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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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254170,#ddd> 일생 | 일생 · 평가 (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 이승만/여담 | |
가족 | 아버지 이경선 · 양아들 이강석 · 양아들 이인수 ·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 | ||
정책 | 대한민국 정부 수립 · 신문지법 · 농지개혁법 ·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 · 한미상호방위조약 · 한미원조협정 | ||
발언 | 정읍발언 · 과도정부 당면 정책 33항 | ||
정당 | 자유당 | ||
역대 선거 | 제헌 국회의원 선거ㆍ 제1대 대통령 선거ㆍ 제2대 대통령 선거ㆍ 제3대 대통령 선거ㆍ 3.15 부정선거 | ||
저서 | 일본 내막기 · 만주의 한국인들 · 독립정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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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독립운동 단체 | 독립협회 · 대한인국민회 · 대한민국 임시정부 · 한미협회 · 독립촉성중앙협의회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대한인동지회 · 흥업구락부 | ||
관련 신문 | 제국신문 · 매일신문 · 태평양잡지 · 협성회회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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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
- 초명은 승룡(承龍)이다. 다른 이름은 일수(一秀), 별칭 이박사(李博士).
- 로마자 표기(Rhee Syng-man)가 여러모로 현대의 일반적인 표기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표기 방식인데, 당시에는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 본인이 자기만의 표기법으로 영문명(Syngman Rhee)을 만들어 해외에서 사용하였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I(Ri) Seung(-)man,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YI(Ri) Sŭngman이다.
-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고의 명필로 평가된다. 이는 당연한 것이, 후대 대통령들과는 달리 조선 말기에 유년기를 보낸 뒤 청년기에 대한제국 신민으로 살았던 사람이고, 어린 시절에는 한학(漢學)을 공부해 과거시험까지 치렀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예에 익숙한 정도가 후대들과는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고, 취미로 즐긴 사람과 생활로 한 사람과는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우고 평생 서예를 연마했기에 "명인"이라 불릴 만큼 글씨의 정교와 기교가 빼어나고 한자 뿐 아니라 한글과 영어 필체도 유려하고 필체가 굳세면서 부드럽다. 이승만은 영어에도 굉장히 능했지만 한문도 매우 뛰어났다. 그리고 글씨를 매우 길게 썼다.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필체가 반듯하여 의지가 강하고 인간적인 완숙함을 갖추고 있으며 원칙을 중시하고 보수적인 성향이 있고 자신감이 강하고 용기 있는 성격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2006년 지인용(智仁勇)이라는 작품으로 대통령 글씨로는 최대인 1억 5,500만 원의 낙찰가로 경매되기도 하였다.
[1] | |
- 조선 왕실, 구체적으로는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굳이 따지자면 왕가의 후손이긴 했지만 직접적인 왕실과는 멀어진 지 이미 오래였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자신을 '프린스 리'라 소개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걸 가지고 이승만이 거짓말로 사기치고 다녔다는 식으로 악의적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외교독립론자였던 이승만은 현지의 지식인, 엘리트층들과 많이 만나고 인맥을 쌓으려 노력했고 듣보 아시아 국가 출신이라서 그렇게라도 해야 상대를 해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게 도움이 되었다. 외국에서 'prince'는 한국어의 '왕자'와 정확히 대응되는 단어가 아니라서 먼 왕손들까지 prince로 보는 체계가 없는 것도 아니며[2], 이승만의 의도가 자신이 왕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일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근본적으로 공화국으로 시작되다 보니 황족, 왕족, 귀족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다.[3] 아무리 동양인이라고 해도 일단 왕족쯤 되면 그래도 좀 달리 봤다고. 안익태도 아일랜드에 있을 때 "아이리시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에 대해 "나라를 통치해 온 황제의 직계손인 '프린스 리'"라며 '왕손'의 의미로 프린스라는 호칭을 붙인 적이 있다. #
- 광복 이후 잔존한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매몰찼다. 조선의 궁궐, 종묘 같은 국가 시설은 차치하더라도 의친왕의 사동궁이나 운현궁 같은 일종의 사유 재산마저 국고로 환수하려 했고 실제로 일부는 성공했다. 말년의 순정효황후 윤씨[4]는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군의 원조로 피난했는데, 휴전 후 이승만의 지시로 창덕궁으로 환궁하지 못하고 한동안 정릉 수인재(修仁齊)[5]에서 기거해야 했다. 이승만은 본인이 전주 이씨 왕가 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은 있었으나, 조선을 망가트린 황실 자체에 대해서는 대단히 싫어했고 독립운동 시기부터 그는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대한제국 황실에 대해 좋게 생각할 일이 없었다.
- 일제강점기 때 이승만은 일제에 의해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10만 달러라는 얘기도 있고[6] 30만 달러라는 얘기도 있으나[7] 어느쪽이든 거액임에는 틀림없다.[8] 당연히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는 한국이 독립했고 그가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현상금 자체가 말소되었다.
-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만난 적이 있는데 만나는 과정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아이젠하워는 미군 장병들을 위로하러 온 것이라 원래 계획에 없던 이승만을 만날 생각이 없었고 이에 환영 군중대회에 각료들까지 준비해놓고 기다렸던 이승만은 망신을 당할 처지였다. 이에 백선엽이 한미 양국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겨우 회담을 주선했다.
