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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96년 10월 17일 | ||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 |||
사망 | 1763년 10월 5일 (향년 66세) | ||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 |||
재위기간 | 작센 선제후 | ||
1733년 2월 1일 ~ 1763년 10월 5일 | |||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 |||
1733년 10월 5일 ~ 1763년 10월 5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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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가문 | 베틴 가문 | |
아버지 | 아우구스트 2세 | ||
어머니 |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 ||
배우자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1](1719년 결혼 / 1757년 사망) | ||
자녀 |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마리아 아말리아[2], 마리아 마르가레타, 마리아 안나[3], 프란츠 크사버, 마리아 요제파[4], 카를[5],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알베르트 카지미어[6],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7], 마리아 쿠니군데 | ||
종교 | 기독교 ( 루터교회 → 로마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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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이 되었으나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방치해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망국으로 빠져드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암군이었다.[8] 작센 선제후로서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이다.2. 생애
2.1. 초기 경력
1696년 10월 17일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이고, 어머니는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 크리스티안 에른스트의 맏딸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랑켄계 방계 출신이었다. 그는 아우구스트 2세가 낳은 수많은 자식들[9] 중 유일한 적자였다. 출생 후 수년간은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나중에는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국왕 프레데리크 3세의 딸인 할머니 안나 소피의 궁정이 있는 리히텐부르크 성에서 자랐다.1711년 5월, 아우구스트 2세는 자신을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길 강력히 거부하는 어머니와 아내로부터 아들을 떼어내기로 마음먹고, 아들이 서유럽 전역에 여행을 떠나게 했다.그는 폴란드령 리보니아 주지사 유제프 코스의 보호 아래 뉘른베르크,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바젤, 베네치아를 잇따라 방문했다. 베네치아의 카니발 행사에 참석했을 때 아우구스트 2세를 상대로 대북방전쟁을 벌이고 있던 스웨덴 국왕 칼 12세를 지지하던 영국 요원이 그를 납치하려 했지만 유제프 코스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1712년 11월 27일, 그는 볼로냐에서 비밀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해 장래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계승을 노렸다. 하지만 작센 선제후국을 공고히 장악하고 있던 개신교 귀족들 때문에 이 개종은 5년간 비밀에 붙여졌다.
1714년 스웨덴 요원들은 쾰른을 방문한 그를 납치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실패했다. 1714년 9월부터 1715년 5월까지 프랑스를 방문해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손님으로 지냈다. 또한 이탈리아인 음악가 안토니오 비발디와 교분을 가지면서 오페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716년 8월 독버섯을 먹은 여파로 식중독에 시달렸지만 곧 회복되었다. 1717년 10월 11일 아우구스트 2세는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이에 분노한 작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우구스트 2세를 지지한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1719년 8월 20일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여대공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드레스덴에서 열렸는데 행사 비용은 400만 탈러에 달했다. 이 결혼식은 유럽에서 가장 큰 바로크 행사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 후 1726년 바르샤바로 가서 폴란드 귀족들에게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2.2.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3년 2월 1일,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했다. 