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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2:45:36

시오노 나나미

파일:nanami_shiono.jpg
이름 시오노 나나미([ruby(塩野七生, ruby=しおの ななみ)])[1]
출생 1937년 7월 7일[2] ([age(1937-07-07)]세)
일본 제국 도쿄도 키타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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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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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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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학력 도쿄도립 히비야고등학교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철학과
가족 아들 안토니오 시모네
데뷔 1969년
1. 개요2. 생애3. 특징4. 문제점
4.1. 편향된 관점4.2. 학계에 대한 몰이해4.3. 근거 없는 추측4.4. 사료 활용에 대한 비판4.5. 정치적 성향과 역사관에 대한 비판4.6. 위안부 관련 망언
5. 취향(?)6. 그 외7. 작품8.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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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작가, 에세이스트. 현재는 이탈리아에 거주하고 있다.

2. 생애

중학생 시절에는 앙드레 지드의 소설에 심취했고, 당대 일본 최고의 명문고등학교인 도쿄도립 히비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

고등학생 시절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호메로스 일리아스를 읽고 지중해권 문화에 심취, 라틴어를 독학해서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 대학 시절 좌파 사회주의 성향의 학생운동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사회주의 자체에 별 감흥을 못 느꼈다.

1963년 대학 졸업 후 아사히신문에 지원했으나 떨어진 뒤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하였다. 이후 5년 만에 귀국해서 <중앙공론> 지에 <르네상스의 여인들>로 데뷔했다. 1970년에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이탈리아인 치과의사와 결혼하여 아들 안토니오 시모네[3]를 낳았으나 이혼했다. 아들은 시오노가 맡았으며, 이혼 후에도 시오노는 이탈리아에 살았다. 시오노는 피렌체에 체류하면서 이탈리아사를 독학하면서 본격적인 서양사 집필 및 연구를 시작하였다. 시오노가 유럽에 살고 있는 이유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유럽에 살고 있는 것이 자료수집 등의 집필에 더 유리하고, 독자들에게도 시장성[4]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5] 이탈리아 정착 첫 해인 1970년에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낸 뒤부터 단숨에 스타 작가가 됐다.

3. 특징

시오노 나나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역사소설가이다. 역사학자가 절대 아니다. 따라서 로마 관련글에 인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 역사를 연구하거나 배우는 입장에서 그녀의 소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녀는 '나름대로' 로마에 관한 상세한 조사를 하고 글을 내지만, 로마에 대한 개인적인 환상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추측이나 의견을 객관적 역사 사실을 두고 첨언하는 것이 아닌) 객관적 사실과 섞어서 기숙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일반인들에게 막연한 인식밖에 없었던 고대 로마, 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를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린 인물이다. 작가가 역사전공자가 아니며 개인연구로 시작해 철지난 통설을 인용하고 편견이 많으며 새로이 추가된 지식이 업데이트되지 않은 교양서를 쓰지만, 마침 시의적절하게 나온 그 저서가 대중에게는 교양을 넓혀주는 역사서처럼 취급되고 있다.

시오노의 대표작은 15권으로 출판된 역사소설 로마인 이야기로, 그 외에도 르네상스 시대나 십자군에 관해 여러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시대의 주요 세력 가운데 하나인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에 대해서도 다룬다. 물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시오노가 좋아하는 베네치아와 치고받고 싸운 오스만 제국은 과소평가의 대상. 작품들을 읽어보면 오스만의 정치, 군사, 문화 등 그야말로 다양한 분야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무지하다는 티가 곳곳에서 나는데, 후기 로마 제국을 다룰 때도 바로 그러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양면적인 인물로, 로마를 연구하는 이들은 그녀를 호의 반, 비아냥 반으로 여사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녀의 책은 딱딱하지 않고 쉽게 읽히는 서술, 이야기를 풀어내는 흡인력, 특유의 감성적인 인물 접근법 등 다양한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료를 임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점, 영웅주의 사관[6], 심각한 인물 편애[7], 근거 없는 상상 끼워넣기[8], 기타 역사서술에 어울리지 않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어서 많은 찬사와 비판을 함께 받는다.

시오노는 학교나 연구기관에서 제대로 공부하고 훈련을 받은 정식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자료를 수집한 사람이기 때문에, 일종의 역사 매니아 재야사학자 정도에 해당된다. 이런 매니아들은 해당 분야에 대한 열정은 돋보이지만 사안에 대해 객관성을 담보하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서술 방향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고, 사료를 철저히 분석하여 본질에 접근하기보다는 본인이 원하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아마추어 특유의 피상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오노의 저작에서도 이런 약점과 한계가 드러난다. 이런 약점은 분석에만 지나치게 치중하면 어렵고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책이 팔리지 않으며, 시장성만 생각한다면 깊이가 좀 약하더라도 책이 재미있고 쉽게 읽히는 쪽이 낫기 때문에 많은 교양역사서에서 공통적으로 어쩔 수 없다지만, 시오노처럼 아예 긴걸 아니다 하는 수준에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기에 변호는 어렵다.

로마인 이야기》가 워낙 대히트한 바람에 대학생들이 로마 제국 관련 과목 레포트로 《 로마인 이야기》를 당당하게 참고자료로 제시하고 써가는 사태가 종종 벌어져서, 사학과 교수들이 뒷목을 잡는 일도 종종 있다.[9] 삼국지연의는 정사와 전혀 다른 판타지 소설이라는 게 잘 알려져 있기라도 하지, 이 사람의 소설은 연의급 역사소설인 주제에 '역사책인 척, 정사인 척'을 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최신작으로는 고대 그리스인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그리스인 이야기>를 내놓았다. 총 3권이라고 한다.

4. 문제점

시오노가 쓴 책들은 쉽게 읽히고 흡인력이 높기 때문에, 독자와 출판사 입장에서는 분명히 환영할 만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하지만 역사 서술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성공한 역사 동인지 작가"라고 말할 정도로 문제가 있는 작가이다. 많은 저작에서 역사를 메인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역사학자가 가져야 할 객관성과 엄밀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 중요한 부분을 바탕으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기보다는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에 상상력을 가미하면서 써내려가는 스타일. 그래서 한때 시오노의 저서 로마인 이야기가 유행하던 당시 그 책을 인용하여 레포트를 써내던 사학과 학생들이 많아 여러 교수들의 두통을 유발하였다. 역사적 사실관계에서 오류가 너무 많은 경우도 있고, 사실관계가 불명확하지만 가정형으로 서술하되 그게 진실이라는 쪽에 무게를 더 두는 식으로 서술했기 때문.

그리고 아무리 에세이라지만 타인의 저작에서 인용한 내용에 대해서는 반드시 각주나 책 후반부의 색인 항목 등을 통해 출처를 밝혀야 하는데, 시오노는 논문을 써본 적이 없는 탓인지 이런 레퍼런스 표기에 상당히 인색한 편이다. 전공서적이나 논문을 아무 것이나 펼쳐보면 다른 책이나 논문을 참고한 페이지에 주석이 달려 있으며, 거기에 저자의 이름이나 출판사, 서명(書名)은 물론이고 페이지 수까지 꼬박꼬박 적혀 있다. 그러나 시오노의 저작에는 '이 부분은 어느 책의 몇 페이지에서 참고한 것'이라는 각주가 빠져 있으며, 교양서적이니 그나마 용인이 되는 것이지 논문이나 전문서적 같은 데에서 이랬다가는 한 마디로 출판 불가다. 또한 해당 내용이 자신이 창작한 픽션이라면 그 역시 책에 표시해놓아야 하는데, 종종 이런 표시가 없어서 실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4.1. 편향된 관점

시오노는 역사학자가 아니며, 스스로도 아마추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녀는 역사소설가 혹은 역사 에세이스트에 가깝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기 바란다.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시오노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역사 자체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인물과 특정 국가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좋아하는 남성에 대해 서술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데,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 체사레 보르자에 애정이 대단하며 그중에서도 카이사르에 대해서는 단순한 호의적 서술을 넘어 거의 숭배에 가까운 수준으로 치켜세운다. 원래 로마사에 관심있는 사람들 중에 카이사르 팬이 꽤 많기는 하지만( #), 시오노는 카이사르에 대한 애정을 상당히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로마인 이야기 15권 중 카이사르 개인에 대한 책이 2권(4, 5권)이나 되며 다른 책에 비해 꽤 두껍다.[10] 내용은 '카이사르를 위한 헌정문'으로 봐도 될 정도로 카이사르 띄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반대로 그와 대립했던 많은 인물들은 지나치게 깎아내리고 있다.

