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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용수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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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50a9><colcolor=#fff> 독도의용수비대
獨島義勇守備隊
파일:독도의용수비대.jpg
설립일 1953년 4월 20일
해체일 1956년 12월 30일
관할구역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독도[1]
대장 홍순칠
후신 독도경비대

1. 개요2. 창설
2.1. 구성
3. 활약4. 임무 완료5. 고난
5.1. 논란
6. 이후7. 대중매체
7.1. 다큐멘터리
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법적으로는 1953년 4월 20일에 독도에 상륙하여 1956년 12월 30일 국립경찰에 수비업무와 장비 전부를 인계할 때까지 활동한 33명의 의용수비대원이 결성한 단체를 말한다.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 제2조 제1호)

2. 창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일본은 전란을 틈타 세차례에 걸쳐 불법적으로 독도에 무단 상륙, 1948년 미군의 폭격 연습 과정에서 희생된 한국 어부의 위령비를 파괴하고 독도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는 나무 표지판을 세우는 등 불법 영토 침략을 공공연히 저질렀다.[2] 이에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부상을 입고 대한민국 육군 특무상사로 전역한 울릉도 출신 홍순칠 울릉도에 살고 있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3]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점인 1953년 4월 20일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되었다.

무장 및 장비들은 대장이자 당시 울릉도 최고의 부자였던 홍순칠이 직접 부산으로 찾아가 오징어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해서 각종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였으며, 결성 이후에는 대원들의 모금을 통해 구입하였다. 또한 경북도경(울릉경찰서라는 이야기도 있다)에서 지원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 개런드로 무장했다. 이후 목재, 전답, 산을 팔아서 계속 군자금을 보충했다.

2.1. 구성

대장은 홍순칠 본인이 맡았으며, 편제는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진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총 45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중 3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전투원 출신이었다. 이후 12명이 탈퇴하면서 최종적으로 수비대에 남은 인원은 33명으로 기록되었다.

3. 활약

독도/역사 참조.

4. 임무 완료

하지만 개인이 군대를 꾸리는 일은 만만치 않았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도 수비대 유지에 날려버린 홍순칠은 계속 자신들의 업무를 정부에서 맡아주길 요청했지만 정부에선 근무환경이 너무 열악하다고 난색을 표하기만 했고 배속된 경찰들은 근무를 거부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항의가 거세짐에 따라 한때 홍순칠이 해적이란 주장이 제기되어 홍순칠을 주한미군이 체포하여 한국 정부에 인계하기도 했다. 홍순칠은 자신이 전재산을 바쳐 독도를 지켰다고 국회의 청문회에서 주장했고 청문회는 홍순칠에게 동정적으로 바뀌어 정부가 뭘 했길래 애국자를 해적으로 몰았냐고 내무, 외무, 국방장관에게 항의하는 지경에 이르러 홍순칠은 석방되었다.

1956년 12월 30일 마침내 기존의 업무를 국립경찰 소속 독도경비대에 인계함으로서 이들의 기나긴 임무는 끝이 났다. 이 공로로 홍순칠은 1966년 5등 근무공로훈장을, 나머지 대원들은 방위포장을 수여받았다. 10명의 의용수비대는 경찰 소속으로 전환하여 그 뒤로도 근무를 계속했다. 그러나 임무를 마친 뒤에도 이들은 독도 방파제 설치를 정부에 건의하는 등의 독도 지키기 및 독도 가꾸기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5. 고난

일본과의 교전 중에선 사상자가 없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전달한 위문품을 받는 과정에서 위문단 한 사람이 놓고 온 카메라집을 가져다 주던 중에 허학도 대원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허 대원은 경찰을 지망하고 있었는데, 사망 후 그의 귀신을 봤다는 대원들이 나타나자 경찰 정모 근무복을 구해와 그의 위령제를 지내주고 나서야 목격담이 사라졌다고 한다.

독도에 수비대원들이 지낼 막사와 계단 등을 만드느라 허위로 징용영장을 만들어 울릉도의 목수와 기술자들을 불법으로 징용하여 수비대 기지를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술자 몇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 군자금의 부족이 심각하여 제주도 해녀들을 불러 해물을 채취하여 팔아서 군자금을 마련하려 했지만 인건비도 나오지 않을 정도라서 그만두어야 했다.

이들은 1969년과 1972년 독도개발 계획서를 경상북도에 제출하며 실효적 지배 강화를 거듭 촉구했지만, 당시 정부는 이들의 존재가 일본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질 것으로 여기며 부담스러운 반응을 나타냈다. 결국 홍순칠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 여사가 전했다. 그가 고초를 겪었음에도 언론은 정권의 통제로 보도하지 못했고, 훗날 '국가정보원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또한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5년에 서울로 이주했고, 1986년, 폐암으로 숨졌다. 박정희 때처럼 일본 등 외국 차관에 의존했던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 독도는 우리땅’을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 2012년 한겨레 칼럼)

5.1. 논란

1. 2006년 오마이뉴스에서 독도수비대에 대한 위와 같은 내용이 사실은 과장되었다는 보도를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미 2000년부터 김점구 독도수호대 대표가 울릉도-독도 학술 뗏목탐사 당시 '가짜 대원설'도 주장했고, 2007년에 감사원이 재심사 처분을 시사하여 국가보훈처 산하에 '독도의용수비대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으나 별 성과 없이 이듬해에 활동을 멈췄다. 1 2 3 반론

2. 독도의용수비대의 창설시기가 1953년이 아니라 1954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국토보호를 목적으로 1954년 정부 보조없이 단독으로 울릉도 출신 대원 30명을 모집하여 다액의 사재를 들여 1956년 8월까지 독도를 수비하여 3차에 걸친 교전을 통하여 일본의 일본의 침입을 방지함으로서 대한민국 영토수호에 헌신 노력하였음" - 총무처 작성, 1966.4.6

그러나 국가보훈부는 1953년 4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독도경비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주장을 인정하고 있다.

2017년 10월 27일, 국가보훈처(현재의 국가보훈부)는 울릉도에서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개관식을 열고,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기념사를 했다. 기념관은 1953년 4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활동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53년부터 1956년까지 3년 8개월 동안 33명이 활동"했다는 내용은 당시 수비대장이었던 홍순칠의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에도 기록돼 있으며, 홍순칠의 수기는 병적기록, 경찰인사기록, 외무부 발행 독도문제개론, 영토표석 관련 문서철(국가기록원 소장), 경상북도 경찰국 조사보고서 등에서 확인 가능하다.

6. 이후

정부는 이들의 공로를 인정해 1996년 4월 홍순칠 대장에게 국가보훈 삼일장을 추서하고, 나머지 대원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여했다. 2005년에는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이 제정되었으며, 이 법을 토대로 2008년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가 공식 출범했다.

현재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도 의용수비대 묘역에 잠들어있다.[4]

7. 대중매체

7.1. 다큐멘터리

8. 관련 문서



[1] 울릉읍 독도리 [2] 사실 일본이 이렇게 도발 수준의 무리수를 둔 데에는 독도 문제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긴 했었다.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 [3] 대장인 홍순칠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원들은 한국전쟁 초기 참전 경험이 있는 전투원 출신들이었다. [4] 33인의 대원들 중 17명이 안장되어 있으며 2024년 현재 생존자는 5명이 남아있다고 한다. 나머지 11명의 경우에는 각자 다른 곳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