이보다 앞선 1732년 9월 13일, 러시아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아우구스트 2세의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문제로 양국간의 갈등이 촉발될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해 아우구스트 2세 사후에 베틴 가문과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서 배제하고 포르투갈 왕국의 마누엘 왕자[10]를 새 국왕으로 세우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733년 4월 27일에서 5월 23일까지 진행된 세임에서, 오직 폴란드인[11]이자 가톨릭 신자인 사람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결의문이 체택되면서, 양국의 계획이 틀어졌다.스타니스와프 1세는 이때를 틈타 폴란드로 귀환하기로 마음먹고, 사위 루이 15세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은 뒤 변장한 채 신성 로마 제국 경내를 거쳐 폴란드에 잠입했다. 이후 바르샤바에서 열린 국왕 선거장에 모습을 드러낸 뒤 귀족들을 열심히 설득하고 뇌물을 건넸다. 1733년 9월 12일, 그는 11,697명에 달하는 귀족들과 폴란드 추기경 테오도르 안제이 포토츠키의 지지를 받고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주변 국가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러시아 제국은 친 스웨덴 성향인 스타니스와프 1세가 폴란드 국왕이 된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고, 합스부르크 제국 역시 루이 15세에게 자기 딸을 바치는 등 명백한 친 프랑스 인사인 그가 폴란드 국왕이 된다면 프랑스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한편, 아버지 사후 작센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발트해 연안의 영토인 리보니아를 완전히 장악하길 희망하는 러시아의 안나 이바노브나에게 리보니아의 쿠를란트 공국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에게는 당시 그가 각국에게 승인을 요청하던 ' 국사조칙'이 승인되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제국은 아우구스트 3세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75,000~90,000명의 러시아 제국군이 3개 군단으로 나뉘어 리보니아, 스몰렌스크, 키예프로 이동한 뒤, 리보니아에 주둔했던 표트르 라시의 군대가 리보니아- 그로드노 선을 따라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를 거쳐 바르샤바로 진격했다. 이때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은 베틴 가문을 지지했기에, 러시아군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1733년 9월 중순, 표트르 라신이 티코신에 도착한 뒤 폴란드 왕국 경내로 진입했다. 그 해 10월 초 카미오네크에 진주한 러시아군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를 추종하는 귀족 906명을 소집한 뒤 선거를 통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로 선출하게 했다. 바르샤바 인근에 집중된 폴란드군을 지휘하는 유제프 포토츠키는 처음에는 비스와강을 건너 수도를 방어하려 했지만, 러시아군의 군세가 너무 강하자 저항을 포기하고 라돔 인근에서 철수했다. 이에 스타니스와프 1세는 추종자 및 근위대와 함께 바르샤바를 떠나 그단스크로 퇴각했다.
한편, 작센에서는 크라쿠프를 공략하고 아우구스트 3세의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러시아의 부당한 개입으로부터 선거의 자유를 수호하기로 마음먹고, 1733년 12월 3일 산도미에시에서 연맹을 결성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그들은 작센군에 맞서 남쪽의 크라쿠프를 방어하고, 동시에 러시아군에 맞서 북쪽의 토룬을 방어해, 러시아군이 그단스크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크라쿠프를 방어하는 임무는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에서 동원된 병력을 지휘하는 루블린 주지사 얀 탈로가 맡았으며, 토룬 수비는 프란치셰크 카지미에시 루드니키, 알렉산데르 멜진스키, 슐리벤 백작 빌헬름이 맡았다.
1734년 1월 7일, 얀 탈로는 타르노프스키 고리에서 작센군을 저지하려고 시도했지만, 폴란드 기병대가 크게 패하자 퇴각했다. 작센군은 여세를 이어가 크라쿠프에 입성했지만, 얀 탈로는 포기하지 않고 크라쿠프 주변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작센군을 괴롭혔다. 여기에 얀 탈로의 형제인 아담 탈로가 이끄는 폴란드군 1,500명이 미에호프 전투에서 대규모 작센군을 격파해, 그들이 그단스크로 진군하는 걸 막아냈다. 1734년 1월 15일, 표트르 라신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슬루제보에서 폴란드 귀족 연합군을 궤멸시켰다. 러시아군은 여세를 이어가 1월 16일 토룬에 입성했다.
1734년 1월17일, 아우구스트 3세는 바벨 대성당에서 크라쿠프 주교 얀 알렉산데르 리프스키에 의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 후 러시아군은 그단스크에 접근했지만, 8,000명의 수비대가 배치된 그단스크 요새의 방어력이 매우 강력했기에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첫번째 공성전에서 큰 손실을 입자, 러시아 사령부는 작센군에 군대와 중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작센군은 마워폴스카 지역에서 얀 탈로가 이끄는 폴란드군의 유격전에 시달려서 러시아군의 요청을 쉽사리 따르지 못했다. 여기에 체르스크 영주 프란치셰크 카지미에시 루드니키와 슐리벤 백작 빌헬름이 포메른 일대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해, 러시아군이 보급에 곤경을 겪게 만들었다. 결국 러시아 당국은 표트르 라시가 그단스크와 포메른을 신속히 평정하지 못한 것을 이유로 1734년 3월 16일에 총사령관 직책에서 배제하고 부르크하르트 크리스토프 폰 뮈니히를 새 총사령관으로 선임했다.
