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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7:53:22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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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교황 문장.svg 가톨릭 교회의 교황
파일:264_s_giovanni_paolo_II.png
제263대 복자 요한 바오로 1세 제264대 성 요한 바오로 2세 제265대 베네딕토 16세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제264대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Sanctus Ioannes Paulus II
Saint Pope John Paul II
파일:성 요한 바오로 2세.jpg
출생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크라쿠프주 바도비체
(現 폴란드 마워폴스키에주 바도비체군 바도비체)
사망 2005년 4월 2일 (향년 84세)
바티칸 바티칸 시 사도 궁전
재위기간 제264대 교황
1978년 10월 16일 ~ 2005년 4월 2일
서명
파일:요한 바오로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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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본명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Karol Józef Wojtyła)
부모 아버지 카롤 보이티와
어머니 에밀리아 카초로프스카
학력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 신학 / 박사)
신체 178cm
축일 10월 22일
문장 파일: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문장.svg [1] }}}}}}}}}
1. 개요2. 생애
2.1. 교황이 되기까지2.2. 반공과 민주화
2.2.1. 비판
2.3. 암살 미수 사건2.4. 교황으로서의 활동2.5. 사망2.6. 시복과 시성
3. 성향
3.1. 종교 간 대화3.2. 정통 교리 수호3.3. 마르셀 르페브르
4. 한국과의 인연
4.1. 1984년 방한
4.1.1. 광주와 소록도 방문4.1.2. 103위 순교자 시성식
4.2. 1989년 방한
5. 기타
5.1. 매체에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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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톨릭의 제264대 교황이자 성인.

20세기의 마지막 교황이자 21세기의 첫 교황으로 가톨릭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2. 생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
- 1978년 10월 22일, 즉위미사 강론에서.

2.1. 교황이 되기까지






동유럽을 대표하는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 출신의 교황이다. 최초의 동구권, 즉 슬라브권 출신 교황이었기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전까지는 교황이 주로 서구권, 즉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84대 교황 세르지오 1세 시칠리아에 거주하긴 했지만 안티오키아 출신의 시리아계 이민자였고, 87대 교황인 시신니오와 90대 교황인 그레고리오 3세도 시리아 출신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교황인 베드로 아랍인과 같은 셈계 백인인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교황=서구권 출신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요한 바오로 2세 이전까지는 하드리아노 6세의 사망 이래 무려 455년 간이나 이탈리아인들이 교황직을 독점해 왔다. 온화한 미소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전임자 요한 바오로 1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1달만에 사망하자 세계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非이탈리아인으로 400여 년만에 선출되었을 때의 여파 또한 상당했다. 선출된 지 한 달여만에 선종한 전임자를 계승하기 위해서 교황을 선출했는데, 그 발표와 더불어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라는 낯선 이름을 듣고 불안해하는 이탈리아 군중 앞에서 폴란드인인 새 교황이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첫 강복을 하자 사람들은 그제야 안심하며 환호했다. 격동의 20세기 말 ~ 21세기 초를 교황으로서 살다 간 이답게 굵직한 이벤트도 여럿 된다.

역사상 가장 국외 순방을 많이 다닌 교황이자 가장 인기가 많았던 교황이었다. 수석으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젊은 시절 3부 리그이긴 했지만 축구선수로도 활동했을 정도로 운동에는 만능이었다. 그래서 선천적으로 몸이 강골이라 온갖 병치레를 겪으면서도 80대 중반까지 살았다.〈보석 가게〉라는 이름의 희곡까지 썼다. 후임자인 베네딕토 16세만큼은 아니지만 여러 권의 신학 서적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즉위 초반에는 미남인 편이어서 세계적으로 환영을 받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회고에 따르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에 당선되기 전 추기경이었을 때 바티칸의 어느 회의에서 눈은 회의 주제와 상관없는 책에 가 있으면서 입에서는 회의에서 다루는 안건에 관한 좋은 해결 방책을 쏟아내고 있었다고 한다. 롤링 스톤즈 밥 딜런의 공연을 듣고 그와 악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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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어린 시절

2.2. 반공과 민주화

사실 추기경 시절에는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와 폴란드 공산정권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교황으로 선출될 때에는 폴란드 신자들이 인질로 잡혀 교황이 휘둘리지나 않을까 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우려가 있었고, 특히 영국은 무례에 가까울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어떤 신문에서는 ' 콘클라베가 아니라 초등학교 반장 선거 같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을 정도. 당시 이탈리아에 대한 칼럼을 쓰던 시오노 나나미 영국의 이러한 반응을 인용해서 "가톨릭 교회가 공산 진영에 대해 카드를 잘못 뽑았다"고 디스했다. 참고로 요한 바오로 1세의 선출에 대해서는 '보수파의 얼굴마담'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유럽과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군사력 경쟁이나 경제 제재 등 위협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신앙심에 바탕을 둔 용기와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평화적으로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공헌했다. 과거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프랑스와의 국교 수립을 위해 협상하던 중, 프랑스 측의 피에르 라발에게 "교황이 거느린 사단이 몇 개나 되느냐?"(다시 말해 "변변한 군사력도 없는 교황이 뭐가 대단하다는 거냐?"라며 무시한 것)고 말했던 적도 있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의 역할은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그리스도교 박해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공동대응을 주문하던 바티칸과 몹시 불편한 사이였다. 이는 서유럽 미국과의 국교를 수립하여 다시 국제사회에 진출하려는 스탈린에게 몹시 큰 장애물이었고, 특히 프랑스 가톨릭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있어서 더욱 그랬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외교관계의 개선을 위해 일시적으로 종교 박해를 중단하고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미국과의 국교 수립 후 더 이상 바티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지자 대대적으로 교회를 파괴하고 고위 성직자들을 처형했다. 스탈린의 종교 박해는 독소전쟁이 발발된 후에야 중지되었다.

