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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 1773년 2월 9일 |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버지니아 식민지 찰스시티 군 (現 미국 버지니아 주 찰스시티 카운티 버클리) |
|||
사망 | 1841년 4월 4일[1] (향년 68세) | ||
미국 워싱턴 D.C. | |||
재임기간 | 제9대 대통령 | ||
1841년 3월 4일 ~ 1841년 4월 4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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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
아버지 벤저민 해리슨 5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바셋 해리슨 |
|
형제자매 | 3남 4녀 중 3남 | ||
배우자 | 안나 해리슨 | ||
자녀 | 6남 4녀 | ||
친인척 | 손자 벤저민 해리슨 | ||
학력 |
Hampden–Sydney College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
||
종교 | 성공회 | ||
신장 | 173cm[2] | ||
소속 정당 |
[[휘그당(미국)| 휘그당 ]]
|
||
문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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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도 국민의 한 사람 아닌가. 카페트는 물론 이 집도 국민의 것이다.[3]
미국의 제9대
대통령.재커리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미영전쟁에 참가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명장이었으며 이후 정치로 입문해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취임식으로 인해 폐렴에 걸려 대통령에 취임한 지 단 1달 만에 사망했다. 이는 역대 미국 대통령을 통틀어 가장 짧은 재임 기간[4]이며, 그가 사망한 1841년 이래 2024년까지 월리엄 헨리 해리슨보다 재임기간이 짧은 대통령은 나오지 않았다. 의학기술이 더 발전하기도 했거니와 대통령 당선자의 건강관리나 신변 보호가 매우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추세이기 때문에 해리슨의 최단기간 임기 기간을 갱신하는 대통령은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손자인 벤저민 해리슨이 대통령이 되면서 유일한 조손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 생애
아버지인 벤저민 해리슨 5세. |
1773년 2월 9일에 버지니아 주의 버클리에서 3남 4녀 중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벤저민 해리슨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이름을 남긴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다. 유년기의 해리슨은 학교가 아닌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787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다. 1791년에 벤저민이 병으로 사망하자 해리슨은 의학 공부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학교를 자퇴한 후 미합중국 육군에 입대한다. 육군 장교가 된 해리슨은 원주민 토벌전에 참전하여 공을 인정받고 중위로 진급한다. 1794년에 그레이트 마이애미 강에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기습하는 계획을 성공한 해리슨은 대위로 진급하여 워싱턴 요새의 경비를 담당하게 되고 재판관이자 부유한 토지업자인 존 사이메스의 딸인 애나 사이메스와 결혼한다.
1798년에 육군에서 전역한 해리슨은 존 애덤스에 의해 노스웨스트의 장관으로 임명된다. 이듬해 해리슨은 노스웨스트에 신설된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고 서부의 토지들을 가난한 사람이 사들일 수 있도록 작은 부분으로 나누는 법안을 통과시켜서 토지 개발자들의 보폭을 확장시킨다. 1800년 애덤스에 의해 해리슨은 인디애나 주지사로 임명되어 12년을 활동하였다. 주지사로서 해리슨은 영토에서 원주민들의 생활의 복지를 보호하는 데 탐사하였다. 원주민들에게 주류 판매를 금지하고 천연두 예방을 명령한다. 1809년에 해리슨은 원주민 지도자들과 함께 화이트 강과 와바시 강에 일대의 토지를 정착인들에게 건네주는 조약을 요청하고 많은 원주민들이 조약을 비난하며 쇼니 족의 추장인 테쿰세와 연합하였다. 해리슨은 영토 시민군들을 모집하고 토지에서 원주민들을 몰아내기 시작한 해리슨은 1813년 10월 5일에 템스 강에서 테쿰세가 이끄는 원주민들을 모조리 격파한다.
1812년에 미영전쟁이 발발하자 제임스 매디슨은 해리슨을 노스웨스트군의 육군 준장으로 임명한다. 다시 육군에 복귀한 해리슨은 1813년에 소장으로 진급하고 온타리오 남부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연합한 영국군과 원주민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전쟁장관(현 육군장관)과 불화를 겪으면서 다시 육군에서 전역하고 오하이오의 농장에 정착한다. 1816년에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한 해리슨은 육군 복무 시절 공금을 오용한 이유로 사법부에게 기소당하지만 하원의 투자회가 잘못된 고발로 결정하면서 처벌을 피한다. 위기를 모면한 해리슨은 다시 오하이오로 돌아와 1819년에 주 의회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고 1825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승승장구한다. 3년 뒤에 상원에서 물러난 후 존 퀸시 애덤스에 의해 콜롬비아 주재 미국 공사로 1년을 근무하였다.
