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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12:37:03

명군이 되어보세!/개변된 역사/3부

명군이 되어보세!
등장인물 ( 1부 · 2부 · 3부 · 4부 · 이재석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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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3부에서 작중 세상에 생긴 변화들을 소개하는 문서.

대체역사 갤러리 독자가 만든 3부 연표

2. 대아주

2.1. 조선 → 대한

대한국
大韓國
파일:대한민국 국기(1945-1948).svg 파일:조선(명군이 되어보세)의 국기.png
국기 군함기
위치 한반도, 부여주, 연해주, 속말주,
영락주, 요동주, 요서주
,
구주총관부, 대남도, 주산 군도,
현토주, 아모 열도, 연역주,
북변[5], 동토[6],
빙주, 북미주[7], 남미주,
동변[8], 중미주, 서미주,
누손주[9], 해사도
번국 하와국, 조홀국, 술루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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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1392년 8월 13일
훈민정음 반포 1446년
경국대전 반포 1474년
무자호란 1588년
경인왜란 1590년
을미동정 1595년
대한 수립( 칭제건원) 1632년
경신대기근 1670년 ~ 1671년
수도 황도 한성부(皇都 漢城府)
민족 한민족, 여진족 등 퉁구스인,
한족, 일본인, 대만 원주민, 묘족, 말레이인, 필리핀인
유럽계 백인
에스키모, 아메리카 원주민, 하와이 원주민
언어 근대 한국어
문자 한자, 국문
종교 유교( 성리학, 국교),
불교, 천주교, 무속 신앙
정치체제 전제군주정
국가원수 태황(太皇)( 임금)
국성 전주 이씨(李)
연호 건원(建元) (1632년 ~ 1650년)
연가(延嘉) (1651년 ~ 1678년)
건복(建福) (1679년 ~ 1699년)
건흥(建興) (1700년 ~ 1740년)
통화 대한통보, 푼(分)<전(錢)<냥(兩)
[clearfix]
2.1.1. 정치
2.1.2. 지역
2.1.3. 인구
2.1.4. 군사/ 치안
2.1.5. 경제
2.1.6. 외교
2.1.7. 사회
2.1.8. 교육
2.1.9. 문화
2.1.10. 식생활
2.1.11. 의학
동의보감으로 대표되는 독자적으로 발달한 한의학에, 재석과 상희의 미래지식에 더해 서양의 양의학까지 들어오면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의학 기술을 자랑하며 유럽에서도 대한의 의학 수준은 뛰어나다고 인정한다. 아무리 최고의 의사들만 선발했겠지만 몸이 허약한 건복제를 21년이나 재위할 수 있게 해주었고 야전에서도 다리 절단 수술을 하고 사람을 살려놓을 수 있을 정도이며, 대한에서도 군사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과학기술은 철저히 비밀을 지키는 반면 의학기술엔 그런 제약을 두고 있지 않아서, 주변국에서 유학생들도 받고 있다.
2.1.12. 과학, 공학
2.1.13. 환경, 생물
2.1.14. 종교
2.1.14.1. 불교
원 역사와 달리 박해가 없기에 무인지변 때 전소된 원각사를 기부금으로 재건할 정도로 교세를 유지하고 있다. 신도의 수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승려의 수는 대략 5만이다. 혜비 진씨, 황태후 이씨 등 황실에서도 불교를 믿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면 상류층 내에서는 여전히 천주교보다 인기인 듯.
2.1.14.2. 예수교
기독교의 여러 종파를 아울러 부르는 명칭.

본래 대한에 기독교 계열 종교는 천주교 하나뿐이었고, 반주교(개신교)는 대한 내에 전파되지도 않았거니와 천주교의 이단 정도로만 알려졌기에 여러 기독교 종파를 아울러 부르는 말이 없었고 천주교라고만 불렸다. 그러나 알렉세이의 방문 후 루스 정교가 공식적으로 도입되면서 루스 정교와 천주교를 아울러 부르는 예수교라는 이름이 생겼다.
2.1.14.3. 회회교
이기빈의 모카 약탈 당시 유입된 아프리카 출신 흑룡군의 후예들이 여전히 믿고 있다. 회회당은 도성에만 하나 있다. 흑룡군 대다수가 음주와 돼지고기를 즐기는 나이롱 신자들이라 선교에 적극적이지도 않고 여러 이유로 회회교의 이미지가 좋지도 않아서 한인들에게 전도되지도 않은 듯 하다. 회회사(回回師, 이맘)는 초기에는 우호국인 천축에서 찾아왔고, 후에는 한인 신자 중에서 선출된다. 1732년에 오스만 제국과의 국교가 맺어지면서 오스만 제국에서 제대로 된 이맘을 파견하여, 나이롱 신자들이 힘들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2.1.14.4. 덕성도
불교, 천주교, 힌두교 모두의 영향을 받아 불교 승려 출신 광진이 창시한 신흥종교.

사이비스러운 교리와 다르게 의외로 1736년 시점까지는 사익 추구 없이 신도들에게 진심으로 봉사하는 정상적인 종교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때문에 재석도 금위사와 우포청의 보고서를 받은 후 조치를 취하지 말고 놔둘 것을 지시한다.
2.1.15. 연도별 주요 사건
스포일러가 될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될 경우 문피아 측에 대한 이익 침해로 항목이 삭제될 위험이 있으므로 지나치게 자세한 기술은 자제 바람.

2.2. 한족

명이 멸망한 후 한족계 국가로 송나라와 서나라가 건국됐다. 그러나 대한에서는 진정한 중화의 후계는 천명을 이은 우리 대한이라며 후송과 서는 도적떼로 간주, 대놓고 때놈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며 중화로 인정하지 않는다.
2.2.1. (멸망)
1368~1630.

원역사와 비슷하게 정묘년을 전후로 전국 각지의 농민반란에 시달렸고, 원역사와 달리 2부에서 황태자 주상락이 독살당하고 욕심많은 주상순이 태창제로 즉위한 바람에 농민반란이 원역사보다 좀더 빨리 터졌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했으나 당시 막 즉위한 선조 이연은 장조의 유훈을 기억해 국상과 가뭄을 핑계로 개입하지 않았다. 이연만이 아니라 건주의 다이샨 역시 개입하지 않았고, 결국 대차게 멸망했다.

하다못해 원역사에서는 사실상 청과 이자성군의 협격에 가까운 모양새[96]였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그냥 농민반란 하나로 망했다. 원역사에서도 존재하는 기근, 그리고 원역사를 능가하는 폭정의 콤보. 덕분에 원역사에서는 반란 진압 과정에서 일찌감치 전사한 고영상이 생존하여 화북지역 반군 지도자로 활약했다. 고영상은 귀부를 명목으로 모문룡을 통해 태창제 주상순에게 뇌물을 바치려 시도했고, 이를 눈치챈 웅정필이 모문룡을 처형했는데 이걸 자신에게 들어올 뇌물을 끊었다며 주상순이 길길이 날뛰며 웅정필을 처형했다.

덕분에 웅정필군은 허무하게 붕괴하고 고영상 군은 웅정필 군까지 흡수하여 그대로 북경을 들이쳤고, 주상순은 황궁을 탈출해 조선으로 도주하려 했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붙잡혀 살해당하고 그것으로 명은 멸망한다. 이 시기가 1630년으로 원역사보다 14년 일찍 멸망한다. 주상순은 살이 져며지고 고깃국이 되어 고영상군에게 잡아먹힌다. 3부 시점에서도 중화천명을 이어받았다 주장하는 후송에서조차 황제부터가 만력제와 태창제를 '주가의 돼지들'이라 지칭하고 후송의 백성들은 돼지고기볶음을 '만력육', 돼지내장탕을 '태창탕'이라고 부를 정도로 경멸의 대상이다.

이러한 농민반란 과정에서 폭정에 시달린 농민들의 분노로 명의 황족은 사실상 멸족, 황족이고 뭐고 할 거 없이 주씨 성을 가진 사람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당했다고 한다. 명의 황족 중 유일하게 제대로 생존이 확인된 주상락의 아들 주유교만이 겨우 일가족을 이끌고 조선으로 탈출하여 대명공에 봉해지고 대구 대명동의 명나라 유민 5천호를 식읍으로 받고, 본인이 직접 건축한 대명묘에서 명나라 황실의 제사를 잇고 있다. 대명공은 황족도 할 수 없는, 대한에서 유일하게 세습 가능한 작위로 남아 있다. 3부에선 1711년에 즉위한 5대 대명공이 대명동을 다스리고 있다.

명은 멸망한지 오래이지만 대구 대명동의 인구 5천호, 그리고 대륙에서 흘러온 명나라 유민들이 모인 인천 소명동에서는 여전히 그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상 차이나타운인 셈. 주산군도에서는 멸망한 명의 유신들이 대대로 관직을 이어가면서 그 잔재를 이어나가고 있다.
2.2.2. 후송
대송국
大宋國
국호 대송국(大宋國)
별칭 후송(後宋)
위치 직예, 절강, 강서, 양광, 복건, 호남, 호북
번국 남월국
수도 남경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趙)
국가원수 황제
연호 천개(天開) (1633 ~ 1668)
홍광(弘光) (1669 ~ 1680)
융무(隆武) (1681 ~ 1684)
소무(紹武) (1685 ~ 1736)
태안(太安) (1737 ~ ?)
언어 중국어(오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대승 불교, 도교
민족 한족
[clearfix]
1633~.

송 공종의 후손을 자처하는 농민반군 지도자 조승복이 강남 일대에 세운 나라. 후송은 편의상 명칭이고 공식 국호는 대송이다. 소금 잠상 출신인 조승복이 건주군이 북경을 함락한 고영상 반란군을 진압하고 화북을 장악하는 2년 사이 강남에서 일어난 수많은 반란군 세력들을 규합하여 1633년 건국했다. 건주군의 공격으로 장강까지 밀려났으나 건주가 화북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사이 반격하여 회수까지 밀어냈고 회수 선에서 국경이 교착되었다.