특히 키케로를 엄청나게 깎아내린다. 키케로에 관한 사료를 보면 카이사르의 내전이 일어났을 당시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파와 카이사르파 중 한 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원로원 측에 붙는 기회주의적인 면을 알 수 있으며, 법적으로 그다지 깔끔하지 못했던 카틸리나 탄핵으로 평생 자뻑하고, 카이사르 집에 갔는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비서가 번호판을 받고 기다리라고 했다며 친구에게 불평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약속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고 건방지다고 폄훼하는 등 쪼잔한 면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시오노가 깎아내리는 수준의 한심한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11] 시오노에 대한 반감으로 한국 서브컬쳐계에서 카이사르를 역으로 너무 깎아내리고 키케로나 술라 등을 너무 띄워주는 경향이 보이기도 했다.

카이사르에 푹 빠져서 있는 탓에 그가 갖고 있었던 성향들을 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체사레 보르자 외에도 좋아한다고 밝힌 남자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있는데, 다빈치의 경우 에세이집 '이탈리아에서 보낸 편지' 에서 밝힌 바로는[12] 그가 자연과학 쪽에서 남긴 업적을 쓰기 어려워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우 이라크 중동의 정세가 좋지 않아 방문할 수 없어서 쓰지 못했다고 밝혔다.

전쟁 3부작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편에 보면, 오스만 제국 술탄 메흐메트 2세의 남색 상대인 노예 소년과 술탄의 성애에 대한 묘사가 동로마 제국의 재상 루카스 노타라스보다 비중이 높다. 그 '남색용 노예'가, 메메드 2세의 치세에 대해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서인 <정복자의 역사(Tarih-i Ebülfeth)>를 쓴 투르순 베이(Tursun Bey)이기는 하나, 이것은 자신의 기록으로밖에 알 수가 없는 탓에 궁정 시종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지만 '남색용 노예'였다는 건 상상.[13] 물론 ' 동로마 제국 로마 제국'이지만, 시오노는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의 한 시대로 보는 걸 부정하는 사람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반기독교 사상 탓에 특정 시대의 정체불명 자기 취향에 맞는 로마 제국만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사람이라 동로마 제국을 폄하한다.[14]

좋아하는 국가 도시도 상당히 티가 난다. 이 양반의 이탈리아 사랑, 특히 베네치아 & 고대 로마[15] 사랑은 정말 엄청난 수준이라, '역사소설'의 한계조차 넘어 거의 대체역사소설에 이를 정도다.

거의 유일하게 여성들에 대한 평가가 좋고 여성 인물들에게 주목한 저서로는, <르네상스의 여인들>이 있다. <남자들에게> 1, 2라는 에세이집을 냈는데, 여자가 바라보는 남자의 시각을 썼고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도 받지만, 여성 상품화에 대한 안티테제적인 관점을 페미니즘으로 포장했다는 비판과 ' 병맛 넘치는 중2병 여성을 위한 지침서'라는 혹평도 있다.

또 전쟁 3부작에 나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된 이후에 '황량해졌다'고 하는 말도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보낸 다음에나 나올 법한 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황제 메흐메트 2세가 치세 내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일 가운데 하나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여러 민족이 한데 어울리는 국제도시[16]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인구 추정치만 해도 1453년 당시 4만 5천 명에서 1500년에는 20만, 1550년에는 66만으로 폭증.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서는 보다 역사를 반영해서 "술탄 아래가 모두 평등하다"는 표현을 하였지만, 사실 이것도 군주론 4장에 나오는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린 것이다.

"인재 등용에 있어서 능력을 우선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근데 그러다가도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펼치고 물량빨로 밀어붙이며 변덕이 심하다고 또 비난한다. 하지만 시오노가 찬양하지 못해서 안달하는 로마 제국도 물량빨로 밀어붙인 적이 간혹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시오노의 평은, '소규모 군대만 찔끔찔끔 보내면 쓸데없는 희생이 커지잖음. 그런데 로마 제국은 한꺼번에 대군을 보내서 이런 희생을 줄였으니 이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한 일임?'이다.[17]

기독교 국가들의 시각에서만 바라볼 뿐, 오스만 제국의 내부 사정이나 정치적 변동에 대해서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시오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해 상당히 무지한 편으로, 시파히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예니체리만이 오스만의 상비군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 예인데,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하권 초반부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 대해 언급하며 이와 같이 서술했다. 황제 메메드 2세가 믿을 만한 군대라곤 예니체리 부대뿐이었으며 거의 매년 군사를 보내어 정복에 몰두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추측했는데, 실제로 오스만이 팽창에 열심이었던 것은 창건자 오스만 1세 이래로 '이교도를 공격하여 이슬람의 땅을 넓힌다'는 사상이 일종의 국시 비슷한 것이었던 데다, 지방관의 인사고과를 평가할 때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던 것이 바로 군공이었기 때문. 그리고 메메드 2세 본인으로 한정하면 그의 평생 꿈이 로마 제국의 재건이었는데, 로마 제국을 재건하려면 당연히 로마 시를 함락해야 하고. 그러자면 당연히 군사 활동에 나서야 할 것이 아닌가.[18] 게다가 예니체리는 일종의 특수병이었고 오스만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시파히였으니, 시파히의 존재를 제대로 몰랐다는 건 시오노가 오스만 제국이 벌인 육전에 대해서는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는 말이 된다. 오늘날 지명도야 물론 다른 문제지만, 메메드 2세 시대부터 쉴레이만 1세 시대까지 오스만 제국에서 시파히가 무시당했다는 건 로마 제국으로 치면 군단병은 어따 팔아먹고 '로마 제국군은 몇 안 되는 근위대를 제외하면 속주민 부대하고 용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라고 지껄인 거나 마찬가지다.

정작 본인이 제일 많이 다룬 서로마 제국에 관해서는 '기독교 때문에 망했다.' 라는 기번식 철지난 견해를 시종일관 유지하며 기독교에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단게 아이러니. 심지어 시오노 나나미는 동로마를 로마 제국이라 인정하지도 않는다.

가령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를 다룬 '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 나오는 '스쿠타리[19] 공방전'의 경우, 시오노가 "체계적이고 정확하다"고 찬양하는 베네치아의 역사가 마린 바를레티가 오스만 제국군의 수를 무려 35만으로 잡은 예가 있다. 물론 오늘날 역사가들은 "앞의 1자가 3자로 바뀐 거 아니냐"고 하는 중.

본인이 살고 있는 이탈리아도 자주 비판하며, 영국은 대체로 찬양조다. "관리가 부실한 이탈리아의 로마 제국 유물을, 관리를 잘하는 영국인에게 맡겨야 한다."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현대 영국은 유물 보존 관리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국가이지만, 제국의 변방이었던 영국[20]과 제국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본인부터도 스스로 "나는 아마추어요."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즉, 그는 사실을 기반으로 적되, 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에는 주관을 개입시킨 것이다. 역사서로 생각할 게 아니라 적당히 재미있게 읽으면 그만이다. 배경지식이나 비판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람은 이러한 부분을 걸러보기 힘들다. 독자로서 비판적 사고를 하며 읽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4.2. 학계에 대한 몰이해

▼ ‘시오노식 역사서술’에 대해 학계에서는 반발도 꽤 있다던데요.