한편, 얀 탈로는 그단스크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곳을 구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와 동시에, 포메른에서 활동하던 폴란드군은 프란치셰크 카지미에시 루드니키의 지휘하에 집결했다. 러시아 사령부는 탈로와 루드니키가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기로 결정하고, 3,000명 가량의 병력을 루드니키 쪽으로 파견했다. 루드니키는 시비에시 인근에서 요격당해 큰 손실을 입었지만, 잔여 병력을 수습해 얀 탈로와 합세했다. 1734년 4월, 얀 탈로는 귀족 기병 133기, 2개의 폴란드군 연대, 400명의 용기병을 이끌고 이동하던 중 투콜라에서 표트르 라시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당시 라시는 소규모 분견대만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지만, 러시아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우려한 얀 탈로가 평화 협상을 벌이느라 시간을 끄는 바람에 이 기회를 놓쳤다. 표트르 라시는 협상하는 척하면서 그단스크로부터 새로운 군대를 불러들였다.
1734년 4월 20일, 표트르 라시는 2,9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비슈친에 주둔한 적군의 진영을 기습 공격했다. 탈로는 전투 대형을 형성한 뒤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는 이점을 살려 러시아군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지만, 훈련이 잘 되지 않은 폴란드군이 전투 도중 대거 이탈하자 결국 항전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이후 폴란드군은 전력을 수습한 뒤 그단스크로 이동했지만 푸츠크에서 브루크도르프 크리스토프 폰 뮈니히가 급파한 기동대에게 참패했다. 얀 탈로는 호이니체로 철수한 뒤 그곳에서 패잔병들을 규합했지만, 그단스크 공방전이 끝날 때까지 어떠한 군사 행동도 벌이지 못했다.
한편, 스타니스와프 1세는 그단스크에서 항전을 진두지휘하면서 프랑스 왕국에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실권자 플뢰리 추기경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공격할 명분으로 그를 도왔을 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누가 선출되는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스타니스와프 1세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원군을 보내주지 않다가 1734년 5월 20일이 되어서야 2,400명 가량의 소규모 프랑스군이 그단스크 인근의 베스터플라테 반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일주일 후 그단스크를 포위한 러시아군을 향해 용감히 공격했지만 간단하게 격파된 후 항복했다. 그단스크 수비대는 적병 8,000명을 사살하는 등 분전했지만 식량이 고갈되자 1734년 7월 7일 항복했고, 스타니스와프 1세는 농민으로 변장한 뒤 프로이센 왕국으로 도피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환영을 받았다.
1734년 8월 30일, 스타니스와프 1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폴란드 전역에 침략자들을 상대로 투쟁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반포했다. 1734년 11월 5일, 스타니스와프 1세의 지지자들은 지쿠프 연맹을 결성했다. 연맹은 프로이센 왕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경 지대인 쿠르피오브스카 숲에서 저항군을 결성한 뒤 작센군과 러시아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또한 프로이센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간의 국경 지대에서는 리투아니아 장군 파슈코프스키가 유격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을 상대로 저항을 이어갔으며, 포돌레에서도 카미에니에츠포돌스키 요새와 성 삼위일체 참호를 점거한 봉기군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기대하며 침략자들에 저항했다. 그러나 러시아군과 작센군이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저항군을 하나둘씩 격파했고, 저항군 지휘관이었던 유제프 포토츠키가 1735년 2월 말에 저항군 중 그나마 잘 훈련받은 연대를 이끌고 자클리친에서 작센군에 귀순하면서 저항의 열기가 차츰 꺼져갔다.
지쿠프 연맹의 확고한 지도자였으며 5,000명의 기병대를 이끌던 아담 탈로는 작센을 침공해 교란시키기로 마음먹고 출진했지만, 크로스노 오드잔스키에 인근에서 오데르 강을 도하하던 중 적군의 급습을 받고 궤멸되었다. 급기야 1735년 10월 프랑스가 합스부르크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봉기군을 더 이상 도와주지 않기로 하자, 지쿠프 연맹은 해산되었다. 결국 모든 희망을 잃은 스타니스와프 1세는 1736년 1월 26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프랑스로 이동했고, 폴란드 귀족들은 1736년 4월 4일 ~ 7월 9일까지 이어진 바르샤바 세임에서 아우구스트 3세를 새 국왕으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아우구스트 3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자리잡았다.
