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9:04:24

그레고리오 9세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ccb400, #ffe100 20%, #ffe100 80%, #ccb400)"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초대-제6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베드로 리노 아나클레토 클레멘스 1세 에바리스토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알렉산데르 1세 식스토 1세 텔레스포로 히지노 비오 1세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아니체토 소테르 엘레우테리오 빅토르 1세 제피리노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갈리스토 1세 우르바노 1세 폰시아노 안테로 파비아노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고르넬리오 루치오 1세 스테파노 1세 식스토 2세 디오니시오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펠릭스 1세 에우티키아노 카이오 마르첼리노 마르첼로 1세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제35대
에우세비오 멜키아데 실베스테르 1세 마르코 율리오 1세
제36대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베리오 다마소 1세 시리치오 아나스타시오 1세 인노첸시오 1세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제45대
조시모 보니파시오 1세 첼레스티노 1세 식스토 3세 레오 1세
제46대 제47대 제48대 제49대 제50대
힐라리오 심플리치오 펠릭스 3세 젤라시오 1세 아나스타시오 2세
제51대 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심마코 호르미스다 요한 1세 펠릭스 4세 보니파시오 2세
제56대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요한 2세 아가피토 1세 실베리오 비질리오 펠라지오 1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61-12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제65대
요한 3세 베네딕토 1세 펠라지오 2세 그레고리오 1세 사비니아노
제66대 제67대 제68대 제69대 제70대
보니파시오 3세 보니파시오 4세 아데오다토 1세 보니파시오 5세 호노리오 1세
제71대 제72대 제73대 제74대 제75대
세베리노 요한 4세 테오도로 1세 마르티노 1세 에우제니오 1세
제76대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비탈리아노 아데오다토 2세 도노 아가토 레오 2세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제85대
베네딕토 2세 요한 5세 코논 세르지오 1세 요한 6세
제86대 제87대 제88대 제89대 제90대
요한 7세 시신니오 콘스탄티노 그레고리오 2세 그레고리오 3세
제91대 제92대 제93대 제94대 제95대
자카리아 스테파노 2세 바오로 1세 스테파노 3세 하드리아노 1세
제96대 제97대 제98대 제99대 제100대
레오 3세 스테파노 4세 파스칼 1세 에우제니오 2세 발렌티노
제101대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제105대
그레고리오 4세 세르지오 2세 레오 4세 베네딕토 3세 니콜라오 1세
제106대 제107대 제108대 제109대 제110대
하드리아노 2세 요한 8세 마리노 1세 하드리아노 3세 스테파노 5세
제111대 제112대 제113대 제114대 제115대
포르모소 보니파시오 6세 스테파노 6세 로마노 테오도로 2세
제116대 제117대 제118대 제119대 제120대
요한 9세 베네딕토 4세 레오 5세 세르지오 3세 아나스타시오 3세
미즉위 선출자
교황 선출자 스테파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121-18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121대 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제125대
란도 요한 10세 레오 6세 스테파노 7세 요한 11세
제126대 제127대 제128대 제129대 제130대
레오 7세 스테파노 8세 마리노 2세 아가피토 2세 요한 12세
제131대 제132대 제133대 제134대 제135대
베네딕토 5세 레오 8세 요한 13세 베네딕토 6세 베네딕토 7세
제136대 제137대 제138대 제139대 제140대
요한 14세 요한 15세 그레고리오 5세 실베스테르 2세 요한 17세
제141대 제142대 제143대 제144대 제145대
요한 18세 세르지오 4세 베네딕토 8세 요한 19세 베네딕토 9세
제146대 제147대 제148대 제149대 제150대
실베스테르 3세 베네딕토 9세 그레고리오 6세 클레멘스 2세 베네딕토 9세
제151대 제152대 제153대 제154대 제155대
다마소 2세 레오 9세 빅토르 2세 스테파노 9세 니콜라오 2세
제156대 제157대 제158대 제159대 제160대
알렉산데르 2세 그레고리오 7세 빅토르 3세 우르바노 2세 파스칼 2세
제161대 제162대 제163대 제164대 제165대
젤라시오 2세 갈리스토 2세 호노리오 2세 인노첸시오 2세 첼레스티노 2세
제166대 제167대 제168대 제169대 제170대
루치오 2세 에우제니오 3세 아나스타시오 4세 하드리아노 4세 알렉산데르 3세
제171대 제172대 제173대 제174대 제175대
루치오 3세 우르바노 3세 그레고리오 8세 클레멘스 3세 첼레스티노 3세
제176대 제177대 제178대 제179대 제180대
인노첸시오 3세 호노리오 3세 그레고리오 9세 첼레스티노 4세 인노첸시오 4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181-240대]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181대 제182대 제183대 제184대 제185대
알렉산데르 4세 우르바노 4세 클레멘스 4세 그레고리오 10세 인노첸시오 5세
제186대 제187대 제188대 제189대 제190대
하드리아노 5세 요한 21세 니콜라오 3세 마르티노 4세 호노리오 4세
제191대 제192대 제193대 제194대 제195대
니콜라오 4세 첼레스티노 5세 보니파시오 8세 베네딕토 11세 클레멘스 5세
제196대 제197대 제198대 제199대 제200대
요한 22세 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 인노첸시오 6세 우르바노 5세
제201대 제202대 제203대 제204대 제205대
그레고리오 11세 우르바노 6세 보니파시오 9세 인노첸시오 7세 그레고리오 12세
제206대 제207대 제208대 제209대 제210대
마르티노 5세 에우제니오 4세 니콜라오 5세 갈리스토 3세 비오 2세
제211대 제212대 제213대 제214대 제215대
바오로 2세 식스토 4세 인노첸시오 8세 알렉산데르 6세 비오 3세
제216대 제217대 제218대 제219대 제220대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
제221대 제222대 제223대 제224대 제225대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 비오 4세 비오 5세
제226대 제227대 제228대 제229대 제230대
그레고리오 13세 식스토 5세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제231대 제232대 제233대 제234대 제235대
클레멘스 8세 레오 11세 바오로 5세 그레고리오 15세 우르바노 8세
제236대 제237대 제238대 제239대 제240대
인노첸시오 10세 알렉산데르 7세 클레멘스 9세 클레멘스 10세 인노첸시오 11세 }}}}}}}}}{{{#!wiki style="padding: 5px 0; display: inline-block; margin: -1px 0px"
{{{#!folding   [제241대 이후]
{{{#!wiki style="padding-top: 0px; margin: 1px -1px -10px"
제241대 제242대 제243대 제244대 제245대
알렉산데르 8세 인노첸시오 12세 클레멘스 11세 인노첸시오 13세 베네딕토 13세
제246대 제247대 제248대 제249대 제250대
클레멘스 12세 베네딕토 14세 클레멘스 13세 클레멘스 14세 비오 6세
제251대 제252대 제253대 제254대 제255대
비오 7세 레오 12세 비오 8세 그레고리오 16세 비오 9세
제256대 제257대 제258대 제259대 제260대
레오 13세 비오 10세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비오 12세
제261대 제262대 제263대 제264대 제265대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제266대
프란치스코 }}}}}}}}}}}}
파일:교황 문장.svg 가톨릭 교회의 교황
파일:178_gregorio_IX.png
제177대 호노리오 3세 제178대 그레고리오 9세 제179대 첼레스티노 4세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제178대 교황
그레고리오 9세
Gregorius IX
파일:그레그리오 9세.jpg
교황명 <colbgcolor=#FFFFFF,#1F2023>그레고리오 9세
출생 1170년
사망 1241년 8월 22일 (향년 70~71세)
재위 제178대 교황
1227년 3월 19일 ~ 1241년 8월 22일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제178대 교황.