3부 초기에는 막장 외교로 인해 주변에 우호국이라곤 하나도 없이 모든 나라와 싸우는 모습 때문에 독자들에게 동네북 호구 국가로 취급되어 애기공룡 둘리를 패러디 한 애기공룡 대한이라는 팬픽까지 나왔다. 하지만 연재분이 진행되면서 그런 사면초가 상황에서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까지 해내면서 서양 기술까지 도입하려는 모습 때문에 상남자 국가로 이미지가 변했고, 직접 등장이 없음에도 3부 세력들 중 가장 인기가 많다. 2부 시절 독자들이 우려하던 청나라 라이징을 막아냈고, 호구스럽던 2부의 만력제 시절 명과 달리 반쪽자리임에도 천자국다운 긍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 듯. 3부 초기 후송의 호구 이미지는 수군은 아예 없는데다 내륙 민란도 진압을 못 해서 대한에 원병을 요청하는 청에게로 잠깐 옮겨갔었다.[97]

후송 현 황제인 조형서가 즉위한 후 청의 배후가 되어주는 대한을 청과 떼어놓고 대한의 해상봉쇄를 풀어 무역을 진흥시킬 목적으로 대한 측에 먼저 국교 정상화를 제안한다. 대한 측은 형제국인 청과의 신의 및 실리를 생각해 답을 보류했지만, 1702년 스페인이 필리핀의 한인 불법체류자를 학살하자 필리핀을 칠 뜻을 굳힌 건흥제가 해상보급로 안정화를 위해 받아들인다. 양측은 서로를 대등한 대송 황제와 대한 태황으로 인정하고, 후송 측 3개 항구[98]를 개항장으로 지정해 대한 수군의 봉쇄를 푸는 대신 배의 규모에 따라 출입항세를 대한 측에 내게 된다.

하지만 그 후 보여지는 행보들로 다시 호구 이미지가 되고 말았는데, 청과의 일전을 앞두고 콜레라로 수십만 명을 잃어 흐지부지되고, 서양 조선공을 초빙하여 서양식 범선을 건조해 함대를 만들어놓고도 마다구 토벌전에서 오히려 마다구에게 일방적으로 털리기만 했고, 철갑선을 만드는가 했지만 위에 나온 것처럼 인력 추진의 허장성세 함대이다.

어떻게든 대한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가 싶었더니, 정작 대한은 심왕작 부활을 통해 청, 후금과 우호관계를 재확인하고 남중국해까지 손을 뻗고, 기대했던 서나라의 내란도 안 일어나고, 안남의 찐씨 정권에게 통수 맞고, 청과의 전쟁에서는 계속 패하기만 하는 등 조형서가 추진했던 정책들은 모조리 실패하며, 결국 중화의 정통이라는 문화적 자부심이라도 세우기 위해 국가 사업으로 자전을 편찬하기로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특유의 언더독스러운 이미지덕분에 대역 장르에 등장하는 중원 세력치고는 인기가 높다.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 같은 커뮤니티에서는 그 날 연재분에서 후송 내부 사정이 언급되면 한동안 후송 이야기만 할 정도이다. 흡사 워해머의 스케이븐을 연상케하는 사회상 때문에 후송이 나오면 꿀잼이 보장된다고 하는 독자들도 있다.

공중분해의 조짐이 보이는 서나라와 달리 후송은 국력 자체는 비교적 굳건한 반면 심각한 사회 모순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4부 혹은 5부에서 공산주의 파시즘같은 극단적 이념이 후송에서 등장하고 후송의 후계 세력이 세계대전기 최종보스로 등극할 것으로 예상하는 독자들과 팬픽이 많다.[99]
2.2.3.
<colbgcolor=#008000><colcolor=#ece5b6>
대서국
大西國
국호 대서국(大西國)
위치 사천, 운남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장(張)
연호 대순(大順) (1635 ~ 1656)
영창(永昌) (1657 ~ 1715)
승평(承平) (1715 ~ 1728)
흥시(興始) (1729 ~ ?)
문자 한자
민족 한족, 그외 소수민족
[clearfix]

1635~.

명을 멸망시킨 농민반군 지도자 고영상이 건주군에게 죽고 세력이 와해된 후 고영상의 부장이었던 장헌충이 그 잔당의 절반을 규합해서 1635년 사천 지방에 세운 국가. 하지만 황실의 내분으로 인해 분열될 위험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1729년 시점 서나라 황실 상황도 결국 1729년 광동왕이 반란을 일으켜 1년간 큰 내란을 겪고, 대한과 일본의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 겨우 광동을 진압하고 군국제를 폐지하지만 국력에 큰 손실을 입는다.
황제 직할지인 사천의 인구는 전체 서나라 인구 6천만 중 2천만을 훨씬 상회하며, 광동과 형주가 각각 1천만을 상회한다. 그 중 운남은 4백만으로 가장 적다. 다만 송나라에게 패배해 형주를 잃었고, 광동 반란으로 또 많은 사망자가 나오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2.3. 건주

누르하치의 건주는 1622년 와라부와 동맹하고 할하부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그 직후 다시 와라부와 적대 관계가 되었으나 누르하치가 1623년 폐암으로 사망한 관계로 즉시 전투를 벌이지는 않는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건주를 계승한 다이샨은 이 대치 관계를 핑계로 고영상의 반란 때 명에 원군을 보내지 않고 명이 멸망하도록 방치하다가 태창제가 살해된 후에야 뒤늦게 근황을 명분으로 화북으로 진군한다. 명나라의 마지막 명장인 원숭환이 원역사의 오삼계처럼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지만 남쪽으로 병력을 차출당하고 황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찾아온 건주군을 막을 명분이 없어 건주군의 입관을 허용하며 건주에 귀부한다. 산해관을 넘은 건주는 고영상 반군을 쓸어버리고 원숭환을 내세워 명군 패잔병을 흡수하며 약 2년에 걸쳐 화북을 모두 장악하고, 강남에 건국된 후송을 공격하여 장강까지 밀어붙였지만 다이샨이 산서성과 섬서성에서 농민들을 추방하고 목장을 만들려 하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이 틈을 타 반격한 후송에게 회수 선까지 밀려난다. 화북 반란을 진압하는 사이 후송과 서의 방어가 단단해지자 강남을 공격할 여력은 없어서 회수 이북 장악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강남을 잃어 식량 자급이 어려워지자 인구를 줄이기 위해 대도시 4곳을 초토화시켜 총 2백만명의 한족을 학살하고 한족 1천만명이 강남으로 도망치게 한다.

그 후 밀약을 지켜 대한에 요동을 할양했고 다이샨은 화북, 홍타이지는 몽골을 분할하여 통치한다.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모두 사망한 뒤 두 나라는 각각 청과 금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각각 황제와 대칸을 칭한다.
2.3.1.
대청국
大淸國
국호 대청국(大淸國)
위치 직예, 산동, 산서, 하남, 섬서, 귀주, 감숙
수도 북경 > 동경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국가원수 황제
연호 천명(天命) (? ~ ?)
숭덕(崇德) (? ~ 1663)
만방(滿邦) (1664 ~ 1671)
순치(順治) (1672 ~ 1695)
중통(○○) (1696 ~ 1728)
홍화(○○) (1729 ~ ?)
언어 중국어(관화), 만주어
문자 한자, 만주문자
민족 만주족, 한족
[clearfix]
명 멸망 이후 화북을 장악하여 통치하던 다이샨이 사망하고 왕위를 계승한 다이샨과 희정옹주 이혜원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요토가 1648년 국호를 청으로 변경하고 칭제했다.
2.3.2. 후금
대금국
大金國
국호 대금국(大金國)
위치 몽골
수도 상도, 카라코룸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국가원수 대칸(大汗)
연호 천총(天聰) (? ~ ?)
명창(明昌) (? ~ ?)
천권(天券) (? ~ ?)
대덕(大德) (? ~ ?)
태화(○○) (? ~ 1722)
천정(天正) (1723 ~ ?)
언어 만주어, 몽골어
민족 만주족, 몽골족, 한족
종교 천주교
[clearfix]
1636년을 기점으로 건주에서 독립하였다. 명이 멸망하고 다이샨의 건주가 화북을 장악한 후 나라를 분할하여 화북은 다이샨이 통치하고 홍타이지는 몽골 칸이 되어 와라부를 상대한다. 홍타이지가 사망한 후 홍타이지와 희연옹주 이혜연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호오거가 1648년 국호를 금으로 하고 칭제한다.

2.4. 일본

중원에서 명이 멸망하고 무려 5개국이 칭제하는 혼란기가 도래하자 일본도 그 영향을 받는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친손자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외손자라는 엄청난 정통성을 지닌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3대 쇼군으로 즉위하면서 에도 막부의 권력이 강해지고, 실질적 군사력은 전무하면서 명의 일본국왕 책봉이라는 명분과 조선 주둔군의 군사력으로 유지되던 진서대장군부는 명이 멸망하고 중원 정세의 혼란과 가뭄으로 대한이 개입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 되자 에도 막부의 압박에 1644년 스스로 폐위를 선언하고 합병된다. 이로써 대한령인 구주총관부를 제외한 규슈 전체가 다시 에도 막부에게 넘어갔다. 에도 막부는 대한과는 적대할 뜻이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진서대장군이 매년 50만석씩 대한에 쌀을 보냈는데 자신들은 100만석씩 보내주기로 했고 친한 다이묘인 사나다, 타치바나 가의 영지는 건드리지 않는다. 대한 측에서는 안 그래도 여력이 없는데 진서대장군부가 구원을 청한 것도 아니고 에도 막부에서도 숙이고 들어오니 개입하지 않았다.

이후 막부는 천주교 탄압을 시작, 규슈 내의 많은 천주교도들이 학살당했고 천주교도 다이묘들은 영지를 몰수당한다. 이에 10만 단위의 반란군이 일어나자 20만 대군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했다. 이 때 일본에 귀순한 아이신기오로 아민(마츠다이라 이에토시)의 기병대가 가장 잔혹한 학살을 저지르며 대활약한다. 여자는 겁탈하고 남자는 수레바퀴보다 크면 전부 죽여대는 기마민족 풍습에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인들도 경악할 정도. 이후 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시마즈 가의 영지 3국 중 사츠마를 제외한 2국을 몰수한다. 학살을 피한 천주교도들은 대한령이라 천주교가 허용되는 구주총관부 영역으로 많이 도망쳤다고 하며 대한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까지 추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편 불교는 교세를 유지 중이지만 승병들은 경인왜란과 을미동정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다.