- 2014년 12월 11일, 발견된 이승만 대통령의 채색수묵화가 처음으로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
1911년, 이승만이 그린 채색수묵화. 옆에 한자로 '지재 대인[9]의 환갑연을 축하드립니다. 부귀하고 장수하십시오. 우남 이승만. 신해년(1911년) 국추(9월)'라고 써있다. 좌측 상단에는 ' 박사. 자는 치성. 호는 우남. 전주 사람. 양녕대군 16대손. 미국 화성돈(워싱턴) 대학 졸업생'이라는 작품 설명이 달려 이 전 대통령이 그린 그림임을 밝히고 있다. |
- 이승만이 김구와 대립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의견 충돌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했으나 김구는 남북 통합 정부를 수립하자고 했다. 여기에는 이승만이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김일성의 존재 때문에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김일성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 남북 통합 정부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했지만 김구는 그래도 계속 김일성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김일성은 이승만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라는 답변을 냈는데 김일성이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실제로는 김구가 본인에게 통합 정부를 수립하자고 한 말을 자신의 체제 선전에 써먹는 한편 남한을 탱크로 다 부숴버리려고 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해방 정국부터 남한 몰래 탱크를 계속 모아들이고 있었다. 이승만이 이걸 간파했는지 이승만은 애초에 김일성이 말이 통하는 인물이 아님을 깔끔하게 인정했으며 그래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직접 가담해서 김구를 온몸으로 존경하고 있던 김준엽과 장준하마저도 해방 정국 당시에는 이러한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노선을 더 지지했을 정도며, 김구가 평양에서 남북 연석 회담을 가진 사실에 대해서는 임정 시절때만 하더라도 좌익과 투쟁을 했던 양반이 이제와서 김일성과 만남을 가지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이해가 안간다고 반응했을 정도였다.
- 손 끝에 입김을 후후 부는 버릇이 있었다. 이는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고종 퇴위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는데 이 때 각종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 오랜 미국 생활로 인해 반쯤 미국인과 같아졌다. 식습관도 카스테라, 샌드위치, 햄버거, 커피, 콜라, 와인 등 미국 음식을 즐겼고 성격도 굉장히 미국인 같아졌다. 되려 박정희와 비교하면 이승만이 훨씬 진보적인 축에 들 정도로 이승만은 다소 미국인 같은 성격이었다. 물론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것처럼 한식도 좋아했으며[10], 이 때문에 경무대 요리사였던 양학준은 한식과 양식을 둘 다 할 줄 알았고 #,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도 비지찌개와 시래깃국 같은 한식 요리를 할 줄 알았다고 한다. 또한 이기붕과 같은 측근들이 부정축재를 일삼았던 것과 달리 이승만 부부는 일하는 사람이 빨래를 널다 놀랄 정도로 속옷까지 닳아 떨어지면 군데군데 기워 착용할만큼 검소했다.
- 이승만이 1904년 한국에서 미국으로 갈 때 쓴 여권은 대한제국의 여권이다. 참고
- 이승만이 1904년 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갈 때 선교사들로부터 추천서를 무려 19통이나 받았다고 한다.[11] 학업 관련 추천서는 주로 이승만이 목회자가 되려고 하니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해 달라는 것이었다. 1905년 2월,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의 학업을 인정 받았으며, 또한 이승만이 학업하는 이유가 목회자가 되기 위함이라고 면접에서 답했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1907년 6월 5일에 졸업하였다. 그 후 1907~1908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12], 1908~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렇게 빠른 시기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한다는 것이 한국 기준[13]으로는 매우 힘들지만, 당시의 학위 과정이나 타국의 교육 지침이 지금 한국과 같다고 생각할 순 없을 것이다.
-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당시 81세의 나이였고, 1960년 퇴임 당시 만 85세[14]로, 대한민국 대통령 사상 최고령 대통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최초 취임 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1998년 대통령 취임 당시 만 74세였던 김대중이 최고령이다. 이승만은 194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나이가 만 73세였다.
- 제1공화국은 거의 모든 대한민국 환 지폐에 이승만이 실려 있었다. 현행 원화 지폐도 그렇거니와 화폐의 인물 초상화는 원래 왼쪽에 두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왼쪽이 있으면 좌익이라는 이유로 1956년에 가운데로 갔고, 사람들이 지폐를 반으로 접고 다녀서 자기 얼굴이 해지는 데 불만을 가져 1년만에 오른쪽으로 다시 옮겼다. 이러한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간 뒤에는 살아있는 사람을 지폐 모델로 쓰지 않고 죽은 지 오래된 위인들을 쓰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존칭을 박사로 불러주길 바라던 인물을 실은 지폐답게 이 지폐 시리즈는 각각 '좌이박', '중앙이박', '우이박'으로 불린다. 이처럼 제1공화국 당시 거의 모든 화폐에 이승만 본인의 얼굴이 들어갔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역사에서 세종대왕 다음으로 화폐에 가장 많이 얼굴이 들어간 인물이다. 즉 세종대왕이 가장 많이 들어갔고, 이승만이 두 번째로 많이 들어간 것이다.
