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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4:58:35

면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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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vlat.jpg
면죄부의 예시[1]
언어별 명칭
<colbgcolor=#DCDCDC> 라틴어 Indulgentia
영어 (Letter of) Indulgence
독일어 Ablass(Brief)
한국어 대사(大赦), 면벌부(免罰符), 면죄부(免罪符)

1. 개요2. 대사와 종교 개혁3. 명칭 논란4. 대사에 대한 설명5. 비유적 용법으로서의 '면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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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면죄부, 혹은 면벌부는 가톨릭 대사(大赦, Indulgentia)[2]를 일컫는 관습적인 용어이다. 이 문서에서는 특히 ' 헌금'과 결부되었던 후기 중세의 대사와 대사가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증서를 다룬다.

2. 대사와 종교 개혁

대사의 조건으로 헌금을 제시하는 문제는 15~16세기 독일어권에서 논란이 되었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15세기 초 서방교회 대분열을 마감하고 아비뇽에서 돌아와보니 로마는 몰락해 있었다. 게다가 로마 재건 사업과 성 베드로 대성당 축조, 교황령의 전쟁 비용 등으로 재정이 어려워졌다.
1517년에 일어난 일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의 대사는 로마로부터 수직적, 고압적으로 수여된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비텐베르크에서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경우처럼, 그러나 보통은 훨씬 작은 스케일로, 대사들은 지역 공동체로부터 시작되었다. 지역 공동체 사람들은 그들의 특정한 동기들이나 관심사들을 위해서 대사를 허락해달라고 로마에 청원했다. 대사의 목적은 성지 관리일 수도 있었으나, 대개는 성당 건축이나 재건축이었고, 심지어는 도로나 다리의 건설처럼 '공동체 프로젝트' 같은 것을 지원하려는 걸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매우 자주 대사를 구매했을 확률이 높지만,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과민반응 때문이 아니라 이런 가치있는 동기들을 위해서였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이 자선 모금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스티커를 받는 것과 유사하다.[3]
-Peter Marshall, 『1517: Martin Luther and the Invention of the Reform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ebook]
후기 중세에 헌금과 결부된 대사 대부분은usually 지역 공동체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고originated with local communities 로마에의 대사 청원을 통해with people petitioning Rome 공동체의 특정한 동기들이나 관심사들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in support of their particular causes and concerns.(Marshall, 위의 책, ebook) 이 과정에서 모금을 하는 동기로 대사가 활용된 것이다. 즉 오늘날로 치면 차라리 크리스마스 씰에 가까운 것이었다.

본래 현금성 대사장 발급은 지역 공동체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는 수단, 특히, 주로 성당의 건축과 보수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보태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던 것이다. 다른 종교와 비교하자면, 이슬람에서 자선증을 발부해주는 것과 비슷하다.

오늘날에는 성당이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주일에 잠깐 모이는 공간'으로 사회적 의미가 축소된 것과 달리, 본래 중세에 성당이란 마을의 기본 단위를 구성하는 장소로, 사람이 모인 공간에는 당연히 소소하게나마 교회로 모일 장소인 성당이 건설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의미를 축소하더라도 현대 사회에서 '학교'가 차지하는 것을 넘어서는 지역 사회적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다. "지역 사회가 성당 건축을 위해 로마에 대사를 청원했다"라는 말이 현대인에겐 매우 기이하게 들리겠지만, '성당'을 '학교'로 바꿔서 읽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대사증이 단순히 "대사는 돈 내고 구원을 사는 티켓"으로 취급되었다면 대사에 대한 불만이 생길 이유도 없었다. 안 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현금 봉헌의 대가로 대사증을 발부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사실상 지역 공동체가 간접세금을 뜯는 것과 같았다.

