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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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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현 중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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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시
那覇市
Naha City
}}}
<colbgcolor=#333399><colcolor=#fff> 시청 소재지 이즈미자키 1초메 1-1
도도부현 오키나와현
면적 39.98㎢
인구 312,352명[1]
인구밀도 7,813명/㎢
시내 총생산 1조 3,443엔 (2015년)
시장
[[무소속(정치)|
무소속
]]
치넨 사토루
(知念覚, 초선)
시의회
(40석)

[[자유민주당(일본)|
자민
]]
9석

[[공명당|
공명
]]
7석

[[일본공산당|
공산
]]
5석

[[입헌민주당(2020년)|
입헌
]]
3석
'''
오키나와
'''
2석

[[사회민주당(일본)|
사민
]]
1석
새로운 바람 X
1석

[[무소속(정치)|
무소속
]]
12석
중의원
(1/465석)

[[일본공산당|
공산
]]
1석
상징 <colbgcolor=#333399><colcolor=#fff> 시화 부겐빌레아
시목 후쿠기
시어 참치
시접 이데아 왕나비
시화목 봉황목
시가 나하시가[2]
지역번호 098
시정촌코드 47201-8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라인 아이콘.svg
파일:kukjaemachi.png
나하시, 나아가 오키나와현의 최대 번화가인 국제거리
파일:external/www.dc.ogb.go.jp/gaiyo-02.jpg
오키나와현의 관문인 나하 국제공항

1. 개요2. 상세3. 지명 유래4. 지리5. 기후6. 지역 구분
6.1. 본청 관내(本庁管内)6.2. 마와시지소 관내(真和志支所管内)6.3. 슈리지소 관내(首里支所管内)6.4. 오로쿠지소 관내(小禄支所管内)
7. 역사8. 문화 및 관광9. 교통
9.1. 노선버스9.2. 공항9.3. 철도9.4. 해운9.5. 도로
9.5.1. 고속도로9.5.2. 국도9.5.3. 현도9.5.4. 자전거 도로
10. 유명 출신자
10.1. 가수10.2. 배우 및 연예계10.3. 예술가10.4. 스포츠10.5. 정치인
11. 오키나와어 지명12. 관련 문서1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 오키나와현의 현청소재지. 또한 오키나와의 중핵시이다. 동부의 슈리지소와 서부의 오로쿠지소 북부의 마와시지소등이 중심으로 나하시에서 주변 시, 정, 촌으로 발달해 왔다. 국제공항 나하 공항과, 현외 및 주변 섬을 잇는 나하항 터미널의 (국제 여객선)과 (국내 여객선)을 껴안는 것부터 오키나와의 관문으로서의 허브 역할도 맡고 있다.

인구는 2021년 기준으로 약 31만 명으로 오키나와 인구의 21% 정도를 차지하며. 나하시, 오키나와시, 우라소에시, 우루마시, 이토만시, 기노완시, 난조시, 토미구스쿠시등으로 이어지는 나하 광역권은 약 95만 명의 도시권이다.

류큐 왕국의 수도였으며, 궁전이었던 슈리 성이 나하시 동부에 위치해 있다.

2. 상세

일본의 모든 도도부현 중 시급도시 가운데 면적이 가장 작고. 인구 밀도는 도쿄 수도권 오사카 간사이권을 제외한 지역으로서는 전국에서 가장[6] 높다. 또 나하 공항이 시 면적의 8% 이상을 차지하고, 그 중에는 자위대 기지도 포함된다. 또 주일미군의 시설이나 나하 항의 항만 시설의 몫도 고려하면 실제 도시 활동에 사용 가능한 면적은 한정된다. 게다가 나하 공항의 고도제한으로 인해 시가지의 상당수는 초고층 빌딩이나 초고층 아파트를 찾기 힘들었으나. 최근에는 군 항공 규제의 영향이 없는 나하 신도시인 나하 북부지구와 마키시지구 등에 초고층 빌딩, 상가, 아파트 등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나하 주변 지역의 베드타운화가 진행되어 나하시를 중심시로 나하 도시권의 인구는 약 78만명(도시 고용권-2005년)이다. 또한 지방에서 인구 감소가 심각한 문제가 되는 오늘날에도 나하 시 및 나하시의 주변 지자체에서는 인구 증가가 현저하고, 2014년 7월 기준으로 도시 고용권 인구는 약 82만명(10% 유입 인구)에 이른다. 게다가 나하시를 중심으로 한 오키나와 본섬 중남부권의 인구는 면적 478㎢에 대한 약 117만명(추계 인구 2014년 7월 1일 현재)을 넘어서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인구 집중 지구이다.