- 광복 후 운현궁이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인정받아 사유재산화 되면서[15] 관저로 쓰지 못하게 되자, 그 대가로 이우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운현궁에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는 등의 무례를 범했다. #
- 조선 시대에 과거시험을 본 적이 있으나 낙방했다. 이것은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이었고 이후 갑오개혁으로 사라지게 된다. 다만 선접 군과 거벽, 사수로 대표되는 당시 과거시험의 폐단을 생각해보면 이승만이 자력으로 합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 더글러스 맥아더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같은 반공주의자이기도 했고 맥아더는 만주에 원자폭탄 사용을 주장할 정도로 북진을 할 생각이 있어서 이승만과 죽이 잘 맞았다. 이 외에도 맥아더가 이승만을 대할 때, 서양인들이 으레 하는 것처럼 동양인을 아랫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웃어른을 대할 때처럼 공손하게 대하고 같이 식사를 할 때도 맥아더가 이승만의 식기를 먼저 챙겨주었다고 하며 또한 이승만의 얘기도 잘 들어줬다고 한다. 맥아더가 GHQ라는 수완을 발휘한 것과 같이 볼 때 그의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16] 그래서 맥아더가 UN군 사령관에서 잘렸을 때 이승만은 매우 아쉬워했다.
- 월튼 워커의[17] 후임으로 온 매튜 B. 리지웨이는 1.4 후퇴 이후 미국 정부의 압록강 재진격 금지, 현 상황 유지 방침[18]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이승만과 사사건건 충돌을 빚었다. 리지웨이의 성격도 이승만 앞이라고 말을 가려 하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불편해 했다고 한다. 백선엽의 자서전인 '군과 나'에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리지웨이 사령관에 대해 "좀 버릇없는 친구였어"라고 평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과는 사이가 좋았다. 리지웨이와는 달리 그는 압록강 재진격에 찬성했고 여러 차례 전선을 북상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19] 한국군 정예화에도 힘 썼다. 이형근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이승만은 진정한 장군은 밴 플리트 밖에 없다며 극찬했다고 한다. 밴 플리트도 이승만에 대해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인 그리고 애국자 중 한명이다'라고 높게 평가했고 그의 회고록에서도 이승만을 높이 평가했다.
- 한국 항공 역사의 기념비적인 민간 여객기가 바로 그의 호를 딴 ' 우남호'다. 우남호는 한국 최초의 항공 노선에 취항했고 한국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하기도 했다. 1971년 퇴역후 인하대학교에 기증되어 현재 인하대 캠퍼스에 전시되어 있다. 이승만은 인하대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 백범일지는 이승만 정부 시기에 금서로 지정되었다.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때 출정식을 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배웅해주며 "만약 ( 한일전에서)지면 현해탄에 몸을 던져야 하네."라고 했다고 한다. 6.25 전쟁이 휴전하고 바로 다음해였지만 기적적으로 한일전에 승리하여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였다.
- 두음 법칙이 적용되지 않을 때에는 리승만으로 불렸다.
- 한때 경기도 성남시의 도로명에 그의 호를 딴 '우남로'가 있었다가 헌릉로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해당 도로에 지어지는 서울 지하철 8호선 역의 가칭도 우남역이었지만 여러 논란 끝에 그냥 역명을 남위례역으로 역명이 결정되었다. 다만 우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아파트가 해당 역 인근에 생각보다 꽤 있다.
- 임시정부 초창기에 대통령(President) 직함을 사용하는것에 집착했던 것이나 곽영주가 '옥체'라든지, '~옵니다' 등 왕에게나 쓸 용어를 사용하자 좋아했던 것을 보면 원래부터 외형적인 직책/직위를 중시했던 인물이 아닐까 하는 분석도 있다. 이승만이 대통령 시절에 자신을 칭할 때 ' 짐'이라고 했다는 썰이 있는데 그건 아니고 자신을 '이승만'이라고 3인칭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었을 뿐이다.[20] 특이하다면 특이한 특징이긴 했지만 워낙 옛날이기도 했고, 이는 현대에도 경우에 따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예를들면 문재인도 '저 문재인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으며 도널드 트럼프 같은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승만이 임시정부 초창기 때 대통령 직함에 집착했다는 것은 약간의 오해가 있는게, 당시 이승만은 한성 정부의 수장인 '집정관총재'였는데 이걸 영어로 번역할 적절한 표현이 'president'라고 생각하여 영어 명칭만 president'라고 썼던거지 한국어 명칭으로는 '집정관총재'를 그대로 썼다.
- 이승만은 박사 학위를 1910년에 받았으나 논문이 책으로 출판된 것은 1912년이었다.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 정책 상 학생들은 자신의 논문을 100부 이상 출판해야 했는데 이승만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출판 비용을 대지 못해서 제때 출판하지 못하고 1912년에서야 출판할 수 있었다.