규슈에 있던 몇몇 개항장들은 폐쇄했지만 쇄국정책을 펴는 것은 아니고 대신 오사카를 개항했으며, 천주교를 박해하고 있으므로 신교 국가인 영국, 네덜란드가 주 교역 대상이다. 해군은 재건되었지만 해적을 억제하는 수준의 연안해군이며 전선도 경인왜란 시대 수준의 왜선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다테 가는 양선도 상당수 건조했는데 막부의 해군금지령을 지켜서 형식적으로만 에도 막부가 소유하도록 하고 다테 가가 사용하고 있으며 남만, 미주까지도 직접 상선을 보내서 교역하고 있다. 군용 양선은 있기는 한데 극소수이다.

구주총관부를 제외한 일본 전역을 통일한 에도 막부는 대한과 적대할 의사는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경신대기근 때에는 쌀을 50만석 추가로 더 보내주는 등[106] 대한과 적극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3부 시기에는 구주총관부를 두고 일본과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설령 분쟁이 일어난다 해도, 구주총관부에 사는 왜인들은 천주교 박해 때문에 에도 막부를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대한에 충성심이 깊어 앞장서서 막부군과 맞서 싸울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외교적으로도 아모국과 유구국으로부터 오는 사신을 일본에 입조한 조공 사절로 선전하면서도 대한에서 오는 특사에게는 감히 뻥칠 엄두도 못낼 정도로 대한을 상대로는 일단 저자세로 나오고 있다. 이 덕분에 호에이 대지진이 터지자 대한에서 구호곡을 보내는 등 대기근 때 도움 받은 것을 갚으며 상부상조 하게 된다.

진서대장군부가 폐지될 때 허울뿐이던 일본국왕 작위는 엄밀히 말하면 에도 막부에게 양위된 것이 아니라 폐위되면서 사라진 것이기에 에도 막부는 일본국왕을 자칭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대한 등 외국에는 이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고 일본국왕위가 양위된 것으로 알려져서 정이대장군을 일본국왕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에는 왜국산 춘화가 밀수되어 유통중이라 하니 작중에서도 일본의 특기는 변하지 않은 듯.

평화가 한 세기 넘게 이어지자 무사들은 전공을 세워 출세할 길이 사라졌고 쥐꼬리만한 녹봉을 받으며 근근히 살아갈 수 밖에 없어졌다. 유일한 탈출구는 막부에 은 10냥과 두 번 다시 일본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내고 용병이 되어 떠나는 것.[107] 그래서 일본 용병들이 아시아 각지에 널리 퍼져서 마치 아시아의 스위스 용병처럼 되었다. 계미남변 때는 파병 온 일본군이 광동에서 고용한 일본 용병들과 싸우게 되었는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이런 칼솜씨로 어떻게 쇼군을 모시냐'며 애송이라고 조롱하고 싸우는 반면 일본군은 순간 동요해서, 지휘관들이 전국시대 때는 편이 갈리면 가족이라도 서로 싸웠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간신히 군을 다잡은 것을 보면 한 세기는 확실히 길었던 듯.

한일정상회담에서 합의되어 술루 술탄국을 평정 중인 대한군을 돕기 위해 막부 정규군이 파병된다. 유럽식으로 훈련받아 대한군에 버금가는 강병이며, 그 후 서나라 광동 반란 때도 막부 정규군이 대한군을 돕기 위해 파병되어 실전경험을 쌓고 서나라에게 무역 이권을 받아낸다.

2.5. 유구국

<colbgcolor=#695370><colcolor=#fff> 유구국
琉球國
국호 유구국(流球國)
위치 오키나와
수도 슈리(首里, 수리)
정치 체제 전제군주정
국성 상(尙)
국가원수 > 황제
연호 영락(永樂) (1710 ~ 1711)
천안(天安) (1712 ~ ?)
언어 유구어
민족 유구인
국교 유구 신토, 불교, 유교, 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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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에 매년 2회 세자나 왕자, 왕제가 입조하며 조공도 바치는 등 사실상 대한의 보호국이지만, 대한이 칭제하며 칭신을 요구하자 만약 대한에 칭신할 경우 대한에서 왕을 갈아치우는 등 내정에 간섭할까봐 두려워해 과거 함께 명의 번국이었고 조선을 형님으로 모셔왔다는 이유를 겉으로 내세워 공식적으로 대한의 번국이 되진 않았다. 대한 내에서도 이에 대해 괘씸하게 여기는 여론은 있으나 응징은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조공도 대한 수군이 유구에 주둔하여 지켜주는 보답으로 드리는 선공이라는 명목으로 바치고, 대한에서 따로 답례품을 받지는 않고 있다. 유구에서는 대한 수군의 저탄소를 유구에 설치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으나 대한 측에서 기술 유출과 비용이 많이 들것을 예상해 거부하고 있었지만, 재석이 주산진을 지키기 위해선 필요하다고 건의해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유구국 세자 쇼준이 재석과 만남에서 취중[111]에 밝힌 바로는, 칭신하게 될 경우 기존 왕실을 폐하고 대한 황족을 보내서 완전히 속국으로 삼을까 두려워서 거부하는 거라고 한다. 정식 신하국이 되면 칙서 한 장으로 왕실을 뒤흔들어 버릴 수 있는 게 무섭다는 듯. 물론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밀어버리려고 하면 저항도 못하는 건 마찬가지라 유구국은 최대한 대한에 굽신거리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 일본 이외에 청, 서, 서반아와도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건흥제가 된 재석은 한서전쟁 후, 남방항로 가운데 자리잡은 유구가 자립하거나 다른 세력에 넘어갈 경우 무력을 통해 병탄할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그럴 경우 일본과의 세력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하여 지켜보고 있었는데, 삼촌들을 제압하고 새로 왕위에 오른 쇼준의 아들 쇼에키가 1710년 갑자기 칭제건원을 선포하고 영락제를 칭한다. 대한과 일본에서는 유구가 외왕내제 상태에 머무르고 기존처럼 대한과 일본을 상국으로 받든다면 그냥 내버려두겠지만, 만약에 진짜 황제 놀음을 한다면 응징하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건흥제가 심왕 책봉식 때문에 청, 후금 황제들과 회맹하기로 하자 유구 영락제도 회맹에 참여하겠다고 한다. 막상 건흥제를 만난 영락제는 건흥제에게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리며 대한을 상국으로 받들 뜻에 변함이 없음을 밝히고 회맹에서도 대한의 충실한 지지자로 활동하나 귀국길에 폐렴에 걸려 1711년 12월 대한 안주에서 사망한다. 건흥제에게 유언으로 유구의 독립 보장과 태자의 안위를 부탁하여 건흥제는 영락제의 유언을 봐서라도 유구 병합은 포기하기로 결심한다.[112]

영락제의 세자가 천안제로 즉위한 후에도 친 대한 정책을 유지하되 자체 군사력이 육해군 합쳐 총병력이 겨우 2500명밖에 되지 않아 자체 군사력 확충을 위해 추가로 천여명을 징병하고 대한에서 2등 중선 2척을 구매하기로 한다. 또한 국민 통합을 위해 역사책인 유구전사 편찬사업을 실시하면서 유구의 시조인 천손씨가 대한, 일본, 중원의 시조보다 빠른 1만 8천 3백년 전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서술하여 국가적 자존심을 세우려 한다.

인구는 대략 30만.

2.6. 아모국

대한의 교역 대상으로 대한과 일본에 어비(생선으로 만든 비료)를 수출하는 것이 주 산업이다. 대한과 우호적이지만 을미동정 후에 중립국이라고 못박아놓은 탓에 대한과 일본 어느 나라에도 번국은 되지 않고 있으며 사절을 보내더라도 신하를 칭하지는 않는다. 인구는 대략 10만. 수도는 서해안에 있는 가장 큰 마을인 '오타올내'로 이곳에 매년 1회 부족장들이 모여 부족장회의를 하며, 이 회의에서 뽑힌 종신직 수령이 국왕인 '곰을 쏘는 자'를 맡는 일종의 귀족공화제 체제이다. 을미동정 후 초대 국왕 석탈왜가 10년간 통치하며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나 석탈왜 사후 다시 부족간의 암투로 인해 부족 연맹으로 퇴보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대한에 사절을 보낼 때는 조복을 입혀 보내고 일본에 사절을 보낼 때는 화복을 입혀 보낸다.

반 대한, 일본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미토 번에서는 아모국을 일본의 영토로 흡수하기 위해 일본인 이민을 장려하여 1732년에는 일본인 인구가 6만명에 달하게 되어, 장기적인 불안요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수확물의 절반을 지역 부족장에게 세금으로 바친다.

최근 외전에서 묘사된 1738년경 아모국의 상황을 보면 부족장들 간에도 일본인 이민이 늘어나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부족장들이 있지만 반면에 일본인이 늘어나면 세금도 늘어나는데 뭐가 문제냐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부족장들도 있어 의견 통합이 안되는데다 상비군 창설에 대해서도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부족장들이 많고, 국왕의 자격을 이름 그대로 곰을 이길수 있느냐 여부로 생각하는 등 정치적으로 단결이 전혀 되지 않아, 대한이 나서지 않는다면 결국 일본에게 흡수당할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황태손 이영도 아모국은 결국 일본에 흡수될 것이니 그 대신 대한은 유구를 번국으로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

2.7. 안남

2부 시절 재석이 여씨 왕조를 몰아내고 보위를 찬탈한 막씨 왕조에 대항해 싸우는 완씨 가문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이후 조선-대한은 완씨 가문과 동맹 관계에 있다. 이후 계속 완씨 가문에게 철재를 수출하고 쌀을 수입해오는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완씨는 조선의 지원을 받아 막씨를 몰아내고 다시 여씨 왕조를 복위시키는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곧이어 완씨의 동맹이었던 정씨 가문에서 여씨 왕가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장악한 뒤 완씨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조선, 유구와 함께 명의 조공국이었던 안남은 명이 멸망하면서 잠시 조공 책봉 체제에서 벗어난다. 이후 서와 후송이 건국된 뒤 서와 후송 각각에서 안남에 사신을 보내 칭신하기를 요구한다. 친한파인 완씨는 대한의 사례를 따라 둘 다 거절하고 칭제건원 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실권을 잡은 정씨 정권는 서에게 칭신하기로 결정하여 안남은 서의 제후국이 된다. 한편 후송은 완씨 세력과 접촉하여 안남을 자신들의 편으로 돌린 뒤 안남과 함께 서를 양면에서 협공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계미남변으로 대한이 동남아에도 손을 뻗치고, 서나라의 정치적 혼란이 예상되어 정씨 정권은 후송으로 편을 바꾸려 했으나, 예상과 달리 서나라가 군국제 도입으로 체제가 안정되면서 정씨 정권은 후송과 손을 끊고 계속 서에 입조하며, 이에 대항하는 완씨 정권은 후송을 버리고 대한에게 '안남국주'로 책봉받고 명목상의 번국이 된다.

