주면서 폭탄 제조에 필요한 화약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독립운동의 특성상 기록을 남길 수가 없어 거의 모든 독립운동 관련 기록이나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위 썰도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심지어 고려공산당을 통해 러시아 내전에 썼던 수류탄을 수십발 얻어왔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 그의 생가가 있던 금양초 부근의 이봉창기념관과 효창공원의 거리는 걸어서 넉넉하게 10분에서 15분정도 걸린다.
4. 대중매체에서
- 1965년 개봉한 영화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에서는 배우 김진규가 연기했다.
- 1969년 개봉한 영화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배우 이순재가 연기했다.
- 1985년 KBS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서는 배우 이두섭이 연기했다.
- 1992년 MBC 특집기획 드라마 < 분노의 왕국>에서는 이봉창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천황 암살 사건을 일으키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전주 이씨(=조선 왕실의 종손)로 설정되어 있다.
- 게임 < Hearts of Iron IV>의 MOD인 Red Flood에서는 이름은 안 나오지만 정황상 일본의 덴노 히로히토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나온다. 이 여파로 일본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독립군이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독립 전쟁을 일으킨다.[33]
- 리첼렌의 대체역사소설 <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회귀한 김구의 조언대로 첫 번째 마차에 폭탄을 던져 사쿠라다몬 의거를 성공시킨다. 이후 만세를 부르다 당당하게 잡혀가게 된다.[34] 이후 의거의 영향으로 일본을 자중지란에 빠트렸고 조선 독립운동사에 희망이 생기는 한편 한치도 예측할 수 없는 동아시아 정세를 가져다준다. 재미있게도 얼마 후 지구 반대편에서는 슈바르체 카펠레의 모의가 성공해 히틀러가 터지고 괴링이 급작스레 총통 후계자로 지명된다. 한동안 생사불명 상태였으나 1부 완결 직전 순국했다는 게 확인되고, 동지였던 윤봉길 의사가 몰래 유해를 수습해온다.
- 명원의 대체역사소설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임시정부를 도우며 경성에 있는 요정을 운영하는 지배인으로 암약하고 있으며 후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아 노인이 되어서도 김유진의 지시로 쿠테타를 일으키려던 장군들의 사이로 등장하면서 쿠테타 모의을 무산시켜버린다.
- 카연갤 출신 만화 작가인 우켈켈박사가 그린 <임시정부 춘심이>에도 등장했는데 작중 춘심이의 시점으로 묘사된 만화에서 평소에 행실이 방탕한 파락호처럼 보이지만, 의거 전에 진지한 모습을 보였고 실제 역사대로 육신의 쾌락과 영원한 쾌락을 언급했다. #
[1]
문서에 따라
1901년생으로 기재된 곳도 존재한다.
[2]
現 도쿄구치소. 옛 이치가야 형무소는 없어졌다.
[3]
고성 이씨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4]
기록에 따라 이진구라고도 함
[5]
친형 이범태의 자식이다. 이봉창 의사 본인은 미혼인 상태로 순국하였기 때문에 직계자손은 없다.
[6]
링크 당시 조선인 남성 평균 신장이 163cm 남짓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장신이다.
[7]
지금의 건국훈장 대통령장.
[8]
일본인 양자로 사용한 이름. 하단 본문 참조
[전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祖國)의 독립(獨立)과 자유(自由)를 회복(回復)하기 위(爲)하야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一貟)이 되야
적국(敵國)의 수괴(首魁)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盟誓)하나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13년(十三年) 12월(十二月) 13일(十三日)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앞 선서인(宣誓人) 이봉창(李奉昌)
[10]
사진 왼편에 적힌 문구는 의사이봉창(義士李奉昌). 작게 쓰인 문구도 동일하다.
[11]
또는 30년
[12]
현재로 치면 계약직 밑에도 수습이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13]
당시 조선인의 내지 전적이 금지된 상황에서 조선인이 일본의 호적을 가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다른 방법은
결혼이나
서양자 입적 등)
[14]
당시 조선인은 법적으로는 일본인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2등신민'이었다.
[15]
일본인인 체 속이고 다닐 때의 이봉창을 만난 일본인들은 그가 조선인일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다고 할 정도로 일본어 발음과 어휘가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16]
이봉창의 전향 과정은
식민지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사례로 쓰인다. 만약 일본이 선전했던 대로 식민지인에 차별이 없이
근대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전향 전의 이봉창 같은 "훌륭한 근대화 사례"는 권장되기 마련인데 오히려 그런 이봉창마저도 의심하고 잡아 가두었기 때문.