나하시 중심부에 '코쿠바 천( 망코)과 아사토 천으로 시가지 동부와 남부로 흐르고. 둘러싸인 평지 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곳에 나하시와 오키나와현의 주 관청과 복합시설, 상가시설등 중요 시설이 대부분 위치해 있다. 1987년 주일미군의 거주지로 활용되었던 마키미나토 주택 지구가 반환되면서 해당 지역이 나하 신도심으로 개발 진행되어 중심지에 일부 기업의 본사 등이 이동했다. 중심부 주변의 구릉지는 거의 모두 시가화(주로 주택지) 되면서 원래의 지형의 높낮이에서 입체적인 도시 경관을 보인다. 한 때 류큐 왕국의 수도였던 슈리 지구는 해발 100m 정도의 높이라 위치에 따라 나하시 전역을 관망할 수 있다.

관광 면에서는 시 중심부의 국제거리, 시 동부의 고지대에 있는 슈리 지구의 슈리 성( 류큐 왕국의 수도. 2000년 12월 세계유산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으로 등록)이 중심이었지만 최근 들어 주일미군 주택지의 유적들이 나하 신도심으로서 개발이 진행되고 있으며 2004년 12월에 세계 최대 규모로 일본 유일의 공항 외부 면세점인 DFS갤러리아 오키나와가 오픈했다. 바다에 접해 있지만 나하 공항과 나하 항 등의 시설이 해안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해수욕장은 1991년에 운용 개시된 나미노우에 비치(인공 해변)가 유일하다. 명산품으로 츠보야 야키(도자기)와 오키나와 특산 소주인 아와모리 등이 있다.

2006년에 중핵시 지정 조건 중 하나였던 면적 규정이 폐지됨에 따라 핵심시 승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2년 10월 19일 열린 일본 내각부 국무회의에서 나하시를 중핵시로 지정하는 정령을 결정한 후, 2013년 4월 1일로 일본 전국에서 42번째 중핵시와 오키나와현 최초의 중핵시로 승격되었다.

2016년 7월 17일부터 동성커플증명서 발급이 가능해진다.

3. 지명 유래

나하를 원래 오키나와어로는 나화(ナーファ 또는 ナファ)라고 불렀는데, 오키나와어에서 어장을 뜻하는 '나바'ナバ)가 변해서 '나화'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자 那覇는 '나화'를 소리나는 대로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이라고 한다.

18세기에 류큐의 민담을 수집하여 정리한 <유로설전(遺老説伝)>에는, 버섯을 닮은 바위가 그곳에 있었는데, 오키나와어로 버섯을 나바(ナーバ)라고 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나화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만 그 바위는 당시에 이미 땅속에 묻혀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고. 민간어원일 가능성도 있다.

참고로 오키나와는 현대 가나 표기법으로 おきなわ라고 적지만 역사적 가나 표기법으로는 おきなは이다. 오키나와의 한자 표기도 그냥 한자를 빌려 쓴 것이므로 옛 발음만 봤을 때 나하라는 지명과 어원상 서로 관계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4. 지리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서해안에 위치하여 동중국해에 접해 있다. 시 중앙부가 거의 평탄하고, 주변부에 작은 구릉 지대가 둘러싸 시내를 동에서 서쪽으로 코쿠바 천과 아사토 천이 흘러 동중국해로 나간다. 토미구스쿠시 경계에 있는 망코는 맹그로브가 발달해 있으며 람사르 협약에 등록되어 있다.