2. 생애

전전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조카로, 1145년 아나니에서 태어났다.[1] 본명은 우골리노 데이 콘티 디 세니(Ugolino dei Conti di Segni).

막강한 인노첸시오 3세의 조카인 덕분에 파리와 볼로냐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1198년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206년 오스티아 교구 주교 추기경을 지냈고, 이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활동을 정력적으로 지원하였다.[2] 실제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요청에 따라 프란치스코회의 후원자를 자침하였고, 글라라 수녀회의 회칙과 재속수도회인 제3회의 회칙 작성을 맡기도 했다. 1227년 3월 18일 전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사망하자 바로 다음날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즉위하자마자 1228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1232년에는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이단자에 대한 망치'로 불린 교회학자 파도바의 안토니오를, 1236년에는 독일 출신의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인 엘리자베트 튀링겐을 시성하였다.

프란치스코회에 대한 지속적인 옹호와 지원, 관심 외에도 그레고리오 9세는 또다른 강력한 수도회 도미니코회도 지원하였다. 이를 위해 1234년 수도회의 창시자 도미니코를 시성하였고, 당시 급속히 세력을 불린 프랑스의 알비파를 상대하기 위해 도미니코회에 이단심문 권한을 주었다. 이들이 가진 종교재판의 권리는 막강하여 주교들이 반발하기도 했으나, 교황은 도미니코회를 옹호하였다.[3] 한편 1230년에는 라이문도(Raimundo)[4] 로 하여금 1918년까지 700년(!) 가까이 유효했던 교회법전을 편찬하도록 위임하기도 했다.