1978년 10월 폴란드 출신의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Karol Józef Wojtyła·요한 바오로 2세의 본명) 추기경 교황 선출 당시 소련의 2인자이자 4년 후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 유리 안드로포프 KGB 의장은 체제에 대한 위협을 직감했다. 안드로포프는 즉각 폴란드에 있는 KGB 책임자에게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의 주민이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방임했는가”라고 물었다. 이어 소련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교황으로 인해 소련에 상당히 어려운 일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한 뒤 KGB에 대해 "폴란드 출신 인물이 교황에 선출된 이유를 분석하라"고 지시했다.

KGB는 며칠 뒤 " 폴란드인이 교황으로 선출된 배후에는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가 주도하고 미국 서독이 합작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KGB는 "이 음모는 폴란드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해체를 의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KGB의 분석은 어느 정도 신빙성을 확인했다. 또한 " 미국의 브레진스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이, 폴란드 출신 보이티와 추기경이 교황이 되도록 일을 꾸몄다"는 분석도 당시의 KGB로서는 의심할 만한 대목이었다. 브레진스키는 1977년 1월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백악관에 들어가기 직전인 1976년 폴란드의 보이티와 추기경이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설한 적이 있다. 당시 브레진스키는 보이티와 추기경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보이티와 추기경을 티 파티에 초대했다. (브레진스키도 폴란드 출신이다.) 두 사람은 모국어인 폴란드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두 사람의 친분 관계는 보이티와 추기경이 교황이 된 이후에도 지속됐다.

그러나 브레진스키가 보이티와 추기경이 교황이 되도록 콘클라베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다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미국 카터 행정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의 고위 외교관 출신으로 카터 행정부에서 백악관 안보 관료를 지낸 제임스 렌츨러는 1998년 10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보낸 기고에서 “ 폴란드인이 교황이 된 데 감동한 카터 대통령이, 냉전의 전개 방향을 뒤바꿀 만한 정책을 주도했다”고 회고했다.

그 중의 하나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최측근으로 ‘성직자 옷을 입은 키신저’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아고스티노 카사롤리 바티칸 국무장관과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 사이에 구축된 이른바 ‘ 바티칸 핫라인’이다. 이 핫라인을 통해 요한 바오로 2세와 독실한 침례회 신자인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사이에는 중요한 정책토론이나 의견 교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렌츨러는 "두 지도자가 군비축소, 인권, 기아구제, 당시 동유럽에서의 민중 소요사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의 잔학행위, 중국에서의 가톨릭 박해, 아프리카에서의 쿠바의 모험주의적인 행동, 중동 평화, 테러 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털어놓았다. 렌츨러는 양측이 모두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원칙을 존중하기는 했지만 “양측의 일치되는 견해에서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행동이 나왔으며, 이러한 행동들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확실하게 지켰는지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교황이 1979년 6월, 폭군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의 학정을 꾸짖다가 순교한 성 스타니슬라오 순교 900주년을 기념해 조국인 폴란드를 방문한 것을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의 서곡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조국 방문을 ‘순례’라고 표현하며 공산독재에 신음하는 동포에게 “당신들은 인간이다. 존엄성을 갖고 있다. 땅에 배를 깔고 기어다니지 말라.”는 유명한 메시지를 낭독했다.

