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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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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佛祖直指心體要節 (下卷)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高麗大藏經板-諸經板)

조선왕조 『의궤(儀軌)』

『동의보감(東醫寶鑑)』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일성록(日省錄)』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

새마을운동 기록물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한국의 유교책판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
17세기~19세기 한일 간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역사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4.19혁명 기록물

동학농민혁명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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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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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1~50호]
{{{#!wiki style="margin:-10px 0"
1. 서울 숭례문
  1.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2.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3. 여주 고달사지 승탑
  4.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5.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6.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7.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8.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9.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10. 익산 미륵사지 석탑
  11.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12.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13. 영천 거조사 영산전
  14. 안동 봉정사 극락전
  15.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16.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17.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18. 영주 부석사 조사당
  19. 경주 불국사 다보탑
  20.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21.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
  22.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23. 경주 석굴암 석굴
  24.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1.#26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1.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2.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3. 성덕대왕신종
  4.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5. 경주 첨성대
  6.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7. 창녕 진흥왕 척경비
  8.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9.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10. 상원사 동종
  11.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12.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13.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14.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5.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16.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17. 혜심고신제서
  18.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19.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20. 부석사 조사당 벽화
  2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22.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23. 예산 수덕사 대웅전
  24. 영암 도갑사 해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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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51~1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76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1.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2.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
  3.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4.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5.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6.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8.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9.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10.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11.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12. 금관총 금제 허리띠
  13.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14.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15.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16.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17.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18. 청자 참외모양 병
  19. 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
  20. 청자 구룡형 주전자
  21.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
  22. 청자 상감모란문 항아리
  23. 김천 갈항사지 동 · 서 삼층석탑
  24.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101~1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101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1.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2.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3.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4.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5.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6.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7. 계유명삼존천불비상
  8.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9. 이제현 초상
  10. 안향 초상
  11. 경주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
  12. 청자 철화양류문 통형 병
  13. 청자 상감모란국화문 참외모양 병
  14. 청자 상감당초문 완
  15. 청자 상감모란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16.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1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4)
  18.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19. 용주사 동종
  20.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21.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22.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23.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24. 녹유골호(부석제외함)
1.#126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1.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2. 금동관음보살입상
  3. 금동보살입상(1968)
  4.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5.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
  6. 징비록
  7.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8. 금동보살삼존상
  9.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10. 금동 용두보당
  11.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검 및 칼집 부속 / 투겁창 및 꺾창
  12.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13. 김홍도필 군선도 병풍
  14. 나전 화문 동경
  15. 정문경
  16. 동국정운
  17.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18.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19. 귀면 청동로
  20.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
  21.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22.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6 /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7
  23.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4, 5 /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
  24. 송조표전총류 권7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151~2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176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1.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2.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3. 분청사기 박지연화어문 편병
  4. 김정희필 세한도
  5. 장양수 홍패
  6.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7.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1)
  8.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2)
  9. 상지은니묘법연화경
  10. 양평 신화리 금동여래입상
  11.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12. 천마총 금관
  13. 천마총 관모
  14. 천마총 금제 허리띠
  15. 황남대총 북분 금관
  16.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17.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18.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19. 토우장식 장경호
  20.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
  2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22. 단양 신라 적성비
  23.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24. 금동보살입상(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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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201~2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201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1.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37
  2.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
  3.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4. 충주 고구려비
  5.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6.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7.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8. 보협인석탑
  9. 감지은니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13
  10.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11.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
  12. 금동탑
  13.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1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 31
  15. 정선필 인왕제색도
  16. 정선필 금강전도
  17. 아미타삼존도
  18. 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
  19. 청자 상감용봉모란문 합 및 탁
  20.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21. 백자 청화매죽문 유개항아리
  22. 경복궁 근정전
  23. 경복궁 경회루
  24. 창덕궁 인정전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251~3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1. 청자 음각'효문'명 연화문 매병
  2. 청자 양각연화당초상감모란문 은테 발
  3. 청자 음각연화문 유개매병
  4.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
  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
  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
  7. 백자 청화죽문 각병
  8.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9. 분청사기 박지철채모란문 자라병
  10. 백자 유개항아리
  11. 백자 달항아리(1991)
  12.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13. 포항 냉수리 신라비
  14.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1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75
  16. 초조본 아비달마식신족론 권12
  17. 초조본 아비담비파사론 권11, 17
  18. 초조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 권6
  19.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20.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2
  21.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
  2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23. 귀함별황자총통(1596년조)
  24.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2.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3.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
  4.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5. 백자 병형 주전자
  6.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7. 통감속편
  8.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9.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0. 백자 ‘천’ ‘지’ ‘현’ ‘황’명 발
  11. 백제 금동대향로
  12.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1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4.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15. 용감수경 권3~4
  16.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17.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8.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 나주 신촌리 금동관
  20.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2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22. 갑사 삼신불 괘불탱
  23.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24.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301~336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 번호 없음 ]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

한의학
<colcolor=#000> 개론 한의학개론, 한문
주 분야 경혈학 본초학 한방내과 원전 한방생리학 한방병리학 한방진단학 의사학
세부/연관 분야 침구학
사암침법
동씨침법
평형침법
본초학/목차
처방제형학
간계내과
심계내과
비계내과
폐계내과
신계내과
황제내경
상한론
동의보감
의학입문
각가학설