이 외에 그레고리오 9세 시기에 가장 치열했던 것은 호엔슈타우펜 왕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15~1250)와의 권력투쟁이었다. 독일 슈바벤 외에도 시칠리아 나폴리 등 남부 이탈리아를 가진 프리드리히 2세는 남북으로 교황령을 에워싸고 있는 형태라 교황이 황제의 권력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2세는 시대를 앞서간 르네상스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타문화에 개방적이고 비종교적인 인물. 교황이 이런 성향의 황제에게 불신을 가지고 적대했고, 결국 교황과 황제는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레고리오 9세는 제4차 십자군의 탈선, 제5차 십자군[5]의 실패 등으로 위축된 동방 십자군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십자군 원정에 나설 것을 요구했는데,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이 자기 영토를 공격할 것을 걱정한 데다 비종교적인 성향 탓에 원정이 그다지 내키지 않아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레고리오 9세가 파문으로 위협하며 강력하게 요청하자 결국 제6차 십자군을 실행했는데, 도중에 병을 얻었다는 이유로 귀국했다. 이에 교황은 황제를 파문에 처했고, 이 조치에 분노한 황제파 세력이 로마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바람에 교황은 페루자로 피신해야 했다.

시칠리아에서 정양한 프리드리히 2세는 1228년 6월 20일, 파문이 철회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출정하여,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1229년에 맺어진 조약에 따라 기독교 세력은 나자렛과 베들레헴을 포함한 성지를 확보하였고[6], 자유로운 순례도 허용되었다. 기한은 10년 6개월로 한시적이었는데, 아이유브 왕조 쪽에서 갱신을 원했기에 일단 1244년까지 15년 동안은 예루살렘이 기독교 측에 일시적으로 귀속되었다. 이는 당시 기독교 쪽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당한 성공이었지만,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파문이 여전히 유효했기에 성지 전체가 파문에 처해지는 일이 일어났다.[7]

어쨌든 프리드리히 2세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교황의 요구대로 십자군 원정을 잘 수행했기에 교황은 명분상 파문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교황은 1230년 파문령을 물리고 황제와 일시적으로 화해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를 둘러싼 영토 문제로 두 사람은 대립을 끝내지 않았고, 결국 1239년 교황이 다시 황제를 파문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번에는 순순히 따르지 않고 군대를 동원해 교황령을 위협하였다. 황제의 군대가 로마를 압박하는 가운데, 그레고리오 9세가 사태 타개를 위해 소집한 시노드는 황제가 주교들의 참석을 방해했기에 개최조차 되지도 못하고 실패로 끝났으며, 결국 1241년 8월 22일 그레고리오 9세가 사망하면서 둘 사이의 대립은 간신히 끝났다.

3. 여담

여담으로 고양이 학살에 대한 1등 공신이다. 1233년 6월 13일, 고양이는 악마의 분신이라 무조건 죽이고 키우는 사람도 처벌한 근거가 된다는 칙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1] 이곳은 130년 뒤 보니파시오 8세가 프랑스 이탈리아 귀족의 하수인들에게 수난을 당한 '아나니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2] 이 과정에서 엄격한 청빈을 강조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수도회의 규율 문제를 놓고 논쟁을 일으켰으며, 결국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였다. 이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강조한 엄격한 청빈함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나, 좀더 온건한 규율로 더 많은 수도회원을 끌어들이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수도회의 규율 문제를 둔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결국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카푸친 작은형제회로 갈라지게 된다. [3] 이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립성과 할거성이 강했던 중세 지방교회를 통제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다. 도미니코회 교황에게만 충성하고 순명하였으므로, 교황 직속의 이단재판관을 지방에 내려보내는 것은 지방에 토지를 갖고 지방 권력자와 밀착하기 쉬운 주교들에 대한 강력한 견제 카드이기도 했다. [4] Raymond of Penaport. 스페인 출신의 법률가로 21세기에도 도미니코 수도회 내에서 유명했던 장상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다. 일례로 교회법전 편찬이 끝난뒤 고령의 나이(당시 70세)와 건강을 이유로 총회에서 은퇴를 신청한게 받아들여졌는데, 다음회 총회에서 이 사실이 밝혀지자 분노한 도미니코 회원들이 은퇴를 허락했던 당시 장상들을 전부 경질시켰다(...). 이유는 이렇게 귀중한 인력을 낭비했다는 이유. [5] 1215년 실시된,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 국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의 실패한 원정. 일부에서는 정규 십자군 원정으로 보지 않기도 한다. [6] 이슬람 성지인 오마르 모스크만은 예외로 하였다. [7]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개의치 않고 1229년 3월 17일 예루살렘에 입성해 성지와 성소들을 순례하고 참배하였는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성지 예루살렘에 입성한 자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