요컨데, 어디어디 성 안에 사는 사람이, 도시 성당 보수에 필요한 자금 보태느라 발행하는 대사증도 사들이지 못한다면 위신이 폭락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중세인들의 지역 사회는 인맥과 인맥, 이웃과 이웃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매우 공동체적인 사회였고, 이런 공동체에서 '재정적으로 필요하니까' 대사를 선포하는 것은 해당 사회의 유산 계급들에게는 굉장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 정도로 교회가 가지는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교황 명의로 대사증이 발급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매우 굵직한 인물들끼리의 "로비 활동"에도 차용되었기 때문에 자주 발급될려야 발급될 수 없었고, 세속 군주가 교황에게 잘 보여야할 이유가 생겼을 때나 교황청에 재물을 헌납하고 교황청에서 형식적인 대사증을 작성해주는 방식으로 매우 드물게 사용되었다. 물론, 그런 일이 생길 때에는 아주 당연히 거액이 오갔으므로, 이런 일이 한번 생길 때마다 교회의 위신에 막대한 타격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후기 중세의 참회 및 연옥 '산업'에서 주된 초점은 사후 기도들과 미사들을 준비하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대사는 기초적인 것이 아니었고 부수적이었다. 대사는 최소한의 노력이나 열망으로 신속하게 천국행을 보장하는 무슨 골든 티켓 같은 것으로는 결코 여겨지지 않았다. 대사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고해성사를 하고 사죄경을 받고는 '은총의 상태'에 계속 머무는 게 필수였다.[4]
-Peter Marshall, 『1517: Martin Luther and the Invention of the Reform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ebook]

루터의 대사 비판도, 교황의 도덕성 이야기가 타겟이 아니었다. 통념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95개조 논조에서 대사 그 자체의 효력은 인정되고 있다. 다만 '은총의 무상성'이라는 신학적 주제에서, 대사는 어디까지 효력이 있는 것인가를 주목한 것이다.
루터의 관심사는 대사의 범위에 관한 것이었지, 대사를 아예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95개조 반박문 제69조에서 "주교들과 교구 사제들은 사도적 대사의 대리자들을 전적인 경의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인정했다(작센 선제후에겐 제 69조를 적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루터는 심지어 이미 죽은 사람에게 대사가 어떤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았다. 비록 연옥의 영혼을 풀어줄 수 있다는 교황의 주장이 "교황에게 있지도 않은 '열쇠의 권한에 의해서가 아니고' '전구(轉求)에 의한 것'"이지만 말이다. 이것은 대사가 어떻게 죽은 이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후기 중세의 다수론이었다. 심지어 앞서 언급했듯 식스토 4세의 1476년 회칙도 대사는 연옥에선 중보기도로 작동한다고 주장했다.[5]
-Peter Marshall, 『1517: Martin Luther and the Invention of the Reform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ebook]
1517년 1월 17일의 설교에서 .... 루터는 대사가 유효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교황의 대사 발표 의도가 좋다는 것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6]
그리고 (1517년의) 여름 혹은 가을 동안, 그는 생각을 분명히 하게 위해 짧은 글을 썼다. 이 텍스트에서 루터는 대사 개념이 현세와 연옥에서 단지 교회가 부여한 잠벌과만 연루된다고 하였다. 정녕 "이 대사들을 수여하거나 받는 것은 가장 유효하다"[7]
루터는 대사가 "허가되고 허용된 것들" 사이에 포함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고, "그것들을 사려는 사람을 막아서선 안된다"고 경고를 하였다.[8]
-Peter Marshall, 『1517: Martin Luther and the Invention of the Reform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ebook]

대사의 유효성은 인정하되, '은총의 무상성'이라는 교리를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게 루터의 논제이다.[9] 루터가 문제삼은 것은 '대사의 존재'가 아니라 '대사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였고, 여기서 '은총의 무상성' 주제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은총의 무상성'에서 비롯된 이신칭의야말로 루터의 종교 개혁 동기이자, 루터 자신이 내세운 자기 신학의 브랜드였으며, 오늘날의 개신교 신자들도 '도덕 논쟁이 아니라' 바로 이 이신칭의에 대한 주목 때문에 루터를 영웅시하는 것이다.