“이탈리아 주재 일본대사관에서 ‘내일 도쿄에서 유명대 교수들이 온다’며 만찬에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가 곧 그 교수들이 저와 동석하기 싫다고 했다는 연락을 받거나, 마키아벨리 전집에 발문을 써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좀 지나니 번역자가 시오노의 발문은 싫다고 했다는 얘길 들을 때 어땠겠습니까. 그런 일은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 그런 때 어떻게 했습니까.

“속으로 두고보자고 생각했지요. 그들보다 더 큰 성과를 내면 된다고. 많은 독자가 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기반으로 로마사를 본다는 것 자체가 성과 아니겠습니까. 학생들이 그 교수들이 정리한 책이 아니라 제 책을 읽고 교수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역사학 교수들에게는 ‘평생 월급 받으며 뭘 했냐’고 묻고 싶지요.”

시오노 나나미가 얼마나 역사에 대해 몰이해적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학문으로서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시오노 나나미는 전혀 긍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본인의 책의 인기도를 자뻑질하며 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기반으로 로마사를 보는 것 자체가 의미있다고 하며 역사학 교수들을 밥벌레 취급하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로마에 대해 왜곡된 허위 정보들을 제공한 범인이기도 하다. 상술되었듯 자기 스스로가 아마추어라며 책장사를 하던 인간이 취하는 태도로서는 아주 글러먹었다. 괜히 역사학계 전문가들이 노망난 인간이라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 위주로 쓰여진 소설책이 역사연구를 다룬 책보다 당연히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애초에 교수들의 역할에 대해 이해를 못 한 모습이며 이들의 역할은 과장되고 소설적인 내용으로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닌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는 이들이다. 그녀가 소설가로서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설가로서의 일일 뿐 역사에 전문성을 가져서가 아니다. 역사가의 역할은 대중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 흥미 위주의 왜곡된 정보를 펴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며,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에 치중하여 사실을 밝히는 것에 소홀해진다면 이는 역사연구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역사가는 학자이지 연예인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의의가 있다.' 식의 주장은 환단고기를 읽고 이걸 기반으로 고조선에 대해 학자에게 질문한다 수준의 주장에 불과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재미로 보면서 시오노 나나미의 글솜씨를 즐기는 것이라면야 상관이 없지만 사실 그런 것치고 글솜씨도 좋은 편이 아니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기반으로 교수에게 학문적 질문을 하는 것은 제대로 학문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오히려 이불킥을 해야 하는 흑역사인 것이다.

역사학 교수들에게 평생 월급 받으며 뭘 했냐고 운운하는데 시오노 나나미 본인이야 말로 학계 교수들이 이룬 업적들과 성과에 대해 제대로 알고는 있는지 미지수이다. 저런식의 주장은 반지성주의적 사고관일 뿐이다.

4.3. 근거 없는 추측

사료로 밝혀져 있지 않은 부분의 마무리를 'XXXX 아니었을까?'라고 사료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예를 들어 칼리굴라를 암살한 근위병사가 "잘못된 자식을 책망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찌르지 않았을까"라며 말하거나,[21] " 도미티아누스를 죽인 사람은 도미티아누스의 아내인 롱기니아[22]이며, 이것이 도미티아누스와 그의 조카딸의 관계를 질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하였는데, 물론 롱기니아가 배후에 있다는 것은 고대 역사가들이 서술에 나오므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롱기니아가 이렇게 한 동기가 조카딸과의 관계를 질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시오노의 상상이다. 가령 롱기니아는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과부로 수절하였고, 자신을 항상 '도미티아누스의 아내'로 소개하였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도미티아누스 암살의 조종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얀데레

세습에 우호적인 견해를 삽입한 경우도 있는데, 일본의 정치가들이 지역구를 물려주는 것을 예로 들며 "안정을 위해 적절한 선택이 될 때가 많다"는 식의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주 국가에서 기득권층인 지역유지 가문이 지역구를 물려주는건 안정이 아니라 부정부패이며 독재로 가는 지름길인 반민주적 악습일 뿐이고 로마 제국이 혈연에 의한 세습을 하여 안정적으로 굴러간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하였으므로 신빙성은 높지 않다.

노예 제도에 대해서는 "로마인들은 노예를 가족처럼 대우하였고 죽을 때 해방해 주었다"는 등 인간미가 넘치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는데, 사실 로마 제국의 노예 제도는 충분히 가혹하였다. 공화정 말기에 몇 차례 노예 반란[23]이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자. 이 가족 같은 노예제는 로마가 이탈리아도 통일하기 전의 노예제 혹은 중산층이 부리는 가족 단위 노예를 설명할 때 쓰이는 말이고 극소수의 행운아들에 불과했으니, 시오노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셈. 주경철 교수는 "햇빛을 보지도 못했던 광산 노예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는 식으로 비판했다. 모두가/족같은 노예제라면 맞는 말일 수도

로마인 이야기》 5권 말미에서 클레오파트라 로마군에게 사로잡혔을 때의 부분을 보면
39세의 여왕과 33세의 승자는 왕궁 안에서 딱 1번 만났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가들 중에는, 그때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수작을 부려 성공한 것과 똑같은 '수법'을 옥타비아누스한테도 시도했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40세를 앞둔 나이에는 저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의 매력도 이미 효력을 잃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나는 그녀가 애당초 시도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자기를 귀여워 해줄 사람을 한눈에 알아본다고 한다. 여자도 고양이와 같다. 자기한테 마음이 쏠릴 만한 남자는 눈빛만 보아도 안다.

클레오파트라도 단정한 용모를 지닌 33세의 젊은이의 차가운 눈길을 받은 순간, 그런 수법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게 아닐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는 것은, 일류라고 자부하는 승부사가 할 짓이 아니다.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고 나서 클레오파트라는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난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현실 인식에서는 계속 잘못을 저지른 클레오파트라였지만, 막판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현실을 분명히 본 게 아닐까. 그녀가 삶에 집착한다면, 로마 제국으로 압송되어 수도에서 거행되는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에서 최고의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개선식이 끝난 뒤에는 여동생 아르시노에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지방 도시 어딘가에서 연금생활을 하는 것이 40세 이후의 인생이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패전국의 왕이라도 개선식이 끝난 뒤에 죽이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 자살을 결심한다. 한 여자로서 살아남기보다는 여왕으로서 죽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옥타비아누스도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왕으로서 죽든 간에, 어쨌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주는 것이 그에게는 편리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와 옥타비아누스가 만났다는 한 문장의 역사적 기록으로, 장문의 상상의 나래와 추측을 한 예이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에 물려 죽은 것을 알고 서둘러 시종을 시켜 몇 리터나 되는 액을 빨아내게 하였고, 마침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낙담했다는 것이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등장한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역시 여기저기서 루머로 돌아다니던 이야기를 듣고 쓴 게 많기 때문에 객관성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24] 제대로 역사를 쓰려면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런 기록이 있다는 걸 소개한 다음 이러저러해서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것 같다고 밝혀야 한다. 여튼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하여 탈선시킬 위험성이 없다면 죽는 것보다 살려서 개선식에 공개하는 쪽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훨씬 이득이다.

비논리적인 작가의 개입과 무리한 추정의 연속은 위에 언급된 비밀 회동이 마치 클레오파트라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양 독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그 근거가 "여자는 고양이와 같다"라거나 "승부사는 지는 경기에 걸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것이라면, 더욱 문제가 된다.