5. 기후

평균 기온이 약 23도로 매우 따뜻한 편이며, 연간 강수량은 2000㎜이상으로 고온 다습한 아열대기후(쾨펜의 기후 구분에서 온난 습윤 기후(Cfa)을 나타낸다.[7] 겨울에도 최저 기온이 10도를 밑도는 것은 극히 드물며[8], 또한 해양성 기후 탓에 한여름의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는 날은 많으나 35°C를 넘는 날은 거의 관측되지 않는다.(2001년 8월 9일 최고 기온 35.6°C가 2011년 8월 시점에서 일본 전국 도도부현 시 소재지의 최고 기온 기록 중 가장 낮은 기록이다.).

전 세계적인 한파가 있었던 2016년 1월에는 진눈깨비가 관측되었다. 근데 그 당시 평균기온으로 따져보면 2015년 대비 0.8도 높아 지구온난화의 영향인 것으로 추정. 1977년 쿠메지마(久米島)에서 진눈깨비가 관측된 이래 오키나와 최초의 강설 기록이다.

열대기후와 아열대기후의 경계점에 있는 지역이니만큼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연중 추위가 없다고 느껴질수도 있다. 관광하기 가장 좋은 계절은 비가 자주와서 문제이기는 하나 쾌적성으로만 봤을때 역시 12 ~ 2월의 겨울로서 서울에 대응하여보면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해당한다.

6. 지역 구분

나하는 본래 류큐 왕국의 수도인 슈리의 외항으로 별개의 지역이었다.[9] 1879년 류큐 왕국이 멸망하고 오키나와 현이 된 뒤로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슈리에는 구 일본군 부대가 들어서서 새로운 행정 기관을 세울 만한 터가 좁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하로 옮겨 가게 되었고, 나중에는 나하가 슈리를 비롯한 주변 지역을 거꾸로 흡수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나하 시역소(시청)에서 행정 목적상 다음과 같은 지역으로 구분한다.

6.1. 본청 관내(本庁管内)

나하 시역소에서 직접 관할하는 구 나하 지역과 나하 신도심[10] 지역이다. 류큐 왕국 시절의 나하는 원래 이곳만을 지칭했다.

6.2. 마와시지소 관내(真和志支所管内)

나하의 북부. 구 마와시(真和志) 시가 있던 지역인데 1957년 12월 17일에 나하 시로 흡수되었다. 참고로 옛 마와시 지역의 일부는 슈리 지역에 포함돼 있어서 마와시지소의 관할 지역이 아니라 슈리지소의 관할 지역이다. 본청 관내와 슈리 사이에 위치한다.

6.3. 슈리지소 관내(首里支所管内)

나하 시의 동부. 구 슈리 시가 1954년 9월 1일에 나하 시에 합병되면서 슈리지소가 설치되었다. 옛 수도 지역이다 보니 나하 시로 합병될 때 주민들의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비유하면 서울이 실질 수도의 지위를 인천에 넘겨줬다가 시간이 지난 뒤 인천이 서울을 흡수한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안 그래도 몇 년 전인 1949년 12월 9일 미군정[11]은 나하를 오키나와의 수도로 한다고 대놓고 공식 선포하는 바람에 자존심이 상해 있었는데,[12] 아예 합병까지 시킨다고 하니 주민들의 감정이 상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정 때문에 이 일대의 행정구역명은 전부 '슈리'로 시작하여 이름만 봐도 슈리 지역임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통합 창원시에서 구 마산 지역의 행정구가 '마산'으로 시작하는 것[13]과 유사하다.

구 슈리 시가 나하 시에 합병됐을 당시 슈리지소 관내는 나하 시의 월경지였다. 하지만 1957년에 마와시 시가 나하 시로 흡수되면서 월경지가 아니게 되었다.