[17]
다만 접촉 사유가 골 때리는데, 세간의 인식처럼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하려던 게 아니라 당시가 불황이라 일자리를 찾던 중 조선인 친구에게서 당시 떠돌던 임정에서 상하이의 영국계 전차 회사에 취직을 알선해준다는 뜬소문을 전해들었기 때문으로 열차 관련 경험이 있었던 만큼 쉽게 취업할 줄 알고 상하이에 온 것이었다.
[18]
임시정부와 처음 접촉할 때도 한국어를 안 쓰고 일본어를 썼다.
[19]
가정부는 일본어로 '임시정부'를 뜻하는 일반명사이지만, 당시 임정을 보는 일제의 시선이 좋았을 리가 없으므로 멸칭으로도 자주 쓰였다.
[20]
그러나 김구는 본명이 아닌 가명(백정선)을 알려줬다. 이봉창은 쇼와 덴노 암살 기도로 일제에 체포된 후의 심문에서도 폭탄 제공자에 대해 가명(백정선)을 댔었다.
[21]
무슨 까닭. 何故라는 한문에서 온 표현이다. 일본어로는 なにゆえ라고 읽는데, 글쓰기나 공식석상에서나 쓸 법한 문어체다.
[22]
일본
가나가와현에 있는 마을. 황실 별장이 있어 천황 등의 황실 인물들이 자주 왕래했다.
[23]
김구는 그때까지도 이봉창을 온전히는 믿지 못해 자신의 이름을 '백정선'이라는 가명으로 말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봉창은 죽을 때까지 김구의 이름을 백정선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24]
상하이에 있던
프랑스
조계. '법'은 프랑스의
중국어 음차 표기인 '법란서(法蘭西)'의 준말이며, 그 영향으로 중국에서는 현재도 프랑스를 '法国', 프랑스어를 '法语'라고 한다. (흔히 많이 쓰는 불란서, 불어는 일본어 음차 표기다.) 당시의 임정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얹혀살고 있었고, 프랑스 조계는 프랑스의 사법권이 미치는 곳이므로 일본이 간섭할 수 없었다. 임정 인사들은 상하이에서도 여기를 벗어나면 일제
밀정들의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면
중국에서 항의했겠지만 당시 중국 상황이 여간 개판이 아니었던 탓에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25]
당시 일본에서 천황을 포함한
황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범죄를 대역죄라고 했는데 고의로 황족을 살해하거나 살해하려고 했을 때 적용되었다. 사형이 유일한 법정형이었고 대심원에서 바로 최종 판결을 내리는 단심제였다.
[26]
당시 취임한 지 겨우 3주 된 신임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도 사임을 청했으나 쇼와 덴노의 반려와 전직 총리였던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중재로 유임했다. 그러니 이누카이는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군부의 폭주를 막으려다 불과 4개월 뒤
5.15 사건으로 해군 장교들에게 암살당한다. 차라리 이때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으면 5.15 사건 때 목숨을 건졌을지도 모를 일.
[27]
열차를 편성하거나 다른 선로에 넣거나 나누거나 하는 일
[28]
고준 황후의 아버지이자 현임
나루히토 천황의 진외증조할아버지이다.
[29]
이봉창 의사의 모던보이적 성향에 대한 책을 썼다. 물론 후기에서 몸이 안 좋아져서 엄청 고생했다고 썼지만 말이다.
[30]
이봉창 의사 명의로 예금 통장과
인감도장을 만들고 고물을 팔아 수입이 생기면 거기에 입금해두었다. 당시에는
금융실명제 이전이라서 이런 일이 가능했다.
[31]
당시 기준으로도 수류탄은 신무기가 아니었다. 심지에 불 붙여 던지던 시대는 지난 지가 오래고, 현대화된 수류탄도 1차대전을 겪는 동안 충분하게 기술이 발전한 무기였던 만큼 폭발력이 정말 강력한 것을 사용했다면 좀 빗나가더라도 천황이 탄 마차까지 동반유폭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32]
백범일지에서는 송식마라고도 한다.
[33]
북한 지역에서는
박헌영을 필두로 하는 공산주의 봉기가 일어나고
남한 지역에서는
김구와
여운형 등을 필두로 민주주의 봉기가 일어난다.
[34]
천황이 폭사하여 모두가 멘탈이 붕괴한 와중에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헌병들에게 당당히 손을 내밀었는데 이는 무고한 이들이 휘말리지 않기 위함이였다. 그런데 정작 범인인 이봉창을 해코지하려고 달려드는 일본인을 헌병이 두들겨패 가며 말리는 웃지못할 광경에 보안 담당자는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