파일:external/haksunje.com/b4.jpg
<colbgcolor=#f39100> 동의보감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2015-1)[A]
대한민국 국보 (2015-2)[B]
대한민국 국보 (2015-3)[C]
<colbgcolor=#315288> 동의보감
東醫寶鑑
Precious Mirror of Eastern Medicine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A]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B]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신림동, 서울대학교)[C]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 활자본 / 목활자본
수량/면적 25권25책(오대산사고본)[A]
25권25책(적상산사고본)[B]
24권 24책(태백산사고본)/17권 17책[C][10]
지정연도 2015년 6월 22일
제작시기 1610년[11]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로고.svg
이름 한국어 동의보감(東醫寶鑑)
영어 Principles and Practice of Eastern Medicine
프랑스어 Principes et pratique de la médecine orientale
국가·위치 대한민국 서울
소장·관리 국립중앙도서관
등재 유형 기록유산
등재 연도 2009년
제작 시기 1612년


1. 개요2. 역사적 배경3. 세계기록유산 지정4. 특징
4.1. 영향
5. 비판6. 번역
6.1. 동의보감과 저작권법
7. 400년만의 재편찬8. 의의9. 그 외10. 국보 (2015-1), 구 제319-1호11. 국보 (2015-2), 구 제319-2호12. 국보 (2015-3), 구 제319-3호13.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5호14. 관련 문서1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정부에서 지정한 국보 제319호로 허준이 완성한 조선 시대의 의학서.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 <목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허준은 동국(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라 하여 ≪동의보감≫이라 이름하였으며, 훈련도감 자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조선 시대에 이미 중국과 일본에도 소개되었고, 현재까지 한국 최고의 한방 의서로 인정받고 있다. 중세 동양 최고의 의서 중 하나로 국외에도 명저로 소개되었고 수차례 번역된 바 있다. 사실 의학서의 절대량으로 보면 중국 쪽이 훨씬 많으나 체계적인 분류와 관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였고 중의학 기록물에 대한 국가적 관심도 부족했던 점을 감안하면 동의보감이 일정 부분 앞선다.

또한 2009년 7월 31일,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세계유산으로 거듭났다.

2. 역사적 배경

선조 때 당대의 어의(御醫 사전참고)와 유의(儒醫 사전참고)들이 왕명을 받고 중국 한국의 의학 서적을 하나로 모아 연구, 편집 등 작업에 착수한 것을 광해군 3년( 1610년)에 허준이 마무리하여 완성하고 광해군 5년( 1613년)에 간행한 의학 서적이다.

참고로 선조 대에 그나마 꼽을 수 있는 문화사업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중단되고 대부분이[12] 광해군 초에 허준이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 받아서[13][14] 작성되고 완성되어[15] 간행되었기에[16] 일반적으로 허준의 개인저작이거나 광해군의 전후복구 내역[17] 중 하나로 간주된다.

3. 세계기록유산 지정

한의학에 대한 기록이다 보니 중국 쪽이 얽힌 일이 있다. 2005년 한국은 보건복지부를 중심으로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 기념 사업 추진단'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등재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는 언론을 통해 중국에도 알려졌으며 2005년 당시 강릉 단오제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로 상처입은 중국의 자존심을 다시 한번 건드리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이 중의학을 한국 문화 유산으로 등재한다는 중국 찌라시들의 자극적 선동까지 더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2009년 동의보감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등재사유는 예방 의학 측면과 공공 의료 서비스 측면에 대한 선구적인 면에 대한 고평가이다.[18] 이 당시 중국 내에서는 중의학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서도 기록등재을 후발주자한테 빼앗기냐면서 중국 문화재 당국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강릉 단오제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로 뜨겁게 데인 중국이 이후 허겁지겁 무형문화재 보호에 나섰듯이 이후 허겁지겁 중의학 서적 등재에 나섰으며 2011년 본초강목 황제내경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고, 그 이전에 세계기록유산에 1건씩만 등재시켰던것과는 달리 2건씩 등재시키기 시작했다.

4. 특징

총 25권 25책으로 나무 활자를 사용하여 발행하였다.[19] 모두 23편으로 내과학인 <내경편>, <외형편> 4편, 유행병·곽란·부인병·소아병을 다룬 <잡병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편과 <목차편> 2편으로 되어 있고,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한 체제정연한 서적이다.

목차에 내경편은 인체의 본질인 정(精), 기(氣), 신(神), 그리고 그 '정ㆍ기ㆍ신'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들(피, 꿈, 목소리, 말, 진액(津液), 담음(痰飮)) 및 '정ㆍ기ㆍ신'을 만들고 담고있는 오장육부, 기생충, 소변, 대변 순으로 기술되며, 각기의 작용 및 생리, 병리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외형편은 인체의 상부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순서대로 기술되며, 이는 기의 상승과 하강, 출입의 원리 및 내상 및 외감의 진행 방향이 외형에도 반영됨을 이해시키는 흐름으로 기술되어 있다. 한마디로 한의학의 기본 원리를 목차만 봐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구조로 편집하고 있는 것이다.

각 항목에 병증(病症)과 처방의 실질적인 것만을 빠짐없이 선택, 수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출전(出典)이 밝혀져 있기 때문에 각 병증에 대한 고금의 치방(治方)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그 밖에도 속방(俗方)을 기재하였다. 동의보감의 위치는 송대 이후에 무수히 많이 나왔던 의서들의 범람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맞물리기도 한다. 왕실 서고나 민간에 떠돌던 수많은 의서들 중에 정말 필요한 내용이 무엇이고, 어떤 지식을 당시 의사로서 알아야 되는가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인데 당연히 이 과정에서 의원의 의학관과 지식, 임상 경험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다만 중국에서 만들어진 책을 참조하는 과정에서 국내에 자생하지 않는 약초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식으로 기록한 부분이 있어, 편집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다.