4.4. 사료 활용에 대한 비판

시오노의 저술은 어느 특정 역사학자의 견해를 전체적인 학계의 의견인 것처럼 정의를 하면서 서술하는 아마추어적인 패턴을 보여줄 때가 많다. 프로페셔널이 아닌 아마추어 역덕후들의 일반적인 문제로서 나나미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령 독일 테오도르 몸젠이라는 학자가 " 카이사르 로마 제국을 재창조했다"고 말한 것을 인용하며 카이사르가 로마 제국을 재창조했다는 근거로 삼는데, 이는 몸젠이 개인적인 찬사를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므로 이것만으로 카이사르가 재창조를 하였다고 확인 서술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어떻게 재창조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들면서 독자들을 납득시키지도 않는다.[25][26]

사료를 잘못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있었던 칸나이 전투의 전술을 자마 전투의 전술과 혼동하였으며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제 일선에 있는 잡병을 돌파하자 배후에 포진하던 정예병이 맞섰고 잡병은 측면에서 협공했다고 하는데, 이는 자마 전투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이중으로 전열을 짠 뒤 일선이 분쇄되어도 포위가 가능할 정도면 숫적으로 우세해야 하는 상황인데, 칸나이 전투 때는 로마군의 보병전력이 한니발 바르카 군의 2배가 넘었다. 아울러 고대 로마의 선거제도를 서술할 때 민회라고 일컫으며 193개 그룹으로 나눠 과반수를 가져가는 쪽이 승리라고 말하는데, 고대 로마에는 백인대 집회와 평민 집회라는 2개의 집회가 따로 있었으며 위는 백인대 집회에만 해당될 뿐 평민 집회는 전혀 다른 방식을 쓰고 있었다( 고대 로마 항목 참고). 그리고 콤모두스를 암살한 사람들의 동기를 알 수 없다고 서술하나, 실은 이들이 왜 그랬는지 서술해 주는 사료는 명백히 존재하고 있다. 이때 암살자들은 콤모두스를 죽이지 않으면 다음날 처형되는 신세였다( 로마인 이야기).

또 개인의 취향에 맞는 사료를 고르고 다른 사료는 누락시키는 경우도 많다. 가령 포에니 전쟁 때 벌어진 전투에서의 전사자 수는 사료마다 다른데, 시오노는 대체로 부풀린 쪽의 사료를 골라 썼다. 때문에 한니발 바르카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2만 5천명의 생존자와 함께 이탈리아에 상륙했다는 식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갈리아를 지나 알프스를 넘는 것이 힘든 여정이긴 하였으나, 75%가 행군 도중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가령 그의 동생 하스드루발은 역시 대군을 이끌고 한니발 바르카와 똑같은 루트를 지났지만, 매우 적은 이탈자를 냈을 뿐이었다. 비록 처음 시도가 힘들다고는 하지만, 같은 루트에서 그 정도로 처음 시도한 쪽과 2번째 시도한 쪽의 차이가 어마어마한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다.

또한 카이사르의 일생을 서술할 때, 그가 로마 제국 내에서 집정관으로서 원로원과 권력투쟁을 했을 때의 묘사도 주로 로마 과목의 교과서로 쓰이는 수에토니우스나 아피아노스의 사료와 불일치한다. 폼페이우스의 동료들에게 배분하기 위한 농지법을 통과시킬 때, 원로원 의원들의 참석 하에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차례로 연설하고 동료 집정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를 새점 타령이나 하는 겁쟁이로 묘사하는데, 이런 서술은 위의 사료들과 맞지 않다( 로마인 이야기). 지나가는 이야기로 언급하지만, 브루투스의 처가 불붙은 을 물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그대로 서술한다. 이건 당시 로마 제국에서 떠돌던 이야기이고, 이후 2차 창작물에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플루타르코스는 당대 여러 기록과 브루투스 개인 서간집을 인용하여 이설을 일부러 반박하고 있다. 즉 브루투스가 필리피 전투에 참가할 즈음에 이미 중병으로 죽기 직전이었다는것, 플루타르코스를 상당히 자주 인용하는 시오노가 이 서술을 고의로 누락시킨 것이다.

또한 글을 쓰다보며 심취하는 탓인지, 그리스어에 무지한 탓인지, 안티오코스 3세가 등장할 때 대왕이란 존칭(메가스)라고 적어놓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대왕의 칭호를 얻은 자는 폼페이우스 뿐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헬레니즘 세계&오리엔트에 너무 무지하고 서술을 거의 하지 않는다

무지를 넘어 비하적인 서술도 있다. 로마와 파르티아나 사산조 페르시아가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써넣는 소리가, '서방' 사람들은 이성을 갖춘 반면 '동방' 사람들은 강력한 전제군주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며, '서방' 사람들과는 달리 '동방' 사람들에게는 힘이 곧 이치이며 무조건 강자에게 굴복한다는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 7권 내용 중 집필하는 데 가장 크게 참고했고 9권에 해당 시기의 저술이 없거나 소실되어 집필이 난처했다고 하는[27] 타키투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자신의 기준에 맞춰서 아니다(또는 틀렸다. 잘못된 일이다.) 싶은 일이라면 해당 사료를 소개하기도 전에 일도양단으로 붓을 휘둘러 응징한다며 "타키투스의 저술을 읽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표현했지만... 자신도 별로 다르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한 성향이 있다. 타키투스는 당신처럼 창작작가가 아니야

또한 이런 문제점은 기독교와 관련한 서술 부분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이 경우에는 1차 원사료라고 할 수 있을 성경의 해당 부분을 똑바로 읽고 인용하고 있긴 한 건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의 모습을 보인다. 한 가지 예로, 로마인 이야기 제12권 <위기로 치닫는 제국> 411~412p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병역거부와 관련해서 다루고 있는데, 자신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예로 들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병사들이 '유대 왕의 병사이면서 기독교인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왕이 지불하는 봉급에 만족하라. 또한 군사행동을 하더라도 포악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 군대 안에서의 승진도 동료를 중상모략한 결과여서는 안 된다."(제12권 411~412p)
해당 부분은 루카 복음서 3장 14절의 내용이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시오노가 참고한 성경의 번역판이 무엇이었느냐를 굳이 따져 볼 필요조차 느끼기 힘든, 너무나 이질적인 두 내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해당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소위 '공생애'를 시작하기 얼마 전의 일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에게 질문한 병사는 절대 기독교인일 수가 없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을지언정 그들이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요한이 훗날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루카 복음서 7장 19절)라고 질문했던 걸 보면 더더욱 이 병사들이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그 병사들은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칭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기독교인인 우리는'이라 억지표현을 집어넣은 것 자체가 시오노 자신의 결론에 억지로 끼워맞추기 위해서라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또한 단순히 강탈하지 말고 고발하지 말고 받은 급료로 족하라는 본래 내용을, 자기 임의대로 '군사행동을 하더라도', '군대 안에서의 승진도'라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을 첨가하여 이 역시 성경 내용을 왜곡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로마 '정치사 부분'의 서술에 있어 시오노가 그나마 견지하려고 한 '정확한 사료참고'의 태도가 유독 기독교 서술 부분에서는 이렇듯 전혀 보이지 않거나 매우 허술한 경우들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성경 왜곡은 다음 내용에서 극치에 이른다.
인간의 몸에도 많은 부분이 있어서 각기 다른 기능을 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바지하는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인 이상 타고난 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정을 잘 하는 사람은 행정관, 가르치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은 교사,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은 설교사를 하면 된다.(제12권 410~411p)
초기 기독교인들도 얼마든지 로마 제국의 공직에 취임할 수 있었을 거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내용인데, 저 부분은 로마서 12장 내용의 일부이다.
"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로마서 12장 4~8절)

로마서의 해당 부분은, 로마 제국 신민으로서의 (로마 사회 내에서의) 여러 역할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 각기 다른 은사를 받은 신자들이 자기들이 받은 능력대로 교회 내에서 수행할 여러가지 다양한 내부적 역할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시오노는 해당 내용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결여된 상태로 ( 로마 제국의) '행정관'이라는 완전히 엉뚱한 표현으로 왜곡해 자기 주장을 성립시키는 데 이용하고 있다. 실제로 성경의 해당 내용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저러한 서술들이 왜곡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해당 성경 내용의 기본적 인용이나,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오노가 서술한 기독교 관련 파트가 신뢰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부분들을 보아도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사료위조를 저지른 적도 있다. 자신이 창작해 낸 사료를 종합잡지인 '추오코론(中央公論)'에 실었다.[28] 일단 문제가 되기 전에 그게 가짜라는 걸 다시 알린 것으로 보아, 정말 위조사료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그냥 단순한 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해당 행위가 정당화될 리는 없다. 출판사는 평판에 먹칠을 당한 셈이고, 학계 또한 문헌오염의 위험에 노출되었던 셈이니까. 학계에서 그녀에게 치를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료 조작이 은밀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다니기까지 하였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의 저서인 < 테이레시아스의 역사>는 이걸 지적한다.

