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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21:58:53

귀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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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고리
Earring

1. 개요2. 상세
2.1. 귀찌
3. 관리4. 맞춤법 논란5. 한국사6. 귀고리를 한 캐릭터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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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 구멍을 내어 달고 다니는 장신구. 피어싱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른 부위 피어싱보다는 좀 더 무난한 장신구로 여겨지는 편이다.

대부분 양쪽 귀에 다 하고 다니지만 한쪽 귀에만 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언밸런스 귀고리라고 왼쪽과 오른쪽 피스의 모양이 다른 경우도 자주 보인다.

2. 상세

천 원짜리에서부터 수십~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다이아몬드같은 귀한 광물이라도 박힌다면 크기에 따라 수천~수억도 가능할 것이다. 특히나 이건 2개가 한 쌍인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원래 역사적으로 선사 시대부터 남녀 모두가 착용하는 장신구였다. 예를 들어 경주시 황남대총은 남녀 부부가 같이 묻힌 쌍릉인데 남성용과 여성용이 모두 출토되었다. 황남대총 금귀걸이 문서 참조. 그러다 조선 시대 중기 이후부터 남성 귀고리 문화가 점차 줄어들고[1] 주로 여성용 장신구로 쓰이다가 2000년대 전후부터 다시 남성들 사이에서도 귀고리 문화가 복고하고 있다.

귀를 뚫어 놓고 오랫동안 귀고리를 안 하고 다니면 구멍이 도로 막히지만 흔적은 남는 듯하다. 뚫은 직후 얼음으로 차갑게 하면 막히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으로는 멀쩡한 자기 를 인위적으로 뚫어서 걸고 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으며 귀를 뚫으면 이 나간다고 안 뚫는 사람들도 있다. 켈로이드 체질로 인해 귀 자체가 혐짤이 될 수 있으며 무거운 귀고리를 하고 다니면 귀가 찢어질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병원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있다. 귀를 뚫을 때 뚫는 기구 상태가 안 좋다면 뚫은 자리가 곪을 수 있다. 귀를 뚫고 나서 B형 간염이나 C형 간염에 감염되는 경우도 있다. 뚫기 전에 켈로이드 체질이라면 귀를 뚫는 기구의 청결 상태에 상관없이 큰 상흔이 남을 수 있다. 전체 인구 중 4.5~16%는 켈로이드 체질이다. 켈로이드 체질용 피어스가 있기는 하지만 거무튀튀하고 단조로운 모양으로 되어 있어 치장용으로는 부적합하다.[2] 켈로이드 체질일 경우 귀를 뚫기보다는 귀찌, 자석 귀고리를 하는 게 훨씬 편하고 아름답다.

여담으로 오른쪽 귀만 뚫으면 동성애자라는 말은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권리(right)를 주장하기 위해 오른쪽(right)을 뚫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네이버 웹툰 모두에게 완자가에서도 언급한 적 있다. 허나 요새는 패션을 위해 한 쪽만 뚫거나 한 쪽이 막혀 버려 다른 한 쪽만 하고 다니는 경우도 많으니 오른쪽 귀만 뚫었다고 해서 동성애자라고 섣불리 판단하지는 말길.

한국에서는 종종 민간요법으로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귀를 뚫는 경우가 있다. 링크 이는 귀에 침을 맞아 병을 고친다는 이침 요법을 응용한 발상이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귀걸이를 한 젊은 남자가 두통 때문에 그랬다고 둘러 대는 상황극이 나오기도 했다.

한때 미용실에서 귀를 뚫어주었다고 한다.

후렌치 레볼루션 등 일부 놀이기구는 귀고리를 착용하고 탈 수 없다.

2.1. 귀찌

귀를 뚫지 않고 하는 것은 '귀찌'라고 부르는데 주로 스프링, 자석, 클립형으로 되어 있다. 어디에서나 손쉽게 살 수 있는 귀고리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상당히 드물다. 귀고리 침을 직접 갈아끼워 귀찌로 마개조하는 것도 가능하다.