2.3.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서의 치세
아우구스트 3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서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웠다. 차르토리스키 가문과 포토츠키 가문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정계를 양분하여 세력다툼을 벌였고, 그 외의 귀족 가문들은 각자의 영지에서 지방 의회를 통해 독자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사병을 육성했으며, 많은 이들이 왕이 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빌려 정당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스타니스와프 1세를 몰아내고 많은 폴란드인을 해친 그에게 적대감을 품었다. 여기에 러시아 여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파견한 러시아군이 아우구스트 3세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폴란드 동부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러시아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히는 정책을 펼칠 여력이 없었다.아우구스트 3세는 이러한 현실 때문에 폴란드에 있어봐야 별 할 일이 없다고 여기고, 폴란드에는 가끔 열리는 세임에 얼굴만 비추는 것 외에는 별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나마도 세임이 열리는 바르샤바에 가지 않고 작센과 가장 가까운 쇼바에서 서류에 서명만 하고 돌아갔다. 그 대신 작센 선제후국 및 폴란드 왕국 총리 하인리히 폰 브륄이 바르샤바에서 왕실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을 구축해 왕권 강화를 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44년과 1746년에 열린 드레스덴 의회에서, 아우구스트 3세는 크라쿠프 주교이자 폴란드 대재상 안제이 스타니스와프 자우스키가 제시한 경제 및 군사 방면에서의 개혁안을 실행하려 했지만,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세임에 모인 폴란드 대귀족들이 리베룸 베토를 선언하고 산회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750년대, 브륄 총리는 작센 귀족들로 구성된 '장관 체제'를 바르샤바 왕실에 구축하고 작센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정치적으로 연결시키고자 시도했다. 그러면서 스타니스와프 1세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던 차르토리스키 가문을 세임에서 배제하기 위해 포토츠키 가문과 연계하려 했지만, 포토츠키 가문이 같은 폴란드 귀족 가문을 배제하기 위해 이방인들과 손잡기를 꺼리면서 실패했다. 차르토리스키 가문은 이 움직임을 눈치채고 아우구스트 3세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아우구스트 3세가 화해를 제안했지만, 공직에서 빈자리가 발생할 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제공하고 브륄을 해임하라는 차르토리스키 가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이렇듯 폴란드에 별로 발을 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인 데다 후임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와 차르토리스키 가문의 반 베틴 가문 선전으로 인해, 아우구스트 3세는 오랫동안 "국가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길 기피하고 모든 걸 장관들에게 떠맡기고 사냥에만 열중한 방탕하고 게으른 왕"이라는 비방을 받았으며, 그를 대신해 폴란드를 통치한 하인리히 폰 브륄은 작센 귀족들을 요직에 앉혀놓고 난정을 일삼은 간신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두 사람이 지나치게 저평가되었다고 간주한다.
아우구스트 3세 치세 동안,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졌던 폴란드 경제는 상당히 회복되었다. 오스만 제국과 작센을 통한 대외 무역이 큰 폭으로 늘어나면서 수출량이 늘어났고, 수저, 식탁보 및 고품질 도자기의 광범위한 사용을 포함하여 폴란드 요리 예술, 세련된 음식이 발전했다. 또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문화가 바르샤바를 중심으로 도입되었다. 한편, 아우구스트 3세는 드레스덴에서 공부하는 폴란드 청년 800명에게 장학금을 지불하는 등 교육에도 힘썼다. 이들은 나중에 폴란드 계몽주의 사상가가 되었다. 또한 그의 치세 동안 작센 출신의 각계 전문가들이 폴란드로 대거 유입되어 경제 발전에 이바지했고, 황무지의 토지 개량 작업과 관련된 네덜란드 정착촌의 개발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의 치세에 제드와브네, 치지제프, 콘스키에, 일리니에츠, 비엘키 미조츠 시가 새로 건설되었고 마그데부르크 법에 따른 도시법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아우구스트 3세가 거의 찾아오지 않는 동안 껍데기만 하나의 국가일 뿐 실제로는 거대한 사병대를 보유하고 주권을 행사하는 대귀족들이 나눠가지는 형태로 굳어졌다. 차르토리스키 가문의 사병대는 왕실 군대보다 규모가 그리 작지 않았으며, 더 나은 장비로 무장했고 우수한 훈련을 받았다. 여기에 비정기적으로 열리며 그나마도 중단되기 일쑤였던 세임 대신 지방 의회가 입법권을 행사했다. 귀족들은 자기들 입맛에 맞게 외교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차리토리스키 가문과 포니아토프스키 가문은 친 러시아파로서 외교 활동을 벌였고, 포토츠키 가문 등은 친 프로이센파로서 입장을 내비쳤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된 외교 정책이나 군사 정책 등을 펼칠 수 있을 리 만무했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그의 치세 내내 뚜렷한 행보를 보이지 않고 수동적인 태도만 보였다.