전문 학자들은 항상 새로운 내용, 남들이 연구한 적이 없는 새로운 주제를 찾아야 한다. 시오노가 다루는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같은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고대 로마의 위인들은 역사학계가 건드리기도 이전 서양 대학들에선 대부분 아예 다른 고전학과로 딴집 차리고 있는 고전학자들이 수백년 동안 빨아먹어서, 이런 거 가지고 남들이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발견, 논증해야 하는 전문 학계의 입장에서 다룰 이유도, 필요도 없는 주제들이다. 이래서 진짜 어지간한 1차 사료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50년, 100년 전에 싸그리 흝어 먹어버린 경우가 대다수라, 상당히 잘 알려져 있는 중세 이후 서양사에 대한 연구는 혹시나마 다른 학자들에게 공개된 적이 없는 영수증 하나라도 없나 하며 남의 개인집에 있는 창고와 조부모댁 유품 보여달라고 징징거린다. 해당 시대에 대해 조금이라도 전문적인 연구를 한 사람이면 동시대인들이 알고 있었을 만한 내용에 기반해 구라치는 건 일도 아니고, 그 중에서 조금만 더 깊게 파면 아예 언어학적 표현, 표기법까지 동시대 기준으로 맞추어 위조 사료 만드는 것 자체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금방 들킨다. 탄소 연대측정기술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걸 일일이 찾아 보고 태클 걸어 줄 전문 학자들은 이탈리아, 스페인, 남 프랑스, 발칸반도 현지에 직접 가서 자료 찾고 발굴할 예산을 타내는 데 바쁘다.

4.5. 정치적 성향과 역사관에 대한 비판

시오노의 책을 꼼꼼이 읽으면 그가 "체제보단 운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에서 종종 "오래 번영하는 국가는 개인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시스템에 의존하는 반 영웅주의의 국가"라고 말하긴 하는데,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그녀의 저서의 실제 서술 태도는 반대로 굉장히 영웅주의적이고 인물 중심적이다. 단순히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카이사르 등 특정 위인들만으로 전체 역사를 해석하려고 시도하기도 하는데, 물론 영웅사관이 반드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로마 공화정은 국왕 일개인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절대군주제가 아니었다. 또한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영웅사관의 한계를 인정하고 합리주의에 따른 보편 국제관계론이나 시대적인 배경 등 구조적인 접근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편[29]이며, 근대 이후에 한정되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민중들의 인식이 갖는 영향도 재평가하려는 시도들이 있다.[30] 그러한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관은 좋게 봐줘도 지나치게 구시대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또한 제국주의를 미화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의 저서에는 로마인이 "진출"하면서 저지른 여러 잔혹행위들이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문명화"된 로마인이 저지른 주민학살이나 인질포획, 노예화와 같은 잔인함은 야만족과 별반 다를바 없었다. 물론 인권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인 전근대의 영토 확장에 따르는 인명 피해를 근대 이후와 같이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시오노 나나미는 당대의 시대상을 고려하여 건조하게 공과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에는 과도하게 감정을 이입하여 유리한 기준을 적용하면서도 정작 동시대에 대립했던 다른 국가들에는 현대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야만적이고 잔혹했다는 식으로 깎아내리려 드는 이중잣대가 문제이다.

'로마인과 일본인의 비슷한 점'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으면, 더더욱 충격과 공포가 배가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 로마 제국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이 글은 일본 잡지사 기자가 굳이 시오노에게 " 일본인과 로마인의 비슷한 점을 설명해 주세요!!"라는 병맛 넘치는 질문을 해서 억지로 대답한 것에 가까워서 무작정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료가 없어서 상상력을 넣어"라는 문장을 항상 넣으므로 오해하지 말자.

그는 일본의 과거사와 관련해 "조상과 후손은 별개"라는 주장을 한다. 그래서 " 일제에 점령당한 35년이란 상처가 한국인에겐 매우 큽니다." 라는 질문에도 " 한국이 역사 문제를 말할 때, 지금의 일본인은 전쟁을 이끌었던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일본이 전쟁에 진 것은 제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입니다. 누군가 제게 전쟁 책임을 묻는다면 저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살아있는 일본인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 아닐까요?"라고 답했다. #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과거 일본의 전쟁 책임이나 식민지기에 있었던 인권탄압 등에 대한 책임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다만 시오노 자신도 전술했듯 동세대 사람처럼 젊은 시절 좌파 학생운동에 몸담은 적이 있긴 하나, 대체로 서양 국가와 문명을 맹목적으로 숭상하는 서구우월주의, 사대주의 성향이 있음과 동시에,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우익임에도 때로는 국까적인 면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국까이지 과거사 반성은 아니다.

웃기게도 일본을 순방한 바 있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는다.

4.6. 위안부 관련 망언

"누가 위안부(慰安婦)라는 명칭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참 상냥한 이름을 붙였다"
"위안이라는 단어는 고통을 위로한다는 의미이며 종군 위안부라는 단어를 다른 언어에서 찾아봤지만 없었고 그래서 영어로 번역하면 섹스 슬레이브(성 노예)가 된다"
"전쟁터는 인간에게 극도의 긴장을 강요한다, 하루가 끝난 후에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위안부에게 가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버리기만 한 젊은 병사들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한다"

2014년 9월 우익성향 월간지 문예춘추에서 일본군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을 기고[31]했는데 위안부 피해자가 강제로 연행된 것에 대해 "인간은 부끄럽거나 나쁜 일을 했다고 느끼는 경우에 강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스스로 반복해서 말하다 보면 스스로 믿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국의 위안부 관련에는 모르쇠 하면서 네덜란드 여성들을 강제로 성노예를 시킨 스마랑 강간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가 "조속히 손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기를 보면 문제의 기고문이 국제사회에 대한 눈치보기에 가까운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2 평소에 본인이 하던 대로 사료확인 제대로 안 하고 발언을 한 것은 확실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 피해자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있다.

또한 문예춘추에 기고한 글에서 "누가 위안부(慰安婦)라는 명칭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참 상냥한 이름을 붙였다"면서 "위안이라는 단어는 고통을 위로한다는 의미이며, 종군[32] 위안부라는 단어를 다른 언어에서 찾아봤지만 없었고, 그래서 영어로 번역하면 섹스 슬레이브(성 노예)가 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그녀의 말은 위안부를 인정하고 사과하고자 한 발언이 아닌, 모호하게 일본군의 만행을 부정하는 말이다. 또한 시오노 나나미는 " 전쟁터는 인간에게 극도의 긴장을 강요한다. 하루가 끝난 후에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위안부에게 가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버리기만 한 젊은 병사들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속아서 끌려왔는데 생판 남인 남자가 본인 가슴에 얼굴 파묻고 울면 걔가 불쌍해서 참아줄 생각인가? 하지만 일본군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공연히 화풀이를 할 목적으로 손찌검을 하거나 담뱃불로 몸을 지지고.[33] 전쟁에서 패하면 황군(皇軍)의 수치를 알려선 안 된다고 위안부를 죽였다.[관련자료]. 또한 이 발언에서 '위안[35]'이라는 단어를 번역 문제로 돌리고 있지만, 굳이 '위안'이라는 단어에 맞춰서 번역하자고 하면 'solace', 'relaxation' 등으로 쉽게 번역할 수 있다. 종군위안부를 '섹스 슬레이브'로 번역하는 것은 바로 저렇게 시오노 나나미가 하는 로망스 사관처럼 미화된 단어로 실태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실태에 맞춰 정확한 명칭을 붙이려는 뜻에서 일부러 단어를 적나라하게 하는 것이다.