루터에 대한 가톨릭의 대응 및 비판도, 도덕성 논쟁이 아니었고, "은총의 무상성이라는 자명한 교리를 루터가 그릇되게 이해했다"는데 있었다. 다시 말해서, 대사 논쟁의 의의는 '은총의 무상성'이라는 종교개혁의 핵심 논쟁의 도화선을 제공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루터 뿐만이 아니라, 후대의 개신교 역시도 가톨릭과의 교의적 차이는 '대사'가 아니라 은총론, 성사론, 교회론이 핵심이었다.[10]
그러나 자선과 관련된 면죄부 부여는 또한 통탄할 만한 남용을 초래했습니다.

특정 프로젝트에 기여한 것에 대한 면죄부가 발표된 후 관련 자선금을 수집하기 위해 Quaestore가 파견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경우에 이러한 quaesstores 의 설교는 무지나 기민함으로 인해 독단적인 진리를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저주받은 자들이 지옥에서 풀려날 것이라고 감히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면죄부의 또 다른 측면은 자선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가톨릭 왕들과 군주[11]들에게 면죄부를 얻기 위해 모은 자선금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보유할 수 있는 허가가 부여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다른 많은 프로젝트에도 유사한 허가가 자주 부여되었으며 군주가 항상 너무 꼼꼼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잘 알려지고 논쟁거리가 되는 질문은 로마에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할 때 부여되는 면죄부입니다.

누구도 학대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며 일부는 매우 심각합니다. 그러나 교회 권위가 악행을 억제하기 위해 – 아마도 항상 필요한 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라도 – 노력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루터교의 슬픈 분열 이후 트렌트 공의회만이 면죄부를 위한 돈을 모으는 것을 영원히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면죄부와 관련된 일부 남용을 이미 진압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보조금의 범위가 명시되었으며 예를 들어 성체 봉헌에는 1년의 대사만 부여되도록 결정되었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40일 이내의 면죄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이러한 한계가 널리 초과되었습니다. 사실, 수백 년, 심지어 수천 년의 면죄부까지 포함하여 허위 문서가 유포되었습니다.
대사의 역사적 기원(The Historical Origin of Indulgences), 구글 번역

대사증이 문제가 된 핵심 원인은 교회의 위신이 떡락 중인데 별다른 대책은 없던 상황에서 기인한다. 평소에야 군주들끼리의 로비 활동에 거액이 대사 명목으로 오가더라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고, 유산계급들은 교회에서 대사를 너무 자주 발행하더라도[12] 그냥저냥 눈감아주었지만, 종교개혁의 열풍이 불어닥친 시기는 소빙하기로 인해 삶이 아주 팍팍해지면서 민심이 아주 흉흉하던 시기였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살기 힘든 시기에는 교회가 정신적 지주로써 의지가 되는 존재로 작용했어야하는데, 하필 그런 시기에 겹처 교회의 재정 상태가 교황청에서부터 개판이 나있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만큼 교회의 상태도 여러모로 엉망이었는지라, 어려운 시기에 모범을 보여야할 교회가 추태를 보이는 사건이 반복되며 교회의 위신이 폭락하고, 비어가는 곳간에 민심도 덩달아 폭락한 것이다.

한 사례로 1515년 당시 신성 로마 제국 7 선제후 중 한 명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13] 요아힘 1세 네스토어의 동생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는 20대라는 젊은 나이에 할버슈타트 주교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를 겸임한 일이 있다.

교회법의 겸직금지와 나이제한은 교황청에서도 무시하고 있었는데 교황 레오 10세 가문빽으로 13세에 추기경이 될 정도였다. 알브레히트는 2개의 교구의 수입에 만족하지 못했는데, 마침 신성 로마 제국 최고서열 선제후 마인츠 대주교[14] 작위가 매물로 나왔기에 2만 9천 두카트의 고액을 입찰해서 낙찰 받았다.