정씨 가문이 다스리는 북하국과 완씨 가문이 다스리는 광남국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광남의 인구는 2백만이다.

2.8. 서반아령 필리핀 → 누손주

대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지만 재석은 태평양 패권을 위해 어떻게든 필리핀을 강탈할 계획을 갖고 있고, 대한에 악감정을 품은 신서반아 부왕대리 몬타네스 주교가 어그로를 끌어서 서반아와 대한의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서반아와의 보복전에서 대한이 승리한 이후 필리핀은 대한의 영역에 편입된다.

2.9. 술루 술탄국 → 술루국

스페인의 진출에 대항한 것처럼 대한의 지배도 받아들이지 않고 대항하고 있어 대한군(+지원받은 일본 정규군)과 계속 전투 중이다. 건흥제는 술루를 평정한다면 원주민들을 추방하고 다른 한인들에게 따돌림받는 가서인들을 사민하여 확고한 대한의 영토로 다지기로 하며, 신하들은 차제에 태황의 서장자인 비수후 디에고를 술루의 번왕으로 분봉하자고 주청한다. 1712년 디에고가 이끄는 대한군이 10살 남짓한 어린 술탄 아흐메드를 생포하여 멸망하고 디에고가 번왕으로 분봉되어 대한의 번국이 된다. 조홀국과는 달리 황자가 분봉되기 때문에 집정대신은 대한 조정에서 파견되며, 같은 이유로 군왕급인 다른 두 번국과 달리 친왕급이다. 술루 원주민들은 상당수 대한의 지배에 반발하여 갈로도(민다나오) 등 다른 무슬림 국가로 도망쳐버렸기 때문에 현재 인구는 한인 출신 가서인 3만, 대한의 지배에 순응한 원주민 2만으로 총 5만명, 약 1만호이며, 건흥제는 술루국을 천주교도들이 모여 사는 이상향으로 홍보하여 구주, 본토 천주교인들의 이민을 장려하기로 한다. 수도인 홀로는 디에고가 모친 이사벨의 이름을 따 라 이사벨라(이사변)으로 개칭했다. 동남아에서 유일한 천주교 국가이고 국왕 디에고부터 신앙심이 깊기 때문에 유럽인들에게도 이미지가 좋다.

* 영토
술루도에 수도 이사변을 두고 있으며 볼내도(乶乃島), 갈로도(葛盧島) 일부와 그 외 작은 섬을 영토로 한다.

2.10. 준가르

준가르(구 와라부)는 누르하치 시절의 건주와 동맹하여 할하부를 함께 멸망시켰고 이후 다시 건주와 적대관계가 된다. 이후 홍타이지에게 몽골 일대를 빼앗기고 그를 계승한 후금과 적대 관계이다.

본래 조선에게 화약을 수입했기에 우호적이었으나 중원 분열 후 서나라, 루스국과 우호 관계가 되어 중계무역으로 화약을 수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자 바로 대한을 배신한다. 주로 후금, 코슈트부와 적대 중이며 종종 대한까지도 약탈을 온다고 한다.

와라부의 일파였던 토르구트부는 북상하여 루스국의 속민인 칼미크족이 된다.

1718년 후금과 청이 제대로 준비한 합동공격에 참패하고 몽골족은 청과 후금에 항복, 군주인 체왕 랍탄은 오이라트족만 거느리고 서쪽으로 도망한다. 옛 감숙성 지역 전역이 청의 수중에 들어가고 알타이 산맥 동쪽이 후금의 수중에 들어간다.

그 후로는 청과 후금이 분위기 쇄신 및 흉년으로 인한 자원 약탈을 보충하기 위해 수시로 털어대는 맛집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서쪽으로 진출해 카자흐 지역을 정복하고 티베트 달라이 라마와 유착관계를 맺어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왕위 다툼에 패해 준가르를 떠난 세력 일부는 페르시아가 무굴 제국을 침략할때 용병으로 따라 들어갔다가 철수할때는 뒤에 남겨졌고, 기병 대응력이 부족한 현지 태수들에게 공포의 침략자로 군림하게 된다.

2.11. 천축국

이기빈 이후로 여전히 조선 공관이 상주 중이다. 이기빈이 천축국 공관에서 일하며 교역으로 번 돈, 자한기르에게 선물받은 돈, 해적질한 해적들에게서 뺏은 돈 등이 무려 은 천만냥이나 되어[113] 이기빈의 가문은 조선 최고의 부자 중 하나가 되었고, 그 후로 천축 공관은 모든 관리들이 가장 부임하고 싶어하는 인기있는 자리가 되었다. 하지만 성친왕에게 뇌물을 바쳤다가 건복제에게 찍힌 조기철이 부정축재한 재산을 몰수당하고 전가사변당한 뒤로는 천축 공관도 그렇게 대놓고 축재를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원역사와 동일하게 아우랑제브가 친이슬람 정책을 펼치며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다. 재석은 어차피 곧 망할 무굴 제국이니 무인지변에 가담한 군관 300여명 파천군이란 이름의 용병으로 보내서 그 혼란 속에서 한 몫 챙겨보기로 한다. 파천군[114] 은 도적떼와 군벌들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뒀으며 혼란에 빠진 천축 조정은 파천군의 활동을 방관한다.

아우랑제브 사후 거듭된 내란으로 파드샤가 계속 바뀌는 혼란 속에서 최후의 승자인 플루크시야르에게 골가타 총관이 용병을 보내주며 베팅한 게 맞아들어가 관세 면제 특권을 받는다. 그러나 플루크시야르도 막장 통치를 하다가 권신들에게 암살당하는 등 혼란이 지속되자 재석은 무굴 제국은 역사대로 망할 것이 분명해졌으니 벵골 지역만이라도 대한의 영향권 안에 확실히 넣기 위해 유능한 벵골 태수 무르쉬드 쿨리 칸과 동맹을 굳히라고 명한다.

1735년에 무굴 제국 대재상이 마라타 동맹과 잉글랜드의 결탁을 의심하여 잉글랜드 상관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가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와 전쟁이 터졌으며, 무굴군은 패배를 거듭하고 대재상이 전사한 끝에 1737년 잉글랜드에게 인도 서부지역의 징세권을 넘기며 현금 1천만 루피(대한 은 3백만냥에 해당)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내고 간신히 강화를 맺는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라타 동맹과의 전쟁에서 고전하는 데다,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암군 무함마드 샤가 페르시아 나디르 샤를 모욕하는 짓을 저질러 나디르 샤에게 원역사처럼 크게 털리고, 나디르 샤가 데려온 준가르 용병들에게 큰 피해를 입는다.

2.12. 조호르 술탄국 → 조홀국

오랜 평화를 누리다가 왕통이 단절되며 내전이 시작되어 혼란에 빠진다. 숙부들과의 내전에서 수세에 몰린 정명완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지만 해적단이 정착하는 것을 막지도 못할 정도.

재석은 정명완이 공위 상태의 조홀국왕위를 차지하도록 지원한 뒤 번국으로 삼아 인도양 항로 중계점으로 사용할 계획을 세웠고, 계해남변으로 내전이 길어졌지만 1712년 4월 정명완이 조호르 술탄을 잡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조홀국왕으로 책봉된다. 정명완은 상국인 대한에 해사도를 바치고, 화번공주로 건흥제의 당생질 의원공주를 하사받는다.

초기 인구는 20만이었으나 1723년 경에는 40만으로 증가한다. 구성원은 최하층민인 말레이 토인이 50%, 나머지 20만 중 10만이 상공업을 담당한 중국인, 나머지가 최상위층인 한인과 군인을 담당한 왜인 등이다. 정명완이 해적질을 할 때는 별로 관심 없었던 대남도의 정씨 본가가 건국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가문의 인재들도 많이 공급해줬기 때문에 사실상 동녕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정명완은 대한에 충성하면서도 내정에서는 대한 몰래 정지룡에게 고조, 부친 정경진에게 순종 묘호를 올리는 등 외왕내제를 하고 있다. 조홀국의 국력을 키우고 형제국인 술루국과 연합하여 아체 술탄국과 맞서왔으나, 지나치게 한인과 왜인을 우대하고 말레이 귀족들을 잔혹하게 숙청했으며 화교 상인들을 이용해놓고 배신하는 짓을 저질러 원한을 쌓아, 그가 1736년 죽자 마자 말레이계인 서장자 정주태가 말레이인들과 화교 상인들의 지원을 받아 세자 정주신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고 이에 정주신을 돕는 대한군과 술루군이 개입하는 내란이 발생한다. 새 왕 정주신은 이 기회에 조홀국 영내에서 말레이인의 씨를 말리려는 각오로 잔혹한 토벌전을 벌여 1737년 내란을 완전 진압한다.

내란 진압 후에는 내란으로 줄어든 인구 보충을 위해 대한의 허락을 얻고 영국 동인도회사와 계약하여 인도인과 파르시인들을 이민으로 받아들인다.

3. 대유주

장조 시기부터 교류가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비록 정기적인 견서사 파견은 중단되었지만 민간 상선에 의한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기에 전반적으로 대한과 어느 정도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다. 대한이 칭제건원을 했지만 여전히 대한 태황은 왕으로, 친왕이나 군왕, 번왕들은 대공으로 대우받는다. 대한 국왕을 부르는 고유명칭으로 '임금'이 정착하였다.

