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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 경북 칠곡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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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 |||
출생 | 1893년 10월 22일 | ||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삼면 오태동
# (現 경상북도 구미시 지주중류4길 15-1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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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9년 8월 1일 (향년 75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고려병원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29 강북삼성병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1호 | ||
본관 | 상장군계 인동 장씨[3] | ||
자 | 치우(致雨) | ||
호 | 창랑(滄浪) | ||
재임기간 | 초대 외무부장관 ( 이승만 정부) | ||
1948년 8월 15일 ~ 1948년 12월 24일 | |||
제2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 |||
1950년 6월 19일 ~ 1952년 5월 6일 | |||
제3대 국무총리 (이승만 정부) | |||
1952년 5월 6일 ~ 1952년 10월 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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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부모 | 아버지 장승원, 어머니 풍양 조씨 | |
형제자매 | 형 장길상, 장직상 | ||
배우자 |
진주 정씨[4] (사별) 풍산 류씨[5] (사별) 김연식[6] (사별) 이유앵 (4번째 재혼) |
||
자녀 |
장남 장병철 차남 장병갑(1927년생) 삼남 장병은(1930년생) 사남 장병문(1950년생) 오남 장병청 장녀 장병민(1911년생)[7] 차녀 장병채[8] 삼녀 장병엽 사녀 장병혜 오녀 장병초 |
||
학력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
졸업) 와세다대학 (미수료) 에든버러 대학교 ( 경제학 / 중퇴)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
||
종교 | 기독교 ( 개신교) | ||
의원 선수 | 4 | ||
의원 대수 | 2, 3, 4, 5(민) | ||
경력 |
수도경찰청장 외무부장관 (초대 / 이승만 정부) 제2대 국회의원 ( 경북 칠곡군 / 무소속) 제2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제5차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 제6차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 국무총리 (제3대 / 이승만 정부) 제3대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 무소속) 원내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 위원장 제4대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 무소속) 제5대 국회의원 (경북 칠곡군 /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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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외무부장관, 제3대 국무총리.
2. 생애
2.1. 대한제국기
1893년( 고종 30) 10월 22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삼면 오태동(현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의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며 경상북도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장승원(張承遠, 1852 ~ 1917. 11. 12)과 어머니 풍양 조씨[9]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이다. 11대 선조는 조선 중기의 사림파 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 ~ 1637)으로[10] 할아버지 장석룡(張錫龍, 1823 ~ 1908. 10. 21)[11]은 1846년( 헌종 12) 정시(庭試)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하여 공조판서(정2품0에 올랐고 아버지 장승원 또한 1885년(고종 22)에 증광시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해 경상북도 관찰사(종2품)를 지내는 등 당시의 이른바 문벌 가문이라 불릴만한 배경을 타고 났다.그의 부친인 장승원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탐관오리 중 한 명으로 청송군수로 재직할 때에는 경상북도 관찰사 자리를 꿰어차기 위해 고을 주민들을 족치다 결국 면직되었지만 복귀했으며 결국에는 목표로 하던 관찰사 자리에 올랐는데 당시 세태를 기록한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공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장석룡과 함께 악행을 일삼아 가는 곳마다 탐학과 도둑질로 가산을 수만 냥 쌓았다'라고 했으니 실로 견부견자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 어용 단체였던 일진회[12]에서조차 영남 지방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인간을 관찰사로 앉히냐고 소리내기도 하였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앞서 관찰사에 임명된 기록에 대해서는 장승원이 고종에게 환심을 사려고 막대한 뇌물을 갖다바쳐서 관직을 얻은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13] 시세를 보는 눈도 뛰어나 일제 치하에서도 재산을 굴리며 경상북도 최고 부호인 동시에 한강 이남 10대 부호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실제로 그가 살고 있던 선산 지역에서는 선산으로 들어가는 사람치고 이 사람 땅을 안 밟은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대지주[14]이기도 했다. 그 후 1915년에 박상진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을 때 그들로부터 군자금 응모 권유를 받았으나[15] 협조치 않고 도리어 일본 경찰에 밀고하려 했다가 1917년 단원 채기중(蔡基中), 강순필(姜順必), 유창순(庾昌淳) 등에 의하여 암살당한다.[16]
참고로 그의 형 장직상은 일제강점기 시절 꽤나 유명한 친일파로 악명 높았다.