교황의 폴란드 방문을 우려하던 당시의 공산정권은, 하필이면 왕에게 저항하다가 순교한 성 스타니슬라오의 순교 기념일에 맞춰 교황이 방문하는 것부터 의도적인 행보라고 판단하였지만, 차마 교황의 방문을 거절할수는 없어 교황이 폴란드 공산정권 수립 35주년, 나치 독일 침공 40주년을 기념해서 방문하는 것으로 방문 목적을 조작하기까지 했으며 전국의 교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교황은 우리의 적이다. 그는 모두에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입맞춤하고 사람들 모두와 악수를 나누는 등, 군중에 친숙한 행동을 한다.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을 보고 하는 짓이다. 우리는 청소년을 무신론자로 만드는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수단이 허용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를 방문한 9일 동안 바르샤바, 크라쿠프 등 대도시를 돌며 수백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은 가는 곳마다 “신념을 잃지 말라, 패배하지 말라, 용기를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거듭 전달했다. 폴란드는 물론 소련 공산당조차도 교황의 영향력에 기절초풍했고 브레즈네프, 그로미코, 안드로포프 등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극도의 우려를 표명했다. 그로미코는 테헤란에서 호메이니나 벌일 수 있던 일이 바르샤바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전부터 가톨릭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안드로포프는 교황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폴란드 국민의 대부분은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교황의 조국 폴란드 방문은 폴란드인의 신앙심을 감동시키는 것이기도 했지만, 애국심과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의식을 움트게 하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후 폴란드의 성직자들은 노동자나 지식인의 공산정권에 대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해나갔다. 결국 다음 해인 1980년 8월 폴란드는 동구권에서는 최초의 독자적인 노동조합인 ‘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를 쟁취했다.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솔리다르노시치는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였다. 이미 폴란드 가톨릭은 1956년 오하프 정권을 무너뜨리고 고무우카를 선출시킬 정도로 사회주의권 종교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1970년에도 고무우카 정권을 무너뜨려서 기에레크 정권에 이르면 공산당이 가톨릭 눈치를 살피는 정도였다. 브레즈네프는 이꼴이 날 줄 이미 알았기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의 입국을 금지하라고 요구했지만 기에레크는 폴란드인 교황의 입국을 거부했다간 정권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소련 서기장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후 교황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입증되었고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중부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까지 덩달아서 들썩이기 시작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리스도인 신자 수가 격감해서 동독의 경우에는 공산정권을 거치면서 그리스도교 신자의 수가 3분의 1 이하로 줄어들던 반면, 폴란드에선 신자들이 오히려 더 증가하여 1980년대 후반에는 미사의 정기적 참례율이 70%를 찍고, 정권의 설문조사에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답변하는 사람이 5%도 안될 정도로 엄청난 교세를 자랑하게 된다.

그외에도 요한 바오로 2세는 체코슬로바키아 방문을 타진하였는데 폴란드 계엄령 사태에 맞물려서 실현되진 못했다. 또 가톨릭, 이슬람을 가리지 않고 탄압하던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 정권에 날을 세우며 격렬히 비판하고 레이건 행정부와 관련해서 긴밀히 협조했다.

2.2.1. 비판

하지만 비판도 있다. 반공주의에 경도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의 학살과 관련하여 비판을 받는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Alojzije Viktor Stepinac) 당시 자그레브 대주교를 1998년 시복하여 세르비아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스테피나츠는 우스타샤에 대해 협력했던 건 아니고, 사적으로는 비판했으나 공적으로 미온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크로아티아계 미국인 역사가 요조 토마세비치(Jozo Tomasevich)는 저서 War and Revolution in Yugoslavia, 1941–1945: Occupation and Collaboration에서 스테피나츠 대주교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1) 개인들과 집단들을 돕는 사적인 행위에서는 "그의 행동이 항상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최고의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다(deserves highest praise, although his actions were not always successful, 563쪽)" (2) 그러나 "세르비아 대상 제노사이드와 우스타샤 정권에 대한 스테피나츠의 언행에는 심각한 결핍이 있다.(there are serious shortcomings in Stepinac’s statements and actions toward the Ustashe regime and its genocidal actions against the Serbs and the Serbian Orthodox Church, 564쪽)", "스테피나츠 대주교도 그 나라의 어떤 가톨릭 주교도 ... 공적 저항의 말을 하지 않았다.(neither Archbishop Stepinac, nor any other Catholic bishop in the state...uttered one word of public protest, 537쪽)"

또한 나치스 전범인 것이 밝혀져 미국, 독일 등에서 현직 오스트리아 대통령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선언할 정도였던 쿠르트 발트하임 오스트리아 대통령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기도 했고,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의 추종자이자 밀월 관계에 있었던 알프레도 슈스터(Alfredo Schuster) 추기경을 시복하는 행위로 논란의 방점을 찍었다.

또한 폴란드인이어서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이 대를 이어 장악한 바티칸의 내부 개혁에는 제대로 손대지 못하고 동유럽 반공운동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바티칸 내부 부패 문제가 오래도록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지속되는 부작용을 불러왔다는 비판이 있다. 심지어는 바티칸과 마피아의 유착 관계를 끊으려던 요한 바오로 1세를 바티칸 부패세력이 독살하고 요한 바오로 2세를 교황에 추대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2.3. 암살 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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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교황으로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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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교황 1995년 10월, 볼티모어를 방문한 교황