3.1. 도이치

유럽을 초토화시킨 30년 전쟁은 '유주대란'이라고 불리며 개신교는 천주교에 반대하는 종교라는 의미에서 '반주교'라고 불리고 있다. 신에 반대한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니 저쪽에서 들으면 불쾌할 만한 명칭. 유주대란 도중에 방문한 6차 견서사는 관전무관으로 황제군 측에 이괄과 군관 셋을 파견했고 이들은 발렌슈타인 밑에서 8년간 참전 없이 관전만 하다가 귀국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실은 북도이치 지역에서 신나게 약탈을 벌였다고 한다.

대유주에 대한이 친 천주교 국가로 알려져 있고 유주대란 당시 이괄이 벌인 약탈의 영향도 있어서 대한에 대한 정서가 좋지 않을 듯 하다.

3.2. 불랑국

대한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공예품, 시계, 책, 견직물을 대한에 수출하고 도자기, 차, 모피, 면직물, 견직물을 수입하는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루이 13세 시절인 1642년 견서사처럼 대한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5년간 머무르다 갔다. 대한의 행정 체계와 성리학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제도에 적용시킨 것은 없다고 한다.

3.3. 루스국 러시아 제국

대한에서는 루스국(壘戍國)이라고 부른다.

3.4. 폴수국

재석의 첩인 올렝카의 고국이고 재석이 방문하여 기병 전술을 훈련받고 제2차 빈 공방전에 참전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가긴 하지만 원역사와 달라진 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빈 전투 후 전리품 중 214,528 두카트를 재석이 챙겨가게 되었다는 정도. 해양진출을 적극적으로 하던 국가도 아니었고 머지않아 멸망하게 될 국가인만큼 대한과 별다른 상호 교류를 할 일이 없을 것이다.

폴수국 왕실도 종두를 맞는다고 하며 원역사에서는 4살에 요절한 공주 아델라이데 루드비케가 살아남긴 했지만 결혼하기 전에 죽고, 얀 3세 소비에스키 사후에 아우구스트 2세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를 물리치고 폴란드 왕이 되는 등 원 역사와 달라지지 않는 역사를 겪는다.

하지만 러시아 황후가 된 재석과 올렝카의 딸 루시아가 어머니 올렝카가 폴란드 왕실에서 받은 수모와 천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자신의 자식을 얀 3세의 외증손이라는 명목으로 폴란드 왕위에 앉힐 생각을 하고 있었고, 루시아의 딸 예카테리나와 형이 생존하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한 앙주 공작 루이(원 역사 루이 15세)가 혼인해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3.5. 수배국

재석 일행이 11개월간 머물렀다. 수배국은 대한과 교류도 거의 없고 반주교 국가라서 별 관심이 없기에 푸대접을 받았다고만 언급되고 통째로 스킵된다. 그 후 칼 12세가 보위에 올라 역사대로 대북방전쟁이 일어나나 대한이 숙련된 병사들과 다량의 총포를 루스국에 지원한 바람에 역사보다 더 크게 패하고 칼 12세도 역사대로 전사하고 만다.

3.6. 잉글국

3.7. 내달국

3.8. 서반아

재석이 빙의하기 이전의 성친왕이 방문했으나 재석 빙의 후에는 방문하지 않는다.

원역사와 동일하게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난 카를로스 2세가 통치하며 서서히 국력이 쇠한다. 카를로스 2세는 원역사와 동일하게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후계자로 지목한다.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원역사에서 1699년 천연두로 사망하는데, 작중에서는 대유주에 종두법이 보급되었기에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죽지 않고 호세 페르난도 1세로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는다. 때문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전개는 완전히 달라져서 스페인과 프랑스가 동맹이 되는 대신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동맹이 프랑스와 싸우는 형태로 일어난다. 프랑스는 실제로 스페인 왕위를 노리기보다는 스페인 영토를 점령해가는 전략을 펼친다.

재석은 어차피 서반아는 몰락할 것이니 불랑국 쪽으로 참전하여 필리핀을 도모할 구상을 하지만 명분이 없어 참전하지 못한다. 서반아 본국은 불랑국도 감당하기 버거웠기에 대한과 척질 생각이 없었는데, 광신도인 돈 후안 오르테가 몬타네스가 신서반아 부왕 대리를 맡으면서 필리핀의 한인 불법이민자들을 강제 개종 및 귀순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거부하는 자들을 학살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태황의 위패 등도 불타버리는 등의 일이 발생하자 대한에서는 서반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필리핀을 공격하는데 이 전쟁이 계미남변이다. 대한군은 개전 몇 주만에 마닐라를 함락시키고 서반아 함대는 바타비아로 퇴각한다. 재석은 전쟁을 필리핀만 얻는 것으로 빠르게 끝내려 했으나 공적을 탐하던 이홍권의 독단으로 대한 함대가 바타비아를 봉쇄하면서 잉글국, 내달국까지 서반아 쪽으로 참전하는 등 확전이 일어난다. 이후 전쟁이 지지부진하게 수 년을 끌자 서반아 당국을 압박하기 위해 미주에서도 신서반아를 침공하게 된다. 결국 궁지에 몰린 서반아는 대한에게 필리핀과 칼리포르니아 반도를 할양하고 종전한다.[127]

3.9. 돌궐국

이기빈의 모카 습격사건 이후로 78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대한과는 냉랭한 관계이다. 어차피 커피 자체 재배도 가능한 시점에 굳이 관계를 개선할 이유가 없으니 관계 개선을 시도하지 않은 듯. 그래도 전쟁까지 벌이는 사이는 아니다.

그러나 이기빈의 모카약탈부터 40년간 영해에서 대한 상선의 약탈과 제2차 빈 공방전에 대한 황제(皇弟) 성친왕이 참전해서 돌궐군 총대장 천막을 점령하고 러시아에 병기와 용병을 지원해주는 등 오랜기간 동안 골머리를 썩게 해 현돌궐은 대한과 평화 협정으로 관계 개선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한은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는 것을 도우려고 프랑스를 적성국 러시아에 붙여주려고 해 관계 개선은 요원하기만 하다.

하지만 마흐무트 1세가 즉위하여 1731년 사절단을 보내 장조 때 있었던 일에 서로 유감을 표하면서 관계가 정상화된다.

4. 대미주

4.1. 대한령 미주

3부 시작 시점에서의 미주 판도: 지도
하와이 복속 후 미주 판도: 지도
아파치 토벌 후 미주 판도: 지도
원미주 탐사 후 미주 판도: 지도
4.1.1. 북미주
원역사의 시애틀, 캐나다 연안.

인구의 약 25만. 상대적으로 이주가 적었기에 원주민 세력이 유지되고 있다. 신욱족( 치누크)이 이 지역에 있으며 조선제 무기로 여러 군소 부족들을 정복하여 강성해진다.

신욱족과 결혼동맹을 맺은 원씨 일가가 북미주 일대의 권세가이다.
4.1.2. 남미주
원역사의 캘리포니아 일대.

인구의 약 90만. 이주민이 많았기에 이 지역의 원주민인 미억족은 한인들이 옮긴 전염병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다. 때문에 미억족은 신욱족과 달리 대한에 감정이 좋지 않다. 반면 올로내족은 국경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대한으로부터 무기를 얻어 군소부족들을 복속시키고 세력을 키웠다.
4.1.3. 빙주
원역사의 알래스카.

인구는 소수. 내강상단이 세운 3곳의 포경 기지가 주요 산업이다. 빙주토인(이누이트)들이 고용되어 일하는데 별도의 급료 없이 내강상단이 비싼 기름과 수염을 챙겨가고 남는 고기와 철제 도구들을 급료로 받는다.
4.1.4. 중미주
원역사의 오리건 일대.

인구 약 5만. 을병대기근으로 이주민이 늘어나자 남북미주 사이의 미개발 지역을 중미주라 하여 개척하고 있다.
4.1.5. 서미주
원역사의 바하 칼리포르니아 반도 일대.

원래는 샌프란시스코 일대가 서미주고, 이쪽이 남미주라고 해야 적절한 명칭이지만, 이미 남미주가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가르키는 고유명사로 정착해 버린지라 이쪽이 서미주라고 불리고 있다.

4.2. 대한령 밖 미주

공식적 대한의 강역은 아니지만 대한령 미주에서 죄를 짓거나 빚을 지고 대평원으로 도망쳐 정착촌을 짓거나 원주민 종족에 합류한 한인들이 일부 있다. 대한에 복속했던 미억족을 약탈하는 아파치족을 원정으로 토벌했으며 그 과정에서 푸에블로 족과 우호관계가 된다. 이후 정호찬이 2년에 걸쳐 대평원을 돌며 원주민들을 회유하고 프랑스 식민지와도 접촉한다.

재석은 미주의 넓은 대평원을 영국/프랑스 식민지가 장악해서 미합중국같은 강대국이 생기는 것은 대한령 미주를 지키기 어렵게 될 것이기에 싫고, 반대로 대한령 미주가 대평원으로 확장하면 본국보다 강해진 대한령 미주가 독립하여 원역사의 미국처럼 본국을 압도하는 것도 싫은 딜레마에 빠진다.[130] 때문에 대평원 원주민들이 연합하여 아모국처럼 친한 성향의 국가를 세우도록 지원할 구상을 하며, 정호찬이 모아온 대평원 원주민 부족들의 사자들에게 환독을 풀어 동질성을 주입시킨다. 하지만 제대로 진행되기 전에 재석이 귀국하고, 재석이 건흥제로 즉위한 후에도 대평원 원주민들이 절대로 뭉치지 않는 바람에 재석도 결국 원주민 국가 건설은 포기하고 그나마 영토에 대한 야욕이 덜한 프랑스 식민지가 계속 남아서 영국 식민지(미국)을 견제할 수 있도록 프랑스를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4.3. 서반아령 신서반아

본국인 서반아가 대한과 우호관계였기 때문에 대한령 미주와 충돌 없이 우호적으로 지냈다. 대한에서 남는 곡식을 정기적으로 누에바 에스파냐에 수출하고 있었을 정도. 부왕 대리를 잠시 맡았던 돈 후안 몬타네스가 대한 측에 식량 수출을 거부하고 무례한 서한을 보내는 사건도 있었지만 후임자가 잘 수습하여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몬타네스 주교가 다시 부왕 대리를 맡아 필리핀 도독령에 한인 불법체류자를 개종, 편입하고 저항하면 토벌하라는 지침을 내리는 바람에, 대한의 어그로를 끌게 되어 미래가 어둡다. 결국 한서전쟁(계미남변)에 패배하여 파나마까지 대한군에게 털리고 바하 칼리포르니아 반도를 대한에게 뺏긴다.

