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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3:48:11

단파방송 밀청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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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기타

1. 개요

일제강점기 말기 방송국에 근무하던 직원들을 중심으로 ' 미국의 소리(VOA)'와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낸 단파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여 전황을 비밀리에 전파하다가 많은 사람이 체포당한 사건.

2. 상세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는 <외국 단파방송청취 금지령>을 공포하고 그 단속을 강화했다.[1] 그러나 경성방송국[2]에 근무하던 한국인 기술 직원들은 1940년 무렵부터 국내 보도방송의 중계를 위한 도쿄의 단파방송을 수신하다가 중경방송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보내는 한국어 방송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신되는 ' 미국의 소리'를 몰래 듣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소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운영하는 국제방송을 말하는데 이승만은 6월 ~ 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매번 격려하는 방송을 시작했다. 이승만의 제안으로 1942년 8월 29일 한국어 방송이 처음 방송되기도 했다.[3] 당시 미국의 소리 방송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의 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1942년 6월 13일 이승만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미국 워싱턴 D.C.에서 미국의 소리 라디오를 통해 '일제는 전쟁에 패망할 것이다. 우리 임시정부는 연합군의 승인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독립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선전하였다. 전체 내용은 아래와 같다.[4]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어데서든지 내 말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한 것은 제일 긴요하고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나 이승만이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 2,300만의 생명의 소식이요, 자유의 소식입니다. 저 포악무도한 왜적의 철망, 철사 중에서 호흡을 자유로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이 자유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시오. 감옥 철창에서 백방 악형과 학대를 받는 우리 총애 남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시오. 독립의 소식이니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왜적이 저의 멸망을 재촉하느라고 미국의 준비 없는 것을 이용해서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야 여러 천 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을 미국 정부와 백성이 잊지 아니하고 보복할 결심입니다. 아직은 미국이 몇 가지 관계로 하야 대병을 동하지 아니하였으매 왜적이 양양자득하야 온 세상이 다 저희 것으로 알지마는 얼마 아니해서 벼락이 쏟아질 것이니 일황 히로히토 멸망이 멀지 아니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임시정부 중국 중경에 있어 애국 열사 김구,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제씨가 합심 행정하야 가는 중이며, 우리 광복군 이청천, 김약산, 유동열, 조성환 등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서 총사령부를 세우고 각방으로 왜적을 항거하는 중이니, 중국 총사령장 장개석 장군과 그 부인의 원조로 군비·군물을 지배하며 정식으로 승인하야 완전한 독립국 군대의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미주와 하와이와 멕시코와 큐바의 각지의 우리 동포가 재정을 연속 부송하는 중이며, 따라서 군비·군물의 거대한 후원을 연속히 보내게 되리니, 우리 광복군의 수효가 날로 늘 것이며 우리 군대의 용기가 날로 자랄 것입니다. 고진감래가 쉽지 아니하나니 37년 간을 남의 나라 영지에서 숨겨서 근거를 삼고 얼고 주리며 원수를 대적하던 우리 독립군이 지금은 중국과 영·미국의 당당한 연맹군으로 왜적을 타파할 기회를 가졌으니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을 세계에 드러내며 우리 민족의 정신을 천추에 발포할 것이 이 기회에 있다 합니다.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서백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타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데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임경업, 김덕령 등 우리 역사의 열렬한 명장, 의사들의 공훈으로 강포·무도한 왜적을 타파하야 저희 섬 속에 몰아넣은 것이 한 역사에 두 번이 아니었나니 우리 민족의 용기를 발휘하는 날은 지금도 또다시 이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지에서는 아직 비밀히 준비하야 숨겨 두었다가 내외의 준비가 다 되는 날에는 우리가 여기서 공포할 거이니 그제에는 일시에 일어나서 우리 금수강산에 발붙이고 있는 왜적은 일제히 함몰하고야 말 것입니다.

내가 워싱턴에서 몇몇 동포와 미국 친구·친우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정부와 교섭하는 중이매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을 날이 가까워 옵니다. 승인을 얻는 대로 군비·군물의 후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망을 가지고 이 소식을 전하니 이것이 즉 자유의 소식입니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씨의 선언과 같이 우리의 목적은 왜적을 파한 후에야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백배나 용기를 내야 우리 민족성을 세계에 한번 표시하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 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파하며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의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당시 이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었던 이들은 극소수(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장택상 등)였으나 이들의 입을 통해서 단파방송 밀청자의 수는 차츰 늘어났고 전황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단파방송을 밀청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1942년 말부터 일제 고등경찰에 적발되어 현업 기술자를 주축으로 하여 아나운서, 편성원 및 조선방송협회 산하에 사업부 소속 공사과, 보수과 그리고 주지과(周知課) 직원들이 일본 제국 경찰에 대량으로 검거되었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주필로 유명한 칼럼가 이규태의 형제도 이걸 듣다가 처벌당했다고 한다.

개성송신소에 근무하던 이이덕, 성기석, 김동하, 홍익범 등이 1942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초에 걸쳐 검거되었고 이어서 경성방송국에도 검거 선풍이 불었다. 이 사건으로 경성방송국 안에서만 아나운서, 편성원, 기술계직원 등 약 40명이 체포되었고 각 지방 방송국까지 합치면 150명 가까운 한국인 방송인들이 검거되었다.

이 밖에도 정객과 민간인으로 끌려간 150여 명을 합치면 300여 명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수난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에게 적용된 법령은 1941년 12월 26일에 제정 공포된 <조선 임시보안령>을 비롯하여 <사설 무선전신전화법>·<사설 방송용전화법>·<육군형법>·<해군형법>·<보안법 및 치안유지법> 등이었다. 이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모두 75명이나 되었다. 대부분이 방송국 직원이었지만 방송인이 아닌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무거운 형을 받은 사람이었던 홍익범 동아일보가 폐간당하기 전에 기자였고 허헌도 동아일보와 관련이 있던 변호사였으며 경기현은 의사였고 문석준은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지낸 사람이다. 이 밖에도 함상훈(동아일보, 조선일보 편집국장 역임), 국태일(동아일보 영업국장), 백관수(동아일보 사장) 등 동아일보 계통의 거물급 언론인들이 증인신문을 받았는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이미 폐간된 뒤였다.

3. 기타

디기리 정규 1집 수록곡인 '아이에서 어른으로' 인트로가 이 방송에서 이승만의 육성을 발췌한 것이다. Ladies and Gentleman, 나는 말합니다. 자세히 들으시오. 내가 말하려는 것은...

KBS 본사앞에 물망비가 세워져 있다.


[1] 일본 본토에서도 일제는 단파방송의 청취와 단파수신기의 소지를 통제했다. 참고로 패전 직후 창업한 소니의 극초창기 주력 사업은 일제에 의해 봉쇄당한 단파수신기의 다이얼을 풀어헤치는 수리업이었다고 한다. [2] 현재 KBS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이다. [3] 참고로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이다. [4]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또 단파방송을 밀청하다가 일제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물망석이 KBS 본관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