1980년대 동유럽의 반공주의 운동을 지원하며 냉전 해체의 지원적인 역할을 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1991년 냉전 종식 이후에는 세계 평화와 반전을 주창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대한민국을 총 두 차례 ( 1984년 1989년) 방문하는 등 재위기간 27년동안 총 129개국을 순방했다. 또한 청년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던 교황은, 1985년 로마에서 개최된 세계청년대회를 시작으로 2002년 토론토에서 개최된 세계청년대회까지 9차례 열린 대회에 모두 참석하여 개·폐막 집사를 집전하고 청년들과 함께했다. 한편 1995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세계청년대회에 참석했을 때는 교황을 노린 테러범들에 의해 또 다시 암살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었다. 이 범인들은 교황이 연설하기로 했던 공원에 폭탄을 설치해 암살하려 했으나 제조 실패로 아파트에서 미리 터지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들은 1999년 필리핀 방문 계획을 잡고 있던 교황을 다시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나, 방문 직전 교황이 계획을 취소하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수호하고자 노력했던 교황으로서, 종교와의 대화를 촉구하고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추구했다. 특히 1980년대 후반 전통 가톨릭 신앙의 수호를 고수하며 교도권에서 멀어졌던 성 비오 10세회와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했으나, 1988년 설립자인 마르셸 르페브르 대주교가 자신의 윤허 없이 주교를 성성하자 결국 파문시켰다. 그러나 교황은 종교와의 대화 위원회에 성 비오 10세회와의 교회 일치를 위한 위원회를 별도 설치해 계속해서 그들과 대화했고 결국 요한 바오로 2세 사망 4년 뒤인 2009년, 르페브르 대주교가 서품한 주교 4명의 파문이 철회되고 6년 뒤인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칙령으로 성 비오 10세회 소속 사제의 고해성사와 혼인성사가 교회법상 합법적인 권위를 얻으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2000년 4월,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중세시대 가톨릭 교회의 중세시대 범죄인 마녀사냥, 면벌부, 루터파 탄압 등에 대해 교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또한 1990년 걸프 전쟁, 2003년 이라크 전쟁 때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찾으라는 메세지를 발표하는 등 재임 기간 내내 전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표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2000년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는 직접 축전을 보내고 바티칸으로 초청하여 회담을 가졌다. 교황은 1980년 아직 대통령이 되기 전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직접 전두환에게 선처를 탄원하는 성명서를 보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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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 서기장의 영접을 받는 교황

1990년대 중반부터 교황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1996년 파킨슨병 판정을 받으면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만성적인 근육떨림과 무릎 관절염으로 인해 허약해지면서 보행기구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요한 바오로 2세의 파킨슨병을 두고 지난 1981년 피격 사건의 후유증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또한 맹장염, 요로결석, 악성종양, 패혈성 쇼크 등 여러 질병을 달고 살면서 수 차례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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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의 개막 미사를 집전하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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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25일, 교황이 생전 마지막으로 집전한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병세가 더욱 심각해져 해외순방이 이전보다 줄어들었고, 보행 때마다 지팡이와 보행장치를 이용해야 했다. 그러나 교황은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끝까지 교황으로서의 의무를 다했으며, 2002년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 참석하고 오상의 성 비오, 테레사 수녀의 시복/시성식을 주재하는 등 고된 스케줄을 이어갔다. 2004년 12월 25일, 교황이 생전 마지막으로 주재한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 중에는 한국에서 온 화동들이 한복을 입고 교황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기도 했다.

2.5. 사망


이렇듯 1990년대 중반부터 교황의 건강은 매우 나빴다. 한때 교황이 건강 악화를 이유로 퇴위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기도 했지만 교황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도좌를 지켰다. 2005년 2월에는 기관지염으로 인한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이송된 뒤 기도삽관을 했고, 이 시점부터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어 전부 필담으로 소통했다. 2005년 3월 31일, 사망하기 3일 전에 했던 마지막 강복에서는 건강악화로 아멘이라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당시 강복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4월 2일에는 이미 7만 명이 넘는 군중이 성 베드로 광장에 몰려들어 교황을 위한 기도회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교황궁에서 2000년에 그가 제정한 하느님의 자비 주일(부활 제2주일, 사백주일) 전야인 2005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9시 37분에 바티칸에 모인 많은 신자들의 기도 속에서 8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공식적인 사인은 만성 심부전 및 패혈성 쇼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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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31일, 공식석상에 나온 마지막 모습 교황의 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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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2일 사망 당시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이 바티칸 시국에 모여 성 베드로 광장을 가득 메우고도 넘쳐나 로마 시내에까지 늘어섰는데 그 추모 인파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4월 8일에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인원이 너무 많아 숙박시설이 모자라게 되자 일반인 참석자를 위해 로마시에서 텐트를 대여하고 대형 디스플레이를 설치할 정도였다. 이렇게 텐트와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워 경건하고 엄숙하게 추모하였다. 이렇게까지 그 죽음을 추모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언론에서는 “세기의 장례식”이라 언급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조문객이 모이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TV로 시청한 장례식이라 한다.

세계 각국에서도 4월 8일에 거행된 교황의 장례식에 조문사절을 파견해 70개국 이상의 대통령 총리, 5개국의 국왕 왕비, 14개 종교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했는데, 그 참석면면을 보면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 영국 찰스 왕세자,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 등 화려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해찬 국무총리를 필두로 한 조문 사절을 파견했다. 이란의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도 참석했는데, 이들이 미국 대통령과 한 공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런 계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어쨌든 당시 교황의 시신 앞에 전 세계 대통령들, 총리들, 국왕들 등 국가의 수장들이 무릎 꿇는 세계적인 면면을 TV 중계로 본 많은 사람들은 교황의 영향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관이 대성당 안으로 운구되기 직전 광장의 인파를 향해 잠시 멈추었을 때, 사람들은 눈물과 박수로 교황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영상). 장례식 참석자 명단(영문 위키). 이탈리아에서는 장례식 때 박수를 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교황이 사망한 날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인파를 향해 사망 사실을 발표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애통해하는 가운데서도 박수를 쳤다.