다만 행정구역은 원래 달랐지만 실제 거리는 대략 4㎞ 정도로 충분히 한 도시라고 볼 수 있는 정도이다.

6.4. 오로쿠지소 관내(小禄支所管内)

나하 시의 서부. 과거에 시마지리 군 소속이었던 오로쿠(小祿/小禄) 촌 일대가 1954년 9월 1일에 나하 시에 합병되면서 오로쿠지소가 설치되었다. 이 일대의 토지 구획을 정리하여 주택가로서 정비되었다. 그래서 오키나와 현 밖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좋다고 한다.

7. 역사

7.1. 류큐 왕국

파일:external/1e7f72fc7138c5ceff6ac4c8c5aa073e1b250b41d55823246aab787d78b6c099.jpg
, 교토대학 총합박물관 소장
나하는 원래 코쿠바 천과 아사토 천 하구의 만에 산재한 섬들이었다. 삼산시대인 1406년, 사시키[14] 아지(按司)[15]였던 쇼하시가 중산(中山)의 수도였던 우라소에를 공격, 당시 중산왕 부네이(武寧)를 물리치고 자신의 아버지 쇼시쇼를 중산왕에 옹립했다. 이 때 중산의 수도를 우라소에에서 슈리로 옮겼으며 슈리 성을 류큐의 궁궐로 삼았다. 동시에 지금의 나하 일대가 정비되어 작은 항구가 되었다.

1451년에 쇼킨부쿠왕 명나라로부터의 책봉사를 맞이하려고 명나라의 기술자 회기(懐機)에게 명해 쵸코테이(長虹堤)라는 길이 1㎞에 이르는 둑길을 건설시켜 오키나와 본섬의 아사토 천 쪽과 연결시켰다. 육로 교통이 정비됨으로써 항구로서의 발전이 시작되어 나하 4정(那覇四町)[16]로 불리는 시가지가 형성됐다.

한편 1392년 중국 푸젠성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나하의 쿠메 촌(久米村)에 정착하고 있었다. 이들은 쿠메삼십육성(久米三十六姓)[17]이라 불렸으며 진공사, 통역, 선박 제조 등 류큐의 무역과 외교를 지탱하는 일에 종사해 왔다.

쇼신 왕(재위 1477-1526)은 중앙집권 정책으로 류큐 왕국 각지에 할거하고 있는 아지들을 슈리에 모여살게 했으며 슈리는 크게 확장되어 왕족, 귀족 그리고 관리들이 모여사는 류큐 왕국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 때의 슈리를 가리켜 수이웨구니(首里親国, すいうぇーぐに)라고 불렀다. 한편 항구도시 나하는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계무역으로 번영하였다.

16세기 왜구 등의 습격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나하항 인근 해상에 있는 섬에 성벽을 쌓고 둑길을 만들어 코쿠바 천 하구의 나하 항의 남북으로 방어용 포대 미에구스쿠(三重城)와 야라자모리구스쿠(屋良座森城)를 건설했다. 게다가 나하항의 맞은편 남쪽의 카키하나(垣花) 등에도 시가지와 항만이 건설되었다.(나하 항 남안은 제2차 대전 후 빈 터에 돼 미군의 나하 군항이 되었다.)

1609년 류큐가 사츠마 번에 종속당한 후, 류큐에서 사츠마측에 도자기 장인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온 장헌공(張献功)이 류큐에 정착하여 나하의 치바나(知花)와 슈리의 타카라구치 (宝口)에 가마에서 도자기가 구워졌다. 1670년에 이러한 가마들을 츠보야(壺屋)로 통합하여 츠보야 아치문(壺屋焼物)이라는 도자기를 생산했다. 한편 슈리의 토리호리(鳥堀), 사키아먀(崎山), 아카타(赤田) 세 동네가 아와모리 소주를 제조할 수 있는 허가를 왕부로부터 받았으며 이 세 곳을 슈리산카(首里三箇)라고 불렀다.