- 제1차 이승만 시 공모전 사건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 시 공모전 세로드립 사건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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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중에서 자신이 이승만과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면 헛소리로 생각하자. 이승만은 6대 독자이기 때문이다. 즉, 5대 조상 대부터 갈라진 남계 친척이 없다. 따라서 양녕대군파에서 이승만과 같은 항렬인 사람 중 가장 가까운 촌수가 12촌이다. 그리고 항렬 상관없이 그나마 가까운 사람들도 20촌 안팎이며, 대부분의 양녕대군 후손들은 30촌이 넘어갈 정도로 촌수가 멀다. 그러므로 이승만과 가장 가까운 부계는 사실상 없다. 참고로 이승만의 누나들의 자손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22]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이승만의 아들 항렬에 해당하는 양녕대군파 일가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인수는 양녕대군파 중에서 자신과 같은 항렬대의 사람들 중에서는 이승만과 거리가 가장 멀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서2남 장평도정의 후손이고, 이인수는 적2남 함양군의 후손이라 실제 촌수는 33촌이기 때문이다. 족보 체계상 왕이 되지 못한 왕자를 기준으로 파조가 정해지기 때문에 '양녕대군파'라는 범주에 함께 소속된 것일 뿐, 양녕대군의 아들 대에서 진작에 갈라진 가계이다.[23]
1952년 1월 1일, 새해부터 최전방을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추위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두툼한 파카 후드 모자를 꽉 쪼여서 대통령이 당황하고 있다. |
- 이승만이 박사 과정에 있을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은 훗날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행정학자로 유명한 우드로 윌슨이었는데, 윌슨은 이승만을 아끼고 좋아했다고 한다. 윌슨은 흑인은 열등인종이라 말했던 노골적인 백인 우월주의자였는데 아시아인은 그리 안 본 모양이다.[24] 항상 이승만을 미래 조선의 지도자가 될 거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프린스턴 대학교의 '우드로 윌슨 스쿨'에 '이승만 홀(Syngman Rhee·1910 Lecture Hall)'이라고 하는 대형 강의실이 있다. 이승만의 박사 학위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박사 학위인데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박사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하였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아닌 "이승만 박사"로 되어있다.[25][26]
- 구미위원부 공관에 출입하던 미국의 많은 저명한 인사들 가운데 한 명이 우드로 윌슨의 차녀 제시 윌슨이었는데, 그녀는 이승만이 프린스턴 재학 시절부터 친하였으며[27] 이 두 사람은 한때 서로 연애 감정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싱턴 D.C.에 찾아올 당시는 이미 외교관 프란시스 세이어(Francis Sayer)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 부부는 미국 조야의 많은 인맥들을 소개시켜주는 등 이승만의 외교 활동에 많은 협조를 해주었다고 한다.[28]
- 1919년 체코의 국부인 토마스 마사리크가 워싱턴 D.C.에서 활동할 때, 그 당시 구미위원부로 활동하던 이승만과 자주 회합하고 만나서 의견을 교환했으며, 이때 그는 이승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승만은 그의 투쟁 방식을 벤치마킹하여 외교 독립노선을 통한 독립과 그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 대한 전략의 얼개 및 골격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29]
- 아마도 근현대사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장기간 활동한 인물일 것이다. 첫 등장이 1896년 독립협회이며, 마지막 등장이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한 퇴진이니, 무려 64년간의 활동이 소개된다. 심지어 독립협회 시절은 대한제국도 성립되기 전이니,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미군정)-대한민국을 거쳐 왔다. 근현대사 교과서의 대단원 구분이 '개항기-일제강점기-대한민국'으로 구분되는 걸 보면 사실상 모든 단원에서 이승만을 한 번씩은 보고 가게 된다. 사실 생존 시기가 더글러스 맥아더[30]와 겹친다.
- 미국의 유명 싱어송라이터인 빌리 조엘의 We Didn't Start The Fire에서 언급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 곡은 미국 현대 역사의 중요한 사건 관련 키워드를 연도별로 언급하는 가사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한국 관련 내용은 네 번 나오는데 이승만 이외에는 남한, 북한, 판문점이 나온다.
- 이승만 정부 아래서 여러개의 동상이 전국에 설치되었는데 4.19 혁명 이후 대부분 철거되었다. 배재학당 시절에 졸업한 배재대학교에 이승만 동상이 있는데 철거 논쟁에 휩쓸리고 있다. # 초대설립자로써 세워진 인하대학교의 동상도 발판만 남은채 창고에 있다.
- 그의 사망일인 7월 19일은 아이러니 하게도, 버마의 독립운동가 아웅산과 해방정국 시기 그의 라이벌이었던 여운형이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여운형 암살일도 7월 19일이기 때문에, 그 날에는 각자 다른 장소에서 추모제를 열고 있다. 여운형기념사업회 쪽에서는 여운형 추모제를 여는 반면, 이승만기념사업회 쪽에선 이승만 추모제를 여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 이름만 들어도 지독할 정도로 경기를 일으키는 두 가지가 있었다. 바로 일본과 공산주의였다.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지역예선 당시 선수들에게 "일본에게 지면 현해탄을 건너올 생각 하지 마라"라고 장택상에게 시킨 것과 김일성을 아예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 그 사례이다.[31]
오늘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함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6일
매일신보 1945년 10월 26일
- 그렇지만 친일파를 기용한것이나 좌우합작을 위해 공산주의를 어느정도 용인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도했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해(1875년)에 태어나서 같은 해(1965년)에 똑같은 나이로 같이 사망했다.