장례식 후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 그중에서도 요한 23세 1963년 매장되었다가 2000년 시복되면서 대성당 내의 성 예로니모 경당으로 이장됨에 따라 비게 된 자리에 안장되었다. 사진 교황 생전의 유서에서는 고향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로마에 묻은 교황청을 비난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판단도 이해의 여지는 있다. 가톨릭 교회의 수장을 다른 땅에 묻는다는 것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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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2011년에 복자로 시복된 교황에 대해 일반 대중과 순례객들이 가까이에서 참배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2011년 5월 3일에 유해가 대성당 지하 묘지에서 이장되어 대성당 내의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에 새로 마련한 대리석 석관에 모셔졌다. 대신 이 자리에 안장되어 있었던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11세의 유해는 변용 제대로 이장되었다. 인노첸시오 11세도 시복되면서 유해가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에 안장된 사례였다.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는 멋진 유언도 남겼다. 가장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다 폴란드어였다고 한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신 일부는 한국에도 안치돼 있다. 천주교 사도회(팔로티회)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 일부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본원과 강원도 홍천군 남면 신대리 '하느님 자비의 피정의 집'에 모셔놓고 신자들이 입을 맞추는 친구(親口)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진 분당 본원에는 머리카락, '하느님 자비의 피정의 집'에는 혈액이 안치돼 있다. 교황의 시신이 국내로 들어온 것은 2011년 7월 초다. 아울러 조선에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견한 파리외방전교회도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성해 일부를 들여왔고, 경기도 군포시 소재 '성 요한의 집'에 안치하고 있다.

팔로티회 안동억 신부는 "로마 교황청과 요한 바오로 2세의 비서 출신으로 폴란드 크라푸프 대교구장인 스타니스와프 드지비츠 추기경의 배려로 시신을 모실 수 있었다"고 밝혔다. 팔로티회는 분당 본원에서는 금요일 오후 4시 미사에서 친구 예배를 열고, 피정의 집에서는 매월 첫 토요일 밤샘 기도와 셋째 목요일 오후 12시부터 4시반까지 기도에서 역시 친구 예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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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교황과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 2001년 2월 21일

2.6. 시복과 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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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 교황 베네딕토 16세 거행, 2011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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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식, 교황 프란치스코 거행, 2014년 4월 27일
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시성 절차를 밟았다. 원래 시복 절차는 객관적인 심사를 위해 사후 5년이 경과해야 가능하게 되어 있는데,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는 베네딕토 16세가 바로 심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함으로써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시복 시에는 대상자가 일으켰다고 인정할 수 있는 기적이 필요한데,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는 프랑스의 한 수녀를 위해 그가 기도한 후 앓고 있던 파킨슨병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완치된 것이 기적으로 인정되었다. 2011년 5월 1일에는 수십만 명의 순례자와 군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역대 최단 기간만에 복자가 되었다. 축일은 교황 즉위미사를 거행했던 날짜인 10월 22일로 지정되었다.

2013년 6월 20일, 교황청 시성성 신학자위원회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에 필요한 2번째 기적을 승인하고 7월 2일 가톨릭 평가위원회에서 복자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을 승인하였으며, 7월 5일 교황청에서 복자 요한 23세와 함께 성인으로 공식 승인되었다.

시성식은 2014년 4월 27일에 거행되었으며, 세계청년대회와 청년 가톨릭 신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됐다. 시성과 더불어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에 있던 요한 바오로 2세의 석관에 새겨진 묘표도 복자(Beatus)에서 성인(Sanctus)으로 바뀌었다. 사진
시복식 전야기도, 시복식 당시에 불렸던 Aprite le porte a Cristo( 그리스도께 문을 열어라). #
시성식 식순에도 포함되어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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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장례 미사 후, 로마 시내에 모여있던 일반인 추모객들 사이에서는 곧바로 Santo Subito라는 외침이 나왔다고 한다. Santo Subito란 '즉시 성인', 즉 요한 바오로 2세를 즉시 시성하라는 뜻이다. 그만큼 생전부터 존경받았다는 이야기다.

아직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나,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요한 바오로 2세를 대교황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2024년 기준으로 천주교 교황들 가운데 '대교황'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사례는 레오 1세 그레고리오 1세, 니콜라오 1세 단 셋 뿐이다.

3. 성향

3.1. 종교 간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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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이후 타 종교와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점을 매우 높이 평가받는다. 이슬람 학자들이나 정교회의 지도자들과도 교류하여 직접 사원을 참배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대희년(2000년) 새해 첫 성사에서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조장하거나 방조해 온 각종 범죄 및 사건들에 대한 시인과 반성을 발표하여 세간에 크나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건 시초를 따지자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연장선상. 당시 아랍권에선 여러 의미로 대환호했다. 그러나 이집트를 방문할 때는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만 환영했고, 콥트 정교회 신자들은 "우리에게 개종을 강요하러 온 것뿐!!"이라며 야유했다고 한다.