4.4. 프랑스령 누벨프랑스

처음에는 원주민이나 대한령 미주와의 교역에 중점을 두었으나, 유럽에서 전운이 짙어지면서 1726년부터 장기 근무 중인 총독 보하르누아 후작이 미시시피 강 유역을 확고히 차지하고 농토를 개척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부족한 인구는 대한령 미주에서 건너오는 한인들로 채울 예정이나, 그 중 상당수가 장길산 일당이 프랑스 교역상들과 짜고 납치해온 노예들로 구성되어 추후 갈등의 소지가 있다. 결국 1739년 장길산이 토벌되면서 대한과 국경을 확정한다.

4.5. 영국령 13개 식민지

대한령 미주와는 아직 직접적인 접촉은 없으나, 원역사처럼 미합중국을 세워 대한의 패권을 방해할까봐 건흥제는 무척 경계하고 있다.

4.6. 하와국

하와이 왕국. 8개의 섬을 모두 합친 하와이 제도는 하와이라고 불리며, 각각의 섬은 하와도(하와이, 빅 아일랜드), 마우도(마우이), 가홀도(카호올라웨), 몰로도(몰로카이), 라나도(라나이), 오아도(오아후), 가와도(카우아이), 니하도(니하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재석이 동변관리사 시절 태평양 패권 유지를 위해 지원자들을 모아 원정대를 구성해서 발견, 정복한다. 와이아케아 추장 마우이와 처음 접촉한 것을 시작으로 섬 전체의 족장들에게 형식적으로 복속 서약을 받는다. 이후 재석이 떠난 뒤 마우이 추장은 남겨진 원정대원들의 도움으로 당시 하와이 여왕이던 케아케알라니와히네를 몰아내고 유력자인 쿠아후이아도 처치한 뒤 그의 딸과 정략결혼하며 하와이의 통일을 이룬다.

이후 본국에서 건복제의 칙사가 도착해 마우이를 공식적으로 하와이 군왕으로 책봉하고 휘하 6개 부족장에게 세습 공작위[131]를 내린다. 이로써 하와국은 칭제건원한 대한의 첫번째 번국이 되었다.

마우이 왕은 사조룡이 수놓아진 녹색 곤룡포를 입고 조정 대신들은 단령을 입고 옥대, 금귀고리를 착용하는 등 대한의 복식 문화도 전파된다. 하와도의 더운 날씨 때문에 곤룡포, 단령 등 관복은 모두 반팔, 반바지에 얇은 천으로 짓는다.

인구는 약 20만이었으나 1704년 역병이 퍼져 17만으로 감소한다.

독자들 사이에선 상당히 인기가 많은 세력이다. 하와국 왕가는 식민제국을 상대로 역으로 사기를 처 권력을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짓을 성공시켰고 이후로도 여러모로 흥미로운 행보를 보였기에 독자들에게는 후송과 함께 3부의 아이돌 취급을 받고 있다.

5. 대상주

5.1. 마다가스카르

6. 오세아니아

6.1. 신홀란도

대한이 필리핀을 정복하고 조호르와 술루까지 영유하자 이에 자극받은 영국이 네덜란드인들이 발견한 호주 서북부 신홀란도 지역에 식민지를 세우고 본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코바이트 무리들을 유배보내 개척하게 한다. 호주 개척이 실제 역사보다 70년 앞당겨진 셈이나 실제 역사에서 개척이 시작된 동남부 해안지대와 달리 서북부 지역은 환경이 척박하여 영국 본국의 지원이 끊기면 자립이 불가능하여 대한에 큰 위협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총독은 코밤 자작이며, 수도는 오늘날의 다윈 시인 조지타운이다.