1836년 해리슨은 대통령 선거를 위해 휘그당 후보로 지명된다. 휘그당원들은 해리슨의 리더십이 당을 통합하며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대선 후보로 지명하여 선거에 출마하지만 민주당 소속의 마틴 밴 뷰런에게 패배한다. 4년 뒤인 1840년에 휘그당원들은 다시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존 타일러를 미국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여 선거에 돌입한다. 해리슨은 경제공황으로 인해 지지율이 추락한 밴 뷰런을 상대로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선된 해리슨이 취임식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려는 날 강한 비가 쏟아졌다. 노령의 해리슨의 건강을 걱정했던 참모들이 해리슨에게 취임식 연기를 요청하였으나 해리슨은 "난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오. 비 따위에 내가 무릎 꿇으면 안 되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모자와 코트도 벗고 취임식을 강행했다.
사실 취임식을 강행했더라도 짧게만 진행했다면 큰 문제는 아니었을수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그가 사전에 준비한 연설문이 8,500단어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는 역대 美 대통령 취임 연설문 중 압도적인 1위로, 2위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것은 5,500단어 정도였으며, 대부분의 경우 취임 연설문은 1,000 ~ 2,000단어 내외의 길이였다.[5] 68세라는 늙은 나이[6]에 엄청나게 긴 취임 연설을 3월 초순의 추운 날씨에 1시간 넘게 비를 맞으며 강행한 것이다. 결국 해리슨은 백악관으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폐렴에 걸렸으며 1개월을 투병하다가[7] 사망했다.
젊은 사람도 한시간 동안 추위 속에서 비를 맞으면 심한 감기에 걸려 앓아눕기 쉬운데, 하물며 70살이 다 되어가는 노인이 견디기엔 상당히 무리였다. 심지어 이 당시는 과학이나 의학도 현대에 비해서는 크게 발달하지 않은 19세기였다.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이 20세기 초인 1928년에 발견되었음을 감안할 때, 당시에는 감염성 질병에 걸리면 신체의 자연치유력에 기대는 대증요법을 제외하면 딱히 치료수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당대의 의학 수준을 생각하면 정말로 만용을 부린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사망하기 전 해리슨은 자신의 후임자가 될 부통령이자 고향 후배[8]인 타일러에게, 다음과 같은 국정에 대한 조언을 남겼다.
나는 타일러 씨가 정부의 깊은 원리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그 원리가 순탄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이오.
해리슨의 죽음은 미국 휘그당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다. 휘그당은 이후로도 재커리 테일러를 대통령에 당선시키지만, 그 역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병사했으며, 그나마 휘그당이 상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을 차지한 것은 해리슨이 승리한 1840년이 마지막이었다. 시작부터 잭슨 민주당에 대한 반발로 결성된 연합세력이었던 휘그당은 여당으로서 새롭게 재조직될 기회를 놓쳐버렸고, 차츰 남부와 북부로 분열되어 갔다. 중도 타협 노선을 앞세우던 헨리 클레이는 184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미국 멕시코 전쟁을 지지하지 않아 패배했다. 결국 북부의 휘그당은 공화당으로, 남부의 휘그당은 헌법연합당이나 민주당으로, 이외의 반유대주의, 반이민주의 세력들은 무지당 세력으로 각자의 길을 갔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 당선 여부 | 비고 |
1816 | 미국 연방 하원의원 특별선거 | 오하이오 1구 |
[[민주공화당(미국)| 민주공화당 ]]
|
3,370 (58.64%) | 당선(1위) | 초선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3,253 (57.19%) | |||||
1821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오하이오 | 43 (42.16%) | 낙선(2위) | - | |
1822 | 4 (3.81%) | 낙선(4위) |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오하이오 1구 | 2,834 (47.15%) | 낙선(2위) | |||
1825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오하이오 | 58 (54.21%) | 당선(1위) | 초선 | |