집필 당시에 나름대로 검증되었던 거의 모든 의서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조선 세종 ~ 세조에 걸쳐서 발간했던 의방유취가 기초 원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0] 특히 상한론 황제내경, 의학입문을 인용한 부분이 많다. 물론 독창성 부분에서 떨어진다고 이 책이 얕보일 이유는 없다. 애시당초 의학이라는 실용적인 학문은 100% 창작, 독창적일 수가 없다. 당장 동의보감이 참고한 상한론이나 내경조차도 그전에 있었던 다른 텍스트와 임상 자료를 참고해서 만들어졌다는 연구가 있다. 또한 상한론, 의학입문 등이 외부의 기운 중심이거나 질병, 병증 중심이었던 데에 비해, 도교적 관점을 도입하면서 사람 중심의 의학을 정립한 공도 있다. 실제로 서문에 '병이 같더라도 사람에 따라 치법이 다르다'는 걸 언급하고 시작한다. 또 이후 한의학의 방향을 외사(外邪)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는 중국에 비해 한반도가 기후가 다양하지 않아 풍토성 질환이 적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최초로 집필된 뒤 후대에 국내의 현실에 맞게 재편집되었다는 의견이 있는데,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경악전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청나라 말에 대두된 온병학의 내용도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재편집이라기보단 중국을 기준으로 한 약방문 조합식을 국내에 맞게 변경한 것이란 의견 쪽이 더 신뢰도가 높다. 동의보감 시절에 경악전서는 있지도 않았고, 경악도 의사가 아니었다. 한참 동의보감(1596년 ~ 1610년)을 쓰고 있던 기간은 임진왜란 ~ 정유재란으로 한중일 3국이 한반도에서 전쟁 중이었다. 경악전서 서문에 따르면 장경악도 명나라의 군인이어서 이 국제 전쟁에서 참전했지만 군인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귀환했다. 이후에 의사로 직업을 바꾸고 성공해서 유경과 경악전서(1624년)를 저술하였다. 시간적으로 따져보면 장경악이 어쩌다가 동의보감을 보았다면 모를까 동의보감이 경악전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외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첫째, 도교적 공리(道敎的功利)와 실용주의적 사상을 적용하여 정확성과 실용성에 중점을 두어 그때까지 번잡다기(煩雜多岐)했던 많은 의서의 의술적 통념을 취사선택하여 정수(精髓)만을 골라 의술이론과 임상에 완벽을 기하였다.

둘째, 동양 의학사에서 최초로 정(精)·기(氣)·신론(神論)에 근본을 두고 내장기(內臟器)의 생리적 기능변조(機能變調)와 그 직접적인 병증을 일괄하여 내경편(내과)에서 새로 다룬 저작이다. 이것은 지금의 정신 신체 의학(心·身)과 같다. 즉, 의술의 본의(本義)를 정신 수양과 섭생에 두고, 복약과 치료는 2차적 의의라고 하였다. 이것이 《동의보감》 전편의 일관된 중요한 특색으로서 350여 년 전에 현대 의학의 선구적인 학설과 치료법이 이미 강구되었다는 사실은 경이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고, 《동의보감》이 한방(漢方)이면서도 한방적(韓方的)이라는 의의가 여기에 있다.

셋째, 당약(唐藥 : 중국에서 나는 약재)이 아닌 한국에서 나는 약재를 권장하였으며, 탕액편에 나오는 약물학의 약재는 속명(俗名)을 일일이 한글로 부기하여 채약(採藥)과 사용이 편리하도록 하였다.

넷째, 각 고방의서(古方醫書)를 고증할 때 인용한 학설이나 처방의 출처를 명시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억설이 아님을 밝혔고, 후학들에게 연구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현대 논문에서나 볼 법한 인용 출처 표시를 확실히 해 두었다.

다섯째, 각 처방약의 용량에 대한 관심인데, 고서에 표시된 것은 용량이 너무 많아 한국인의 체질에 적당치 않음을 지적하였으며, 오랫동안의 임상 경험으로 얻은 지식을 살려 표준 용량의 기준을 만들어 적의(適宜)를 가감하도록 하고, 그 복용법까지 명시하였다.

여섯째, 민간에서 아쉬운 대로 쉽게 조제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단방약을 집어넣었다.

4.1. 영향

동의보감이 한국 한의학계에 끼친 영향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들 수 있다.
조선 시대 일본에 간 통신사가 병이 나자 일본인 의사가 치료를 하러 왔는데 "야 저 야매 왜놈 의사는 집에나 가라고 전해라~"라는 발언을 했다. 그 말에 화난 일본인 의사가 "난 동의보감 보고 공부한 제대로 된 의사인데 왜 그러냐?" 하고 화를 냈고 마침 의술에 조예가 있던 통신사가 정말 공부했나 시험을 해본 후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의보감은 당시에 확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서를 참고하고 여기에 내의원의 연구가 더해져 완성된 일종의 의학 백과사전, 전공서적으로 출판되자마자 조선, 청나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심지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마다 북경의 서점에서 동의보감이 팔리고 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중국으로 파견 나간 사신이 중국 책방 거리에 책을 사러가면서 "조선에서 출판된 책으로 잘나가는 건 뭐가 있을까?"하고 돌아다녔는데, 동의보감의 점유율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내심 잘 나가는 문화국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기에 조선 양반이 쓴 성리학 책을 가장 기대했겠지만, 정작 조선에서 잡학으로 평가하던 의학서적이 가장 잘나갔었던 것. 다만 이 당시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던 시기였고, 성리학이 교조화되기 시작하던 조선과 달리 양명학과 고증학이 대세가 되던 시기였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당대 일본이라면 모를까, 당대 중국에서 굳이 성리학 서적을 조선에서 수입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5.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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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번역