토사의 퇴적으로 인해 나하는 류큐 왕국 말기에는 육지와 이어지게 되었다.

7.2. 류큐 처분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huri-Sanka_in_Taisho_era.jpg
다이쇼 시대의 슈리(슈리산카)
1879년 류큐 처분으로 류큐왕국은 멸망하였다. 새로이 설치된 오키나와 현은 기존의 건물들에 일본군 시설까지 들어서 자리가 없는 슈리 대신 나하에 현청을 두었고, 이때부터 나하가 슈리를 대신하여 오키나와의 중심지가 되었다. 나하는 오키나와 현의 물자 집적지, 상업 도시로서 번영을 거듭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발발, 1944년 10월 10일 대규모 공습과 1945년 4월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에 의해 시가지는 완전히 파괴됐다.

7.3. 오키나와 전투 이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kusai_Dori_in_1955.jpg
1950년대의 국제거리

전후, 옛 나하 시 중심부는 미군의 관리하에 들어가 군 시설에서 1마일 이내로 출입금지지역이 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현 북부의 수용소에 옮겨져 있었다. 생활 물자 부족 해소를 위해 1945년 11월 나하시 츠보야 지구의 도자기 장인들이 먼저 돌아오고 12월에는 마키 지구의 기와 장인들 136명이 돌아왔다. 이어 가족이나 친척이 이주했으며, 이에 섞여 허가 없는 주민도 속속 나하에 머무르면서 츠보야로부터 신 현도(현재의 국제거리)일대에 차례로 마을이 부흥, 암시장도 자연적으로 확대했다.

이런 가운데 주민 중 한사람인 타카라 하지메(高良一)가 미군과 직접 협상해 미군의 물자 집적소가 있던 신 현도 도로변 땅(현재의 텐부스나하 근처)에 1948년 1월경 극장"어니 파일 국제 극장"[18]을 개관했다. 이후 주변은 상업지로서 급속히 발전해 신 현도는국제거리로서 '"기적의 1마일"'이라고 불리게 된다.

1954년에 슈리를, 1957년에는 마와시를 합병하였다. 1958년에는 슈리 성의 정문인 슈레이몬이 재건되었다. 1989년 슈리성 복원을 시작, 1992년에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개장되었다. 그러나 2010년대 말 거의 복원을 완료했던 상황에서 화재로 인해 상당수의 전시물과 건물이 소실되었다. 화재 이전까지 20여 년에 걸쳐 복원된 만큼, 다시 복원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2003년 오키나와 도시 모노레일선이 운행을 시작했으며, 2013년에 중핵시에 지정되었다.

8. 문화 및 관광

8.1. 관광지

2000년 12월 세계유산 "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으로 등록된 9개의 사적 가운데, 나하 시내에는 총 4곳이 존재하고 있다.

8.2. 축제( 마츠리)

8.3. 종교 시설

8.3.1. 류큐신토

우타키(御嶽)는 류큐에서 전통적으로 제사를 지내던 성소(聖所)를 말한다.

8.3.2. 신토

일부는 류큐 왕국이 일본 제국에 합병되기 전에 일본 본토의 신토가 유입되어 국가신토[22]의 신들을 섬긴 곳도 있다.

8.3.3. 불교

8.3.4. 유교

8.3.5. 기독교

9. 교통

중심 시가지는 전후 스프롤 현상으로 충분한 도시 기반 정비가 되지 않고 무질서한 도시화가 추진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도로가 폭 12m이하로 좁다. 이렇게 좁은 도로가 만성적인 교통 체증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국제거리와 기타 간선 도로의 기능을 보완하는 도로가 거의 없거나 폭이 좁은 구간이 많으므로 국제거리와 기타 간선 도로에 더 부담이 걸려 있다.

이들의 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오키나와 도시 모노레일선(유이레일)이 개통됐다.

덧붙여 오키나와 현에서의 현외 교통의 요충인 국내에서도 유수한 국제 공항인 나하 공항과, 현 내외에 항로가 집중하고 있는 나하 항이 있다.