1836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국 |
[[휘그당(미국)| 휘그당 ]]
|
550,816 (36.63%, 73인) | 낙선(2위) | - |
1840 | 1,275,390 (52.90%, 234인) | 당선(1위) | 초선 |
4. 평가
겨우 재임 기간 1달 만에 죽은 최단기 집권, 비운의 대통령으로 인식이 되는 편이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들의 인기와 업적을 평가하는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짧은 임기 기간으로 인해 제임스 A. 가필드와 같이 제외되는 경우도 있으며, 나올 경우 해리슨보다 순위가 낮은 이들은 웃음거리가 된다.[9] 심지어 사망의 원인이 된 우천 중 연설 강행으로 인한 폐렴 투병도 누군가 강요해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 보좌진들이 전부 말렸음에도 해리슨 본인이 강행했다가 생긴 일이라 현대에서는 쓸데없이 가오를 잡다가 죽은 대통령이라는 식으로 유머 소재로 쓰이기까지 한다.만일 그가 죽지 않고 계속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채웠다면 어땠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율리시스 S. 그랜트나 재커리 테일러와 같이 전형적인 무골로 정치를 잘하진 못했을거라는 의견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같이 정치를 잘하였을 거라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휘그당원들이 해리슨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한 부분과 그의 인성이 선했다는 일화들이 있기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5. 기타
- 손자인 벤저민 해리슨은 제2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벤저민의 취임식 당일에도 비가 내렸지만, 벤저민은 조부와는 달리 취임 연설을 빠르게 마쳤고, 비록 재선에는 실패했지만[10] 4년의 임기도 채울 수 있었다.
- 짧은 임기 때문에 미국 역사에서는 비중이 한없이 적지만, 오늘날 미국 선거운동에서 신기원을 개척한 인물이다. 윌리엄의 표어인 'Hard cider and log cabin'은 '거친 사과술과 통나무집'이라는 뜻인데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서민형 대통령'을 추구한다. 이 구호는 원래 상대방이 내건 ' 통나무집에서 늙어야 할 노인'이라는 구호인데 이 구호를 그대로 활용하기로 한 해리슨은 자신의 고령을 서민적인 이미지로 뒤집어 선거에서 승리한다. 2번째 표어인 '티퍼카누와 타일로도'는 해리슨의 전쟁 경력을 내세운 표어이다. 실제로는 해리슨이 더 귀족적인 부자였지만 밴 뷰런을 무능력한 부자로 만드는 데 성공하여 선거인단에서 승리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야말로 이미지 선거의 원조라고 볼수 있다.
- 미국 대통령들 사이에서 전해져 온 테쿰세의 저주의 첫번째 희생자로 유명한데, 이는 그가 테쿰세를 사살한 장군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투 이후 수백명이 넘는 미군 장병들은 서로가 테쿰세를 사살하였다고 주장하지만 테쿰세는 테임스 전투에서 윌리엄에게 사망한 것으로 공식 확인되었다.
- 아내인 애나 사이메스는 금슬이 매우 좋았다. 특히 애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당시 군인이었던 남편과의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음에도 남편과 같이 결혼식을 올려버리고 멀리 떠나서 살 정도로 남편을 사랑했다. 그래서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무려 10명이나 낳을 정도였다. 애나는 남편이 죽고나서도 24년이나 살아서 88세에 사망하여 당시로서는 매우 장수했다. 하지만 애나도 알고보면 삶이 불행한데 가난하게 산데다가 자식들이 존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특히 남편이 대통령에 취임한지 오래 안되어서 사망하다보니 영부인도 고작 한달밖에 못했으며 남편이 폐렴으로 죽었을때도 애나는 오하이오에 있었고 병이 나서 병석에 있었기에 치유되고 나서야 갔지만 남편은 이미 사망하여 임종도 지켜주지 못하였다.
- 특이하게 청설모 고기로 만든 스튜를 좋아했다.
- 그를 만나고 싶어서 백악관에 찾아온 농부가 비를 제치고 관저에 도착하자 해리슨의 집사는 농부의 행색을 보고 만나게 하지 않고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해리슨이 이를 알아채고 왜 손님을 따뜻한 곳에 있게 하지 않냐며 혼을 낸다. 집사가 "농부가 신발에 진흙을 묻히고 들어와서 응접실 카페트를 더럽힐까봐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해리슨은 다음과 같은 말로 집사를 타이른 후 폐렴으로 투병하던 불편한 몸으로 농부를 융숭히 대접하였다.