유력가에서 선제후직을 차지하여 황권 세습에 거의 다가간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려는 교황 레오 10세의 의도도 있었다. 한편 마인츠 말고도 쾰른 선제후나 잘츠부르크 대주교도 수입이 많고 영지가 넓어서 시가가 2만 두카트가 넘었다. 이 과정에서 알브레히트는 로마에 송금할 현금이 모자랐고, 유럽 최고 금융대부업자 야코프 푸거에게 2만 1천 두카트를 빌렸다. 교황청에서는 알브레히트를 도와줄 목적으로 1502년 조반니 메디치 추기경 시절부터 레오 10세의 수하였던 도미니코회 수도자 요한 테첼(Johann Tetzel, 1465-1519)[15]을 파견했고, 8년치의 대사 선포를 허가하고 수입은 대주교와 교황청이 반으로 나누기로 합의했고, 알브레히트 대주교(Albrecht, 1490~1545)는 초입세[16]를 제외한 금액은 푸거에게 갚기로 합의했다.

한술 더 떠, 1518년 교황 레오 10세는 대사의 판매 권한과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서는 당시 교회에선 토론 자체를 인정치 않고 거론할 경우 파문한다 선언했다.

이런 사건들은 "평소"였다면 흉볼지언정 불만이 폭주할만한 원인은 되지 않았다. 막말로 유산계급들에게 있어 "남의 일"이자 "높으신 분들만의 일"이었으니. 하지만, 지갑 사정이 안 좋은데 별 수 없이 대사증 발행에 적선하고 오며 불쾌해하는 중에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상황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한편 대사에 대한 악명 높은 루머로 "성모 마리아를 범했더라도 대사는 그 죄를 씻어준다"라는 광고를 요한 테첼이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루터가 한 주장인데, 루터의 이 주장은 근거가 없다.[17] 오히려 테첼은 해당 발언을 결코 한 적이 없다는 진술을 할레안데어잘레의 교회 및 시민 당국으로부터 받아냈다.
Myconius, a Franciscan friar perhaps hostile to the Dominicans, heard Tetzel perform, and reported, for this year 1517: “It is incredible what this ignorant monk said and preached. He gave sealed letters stating that even the sins which a man was intending to commit would be forgiven. The pope, he said, had more power than all the Apostles, all the angels and saints, more even than the Virgin Mary herself; for these were all subject to Christ, but the pope was equal to Christ.” This is probably an exaggeration, but that such a description could be given by an eyewitness suggests the antipathy that Tetzel aroused.
[도미니코회원들에게 적개심을 품은 듯한 프란치스코회원 뮈코니우스 수사는 테첼의 퍼포먼스를 듣고, 같은 년도인 1517년에 보고했다:
이 무식한 수사가 말하고 설교한 내용은 믿을 수 없다. 그는 봉인된 편지들을 줬는데, 거기엔 심지어 짓고자 하는 죄까지 용서된다 적혀있다. 그가 말하길, 교황은 모든 사도들, 모든 천사들과 성인들, 심지어 동정 마리아님보다 권한이 크다고 했다. 이들이 그리스도께 종속되니 교황 홀로 그리스도와 동등하단다.
이는 과장으로 보인다. 다만 그러한 서술이 나왔다는 점은 테첼이 일으킨 반감을 암시한다.]

A like hostility appears in the rumor mentioned skeptically by Luther, which quoted Tetzel as having said at Halle that even if, per impossibile, a man had violated the Mother of God the indulgence would wipe away his sin. Tetzel obtained certificates from civil and ecclesiastical authorities at Halle that they had never heard the story. He was an enthusiastic salesman, but not quite conscienceless.
["비슷한 적개심이 루터가 비관적으로 언급한 루머에 의해 나타났다. 이 루머의 인용에 의하면, 테첼은 이렇게 말했다:
설령 ㅡ내(루터)가 보기엔 불가능한데ㅡ한 남자가 하느님의 어머니를 범했더라도 대사(면벌부)는 그의 죄를 씻어낸다
그러나 테첼은 Halle시의 시민적 및 교회적 권위로부터,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결코 들은 적 없다는 입증을 얻어내었다. 테첼은 열정적인 세일즈맨이었으나 양심을 내다버리진 않았다.]
-Will Durant. The Reformation. The Story of Civilization. Vol. 6. Simon and Schuster.