결혼식장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유는 한국에서는 귀를 뚫지 않은 여성이 전체 여성의 50% 가까이 되기 때문이다. 귀를 뚫지 않은 사람은 그냥 귀걸이를 안 끼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사람도 결혼식 때는 귀찌를 끼는 경우가 많다.

미국 여자는 귀를 안 뚫은 비율이 20% 밖에 안 되지만 일본 여자는 76% 가까이가 귀를 안 뚫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귀를 안 뚫은 사람들을 위한 귀찌를 이어링(イヤリング, 이야린구)라고 부르고 귀를 뚫은 사람들을 위한 끝이 뾰족한 귀고리를 피어스(ピアス, 피아스)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이어링이 피어스보다 더 흔하다. 아이돌들도 귀를 안 뚫고 이어링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부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귀를 뚫으면 안 좋은 반응을 보이거나 팬질을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부 귀찌는 실제로 착용하게 되면 몇시간 또는 몇분정도 후에 미칠듯한 고통이 밀려오는데 귀찌의 스프링이나 클립이 강하게 무는 탓도 있고 끝이 뾰족하게 처리되어 있으면...

귀찌의 일종으로 이어 커프(Ear Cuff 또는 Ear wrap)라고 부르는 것도 있는데 일반적인 귀찌/귀고리보다는 훨씬 크고 화려한 장식품을 의미한다. 보통은 귀를 덮는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져 있으며 은근히 드래곤의 형상을 한 것이 많이 보인다. 보러가기[3]. 참고로 보아가 모 방송에서 화려한 이어 커프를 하고 나온 것이 화제가 되었다. 관련 기사 아마도 협찬인 듯?

3. 관리

귀를 뚫고 난 다음 관리하는 방법이 가장 중요하다.

귀를 뚫고 나서는 3~4주는 귀고리를 빼지 않고 그대로 착용해야 한다.[4] 귀고리를 만지작거리는 것은 상처를 잘 아물지 않게 해 주기 때문에 자제하는 것이 좋다. 1~2주 정도는 음주, 흡연은 삼가는 것이 좋은데 음주와 흡연은 면역력을 떨어뜨려 감염의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하게 되면 습기가 차기 쉽기 때문에 물기가 없도록 말리는 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말리지 않는다면 염증을 유발할 수 있고 그만큼 잘 아물지 않게 된다. 귀고리를 한 곳은 직접 수건으로 문질러 닦을 수 없으므로 드라이기를 이용해 차가운 바람으로 말려주는 것이 좋다.

잠을 잘 때 귀가 눌리거나 상처가 나지 않게 정 자세로 잠을 자는 것이 좋다. 잠버릇이 고약한 사람이나 모로 누워서 자는 버릇이 있는 사람들은 특히 주의해야 한다.

귀를 뚫은 곳에서 염증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후시딘 같은 항생제 연고를 7일간 하루 2회씩 발라주는 것이 좋으며 특이사항이 있는 경우에는 소염제를 챙겨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귀를 뚫은 후 며칠에서 한 주간 병원에서 관리해 주는 경우도 있으니 잘 알아보는 게 좋다.

귀를 뚫기 전에 금속 알러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데, 대부분 귀걸이에는 금, 은이 많다고 하지만 가격이 저렴한 악세사리들은 이를 도금한 니켈 형태의 귀걸이가 대다수이며 사람들은 니켈 성분에 의해 알러지를 호소한다. 만약 이것을 모르고 뚫은 경우에는 피부가 가렵고 따가운 느낌을 받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피부가 부어오르거나 진물이 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증상이 나타난다면 손으로 만지지 말고 액세서리를 뺀 뒤 냉찜질로 가려움증을 가라앉히는 것이 좋다고 한다. 18K 금이나 은, 그리고 타이타늄으로 된 액세서리를 선택하는 것이 안전하다. 물론 이 세 물질에도 반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100% 안전한 것은 아니다. 실리콘으로 된 투명귀걸이를 선택하는 것도 좋은데 무엇보다도 알러지를 예방할 수 있고, 투명 체질이라 귀걸이 착용을 허용하지 않는 학교에서는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5] 착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 실리콘도 알러지가 있는 체질이라면 드물게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과 파는 곳이 한정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최근에는 '주얼리 코트', '주얼리 실드'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코팅제가 있어 피부에 금속이 직접 닿지 않게 도우며 다양한 귀고리에 도전할 수 있다고 한다. #

4. 맞춤법 논란

귀고리는 귀+고리(ring)의 합성어인 귀엣고리의 준말이다.