9.1. 노선버스

오키나와 도시 모노레일선이 개업한 뒤에도 주요 공공 교통은 버스에 치우쳐 있다. 특히 중심 시가지에서의 버스 교통량이 매우 많다. 1997년 교통 센서스에 따르면 국제거리 주변이 하루 1,500-1,600대의 버스가 통과돼 교통 체증의 원인이 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국제거리의 서쪽에 있는 국도 58호를 경유하는 루트에 대한 변경이나, 나하 신도심에 신설된 역 광장 등을 기점으로 하는 경로로 변경했기에 당시보다 약 20%가량 줄었다.

노선 버스는 모두 민간 기업에 의한 운행되고 있어, 시내 노선을 갖는 것은 밑의 4개 회사다. 주로 시내 교통에 제공하는 균일 운임 노선은 대체로 나하 버스가 운행하며, 비교적 장거리 시외 구간을 운행하는 노선은 나머지 3개 회사가 각각 운행하고 있다.

일본의 대중교통 비용이 한국에 비해 상당히 비싸지만, 오키나와의 버스 비용은 혼슈와 비교해도 비싼 편에 속한다. 때문에 시외로 나가거나 계속 이용할 생각이라면 교통 패스 사용이 합리적이다. 1일권 또는 3일권으로 111, 117번 버스[26]를 제외한 위 4개 회사의 전 노선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자세한 내용은 교통 패스/일본/도서 지역 문서 참고.

9.2. 공항

나하 공항을 통해 오키나와나 일본본토 각지를 비롯해 아시아 각국과 연결된다. 한국에서는 2020년 전세계적으로 덮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전 항공사 무기한 운항중지였다가 2023년 현재 아시아나항공, 진에어, 티웨이항공[27], 제주항공, 대한항공에서 인천발 나하행 항공편을 운항하고있다.

2019년 3월에 국제선 청사와 국내선 청사가 통합되었고 국내선쪽에 몰려있던 각종 편의시설이 일부 새로 생긴 건물로 옮겨져서 국제선 이용객들이 좀 편해졌다.

9.3. 철도

다이쇼 시대에는 오키나와 현영철도 요나바루선, 카데나선, 이토만선이 있었다. 오키나와전기의 노면전차가 시내를 달리고, 이토만 마차 궤도도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쇼와 시대에 들어서자 오키나와 전기의 노면 전차와 이토만 마차 궤도는 버스와의 경쟁에 밀려 폐지되었으며, 남아있던 오키나와 현영 철도 노선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운행을 멈춘다.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서 기반 시설이 파괴되었고 전후 미군정 하의 오키나와에서도 복구되는 일은 없었다. 이와 관련된 괴담으로 한때 " 오키나와에 지하철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떠돌기도 했다.

그러나 인구 집중으로 교통 혼잡을 겪던 나하에서 모노레일 건설을 시작, 2003년 8월 10일 전후 최초의 궤도계 교통수단으로 오키나와 도시 모노레일선(유이레일)이 개업하여 현재 오키나와 유일의 궤도 교통수단이 되었다. 도심 교통 혼잡 및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에 2량으로 운영하던 모노레일의 3량 변경[28]이 예정되어 있다.

인구 20만명 이상의 특별구 및 시 속에서 JR그룹 역이 없는 것은 나하시 그리고 사이타마현 카스카베시, 소카시, 도쿄도 분쿄구· 세타가야구 네리마구, 군마현 오타시, 가나가와현 야마토시, 아츠기시, 아이치현 토요타시, 오사카부 토요나카시가 있다. 이들은 분쿄구 야마토시를 제외한 JR의 철도 노선 자체가 통하지 않는 것도 공통된다.[29]

최근에는 시 차원에서 LRT를 추진하고 있다. 노면전차 [30] 로 가닥을 잡은 듯 하며, 나하시의 공보 및 종합교통전략에 따르면 2026~2030년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아사히바시와 신도심, 시마시 지역 연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검토된 복수의 노선에서 모두 흑자 예상을 보였다고 한다. 관련 자료.[31] 물론 제대로 추진될지는 계속해서 지켜봐야 할 듯 싶다.