장택상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근대식 학교에 입학했으며 12세 되던 1905년 진주 정씨와 혼인하였으나 1908년 사망하였다. 이후 선조 때 명재상 류성룡의 후손인 풍산 류씨와 재혼했으나 이 또한 일찍 죽고 청년기에 이르러서야 부인 김연식과 재혼했다. 김연식에게서는 장병혜, 장병민, 장병초, 장병화 등의 딸과 아들 장병청 등이 태어났다.
2.2. 일제강점기
장택상은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도쿄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박정희군이라 부르던 장택상
일제강점기 해외 유학 때 열차로
만주에 갔다가 아버지 장승원의 친구인
이상설을 만났다. 그에게서 민족혼에 대한 것을 주입받은 뒤 곧바로 그의 추천장을 들고 열차로
시베리아에 갔다가 여러 사람을 만나 중간중간 숙박하면서 추천장을 들고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식으로
소련을 거쳐
독일에 도착했다.
안창호가 잠시 독일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독일을 헤매다가 우연히 안창호를 만났다. 안창호는 그에게 왜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가, 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며 장택상 스스로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며,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가 스스로의 입으로 답하게끔 질문했다. 달변에 감동받은 장택상은 안창호가 후에 해방 조국의 진짜 대통령감인 분인데 일찍 돌아가셔서 아쉽게 됐다며 한탄하기도 했다.[17][18] 1908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여비가 떨어졌을 때 그는 한 프랑스 아가씨와 사귀며 그로부터 차비를 얻기도 했다.[19] 그 뒤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 도착했으며 1913~1915년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했으나[20] 나중에 중퇴했다.[21]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해 국내에서는 몇몇 독립운동가를 숨겨두었다는 이유로 가택 수색을 당하기도 했고 청구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바 있었다. 그리고 집안의 재력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밀리에 자금 지원도 했다.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었던 그는 1940년 이후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고향에 칩거하였다. 1942년에는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를 통해 방송하던 단파를 안재홍, 송진우, 여운형, 윤치영, 김성수 등과 함께 밀청하다가 걸리기도 했으며 이후로 "일본은 패망할 것이다"라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2.3. 미군정
1945년 8.15 광복 직후 친일파들이 대거 포함된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해[22][23] 미군정에 채용되어 경기도경찰청 경찰부장, 제1관구 경찰청장, 수도경찰청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한국 정부 수립 직후 초대 외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해방공간에서 경찰청장으로 일하면서 좌익 및 중도파에 대한 수많은 극우 정치 테러[24]를 주도 및 방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좌익 킬러, 정치깡패의 괴수로 알려졌으나 정작 본인은 여운형, 여운형의 사돈 이만규, 조봉암 등의 중도파 및 좌익계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훗날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할 때 조봉암 선처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도 장택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딸 장병민과 사위 채항석이 조선공산당 당원이었다.[25] 때문에 여운형과 이만규에게 좌우 대립이 극심하여 목숨이 위험하니 정계를 은퇴하여 시골에 은거하거나 북으로 가라고 권유하지만[26] 장택상이 단독 정부 수립에 찬성한 한국민주당에 가담했고 미군정에 채용된 수도경찰청장 직위에 있는 상황에서 그의 인정은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특히 통일에 목숨을 걸었던 정치가 여운형에게는 말이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그날 장택상이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가자 맏딸 여난구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뭐하러 여기왔느냐? 썩 나가라"고 소리질렀고 장택상이 우물쭈물하다가 가버린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한편 이만규는 정치가라기보다 학자였기 때문에 장택상 조언대로 북으로 건너가서 잘 살게 되었다. 여운형 암살 당시의 정황을 보면 상당 부분 관여 내지는 방조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여운형 암살 당시 축구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집으로 돌아가던 여운형의 차를 트럭이 막았고 저격이 있었다. 같이 있던 여운형의 비서가 저격범을 쫓으려 하자 옆에 있던 경찰들이 비서를 암살범이라 붙들었다. 