동의보감은 한문으로 되어 있거니와, 현대 말과 맞지 않아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있어왔다. 동의보감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선비인 허민이다. 1964년에는 『동의보감』(상중하, 동양 종합 통신 대학 발행)을 완역하였다. #[21]

어렵고 난해한 동의보감을 쉽게 풀어서 쓴 역주본도 나오고 있다. 2012년 현재도 출간 진행 중으로 동의과학연구소 겸 양재동일한의원 원장인 박석준의 주도로 2002년 동의보감 완역본 1권 내경편이 발간되었고 2008년 동의보감 완역본 2권 외형편이 발간되었다. 2권 이후의 작업은 현재까지 없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국역·영역 작업을 완료하여, 2015년부터 한의학고전DB에서 공개하고 있다.[22] 2014년 개발된 스마트폰 앱인 '내 손 안의 동의보감'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1972년 동의보감(東医宝鑑), 1973년 속동의보감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어로 완역되어 출판되었다.

6.1. 동의보감과 저작권법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이자, 6.25 전쟁 당시 납북 조헌영 박사[23]의 주도로 국역본이 완성되었다. 이후 1982년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다시 펴낸다.

한의학계는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로부터 판권을 옮긴 '동의보감'(여강출판사)과 허민의 '동의보감 국역증보'(남산당)를 주로 참고했으나, 내용과 해석이 분분하였다.[24][25]

이 북한 번역본을 둘러싼 사건 덕분에, 동의보감은 한의학뿐만이 아니라, 한국 저작권법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조헌영 박사의 번역을 참고한 여강출판사의 '동의보감'과 흡사한 법인 문화사[26]의 '동의보감' 국역본이 나왔는데, 여강출판사 측이 이를 고소한 것이다. 하급심에서는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이 나온 적이 있다. 2001년부터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2005년 경 법원이 북한과의 판권 계약을 주장한 여강출판사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하여 북한에 조회를 하자, 북한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저작권사무국'[27]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저작권사무국은 저작권자의 승인과 저작권사무국의 공증 확인서가 없는 한 남측에서의 우리 저작권에 대한 이용은 저작권 침해로 된다[28]는 것을 알립니다."라는 공문을 보냈고, 이에 법원은 저작권을 주장한 원고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29] 원고는 북한 출판사가 1978년 조선족 문화 예술관에 판권을 위임하고, 남한인이 그곳에서 판권을 취득해 왔다고 주장했으나, 북에서는 이런 일이 없다고 한 것이다.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라 저작권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남북한은 저작권 관련 국제 협약인 베른 협약에 가입하고 있다. 북한의 법학사전 설명을 보면, “과학, 문학 또는 예술의 창작품에 대하여 창작자가 가지는 권리"가 저작권임을 명시하고 있다.

7. 400년만의 재편찬

우수한 한의학 의서이긴 하지만, 21세기 현 상황에선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 이에 한국한의학연구원은 동의보감 편찬 400년만에 재편찬 사업을 2012년에 추진하였으며, 2016년까지 집필을 완료하고 편집 과정을 거쳐 2020년에 공개하였다.

동의보감은 1613년 발간돼 지금까지 한의학 대표 교과서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등장한 임상적 성과를 담지 못하며, 일부 내용은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게 한계점으로 꼽혀왔다. 이에 신동의보감은 크게 기초 한의학, 임상 한의학, 한국형 한의학 등 3개 분야로 나눠 동의보감을 재집필하기로 하였다. 기초 및 임상 한의학 분야는 동의보감 외 중요 문헌 고찰을 통해, 현재까지 등장한 동아시아 한의학을 중심으로 집대성하기로 하였다. 여자 태아를 남자로 바꾸는 식의 '전녀위남법', '은형법' 등 황당무계한 부분에 대한 리뷰도 포함된다. 주목할 부분은 한국형 한의학 편찬 사업이다. 동의보감 이후 국내 한의사가 자체 개발해 현장에서 사용 중인 치료 기법을 체계화해 추가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신동의보감은 한의학 교육과 일선 한의사들의 임상 참고 자료로 보급될 예정이다. 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될 때마다 위키백과 형식의 업데이트 시스템도 구축된다. 즉 허준의 업적을 계승하고 동의보감 편찬 이후 의학적 성과를 한데 모아 현대 한의학의 임상적, 과학적 성과를 반영한 통합형 근거 중심의 한의학서를 만든다는 것이다.

8. 의의

동의보감은 세계기록유산임과 동시에 국보 제3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의보감은 중세 동양 최고의 의서 중 하나로 현재까지도 한국 최고의 한방 의서로 인정받고 있으며, 왕명으로 편찬되어 일반 민중이 쉽게 사용 가능한 의학지식을 담고 있는 세계 최초의 공중보건의서이다. 서양에서 공중보건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19세기임을 고려하면, 이미 우리나라는 서양보다 몇 세기나 앞서 공중보건과 예방의학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동의보감을 통해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런 선구적인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할 수 있는 기록물이다.