여담으로, 요기공원[32]에 증기기관차가 한대 전시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과거의 오키나와를 달리던 건 아니고 전쟁 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직후 '증기기관차를 한번도 보지 못한 오키나와 어린이들을 위해' 큐슈에서 가져온 증기기관차라고.[33]

9.4. 해운

나하 항구와 토마리 항구[34]로 나뉜다. 대부분의 여객선은 토마리 항구에서 출발하나, 나하 항구에서 모토부 항구와 연결되는 여객선이 다닌다.[35]

9.5. 도로

9.5.1. 고속도로

9.5.2. 국도

9.5.3. 현도

9.5.4. 자전거 도로

10. 유명 출신자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다음 분류도 참고하십시오: 나하시 출신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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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가수

10.2. 배우 및 연예계

10.3. 예술가

10.4. 스포츠

10.5. 정치인

11. 오키나와어 지명

한자 일본어 오키나와어
那覇 나하 なは 나화 なふぁ, なーふぁ
国場 코쿠바 こくば 쿠쿠바 くくば
安謝 아쟈 あじゃ 아쟈 あじゃ
真和志 마와시 まわし 마지 まーじ
首里 슈리 しゅり 수이 すい
小禄 오로쿠 おろく 우루쿠 うるく
토마리 とまり 투마이 とぅまい
那覇四町 나하욘마치 なはよんまち 나화유마치 なーふぁゆまち
西村 니시 にし 이리 いり
東村 히가시 ひがし 아가리 あがり
若狭町 와카사마치 わかさまち 와카사마츄 わかさまちゅー
泉崎 이즈미자키 いずみざき 이쥰쟈치 いじゅんじゃち
久米村 쿠메무라 くめむら 쿠닌다 くにんだ
三重城 미에구스쿠 みえぐすく 미이구시쿠 みいぐしく
屋良座森城 야라자모리구스쿠 やらざもりぐすく 야라자무이구시쿠 やらざむいぐしく
垣花 카키하나 かきはな 카치누하나 かちぬはな
久茂地 쿠모지 くもじ 쿠무지 くむじ
壺屋 츠보야 つぼや 치부야 ちぶや
首里三箇 슈리산카 しゅりさんか 수이산카 すいさんか
鳥堀 토리호리 とりほり 툰쥬무이 とぅんじゅむい
崎山 사키야마 さきやま 사치야마 さちやま
赤田 아카타 あかた 아카타 あかた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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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계인구 2024년 2월 1일 기준 [2] 가사 [3] 요즘에는 일본 표준 자형대로 적지만 예전에는 조금 다르게 적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那 자의 경우, 왼쪽 부분을 刀에다 가로 선 두 개를 그을 때, 두 가로 선이 刀의 오른쪽으로 조금 삐져나오게 썼고 #, 覇 자의 경우, 윗 부분을 覀의 형태가 아니라 襾처럼 아래의 가로선을 완전히 닫지 않은 형태로 썼다고 한다 #. 현재는 일본 표준 자형으로 바꿔서 那의 刀 부분에 가로선이 오른쪽으로 삐져나오지 않게 쓰고 #, 覇의 윗 부분은 覀로 쓴다 #. [4] '나' 부분을 길게 발음. [5] '나' 부분을 짧게 발음. [6] 두번째는 후쿠오카현 카스가시이다. [7] 열대기후가 아닌 이유는 아슬아슬하게 최한월의 평균기온이 18도를 밑돌기 때문이다. 1월 17.0도 2월 17.1도로 2개월이 열대기후 기준에 약간 못미친다. [8] 역대 최저 기온이 1918년 2월 20일의 4.9도이며, 2016년 1월 24일 동아시아 한파때 기록한 온도는 6.1도로 역대 7위에 해당함 [9] 슈리-나하의 관계는 서울-인천, 교토-오사카의 관계와 같다. [10] 오모로마치 일대. 