그도 국민의 한 사람 아닌가. 카페트는 물론 이 집도 국민의 것이다.
- 독립전쟁 발발 전에 태어난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11]
- 미국 역사상 최초로 사진을 찍은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위의 사진 같아 보이는 모습은 실제로는 1840년에 알버트 갤라틴 호이트[12]가 1840년에 그린 해리슨의 초상화를 1850년에 사진으로 찍은 것이다. 호이트가 그린 해리슨의 초상화 실제로 처음으로 사진을 남긴 대통령은 전임자인 존 퀸시 애덤스이다.[13]
- 해리슨 이전의 대통령들 중에서 홀수번호 대통령들은 키가 180cm 이상에 속했고[14], 짝수번호 대통령들은 180cm 이하에 속했는데[15], 이 사람이 9대 대통령이 되면서 이 징크스는 깨졌다.[16]
- 미국에서는 '재임기간이 가장 짧은 대통령'으로만 알려져있다. 심슨 가족에서는 '그저 그런 대통령들'이라는 노래에서 "전 30일만에 죽었답니다!"라고 대사를 친다.
[1]
급성
폐렴으로 별세.
[2]
함께 싸웠던 동료인
재커리 테일러와 같다.
[3]
그의 가치관과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말이다. 자세한 건 밑 하단 참조.
[4]
참고로 해리슨과 같이 임기 중 서거한 케이스를 제외하고 순수한 재임 기간이 가장 짧은 대통령은
제럴드 포드이다. 이 경우는 어느 정도
길게 재임한 대통령이 사임해서 승계받았기 때문에 남은 재임 기간이 짧았던 경우.
[5]
19–20세기만 하더라도 영어권에서는 소설을 비롯한 서술문학에서는 물론이고 신문 기사와 연설문 등 활자 매체, 그리고 논문에서도
만연체가 말 그대로 만연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돌입하면서 학술적 글쓰기에서 시작되어 모든 활자 매체에서
간결체를 선호하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6]
이 나이는 미국 역대 대통령중 바이든, 트럼프, 레이건 다음으로 고령의 나이로, 심지어 레이건이 깨기 전까지 약 140년에 달하는 기간동안 해리슨이 유일한 고령자 대통령이었다. 이 외에 퇴임 당시의 최고령 기록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나오기 전까지는 전전임자인
앤드루 잭슨(퇴임 당시 69세 534일)이 가지고 있었다.
[7]
당시의 의학 기술로는 폐렴을 치료할수가 없었다.
[8]
카운티(찰스시티)까지 고향이 동일하다.
[9]
2021년 C-SPAN 조사에서는 뒤에서 5등을 차지했는데, 윌리엄 해리슨 뒤에 있는 대통령들은 순위가 높은 순으로
도널드 트럼프와
프랭클린 피어스,
앤드루 존슨,
제임스 뷰캐넌 4명뿐이다. 참고로 이들은 트럼프를 제외하면 다 남북 갈등기의 대통령들이다. 2021년 말고도 대체적으로는 거의 항상 뒤에서 10위권에 들어가는 편이다. 비슷한 처지인 가필드는 적어도 중하위권은 가는 것과는 대비되는 편.
[10]
초선 당시에는 득표에선
그로버 클리블랜드에게 졌고, 선거인단에서 이겼다.
[11]
전임자인
마틴 밴 뷰런은 독립전쟁 이후에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최초로 미국인으로 태어난 대통령" 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후임자인
존 타일러는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년이 지나서 태어났다.
[12]
Albert Gallatin Hoit, 1809~1856, 미국의 화가
[13]
물론 그가 대통령이었던 시기는 사진의 태동기였기 때문에 애덤스가 찍은 사진들은 전부 애덤스가 퇴임한 후에 찍은 사진이다.
[14]
초대 조지 워싱턴 188cm, 3대 토머스 제퍼슨 190cm, 5대 제임스 먼로 183cm, 7대 앤드루 잭슨 185cm
[15]
2대 존 애덤스 170cm, 4대 제임스 매디슨 163cm(최단신), 6대 존 퀸시 애덤스 171cm, 8대 마틴 밴 뷰런 168cm
[16]
참고로 해리슨은 173cm이다. 후자인 존 타일러도 183cm이기 때문에 타일러도 짝수번호 대통령들 중에서 180cm 이상을 찍은 첫 대통령이라고 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