9. 그 외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동의보감은 일반인이 쉽게 볼 수 있는 서적이 아닌 전문서적이다. 한글 번역본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약초학이나 한의학적 지식이 있어야만 의학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게다가 분량이 무지막지하다.[30] 내경편이 한자로 4권인데 한국어 번역을 하자 200자 원고지에 8천 쪽이었고, 외경편이 한자로 4권인데 한국어 번역을 하자 200자 원고지 9천 쪽 분량이었다. (외경편 2160쪽)[31] 당연히 분권해서 판매 중이지만 그 한 권으로도 충분히 흉기가 될 정도. 단순 암기는 둘째치고, 환자가 생겼을 때 바로바로 해결법을 찾기도 힘들다. 민간 배포용이라는 의도로 만들기는 했지만, 완전 초보자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시중에서 동의보감 검색해봐야 소설 동의보감밖에 안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점을 악용해서 음식점이나 판매점에서 '동의보감에 나온 xx의 효능' 하는 식으로 뇌피셜을 적어 놓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대충 좋을법한 효능을 나열해놓고 출처가 없으니 동의보감이라고 적는 식.

허준이 침구에 능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것은 일부 무면허 침구사들이 근래 내세운 주장이다. 이들은 허임의 일화를 내세워 침구의가 전혀 다른 분야인 것처럼 포장하기도 한다. 이것을 위해 침의 vs 약의라는 식으로 몰고가는 경우도 있는데 실록을 통틀어 약의라는 직종이 따로 존재한 적은 없다. 더군다나 침의를 따로 양성하고 관리하는 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침의는 어디까지나 기존 체계의 일부로 존재하였다.

세종 때에 침구의를 뽑기 시작하면서 침구학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일종의 전문의가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력의, 치종의 등의 다른 전문의도 있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전문 분야의 차이라서 과거 시험에서는 비중의 차이가 있으나 한의학 전반에 대하여 모두 공부하여야 했다. 무엇보다 침의가 약 처방한 내용도 버젓이 나오고 있다. 실록에서 허준이 '소신은 침을 잘 모르옵니다만(후략)'라고 하여 침의인 허임이 침을 놓게 한 기록이 있으나, 이 부분도 앞뒤 문맥을 파악해야 한다. 선조가 편두통이 생겨 어떤 식으로 치료할지 허준과 상의하는 부분이며 이때 허준은 침구 치료를 권하면서 침의인 허임을 높이기 위해 겸양의 표현으로 저 말을 한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때의 왕실 의료는 집단 협진 체제였다. 즉 주치의격인 원로 의사가 병명을 진단하면 그 밑의 의사들이 각각 혈자리를 잡고 침을 놓는 방식이었다. 당장 허임이 나오는 저 기사만 봐도 허준은 병명을 진단하고 남영은 혈자리를 잡고 허임이 침을 놓는 방식이었다. 허준이 정말로 침구에 능하지 않았다면 선조가 침구 치료에 대해 허준과 상의할 이유가 없다. 현대 의학으로 비유하면, 대통령 주치의가 병명을 진단하고 좀더 수술 실력이 능숙한 다른 의사가 수술을 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 주치의가 수술에 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런 방식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왕의 몸에 침습적 치료인 침 치료를 하기 때문에 만전을 기하기 위한 것이다. (실록에서도 침의의 실수로 왕이 죽는 경우가 몇 번 나온다.) '침구편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편이다. 23편 중 달랑 1편이 침구에 할애되어 있을 뿐'이라고 하나 이는 동의보감의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 동의보감의 신형편을 제외하고는 각 편마다 끝 부분에 침구 관련 내용이 서술되었다. 무엇보다 허준의 다른 저작들에도 침구 관련 내용이 나온다.


동명의 소설도 있다. 정확한 제목은 < 소설 동의보감>이다. 해당 책은 발간 당시 공전의 대 히트를 기록했고, 이후 tv 드라마 < 허준>으로 만들어졌는데, 드라마 역시 히트를 쳤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게임 임진록 2에서는 전광렬이 열연한 드라마 허준의 대히트로 멀티플레이 조선군 진영 영웅 유닛으로 패치 추가됐다. 여기서 허준의 전용 업그레이드가 동의보감인데 허준 주변 아군 유닛을 서서히 치료해주는 효과다. 허준은 임진왜란을 겪은 인물이니 그가 나와도 이상할 건 없지만 동의보감은 정작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나왔다.

10. 국보 (2015-1), 구 제319-1호[A]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許浚,1539∼1615)이 1610년(광해군 2)에 조선과 중국에 유통되던 의서와 임상의학적 체험을 통한 치료법을 엮어놓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의서이다. 선조는 1596년에 허준과, 양예수(楊禮壽), 이명원(李命源) 등에게 명하여 의서를 편찬토록 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허준은 14년 동안 정력을 쏟아 1610년에 드디어 완성하였으니 이것이『동의보감』이다.『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사람이 찬술한 의서 중에서 최고라는 국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 초간본은 편찬된 지 3년 후인 1613년(광해군 5) 11월에 내의원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으며, 모두 25권 25책이다.

내용은 목록 2권, 「내경편(內景篇)」4권 26조,「외형편(外形篇)」4권 26조,「잡병편(雜病篇)」11권 38조,「탕액편(湯液篇)」3권 17조, 「침구편(鍼灸篇)」1권 1조 등 모두 25권 108조목으로 구성되었다. 전개방식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의 5대강(大綱)을 기준으로 각기 세부 분류한 다음 해당되는 병의 이론, 처방, 출전을 밝혀놓았다.

