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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영지 Civitas Schinesghe Polonia |
|
문장 | |
존속 기간 | 9세기 경 ~ 1025년 |
위치 | 현재의 폴란드 |
수도 | 그니에즈노 |
정치체제 | 군주제 |
국가원수 | (폴로니아인의) 공작 |
주요 공작 | 미에슈코 1세 |
언어 | 고대 폴란드어 |
종교 | 슬라브 토속신앙, 가톨릭 |
종족 | 폴로니아인(폴란드인) |
성립 이전 | 서 슬라브 족 |
주요사건 | 1025년 볼레스와프 1세 대관식 |
성립 이후 | 폴란드 왕국 |
언어별 명칭 | ||
라틴어 | Civitas Schinesghe / Polonia | |
폴란드어 | Ziemia Polsk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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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세기 경부터 1025년까지 동유럽에 존재했던 국가였다. 폴란드의 국가 기틀이 확립된 시기이다. 폴란드를 위시한 서구권에서는 미에슈코 1세가 작성한 다고메 이우덱스(Dagome iudex)에 따라 교회 라틴어로 치비타스 스키니네스게(Civitas Schinesghe)라고 불리며 그니에즈노국(國)이라고도 불린다.2. 폴란드 건국 신화
본래 슬라브에는 레흐(Lech)와 체흐(Czech),그리고 루스(Rus)라는 이름의 3형제가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삼형제와 그들이 이끄는 무리가 광야 사이에 있는 넓은 들판에 도착했는데, 그 들판에는 커다란 참나무가 서 있었으며, 흰 독수리들이 큰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이에 레흐는 이곳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정착하고자 했고, 그곳의 흰 독수리 둥지(gniezdo)에서 이름을 따와 수도 그니에즈노(Gniezno)를 건설했다. 반면, 체흐와 루스는 각자의 땅을 찾기 위해 떠났고, 각자 체코(Cech)와 러시아( 루스, Rus/Рус)를 건국하게 되었다.
레흐(Lech)라는 이름 덕분에 폴란드인을 가리키는 고유어 레히치아(Lechicia)와 폴란드인의 땅을 의미하는 레히아(Lechia)가 탄생했다.[1] 체코 쪽 건국신화에서는 러시아 없이 폴란드와 체코만 등장한다. 체코인들 입장에서는 루스인들을 볼 일이 없으니..
3. 피아스트 왕조 탄생 설화
쿠야비(Kujawy)의 고프워(Gopło) 호숫가에 크루슈비차(Kruszwica)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곳의 공작(公爵) 포피엘(Popiel)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워 민중을 못 살게 굴었다. 가난한 백성에게 공물상납을 지시했고, 재산을 빼앗거나 죄 없는 자들을 감옥에 보내기 부지기수였다.이것을 그의 아내도 부추겼고, 이를 보다못한 선친 형제의 세 명의 삼촌들이 타 일렀으나 도리어 이들을 추방시켰다.
훗날 포피엘 부부는 삼촌들을 꾀내어 독살했는데, 이들의 시체에서 수 많은 쥐떼가 나와 포피엘 부부를 덮쳐 죽여버렸고, 이로써 크루쉬비차의 통치자는 사라졌다.
한편, 크루쉬비차 인근에 피아스트(Piast Kołodziej)[2]라는 수레바퀴 장인의 부부[3]가 살았는데 이들은 노년의 나이가 돼서야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에게 시에모비트(Siemowit)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시에모비트는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고 피아스트 부부는 아들에 대한 걱정이 컸다. 그러나 시에모비트는 굉장히 총명하고 현명한 아이로 자랐다고 한다.
시에모비트가 7세가 되던 날, 당시 풍습대로 어머니 슬하에서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 머리를 자르는 성인식이 치러질 예정이었고, 잔치를 벌이고자 했다. 그런데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의 숫자가 부부의 예상보다 많은 탓에 이들은 음식이 부족할 것을 걱정했는데, 그런 와중에 두 명의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피아스트는 기꺼이 그들을 맞이했는데, 줴피하가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을 만들려하자, 거의 동 났던 음식과 음료가 모두 가득찼다고 한다.
이에 줴피하는 그것들로 손님들에게 대접했고, 두 명의 낯선 사람들은 부부의 아들 시에모비트에게 축복을 내려줬는데, 이때 시에모비트의 눈이 띄였다. 그래서 부부는 두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 했으나 이미 그 두 사람은 떠나 없어졌다.
몇년 뒤, 크루쉬비차 공작 포피엘이 일가족과 함께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모든 사람들이 피아스트를 통치자로 추대했고, 그리하여 피아스트가 새로운 공작이 되면서 피아스트 가문이 통치가문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이후 시에모비트 다음으로 시에모비트의 아들 레스테크(Leszek), 레스테크의 아들 시에모미수(Siemomysł)가 차례로 통치권을 이어받았고, 그 뒤에 시에모미수의 아들 미에슈코 1세(Mieszko I)가 즉위한다.[4]
4. 피아스트 왕조 초기
피아스트 왕조는 966년 미에슈코 1세(Mieszko I)가 주변 지역을 통합하고 기독교( 가톨릭)를 받아들이면서 개창한 왕조이다. 미에슈코는 세례를 받기 전부터 폴란드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예 중 하나로 가톨릭 국가인 보헤미아의 공주 도브라바(Dobrava)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미에슈코의 가톨릭 수용 이후 그의 신하와 국민도 집단적으로 세례를 받아 폴란드는 가톨릭화 되었다. 미에슈코의 치세 때 폴란드에는 로마 교황청 직속 선교 주교구가 설치되었다. 폴란드는 독자적인 주교구를 가짐으로써 왕국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대외적으로 보다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미에슈코 1세의 사망 이후 992년 미에슈코의 맏아들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Bolesław I)가 제위에 오른다. 그는 '용감왕'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왕으로 그의 제위 동안 폴란드는 국가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심지어 1018년에는 볼레스와프 1세의 사위 스바트폴크(Svatpolk)가 장인의 지원을 등에 업고 키예프 대공국의 지위 계승전에 뛰어들어 키예프를 잠시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생전 동안 신성 로마 제국과의 외교도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오토 3세가 사망한 후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제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고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의 반대파를 지지하였다. 이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1002년부터 1018년까지 산발적으로 지속전 이 전쟁은 부지신(Budziszyn) 회담으로 종결되었다. 1024년 볼레스와프 1세와 대립각을 세우던 하인리히 2세가 붕어하자, 교황의 동의를 얻어 그니에즈노에서 대관식을 치러 공식적으로 폴란드의 국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1세는 대관식 1년 뒤인 1025년 사망하였다.
5. 참고 문헌
- 정병권, <폴란드사 (세계각국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7
6. 관련 문서
[1]
훗날 폴란드 민주화에 기여하는
레흐 바웬사의 이름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2]
수레바퀴라는 뜻이다
[3]
아내의 이름 줴피하(Rzepicha)
[4]
피아스트와 시에모비트 모두 실존인물인지는 불명확하다고 하며, 다만 훗날 볼레스와프 3세(1107~1138)시절에 쓰여진 연대기에 등장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