미군이 주둔했다가 반환하여 재개발된 지역. [11] 당시 오키나와 현은 미국이 통치했다. [12] 그 전까지는 나하가 실질적으로 현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공식화하지는 않았다. [13]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14] 佐敷, 지금의 난죠 시에 위치 [15] 구스쿠(城)을 다스리던 오키나와의 호족 [16] 니시(西村), 히가시(東村), 와카사마치(若狭町), 이즈미자키(泉崎) [17] 여기서 삼십육성은 서른 여섯 가문이 아니라 그냥 많은 가문들이라는 뜻이다. [18] 어니 파일(Ernest Taylor "Ernie" Pyle)은 미군의 종군기자로 당시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의 심리 상담을 해주며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저격당해 사망하였다. 어니 파일 국제 극장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 갈 때는 운동화를 신는 걸 추천한다. 길이 장난 아니게 험하다. 비 오는 날에는 미끄러우니 조심하거나 가지 않는 것이 좋다. 혹시 차를 슈리 성 주차장에 주차했으면 다 내려와서 택시 타고 올라가는 게 좋다. [20] 최근 포장마차촌(야타이무라)이 생겼다. 입맛에 따라 추천할 만 하다 [21] 가마를 때며 나오는 매연이 주거지의 환경문제로 대두하였고, 이 때문에 대부분의 장인들은 요미탄손 등지로 이주하였으나, 매연의 문제가 없는 대신 크기도 작고 비용은 비싼 전기가마를 쓰는 곳들은 남아있다고 한다. [22] 천황의 종교. [23] ニライカナイ, 오키나와에서 바다 건너편 멀리에 있다고 전해지는 풍요로운 낙원. 신들과 망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24] 류큐 왕국에 있었던 8개의 주요한 신사 [25] 강용구 페트릭 신부 [26] 이 두 버스는 고속도로를 경유하며 보다 등급이 높은 공항리무진, 급행버스와 비슷하게 운행하기 때문에 패스로 탑승할 수 없다. [27] 계절편 [28] 3량 신차 도입 및 기존 2량 차량 일부의 1량 증가가 같이 진행된다. 관련 기사 [29] 다만 이 지역들은 대형 사철, 지하철 노선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나하시와 직접 비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편 나하시 인근의 지역들까지 나하 대도시권으로 간주되는데 이 권역이 면적과 인구수 모두 정령지정도시들과 비교하면 중간 순위 정도에 해당하는 등 광역철도 부설의 당위성은 충분하다. 1대 1로 비교하자면 기타큐슈시보다 좁고 사람이 많다. [30] 위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나하시의 현재 도로 크기로는 노면전차 선로 및 정류장 설치에 큰 어려움이 있다. 전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지어진 노선이 역과 선로를 공중에 만들어 도로와 분리시킨 모노레일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게다가 도로 일부를 빌려 병행하는 노면전차의 경우, 렌터카(노면전차 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관광객) 비중이 높은 나하시에서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할 수도 있다. [31] 나하시는 좁은 면적에 워낙 많은 인구가 있고 관광객도 많기에 어지간한 막장운영을 하지 않는 이상 적자가 날 수 없다. [32] 매년 벚꽃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33] 제주도 삼무공원 미카형 증기기관차와 비슷한 케이스다. [34] 국내에서는 어째서인지 토마 항구로 잘못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35] 츄라우미 수족관, 해양박공원, 이에지마 등 북부의 관광지에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나하 항구의 유일한 여객 노선이기도 하다. 다만 하루에 한 대씩 다니며 아침에 출발하니 주의. 사실 이 배는 오키나와에서부터 요론 가고시마까지를 왕복하는 장거리 노선이다. 때문에 깜빡하고 못 내리는 불상사가 생기면 무척 곤란해진다. [36] 주일미군 아버지와 현지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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