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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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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위원회
Комитет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State Security 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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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d700> 존속 1954년 3월 12일 ~ 1991년 12월 3일
국가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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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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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직원 수 약 480,000명[1]
위치
KGB 청사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연방시 제르진스키 광장)
1. 개요2. 상세3. 청사4. 역대 주석5. 관련 인물6. 등장 매체

[clearfix]

1. 개요

국가보안위원회(, Комитет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통칭 KGB는 소련 정보기관이자 정치경찰이다.

보통 정보기관이 해외첩보 국내방첩이 나뉜 서구권 국가들과는 다르게, KGB는 대외첩보와 국내방첩을 한 부서가 독점한 형태였으며, 자체적으로도 체포 또는 수사가 가능했다.[2]

비록 경찰까지 독점했던 NKVD에 비해서는 권한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KGB는 분리된 부서 기능 만으로도 한국으로 치면 국가정보원, 안보수사국, 국군방첩사령부, 대통령경호실, 해양경찰청 같은 부서를 보유하고 있었다.[3] KGB가 냉전 시대에 서구권 정보기관에 비해 비교적 높은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였던 이유도, 해외였다면 여러 정보기관에 분산되었을 기능이 KGB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독점구조는 정보기관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유리할 지 몰라도, 문민통제 관점에서 볼 때 역으로 KGB가 소련 정계에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실제 KGB는 소련 중, 후반기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스탈린 사후 지도자 선출 때마다 큰 영향력을 끼쳤다.[4]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KGB는 정부의 칼날이 향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소련을 멸망시키는 방아쇠를 당기게 된다.

2. 상세

KGB의 창설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후 시작된 소련의 권력투쟁과 라브렌티 베리야의 숙청에서 시작되었다. 내무인민위원 출신이었던 베리야가 자신의 권력 강화를 꾀하면서 국가안전부를 내무부로 합친 결과 경찰, 첩보, 수사, 내부감시기관이 하나로 통합된 거대한 부서가 만들어졌으며,[5] 베리야 자신이 거대해진 내무부의 수장인 내무장관에 취임했다. 물론 베리야의 목적은 정보기관과 내무기관을 자기 휘하로 두어 권력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었다.[6]

당연히 베리야가 숙청된 이후 이렇게 권력이 강한 부서를 계속 유지시키기에는 여러모로 지나치게 부담스러웠기에 1954년에 내무부를 기존 방식대로 경찰행정 부서로 축소하고, 첩보 및 방첩 부서를 소련 장관회의에 소속된 별도 기관으로 분리하기로 결정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보안위원회가 탄생했다.

KGB는 창설된 직후 탈스탈린화 및 해빙기와 맞물려 기존 직원의 절반 이상을 감축했다. 사실 KGB의 전신이었던 NKVD가 스탈린 정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감안한다면, 당시 소련 정부 및 군 인사들은 자신을 포함하여 동료 정치인들의 목숨을 쥐고 흔들었던 소련 비밀경찰의 영향력을 어떻게 해서든 감축시키고 싶어했다. 따라서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집권하는 시기 사이 스탈린의 사냥개들이었던 비밀경찰은 숙청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숙청된 인사 중 대표적인 인물로 스탈린 시절 NKVD의 해외공작을 총괄했었던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있었다.

KGB가 다시 영향력을 회복한 계기는 헝가리 혁명 과정에서 진압과 반체제 인사 체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헝가리 혁명 이외에도 국내 소요사태 진압과 프라하의 봄 진압에 참여했으며, 유리 안드로포프가 주석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매우 엄격한 검열 및 탄압 정책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감시, 여론을 통한 압박, 명예훼손, 협박, 대도시에서의 주거 금지, 국외추방 또는 정신병자라는 딱지가 붙여져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처분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소련 반체제인사로 명망이 높았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KGB에 의해 추방당하거나 연금되었다.

또한 KGB는 CIA MI6 등 서방의 여러 내로라하는 정보기관에 침투해서 케임브리지 5인조와 같은 내부 스파이를 통해 정보를 입수할 정도로 뛰어난 첩보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MI6의 경우에는 한때 국장이 내부 스파이로 의심받았을 정도로 서방의 정보기관들은 냉전이 끝날 때까지 조직 내에 침투한 KGB의 스파이에 대한 공포가 심했다. 심지어 타국의 대사관을 비롯한 외교공관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도청을 해 소련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미국 대사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7]

하지만 냉전 시기의 정보기관이 항상 완벽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처럼, KGB 역시 지나치게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 아프가니스탄 전쟁 8월 쿠데타에 참여하면서 소련을 붕괴시키는 데 기여했다. 대표적으로 8월 쿠데타 당시 현직 주석이던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가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참여했다가 체포되면서 KGB 역시 해체되었고, 이후 소련 구성국들의 정보기관으로 계승되었다.[8]

소련 붕괴 이후의 혼란기 속에서 KGB 출신 인사들은 자신들이 가진 정보력과 인맥을 바탕으로 재산을 불려나가면서[9] 사회지도층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역시 KGB 출신의 독재자 블라디미르 푸틴의 밑에서 실로비키라는 이름으로 주요 정치, 사회, 경제 분야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에서도 아제르바이잔 KGB 주석 출신인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혼란기를 거쳐 정권을 잡은 뒤, 독재자가 되었다.