『동의보감』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곧 명말청초(明末清初)에 중국으로 유출되어 중국에서는 1763년(乾隆 28)이후 수차례 간행되었다. 일본에서도 1724년(享保 9)에 교토서림(京都書林)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1799년(寛政 11)에는 오사카서림(大坂書林)에서 재판본이 간행되는 등 『동의보감』은 동양의학의 필독서가 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東醫寶鑑』 전 25책 가운데 內景篇 卷1이 수록된 冊3의 서문 권두에는 “萬曆四十二年(1614, 광해군6)二月日/內賜東醫寶鑑一件五臺山上/ 左承旨臣李[手決]”의 內賜記가 있다. 그 뒤에는 萬曆三十九年(辛亥, 1611, 광해군3) 孟夏에 지은 月沙 李廷龜(1564~1635)의 서문과 “萬曆四十一年(1613, 광해군 5)十一月日內醫院奉敎刊行”의 刊記가 있다. 또한 “通訓大夫行內醫院直長臣李希憲(1569~1651)” 및 “通訓大夫行內醫院副奉事臣尹知微(?~?)” 등 監校官의 銜名이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東醫寶鑑』은 완질을 갖추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11. 국보 (2015-2), 구 제319-2호[B]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許浚,1539∼1615)이 1610년(광해군 2)에 조선과 중국에 유통되던 의서와 임상의학적 체험을 통한 치료법을 엮어놓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의서이다. 선조는 1596년에 허준과, 양예수(楊禮壽), 이명원(李命源) 등에게 명하여 의서를 편찬토록 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허준은 14년 동안 정력을 쏟아 1610년에 드디어 완성하였으니 이것이『동의보감』이다.『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사람이 찬술한 의서 중에서 최고라는 국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 초간본은 편찬된 지 3년 후인 1613년(광해군 5) 11월에 내의원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으며, 모두 25권 25책이다.

내용은 목록 2권, 「내경편(內景篇)」4권 26조,「외형편(外形篇)」4권 26조,「잡병편(雜病篇)」11권 38조,「탕액편(湯液篇)」3권 17조, 「침구편(鍼灸篇)」1권 1조 등 모두 25권 108조목으로 구성되었다. 전개방식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의 5대강(大綱)을 기준으로 각기 세부 분류한 다음 해당되는 병의 이론, 처방, 출전을 밝혀놓았다.

『동의보감』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곧 명말청초(明末清初)에 중국으로 유출되어 중국에서는 1763년(乾隆 28)이후 수차례 간행되었다. 일본에서도 1724년(享保 9)에 교토서림(京都書林)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1799년(寛政 11)에는 오사카서림(大坂書林)에서 재판본이 간행되는 등 『동의보감』은 동양의학의 필독서가 되었다.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東醫寶鑑』에는 內賜記가 없다. 그러나 서문의 앞부분에 ‘宣賜之寶’를 찍었고, 우측 변란 밖으로 후에 조선총독부에서 찍은 ‘茂朱赤裳山 史庫所藏 朝鮮總督府寄贈本’이라는 長方形朱印이 있어 적상산사고본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사고본의 내지에 內賜記가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책이 기증되는 특정 시기에 해당 면이 결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東醫寶鑑』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동일본으로 완질을 갖추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12. 국보 (2015-3), 구 제319-3호[C]

『동의보감(東醫寶鑑)』은 허준(許浚,1539∼1615)이 1610년(광해군 2)에 조선과 중국에 유통되던 의서와 임상의학적 체험을 통한 치료법을 엮어놓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의서이다. 선조는 1596년에 허준과, 양예수(楊禮壽), 이명원(李命源) 등에게 명하여 의서를 편찬토록 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허준은 14년 동안 정력을 쏟아 1610년에 드디어 완성하였으니 이것이『동의보감』이다.『동의보감』은 우리나라 사람이 찬술한 의서 중에서 최고라는 국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 초간본은 편찬된 지 3년 후인 1613년(광해군 5) 11월에 내의원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으며, 모두 25권 25책이다.

내용은 목록 2권, 「내경편(內景篇)」4권 26조,「외형편(外形篇)」4권 26조,「잡병편(雜病篇)」11권 38조,「탕액편(湯液篇)」3권 17조, 「침구편(鍼灸篇)」1권 1조 등 모두 25권 108조목으로 구성되었다. 전개방식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의 5대강(大綱)을 기준으로 각기 세부 분류한 다음 해당되는 병의 이론, 처방, 출전을 밝혀놓았다.

『동의보감』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곧 명말청초(明末清初)에 중국으로 유출되어 중국에서는 1763년(乾隆 28)이후 수차례 간행되었다. 일본에서도 1724년(享保 9)에 교토서림(京都書林)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1799년(寛政 11)에는 오사카서림(大坂書林)에서 재판본이 간행되는 등 『동의보감』은 동양의학의 필독서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東醫寶鑑』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24권 24책으로 太白山史庫本이며, 다른 하나는 동일 판본이나 內賜記가 없는 것으로 17권 17책이다. 太白山史庫本은 전체 25책 가운데 책16에 해당하는 雜病篇 卷六이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일 판본인 17권 17책 가운데 雜病篇 卷六이 포함되어 있어 태백산사고본의 내용을 보완하고 있다. 2008년 지정 당시 『東醫寶鑑』 초간본의 전해지는 사례가 드문 현실에서 太白山史庫本이라는 역사성과 雜病篇 卷六의 보완을 통한 초간본 완질이라는 가치가 인정되었다.

13.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5호

「동의보감(東醫寶鑑)」은 1596년(선조 29) 왕명에 따라 허준(許浚, 1539~1615)이 유의(儒醫) 정작(鄭碏), 태의 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1610년(광해군 2)에 25권 25책으로 완성한 의서이다.