당시 경찰 총수가 장택상이었으니 최소한의 관련성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경찰청장을 지내면서 악질 고문 경관 노덕술 등을 총애하고 의열단을 이끈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조사하고 월북을 권했고 김구의 암살에도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며 발췌 개헌이 통과하는데 공헌하는 등 근현대사 막장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장택상 본인도 독립운동가였고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비슷한 선택을 한 경우가 있어서 시대적 한계로도 볼 수 있다. 장택상뿐 아니라 지청천, 이범석, 손원일 등 거물급 독립운동가들도 친일파 출신들을 내치지 않고 기용한 경우들이 있다. 반민특위 해산의 총책임자 이승만도 개인적으론 극렬 혐일 성향이라서 친일파 등용과는 별개로 대일 정책은 강경 반일을 고수했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이 친일파를 안고가려했다고 보기보단, 미군정이 운영을 위해 친일파들을 검토 없이 수용한 상황을 고려해야한다. 일제 치하에서 고위직이나 실무를 담당한 쪽은 대다수가 친일파였고, 미군정은 이들을 일제가 후퇴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운영에 써먹을 자원으로 보았다. 미군정이 들어선 상황에서 친일파의 다수가 그대로 자리를 유지했기에 그들이 원했든 원치않든 같은 직장에서 지내게 된 상황이었다. 훨씬 많은 숫자의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해 수많은 국민들이 친일파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긴 했으나 결국 정치적 이유 때문에 무산되었듯이 독립운동가들이 현대의 시각과 달리 친일파를 품어주려 했다는 시각보다는 독립 이후 정치, 권력, 이념이 더욱 중요해진 근현대사와 그 시대의 한계로 봐야 더 합리적이다.
미군정과 장택상, 1공화국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경력직 경찰 대다수가 친일파였다는 점 때문에 고급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신생 국가 운영에 어쩔 수 없이 필요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장택상은 독립운동가 시절 자신을 직접 고문했던 가창현이란 경찰을 등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를 권력욕과 정치 구도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실제로 건준이 친일 경찰을 대신해 치안조직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었다곤 하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에 이러한 주장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기도 했고.[27] 그럼에도 노덕술 등 선을 넘은 악질들까지 싸고 돈 점 등은 비판받을 수 있고 현대사의 아쉬운 점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28][29]
장택상은 1월 26일 서울 시내 서장 인사 단행시 이구범을 본정경찰서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구범은 친일경찰 행위로 원한을 사 원한있는 개성 시민들이 광복이 되자마자 집에 불을 지르러 간 친일경찰일 뿐 아니라 항공회사를 설립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전쟁을 도와준 심각한 친일파다.
2.4.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내무부장관에 임명됐으나 인선 과정에서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의 실수로 외무부장관으로 나가게 됐다. 그러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기로 했다가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된 윤치영과 서로 오해하면서 앙숙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정부 수립 이후 임명된 외무부장관 자리의 경우 그닥 맞지 않았던 탓에 외무장관에 취임한지 반년만에 사표를 쓰고 나와버리고, 미군정기때 형성한 경찰 인맥을 이용해 은연중에 윤치영에게 엿을 먹이면서 경찰쪽에 끊임없이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다. 정부 수립 초기에 그는 이승만에게 건의하여 장건상[30]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장건상의 회고[31]에 의하면 어느날 자신을 부른 장택상이 수도청에 앉아있다가 장건상 본인이 들어오자 감격받은 듯이 무릎을 탁 치며 "형님! 됐습니다!"라는 것이다. 장건상이 연유를 묻자 장택상은 장건상을 장관으로 임명하라는 이승만의 승인이 떨어졌음을 말했으나 장건상은 원래 복에도 없는 벼슬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단독 정부는 민족을 분열시키는 것이니 참여할 수 없다며 거절 의사를 나타냈고 장택상은 이에 대해서 아쉬워 했다고 한다.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기도 한 장건상도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으로 장택상과는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이었다. 그래서 10년의 나이 차이에도 형과 동생이라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32]1950년 9월 초,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을 앞두고 유엔에서 장면 대사와 장택상 대표가 워렌 어스틴 미국 유엔 대표와 긴밀하게 상의하는 모습. | 1950년 9월 1일, 장택상, 장면, 임병직, 임영신 등 유엔 한국대표들이 김일성의 남침 저지에 관하여 어스틴 미국 유엔대표와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