목걸이와 짝을 맞추어 귀걸이라는 말도 있지만 목걸이는 글자 그대로 에 거는 것이고 귀고리는 귀에 거는 것이 아니라 귀에 다는 고리다. 즉, 귀고리의 '고리'는 '걸다'에서 파생된 '걸이'가 아니라 명사인 '고리(環)'다.

그러나 이 경우 생기는 한 가지 논란이 '꿰는' 타입이 아닌 귓바퀴에 '거는' 타입의 액세서리까지도 '귀걸이'라고 못 부르냐는 것이다. 귀고리 중에는 귀에 구멍을 뚫지 않고 귓바퀴에 거는 종류도 있는데 조선 시대의 귀고리가 그랬고 고리가 소 코뚜레만한 삼국시대의 태환이식도 이렇게 귓바퀴에 걸어서 착용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경우 글자 그대로 귀에 거는 귀고리이므로 귀걸이라 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1989년 맞춤법 개정 이전까지는 '귀걸이'와 '귀고리'는 이음동의어라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었으나 개정 이후에는 귀에 구멍을 뚫어서 그 구멍에 다는 액세서리는 '귀고리' 또는 '귀걸이', 방한용 귀덮개(귀마개) 등 귀에 거는 것은 '귀걸이'[6]가 되었다. 그러니까 지칭하는 대상이 두 가지가 될 수 있도록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귀걸이'도 귀고리의 이음동의어 표준어로 인정된다. 국립국어원 표준어대사전 참고.[7]

정리하자면 '귀걸이'라는 단어는 '귀고리'(ear ring)의 의미로도 쓰일 수 있고 '귀마개'의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5. 한국사

파일:신석기시대 귀고리 - 부산 동래구 복천박물관.jpg 파일:부산 출토 신석기시대 귀고리.jpg
부산 출토 신석기시대 귀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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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귀고리 부여의 황금문화
<nopad> 파일:고구려, 신라, 백제 귀걸이.jpg 파일:삼국시대 귀고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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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조선 귀고리 다양한 양식의 삼국시대 귀고리들
KBS 역사스페셜 – 조선시대 남자도 귀고리를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원래 신석기 시대부터 남녀 모두 일반적으로 착용하던 장신구였다. 특히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삼국시대 귀고리 중 몇몇은 사이즈가 상당히 커서 '귀에 구멍을 얼마나 크게 뚫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대표적으로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금귀걸이가 있다. 특히 신라 시대 태환이식은 귀에 걸기엔 너무 커 보여서 한때는 끈을 걸고 걸었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분황사 모전탑에 공양된 은제 귀마개나 황룡사지 출토 은제 귀마개를 고려하면[8] 태환이식은 착장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다만 이런 태환이식들은 속이 적당히 비어 있어서 보기보다는 무게가 가볍다고 한다.

선덕여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분황사 출토 은제 귀마개는 그 아름다움도 놀랍지만 선덕여왕이 직접 이런 귀마개를 착용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귀고리들은 금관, 발찌, 팔찌, 허리띠 등에 매달아 드리개 장식처럼 응용해서 쓰기도 했다. 특히 금관이나 허리띠에 다는 수식은 귀고리로 쓰일 때부터 장식이 화려하고 더 긴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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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고로 조선시대 중기 이전을 다룬 사극에서 고증을 제대로 맞추려면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특히 자주 나오는 고위 귀족이나 왕족일수록 귀고리, 팔찌, 목걸이 황금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도록 해야 한다.