「동의보감」은 고 김두종(金斗鐘) 박사가 한독의약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로 내경편 권2와 외형편 권1, 침구편 등 3권 3책이다. 「동의보감」은 비록 완질본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중기의 목판인쇄문화는 물론 한의학 및 서지학의 연구에 활용될 수 있을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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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구 제319-1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B] 구 제319-2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 [C] 구 제319-3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A] [B] [C] [A] [B] [C] [10]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24권 24책으로 된 태백산사고본이고 나머지 하나는 17권 17책으로 된 판본이다. [11] 문화재청 링크 [12] 선종왕(宣宗王)은 몸조리를 하는 방법으로써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의학에 관심을 두고 백성들이 병으로 앓는 것을 걱정하여 병신년(1596년, 선조 29)에 태의(太醫)로 있던 허준(許浚)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즘 조선이나 중국의 의학책들은 모두 변변치 않고 보잘 것이 없는 초록(抄錄)들이므로 그대는 여러 가지 의학책을 모아서 좋은 의학책을 하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사람의 병은 다 몸을 잘 조섭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므로 수양하는 방법을 먼저 쓰고 약과 침, 뜸은 그 다음에 쓸 것이며 또 여러 가지 처방이 번잡(煩雜)하므로 되도록 그 요긴한 것만을 추려야 할 것이다.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일찍 죽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약초가 많이 나기는 하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니 이를 분류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 허준(許浚)은 유의(儒醫) 정작(鄭碏, 1533~1603)과 태의(太醫) 양예수(楊禮壽, ?~1597)⋅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례남(鄭禮男) 등과 함께 편집국(編輯局)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대략적인 체계를 세웠을 때 정유년(1597년, 선조 30) 난리를 만나 의사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편찬은 할 수 없이 중단되었다. 그 후 선조가 또 허준에게 혼자서라도 편찬하라고 하면서 국가에 보관하였던 의학책 500여 권을 내주면서 참고하라고 하였다. 편찬이 아직 절반도 못 되었는데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새 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경술년(1610년, 광해군 2)에 비로소 이 사업이 끝나서 왕에게 바쳤다. 이 책의 이름을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지었으며 모두 25권으로 되어 있다. (『월사선생집』권39, 서, 동의보감서) [13] 사간원이 아뢰기를,...죄인 허준(許浚)의 죄악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라 다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배된 후에도 기탄없이 방자하여 태연스럽게 출입하기를 평인과 다름없이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잠상인(潛商人)들과 내통하며 꺼리는 일이 없습니다. 본래 흉악 패려한 사람으로서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뜻밖의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위리 안치를 명하여 출입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조의에 대해서는 객사(客使)가 지금 막 와서 해변의 방비가 참으로 긴급하니 우선 추고하고, 허준에 대해서는 그가 어찌 방자하게 원망을 품는 일이 있겠는가.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광해 1년 4월 21일) [14] 전교하였다. "허준(許浚)은 호성 공신(扈聖功臣)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에 내가 마침 병이 많은데 내국(內局)에는 노성한 숙의(宿醫)가 적다. 더구나 귀양살이한 지 해가 지났으니,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이제 석방하는 것이 가하다." 〈사신은 논한다. 허준은 온 나라의 죄인이니, 상이 어떻게 사사로이 할 수 있겠는가. 허준이 선왕의 말년을 당하여 궁중에서 사랑을 받았으며 많은 잡약(雜藥)을 올려 마침내는 선왕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슬픔을 당하게 하였으니, 그의 죄상을 캐어보면 시역(弑逆)하였다고 말하여도 가하다. 이미 그의 죄를 밝게 바로잡아 신명과 사람의 분노를 시원하게 할 수 없었는데 지금 도리어 해가 지나도록 귀양살이한 것이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 충분하다고 말을 하니, 아, 상에게 병이 많은 것은 진실로 염려할 만하지만 선왕의 병을 잊을 수 있겠으며, 상에게 공로가 있는 것은 진실로 기록할 만하지만 선왕에게 죄가 있는 것은 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상의 이번 일은 삼사(三司)에 달려 있으니, 삼사는 당연히 합사(合辭)하여 성토하도록 청원해서 우리 임금을 잘못이 없는 곳에 이르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이 뒤에 간원이 홀로 발론하였다가 즉시 정지하였으니, 오늘날의 이목 구실을 하는 신하는 임금이 하고 싶어하는 대로 따르는 자라고 말할 만하다.〉 (광해 1년 11월 22일) [15] 전교하기를,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찬집(撰集)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찬집하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1 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를 내의원으로 하여금 국(局)을 설치해 속히 인출(印出)케 한 다음 중외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하였다. 