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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은 빌뉴스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일군의 폴란드인 집단 혹은 리투아니아 국민 중 폴란드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인구를 의미한다.
2. 역사
2.1. 전근대
자세한 내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폴란드계 이민자의 후손보다는 근세 빌뉴스 일대의 리투아니아인들이 문화적, 언어적으로 폴란드화한 경우, 루테니아 일대에서는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귀족 가문이 폴란드인 귀족 가문과 통혼하면서 폴란드인과 동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2.2. 폴란드 분할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러시아 제국에 병합된 후에도 한동안 러시아 제국에서는 폴란드어를 실질적인 행정 용어로 사용하는 것을 용인하였으나 폴란드인 민족주의 세력의 독립운동인 1830년 11월 봉기 그리고 1863년 1월 봉기를 경험하면서 폴란드어 및 폴란드 문화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리투아니아 일대의 폴란드인 상당수가 프랑스나 미국 등으로 망명하였고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일대의 폴란드 엘리트 문화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당시 리투아니아 민족주의도 러시아 제국 측으로부터 상당한 탄압을 받았지만 그 탄압의 정도가 폴란드 민족주의보다는 덜했고 이 과정에서 사모기티아 일대의 리투아니아인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을 폴란드-리투아니아인 정체성과 구분되는 별개의 리투아니아 민족으로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2.3.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시대
폴란드어와 리투아니아어는 같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만 폴란드어는 슬라브어군 서슬라브어파에 속하는 반면 리투아니아어는 발트어군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에 폴란드 문화가 리투아니아에 끼친 영향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남부 농촌 지역에서는 폴란드어의 방언연속체으로도 볼 수 있으면서도 리투아니아어의 방언연속체로도 분류 가능한 피진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전간기에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이 빌뉴스를 두고 폴란드 제2공화국과 갈등을 빚으면서[1] 리투아니아 측에서는 자국 내 이런 피진어를 사용하는 인구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리투아니아화 작업에 돌입하였고 독립 후 새로 들어선 학교들은 폴란드어 어휘가 가능한 한 최대한 제거된 형태의 리투아니아어를 배우게 되었으며 폴란드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상당한 차별을 받게 되었다.
상술한 것처럼 리투아니아의 귀족 가문 상당수가 수백여 년에 걸쳐 폴란드인들과 통혼했돈 데다 독립 직후 기준으로 리투아니아의 지주 계층 상당수가 폴란드어를 모어로 사용하던 상황이었다.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측은 폴란드계 인구가 소유하던 농지들을 반강제로 리투아니아인 농민들에게 분배하였고 여기에 반발한 폴란드계 인구 상당수가 리투아니아를 떠나 폴란드 혹은 미국 등으로 이민했다.
2.4.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리투아니아는 소련에게 점령당하고 소련의 일부인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으며 폴란드 제2공화국이 점령했던 빌뉴스도 소련 리투아니아 영토로 넘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소련이 폴란드에 친소적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정권을 세우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사이에 인구 교환이 이루어졌는데 폴란드 내 리투아니아인들이 이동되는 경우보다는 리투아니아 지역 내 폴란드인들이 폴란드 인민 공화국으로 이동당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1944년 당시 빌뉴스시의 인구 중 80~91% 가량이 폴란드인이었으나[2] 인구 이동이 이루어지면서 빌뉴스 내 폴란드계 인구는 소수로 전락했다. 1945-1948년 사이 197,000여 명이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로 이동되었으며 1956-1959년 사이에 추가로 46,600여 명이 이동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빌뉴스 일대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이었다.2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들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처럼 폴란드-리투아니아주의에 경도된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 폴란드인 집단은 리투아니아인들에 의해 소수민족 취급을 받는 와중에 경우에 따라 반리투아니아-친소 성향을 가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 리투아니아 폴란드인 선거활동-기독교 가족 연합이 친러 성향을 띄는 것과도 연계되어 있다.
1950년대에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지방 정부는 리투아니아 내 폴란드인들을 리투아니아인으로 완전히 동화시키려는 여러 가지 정책을 입안했으나 이러한 리투아니아화 정책은 해당 정책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라고 생각한 모스크바 정부 측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폴란드-러시아 관계가 그토록 험악함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에서만큼은 폴란드인들이 모스크바 측의 도움을 받는 상황이었다. 1988년 11월에는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들을 주축으로 리투아니아 독립에 반대하는 친소 단체인 예딘스트보가 결성되었던 바 있는데 이들은 단순한 소련의 어용 정당이라기보다는 리투아니아 내 폴란드계 인구 전반의 의사를 대표하는 단체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다. 1990년 조사에 의하면 리투아니아 내 폴란드인 중 47%가 소련 공산당을 지지했으며[3] 단 35%만이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바란다고 응답하였다. 이러한 의중을 반영하듯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들이 1990년 폴란드계 자치 지역을 수립하고 신생 리투아니아에서 분리하여 동폴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소련에 잔류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폴란드계 가정에서 출생한 아이들도 리투아니아어나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연유로 리투아니아 내 폴란드계 인구 비율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감소하게 되었다. 1959년 통계에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 폴란드계 인구 비중은 8.5%에 달했으나 1989년 조사 시점에서는 이 비율이 7.0%로 감소하였다.
3. 현황
자세한 내용은 리투아니아 폴란드인 선거활동-기독교 가족 연합 문서 참고하십시오.- 리투아니아 내 폴란드계 인구 분포 지도 (2011년 기준)
오늘날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과 여타 리투아니아인 사이의 구분은 어렵지 않은 편인데 같은 성씨라 하더라도 작명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폴란드에서 기원한 성씨 주코프스키(Żukowski, 여성형 주코프스카(Żukowska))는 리투아니아인의 성명으로 쓰이는 경우 남성은 주카우스카스(Žukauskas), 미혼 여성은 주카우스카이테(Žukauskaitė), 기혼 여성은 주카우스키에네(Žukauskienė)로 쓰이는데 비해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 여성 이름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주카우스케(Žukauske)로 쓰인다.
4. 여담
캐나다에는 빌뉴스에서 이름을 따온 윌노(Wilno)라는 마을이 있는데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들이 세운 마을은 아니고 18세기 프로이센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카슈브인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이름을 붙인 마을이라고 한다.5. 같이 보기
[1]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 문서 참조
[2]
원래는 유대인과 가톨릭 폴란드인들이 빌뉴스 인구를 사실상 양분하던 상황이었으나 2차대전 초반에 빌뉴스시의 유대인 인구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절멸당하면서 8~90% 비율로 올라간 것.
[3]
리투아니아인 중에서 지지 비율은 8%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