이 행위는 종교를 떠나 굉장히 용기있고 올바른 행위였으며, 충분히 찬사를 받아 마땅한 행동이었다. 범세계권의 거대 종교의 수장이 자신의 종교가 저지른 범죄와 사건에 대해 미화하거나 숨기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건 그것이 올바르다는건 알아도 실행하기엔 결코 쉽지 않은 행동이다. 대부분의 독재국가와 독재자들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미화하거나 숨기려는 태도를 보이는걸 본다면 평범한 이들로선 결코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걸 빌미로 꼬투리 잡아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요한 바오로 2세를 사탄 취급했다. 예컨대 <바티칸 암살단>이라는 책은 가톨릭이 암살단을 조직하여 개신교 및 불교 힌두교, 전세계 종교인을 암살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아싸신이 천주교 조직이라는 새빨간 거짓말까지 써댔다.

3.2. 정통 교리 수호

온건하고 유화, 화합적인 교황이기는 했지만 콘돔의 사용이나 여성 사제 반대 등 교리적 측면에서 가톨릭 정통 교리를 고수했다. 바오로 6세 등 선대 교황들에 이어 자연 순리를 따르지 않는 인공적인 피임을 엄격하게 거부하였다. 혼인성사를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급진적 해방신학의 활동을 막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적극적 반대에 나섰다. 해방신학의 경우 가톨릭의 교리를 생각하면, 특히 사회적 개혁에 찬성하는 교황(대표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들도 해방신학에 대해선 부정적인 것 등 생각해 볼만한 거리다.

평신도 영성 단체인 오푸스 데이(Opus Dei, 하느님의 사업)와의 연계, 특히 친위대나 싸고 돈다는 식의 비판을 많이 받기도 했다. 실제로 교황 직속의 성직자치단이 된 것이 1982년이요,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몬시뇰 시성한 것도 요한 바오로 2세 때인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47차례의 시복식을 주재하여 1,338명을 시복하고 51차례의 시성식을 주재하여 총 482명을 시성하였다. 또한 9차례의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여 231명(1명의 비밀 추기경 제외)의 추기경을 임명하고 6차례의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였다. 바오로 2세는 1978년부터 주교대의원회의를 15회 소집하였다. 여기에는 정기총회 6회(1980, 1983, 1987, 1990, 1994, 2001), 임시총회 1회(1985), 특별총회 8회(1980, 1991, 1994, 1995, 1997, 1998[2회], 1999)가 있다.

주요 문헌으로는 14개의 회칙, 15개의 교황 권고, 11개의 교황령과 45개의 교황 교서가 있다. 목자의 배려로 많은 교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라틴 가톨릭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를 위한 교회법전도 공표하였다. 하느님 백성을 격려하는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는 구원의 해, 마리아의 해, 성체성사의 해, 2000년 대희년 등을 제정하였다. 또한 세계청년대회를 제정하여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래 서명한 장관과의 만남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교리성 정기 회의에서 채택된 '프리메이슨 단체들에 관한 선언'을 인준했고 발표를 명했다.

3.3. 마르셀 르페브르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전통주의적 경향 그리고 교회 일치,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에 대한 반대 의견 등의 이유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갈등이 있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와 그 추종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예식에 따른 미사 거행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1984년 10월 3일 경신성 특전(AAS 76 [1984] 1088f)은 일정한 조건 아래 트리엔트 공의회의 예식에 따른 미사 거행을 허락한 것이었다. 아시시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종교 간 기도 모임 이후 르페브르 대주교와 교황의 갈등은 극에 달하였고 여러 차례 일치를 이루려 했던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간 뒤, 1988년 6월 30일 르페브르는 에콘(스위스, Wallis)에서 “성 비오 10세 형제회” 소속 4명의 신부[3]를 교황의 위임(교회법[1983년] 제1013 1382조 참조) 없이 주교로 서품하였다. 1988년 7월 1일 주교성은 교령으로 자동 파문 제재(excommunicatio latae sententiae)를 공식 선언하였고, 1988년 7월 2일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의 교서 「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를 통해 자동 파문 제재를 재확인하였다.
제 1364 조 ① 배교자나 이단자나 이교자는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고, 제194조 제1항 제2호의 규정이 준수된다. 성직자는 그 외에도 제1336조 제1항 제1-3호에 규정된 형벌로 처벌될 수 있다.
제1382조 성좌의 위임 없이 어떤 이를 주교로 축성하는 주교와, 또한 그에게서 축성을 받는 자는 사도좌에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는다.

4. 한국과의 인연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또한 1989년에는 천주교 군종교구를 설정했고, 2004년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경기도 북부를 분리하여 천주교 의정부교구를 설정하였다.