다만 이것과 별개로, 당대 대사 판매인들이 여러 문구를 써가며 대사를 판매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또한, "공식적인 대사"로 각종 기부를 받던 것과 별개로, 실제로는 용도불명(?)의 "비공식적인 대사"도 많이 판매되었으며, 이러한 남용은 공의회에서 논의될 정도로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3. 명칭 논란

위와 같은 역사적 배경과 교파 별(개신교 및 천주교) 신학적인 관점 차이로 인해 명칭에 대한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면죄부/명칭 논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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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사에 대한 설명

대사는 면죄부가 성립할 수 있었던 신학적 근거이다. 천주교에서만 인정하며 개신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면죄부를 '헌금형 대사'라 부르기도 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대사(종교)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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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비유적 용법으로서의 '면죄부'

'헌금형 대사'라는 삽질의 여파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21세기에도 면죄부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인다. 이를테면 TV프로 중에서도 이미지가 안 좋거나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연예인 토크쇼 TV프로에 출연해서 자신이 받는 오해나 사연이라든가 상황을 구구절절 말하고 난 뒤 까임이 평소보다 확실히 줄고, 몇몇 연예인은 이것을 발판으로 다시 연예계 활동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이 프로는 잘못이 있는 연예인에게 면죄부를 준다고 일부 네티즌들이 표현한다. 이때 TV프로 이름을 면죄부도사, 면죄부캠프, 병심장 등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돈 많고 빽좋은 누군가의 악행 및 비행들을 미화하려고 하거나, 혹은 가벼운 솜방망이식 처벌만 내리려고 하면 면죄부를 준다고 한다.[18]

스포츠에서는 특정 선수나 팀이 경기 안팎에서 구설수가 나와도 성적만 좋으면 면죄부를 주자는 팬덤과 여론의 어이없는 헛소리가 당연시하게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표적인 예시로 야구로 보답하겠다.

게임스탑 주가 폭등 사건으로 공매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면죄부가 중세에서 기독교가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공매도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범죄자들이 감형을 받기 위해 기부, 헌혈, 장기기증 신청을 하여 문자 그대로의 면죄부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으며 이에 대한 이미지도 점점 악화되고 있다.