3. 청사

파일:Lubyanka before Addition.png
추가 증축 이전의 청사
KGB의 청사는 루뱐카 광장에 있는 통칭 루뱐카로 원래는 1898년에 지어진 전러시아 보험회사의 소유의 연립주택이었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 건물의 소유권은 상공광업의 국유화와 함께 정부로 이전되었고, 1919년부터 체카가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무엇보다 크렘린과 가까이 위치한다는 이점 때문에 소련의 역대 비밀경찰 조직은 모두 이 건물을 청사로 사용하였고, 그 악명 높은 NKVD 라브렌티 베리야부터 유리 안드로포프까지 모두 3층에 위치한 같은 집무실을 사용했다.

루뱐카는 NKVD가 청사로 사용하면서 대숙청 당시에 악명을 날렸는데, 한국의 1970-80-90년대 남산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루뱐카 내부의 감옥에서는 고문 뿐만 아니라 처형도 있었고, 고문사 혹은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신을 비밀리에 처리할 수 있는 자체 소각로까지 건설하여 사용하였다.[10] 하지만 냉전이 시작되면서 감옥 역시 폐쇄되기 시작해 U-2 격추 사건으로 소련에 체포되었던 프랜시스 게리 파워즈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루뱐카 역시 상주 인원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증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940년에 알렉세이 슈셰프라는 건축가가 기존보다 2배 이상 커진 증축안을 내놓았지만 독소전쟁 등의 다양한 이유로 절반 수준만 진행되었다. 이후 1983년에 추가 증축을 거친 끝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루뱐카가 완성되었다. 증축 전까지의 루뱐카는 상단의 사진과 같이 구청사와 절반 수준만 지어진 신청사가 함께 있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루뱐카 앞 광장에는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거대한 동상이 있었으며, 모스크바 시민들이 '철의 펠릭스'라는 별명으로 부른 제르진스키의 동상은 소련 붕괴 이후 시민들의 열렬한 성원 속에 철거당했다.

현재 루뱐카는 FSB의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 조직 편성 #==

4. 역대 주석

5. 관련 인물

6. 등장 매체



[1] 1991년 기준으로 KGB의 준군사조직과 특수부대, 그리고 당시 임시로 소속이 전환되었던 군부대를 포함한 수치이다. # [2] 마치 FBI와 CIA가 하나로 합친 격이다 [3] 앞서 거론된 부서만 해도 해외첩보, 국내방첩, 군사방첩, 요인경호, 국경수비라는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4] 단적으로 KGB는 흐루쇼프의 실각을 방조하여 브레즈네프의 집권을 도왔으며, 브레즈네프 사후에는 KGB 주석이었던 안드로포프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고르바초프 또한 안드로포프의 지지로 정치국 위원이 되어 차기 서기장 후보에 오를 수 있었다. [5] 한국으로 치면 행정안전부 + 경찰청 + 해양수산부 + 해양경찰청 + 대통령비서실 + 대통령경호처 + 국가안보실 + 국가정보원 + 감사원이 모두 한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셈이다. [6]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나라 혹은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일지라도 국가권력이 정보기관 정치경찰처럼 만들어 국가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현대 역사에서 매우 자주 있었던 일 중 하나였다. 당장 한국만 봐도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시작해 오늘날 국정원에 이르기까지 어떤 논란에 휩싸이는지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7] 공산권 국가 소재의 미국 대사관들은 방음실을 따로 만들어 비밀첩보작전에 관한 계획 수립은 전부 방음실에서 수행했다. [8] 발트 3국의 KGB는 OMON과 함께 소련 점령의 첨병 역할을 맡았기에 공화국 최고회의가 직접 나서서 철저히 관련 인력들을 공직에서 해임시키거나 체포했고, 변호사 외교관, 경찰 출신을 모집하여 새로운 정보기관을 설립했다. [9] 특히 러시아의 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주식을 불하받은 일반인들이 나중에 큰 돈이 된다는걸 알아도 당장의 생계가 어렵기 때문에 주식을 헐값에 팔아들인 경우가 많았는데, 올리가르히와 KGB 출신 인사, 마피아들이 이 헐값에 판 주식들을 대거 매입해서 이득을 본 경우가 많았다. 일반인들이 다시 주식을 살 여유가 되었을 때는 이미 주요 기업들이 이들의 손에 넘어갔다. [10] 이 거대한 소각로에서는 죄수만 태우는 게 아니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언젠가 출판하기 위해 보관하고 있던 각종 원고와 종군 일기 등의 서류들도 체포 당시 전부 압수당한 채 이 소각로에서 불탔다고 한다. [11] GRU가 주로 블랙옵스에 가까운 흑색작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제1총국은 일명 슬리퍼 요원 (Sleeper Agent)이라 불리는 고정간첩을 이용한 정보 수집을 선호했다. [12] 행정 당국 및 군사령부에 보안 통신을 제공하는 KGB 예하의 준군사조직으로, 소련군의 명령체계에 속하지 않았다. [13] 본인은 KGB 주석으로 임명 당시 별로 내키지 않아했다고 하며, 장군 계급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14] 드라마 체르노빌에 나오는 KGB 주석 차르코프는 사건 당시 KGB 주석이었던 체브리코프와 KGB 제1부주석이었던 필립 보브코프를 섞어 만들어낸 인물이다. [15] 당시 러시아 의회는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의 여파로 극우파인 러시아 자유민주당과 극좌파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다수당을 점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6] 사실 그 전 미션인 '냉전의 메아리'에서 블랙 옵스 1에서 제이슨 허드슨이 이끄는 팀이 침투했던 우랄산맥의 야만타우 산에 있는 비밀 군사 기지에 알렉스 메이슨 프랭크 우즈가 벨리코프의 도움을 받아 침투해서 슈퍼컴퓨터를 입수해 요원 명단을 알아내려고 했으나. 이미 페르세우스가 명단을 지워버린 뒤라 어쩔 수 없이 KGB 청사에 침투한다는 작전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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