드라마 화랑에서도 민호, 뷔 등이 긴 드롭 이어링을 착용했는데 아이돌이라 원래 귀를 뚫은 것이다. 드라마 중간중간에 귀걸이가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래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귓바퀴에 거는 귀걸이를 등장시켜 나름대로 고증을 살렸다. 귀를 뚫어야 하는 부담도 없는 데다 귀걸이가 크고 무겁더라도 착용이 가능하다. 이 드라마에서는 정웅인이 이런 귀걸이를 착용하고 등장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고증과 거리가 멀다는 인식이 있지만 장신구 소품 고증은 은근히 꼼꼼했던 드라마였다.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귀고리는 남녀노소 막론하고 흔히 달고 다니던 액세사리였다. 이 때는 여성 한정으로 귀에 걸치는, 그것도 도 아닌 노리개 같은 술을 달아놓은 귀고리가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인 일본인을 구분하지 않고 사람의 목을 잘라 전공을 부풀리려던 장수들이 이 수급의 귀에는 귀고리 자국이 있으므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속임수를 들켰다. 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4일 신유 여섯 번째기사를 참조. 정글고에도 이 이야기를 다룬 바 있다.[9]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한 역관 중국에서 겪은 실화 중 하나로 이런 것이 있는데 '대단히 콧대가 높아 조선인을 상대하지 않는 기생'에게 중국인이라고 속이고 접근했는데 그가 워낙 중국어를 중국인처럼 잘 해 처음에는 속았던 그 기생이 그의 귀를 보고 귀고리 자국이 있으니 당신은 조선인이라고 알아차렸고 그 역관은 부랴부랴 "내가 외아들이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여장을 시키면서 귀고리를 달았던 자국이다"라고 변명했다는 이야기다.

조선 중기부터 볼 수 없게 된 이유는 선조 시기 때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적인 문제로 젊은 남자들이 귀고리를 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신체발부 수지부모, 미개한 풍속이어서 금했다기보다는 귀고리 때문에 금과 은의 수입이 늘어나 국가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5년 9월 28일 기사 참고. 명나라가 망하고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면서 유교와 검소함을 강조했던 조선의 이념이 시너지 효과를 내어 사치의 상징인 귀금속 장신구 문화를 위축시키고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이어내려 오던 만큼의 화려함은 찾아보기 어랴워졌다. 사실 조선 자체가 중국식 제도를 대거 받아들이며 과거를 청산하고 재탄생했다는 느낌으로 이전 왕조들과 다른 점이 많다.

사실 이런 귀고리 박멸은 조선 초기부터 조짐이 있었는데 세종 시절 명나라에서 '원나라에 금 바친 것처럼 우리한테도 금 바쳐라'라고 요약할 수 있는 요구를 줄기차게 해 왔다. 그래서 세종은 금 상납을 피하기 위해 '조선에는 금이 많지 않다'는 핑계를 대려고 머리를 굴려야 했는데 막상 그렇게 핑계를 대자니 조선 여기저기에서 금을 유통하고 있는 곳이 너무 많았고 결국 세종은 금 금지령을 내려 조선에서 금을 감추고 명나라에 핑계를 댔다. 덕분에 금 상납은 면제받았지만 명나라에의 금 상납이 무위로 돌아간 후 금이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는데 중기로 이르러서 선조 때 그것이 유교적인 사상을 이유로 터진 것이다. 그래서 귀를 뚫는 귀'고리'도 대부분이 귓등에 걸치는 귀'걸이' 방식으로 바뀌넜고 교과서에서 으레 볼 수 있는 화려하고 현대 기준으로도 세밀하기 그지없는 형태의 금속 귀고리들도 대부분 끈 등으로 만들어 작은 은구슬이나 술장식을 달아놓은 노리개 형식으로 바뀌었다.