7년 전쟁 시기, 프로이센군을 피해 바르샤바로 피신한 아우구스트 3세는 러시아군이 폴란드를 거쳐 프로이센으로 진격하는 것을 허용했다. 러시아군은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폴란드의 여러 도시와 마을로부터 물자를 징발했고, 때로는 약탈을 일삼았다. 아우구스트 3세는 이에 대해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고, 정치에 뜻을 잃고 사냥에 집착했다. 1763년, 차르토리스키 가문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아우구스트 3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서 폐위시킬 음모를 꾸몄지만,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아우구스트 3세가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2.4. 작센 선제후로서의 치세
1738년, 아우구스트 3세는 자신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는 데 기여한 하인리히 브륄에게 전권을 맡겼다. 하인리히 브륄은 선제후와 약 30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드레스덴 의회에서 정책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누렸고, 다른 장관들은 브륄의 허락 없이 왕 앞에 나타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브륄은 난잡하게 운영되던 작센 행정부를 통합했다.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군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무리하게 투입하려는 행보를 보이자 반감을 품고 1742년 오스트리아 쪽으로 갈아탔다.1745년 1월 8일, 작센은 바르샤바 조약에서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공화국과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제국 상속을 보장하기 위한 연합을 결성했다. 이후 작센군은 오스트리아와 힘을 합쳐 프로이센군에 대항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탁월한 전략전술에 휘말려 연전연패했다. 급기야 1745년 12월 15일 드레스덴 인근의 케셀스도르프 전투에서 보병 24,000명과 기병 7,000명으로 구성된 작센군이 보병 16,800명, 기병 4,000명으로 구성된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맞붙었다가 적병 5,000명을 사상시키는 동안 1만 명이 넘는 사상자 및 포로가 발생한 참패를 당하고 말았고, 프로이센군은 사흘 뒤 드레스덴에 입성했다. 결국 작센은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도, 의지도 상실하고 프로이센과 드레스덴 협약을 체결해 전쟁에서 이탈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 브륄은 자국에 큰 타격을 입힌 프로이센 왕국에 맞서기 위해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화해시켜 동맹의 역전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재정 정책에서 심각한 실책을 범하면서, 작센은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면서 바닥을 드러낸 재정을 매꾸기 위해 국채를 대량으로 발행했다. 이때 그는 의회 관리 자산을 국채로 교환했으며, 공무원과 장교들의 미납된 급여를 국채로 지급했다. 그러나 국채 가치가 액면가의 3분의 1로 떨어지면서, 작센의 신용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드레스덴 의회는 1749년 특별 위원회를 개최해 브륄의 재정 정책을 규탄했지만, 아우구스트 3세는 브륄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면서 브륄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무력화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인 금융 전문가 A. M. 비숍필드를 포함한 일부 인사들을 체포했다. 결국 의회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산되었고, 이후로 드레스덴 의회는 다시는 개최되지 않았다. 또한 브륄은 재임 기간 동안 위원회가 세금 계산서를 조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브륄이 약속 어음 또는 세율을 조작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반발한 위원장 부나우 백작은 1751년에 사임했다.
이렇듯 어려운 재정 상황으로 인해, 공무원 및 장교에 대한 급여 지급이 장기간 불규칙하게 지급되었다. 1751년, 전쟁 기금은 장교들에게 1년 반에서 2년치의 급여를 한꺼번에 지급해야 했다. 반면 오페라, 건축물, 사냥 등 행사를 위한 예산은 줄어들지 않았다. 브륄은 부족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1748년 이후 군대를 지속적으로 감축해 32,000명에서 17,000명으로 줄였고, 귀족을 제외한 모든 주택 소유자에 대한 세금을 인상했으며, 하노버와 영국으로부터 350만 탈러를 대출받는 대가로 2개 카운티의 수입을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재정 적자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7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이르면, 재정 적자는 1,500만 탈러에 달했으며, 조세 적자는 3,000만 탈러에 이르렀다. 1756년 봄에는 채권자들에게 이자를 지급하는 것마저 불가능했다.