과거사 문제를 재판에 빗대서 중국과 한국은 원고로 일본은 피고로 비유하며 원고 측(한국과 중국)은 탁자를 치며 목소리를 높이는 전법을 잘 쓰는 데다, 피고 측은 유능한 변호인을 기대하기 어려워서 피고측인 일본은 침묵해버리기 쉽고 침묵하고 있으려면 증거를 통해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20세기 전반부터 50년간 일본의 모든 공문서를 모아 공개하고 영어 번역문도 만든 뒤 이에 대한 판단은 제3자에 맡기자고 했다.

그 뒤 '아시아역사자료센터'라는 곳이 공문서를 수집하고 있다면서 "이런 센터를 통해 '일본은 역사를 마주 보지 않는다'는 비난에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센터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10배 늘리자면서 "공문서를 데이터화하는 데 20년이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자기비판이나 사죄를 유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산을 10배 더 지원하는 건 싸다"는 결론을 내렸다. # 욕을 20년 늦게 먹기 위해 돈을 늘리는 것은 싸다! 천잰데

기존 저작들의 탐미주의적, 제국주의 옹호적, 영웅주의적 성향 때문에 상당수의 독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

5. 취향(?)

로마 제국과 관련되지 않은 시오노의 다른 책, 에세이 등을 읽다보면 그녀가 얼마나 외면의 아름다움, 즉 육체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1900~1950년대를 주름잡은 할리우드의 미남미녀 배우들에 대해서는 온갖 찬사를 던지다가도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드니로는 극딜한다. 온갖 이유를 다 대는데 잘 들어보면 그냥 아, 못생긴 것들 나오니 짜증나. 내가 저걸 왜 봐야 함? 이 한 마디 뿐이다. 메릴 스트립도 비슷한 이유로 비난한다. 좀 더 자세히 적으면 1950년대 이전의 영화를 보면 현실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는데, 리얼리즘의 시대로 접어들며, 그리고 니콜슨과 호프먼, 드니로의 전성기가 시작되며 영화 속에서 현실과 똑같은 피로함을 느끼게 된다며 저 셋을 싫어한다. 물론 저 3명이 연기 잘하는 건 인정하지만 '현실과 똑같은 연기를 한다고 그게 연기를 잘하는 걸까?'라며 딴지를 걸고 넘어진다. 이 에세이는 메릴 스트립을 향해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마세요. 당신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다 알고 있나요?'라는 어이상실의 말을 날리며 끝맺는다. 메릴 스트립: 칭찬 감사합니다![36]

시오노가 외모가 아닌 육체의 아름다움에 끌린다고 한 이유는 운동선수들을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정작 스포츠는 또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이다. 특히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을 비교한 글을 보면 앞선 세 배우를 극딜한 것과 반대로 세 선수 모두를 엄청나게 찬양한다. 패배한 날에는 '내가 내일 자네들에게 승리를 보여주겠어'라고 말한 뒤 반드시 이겼다는 일화를 이야기하며, '리더는 이래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절정은 마이클 조던이다. 조던에 대해서는 특유의 운동 능력을 찬양하며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젊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떠오른다', '인간 육체 본연의 아름다움' 등 시오노가 쓸 수 있는 가장 큰 찬사를 바친다. 여기에는 육상선수인 칼 루이스도 포함된다.

이탈리아에 오래 거주하다 보니 엄청난 축빠이기도 한데, 축구에 많이 식견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좋아하는 선수 중심의 얼빠. 물론, 식견이 있든 선수만 좋아하든 본인 마음이지만 아무래도 시오노는 그간 육체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성향을 많이 드러냈고 이런 성향이 축덕질에서도 그대로 나오는지라 곱게 보지 않는 사람이 많다.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즈보니미르 보반, 로베르토 만치니,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데니스 베르캄프 등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대단하다. 다음은 선수에 대한 평이다.[37]
바티스투타: "한 번이라도 좋으니 카메라맨으로라도 분장해, 골 바로 뒤에서 바티스투타의 슈팅 모습을 보고 싶어요. 이 천성의 스트라이커의 발에서 튀어나가는 슈팅의 위력을, 골키퍼와 거의 같은 위치에서 맛보고 싶은 거예요. 막무가내로 강력히 밀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 것이 틀림없을 테니까."
지단: " 프랑스의 10번이 델피에로였다면, 프랑스는 이기지 못했어요. 한편, 이탈리아의 10번이 지단이었다면, 이탈리아는 챔피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대답이 되지 않나요? 지단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이런 남자와 결혼하면 여자는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다하게 돼요. 부드러운 유머, 축구를 직업으로 삼는 데 대한 마음가짐의 확실함, 무대가 크면 클수록 더욱 발휘되는 승부 배짱. 미남이 아니건 머리가 벗어졌건 알 바 아니라는 느낌마저 들거든요. 고대 로마의 장군이라면, 서슴없이 그를 백인대장에 임명했을 겁니다."[38][39]
루이스 피구: " 포르투갈 팀의 약진상은 나를 매우 행복하게 만들었어요. 첫째, 피오렌티나에서 플레이하고 있는 루이 코스타의 차분한 멋이 못 견디게 좋아요. 게다가 피구 선수는 그 생김새부터가 '사나이'거든요. 그래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요."

반면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서슴없이 디스하는데, "나의 위대한 이탈리아가 이럴 리가 없어!" 수준이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에 대해서는 "소심하고 모국어조차 제대로 못하는 저능아"라고 비난했다.[40] 프란체스코 토티 역시 "지능 수준이 의심가며, 유로2000에서 고작 1골 넣은 걸로 거만해하는 어린애"라고 깠다. "이러한 어린애들이 이끄는 이탈리아 축구팀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고 깠는데, 결과론적으로 그들의 대활약으로 이탈리아는 독일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다만 해당 인터뷰에서 틀린 말만 한 것은 아니고, 국가대표 선수에 대한 문호가 이민자에게도 열려 있는 팀이 강하다면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강팀이 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41]

시오노는 뭘 하던 그 주제 자체를 진지하게 조명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가진 파시즘적 싸구려 영웅주의에 기반한 뒤틀린 미학의 소품 정도로 다룬다는 비판을 듣는다. 비평가이자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대표작 오리엔탈리즘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한 서구 지식인들은 중동을 진지하게 그 자체만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재생산하는 목적으로 다루어 왔다"며 언급한 문헌적 태도[42]로 볼 수 있다.

6. 그 외

시오노의 책이 인기를 얻은 것에는 번역자 김석희의 공로가 크다. 실제로 김석희 번역이 아닌 작품들은 번역이 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시장에서 참패했다. 이는 시오노 팬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경우, 김석희 씨가 시오노의 동의를 얻어 문장 구조를 완전히 뜯어 고쳤다고 한다.

특히 전쟁 3부작의 경우, 소설이기 때문에 역사는 잠깐 제쳐두고 읽을 수 있다. 다만 시오노의 책을 읽을 때에는 그 기반에 깔린 생각을 염두에 두면서 읽을 것.

본 문서에서도 몇 번이나 상기되고 있는 사실이지만, 시오노는 정규 훈련을 받은 역사가가 아닌 아마추어로서 그녀의 책을 역사로 읽는다는 것은 역사공부에는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오노는 자신의 글에서, 그것이 역사서로 기능하기 위한 최소한의 고민도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소설가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오노 나나미를 정말 질색하는 이유는, 자기 입으로 자신을 그렇게 아마추어로 정의하는 주제에 자꾸 소설이 아니라 정식 역사서인 척하는 책을 쓰면서 나대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대로 된 역사서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더라도, 어느 정도 학계의 연구에 의해 명확히 밝혀진 사실조차 무시&왜곡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표현하는 책이 시오노의 저작들이다. 게다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는 당당하게 사실인 양 이런저런 사례를 끌어 모으다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 '픽션이니까'라면서 면피하는 자세를 취하는 경우도 많다. '허구의 이야기'로써 기승전결 구조를 갖추고 있다면, 그 글은 외형상의 형식과는 무관하게 소설에 해당한다. 즉, 소설은 기행문, 서간문, 일기의 형태로 쓰여질 수도 있고, 논문이나 보고서 형태로 쓰여질수도 있다. 즉, 시오노가 역사서와 유사한 형식으로 소설을 쓰는 것 자체는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일단은 "소설인 시오노의 책을 역사서를 보는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 작가의 상상을 덧붙이는 건 소설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자기 최애캐는 신격화하고 마음에 안 드는 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악의적으로 깎아내리는 행위나 제국주의 옹호 등을 "소설이기 때문에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저런 짓은 진짜 동인지에서 해도 비판받는다.