- 1918년 미국 체류 당시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 징집 문서에서 자신의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것이 미국 국가기록원에서 발굴 공개되어 파장이 일었다. 경향신문 보도= “내 국적은 일본” 이승만 前 대통령 미국 문서 논란 조선일보 보도= “내 국적은 일본” 이승만 美체류시절 자필 국적표기 충격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고 자부하였는데 미국 공문서에서 자신의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당시 상당한 논란이 불거졌다.[32] 이 자료는 2013년에 발굴되어 국내에는 당해 10월 5일경에 유력 언론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2023년 현재에는 네이버 검색시 결과는 노출되나 기사의 원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의 대부분 언론사에서 삭제되어 있다.[33]
- 우장춘 박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감싸준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우장춘이 일본에서 대한민국으로 환국했지만, 정치계에선 우장춘의 아버지가 친일파 우범선이라는 점, 일본에 오랜 시간 동안 지내면서 한국어에 서툴렀다는 점 등을 이유로 노골적으로 무시했는데, 그런 우장춘의 몇 없는 정치적 우군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상기한 이유로 연구 예산을 주지 않고 뻐팅기던 농림부 장관에게 "자네는 아직 젊은데 벌써부터 노망이 났나?"라고 꾸짖어 예산을 주게 한 건 유명한 일화.
- 이승만은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으로 부를 것을 강조하며 민주국의 기초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마련되었고, 무저항주의를 시작해서 성공한 사적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남녀선열들의 공업(功業)을 국가가 인증하는 것 #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즉, 이승만 본인은 스스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정부를 세웠다는 역사관을 관철하였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연호 및 이승만/평가 항목을 참조.
-
독재자 중에서도 한 손에 꼽을 수준의 엘리트이기도 하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학사,
하버드 대학교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34]라는 지금 기준으로도 어마어마한 학력을 가지고 있데, 이승만은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6월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가 지금보다
인종차별이 더했던 시절이었다는 것, 1919년 기준 조선인의 보통학교[35] 취학률이 3.9%였다는 것,(
#) 해방 직후에도 조선인의 문맹률이 (일제의 우민화 교육으로 인해) 78%, 1944년 기준 중학교 이상 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비율은 고작 1.4%에 달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히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 기준으로도 최상위급의 엘리트였던 셈이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박사 호칭을 더 좋아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던 것.[36] 라이벌인
김일성이 중학교 중퇴[37]였던 것과는 대조적.[38]
타 독재자들과 비교하면 인디라 간디는 옥스퍼드 대학교 학사에, 리콴유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사였고, 리셴룽은 이승만이 거쳤던 하버드 대학교 석사였으며,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에든버러 대학교 석사, 로버트 무가베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경제학 석사( ?)[39],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위스콘신 대학교 석사로 높아야 명문대 석사 학위에 그쳤다. 파리 대학[40] 박사였던 키우 삼판, 빈 대학교 법학 박사였던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의 경우 이승만의 학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국가원수는 아니었으니 논외. 그나마 비슷한 급으론 무함마드 무르시(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재료공학 박사), 안토니우 살라자르( 코임브라 대학교 법학 박사, 동대학 경제학 교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르시는 학교의 네임밸류 면에서 이승만보다 뒤쳐지고, 그나마 살라자르가 현역 교수까지 찍어봤단 점에선 이승만보다 우위인 면이 있다. 또 독재자 여부에 논란이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베냐민 네타냐후는 MIT 석사, 하버드 대학교 박사과정 중퇴이며,[41] 살리 베리샤는 티라나 대학교 의학 박사에 의대 교수까지 한 적이 있다.
2. 이승만과 개신교
생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종파는 감리회[42]이며,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했다.[43] 조선시대에 태어난 그는 그 시절 태어난 여느 사람들처럼, 과거시험을 공부하고 유학(儒學),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며, 불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불교와도 친화성이 있었던 인물이었다.하지만 고종의 전제왕권과 친러정책에 반대하여 만민공동회에서 고종이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입헌군주제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반역죄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44] 한성감옥 옥살이 당시 1901년에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원래 미국 선교사들과 만남을 가지던 시절에는 성경에 큰 관심이 없다가 감옥에 갇혀있고 나라의 앞날이 어두웠던 시절 마음이 힘들어 성경을 감옥으로 들여와서 읽기 시작한 뒤 감명을 받아서 개종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도 기독교 관련한 얘기가 잠깐 나온다. 정동교회에서 장로직[45]을 맡으며 교회 내에서도 위치를 차지했다.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미국 기독교 사회에 한국을 알리고,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강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인들에게 105인 사건 등과 같은 일본의 한국교회핍박 사실을 알리며, 미국 기독교 사회 인사들과 접촉하거나 청중 강연을 통해서 한국독립을 호소하였다.
광복 후 대통령이 된 후 이승만은 개신교를 우대해주기 시작했고, 대한민국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제헌의회 개헌식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축사를 하거나, 목사이기도 했던 이윤영 의원이 국회 시작 전 기도를 맡기도 했다. 이 후 취임식에도 매번 목사가 취임선서를 하기 전 기도를 했고,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했다.[46][47] 대통령직 사임 이후 하와이로 간 이후에는 하와이에 있는 한인기독교회를 다니다가 사망한 뒤 장례예배 등은 정동제일교회에서 치러졌다. 당시 장례는 전통 상여식 장례식과 개신교식 예배를 혼용한 형태였다.[48]
다만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 이승만 외에도 개화기 이래 정치가와 지식인들 가운데 개신교인들이 많았다. 개신교를 통해서 유교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고 해방 이후에 대립하기도 했던 김구[49]와 독립운동기에 이승만과 협력, 갈등 관계에 있었던 안창호 등도 개신교인이었고, 정치적/민족적으로 중요한 상황에 신앙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다.[50] 이러다 보니 훗날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의 중심이 되는 세력이 기독교 우파가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프란체스카 일기에 기록된 일화들을 보면 개인적으로 신에 대한 신심은 꽤 깊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으로 파견된
중공의
암살공작원들이
대통령의 생명을 해치려 하는데도 대통령은 지금도 경호경관 수를 줄여 한명이라도 더
전투경찰로 내보내 싸우게 할 궁리만 한다.