브륄은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동맹의 역전을 통해 프로이센을 고립시킴으로써 자국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려 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히려 가만히 있다가 협공당하느니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고, 1756년 8월 29일 작센을 기습 공격했다. 그는 작센을 점거한 후 그곳을 기점으로 삼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작센군은 프로이센군이 자신들을 먼저 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데다 병력이 위험할 수준으로 감축되었고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은 뒤 피르나 근교에서 방어진을 형성한 채 오스트리아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1756년 10월 1일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로보지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작센군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루토프스키는 희망을 잃고 10월 16일에 항복했다. 이후 아우구스트 3세는 10월 20일 바르샤바로 도주했다. 10월 27일 바르샤바에 도착한 아우구스트 3세는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으나 별다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사냥과 취미 생활에만 열중했고, 작센은 7년 전쟁 내내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간의 전장으로 전락해 황폐해졌다.
3. 사망
7년 전쟁이 종결된 후인 1763년 4월, 아우구스트 3세는 고문들과 함께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763년 10월 5일, 그는 드레스덴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67세. 그의 유해는 드레스덴 가톨릭 궁정 교회에 안장되었다. 장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이 그의 뒤를 이어 작센 선제후가 되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러시아 제국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지원을 받은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선출되었다.그가 죽자, 당시 드레스덴 궁정악장이였던 작곡가 요한 아돌프 하세가 그의 장례미사를 위해 레퀴엠 C장조를 작곡하였다.
4. 아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요제파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나 아말리의 장녀로 1719년에 작센 선제후국의 계승자였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와 결혼했다. 1733년, 남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로 선출되었다. 마리아는 1734년 1월 20일에 남편과 함께 대관식에 참석하고 폴란드 왕비로 선임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여러 정부를 두고 수많은 사생아를 낳아 세간의 지탄과 비웃음을 샀던 걸 반면교사로 삼아 아내에게 매우 충실했고, 두 사람은 총 12명의 자녀를 낳았다.
마리아는 작센에 거의 틀어박혀 지냈던 남편과는 달리 폴란드를 자주 왕래했다. 그녀는 폴란드어를 익혔으며, 세임에 자주 참석했다. 드레스덴에 없는 동안 자녀들과 프랑스어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곤 했다. 또한 남편과 음악, 예술, 사냥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으며, 가을 기간 동안 후베르투스부르크 별궁에서 남편과 함께 지내곤 했다. 그녀는 하루에 4차례나 미사에 참석하는 등 헌신적인 가톨릭 신자였는데, 특히 성 프란치스코 자비에르를 존경해 드레스덴에 그를 기리는 성당을 건설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예수회 신부이자 그녀의 고해신부인 안톤 헤르만은 그녀가 지나치게 종교에 빠져들었다며 광신의 오류를 범하지 말아달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녀는 종교적 도덕 관념에 근거해 빈민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데 힘쓰기도 했다.
마리아 요제파는 정치 방면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남편이 부재 중일 때 공식적으로는 섭정에 선임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대리인으로서 활동했으며, 각료와 대사들은 그녀에게 보고를 올렸다. 또한 그녀는 외교 서신을 자주 작성했으며, 남편에 대한 영향력을 좀더 키우기 위해 하인리히 폰 브륄을 상대로 경쟁을 벌였다. 한편, 그녀는 장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장남보다는 차남 프란츠 크사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되기를 바랐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과 며느리 마리아 안토니아가 폴란드를 방문하는 것을 가로막고 폴란드에서 인맥을 쌓는 것을 저지했으며, 1754년 장남이 마리아 테레지아와 면담하는 것도 막았다.
남편이 1756년 10월 20일 드레스덴을 떠나 바르샤바로 갔을 때, 그녀는 장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과 함께 드레스덴에 남아 프로이센군에 의해 궁전에 가택 연금되었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보이지 않는 잉크를 사용해 서신을 몰래 주고받았다. 그러나 경계가 갈수록 삼엄해지면서 편지를 보내는 게 어려워졌고, 1757년 4월 4일에 그녀의 시녀인 안나 레지나 폰 오길비 백작 부인이 체포되기도 했다. 1757년 9월 6일, 그녀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너무 삼엄한 경비를 받고 있어서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편지가 될 거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 해 11월 17일 드레스덴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드레스덴 가톨릭 궁정 교회에 안장되었다.