6.25 전쟁 중에는 조봉암, 신익희와 함께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사수한다 해 놓고 피난간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퇴짜 맞았다. 이승만 曰, "내가 당덕종이냐!"[33] 이후 이범석, 윤치영,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에 대한 충성 경쟁을 하게 된다. 장택상은 이범석의 원외자유당에 맞서 원내자유당 잔류파를 이끌면서 제2대 국회의 내각제 개헌을 시도하다 실패한다. 결국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이승만 옹위를 결정한 장택상은 그토록 싫어하던 이범석과 함께 우익 청년 단체를 동원해 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을 도왔으며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34] 국무총리 재직 중에는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이범석의 제3대 부통령 출마를 낙선시키기도 했다.[35] 이범석은 장택상을 경찰에 고소했지만 경찰에서는 통할리도 없었다. 이범석과 조선민족청년단계는 그 뒤 장택상이 일제강점기 경기도지사 출신의 일본인 후루이치 스스무(古市進)[36]를 부산 항구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혐의로 "장택상은 친일파~" 라는 노래를 불러서 장택상을 낙마시켰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당시만 해도 일본과 정식 외교 관계가 없었고 만났다는 후루이치가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를 지냈다는 점이 꼬투리를 잡힌 것이다. 다만 이 사건의 진위 여부는 논란이 있다. 장택상은 친일파~ 정도 노래가 아니라 장택상은 조선총독부 고관 아무개와 일본에서 회담해서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논의했다식의 이적 행위로 몬 것이다.[37]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발하여 훗날 민주당으로 발전하게 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이 때 혁신계 정치인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여가 논란이 되는데 장택상은 절친인 조봉암을 적극 지지하였다. 하지만 반공 우익 성향이 강한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의 맹렬한 반대로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입성은 결국 좌절되었고 실망한 장택상은 다시 자유당으로 돌아갔다.[38] 1959년 조봉암이 구속됐을 때 홍진기[39] 법무부장관 등에게 조봉암의 무고함을 설명했고 그를 변호하는 글까지 직접 작성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조봉암과 친분이 있었는데 장택상 자신이 UN 대표로 파견될 때는 가족들에게 내가 없는 동안 조봉암을 따르라 하고 출국 전에 조봉암에게 가족을 의탁하니 조봉암은 감동받았다 한다. 조봉암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차마 이승만이 조봉암을 어찌 못할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결국 조봉암은 사형되었다.
1956년 이범석과 손잡고 공화당이라는 정당을 만들려다 실패했으며, 1963년 9월 자유당을 재창당하여 총재를 맡았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윤보선, 함석헌 등과 함께 가담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 동아일보>와 < 조선일보>에 칼럼과 회고록을 기고하면서 신민당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1969년 7월 폐암으로 입원했으며 1969년 8월 1일 오후 7시 15분에 사망하였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을 추서받았으나 건국훈장 서훈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 그의 유해는 1969년 8월 7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
△ 장택상 전 총리 장례식 |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8 | 제1대 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 (1.52%) | 낙선 (3위) | [40]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경북 안동군 을 | 5,488 (16.88%) | ||||
1949 | 1949년 재보궐선거 | 서울 종로구 을 | 6,793 (30.53%)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경북 칠곡군 | 21,407 (58.65%) | 당선 (1위) | 초선 | |
1951 | 제2대 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5 (3.31%)[41] | 낙선 (4위) | [42][43] |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경북 칠곡군 | 27,426 (79.52%) | 당선 (1위) | 재선 |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25,391 (74.95%) | 3선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12,033 (30.59%) | 4선 | |||
1963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경북 성주군·칠곡군 |
[[자유당|]] |