[1] 다만 현실에서도 선대왕이 정치적인 이유로 개종한 나이롱 신자였으나 그 후손 왕이 독실한 신자가 되는 경우가 꽤 많았으므로 후금도 시간이 더 지나면 독실한 천주교 대칸이 등장해서 종교색이 짙어질 수도 있다. [2] 되놈이 맞는 표현이고, 떼놈이 주로 쓰이는 멸칭이지만 작중에서는 때가 많다고 때놈이라고 [3] 촉한, 조위, 손오 삼국이 서로의 군주를 촉주, 위주, 오주라고 부르던 것 처럼 대한에서는 공식적으로 '송나라 주인'이라는 의미로 송주(宋主)라고만 부르고 있으며, 그마저도 과분하다는 여론이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후송 태조 조승복이 소금 잠상을 한 것에 착안해서 아예 '소금 장수 집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건 대한 태황이 직접 부르는 멸칭이다. [4] 사실 굳이 심왕을 부활시킬 절박한 이유가 없는데 심왕이 부활한 것으로 볼때 4부에서 재석이 빙의할 대상이 심왕이고 대한, 청, 후금 3국을 통합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독자들의 추측이 있었다. [5] 흑룡강 이북 외만주 [6] 레나 강 이동 이르쿠츠크 주, 극동 연방관구 [7] 워싱턴 주, 브리티시 컬럼비아 [8] 네바다, 유타 주 [9] 累蓀, 구 남변 [10] 황제가 아니라 태황이라고 칭한 것을 보면 2부에서 발견한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밝혀진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즉, 대한 태황은 고구려 태왕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셈. 그렇지만 '태황'이란 칭호가 중국과 무관한 것은 아닌데, 진나라 왕 영정이 진나라 군주의 칭호를 왕보다 더욱 높이려고 할 때 '황제'뿐만 아니라 '태황'이란 칭호도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11] 처음에는 태황비라는 호칭도 혼용하는것으로 설명되었는데, 비(妃)는 제후왕 부인의 호칭이고 천자의 부인의 호칭은 후(后)라는 독자 지적에 태황비 호칭은 황후로 수정하며 폐기된 듯. [12] 사실 창업군주나 추존이 아니면서 조 묘호를 받으려면 원역사의 영락제나 강희제 정도의 업적을 쌓아야 한다. 이는 본작의 대한이 이미 묘호를 쓰던 국가가 칭제한, 동아시아를 통틀어 매우 희귀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저 '조' 붙은 추존 황제들이 말 그대로 추존된 명예 황제들이기 때문에 후대 군주들은 그냥 기존 법칙대로 '종'을 쓰는데 아무 부담이 없지만, 대한의 저 추존 태황들은 실제로 즉위해 통치한 군주였고 실질적으로도 대한은 대내외적으로 조선의 국체가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 '종'을 쓰는것이 사실상 격하로 받아들여지기 쉬운 상황이다. [13] 암군의 재목은 주인공 재석에게 몸을 빼앗긴다. [14] 작가의 말에 의하면 내각승상 직속으로 잡다한 행정사무를 맡는, 현대의 국무조정실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15] 3부 시점에서는 육군과 수군 사이의 인적 교류가 드물기 때문. 소총, 야포, 검, 흉갑과 투구등을 만드는 군기시와 의무병역제도로 들어오는 병력, 전시에 거국적으로 동원될 예비병력, 목장 등은 해군이 관여할 일이 별로 없지만 전시에 동원될 수운 및 민간선박, 조선소는 육군이 관여할 일이 별로 없다. [16] 사르후 전투에서 얻은 영락군에 주변 지역을 편입시켜 승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17] 남미주는 캘리포니아, 북미주는 시애틀 지역. 아직 로키 산맥은 넘지 못했다고 한다. [18] 명 멸망 후 건주에서 할양되었다. [19] 대외적인 명분은 주산군도는 한때 상국이었던 명의 영토인데 주인이 사라졌다고 낼름 집어먹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지만, 영토로 편입하고 싶었다면 명 황실을 계승하는 대명공을 내세워 명분을 확보하면 그만이다. 그저 실리 때문에 그냥 두는 게 이득이라 안 할 뿐. [20] 510만에 달하는 북방 5주(부여주/연해주/속말주/요동주/영락주) 인구가 대부분이고, 미주와 북구주는 도합 107만 정도이며, 대남도 인구는 대략 210만 즈음이다. [21] 부친이 내강상단 도방이었기에 가능했다. [22] 백면나인은 백인 궁녀를 부르는 명칭이었지만 이들 대부분이 슬라브계였던 관계로 결국 슬라브족 여성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변했다. [23] 조선 여인들이 백인 남자들의 큰 양물에 혹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혼혈 사생아를 낳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 경우 여인과 이런 혼혈 사생아들은 버려진다고 한다. 딱히 인종적인 차별이 아니라, 불륜 행위와 사생아에 대해서만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별 다른 차별없이 살고 있다. [24] 이들은 태자가 혼인할 때 금혼령도 받아들이고, 간택단자도 낸다. 다만 네덜란드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확고히 지키고 이에 응하지 않고 있는데, 송시열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나 장조대제가 허용한 것이라며 3부 들어서도 특례를 인정 받았다. [25] 재석이 이에 대해 궁금해서 내각승상이었던 김세룡에게 물어보니, 영국계는 2부의 월터 롤리가 지원자를 아무나 모집해서 데려왔으니 정체성을 오래 유지할 리 없지 않겠냐고 답했다. [26] 불구, 바보, 과거급제자, 3대 독자 등. [27] 군대 밥과 잠자리가 맘에 안 든다는 이유만으로도 [28] 건흥제가 성친왕 시절 부터 사선으로 갖고 있던 동현을 기반으로 제작된다. 동현은 성친왕에 빙의한 재석이 여차하면 해적질이라도 하기 위해서 1,200톤급 선체에 화력을 처발라 24파운드 포를 40문 탑재 USS 컨스티튜션?? 과무장 슈퍼 프리깃이고, 이를 약간 다운사이징 해서 만드는 5등 대선은 1,000톤급에 24파운드 포를 20문 이상 탑재하여 화력은 영국 60문 전열함과 대등하다. [29] 재석과 상희는 현대의 기억을 떠올려서 수포대장이 이끄는 수포청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는데, 시중에서는 포청에 대응해서 포청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 [30] 처음에는 어사대라고 등장했으나 나중에 작가가 기관명칭은 감찰원이고 수장이 어사대장이라고 설정을 변경한다. [31] 말이 훈련이지 도박성의 유흥에 가깝다. 이런 건 실제 서부개척시대 미국 민병대도 똑같았다. [32] 미주 이민 1세대가 장조 시대 온갖 전란을 거친 도감군의 베테랑 퇴역병들인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 한 부분. 역설적으로 그만큼 미주는 평화로운 지역이라 할 수 있다. [33] 아무래도 고려시대 장수라는 점이 고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4] 견서사는 중단되었지만 그 목표였던 현지 주재원들을 통해 서양과 교류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퇴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35] 공교롭게도 삼군부를 현대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에 빗대어 보면 전제군주국가라서 중요성이 클 수도방위사령관이 포함되고 작중 시대에서 없는 공군참모총장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잠재적인 적국을 견제하는 최정예 육군 병력을 지휘하는 대한북병사는 지상작전사령관에, 후방 육군 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지방군을 지휘하는 대한남병사는 제2작전사령관에, 대한수군통제사는 해군참모총장에 대응된다. [36] 스페인 총독은 애꿎은 중국인들을 학살하여 분풀이를 한다. [37] 연재일인 2021년 1월 9일은 토요일이므로 그 전날인 1월 8일 기준 은 시세는 트로이온스(31.1034768 g) 당 24.58달러, 환율은 매매기준율 기준 1,092원으로 대한통보 1냥(37.5 g)은 30,743.3원이다. [38] 원은 추후 금화를 발행할 때 단위로 쓰기 위해 남겨둔다. [39] 대유주와는 문화가 다르기에 태황의 얼굴을 새기지는 않았다. [40] 다른 이름들 후보로는 고려때 쓰던 동국통보, 해동통보, 그리고 나라가 세졌더니 스케일도 커졌는지 천하통보도 있었으나,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것은 대한통보와 건흥통보였고 태황이 바뀔 때마다 화폐 이름을 바꿀 수는 없다며 대한통보로 결정된다. [41] 나중에는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조폐기를 만들 계획이지만 아직은 수작업으로도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42] 후금 역시 루스와 맞닿는 만큼 충돌이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왕래가 힘든 만큼, 대한 측에 이 문제를 맡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43] 사실 마음만 먹으면 점령하는 게 어렵지 않으나, 어차피 대한에서 원한 것은 황제국에 어울리는 조공국이나 번국이지, 새로운 영토는 아니다. 더구나 대기근 시기에 재정이 빠듯한 상황에서 섬 몇 개 먹자고 군대를 움직이고, 주변국을 긴장시키며 자극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44] 실제 역사에서 서울 인구가 70만을 돌파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의 일이다. [45] 그레고리력은 양력. [46] 명군 세계관에서 기상현상은 실제 역사와 동일하다. [47] 역사를 어렴풋이 알고 있던 재석은 2부 장조 시절에 경신대기근이라는 대기근으로 조선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경술년 신해년에 일어난 것이 아닌 경신년에 일어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장조 사망 시점에서 너무 먼 미래라서 잊혀질거라는 생각이 든 재석은 예언 같은거 안 하기로 결정했고 결과적으로는 실수 예언을 피하게 되었다. [48] 근데 실제로 "경신"이라 예언을 했으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예언의 특성상 후일 "아아! 그 경신이라 함은 경신년이 아니라 경술년과 신해년을 뜻하는 것이었구나!"라는 식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49] 30년이 넘도록 기근이 이어졌으니 장조 대까지 쌓아놓은 보와 저수지도 거의 다 말라버렸을 것이고, 감자와 옥수수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나마 장조의 유언과 잘 정비된 국가 시스템, 여러 구황 작물과 식민지들, 타국과의 식량 교역 등을 통해 원역사보다 훨씬 더 양호하게 해결했다. 원역사의 조선에서는 경신대기근이 진행되는 2년 만에 100만 명이 아사했다. [50] 태황의 와병은 발표하지 않지만, 대리청정 사실은 보도되므로 행간을 읽을 줄 알면 태황이 와병 중이라는 걸 눈치챈다. [51] 큰 틀에선 맞지만 세부사항은 틀린데다가 성친왕의 활약을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수준으로 묘사했지만 지방에서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지라 손을 못 쓰고 있다. [52] 재석은 경제적 이유 외에도 선조가 알라르콘에게 인간 평등 사상을 교육받은 영향도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53] 실제 조선에는 외지부라는 변호사 비슷한 이들이 존재했다. 다만 조정에서는 이들이 수령의 권한인 사법판결에 개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지속적으로 탄압했고 결국 근대에 서양 사법체계를 도입하기 전까지 제도화되지는 못했다. [54] 다만 예왕의 책사 최신원은 사지가 먼저 잘리고 목이 잘린다. [55] 유럽도 마녀사냥을 하면서 온갖 고문을 다 자행하고 화형은 물론 수레바퀴형에 거열형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지만, "죄수를 심문하고 처벌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지, 전쟁포로를 이런 식으로 처형하지는 않았다. [56] 어떤 놈들이었는지 알고 싶으면 갱스 오브 뉴욕을 보도록 하자. 불 끄러 왔으면서 경쟁업체와 마주치니 살수마차는 놔둔 채 패싸움을 벌이는 등 조폭이 따로 없다. [57] 삼대독자, 과거 급제자, 딱 보면 알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경우 등. [58] 2부에서는 전국에서 2개의 탄광만으로 석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있었다. [59] 실제 역사에서도 미국인들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수정된 공연을 더 좋아했고 원본을 보고 싶어하는 이들과 훌리건마냥 다투기도 했다. [60] 2부 시절에는 백면나인들이 모두 궁녀들이었기에 중전이 소유한 정도극단에서만 백면나인 배우를 쓸 수 있었다. [61] 당장 돈이 된다고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담배를 심으면 식량생산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 [62] 일반 곡식을 재배하는 논밭의 거의 5배 이상. [63] 현실의 그림과는 이름만 같은 다른 그림. 말년의 이혼 추기경의 도포와 갓을 입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64] 사씨남정기는 쓰지 않았다. [65] 재석이 빈 전투에 참전한 이유는 차르니에츠키의 도발 때문이 가장 컸지만 본국에는 그렇게 알려진다. [66] 재석은 이걸로 거위 무종계를 만들어 먹는다. 왜 닭이 아니라 거위로 했냐면 이 동네는 닭도 맛없어서 그랬다고. [67] 실존인물로 영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 위그노 과학자. [68] 해당 회차 연재일인 2021년 1월 5일 기준 은 시세는 트로이온스(31.1034768 g) 당 27.57달러, 환율은 매매기준율 기준 1,089원으로 은 1냥(37.5 g)은 36,198.2원이다. [69] 재석이 만든 무종계가 포함된. [70] 과자, 과일, 포가 차려졌다. [71] 피를 붉게 하는 것이 그 안에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어떻게 해도 관찰할 수 없어 피와 비슷한 정도로 짠 소금물을 이용해 희석해서 관찰에 성공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생리식염수로 이어질 수도 있다. [72] 바이러스 프리온은 광학현미경으로는 관찰이 불가능하고, 박테리아도 염색하지 않으면 관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본래 이질균도 염색을 해야 관찰되나 김인황의 시력이 매우 좋아 염색하지 않고도 이질균을 관찰하는데 성공했다는 설정이라고 작가가 설명했다. 