【책 이름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인데, 대개 중조(中朝)의 고금 방서를 널리 모아서 한 권에 모은 다음 분류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 (광해 2년 8월 6일) [16] 내의원 〈관원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하삼도(下三道)에 나누어 보내서 간행하게 할 일을 앞서 이미 계하하여 각도에 공문을 발송한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책 수가 매우 많고 공사가 적지 않기 때문에 각처에서 탈보(頉報) 및 장계가 올라온 것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지만, 각도에 재료를 준비해서 해가 바뀌면 즉시 나누어 간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책은 다른 책과 달라서 두 줄로 소주(小註)를 써놓아서 글자가 작아 새기기가 매우 어려우며, 약명(藥名)과 처방은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사람의 목숨에 관계가 되는데 애초에 본책(本冊)이 없어서 필사본으로 한 부를 간행했을 뿐이므로 다시 의거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외방(外方)에 맡겨 두면 시일이 지연되어 일을 마칠 기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착오와 오류가 생겨서 결국 쓸모없는 책이 되어 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본원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과거에 의서(醫書)를 인쇄해 낼 때처럼 의관(醫官)이 감수(監修)하고 교열(校閱)한다면 반드시 일의 성취가 빠르고 착오가 생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해사(該司)의 물력(物力)이 곤란하기는 하나, 한 달에 들어가는 요미(料米)와 가포(價布)를 계산해 보면 미(米)·태(太)가 아울러 18석이고 무명이 20여 필인데 그 공정이 1년의 공사에 불과하므로 통계가 크게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사로 하여금 혼자 마련하게 한다면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삼도가 앞서 재료를 마련해 놓았으니, 들어갈 무명을 헤아려서 각각 수송하여 경국(京局)을 돕게 한다면 공사간에 다 편리하고 이로울 것입니다. 신들이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 계획이 제일 낫습니다.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 3년 11월 21일) [17] 예조가 아뢰기를, "근래 사시의 운행이 차례를 잃어서 염병이 재앙이 되고 있습니다. 천행반진(天行斑疹)이 가을부터 크게 성해서 민간의 백성들이 많이 죽고 있는데, 이는 예전엔 거의 없던 증상입니다. 혹은 금기(禁忌)에 구애되고 혹은 치료할 줄 몰라 앉아서 죽는 것을 쳐다만 보고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돌림병에 일찍 죽는 것이 진실로 측은하니, 내국의 명의로 하여금 의방(醫方)에 관한 책을 널리 상고하여 경험해본 여러 처방을 한 책으로 만들어서 인쇄 반포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허준(許浚) 등으로 하여금 속히 편찬해 내게 하고, 여단(厲壇)에도 다시 기도하여 빌도록 하라." 하였다. 【가을과 겨울 사이부터 이 돌림병이 생겼는데, 세속에서는 당홍역(唐紅疫)이라 하였다. 또 염병이 간간이 돌아, 이때부터 끊긴 해가 없었다. 수구문 밖에 시체들이 서로 겹칠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살육을 당한 억울한 혼령들이 초래한 것이라 하였다. 】 (광해 5년 10월 25일) [18] 유네스코에서 한국과 중국의 의서를 비교해서 동의보감을 더 높이 평가했다든가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 당대 금속활자는 고정이 쉽지 않은 등 기술적인 문제로 대량 인쇄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대량으로 찍어내는 판본은 모두 목재활자를 사용하였다. [20] 의방유취가 과연 동의보감의 기저본이었는지, 역사적 연속성은 어느 정도 였는지는 2010년대 이후 관련 주제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 한국 과학사 학회 신동원 교수의 저술들을 참고하면 된다. [21] 참고로 1년 뒤에, 『 열하일기』를 완역하였다. [22] 원문, 국문, 영문 모두 열람 가능 [23] 시인 조지훈의 부친이기도 하다. 한의사 출신이며, 남한 제헌의원으로서 한의학계에 남긴 업적이 엄청나다. 1950년 보건의료 행정법안”의 제1장 총칙의 의료인 규정에 서양 의사 제도만 두고 한의사 제도는 폐지한 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앞장서서 폐지에 힘썼다. 북한에서도 최초로 동의학( 남한 한의학에 해당) 박사가 되었으며, 현재의 한의학이 있기까지 큰 공헌을 하였다. 88세까지 살아 굉장히 장수했는데 어느 정도냐면 아들 조지훈보다 20년은 더 살았다. [24] 여강출판사는 1993년 북한판 동의보감의 저작권자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로부터 15년 동안 한국에서의 판권을 가지고 계약했다고 하였다. 밑에서도 서술하지만 이는 거짓이다. [25] 다른 기록유산 중 조선왕조실록 북한에선 1980년, 남한에선 1994년에 완역되었다. 승정원일기 일성록도 현재 번역 중이다. 참고로 승정원일기는 현재 진형형으로 번밀레 중이고, 완성은 언제 될 지도 모른다. [26] 법인 문화사 측은 이것이 복제가 아니라, "국내 한의대 교수들로 구성된 번역 위원들이 동의보감 원문과 중국 서적을 토대로 책을 출판한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27] 2004년에 설립되었다. 아마도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함인 듯하다. [28] '~이/가 되다' 대신 '~(으)로 되다'를 쓰는 것은 북한 문화어 용법이다. [29] 유사 사례로 리조실록 사건이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 북측에서 완역한 리조실록 판권을 계약한 여강출판사와 무단 복제한 다른 출판사와의 소송으로, 이번에는 여강출판사가 승소하였다. 참고로 여강출판사는 이 외에도 많은 북한 저작물을 펴냈다. 북한 저작물은 상호주의에 관계없이 우리 저작권법 상의 보호를 받는다고 판시하여 상호 저작권을 보호하는 한국의 실정법에 배치되지 않으려면 응당 지켜야한다는 뜻이다. [30] 한문으로 된 영인본 기준으로 총 25권, 3200여 쪽, 160만여 자이다. 우리말로 풀어 쓰면 더욱 분량이 늘어난다. [31] 따라서 25권 전체에 1만 2천 ~ 1만 4천 쪽 정도 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소아과 국시를 치기 위해 배우는 홍창의 책이 약 700쪽, 전문의를 따기 위해 배우는 넬슨 책이 약 3천 쪽이다. [A] [B]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