[1] 1500년대 종교 개혁 직전 스웨덴에서 발행된 것이다. 다만 발행자는 이탈리아 출신 고위 성직자인 조반니 아르침볼디(Giovanni Angelo Arcimboldi)다. 여담으로 스웨덴( 핀란드 포함)은 덴마크로부터의 독립 전쟁으로 칼마르 연합에서 탈퇴한 뒤 국왕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주도로 루터교회로 개종했다. [2] 영어로는 indulgence [3] In light of what was to happen in 1517, it is important to stress that most indulgences were not dispensed outwards from Rome in imperious, high-to-low fashion. As with Elector Frederick’s initiative in Wittenberg, but usually on a much smaller scale, they originated with local communities, with people petitioning Rome to grant an indulgence in support of their particular causes and concerns. The aim might be to add lustre to pilgrimage sites, but was often in aid of the building or rebuilding of churches, or even to assist with what might look to us like ‘community projects’, such as the construction of roads and bridges. It seems likely that people quite often purchased indulgences, not out of a neurotic concern with the condition of their souls, but in order to support such worthwhile causes, much as we might take a sticker from a charity-collector today. [4] In the main, indulgences were ancillary, not foundational, to the late medieval ‘industry’ of penance and purgatory, whose main focus continued to be on the provision of post-mortem prayers and masses. They were certainly not ever supposed to be some kind of golden ticket, guaranteeing swift entry to heaven with minimal effort or anxiety. To receive the benefits, it was necessary to have been to confession and received absolution, and to remain still in a ‘state of grace’. [5] Luther’s intention was to limit the scope of indulgences, not abolish them entirely. He conceded (69) that ‘bishops and parish priests are bound to admit commissaries of the apostolic indulgences with all reverence’—a stricture that evidently didn’t apply to Electors of Saxony! Luther did not even deny that indulgences might have some efficacy for those already dead, though the pope’s claim to be able to grant remission to souls in purgatory was ‘not by “the power of the keys”, which he does not possess here, but “by way of intercession”’. This, in fact, was the majoritarian late medieval view of how indulgences could be applied to the situation of the dead; even Sixtus IV’s expansionist bull of 1476, as we have seen, claimed that in purgatory indulgences worked per modum suffragii. [6] In a sermon very likely preached at the Castle Church on the eve or day of the anniversary of its dedication (17 January 1517) .... Luther did not deny that indulgences were useful, or that the pope’s intentions in issuing them were good [7] And, either over the summer or in the autumn, he composed a short tract to clarify his own thinking on the issue. In this text, Luther elaborated the idea that indulgences, in this life or in purgatory, were solely concerned with remission by the Church of temporal punishments, penalties which the Church itself had imposed. It was indeed ‘most useful to grant and to gain these indulgences' [8] he did not deny that indulgences numbered among ‘the things that are permitted and allowed’, and cautioned that ‘one should not hinder someone from buying them’. [9] 대사 자체에 대한 루터의 거부는 이후 1520년의 저작인 『Von der babylonischen Gefangenschaft der Kirche』에서 나오는데, 여기서의 요지는 "애초에 교황이 사기꾼인데 대사가 무슨 쓸모인가"라서 대사의 효력에 대한 논쟁이라 볼 수 없다. 즉 "루터가 대사를 거부했는가"라고 물으면 결과적인 대답은 "그렇다"이지만, 이 거부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나온 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하고나니 대사도 거부한 것이다. 인과관계가 반대로 뒤집힌 셈. [10] 다만 은총론은 교의 신학 중에서도 특히나 매우 난해한 분야이고 내용 파악조차 쉽지 않은 분야이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수준의 세계사에서는 이를 쉽게 설명하다보니 '은총의 무상성'이 아닌 면벌부(대사)가 키워드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루터 자신도, 후대의 개신교도, 가톨릭도, 세속 역사학에서도 모두 거부되는 단순한 설명이 통용되는 실정이다. [11] prince 독자적으로 활동이 가능할 정도로 위세 있는 군주들을 prince라고 하기도 한다. [12] = 자기 지갑에서 열심히 봉헌금 뜯어가도 [13] 이 브란덴부르크가 나중에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아 독일을 통일하는 프로이센 왕국이 된다. [14] 신성 로마 제국의 7선제후 중 최선임 제후로 황제선거시 마지막 투표로 동수시 결정권한이 있으며 독일 왕국 재상직이란 명예와 알프스 이북의 교황의 대리인이라는 수식을 들을 정도의 권력자였다. [15] 폴란드 왕국에서 이단심문관을 지냈고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에서 간음 등의 엽색행각으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교회빽으로 석방된 전적이 있는 문제가 심각한 인물이었다. [16] 십자군 전쟁 시기 전비 마련을 목적으로 성직제후에게 부과된 세금으로 첫해 수입을 몽땅 바친다. 이후 십자군 전쟁이 없어졌어도 관례적으로 계속 부과 됨. [17] 심지어 루터교회에서도 루터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본다. Lutheran Church–Missouri Synod(미국의 보수성향 루터교단)에서 운영하는 프로테스탄트 개혁 500주년 기념 홈페이지인 Reformation 500에서는 인물 소개란의 Johannes Tetzel 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Luther also targeted an alleged view of Tetzel that such onerous sins as violating the Virgin Mary could be absolved by an indulgence, though this was unsubstantiated." #
[18] 현행법상 한 번 처벌을 받은 죄목에 대해서는 다시 처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권력이나 금력을 이용해 뒷거래를 하거나, 일부러 판결에 악영향을 미칠만한 디테일한 부분들을 감추고 자백하여 최대한 약하게 처벌받고 넘어가 버리면, 나중에 무겁게 처벌하려고 해도 불가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