물론 박테리아든 바이러스든 병원체가 원인이 아닌 병도 많다. [73] 언급은 없지만, 비슷한 시기 증기기관 개발과 개량은 유럽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이쪽은 아직 실험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대한에서는 민간에서 산업용으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로 앞서 가고 있는 상태. 더구나 증기기관의 활용에는 시장의 확대, 노예제도 폐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산업혁명 초기만 해도 증기기관에 대해서 불티를 날려 화재를 유발한다는 둥, 악마의 기계라는 둥 좋지 않은 편견이 꽤 많았다. [74] 석탄 수송거리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북구주-나하, 제주-나하 항행거리는 벽란도-옌타이 항행거리의 2배에 달한다. [75] 이 때문에 제3공화국 시절부터 대대적인 녹화사업을 벌여야 했다. 산림청이 한때 내무부 직할로 편제되어 있었던 것은 그 흔적이다. 결과는 21세기 현재는 민둥산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대성공. [76] 진짜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안 된다. 석탄의 문제점은 이산화탄소뿐 아니라 태울 때 나오는 유독물질도 있고, 이 유독물질이야말로 훨씬 더 즉각적이고 치명적인 기후 변화를 주는 데다가 얘는 나무가 처리하지 못하는 문제라서... [77] 이 동물들은 전통적으로 장수의 상징이기에 인기가 많을 만하다. [78] 실제로 홍제까지 철도를 놓으려면 무악재의 경사도가 철도에서 급경사로 치는 30퍼밀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약 37퍼밀) 1700년대의 증기기관차로는 어림도 없고 독립문 쪽으로 1km 가까운 터널을 뚫어야 한다. 철도마차 정도의 자본력으로는 부설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79] 야생 칠면조는 미국 서부 해안 일대에는 살지 않는다 [80] 덩치가 커서 백숙을 한다고 해도 닭보다 더 오래 끓여야 한다. 더구나 칠면조는 삶으면 질겨져서 맛이 별로다. [81] 불교도가 대부분 서민들인 대한과 달리 일본에서는 고위층도 불교를 많이 믿으니 당연히 이쪽이 더 수익성이 좋을 수밖에 없다. [82] 몇몇 독자들은 철근 콘크리트가 없던 시절에 석조건축이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최소형태로) 10층을 넘겨버리면 1층이나 기단석에 암석의 장력을 초월한 하중이 걸리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나, 이 탑은 사람이 거주하는 형태가 아니라 중세 고딕 성당의 첨탑처럼 잠깐 올라갔다 내려오는 정도의 탑이므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쾰른 대성당 첨탑 높이가 157.38 m이다. [83] 물론 재석의 사유재산을 침범했기 때문만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 아파치족이 대한령 미주의 번호인 미억족을 약탈하고 한인들까지 위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84] 그 중 482명은 융통성 없는 남대문 수문장이 성문을 뒤늦게 개방해서 남대문으로 탈출하려던 중 발생한 압사자다. [85] 그래서 예왕이 난을 준비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86] 형구들도 다 불에 타서 추국을 시작하기 전에 새로 만들어야 했다. [87] 죄인들을 가둘 곳이 없어서 난의 수뇌부는 경복궁에 마련된 추국청, 병사들은 원각사 터에 임시로 수용해야 했다. [88] 2부에서 재석이 대남도 초대 관찰사가 된 정일한의 후손이 뒤늦게 자신이 왕족임을 알고 반란을 일으켜서 한양이 불바다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그 형태는 달랐지만 반란도 한양 불바다도 실제로 일어났다. 북만주 전선에서 소련과 전쟁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89] 그 중 60명은 성친왕저를 지키던 외금위 병력으로 성친왕저를 끝까지 지키다가 전멸한다. [90] 전사자의 대부분인 800여명 이상은 반군이 와해될 때 남대문으로 퇴각하다가 압사당했다. [91] 6명은 성친왕저에 고용된 하인, 29명은 성친왕저에 피난 중이던 이재민. 5명은 동촌 화재로 사망한 민간인. 사망자 중에는 보리스의 아내도 있다. [92] 대신 부관참시 당했다. [93] 현재 캐나다 시간 기준 1월 26일 21:00 발생. 작중 대한 영토 내부에서 날짜 변경선 적용하지 않고 한양 기준 시간대로 시차만 적용하면 하루 늦어짐. [94] 피해는 대한 해군이 더 컸지만 영란 연합함대가 먼저 철수하였다. [95] 실제 역사에서는 미야모토 무사시 사사키 코지로의 결투가 열렸던 간류지마이다. [96] 양측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양측의 개별 플레이를 명이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97] 사실 청도 내륙 민란을 진압할 정도는 되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한에 원병을 청하는 것이다. 물론 해군이 없는 등 국가 자체가 후송에 비해 손색이 있긴 했지만 이후 대한의 지원을 얻어 수군을 창설했다. [98] 원래 상해, 항주만 개항하기로 했다가 후송 측의 요청으로 복주가 추가되었다. [99] #1, #2, #3, #4, #5. [100] 그러나 대한에서는 강한 상비군이 있기 때문에 건주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다. [101] 대한에게는 약한 척을 해서 자신들의 상국이라는 위신을 세워주고 청의 한인들에게는 대한과 청이 돈독한 동맹관계라는 것을 과시하여 반란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도로 추정된다. 대한에서도 이 반란 토벌전이 전쟁을 거의 겪지 않는 대한군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대규모 육상전이라서 대한군의 실전 감각 유지에 도움이 되는데다가, 이에 따른 보상도 주기 때문에 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102] 정치적 이유 말고도 경제적 이유도 있어보이는데 기본적으로 정주국가인 청나라는 운용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 기병부대가 주력이다. 그런데 한 척마다의 가격이 매우 비싼 배를 굴려야하고 수병들의 숙련도가 중요한 수군을 키우려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 [103] 이들을 험하게 다뤘다가 청 조정이 한족들에게 민심을 잃는 것도 곤란하다. [104] 건주 여진이 원래 살던 남만주는 삼림지대로, 초원에서 육성된 몽골 기병과 달리 숲에서 사냥으로 육성된다. [105] 몽골인들은 후금의 황자들인 부수, 파포태, 나십, 러시아 태자 알렉세이, 대한의 부마 박문수가 이 전투에서 싸웠다 하여 '타반 노요니 툴란'(다섯 황자의 싸움)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106] 일본도 1674~1675년에 엔포 대기근을 겪었고 당시는 전세계가 소빙하기를 겪는 와중이었으므로 일본이라고 식량사정이 좋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이미 장조 시절 경인왜란과 을미동정 때 호되게 당하고 힘의 차이를 확인한 에도 막부로서는 막강한 군사력의 이웃 국가가 대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니, 눈이 돌아간 대한군에게 일본이 약탈당하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없는 살림에서라도 미리 숙이고 들어갔을 것이다. [107] 2부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양응룡의 난 때 참전한 용병들에 대해서 평화가 싫으면 나라 밖에서 싸우다 죽어버리라고 냉소적으로 생각하는데, 이를 후대에 정책화 한 것으로 보인다. [108] 회담이 북구주에서 열린 이유는 북구주는 대한이 점유한 영토지만 명목상 일본의 영토이기도 하기에 양측의 위신이 모두 손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북구주 중에서도 후나지마 섬에서 만난 이유는 내륙에서 회담을 열었다가 쇼군이 원한을 품은 천주교도에게 피습당할 우려가 있어 민간인이 없는 군사요새인 후나지마 섬에서 개최한 것이다. [109] 기존 해삼위, 동래, 박다(하카타), 오사카, 센다이 5곳 중 센다이를 제외하고 비공식으로 사용하던 지선성, 덕진성 2곳과 추가로 히로시마, 장기(나가사키), 소창(고쿠라), 제물포 4곳이 추가로 개항 했다. [110] 타 고산케는 막부의 주요 도시인 교토, 오사카, 에도의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반면 히로시마번은 대한과의 외교를 전담시키기 위해 만들었다. 이전의 대마도주와 비슷한 포지션. [111] 진짜 취해서인지, 취한척 하면서 속내를 드러낸 것인지는 불명 [112] 꼭 영락제가 가엾어서라기보다는 이 상황에서 대한이 유구를 병합하러 나선다면 3.1 운동처럼 유구 황제를 대한이 독살했다는 오해를 사기 딱 좋고, 유구인들이 대대적 저항에 나서고 후송을 끌어들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113] 실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소문은 그렇게 났다. [114] 빈손으로 전역해야 할 병사들 중에서도 자원을 받아서 총 1000여명 규모 [115] 명의 번국이던 2부 시절에는 황제는 오직 중원의 천자 뿐이라며 황제로 칭하는데 거부감이 있어 카이저라고 음차해서 불렀으나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칭제하며 대한으로 바뀐 3부 시점에는 그럴 이유가 없어 그냥 황제로 부르게 되었다. [116] 잉글국과 동군연합이라 그래도 나라 취급인 숙호국과 달리 아란도는 나라도 아닌 잉글국의 지방으로 간주한다. [117] 엄밀히 말하면 천연두로 죽은게 아니라 피를 몇 리터씩 흘리게 하는 엉터리 사혈치료로 죽었다. [118] 안타깝게도 이런 주장이 현실에도 있다. [119] 원래 동아시아인이 황인 중에 가장 피부가 흰 편으로 남유럽 백인과 비슷한 정도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북방계인 예맥이 원류 중 하나이기 때문에 중국인, 일본인에 비해서도 체격이 크고 피부가 흰 편이다. [120] 실제 역사에서는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을 일으킨 오페르트가 유럽에 조선인은 백인 후손이라는 썰을 퍼트렸다. [121] 파스타를 먹던 이탈리아에서는 3부 이전부터 이미 포크를 잘 쓰고 있었으나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는 포크의 존재를 알고도 쓰지 않았다. 포크가 빨리 보급되지 않은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거나 이탈리아 놈들이나 쓰는 것이라는 문화적인 거부감이 주된 이유였는데, 작중에서는 조선산 고급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포크와 달리 창숟가락 사용은 세련된 것으로 여겨져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2] 당시 루스 차르국은 이미 차르를 자칭하고 있었지만 워낙 유럽에서 쩌리 국가인지라 다른 유럽국가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그냥 모스크바 대공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한에서는 그것도 아니고 그냥 도적떼 수령처럼 여기는 것. 순박한 원주민들을 수탈하고 여자들은 성노예로 삼고 있고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발전 수준이 떨어지니 조선인들 입장에선 천하의 개쌍놈들에 야만인들로 보일 만도 하다. [123] 현재 56세다. [124] 그러나 원역사의 스타니스와프는 재석의 생각과는 달리 88세까지 장수하였으며 심지어 사인은 사고사였다. [125] 실제로 셰익스피어는 작품의 고증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클레오파트라가 당구를 치는 등 고증을 따지면 설명이 안 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사실 이 세계관에선 동양과 교류가 많이 이뤄진 편이지만 실제 역사에서 당시 유럽인들의 동방에 대한 이미지는 아랍 풍습이 고작이기도 했다. [126] 실제 역사에서도, 미분 계산을 처음 확립한 사람은 피에르 드 페르마였고, 적분 계산을 처음 확립한 사람은 요하네스 케플러였지만, 이들 계산법의 실제 증명 뉴턴 라이프니츠가 했다. [127] 필리핀은 단순히 할양받은 것이지만 칼리포르니아는 구매하는 형식으로 획득한다. [128] 화약과 종이와 소금은 전근대에는 국가 전매 품목으로 삼는 일이 흔했을 정도로 노동집약적인 제조품이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사초마저 물에 씻어 재활용했을 정도로 전근대의 종이는 간단한 물건이 아니었다. 인구 100만명도 채 못 채운 미주에서 원주민 부족 말고 딱히 적국도 없는데 화약의 수요가 있을리도 없고. 수렵은 활로 하는 건가 [129] 재석이 주도한 아파치 토벌 작전 때 포로가 된 아파치에게도 다리 절단 수술을 집도해서 살려줄 정도이다. 고마워하기는 커녕 전사가 될 수 없게 했다며 증오하지만... [130] 물론 현실의 미국과 영국처럼 모국과 우호적인 초강대국이 탄생할 수도 있지만, 이건 영국이 미국에 개길 정도의 국력이 전혀 안되는 것도 있거니와 미국 입장에서도 영국이 오대양 육대주에 걸쳐 구축해놓은 막대한 인적, 문화적 네트워크(특히 파이브 아이즈로 대표되는 앵글로색슨 운명공동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모국과 식민지의 힘이 엇비슷하면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 제국처럼 툭탁거리는 사이가 될 수도 있고, 실제 미국과 영국도 독립 후 반세기가 지나 또다시 미영전쟁이라는 개싸움판을 벌인 적이 있었다. 수십년간 왕노릇을 하며 조선-대한을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하게 된 재석은 대한의 강역이 줄어드는 것을 꺼리고 있다. [131] 8개의 섬 중 가홀도는 인구가 적어 마우공의 영지로 취급했다. [132] 실제 역사의 상수시 궁전과 같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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