하지만 흥미진진하게 서술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뛰어나므로, 시오노의 저서는 어느 정도 역사에 관심이 있으나 잘 모르는 초보에게 있어 읽기 쉬운 입문서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 내용의 형편없음 때문에 바람직한 입문서라곤 할 순 없지만, 그래도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는 일가견이 있다. 역시나 책 내용 자체는 틀린 점이 많지만 많은 역덕들을 유럽사로 이끌어 주었던 먼나라 이웃나라와 비슷하다 볼 수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입문서'이니만큼 서양사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쌓고 싶다면 시오노의 책만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은 위험하며, 대학 교수와 같은 역사학자들이 서술한 저서를 읽는 것이 좋다. 둘 다 읽으면서 시오노가 어떤 부분에서 이상하게 서술했는지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

비전공자보다는 "전공자가 혹여 뭔가 놓치고 넘어간 게 있나?" 하는 의문으로 보면 그나마 좀 말이 되는 얘기도 없진 않다. 논란거리 중 여러 주장 중 하나와 일치하는 것일 뿐이란 의견도 일리는 있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나름 찌질했던 인격을 생생하게 복원해낸 건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신동아 2007년 5월호 인터뷰에서 " 이탈리아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내일 도쿄에서 유명 대학교수들이 온다'며 만찬에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가 곧 그 교수들이 저와 동석하기 싫다고 했다며 냉대를 받았다거나, 마키아벨리 전집에 발문(Preface)을 써 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좀 지나니 번역자가 시오노의 발문은 싫다고 했다.[43] 그런 얘길 들을 때 어땠겠습니까. 그런 일은 수시로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왕따 신세인 것 같다. 교차 검증이 일반화되지 않았고 폐쇄적인 학계 권력이 강했던 시절 저질렀던 표절을 비롯한 세부적인 지적 불투명성, 카르텔화된 학계 권력 같은 비판이야 사실 한국을 비롯해 어느 나라 사학계를 상대로도 할 수 있는 말이고, 이런 점을 떼어놓고 보면 일본 사학계는 아시아에선 여전히 독보적으로 세계적 권위를 가진 학계이다. 서양 내의 동양사 연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일본사 자체의 볼륨과 심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일본사가 아닌 외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일본인 학자들을 기준으로 봐도 러시아 혁명사의 거장 하세가와 쓰요시, 근세 유럽-중동간 문명 교류 연구로 명망 높은 다케다 준코, 남아시아사의 권위자 카라시마 노보루 같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일본 외의 주제를 다루면서도 전 세계적 권위와 명성이 있는 학자들의 아웃풋으로 따지면 여전히 한국이나[44] 중국에 비해 확실하게 우위일 만큼 일본 사학계는 권위나, 업적이나, 프라이드나 높은 편인데 학자면 다 거기서 거긴 줄 아는 어떤 멍청한 윗사람이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동인지 작가를 동석시키려고 하니 학자들이 같잖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글루스의 월광토끼라는 블로거는 자신이 서울의 모 대학에서 경험한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라틴어를 가르치는 교수가 로마-그리스 고전을 이야기하면서 시오노 나나미를 비판했으나, 재미있고 쉬운 역사에 관한 책을 썼다는 점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발언했다는 내용. 관련 링크

7. 작품

대한민국에 출판된 작품은 한국어판 중심으로 적었다. 출판연도는 일본 초판 기준.