5.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Frederick Christian, Elector of Saxony) |
1722년 9월 5일 | 1763년 12월 17일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토니아 여공작[12] 슬하 3남 1녀[13] |
1녀 |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Queen of Spain) |
1724년 11월 24일 | 1760년 9월 27일 |
카를로스 3세 슬하 6남 2녀[14] |
2녀 |
마리아 마르가레타 공주 (Maria Margareta von Sachsen) |
1727년 9월 13일 | 1734년 2월 1일 | |
3녀 |
바이에른의 선제후비 마리아 아나 (Maria Anna, Electress of Bavaria) |
1728년 8월 29일 | 1797년 2월 17일 |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15] |
2남 |
프란츠 크사버 왕자 (Prince Francis Xavier) |
1730년 8월 25일 | 1806년 6월 21일 |
마리아 키아라 스피누치[16] 슬하 3남 7녀 |
4녀 |
프랑스의 도핀 마리 조제프 (Maria Josepha, Dauphine of France) |
1731년 11월 4일 | 1767년 3월 22일 |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17] 슬하 4남 3녀[18] |
3남 |
쿠를란드 공작 카를 (Charles, Duke of Courland) |
1733년 7월 13일 | 1796년 6월 16일 |
프란치슈카 크라신스카[19] 슬하 1녀[20] |
5녀 |
르미르몽의 수녀원장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hristina, Abbess of Remiremont) |
1735년 2월 15일 | 1782년 11월 19일 | |
6녀 |
마리아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Maria Elisabeth) |
1736년 2월 9일 | 1818년 12월 24일 | |
4남 |
테셴 공작 알베르트 카지미어 (Albert Casimir, Duke of Teschen) |
1738년 7월 11일 | 1822년 2월 10일 |
테셴 여공작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21] 슬하 1녀 |
5남 |
트리어 선제후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 (Clemens Wenceslaus, Archbishop-Elector of Trier) |
1739년 9월 28일 | 1812년 7월 27일 | |
7녀 |
에센 수녀원장 마리아 쿠니군데 (Maria Kunigunde, Abbess of Essen) |
1740년 11월 10일 | 1826년 4월 8일 |
[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장녀.
[2]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왕비.
[3]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의 선제후비.
[4]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의 두번째 아내로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클로틸데,
엘리자베트 공주의 어머니.
[5]
쿠를란드 공작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외할아버지다.
[6]
테셴 공작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남편.
[7]
트리어 선제후.
[8]
문화적으로 보았을 때는 그의 치세가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나라만 낼름하고 국정은 총신 브륄에게 맡겨 수수방관한 탓에 주요 귀족들을 중심으로 연방의 군벌화가 되어
폴란드 분할이 진행되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 각주만 보았을때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만 암군이었나 싶겠지만 문서를 끝까지 읽어보면 작센에서도 암군이었던 무능한
잉여인간이었다.
[9]
일설에 따르면 365명에 달하는
사생아를 낳았다고 한다.
[10]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2세의 막내 아들.
[11]
여기서의 폴란드인은 인종적인 의미의
폴란드인이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귀족을 의미한다. 즉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귀족이라면 국왕으로 선출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다.
[12]
카를 7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1세의 외손녀.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과는 이종사촌간.
[13]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안톤 등
[14]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루도비카,
카를로스 4세,
페르디난도 1세 등
[15]
카를 7세의 장남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외손자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마지막 군주이다. 마리아 안나와는 이종사촌간.
[16]
귀천상혼이다.
[17]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의 장남.
[18]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클로틸데,
엘리자베트 공주 등
[19]
폴란드 백작가의 딸이었다. 명백히
귀천상혼으로 간주되는 결혼이었지만 그나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가 Prinzessin 칭호를 내려주었고, 덕분에 딸은
사르데냐 왕국
사보이아 왕가의 분가로 시집갈 수 있었다.
[20]
카리냐노 공작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이탈리아 왕국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할머니이다.
카를로 펠리체를 끝으로 사보이아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면서 남편 카를로 에마누엘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카를로 알베르토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왕이 되었고 뒤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카를로 알베르토의 장남이 바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다.
[21]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4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