23,647 (30.89%) | 낙선 (2위) |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23,389 (27.43%)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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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총선 ( 경북 성주군·칠곡군) | }}}}}}}}} |
4. 대중매체에서
- 2006년 KBS 대하드라마 < 서울 1945>에서는 배우 김동현이 연기했다. < 야인시대>와는 반대로 부정적으로만 묘사되어 있으며 그의 독립운동 경력은 전혀 소개되지 않고 오로지 ' 좌익 세력을 축출하는데 앞장섬.'이라고 인물 자막 소개 등에 강조하면서 친일파들을 등용하여 오로지 빨갱이만을 축출하고 탄압하는데만 앞장선 인물로 묘사된다. 드라마에서 빌런인 박창주를 친일경찰임을 알았음에도, 경찰로 복직시켰으며 말 그대로 좌익들을 탄압한다. 작중에서 주인공 최운혁에게 납치 당하는 인물로도 나온다. 납치된 중간에 자수하면 선처를 배풀겠다는 식으로 주인공을 회유했으나, 이에 실패하자 거침없이 박창주가 지휘하는 국군에게 신고한다. 특히 이승만과 함께 여운형 암살의 배후로 나온 탓에 3녀 장병혜가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와 함께 담당 연출자 윤창범 PD 등 2명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나 2010년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5. 기타
- 이상한 소문[45]도 있지만 장택상은 독립운동가가 맞다. 다만 후에 노덕술을 중용한 것은 장택상의 비판점 중 하나가 되었다. 일화에 의하면 친일 경찰들을 등용하는 과정에서 그를 고문한 적이 있던 경찰도 등용했는데 경찰관은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된 장택상의 보복을 두려워했지만 장택상은 오히려 일제강점기 때는 어쩔 수 없었다며 직무를 수행하는 열의는 대단했다고 치하했다고 한다.
- 이승만과는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대회와 구미위원부 시절부터 인연이되어 해방되고 경무국장 조병옥과 함께 수도경찰청장 직을 수행하면서도 좌우합작의 김규식 대신 이승만을 적극 옹호하며 네이션 빌딩에 동참했다. 그 후, 4번의 국회의원으로서 이승만과 협조하기도 때론 대립하기도 하면서 다사다난한 의정 활동을 벌였던 그는 인생 말년에 인터뷰에서 이승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a]
이 박사는 애국자였다. 그의 애국은 거의 종교적 신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박사는 자기 조국을 비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분의 사고는 '조국이면 그뿐이지 잘잘못 간에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 자신이 이 박사를 소년 시절부터 모셔왔지만 '조선 사람은 할 수 없어.'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흔히 우리들 사이에 쓰고 있는 말이지만 이 박사의 사전에서는 그런 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분은 이와 반대로 흔히 '외국 사람은 할 수 없어'하는 말을 많이 쓰고 있었다.
이 박사는 오락을 몰랐다. 주량은 물론이고 장기, 바둑 등 모든 실내 오락도 이 박사는 문외한이었다. 만일 그것을 오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글 쓰는 오락은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조국의 사정을 외국 정부나 정당인에게 알려주는 글이었다. 그분의 이 습성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쉴 새 없이 가지고 있어서 측근자들이 '이 박사의 타이프라이터는 단명'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a]
나 자신이 이 박사를 소년 시절부터 모셔왔지만 '조선 사람은 할 수 없어.'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흔히 우리들 사이에 쓰고 있는 말이지만 이 박사의 사전에서는 그런 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분은 이와 반대로 흔히 '외국 사람은 할 수 없어'하는 말을 많이 쓰고 있었다.
이 박사는 오락을 몰랐다. 주량은 물론이고 장기, 바둑 등 모든 실내 오락도 이 박사는 문외한이었다. 만일 그것을 오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글 쓰는 오락은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조국의 사정을 외국 정부나 정당인에게 알려주는 글이었다. 그분의 이 습성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쉴 새 없이 가지고 있어서 측근자들이 '이 박사의 타이프라이터는 단명'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a]
-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재학 중인 김영삼을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시킨 것도 장택상이다. 1958년 공화당을 조직할 때는 김대중을 일시적으로 대변인으로 채용하기도 했다.[49]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하여 김영삼, 이승만, 박정희가 셋이 서로 대립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나중에 이회창이 당 총재가 되는 한나라당에 이르러서는 그 정당으로부터 국민의힘에 이르기까지 보수 제1정당에서는 저 세 사람 모두를 존경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3당 합당과 뉴라이트의 부상을 겪으며 보수정당에 셋의 지지자들이 모여 벌어진 일.