8. 참고 문헌



[1] 7월 7일에 태어났다고 七生이라고 했다고 한다. 동음이의어로 鹽の七味, 소금의 일곱 맛이라고 장난치기도. [2] 이날은 우연히도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3] 현재 영화계에서 일하는 듯하다. '로마에서 말하다'의 대담에 헐리우드에서 스태프로 일했던 썰을 풀었는데, 스파이더맨 2 샘 레이미 감독과 <로드 오브 독타운> 촬영 중의 히스 레저는 각각 아내와 매니저가 담배를 못 피우게 해서 흡연자였던 안토니오를 통해 촬영장 밖으로 나가 몰래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대놓고 담배를 피웠던 이는 거물이었던 잭 니콜슨 뿐이었다고. [4] 유럽 이야기라면 아무래도 재유럽 작가의 것이 일본 내 작가의 것보다는 독자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을 것이다. [5] 국내 작가도 이런 성향을 활용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고 물론 지금도 있다. [6] 시오노 나나미만 그런 건 아니다. 로마사 및 유럽 고대사 연구가 활발했던 나라들 중 하나가 독일이고, 바로 그 독일에서 영웅주의 사관이 나오기 시작한다. 일본이 개화시절에 독일을 참고한 걸 생각하면, 절대 우연이 아니다. [7] 이것 또한 시오노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대 역사 연구가들 중에서 특정 인물빠가 적지 않다. [8] 시오노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뇌피셜이 너무 많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같은 역사소설들도 역시 상상 끼워넣기 및 음모론을 채용하지 않는 건 아니나 어느 정도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소설을 전개한다. 문제는 시오노 나나미는 근거가 없는 뇌피셜을 너무 사용한다는 거다. [9] 학생들이 하도 시오노의 책을 사료랍시고 참고해대는 바람에 혈압이 오를대로 오른 모 명문 사립대의 서양사 교수는 레포트 주제를 아예 "시오노의 책에 대한 비판"으로 내준 뒤, '가장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비판한 학생'에게 그 학기 최고학점을 주고 레포트를 수업시간에 낭독시킨 적이 있다. [10] 그 앞뒷권인 3권과 6권의 두께가 얇기 때문에, 꽂아두고 보면 더 두꺼워 보인다. [11] 마리우스-술라의 시대로부터 2차 삼두정치에 이르기까지 키케로만큼 명확한 정파적 입장을 가진 이가 살아남은 예가 없다. 하물며 키케로는 술라의 잔혹함을 비판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다. 이는 도리어 키케로가 그만큼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관점은 당연하겠지만 시오노의 고유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런 관점의 역사학자들도 얼마든지 있었고 또, 근거가 없지도 않다. 당장 로마에서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가 잠시 헤게모니를 잡는 동안 키케로는 자기 아들이 있던 그리스로 튀었던 적이 있다. 그러다가 옥타비아누스가 와서 안토니우스의 대항마가 되지 그에게 붙어서 안토니우스를 디스했다. [12] 2권 '레오나르도 내 사랑' [13] <콘스탄티노플 함락>에는 메메드 시대에 역사서를 쓴 튀르크인은 그 혼자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아시크파샤자데(Aşıkpaşazade, 1400~1484)나 케말파샤자데(Kemalpashazade, 1468~1536)는 어디다 팔아먹었을까. 다만 그리스 혐오에 가까운 시오노의 '관점'을 생각하면, 투르순 베이의 기록을 따라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최후의 순간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다가 끔살당했다고 기록했을 법도 한데, 왜 장렬히 전사했다고 했는지 의문. 동로마보다 투르크를 더 싫어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최후 묘사가 누그러졌을 수도 있겠다. [14] 전쟁 3부작은 작자 자신도 인정한 소설이다. 역사 에세이에선 살짝살짝 드러나던 작가의 취향을 소설에선 감출 필요가 없어졌는지, 3부작 중 2작품은 주인공이 동성애를 하고, 남은 하나에선 불륜을 한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고, 소재로 쓸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주 내용과 별개로 뜬금없이 등장한다는 것이 문제. 물론 전쟁 3부작의 주제가 '전쟁터에서 피어나는 낭만적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면야 할 말 없다. [15] 단 동로마는 제외. [16] 이슬람교가 우대받고 기독교 등 나머지는 그보다 못한 지위를 가졌지만, 그 당시에는 진보적인 정책이었다. [17] 가령 서기 73년에 벌어진 마사다 공방전에 대해 서술할 때 수비군은 천 명도 안 되었는데, 공격 측인 로마군은 만여 명이었다고 소개하며 이와 같이 주장했다. [18] 실제로 말년에는 이탈리아 본토를 해로로 침공하여 오트란토라는 항구도시를 점령하기도 했다. 다만 바로 이듬해에 메메드가 죽으면서 로마 진격은 백지화. [19] 알바니아어로는 슈코더르. [20]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영국이 고대 유물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독자적인 켈트 부족의 문화도 결코 흔히 생각하던 야만족 수준은 아닐 뿐더러, 시골 박물관에도 로만 브리튼 시대의 유물이 수두룩하다. 다만 본토였던 이탈리아가 당연히 관리해야 할 유물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뜻. [21] 이때 이 군단병은 단숨에 칼리굴라의 목을 친 뒤, 곁에 있던 그의 아내도 무참히 살해하였고, 심지어 갓난 아기였던 칼리굴라의 딸마저 벽에 던져서 머리뼈를 박살내 죽여버렸다. [22] 네로 시대의 유명한 장군 코르불로의 딸 [23] 유명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도 노예 반란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가족같이 대하는 노예'의 현실은 로마 시민들의 볼거리를 위해 목숨을 내던져야 하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24] 당장 티베리우스 전설이라는 기록만 봐도, 다른 역사가들은 아예 관심도 갖지 않거나 대충 이런 소문이 있다는 식으로 써놓은 것들을 수에토니우스가 그럴 듯하게 정리한 뒤 출판한 것. [25] 몸젠은 유명한 역사가이고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긴 하지만, E.H 카가 비판하듯 영웅주의적 사관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는 비판적으로 접근되고 있다. 등자의 발달이 기사계급의 출현을 초래했다고 정의를 내리기도 하나, 사실 이에 대한 논의는 학계에서 아직도 진행 중에 있으며, 요즘은 등자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26] 유명한 역사가의 말을 인용하는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이해가 잘 안 간다면, 스타크래프트에서 A라는 전략이 있는데 임요환만 강력하고 효과적인 전술이라고 주장하고 그 밖의 프로게이머들. 예를 들어 홍진호나 강민, 이윤열은 그렇게 하다가는 게임 말아먹는다고 비판했다고 해 보자. 이 때 홍진호 등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임요환의 말만을 인용하면서, 그것도 뭐가 어떻게 효율적인가 하는 분석도 하지 않으면서 A를 무작정 찬양하는 게 옳은 일이겠는가? [27] 대놓고 타키투스의 저술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다른 의견을 내는 방식으로 집필 했다고 한다. [28] '침묵하는 소수', '생각의 궤적'에 실린 에세이 '가짜 만들기에 대한 고백'. 르네상스 시대의 네 교황을 다룬 '신의 대리인' 을 연재할 때의 일이다. [29] 예컨대 카이사르라는 '초인'이 있었기에 로마가 제정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로마의 체제나 처한 상황이 카이사르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인물을 태동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관점에 해당한다. 이런 관점에선 당대 일어난 사건의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카이사르의 성격이나 인간성을 탐구하는 대신 로마의 지정학적 위치나 체제의 모순을 탐구할 것이며, 이것이 현재까지는 역사학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접근법이다. [30] 흔히 민중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민중사관 역시 민주주의 체제가 발달하기 전까지는 역사의 주체가 아니었던 민중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적어도 거시적인 국가 간 질서에만 집중했던 전통적인 사관의 맹점을 보완하는 정도의 가치는 인정받고 있다. [31] 기고문 제목은 "慰安婦大誤報 日本の危機を回避するための提言-朝日新聞の“告白”を越えて"(위안부 대 오보 일본의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제언-아사히신문의 "고백"을 넘어서)이며, 문예춘추 홈페이지에서도 본문 확인은 할 수 없다. [32] 이 종군(從軍)이라는 표현은 "종군 기자"처럼 "군(軍)을 따라다녔다"는 뜻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구(舊)일본군을 자의로 따라다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33] 심지어는 피해 여성이 매독에 걸리자, 음부에다가 강제로 수은 증기를 쐬게 해서 해당 여성을 불임으로 만들기도 했다. 사실 수은 증기를 쬐는 법은 항생제가 등장하기 전인 19세기 말까지 매독 치료에 실제 사용하던 방법이기는 했으나, 2차 세계대전 시기는 페니실린이 이미 등장한 후였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쓸 방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식량조차 제대로 보급이 안 되는 당시 일본군이 소모품처럼 써버리기 위해 끌고 온 성노예 여성들을 대상으로 귀한 페니실린을 쓰려 했을 리가... [관련자료] 일본군 출신 일본인 노인의 솔직한 증언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 [35] 일본에서는 종업원의 사기 진작을 위한 사원 여행을 '위안여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6] 재밌는 것은 시오노 나나미가 존경하는 여성 중 하나로 마거릿 대처를 꼽은 적이 있는데(로마인 이야기 길라잡이의 강연에서) 영화 '철의 여인' 에서 마거릿 대처 역을 맡은 배우는 메릴 스트립이었다. [37]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1년에 이루어진 인터뷰. 에세이집 '생각의 궤적' 에도 실려 있다. # [38] 무조건적인 칭찬은 아니고, "성격이 다혈질이라 총사령관감이 아닌 백인대장감"이라는 뉘앙스의 발언이 뒤에 붙었다. [39] 그런데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델피에로가 출전한 이탈리아 대표팀이 지단이 출전한 프랑스 국가대표팀을 꺾고 우승했다. 다만 지단은 2006년 키맨으로서 활약했지만 델 피에로는 1.5군 정도의 위상이었고 지단의 성격이 다혈질이라 말아먹은 것까지 치면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40] 비록 델피에로가 유로에서 활약하지는 못했어도, 3연속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진출과 유벤투스 칼치오폴리 사건과 세리에 B로의 강등 이후에도 이를 딛고 일어나 다시 유벤투스에 리그 우승을 안겨준, 유벤투스의 레전드로 남은 선수이다. 시오노가 델피에로의 플레이스타일을 보고 소심하다는 것은 "몸싸움을 걸어서 이길 생각은 안하고 도망다니는" 플레이를 보고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당시 세리에에 있던 센터백들은 야프 스탐, 알레산드로 네스타, 조르조 키엘리니, 마르셀 드사이, 파울로 말디니, 파비오 칸나바로 등 역대 최고의 수비진을 가진 리그였다. 이런 리그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평할 수 있다. [41] 이 시기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녹슨 전차'라는 오명을 들을 정도로 전력이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 무렵부터 게랄트 아자모아, 다비드 오동코어,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같은 이민자 출신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적극 발탁하기 시작했다. 이후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이 우승까지 갈 수 있었던 데에는 메수트 외질, 사미 케디라, 제롬 보아텡, 루카스 포돌스키 등 독일계가 아닌 이민자 집안 출신의 선수들의 활약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42] textual attitude. 말하자면 해당 주제에 대해 본인이 심도 있는 연구와 끈기를 통해 1차적인 정보로 그 자체의 진리를 탐구하는게 아니라, 피상적인 편견과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태도. [43]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역사학계에 관련된 업적도, 학위도 없는 일개 외부인인 시오노가 발문을 쓰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다. [44] 2020년대 들어서 고대 이집트사 전문가 한 명이 나온 정도. [45] 한국어판은 원서에 있던 부제 '피렌체의 존망' 은 빠져 있다. [46] 한국어판은 '~살인사건'이라는 부제가 빠져 있다. [47] 르네상스 시기의 교황들 중 비오 2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오 2세, 레오 10세를 다룬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