4.1. 1984년 방한



한국을 두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이용한 항공사는 알리탈리아로, 기종은 DC-10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도 알리탈리아를 이용해 서울공항으로 입국하였다. 천주교 전래 200주년 및 조선대목구 설정(1831년 9월 9일) 150주년을 기념해 1984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조선시대의 순교 복자 103위를 시성하였다. 군사독재 시기인 1984년의 방한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당시 전두환 정권이 소위 유화조치를 취하게 만든 계기 중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파일:attachment/요한 바오로 2세/04.jpg
교황의 한국 방문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접견하는 사진
정통성이 부족한 전두환 정부는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교황 방한을 적극 추진했으나, 자칫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한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고민에 교황청은 망설였다. 한편 교황 방한 직전인 1983년 12월 유화조치가 취해진다. 대학구내에 상주하던 전투경찰병력 철수, 민주화운동관련 제적학생 복교, 해직교수 복직, 일부 정치범 석방, 몇몇 민주인사 정치활동금지해제 등 일명 1984년 유화국면의 도래이다.

전두환 정권의 이 유화적인 태도는 정권의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반독재민주화세력의 씨를 말렸기 때문에 약간 풀어줘도 별 문제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는 것. 이 시절은 박정희 정권 말기를 기점으로 부흥했던 대규모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70년대 저리가라 할 정도의 초강경 진압으로 큰 침체기였던 시절이다. 한편으론 반대 의견도 있다. 전두환 정권이 폭력을 기반으로 세운 정권에 대한 대외적인 평가를 바꿔보기 위해 교황의 방한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적극적인 자세이라기보다는 교황 방한의 역효과를 우려하여 여러 차례 방침을 번복했던 것도 사실이고, 교황청은 이미 1980년 당시부터 광주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면서 교황의 한국 방문을 적극 추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1984년 한국 방문 당시 대표적으로 한 말이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쁨이 아닌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 논어》 학이(學而) 편의 구절이었다. #1 #2 #3

4.1.1. 광주와 소록도 방문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을 위한 1984년 방한 당시 첫 공식 일정은 5.18 민주화운동을 겪은 광주광역시 방문 일정이었다.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공식 행사인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광주공항에서 미사 장소인 광주무등경기장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공항에서 경기장으로 바로 가지 않고 5.18 민주화운동의 핵심 지역인 전라남도청 금남로를 들른 후 무등경기장으로 갔다. 참고로 광주 지도를 보면 이 방문 경로는 최단경로가 아니며 광주시내를 빙 둘러가는 길이다. 특히 교황이 이 경로를 동선으로 쓰는 것을 전두환 정부가 극렬히 반대했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불과 4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데다, 하필이면 방문 시점이 5월이었고, 교황이 가는 전라남도청 금남로가 5.18을 상징하는 지역이었기에, 신군부 인사들이 실권을 잡던 전두환 정부 입장에서는 교황의 광주시내 이동이 상처 받은 광주시민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5.18이 전두환 정권의 주장대로 반란세력 진압이 아닌 국민에 대한 탄압과 무력진압이라는 걸 다시 한번 전 세계에 공표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 광주에서는 교황에 대한 환영 퍼레이드만 열렸을 뿐 시민들의 반대 시위는 없었다.

당시 교황이 이 경로를 택한 것은 교황청과 김수환 추기경이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한 덕분이다. 그 시절 대한민국 군사정권은 민주화 운동의 지원자 역할을 했던 한국 천주교회를 눈엣가시로 생각했고 천주교를 향해 압박과 반대를 거듭했다. 물론 교황청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71년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때 김수환 추기경이 강론에서 박정희 유신독재 장기집권을 우려하는 메시지를 보내자 박정희가 득달같이 KBS로 전화해서 미사 중계 중단을 지시했다. 아울러 이에 그치지 않고 교황청에 투서를 넣어 김수환 추기경의 직위해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박정희의 투서를 소 닭 보듯이 씹으면서 귓등으로도 안 들었고 김수환 추기경은 원만히 사목 활동을 이어갔다. 박정희의 투서도 가볍게 씹어버린 교황청이었기에 전두환의 교황 광주 방문 방해 역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에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1980년 5월 이후 처음이었다. 201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광주 방문 기념비가 무등경기장 주경기장 터에 세워진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 외야 밖에 설치되었다.

또한 교황은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곳을 보여달라”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록도를 방문하여 한센병 환자들의 머리에 일일이 손을 얹고 “친히 고통을 겪으셨던 예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라고 격려하고 축복했다.

지금은 소록대교를 통해 녹동항과 연결되지만, 소록도는 요한 바오로 2세 방문 당시인 1984년까지만 해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의 교통수단인 배를 같이 타지 않았을 뿐더러 필요한 물자를 나르는 선박의 선착장이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한센병 환우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던 곳이다. 지금도 소록도로 가는 접속도로가 고속화도로 스펙인 이유는 한센병 환우들에 대한 차별의 흔적이다.

4.1.2. 103위 순교자 시성식

1984년 방한 때 교황이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거행한 한국 순교 복자 103위 시성식은 여러 가지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우선 복자 성인품에 올리기 위해 필요한 두 번째 기적 심사를 면제해 주었는데, 조선 시대 순교자들이 복자로 시복될 때도 기적 심사가 면제되었지만 이러한 면제는 보통 한 번만 인정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기적심사의 면제 사유로 선교사가 해당 지역으로 들어가 전파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앙을 수용하여 교회를 만든 것을 통해서 면제하였다고 한다.