구국과
독립투쟁으로 살아온 대통령의 목에는 줄곧
일본
정부의
현상금 30만 달러가 걸린 채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겨왔으며, 여러 차례 암살범들의
저격을 받을 때마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고 태연자약한 대통령이었다.
1951년 2월 5일[51]
1951년 2월 5일[51]
3. 이승만과 박정희의 관계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는 박정희 5사단장 |
박정희가 집권했을 때 이미 4.19 혁명으로 하야했음에도 여전히 인기 있던 이승만은 그에게 장벽이었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을 불허하였으며 장면 총리는 죽어서야 집 밖에 나오도록 했다. 당시 상황이「60∼64년 외교문서」공개를 통해 드러났는데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귀국을 고집하면 그와 프란체스카여사의 여권을 취소하라』며 절대 귀국치 못하게 호놀룰루 영사관에 강력지시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개인적으로도 이승만의 온갖 실정들을 골라잡아 경멸의 대상으로 삼았다. 때문에 이승만을 무능한 지도자라고 세뇌하는 것마냥 숱하게 비판하였으며, # 이승만 정권에 대해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썩어 문드러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해방 귀족이 날뛰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실제로 박정희는 이승만과 가까웠던 정치군인의 횡포, 여기서 비롯되는 인사 적체 문제 등 이승만 정권의 총체적 난국과 문제점들을 집권기에 직접 겪은 바 있다. 1차적으로는 여순반란사건이 박정희와 이승만의 앙금을 만드는데 기여했고, 2차적으로는 전후 진급심사에서 곽영주가 자신의 남로당 행적때문에 진급을 누락시키려하자 백선엽이 말려 겨우 진급한 것 때문에 박정희와 이승만의 사이가 매우 나쁜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는 발췌 개헌 당시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상관인 이용문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수립한 바가 있다. 즉 5.16 군사정변은 두 번째 계획이었다. 본래 5.16은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계획되었다. 시행날짜는 3월 15일로부터 두 달 뒤인 5월 8일이었다. 그렇게 정한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사람이 송요찬인데 그 송요찬이 미국으로 가는 날이 5월 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 8일로 정한 것이다.[52]
이승만 전 대통령 영결식 당시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대독한 추모사에서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건국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김종필은 박정희가 우남 '이승만 박사를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던간에 일단 죽은 고인에 대해선 심한 비판을 삼가고 되도록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박정희의 개인적인 생각과 별도로 영결식에서의 발언은 그래도 최소한의 예우는 갖춘 립서비스에 가까울 수 있다. 그 증거로 박정희의 1962년 저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박정희는 이승만에 대해 매우 나쁘게 평가했다.[53] 그리고 2015년 4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배나TV의 장원재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조사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대신 참석한 정일권 전 총리가 말하길 박 대통령에게 조사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조사는 노산 이은상에게 부탁해서 쓰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 즉 박정희가 이승만을 계승했다는 식의 주장들은 대다수 비공식적이거나 지엽적인 증언들에만 의존하고 있는 편이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는데, 당연하게도 이승만의 장례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었다. 거기서 양자와 의견 조율이 안 되자, 박정희는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했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한다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장을 요구하였다. 이에 박정희는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석제 당시 총무처 장관은 이 보도를 부인했다.
박정희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독립운동가와 그 일족에게 훈장을 수여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했다는 건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라고 비하했다. #[54]
그외에도 이승만 정부의 삼백 산업 등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갈아엎는 동시에 수출주도산업화로 전환시키고 혁명 재판을 통해 이승만 정권을 무력으로 지탱하던 정치 깡패들도 재판을 통해 다수 제거하는 등 실질적인 정책 면에서도 이승만 정부를 계승하는 것보단 단절하는 특징이 강했던 편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재임 기간이 두 번째와 첫 번째로 길다.[55] 또한 보수, 우익 진영에서는 찬사와 높은 평가를, 진보, 좌익 진영에서는 비난을 받는다. 다시 말해 70년 현대사에서 절반 가까이 재임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굵직한 행적을 남긴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1]
1947년 2월 19일,
이승만이 도미하여
워싱턴 D.C.의 칼튼 호텔에서 쓴
한시. "내 염원은 3천만 동포가 함께하는 통일된 나라를 이룩하는 것. 그러면 내 임무는 끝나고 여생을 산간의 아름다움에 의탁해 고요와 평안속에 살련다."
[2]
프린스 문서로. 물론 조선과 대한제국에 실제로 서양의 프린스에 비견되는 작위 내지 칭호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한국사를 모르는 서양인들에게는 17대 전에 왕실에서 갈라진 사람이 프린스라도 말이 안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3]
미국이 막 성장하던 시절 이런 평민 거부들은 유럽의 귀족들과 결혼하는게 일종의 유행이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이런 시대상이 표현됐는데, 여주인공인 로즈가 미국의 모 거부에게 팔려가듯 결혼할 예정이었다.