- 1967년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파텍 필립 시계는 국내 존재하던 시계 가운데 가장 고가였다고 한다.[50]
- 홍덕영의 증언에 의하면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아시아 예선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으로서 선수들에게 "일본에 지면 현해탄을 건너올 생각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51]
- "로맨스는 인생이요, 인생은 로맨스"라는 말을 남겨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다.
- 실제 성격은 아첨꾼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자존심이 대단했고 심지어 오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52] 오히려 자기 아버지처럼 막장으로 살거나 형처럼 친일파가 되지 않은 게 대단할 따름이다.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5동에 장택상의 별장이 있었다. 그래서 별장이 있었던 호암산이 '별장산'으로 불리기도 했었고 별장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빌라와 상점이 많이 있었다. 시흥계곡 복합환경생태공원에 별장터 안내 표지가 있다.
- 한려학파를 이끈 대학자인 장현광의 후손으로 남인 명문가라 초혼은 정경세의 후손과, 재혼은 류성룡의 후손과 했는데 두사람 다 금세 죽어버려 삼혼이 실질적인 첫결혼이라 할만큼 초반에 부인복이 없었다. 다행이도 이후에는 정상적으로 결혼생활이 이어져 자식을 많이 두었다. 그런데 세번째 부인마져 본인보다 먼저 죽어 사혼까지 했다는게 함정.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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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훈 사망 (1951.2.3.) * 안동 갑 김시현 의원직 상실 (1954.1.30.) * 영양 조헌영 납북 * 영천 을 조규설 납북 * 상주 갑 박성우 납북 * 문경 양재하 납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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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46번지.
[2]
인근의 신동, 구평동, 황상동, 인의동, 양호동, 구포동, 임수동과 함께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
[3]
남산파(南山派) 31세손 ○상(○相) 항렬.(
족보)
[4]
홍문관대제학을 지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후손으로 정우묵(鄭佑默)의 딸이다.
[5]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의 후손으로 류도상(柳道相)의 딸이다.
[6]
공주 김씨 김관호(金寬鎬)의 딸이다.
[7]
1911년 2월 2일생.
평강 채씨 25세손 채항석(蔡恒錫, 1912. 3. 11.생)과 혼인.
[8]
한유갑(韓有甲)과 혼인.
[9]
조준구(趙駿九)의 딸이다.
[10]
장현광의 문하생들은 대체로 당파로는
남인 계열이었으며
정조 독살설을 제기하고 거병하려다가 실패한 장현성 형제 등도 장현광의 후손이다.
[11]
초명 장용규(張龍逵). 1868년(고종 5) 종3품 예조참의로 재직 중에 장석룡(張錫龍)으로 개명했다.
#
[12]
1904년 8월 설립 당시에는
황실 존중과
국가 기초 공고,
인민의 생명 재산 보호, 정부의
정치 개선 실시, 군정
재정의 정리 등을 취지로 삼은 어용 단체였는데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완전한 친일 매국 단체로 변질되었다.
[13]
여기서 고종의
매관매직 실체가 드러난다.
[14]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버지
박성빈이 장승원 집에 갔고 그 결과로 둘째 형
박무희가 소작농으로 일하기도 했던 바가 있었는데 이런게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대지주였다. 때문에 박정희는 장택상을 껄끄럽게 생각했다고 하며 장택상의 정치적 제자가 후에
야당 총수가 된
김영삼이란 것도 박정희가 장택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됐다. 결국 이러한 배경이 원인이 되었는지 훗날 장택상은 말년에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싸우는 반독재투사가 되기도 한다.
[15]
일설에 의하면 장승원이 왕산
허위가
고종의 신임을 받는 것을 보고 이를 이용해 자신을 경상도 관찰사 직에 천거를 해주면 20만원을 주겠다며 청탁을 해왔다고 한다. 이때 허위가
돈을 받지 않고 거절하려 하니 당시 허위의
제자였던 박상진이 이런 모습을 보고서 허위에게 '그 돈을 미리 받지 말고 나중에
독립 자금에 협조하라는 식으로 약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고한다. 허위는 이에 장승원을 고종에게 경상도 관찰사 직에 합당한 인물이라며 천거하였다. 그런데 허위가
의병 활동 도중 체포되어 1908년에
순국한 후 장승원은 그새
오리발을 내밀며 모른체 했다는 것이다.