또한 한국 천주교의 요청에 따라 성인명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로 변경했다. 원 명칭에는 조선으로 파견되었다가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제2대 조선대목구장), 모방 나 베드로 신부[4],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의 이름이 앞에 있었지만, 한국의 성인이 아니라 프랑스의 성인을 기념하는 것 같다는 한국 천주교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파격적인 것은 시성식을 바티칸이 아닌 곳에서 거행했다는 것이다. 시성식은 교황이 직접 주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만 거행하는 것이 아비뇽 유수 시기를 제외하면 수 세기 동안 굳어진 원칙이었지만, 당시 한국 천주교에서는 "한국 천주교의 첫 성인 탄생이라는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교황 방한에 맞춰 시성식을 한국에서 열 수 없겠느냐"고 교황청 시성성에 문의했다.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을 위해 매우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던 시성성이었지만, 시성식 장소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 바티칸 아닌 곳에서 열리면 다른 지역 교회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그 상징성이 퇴색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시성성의 입장과 상관없이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방한 때 시성식을 주재하겠다고 친히 결정하면서, ‘한국에서 거행된 시성식은 어디까지나 1984년 교황 방한 때의 부대 행사이지 주된 행사가 아니고, 시성성의 동의 없이 교황의 의지로 관철한 극히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이는 시성식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변경이 아니며, 다른 교회가 한국 천주교를 선례로 들어 자국에서 시성식을 거행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구조가 정립되었다. 실제로 시성성 장관과 차관, 차관보는 한국에서의 시성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몇몇 시성 청원인이 바티칸 외의 지역에서도 시성식이 가능한지 문의했을 때 시성성에서는 '예외는 한 번뿐이며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거행한 시성식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바티칸에서의 시성식'이라는 원칙을 깬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어 그 후 바티칸 아닌 다른 곳에서 시성식을 거행하도록 만든 단초가 되었다. 예를 들어 2015년 스리랑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성 요셉 바즈 신부로 서기 1651년 인도 고아 출생. 성 필립보 네리가 설립한 오라토리오 수도회에 입회 후 사제가 되어 스리랑카 섬의 선교사로 파견됨. 당시 스리랑카 섬은 칼뱅파 국가인 네덜란드가 장악하여 가톨릭을 혹독하게 박해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전교에 힘을 써 15개의 성당과 400개소의 공소를 구축하는 한편 타밀어 싱할라어 복음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또한 천연두 희생자들을 돌봄으로써 불교 신자인 왕의 신임을 얻어 선교 자유를 얻었다. 1711년 1월 16일 칸디에서 사망했다. 1995년 1월 21일 시복됐다. 2015년 1월 14일 시성됐다.

4.2. 1989년 방한


1989년에는 제44차 성체대회를 집전하기 위해 재차 방문했는데, 직접 약간의 한국어를 배워 쓰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 방문 당시 어떤 할머니에게 교황이 직접 준 물건이 그 할머니 사후 손녀의 손으로 옥션에 올라갔는데, 물건은 결국 사람들이 안 믿어서 욕만 줄창 받고 내려갔다. 그 증거가 한국에 교황이 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바닥을 구르며 웃었다. 진짜면 왜 팔겠냐는 의견도 대세다. 손녀가 무교인가보지그 외에도 2~3개 정도 한국에 두고 간 것이 있다. 십자가 달린 목걸이, 묵주 등등. 생전에 북한 문제와 연계되어 한국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김대중이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집행날짜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을 때 김대중에 대한 대대적인 구명활동을 벌여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게 조치하도록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대한민국 정부에 입김을 불어넣어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은 지 2년만에 국외추방으로 일단락시켰다. 요한 바오로 2세 덕분에 목숨을 건진 김대중은 미국에서 살다가 귀국 후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그 말고도 미국이나 국내에서 김대중의 구명을 위해 힘쓴 내외국인은 많았다. 결정적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큰 도움은 되었다.

너무나도 알현하고 싶었던 한국인(관광객은 아니었다고 한다.) 둘이 알현 시간 후에 몰래 만나 뵙자, 위트 있게 '쉿, 혼나' 라고 한국어로 말한 일화도 있다. 한국인 순례자를 만났을 때 항상 건네는 인삿말은 찬미 예수이었다고 한다.

성유해 일부인 모발 혈액이 우리나라에 안치되어 있다.

5. 기타

파일:요한바오로2세_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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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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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황관 열쇠, 그리고 십자가에 M이 걸쳐진 성모 마리아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2] 3:08:16에 나온다. [3]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리처드 윌리엄슨, 알폰소 데 갈라테라 [4]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신학생으로 뽑아 양성했다. 최방제는 유학 도중 병으로 죽었으나,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신부가 되었다. [5] 게다가 당시에는 사보이아 왕조의 최대의 적 이탈리아 공산당이 원내2당+제1야당으로서 엄연히 살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