[4]
순종황제의 계후(繼后).
한국의 마지막 황후다.
[5]
齊(제)로 썼지만 거처를 뜻하는 齋(재)를 대신해서 쓰는 경우도 있어서 수인'제'가 아니고 수인'재'로 읽는 것이 옳다.
[6]
해리스 목사
[7]
신한민보
[8]
현상금 액수에 대해 공식 확인된 바는 없다.
[9]
중추원
의관을 지낸 지재(之裁) 이규익 선생의
환갑
잔치 때 61명의 유명 인사가 선물로 만든 이 서화첩은 '헌수첩(獻壽牒)'이라는 제목의 두 권짜리 책으로 이 전 대통령의 채색수묵화와 글씨는 물론 해사 김성근, 동농 김가진, 우하 민형식, 경석 이우면 등 당대 명필로 이름을 날린
구한말 고위관료도 대거 이름을 올렸다.
[10]
다만, 해당 장면에서는 이승만의 입맛보다는 검소한 의식주에 중점을 뒀다.
[11]
대학용 추천서만 있는건 아니고 자신의 제자인 이승만이 미국 현지에서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기를 요청하는 추천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2]
처음에는 1과목을 낙제하여
하버드 대학교 석사학위 취득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과정 입학허가를 받은 뒤에 다시 하버드 대학교에 돌아와서 석사과정을 신청했는데,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이례적으로 낙제한 그 과목만 계절학기에서 재이수하면 석사학위를 주겠다고 했고, 이승만은 그 과정을 재이수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학위 취득과정이 굉장히 이례적임을 알 수 있다. 단, 학위취득은 1910년이다.
[13]
한국의 석박사과정은 유럽-미국의 동일 과정보다 다소 오래걸리는 편이다.
[14]
그것도 당시 한국 남성 평균 수명이 60년이 채 안되던 때다.
[15]
이우 왕자의 부인인 박찬주 여사의 노력이었다. 장남인 이청 명의로 사유화되었다.
[16]
맥아더의 부친은 일찍이 일본 주재무관을 지냈으며, 더글라스 맥아더는 아버지의 부관으로서 이미 1905년에 일본에 체류한 경험이 있었다.
[17]
월튼 워커도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이승만이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가 죽었을 때 매우 슬퍼하면서 사고를 낸 병사를 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정은 들었는 듯하다.
[18]
애초에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의 방침이 한국이야 어찌되든 전쟁부터 끝내고 보자는 것이었다. 맥아더가 사령관이었던 시절에도 그랬으나 2차 대전 동안 비대화된 군대에서 육해공군의 최선임자씩이나 되었으니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
밴 플리트는 여러 차례 자신의 상관이었던 리지웨이에게 전선을 북상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리지웨이는 압록강까지 진격해도 미군의 희생이 너무 큰데 비해 전략적 가치는 없고 그저 땅만 더 얻을 뿐이라며 작전을 승인하지 않았다.
[20]
동양권 군주가 자신을 가리키는 과인이나 짐, 고 등의 표현도 3인칭이다.
[21]
Assiated Press
[22]
첫째 누나는
단양 우씨에게, 둘째 누나는
청송 심씨에게 시집을 갔다.
[23]
양녕대군파 안에서 이승만의 조카뻘 자손 중 이승만과 가장 멀려면 마지막 공통조상이 당연히 양녕대군이어야 하는데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이고 바로 아랫대 사람은 17대손이므로 이를 고려해 계산하면 이승만과 가장 먼 조카 항렬인 사람은 33촌이 된다. 아무리 항렬이 조카뻘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먼 촌수인데 어떻게 양자로 입양되었냐면,
영어를 잘해야 하고 나이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야 하고, 아직 미혼이어야 한다는 등 이승만 부부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부터 대한민국 초기까지는 양자를 일족 중에서 들이고 진짜 자식으로 취급했다. 이를 보종차원에서 한다고 한다. 물론 제사를 지내게 할 목적으로 빈한한 먼 친족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24]
서구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은 고도의 문명국을 이루었던 청나라, 조선, 그리고 빨리 개화된 일본에 대해서는 흑인보다 우등한, 이른바
명예 백인 취급을 해 주었다. 히틀러가
손기정과의 악수는 흔쾌히 한 게 그 사례다.(물론 손기정이 메달리스트였던 것도 있지만, 특히 히틀러가 자신이 지도하는 국가가 기존 구미열강보다 더 낫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도 있다.) 반면 진짜 백인이라도
유대인과
슬라브족의 취급은 좋지 못했다. 그 당시의 서구 사람들의 인종 구분은 생물학적 구분이 아니라 다분히 문명화 수준이나 자기들 마음에 드느냐의 여부에 따른 구분이었고, 이로 인한 폐해는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그 최악의 사례가
르완다 내전이다. 물론 이것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청과 한국을 깔보았으며 일본도 마냥 좋아한 건 아니었다.
[25]
이승만 사망 소식을 보도했던
대한뉴스에서도 이승만 박사라고 말하고, 지금도 아주 나이 많은 어르신들 중에는 종종 이승만 박사로 호칭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26]
이것은 대대로 내려온 사회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은데, 조선시대에도 문형이라고 해서 학문이 뛰어난 사람을 높이 사서 영의정보다도 대제학을 역임한걸 더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명, 청 시대 중국도 마찬가지로 (사실상)재상의 공식 명칭이 내각 대학사였다.