몽골계의 풍습을 금지한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런 장신구 문화는 몽골 같은 북방계보다는 오히려 인도차이나 반도, 대만, 오키나와로 이어지는 남방계 문화와 가깝다. 실제로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서는 직경 2~9cm, 심지어 20cm로 달하는 귀마개[10]나 귀고리가 존재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한국에서 귀고리를 거는 풍습은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인데 신석기 대표 유적인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흙으로 빚어 구운 직경 9cm짜리 귀마개들이 확인되었으며 삼국시대 아라가야 고분군인 함안 도항리 고분군, 신라 고분군인 경산 임당 고분군에서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러나 꼭 남방계만의 문화라고 하기에도 뭐한데 위 역사스페셜 영상을 보면 남자들까지 귀고리를 하는 문화는 흉노족, 선비족, 예맥족( 한민족) 등 북방민족의 풍습이었다. 조선시대에 통역관을 지낸 안정란이라는 사람이 중국을 갔을 때 능숙한 중국어와 함께 중국식 옷차림을 하고 한족만 출입 가능한 사창가를 갔다가 귀에 뚫은 귀고리 구멍 때문에 들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 청나라 시대에는 여성들이 만주족의 풍습대로 귀걸이를 한쪽 귀에 3개씩 해서 총 6개의 귀걸이를 달기도 했는데 황실에서 귀고리의 부품으로 사용하는 진주에는 신분에 따라 등급이 있었으며[11] 사극 드라마 연희공략 등에서 만주족식 삼중 귀걸이가 잘 묘사된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남자들이 귀걸이를 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를 자세히 보면 귀걸이가 보인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도 당시 고증을 살려 남자 배우들이 귀걸이를 하고 출연했다. 당시에는 험난한 항해를 떠나는 선원들이 일종의 부적으로 귀걸이를 착용하기도 했는데 영어 위키백과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링크

필리핀, 캄보디아, 남미 여러 나라들에서는 어린 여자아이들의 귀를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무조건 뚫는 경우가 매우 많으며 이로 인해 미국으로 넘어온 히스패닉들이 아동의 신체의 자유와 관련한 문제에 놓이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일본은 귀를 뚫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는지 오늘날까지도 귀를 뚫지 않은 여성의 수가 한국보다 훨씬 많고 일본 제국 시절에는 아이누 남녀들의 입술 문신과 함께 귀 뚫기도 금지한 선례가 있다.

6. 귀고리를 한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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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타



[1] 선조 중국인들이 비웃는다고 남성 귀고리 문화를 오랑캐의 풍속 취급하며 금지시킨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그러나 문화와 풍습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닌지 귀'고리' 대신 귀'걸이'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근데 이걸로 선조를 비난하는 건 선조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삼국시대 귀고리 유물은 현대에 유적 발굴 등을 통해 발견한 것이고 전문적인 역사학이 전무하던 조선시대때는 삼국시대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에서 알 수 있는 전반적인 역사의 흐름밖에 알 수 없으니 선조는 삼국시대 귀고리의 존재 자체를 알 수가 없었다. 당대 동아시아 제일의 선진국은 중국이었고 이미 신라 시대에도 관복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꾼 것처럼 선조 입장에서 당대 중국()인들이 조선의 귀고리 풍속을 미개한 풍습이라고 여기니 이를 따라 없애자고 생각한 것을 마냥 사대주의라고 비난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신체발부 수지부모, 미개한 풍속이어서 금했다기보다는 귀고리 때문에 금과 은의 수입이 늘어나 국가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2] 보통 티타늄이다. [3] 이 링크에는 검색어에 dragon이 들어 있으며 다른 디자인은 검색어에서 dragon 을 빼고 재검색하면 된다. [4] 물론 귀고리를 뺀다고 구멍이 곧바로 막히지는 않으므로 실수로 귀고리가 빠진 경우엔 빨리 꽂아주면 된다. [5] 단 큐빅이 있는 경우라면 제외된다. [6] 귀+걸('걸다'의 원형)+이(물건을 가리키는 접미사). [7] 귀걸이를 검색해보면 '「3」=귀고리'를 확인할 수 있다. [8] 귀에 뚫은 구멍이 다시 붙지 않도록 유지시키는 원판 모양 도구이다. [9] 원래 해당 내용의 웹툰을 볼 수 있도록 링크가 걸려 있었으나 아쉽게도 정글고가 유료화된 후 볼 수 없다. [10] 귀에 뚫은 구멍을 유지시키는 마개. 원판처럼 생겼다. [11] <皇朝礼器图式(황조예기도식)>: 황태후, 황후의 귀걸이는 1등 동주 2개, 황귀비, 귀비, 황태자비의 귀걸이는 2등 동주 2개, 비의 귀걸이는 3등 동주 2개, 빈의 귀걸이는 4등 동주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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