참조
[16]
이 사건으로 대한광복회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고 단원들이 검거당하고 결과적으로 박상진 또한
사형 선고를 받고 죽게 된다.
[17]
1938년 안창호가
병원에서 죽었을 때는 부인 김연식을 데리고 안창호의 빈소에 당당하게 문상을 다녀오기도 했다. 문상 정도야 무슨 문제인가 하겠지만 당시에 조선총독부령에 특정 혐의로 처벌받은 사람들의 입원이나
장례에 대해서
언론인이나
관료들의 접근 및 보도를 제한할 정도로 감시가 심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대인배라 볼 수 있다.
[18]
해방 후에는 안창호의 정적인 이승만에 충성했다. 사실 이승만에 충성하기 전엔 고하 송진우를 더 지지하기도 했었다.
[19]
장택상은 프랑스를 떠나면서 그녀를 잊지 못해 1950년
UN에 파견되는 대표로 왔을 때 그녀의 집을 찾아 길을 헤매다가 못 찾았고 보좌진들이 그를 찾아다녀서 겨우 찾았다. 그러나 쪽팔려서 차마 그녀를 찾으러 갔다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소리는 차마 못했다고 한다.
[20]
윤보선도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부인 장택상과 고고학과인
윤보선은 학과가 달랐다.
[21]
비록 도중에 중퇴하기는 했어도 이 당시 굉장히 드물었던 영미권 유학 엘리트이긴 했다. 다만 중퇴 이후에 영어를 써먹을 일이 많이 없어서 그랬는지 많이 까먹은 모양이다.
이승만의 공보비서를 역임했던 최기일의 회고에 따르면 장택상은 종종 돈암장에서 본인의 영어 실력을 개탄하면서
이승만의 영어 실력을 많이 부러워했었다고 한다.
[22]
이에 대해서 알려진 비화는 다음과 같다. 장택상이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는데 여운형이 명망가인 자신을 안 불러줬다고 삐져있는 상황에서 김성수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전보가 날아들어와
경성에 오게 되었다. 때마침
안국동 로터리에서 친구였던 야자
이만규를 만났고 이만규는 "오 창랑! 마침 자넬 찾고 있었네. 어서 몽양 댁으로 가세."라고 하였으나 "난 선약이 있으니 다음에 만나세"라며 거절해 장택상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아닌 한국민주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23]
애초에
한국민주당 출신이었던만큼 미군정기 초창기때만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송진우를 더 열렬하게 지지했었다는 주변 지인들의 증언이 있고, 송진우가 암살당했을 때도 빈소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반드시 고하 선생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송진우가 암살당하게되면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이승만과 손을 잡게 되었다.
[24]
그 외 불법적인 감시, 사찰, 수색, 자산 몰수 등 미군정의 묵인 하에 온갖 탄압을 주도했다.
[25]
장병민 부부의 경우 기본적으로 미군정의 좌익에 대한 탄압 때문에 여러번 체포를 당하는 고초를 겪지만 어쨌거나 아버지가 수도경찰청장이었기 때문에 금방 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가
남로당을 때려잡을 거란 첩보를 미리 입수해서 남로당원들을 미리 대피시켜주는가 하면, 아버지의 집을 무려 남로당원들의 비밀 아지트로까지 활용까지 하는 대범함을 보여줬다고.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장병민은 본인의 아버지가 평소에 기생첩을 거느리면서 어머니 김연식에게 마음의 상처를 많이 줬기 때문에 그만큼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고 한다. 반면 셋째 딸인 여동생 장병혜는 아버지를 폄하했다는 이유로 드라마
서울 1945의 제작진들을 고소하기까지 하는가 하면 장택상기념사업회까지 운영할 정도로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띄우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26]
게다가 본인의 큰딸 장병민과 사위 채항석도 결국 월북을 하는데, 훗날
박헌영계열로 몰려 이 둘 부부는
김일성 손에 숙청당하게 되고, 세월이 훨씬 지난 2005년에 이 둘 부부의 사위가 다시
남한으로 탈북을 하게 되는데 오랫동안 '얼굴없는 황장엽'[53]으로 알려져오다 2017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 남한 정착 이후 자신의 장모의 여동생이었던 장병혜와 만남을 가지려고 시도했으나 극렬한 반공성향을 가진 장병혜는 만남을 거절했다고.