[27]
특별히 그녀가 조선의
YWCA
선교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터라 이승만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미국 YWCA 전국위원회에서 근무하였다.
[28]
林炳稷, 《臨政에서 印度까지 : 林炳稷外交回顧錄》, 1964, 女苑社, p. 132
[29]
“맥아더情報의 壽命 : 48時間”, 《月刊中央》, (중앙일보사), 1968년 12월, p. 247-255
[30]
같은 19세기 후반 출생으로 1차대전 때 이미 사단장이었고 한 번 퇴역했다가 2차 대전 때 복귀해 6.25까지 현역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태평양 전쟁부터 인천상륙작전정도까지 알려져 있는데 알고 보면 짬밥이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 정도 짬밥이냐면 영미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가 맥아더의 옛 부관 출신이다.
[31]
김일성을 만날 볼 생각이 없느냐? 는 기자의 질문에 김일성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그와의 만남은 없다고 말한 바가 있다.
[32]
당대 활약하였던 대다수의 독립운동가 또는 해외 거주 한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조선인 또는 고려인으로 기재한 사실은 여러 자료를 통해 교차검증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홍범도 장군은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참석시 작성한 입국조서에서 입국목적을 고려독립으로 기재한 바 있다.
[33]
그러나 이승만은 20여개가 넘는 다른 행정문건에는 전부 Korea로 국적을 표기했다. 애초에 안창호도 출입국카드 국적란에 일본으로 표기한 적이 있다.
[34]
심지어
우드로 윌슨의 수제자이기까지 했다! 20세기 초 기준으로는 최고의 스펙이었던 셈.
[35]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다.
[36]
다만 저런 스펙이 이승만의 오만을 부추겼다는 비판도 있다.
[37]
다만 중퇴 시점에서 교육 과정은 거의 끝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38]
다만 김일성도 당시 취학률을 고려하면 지식인이라 자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상대가 이승만이라서 초라해 보일 뿐이지.
[39]
참고로 무가베는 독립운동 중 수감되었을 때 방송통신 과정으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따냈다고 한다.
[40]
1970년
68운동으로 해체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대학교 중 하나였다.
[41]
중퇴 요인도
형의
죽음 때문이다. 참고로 네타냐후는 IQ가 180이라는 말이 있다.
[42]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 개신교 신자인 대통령은 이승만 포함
윤보선,
김영삼,
이명박까지 총 4명인데, 다른 세 사람의 종파가
장로회인 것과 달리 이승만은 감리회였다.
[43]
참고로 정동교회는 소래교회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세웠다.
[44]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경도된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파들이 많았는데
고종 퇴위와 반러활동은
일본이 의도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훗날 '청년 이승만 자선전'에서 이 때 박영효계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의 과오라고 인정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박영효처럼 노골적인 친일은 아니었고 일본처럼 근대화를 이루자는 지일에 가까웠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활동하던 대한제국 초기의 이승만의 성향은 친미이자 지일이었으나 그 후 반일로 전향하여
민영환의 대미 밀사로 활약하게 된다.
[45]
장로직은 감리회에도 있는 직책이며,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감리회에서는 장로 임직식도 여러번 가졌다. 또한
권사 역시 장로회처럼
여자만 맡는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권사직을 부여했었다.
[46]
공휴일로 지정된 첫 종교 기념일은
개천절이다. 개천절이 공휴일로 지정되자 그 이유로 크리스마스도 공휴일로 지정됐고 같은 논리로 불교계의 요구에 따라
부처님오신날까지 공휴일로 지정됐다.
[47]
다만 이와 별개로
제헌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와 함께
정치와 종교는 분리할 것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48]
본래 개신교는 장례 내의 미신적 행위를 허용하지 않지만, 대통령의 장례라는 특성상 아예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별히 허락된 것으로 보인다.
[49]
원래는 친한 사이였다. 김구도 처음부터 개신교 신자는 아니었다.
[50]
애초에 독립운동가들 중 개신교 신자가
천도교 신자 다음으로 많았다. 당장
민족대표 33인 중에도
목사들만 10명이며, 전도사, 장로 등까지 따지면 더 많다.
[51]
『6.25와 李承晚 : 프란체스카 亂中日記』, 耆婆郞, p. 425-426
[52]
다만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데는 군 인사에서의 소외, 진급 지체 등 개인적인 불만과 군의 파벌 및 비리에 대한 반감,
장면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 등이 함께 작용했고, 그 바탕에는
만주군 시절의 경험과
군국주의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른바 5.16 군사정변의 주체들이 내세우는 '국가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은 상당 부분 언어적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그들의 주장대로 무능한 민주당 정권에 들고일어난 것이라 해석한다 하여도, 5.16 군사정변이 합법적인
민주주의 정부를 전복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한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라는 사실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53]
심지어 우익 세력에서 이승만의 주요 업적으로 손꼽히는 토지개혁조차 별 효과가 없었다며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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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독립운동에 몸담은 공산주의자였는데, 미군정 시기에 좌우파 충돌이 있었을 때 우파의 공격에 의해 죽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몸을 담그게 된 것도 사실 이런 배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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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시절까지 포함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햇수로 18년, 박정희 대통령이 16년으로 대통령직 자체를 역임해 본 사람 중에는 재임기간이 가장 길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