[27]
친일 청산 비교 대상인 북한의 경우 소련군정이 훗날 소련파로 불리는 고려인 경력직 고급 인력들을 대거 들였고 지원도 미군정이 남한에 한 것보다 풍족해 국가 운영에 친일파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출처:이택선,<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또한, 그런 북한도 일부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줘서 중용했는데 자세한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북한 참고.
[28]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었더라도 당시 친일파 등용이 가장 활발했던 경찰조직은 민중들에게 원성을 샀고 민족주의 중도파 세력 역시 미군정과 1공화국을 크게 비판했다. 북한은 이를 정통성 공격에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적화통일을 시도했고. 지금까지 친일청산 문제가 불거지는 것 또한 당시의 인식이 재야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 드러난 것이다.
[29]
씁쓸한 사실이긴 하지만 원래 해방 후에 친일파처럼 식민지에 오랫동안 부역해오던 이들이 계속 중용된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난 인류사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비록 식민지에 부역했다는 원죄가 매우 크긴 하지만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보니 그 분야가 굴러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친일파들을 중용해서 써먹은 것.
[30]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장택상의 12촌 형이며 서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31]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 기록한 것에 의하면.
[32]
장건상이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장택상이 직접 축하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장건상은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의 부당수 노릇을 하다가 여운형이 암살된 뒤에는 근로인민당의 당수로 남북협상에 참여해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33]
장택상의 회고록-대한민국 건국과 나
[34]
여기에는 이승만이 장면을 자유당 내의 내각제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라는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그 덕분에 장택상은 이승만에게 그렇게까지 찍히지도 않고 도리여 국무총리에 임명될 수 있었다.
[35]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이범석의
족청의 규모가 커지자 이를 경계한 이승만의 의도와 이범석, 윤치영 등 이승만의 강경파 측근을 이승만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미국의 압력도 작용했다. 그러나 이범석이 쫓겨난 뒤
어부지리 격으로
2인자 자리는 이기붕이 차지했다. 이범석이나 장택상 중 2인자가 나올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건 허약하고 세력도 가장 약했던 이기붕이었던 것.
[36]
당시 언론에서는 후루이치의 이름을 따서 이 사건을 고시진 사건이라 일컫기도 했다.
[37]
비슷한 류의 폭로가 신익희가 당시 납북돼서
북한에 체류 중인
조소앙이랑
인도
뉴델리에서 만나서 중립화
통일을 논의했다는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이 있다.
[38]
호헌동지회에서 배제된 조봉암은 무소속으로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무려 200만 표를 득표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39]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인.
[40]
제헌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
[41]
2차 투표에서의 결과
[42]
제2대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
[43]
1차 투표 11표 7.28%로 4위
[44]
1995년
SBS 창사 5주년 특별기획 <
코리아게이트>와 2004년
MBC 특별기획드라마 <
영웅시대>, 2014년
TV 조선 드라마 <
불꽃 속으로> 3작품의
박정희 역.
[45]
# 이 글에는 출처가 리영희의 저서라고 되어 있는데 리영희의 어느 책에도 이런 내용이 없다.
[출처]
김영삼 회고록 1권.
[a]
希望出版社, 《政界秘史 事實의 全部를 記述한다 : 歷代 主役들이 實吐한 未公開 政治裏面 秘史》, 1966, 希望出版社, p. 131
[a]
[49]
DJ와 더불어 총리 재직 시절 김영삼도 발탁하였다. 이외에도
여운형,
이만규,
조봉암과 친하게 지냈다.
[50]
1967년 기준
휘발유 1리터가 21원이었으니 당시 60만원은 요즘으로 치면 4,800만원 정도 된다. 현재 양산되는
IWC 시계의 국내 가격이 600~900만원 수준임을 생각하면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
[51]
다만 이는 이승만의 의지가 강하게 들어간 것이기는 하다.
[52]
대단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정체성은 사실 양반-귀족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